오아시스라고 생각했던 그것은 치명적인 독약이었다.그러니까 연정우는 일부러 류수미를 유혹할 ‘덫’을 던진 것이다.하기야 만약 이런 이유가 아니었다면 류수미 또한 연정우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을 것이다. 필경 믿었던 남편은 이미 혼수상태에 빠져있었으니.류수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연정우를 놓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그를 붙잡는 것이었다.하지만...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으나 목이 꽉 막혀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그때, 옆에서 기계에서 요란한 경고음이 울리기 시작했고 류수미는 그 소리에 바로 고개를 돌렸다.그뿐만 아니라 밖에 있던 의사들도 그 소리를 들었다.그들은 급히 병실로 뛰어와 류수미를 밀쳐내고 응급 처치를 시작했다. 류수미는 핸드폰을 쥔 채, 병상에 누워 있는 남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그때 사민혁은 산소마스크를 쓰고 있었다.며칠 전만 해도 사민혁은 웃으며 류수미에게 말했었다.“내가 어깨의 짐을 내려놓으면 너랑 함께 세계 여행을 떠날 거야. 너도 알지? 너는 여전히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까 내가 그런 방식으로 도와주려고 이러는 거야.”그동안 류수미가 저지른 모든 무례한 일들을 사민혁은 다 받아주고 감싸 주었다. 사실, 성유리의 부상을 입고 연정우가 그녀를 데리고 떠날 때, 사민혁은 반대했었다.그러나 류수미가 그런 사민혁을 막았다.그들이 눈을 마주쳤을 때, 그는 분명히 아내의 눈에서 악의를 봤을 것이다. 그러나 사민혁은 류수미를 질책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오히려 사민혁은 류수미를 부추기듯 응원했고 달래줬었다.류수미는 그 선택으로 인해 그들이 이렇게 큰 대가를 치르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지금 사민혁은 아무런 생명력도 없이 병상에 누워서 의사들이 손을 쓰는 걸 그대로 맡기고 있었다.류수미는 사민혁이 방금 전 전화 내용을 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다.의사들은 분명히 그의 회복 속도가 빨라서 며칠 안에 깨어날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런데 방금 류수미는 갑자기 그런 느낌이 들었다.사민혁은 깨어날 수 없는
“사민혁 씨가 죽었대.”박한빈이 성유리에게 사망 소식을 전했을 때, 그녀는 멍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서 조금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마치 박한빈이 말한 사람이 누구였는지 깊이 생각하는 듯 보였다.“사민혁 씨는 사하나 씨 아버지야.”성유리의 반응을 눈치챈 박한빈이 바로 대답했다. 그리고 그 말이 떨어지자 성유리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잠시 후, 그녀는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물었다.“왜요? 전에는 분명...”“병원에서는 사민혁 씨가 혼수상태에 빠져있다 심장마비가 도졌다고 했어.”“그 당시 의사들의 응급처치가 정말 빠르게 이루어졌고 사민혁 씨 심장병도 그렇게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어.”“사민혁 씨가 더 살지 못한 이유는... 아마도 본인이 살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일 거야.”박한빈의 목소리는 매우 평온했다.하지만 그의 간단한 설명에 성유리의 몸은 덜덜 떨렸다.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성유리는 겨우 목소리를 찾았다.“그럼 연정우 씨는요? 그 사람은 찾았대요?”박한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경찰이 그를 추적 중이야. 이런 상황에서 연정우 씨가 모습을 드러낼 리는 없을 거고.”“그럼... 류수미 씨는 어떡해요?”성유리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로 물었다.“현재 사씨 가문은 이미 파산한 상태야.”박한빈은 차분하게 말했다. 애초에 그는 원래 사씨 부부에게 별로 좋은 감정을 가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전에 성유리에게 사하나의 일로 압박하고 질타할 때, 박한빈은 그들의 사고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느꼈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하나가 사망한 건 사실이기 때문에 그들을 싫어하더라도 최소한 사하나라는 사람에 대한 측은지심은 있었다.게다가 두 사람은 나이가 많이 들었고 딸을 잃은 그들의 감정이 격해진 것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있었다.그러나 성유리가 실종된 후, 박한빈은 그들을 동정할 이유도 찾지 못했다.그래서 이제 그는 상업적인 관점에서 매우 냉철하게 성유리에게 상황을 설명했다.“회사는 여전히 거대한 빚을 안고 있지만 이
“마지막으로 사민혁 씨를 배웅하는 것도 제 마음의 안정을 위해서예요.”성유리의 목소리는 아주 낮았는데 마치 박한빈의 귀에 속삭이는 듯했다.박한빈은 고개를 숙여 성유리를 한참을 바라보다가 결국 천천히 대답했다.“알았어. 내가 같이 가줄게.”하지만 박한빈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사민혁의 장례식은 결국 순조롭게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아니, 자세히 말하면 장례식은 시작조차 하지 못했다.사람들이 추모식 현장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장례식의 주인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 사씨 가문에는 연세가 지긋한 어르신 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하지만 정오까지 할머니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결국 누군가 나서서 찾아온 손님들에게 알려주었다.“장례식이 취소되었습니다. 유일한 가족이 병원에 있기에 진행할 수 없어서 장례식은 장례식장 사람들이 대신 맡아서 간소하게 진행할 것입니다.”성유리는 그때 사람들 틈에 서 있었다. 처음에는 할머니가 충격을 받아서 병원에 갔다고 생각했다.그러나 며칠 후, 성유리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유일하게 남은 할머니는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어르신은... 미쳐있었다....“정말 안타깝긴 하다.”정원에서 김서영이 꽃을 손질하며 말했다.“비록 그 사람도 잘못한 일이 있었지만 그전에는... 사실 꽤 괜찮은 사람이었어.”“이 몇 년간 겪은 충격이 너무 컸던 것 같아.”성유리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김서영은 그제야 뭔가 깨달은 듯 재빨리 말을 이어갔다.“내 말은 그런 뜻은 아니고 그냥...”“알아요.”성유리는 빠르게 대답하며 싱긋 웃어 보였다.그러자 김서영은 한숨을 쉬며 계속 말했다.“그냥 세상일이 참 예측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 그래서 말인데... 어떤 일이든 지금 이 순간을 즐겨야 해.”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런데 연정우 그 사람은 여전히 소식이 없나?”“잘 모르겠어요.”김서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그 사람... 너무 무서워. 소리 소문 없이 떠나버렸는데
에릭이 전화를 끊고 돌아갔을 때, 박한빈은 이미 방문을 활짝 열고 있는 상태였다.그리고는 선장에게 작은 보트를 준비하라고 연락하고 있었다.“어디 가려고?”에릭이 물었다.“집에.”박한빈은 빠르게 대답했다.“이건 축하 파티잖아. 다들 와 있는데 네가 먼저 간다고?”박한빈은 유람선에 있는 사람들을 한 번 쳐다봤다. 그들은 술을 많이 마신 상태기에 딱 봐도 이성을 잃은 사람들 같았다.이런 장면은 박한빈에게 낯설지 않았다. 예전이라면 박한빈은 이곳에 남아 사람들을 구경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었다.“여기엔 너 혼자 있으면 충분해.”박한빈은 단호하게 대답했다.“그게 무슨 말이야?”에릭은 떠나려는 그를 막아서며 말했다.“다들 이렇게 모였는데? 너 때문에 이곳에서 파티를 열게 됐잖아. 그럼 이제 뭐가 더 필요해?”“내가 모든 비용 다 지급할게.”박한빈은 자신을 막아서는 에릭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대답했다.“그것도 안 돼, 내가 뭐 돈이 부족한 사람인 줄 알아?”이내 에릭은 한 일 초의 고민도 없이 거절했다.하지만 박한빈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계속해서 선장에게 작은 보트를 먼저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솔직히 말 지금 집에 돌아가도 네 아내를 볼 수는 없을 거야.”박한빈은 이미 에릭의 존재를 무시하고 있었지만 마지막 말에 발걸음이 뚝 멈췄다.그러더니 뒤돌아서 에릭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너 지금 그게 무슨 말이야?”에릭은 박한빈과 꽤 오랜 시간을 지내왔지만 그들 사이에는 묘한 연대감이 있었다. 에릭은 때때로 박한빈이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는 또 다른 자신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다만 박한빈은 세속적인 틀에서 벗어났고 이제는 무엇을 하든 자신을 즐기기 위해서만 행동했다.반면 에릭은 여전히 그 틀 안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박한빈을 ‘구출’하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지금 보니 그것은 에릭의 일방적인 바람이었던 것 같았다.특히 성유리와의 관계가 더 가까워질수록 박한빈은 점점 더 낯설게 느껴졌다. 에릭에게
다른 때라면 에릭은 박한빈이 단순히 반박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박한빈의 눈빛은 매우 진지했고 회피하려는 시도도 없었다.에릭은 잠시 박한빈을 응시한 후 옅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너 그렇게 확신하는 거야? 성유리 씨는 단지 연약한 여자일 뿐인데?”그러나 박한빈은 여전히 단호하게 대답했다.“유리가 연약하냐 안 하냐는 상관없어. 나는 유리가 반드시 올 거라는 걸 아니까.”“그럼 만약 성유리 씨가 오지 않으면?”에릭이 다시 물었다.“내 명의의 모든 주식은 네가 가져.”박한빈의 대답에 에릭은 다시 한번 놀랐다. 그는 입을 뻥끗거렸지만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잠시 후, 겨우 정신을 다잡은 에릭이 입을 열었다.“진심이야?”“당연하지.”박한빈은 짧고 간결하게 대답했다.에릭은 침묵하다 갑자기 웃으며 물었다.“설마 이 틈을 타 도망가려는 건 아니지?”그러자 박한빈이 되물었다.“아까 내기 하자고 했잖아. 만약 내가 이기면 넌 뭐 해줄 건데?”에릭은 그가 이렇게 물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이 상황은 자신에게 유리한 게임처럼 보였다.그는 박한빈이 성유리를 좋아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결국 남자라면 누구나 온화하고 예쁜 여자를 좋아하는 법이다.에릭도 성유리가 정말 예쁘다고 인정했다. 그녀의 연약해 보이는 모습은 남자들의 보호 본능을 충분히 자극할 수 있었다.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성유리가 어떻게 홀로 배 위로 온다는 것인지, 에릭은 전혀 믿기지 않았다.게다가 이게 바로 유람선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면 성유리가 신고하면 근처에 의심스러운 배가 나타나면 바로 알 수 있다.그래서 에릭은 성유리가 절대 혼자 올 리가 없다고 여러 번 강조한 것이다.“네가 원하는 게 뭐야?”에릭은 자신이 이길 것이라고 확신했기에 어깨를 으쓱하며 직접 박한빈에게 물었다.“내가 원하는 거는 간단해. 넥스트펀드 5% 주식만 있으면 돼.”박한빈의 대답에 에릭은 다소 놀랐다. 비록 그 주식이 적지 않지만 박한빈이 에릭에게 건 내기는
때는 이미 한 겨울이었다. 몰아치는 바닷바람에 성유리의 머리카락이 흩날렸고 그녀의 여윈 몸매는 밤의 어둠 속에서 더욱 고독하게 보였다.성유리는 추위에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맞은편 사람을 바라보았는데 그 눈빛에는 호기심과 약간의 두려움이 드러나 있었다.에릭은 원래 성유리를 속일 연기를 할 사람을 찾으려 했다. 박한빈에게 말했던 것처럼 성유리를 ‘시험’하려 했던 것이다.하지만 박한빈은 그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다.“나는 유리가 나를 위해 무엇이든지 할 것이라는 걸 알아. 근데 나는 유리가 그렇게 하는 걸 원하지 않아. 더군다나 나중에 이게 단지 소란일 뿐이라는 걸 알게 되면 더 안 좋을 거야.”“우리는 그런 걸로 서로를 증명할 필요가 없어.”박한빈은 그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그 모습에 에릭은 억지로라도 싸우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그는 박한빈이 말한 진짜 이유는 자랑하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했다.그가 말한 핵심은 사실 처음 박한빈이 한 말에서 나온 것이었다.[나는 성유리가 나를 위해서 무엇이든지 할 것이라는 걸 알아.]그 말에 에릭은 도대체 박한빈이 어디서 그런 자신감과 근거가 나오는지 궁금했다.그리고 지금, 성유리의 모습을 보고서야 에릭은 깨달았다. 박한빈이 이런 자신감을 갖는 것이 자만 때문이 아니었다.그때 박한빈은 성유리에게 해역 위치만 알려주었을 뿐, 어떻게 부두를 지나올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힌트를 주지 않았다.그래서 지금 성유리는 낡은 어선에 타고 왔는데 그 배에는 이끼와 청소되지 않은 작은 물고기들이 엉겨 붙어 있었다.배가 정착할 때, 프로펠러는 큰 소음을 내며 미친 듯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치 언제라도 그녀를 뒤집어버릴 듯한 위태로운 상황이었다.이런 배는 성유리의 기품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고 그녀의 신분에도 맞지 않았다. 사실 성유리가 박한빈의 비서에게 전화를 걸면 즉시 요트를 준비해 에릭이 말한 곳으로 올 수 있었을 것이다.그러나 성유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자리를 박차고 부두로 달
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린 채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서야 확신했다.“저 사람이 박한빈 씨 친구예요?”“아니.”박한빈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빠르게 부정했다.“나한테 저렇게 멍청한 친구가 있을 리 없잖아.”말하는 동안 그는 이미 선원들에게 도구를 가져오라고 지시했고 성유리가 계단을 밟고 배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왔다.그와 동시에 안전요원들이 내려가 에릭을 끌어올렸는데 그는 이미 온몸이 흠뻑 젖어버린 상태였다.원래는 입에 담지도 못할 거친 욕설을 내뱉고 있었지만 차가운 날씨에 재채기가 멈추질 않자 결국 아무 말도 못 하고 사람들의 부축을 받아 안으로 들어갔다.박한빈은 신경 쓰지도 않고 어부에게 돈을 던지듯 건넨 뒤, 성유리의 손을 잡고 안으로 향했다.“그럼 두 분은 아는 사인가요?”성유리가 다시 물었다.“알긴 알아.”박한빈은 그렇게 대답하더니 곧바로 이런 말을 덧붙였다.“근데 네게 전화한 건 몰랐어. 나는 그때 방에 갇혀 있었거든. 진짜야.”“근데 왜 박한빈 씨를 가둔 거죠?”“널 찾으러 가려고 했는데 쟤가 반대했어.”박한빈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하지만 성유리는 갑자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방금 전 그 남자와 박한빈 사이는 뭔가 이상했다.근데 딱히 뭐가 이상한 건지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웠다.박한빈은 성유리의 표정을 신경 쓰지 않은 채, 1층 파티장을 피해 뒷계단으로 향했다.그런데도 성유리는 귀를 울리는 음악 소리에 걸음을 멈췄다.“여기서... 파티를 벌이고 있는 건가요?”“응. 맞아.”“그럼 박한빈 씨도 오늘 이 파티에 온 거겠네요?”“응.”“그럼 제가 왔는데 파티에 데려가지도 않으실 거예요?”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의 걸음이 뚝 멈췄다. 그리고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며 망설이던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됐어. 어차피 파티도 끝나가고 저 사람들 술 취해서 난동을 부리고 있을 텐데... 볼 것도 없어.”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박한빈을 가만히 바라봤다. 눈을 가늘게 뜨고 가만히 자신을 응시하는
사실 성유리는 아까부터 박한빈의 말과 행동이 이상하다고 느끼고 있었다.자신이 집에 가는 걸 막았다느니, 방에 가뒀다느니 같은 말에 너무 의심이 들었었다.박한빈이 어린애도 아니고 에릭이라는 사람은 그의 보호자도 아닌데 무슨 권리로 막았다는 건지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럴 이유가 있다면 단 하나, 그들 사이에 다른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결국 방 안에 있었던 사람은 박한빈 혼자가 아니었을 것이라는 확신이 서자 성유리의 얼굴에서 천천히 표정이 사라졌다.그녀는 자연스럽게 박한빈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그는 이미 성유리의 움직임을 눈치채고 있었다.그래서인지 손을 놓기는커녕, 오히려 더 힘을 주어 성유리를 그대로 품에 끌어안았다.그리고는 정면에 서 있는 남자를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이 사람은 내 아내야.”상대방은 이미 술이 많이 취해 있었는지 박한빈이 무슨 말을 했는지에는 관심도 없었다.그저 성유리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을 뿐이었다.그러다 박한빈이 그녀를 끌어안자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투덜댔다.“로얀, 너 또 너만 먹으려고 그러는 거야? 우리 다 같이 나눠야 하는 거 아니었어?”“닥쳐!”박한빈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말을 끊어버렸다.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우리 그냥 돌아가자.”성유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굳이 파티에 가겠다고 고집부리지도 않았다.어차피 파티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이제는 굳이 가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으니까.원래 박한빈은 작은 보트를 이용해 성유리를 바로 육지로 데려가려 했다.그러나 이미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었고 날씨까지 고려해야 했기에 결국 성유리를 객실로 데려가기로 했다.방으로 돌아가는 길, 파티장 쪽에서 풍선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그게 오늘 밤의 하이라이트였다.펑!폭발음이 들리자 귀를 찢을 듯한 음악과 함께 여자들의 환호성이 이어졌다.소리만 들어도 그곳이 얼마나 난잡한 분위기일지 충분히 짐작이 갔다.박한빈은 원래도 이런 분위기를
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이 잠시 멈칫했지만 곧 다시 입을 열었다.“다른 사람들이 나한테 투자를 받으려면 최소 몇 근 정도 되는 엄청난 양의 술은 마셔야 해. 그런데 넌 뭘 했지?”“전 당신 아내잖아요. 저한테 그 정도 특권도 없나요?”성유리는 아주 당당하게 말했고 아내라는 단어도 이제는 꽤 자연스럽게 나왔다.박한빈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려 했지만 눈빛 속에 감춰지지 않는 웃음기가 스며 있었다.하지만 바로 그때, 그들 뒤에서 뜻밖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지서연?”그 소리를 듣는 순간, 성유리는 발걸음을 뚝 멈췄고 모든 표정이 사라져 버렸다.지서연이라는 이름은... 정말 오랜만이었다.오래전이라 성유리는 자신도 이미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다.혹은, 이제는 담담하게 마주할 수 있다고 믿었다.어차피 지금은 박한빈과 예전의 일을 평온하게 이야기할 수도 있고 과거의 자신을 농담처럼 가볍게 흘려보낼 수도 있으니까.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성유리 혼자만의 착각이었다.지금 그 이름이 다시 들려온 순간, 날카로운 기억들이 마치 조각난 유리처럼 성유리의 차분한 겉모습을 찢어버리고 심장 깊숙이 파고들었다.성유리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그 사람이 벌써 성큼성큼 다가왔다.“정말 너 맞지? 아까는 내가 잘못 본 줄 알았어! 그런데 진짜 너였네.”여자는 잔뜩 흥분하며 말을 이어갔다.“나 요즘도 뉴스에서 너 자주 봤어! 다들 그러더라? 너 요즘 잘나간다고. 부자 남편 만나서 유복하게 산다며?”“원래 너 찾으려고 금성까지 갈까 했었는데 연락처를 몰라서 못 갔어. 그런데 이렇게 우연히 만날 줄이야!”여자는 감격한 듯 팔을 뻗어 성유리의 손을 덥석 잡았다.“예전에는 너랑 우리 단이가 같은 반 친구였잖아! 맞다, 그리고 너...”여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유리는 이미 손을 뿌리쳤다.그리고 담담하게 대답했다.“사람 잘못 보셨네요.”그 말에 여자가 순간 멍해졌지만 이내 다시 물었다.“그럴 리가 없어. 내가 널 어떻게 몰라보겠어? 네 집 예전엔...”
성유리는 손끝에 힘을 잔뜩 줬다.하지만 박한빈의 팔 근육이 워낙 단단해서 자신이 아무리 힘을 줘도 제대로 꼬집히지도 않았다.이 사실을 깨닫자 성유리는 살짝 짜증이 났다.성유리가 눈썹을 찌푸리며 박한빈을 원망스럽게 바라보자 그는 곧장 그녀의 기분을 이해한 듯 말했다.“차라리 깨물어 볼래?”“됐어요.”그녀는 퉁명스럽게 대답한 뒤,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그렇지만 얼굴에 실망감이 가득했다.그제야 박한빈은 성유리가 진짜로 신경 쓰고 있는 게 뭔지 깨달았다.“일이 잘 안 풀려?”성유리는 입술을 살짝 깨문 뒤, 고개를 끄덕거렸다.“아까 감독이랑 이야기했다고 했지? 무슨 얘기였어?”“대본 관련해서...”“수정해야 돼?”박한빈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다른 작가들도 있으니까 너 혼자 할 필요 없잖아.”“제작사가 새로운 배우를 끼워 넣으려고 해요. 그래서 캐릭터를 추가해야 하는데...”성유리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이미 대본이 충분히 꽉 차 있어서 추가하려면 거의 처음부터 다시 짜야 돼요. 그런데 감독은 일주일 안에 끝내라고 했어요.”“넌 그걸 동의한 거야?”“제가 싫다고 해도 방법이 없었어요. 저쪽이 우리 영화 최대 투자사거든요 그래서 감독도 쉽게 거절할 수 없고요.”“음... 그럼 곧 최대 투자사가 바뀌겠네.”박한빈의 말에 성유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왜요?”“내가...”그는 뭔가를 더 말하려다, 이내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성유리를 힐끔 바라봤다.그런데 성유리도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박한빈을 바라보며 물었다.“성유리, 너 지금 나 떠보는 거지?”“아니요? 전혀 아닌데요?”박한빈은 성유리의 대답을 듣고도 그녀의 코를 살짝 꼬집었다.“아야!”갑작스러운 행동에 성유리는 깜짝 놀라 손까지 휘저으며 외쳤다.“뭐 하는 거예요! 살살 좀 하라고요!”성유리가 두 손으로 자신을 마구 밀쳐내자 박한빈은 코웃음을 치며 손을 놓아주었다.“내가 제작사에 투자하게 만들고 싶으면 그냥 솔직하게 말하지 그래? 이렇게 덫을 세우지 말고.
새로운 캐릭터를 추가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고 게다가 투자사에서 내건 조건도 까다로웠다.“주인공보다 비중은 적어야 하지만 캐릭터 자체는 충분히 매력적이어야 합니다.”감독이 단순히 조건만 언급했을 뿐인데도, 성유리는 이미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성유리 작가님.”감독은 마치 그녀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말을 이어갔다.“원작자가 누구보다 가장 잘 알겠죠? 어디에 캐릭터를 끼워 넣어야 자연스러울지. 그러니까 이 작업은 당신이 맡아주세요.”감독의 말에 성유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그러나 감독은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바로 통보를 내렸다.“투자사에서 일주일 내로 수정된 대본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러니 준비하세요. 그리고 임 작가님이 성 작가님 작업에 맞춰 협조해 주세요.”그 말을 끝으로 감독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캐스팅 이야기를 중얼거리며 나갔다.회의실에 남겨진 성유리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그러자 맞은편에 있던 임 작가는 성유리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작가님, 혹시 떠오르는 아이디어 있으세요?”성유리는 묻는 임 작가를 한 번 바라본 뒤, 고개를 저었다.“그럼 어쩌죠? 겨우 일주일인데 이 대본을...”임 작가가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성유리의 휴대폰이 울렸다.화면을 보자 예상대로 박한빈이었다.성유리는 잠시 멈칫하다가 임 작가에게 말했다.“일단 먼저 돌아가세요. 통화하고 나서 다시 생각해 볼게요. 필요한 부분 있으면 따로 연락할게요.”“네, 알겠습니다.”상대는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성유리의 말을 거스를 수 없었으니 결국 조용히 짐을 챙겨 회의실을 나갔다.그제야 성유리는 전화를 받았다.“아직 회의실에 있어?”수화기 너머 박한빈의 목소리는 살짝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첫 두 글자만 들어도 이미 감정이 묻어나왔지만 그는 곧 스스로 감정을 누그러뜨리려는 듯 어조를 차분하게 바꿨다.“네.”“그런데 내가 보낸 메시지는 왜 안 봤어?”“감독님이랑 이야기 중이었어요.”“아... 그래?”그
이런 상황은 이미 익숙했다.이제는 누군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유가 거의 다 박한빈 때문이라는 것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였을까, 이우빈이 식사 제안을 했을 때도 성유리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하지만 막상 듣고 나니 순간적으로 뭐라 답해야 할지 망설여졌다.잠시 고민하던 끝에, 담담하게 대답했다.“아마 그이도 시간 없을 거예요. 여기 온 것도... 원래 업무 때문에 온 거라서요.”“아, 괜찮습니다. 어차피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되는 거니까요.”“네.”성유리는 고개만 끄덕이며 대충 상황을 넘겼다.그렇게 대화를 마쳤으면 떠날 법도 한데 이우빈은 그럴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성유리는 원래 하려던 대본 수정을 이어가고 싶었지만 바로 옆에서 버티고 있는 이우빈이 신경 쓰여 집중하기 쉽지 않았다.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더 할 얘기 있어요?”“아니, 없습니다.”“그럼...”“전 그냥 할 일이 없어서 여기 있는 겁니다.”이우빈은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말했다.“작가님이 일하는 거 보는 게 꽤 재밌기도 해서요.”성유리는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러다 갑자기 이우빈이 뭔가 떠오른 듯 물었다.“맞다, 재국 형님이 오후에 라이브 방송을 잡아놨는데 작가님도 같이하실래요?”“전 괜찮...”“이번 신작 영화 관련해서 팬들이랑 얘기할 건데 제가 대본을 보긴 했지만 어디까지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거든요. 작가님은 확실히 알고 계시죠?”“저도 잘 몰라요. 그리고 저 라이브 방송 안 할 거고요.”“그렇지만...”이우빈이 뭐라고 더 말하려던 순간,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그 소리가 들리는 순간, 성유리는 갑자기 몸이 굳었다.마치 자신이 잘못한 일이라도 한 것처럼.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까부터 지금까지 계속 이우빈과 거리를 두고 있었고 말할 때도 마찬가지였다.“실례합니다, 성유리 씨 계십니까?”낯선 목소리에 성유리는 긴장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그러나 이우빈이 먼저 나서서 문을 열었다.문 앞에 서 있던 건 배달
성유리는 컵을 한 번 힐끗 보기만 해도 이우빈이 뭔가를 오해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하지만 지금 자신의 상태를 굳이 설명하기도 난감했다.그래서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점심도 안 드셨던데 뭐라도 드시는 게 어떻습니까? 제가 매니저더러 시켜드리라고 할까요?”“괜찮아요. 전 그냥... 배가 별로 안 고파서 그래요.”“그래도 굶으시면 안 됩니다. 밥은 꼭 챙겨 드셔야죠.”이우빈은 굴하지 않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그러면서 휴대폰 갤러리를 열어 성유리에게 사진을 보여주었다.“이거 보세요, 어제 유재국 형님이 드셨던 건데 꽤 맛있어 보이지 않아요?”“죄송하지만 전... 감독님이 체중을 더 감량해야 한다고 해서 요즘 다이어트식만 먹고 있습니다. 그래서 추천은 못 해 드리겠어요.”“아니, 정말 괜찮아요. 지금은 별로 안 먹고 싶어서...”“그럼 그냥 시켜놓겠습니다. 입맛이 없어도 조금이라도 드셔야 하니까요.”이우빈은 성유리가 거절할 틈도 없이 매니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그리고 마치 모든 걸 예상했다는 듯, 매니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음식을 들고 들어왔다.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뭔가 망설임이 묻어 있었다.남자는 성유리를 한 번 보더니 결국 참지 못하겠다는 듯 말했다.“이우빈 씨, 유재국 씨께서 계속 찾고 계십니다. 특별한 일이 없으시면 한 번 가보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오랜 시간 인기 스타로 활동해 온 이우빈이 이 말의 의미를 모를 리 없었다.그렇지만 그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매니저를 향해 손을 휙 내저었다.매니저는 뭔가를 더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을 떼지 못하고 결국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나갔다.“자, 빨리 드셔보세요.”그리고 이우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활짝 웃으며 음식을 성유리 앞에 밀어놓았다.워낙 적극적인 태도에 성유리는 어쩔 수 없이 그 음식을 받아들었다.이우빈이 시킨 건 이 지역 특유의 비빔면이었다.고소한 참깨와 땅콩 소스가 올려져 있었는데 고추기름은 따로 곁들여져 있었다.“작
야시장은 여전히 사람들이 북적였다.옆에서 스피커로 광고를 틀어대는 덕분에 원래도 시끄러운 거리가 더욱 소란스러워졌다.그런데도 박한빈은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도 아름답다고 느꼈다.붐비는 인파 속에서, 진한 삶의 냄새가 가득한 이곳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진지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여자는 미안하다고 했지만 박한빈에게는 그 말이 한 편의 사랑 고백처럼 들렸다.“나는 널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아.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어젯밤의 냉전도, 오늘 하루 내내 품고 있던 답답함도, 사실은 성유리 때문이 아니었다.박한빈은 그저 자신을 탓하고 있었을 뿐이다.뜻밖의 반응에 성유리는 잠시 멍해졌다가 이내 고개를 천천히 끄덕거렸다.“그럼... 이제 화 안 난 거지?”박한빈이 다시 물었다.그러자 성유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안 났어요.”사실 어젯밤 박한빈을 몰아붙이고 나서 성유리의 감정은 이미 가라앉아 있었다.이곳까지 일부러 찾아온 건 그저 그와 어떻게 지내야 할지 모르겠어서 선택한 것이다.하지만 그렇게 말하고 나니 박한빈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그러고는 성유리를 가만히 안아 올렸다.주변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많았다.심지어 길 건너편에서는 몇몇 사람들이 그들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박한빈은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그저 허리를 숙이고 성유리를 단단히 끌어안았다.이제 그는 알맞은 힘과 각도를 완벽히 익혔다. 그래서 아프지 않지만 벗어나기도 쉽지 않은 포옹이었다.성유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박한빈의 가슴을 가볍게 밀어내며 말했다.“계속 구경 안 할 거예요?”“안 해.”그는 단호했다.성유리는 순간 당황했지만 박한빈이 곧장 자신의 손을 잡고 발걸음을 옮기자 그제야 의도를 깨달았다.“저 아직 다 못 먹었는데요?”당황한 성유리는 발걸음을 뚝 멈추곤 말을 얼버무렸다.“가서 마저 먹어.”“진짜 먹을 수 있게 해 줄 거예요?”성유리가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자 이번엔 박한빈
음식이 다 익자 아주머니는 건져 올린 재료들을 가위로 잘게 잘라 그릇에 담고 매운 고추장과 참깨를 듬뿍 뿌려 버무렸다.성유리는 그 과정을 흥미롭게 바라보았지만 박한빈은 여전히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이내 아주머니가 음식을 내주자 성유리는 망설임 없이 젓가락을 들어 박한빈에게 내밀었다.“한번 드셔볼래요?”자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묻는 성유리를 뚫어져라 보던 박한빈은 입술을 달싹였다.몇 초 뒤, 마치 이제야 정신이 든 듯 천천히 입을 벌렸다.“맛있어요?”성유리가 기대에 잔뜩 찬 눈빛으로 물었다.음식이 입안에 들어오는 순간, 박한빈은 본능적으로 인상을 찌푸릴 뻔했다.하지만 성유리와 눈이 마주친 순간 표정을 재빨리 고쳐 잡고 대답했다.“맛있네.”성유리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후, 자신도 한입 먹었다.박한빈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에릭 일은... 내 잘못이었어.”갑작스러운 말에 성유리는 젓가락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그때 너무 깊이 생각하지 않고 조언해 줬어. 사실... 그냥 무책임했지.”박한빈은 담담한 목소리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그래서 오늘 확실하게 이야기했어.”“뭐라고 했는데요?”“결혼을 왜 하려는 건지 제대로 생각해 보라고 했어.”박한빈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속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이건 결국 에릭의 감정 문제잖아. 내가 너무 간섭하는 것도 안 좋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걔가 스스로 답을 찾도록 돕는 거야.”“그래서 물어봤어. 이게 단순한 복수심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 아라 씨와 결혼하고 싶은 건지.”“만약 에릭이 진심이라면 최소한 앞으로 아라 씨와 그 사람의 가족을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할 테니까. 그렇다면 결혼이 꼭 나쁜 선택은 아닐 수도 있잖아.”박한빈은 성유리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너도 그렇게 생각해?”그의 시선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마치 자신의 선택이 옳았는지 성유리의 확인이 필요하다는 듯이.성유리는 그런 그를 한동안 바라보
이곳에 다시 온 건 사실 성유리에게도 몇 년 동안 처음 있은 일이었다.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곳은 사회의 발전과 함께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높이 솟은 빌딩들과 화려하게 반짝이는 불빛들.그 풍경 속에서 성유리는 마치 자신의 기억이 엉켜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하지만 아무리 큰 변화가 찾아와도 사람들의 생활 습관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 법이다.이 지역은 밤이 되면 산바람이 불어와 꽤 서늘했기에 매운맛과 강한 양념을 선호하는 문화는 여전했다.박한빈은 원래 매운 음식을 전혀 먹지 못했지만 성유리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자주 매운탕을 먹으러 다녔다.물론 그는 여전히 맑은 국물을 선택했지만 가끔은 매운 국물에도 도전하곤 했다.그렇지만 오늘 밤 성유리는 매운탕 집 대신 내비게이션을 따라 근처의 음식 거리로 향했다.사실 전국 어디든 이런 음식 거리에서 파는 것들은 대체로 비슷했다.그런데도 박한빈은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고 북적거리는 인파 속에 서 있는 것조차 익숙하지 않아 보였다.성유리는 불편해하는 박한빈의 기색을 눈치챘지만 아무렇지 않아 하며 말했다.“이 음식 거리를 지나면 앞에 버스 정류장이 있어요. 그리고 그 버스의 마지막 정류장이 예전에 제가 다녔던 학교고요.”그 말을 들은 박한빈은 꽉 찌푸리고 있던 미간을 조금이나마 풀었다.“가볼래?”그러다 문득 그가 물었지만 성유리는 박한빈을 한 번 흘겨보며 대답했다.“이 늦은 밤에 학교엔 누가 가요? 게다가... 전 못 가요.”“왜? 누가 널 보면 곤란해?”성유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사람이 아니고....”주변이 워낙 시끄러워서인지 박한빈은 그녀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그래서 그는 몸을 숙이며 다시 물었다.“뭐라고?”성유리는 박한빈의 귀 가까이 다가가 나지막이 속삭였다.“다들 그러잖아요. 우리 학교는 원래 공동묘지였다고. 원한 맺힌 혼령들이 아직도 그 자리에 남아 있다던데... 학교를 세운 뒤에도 밤이면 돌아다닌대요.”성유리는 꽤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응?”“그 사람이 나보다 잘생겼어?”“그게 아니라...”“혹시 내 젊었을 때랑 좀 닮았다고 생각하는 거야?”“박한빈 씨 지금도 안 늙었어...”“그런데 왜 그 사람을 남자 주인공으로 선택한 거지? 남자 주인공은 나여야 하는 거 아니야?”성유리는 상황이 좀 꼬여버렸다고 느꼈다.어젯밤, 그들은 격렬한 말다툼을 한 데다가 심지어 따로 잠을 잤었다.그녀는 최소 며칠은 냉전 분위기가 계속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전혀 아니었다.“왜 대답 안 해?”박한빈이 다시 물었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성유리는 그를 한 번 보고는 깊이 한숨을 쉬었다.“캐스팅은 제가 관여하는 부분이 아니에요. 그리고 제가 쓴 남자 주인공이 꼭 박한빈 씨라고 말한 적도 없고요.”“그럼 네 그림이랑 내 사진을 한번 비교해 보면...”박한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유리는 그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성유리의 작품은 늘 공개되어 왔고 출판되거나 영상으로 각색될 때도 아무렇지 않았지만 박한빈 입에서 직접 그런 말이 나오니 이상하게 부끄러웠다.“그래요. 맞다고 합시다.”하지만 박한빈이 계속해서 집요하게 쳐다보자 성유리는 이를 악물고 다시 말했다.“그래서 어쩌라고요? 각색은 각색일 뿐이에요. 설마 배우가 돼서 직접 연기라도 하겠다는 건 아니죠?”“연기는 안 해. 하지만 네가 인정했다는 것만으로 충분해.”성유리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박한빈도 잠시 조용해졌다.이 대화는 이쯤에서 끝이 난 것 같았다.그렇지만 이제 그들 사이의 현실적인 문제로 다시 돌아왔다.예를 들면 성유리가 왜 여기 있는지, 왜 말도 안 하고 혼자 왔는지 같은 것.성유리는 천천히 손을 내렸고 박한빈도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팔을 조금 느슨하게 풀었다.그는 입술을 다물며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그 순간 성유리의 휴대폰이 먼저 울렸다.성유리는 박한빈을 살짝 밀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전화를 받았다.“엄마, 왜 내 메시지 안 봤어?”수화기 너머 하늘이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서운함이 묻어 있었다.성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