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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12화

Author: 송진
박한빈이 집에 돌아왔을 때, 성유리는 여전히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너무 집중한 나머지 그녀는 박한빈이 이미 돌아왔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오기 전까지는.

“뭐 보고 있어?”

성유리는 깜짝 놀라며 반사적으로 화면을 가렸고 동시에 고개를 돌려 따지듯 박한빈에게 물었다.

“왜 박한빈 씨는 발걸음 소리도 안 나요?”

박한빈은 성유리의 컴퓨터 화면을 흘끗 내려다보았다.

사실 별거 아니었다.

그녀가 예전에 작업했던 작품들, 그뿐이었다.

그리고 그 작품들을 박한빈은 전부 다 알고 있었다.

출판된 것은 물론, 그녀가 그동안 공개한 모든 작품을 이미 다 봤었다.

한때 박한빈의 사무실을 드나들던 사람들은 책상 위에서 익숙한 장면을 목격하곤 했다.

수많은 서류 더미 사이에 놓인 몇 권의 컬러풀한 만화책.

표지에는 한 쌍의 남녀가 다정하게 포옹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 자체로는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장면이지만 그것이 박한빈이라는 사람과 어울리느냐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러니 직원들이 몰래 수군거리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박한빈은 그런 말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성유리의 컴퓨터 화면을 스치듯 보기만 해도 박한빈은 그녀의 이야기가 어느 부분까지 진행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아, 다음 화에서 남자 주인공이 빗속에서 무릎 꿇고 용서를 비는 장면이 나오겠네.”

솔직히 말해 그는 이 작품 속 인물들의 논리와 전개 방식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어떤 면에서는 등장인물들이 전부 미쳐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하지만 성유리가 떠나 있던 몇 년 동안 이 작품 덕분에 안정적인 생활을 했다는 걸 알기에 박한빈은 더 이상 의문을 가지지 않기로 했다.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어도 존재하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의 직업이라면 그는 그것을 존중해야 했다.

원래라면 박한빈은 도대체 왜 이런 걸 가리는지 물었을 것이다.

이미 출판까지 되었고 영상화도 된 작품인데 이제 와서 숨긴다고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지만 성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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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성유리는 금방 말을 덧붙였다.“걱정하지 마세요. 저 정말 안 다쳤으니까. 그냥... 뺨 한 대 맞은 것뿐이에요.”그 말이 끝날 무렵, 성유리는 박한빈이 화를 낼까 봐 불안해져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그러자 박한빈이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그냥 뺨 한 대? 그게 별거 아닌 거 같아? 그럼 뭘 해야 심각하다고 생각할 거야? 네가 장애를 입을 정도로 맞는 걸 봐야 이게 심각하다고 느끼겠다는 거야?”“이곳은 우리 집이야. 누가 와서 너한테 손을 댔는데 내가 그냥 참고 있어야 된다는 거야?”박한빈은 갈수록 점점 더 분노하는 것 같았다.그의 입술은 점점 더 꽉 다물어졌고 급히 몸을 돌려 뭔가 하려는 듯했다.더 불안해진 성유리가 급히 박한빈을 붙잡았다.“뭐 하시려고요?”“손 놔.”“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한빈 씨가 이러면 전 너무 무섭단 말이에요.”성유리가 그렇게 말하자 박한빈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마치 그가 나가버릴까 봐 성유리는 박한빈의 허리를 꽉 껴안고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박한빈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의 표정은 조금 진정된 것 같았다.그래서 성유리는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말했다.“그리고 사실 저도 큰 손해 본 것도 아니야.”“너도 그대로 되돌려줬어?”“그건... 아니에요. 하지만 제가 그 사람한테 따졌죠. 그러니까 그냥 슬퍼하고 절망하며 떠났어요.”성유리가 마치 자랑하는 듯한 표정으로 말하자 박한빈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물었다.“그게 전부야?”“이거면 충분하지 않아요? 그럼 제가 진짜 그 사람이랑 싸워야 한다고 생각하셨어요?”“싸우고 싶으면 싸워.”박한빈은 단호하게 말했다.“그 사람이 진짜 너한테 맞거나 네 손에 의해 장애를 입었다면 내가 뒤처리 해줄게.”성유리는 농담으로 말했을 뿐인데 박한빈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마치 정말 성유리가 어떤 짓을 벌여도 뒤처리를 해줄 것 같은 표정이었다.성유리는 그 표정을 보며 순간적으로 박한빈은 말한 대로 할 수도 있겠다고 믿어버렸다.“그런 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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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민혁 씨가 죽었대.”박한빈이 성유리에게 사망 소식을 전했을 때, 그녀는 멍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서 조금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마치 박한빈이 말한 사람이 누구였는지 깊이 생각하는 듯 보였다.“사민혁 씨는 사하나 씨 아버지야.”성유리의 반응을 눈치챈 박한빈이 바로 대답했다. 그리고 그 말이 떨어지자 성유리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잠시 후, 그녀는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물었다.“왜요? 전에는 분명...”“병원에서는 사민혁 씨가 혼수상태에 빠져있다 심장마비가 도졌다고 했어.”“그 당시 의사들의 응급처치가 정말 빠르게 이루어졌고 사민혁 씨 심장병도 그렇게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어.”“사민혁 씨가 더 살지 못한 이유는... 아마도 본인이 살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일 거야.”박한빈의 목소리는 매우 평온했다.하지만 그의 간단한 설명에 성유리의 몸은 덜덜 떨렸다.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성유리는 겨우 목소리를 찾았다.“그럼 연정우 씨는요? 그 사람은 찾았대요?”박한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경찰이 그를 추적 중이야. 이런 상황에서 연정우 씨가 모습을 드러낼 리는 없을 거고.”“그럼... 류수미 씨는 어떡해요?”성유리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로 물었다.“현재 사씨 가문은 이미 파산한 상태야.”박한빈은 차분하게 말했다. 애초에 그는 원래 사씨 부부에게 별로 좋은 감정을 가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전에 성유리에게 사하나의 일로 압박하고 질타할 때, 박한빈은 그들의 사고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느꼈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하나가 사망한 건 사실이기 때문에 그들을 싫어하더라도 최소한 사하나라는 사람에 대한 측은지심은 있었다.게다가 두 사람은 나이가 많이 들었고 딸을 잃은 그들의 감정이 격해진 것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있었다.그러나 성유리가 실종된 후, 박한빈은 그들을 동정할 이유도 찾지 못했다.그래서 이제 그는 상업적인 관점에서 매우 냉철하게 성유리에게 상황을 설명했다.“회사는 여전히 거대한 빚을 안고 있지만 이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817화

    “마지막으로 사민혁 씨를 배웅하는 것도 제 마음의 안정을 위해서예요.”성유리의 목소리는 아주 낮았는데 마치 박한빈의 귀에 속삭이는 듯했다.박한빈은 고개를 숙여 성유리를 한참을 바라보다가 결국 천천히 대답했다.“알았어. 내가 같이 가줄게.”하지만 박한빈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사민혁의 장례식은 결국 순조롭게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아니, 자세히 말하면 장례식은 시작조차 하지 못했다.사람들이 추모식 현장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장례식의 주인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 사씨 가문에는 연세가 지긋한 어르신 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하지만 정오까지 할머니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결국 누군가 나서서 찾아온 손님들에게 알려주었다.“장례식이 취소되었습니다. 유일한 가족이 병원에 있기에 진행할 수 없어서 장례식은 장례식장 사람들이 대신 맡아서 간소하게 진행할 것입니다.”성유리는 그때 사람들 틈에 서 있었다. 처음에는 할머니가 충격을 받아서 병원에 갔다고 생각했다.그러나 며칠 후, 성유리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유일하게 남은 할머니는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어르신은... 미쳐있었다....“정말 안타깝긴 하다.”정원에서 김서영이 꽃을 손질하며 말했다.“비록 그 사람도 잘못한 일이 있었지만 그전에는... 사실 꽤 괜찮은 사람이었어.”“이 몇 년간 겪은 충격이 너무 컸던 것 같아.”성유리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김서영은 그제야 뭔가 깨달은 듯 재빨리 말을 이어갔다.“내 말은 그런 뜻은 아니고 그냥...”“알아요.”성유리는 빠르게 대답하며 싱긋 웃어 보였다.그러자 김서영은 한숨을 쉬며 계속 말했다.“그냥 세상일이 참 예측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 그래서 말인데... 어떤 일이든 지금 이 순간을 즐겨야 해.”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런데 연정우 그 사람은 여전히 소식이 없나?”“잘 모르겠어요.”김서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그 사람... 너무 무서워. 소리 소문 없이 떠나버렸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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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릭이 전화를 끊고 돌아갔을 때, 박한빈은 이미 방문을 활짝 열고 있는 상태였다.그리고는 선장에게 작은 보트를 준비하라고 연락하고 있었다.“어디 가려고?”에릭이 물었다.“집에.”박한빈은 빠르게 대답했다.“이건 축하 파티잖아. 다들 와 있는데 네가 먼저 간다고?”박한빈은 유람선에 있는 사람들을 한 번 쳐다봤다. 그들은 술을 많이 마신 상태기에 딱 봐도 이성을 잃은 사람들 같았다.이런 장면은 박한빈에게 낯설지 않았다. 예전이라면 박한빈은 이곳에 남아 사람들을 구경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었다.“여기엔 너 혼자 있으면 충분해.”박한빈은 단호하게 대답했다.“그게 무슨 말이야?”에릭은 떠나려는 그를 막아서며 말했다.“다들 이렇게 모였는데? 너 때문에 이곳에서 파티를 열게 됐잖아. 그럼 이제 뭐가 더 필요해?”“내가 모든 비용 다 지급할게.”박한빈은 자신을 막아서는 에릭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대답했다.“그것도 안 돼, 내가 뭐 돈이 부족한 사람인 줄 알아?”이내 에릭은 한 일 초의 고민도 없이 거절했다.하지만 박한빈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계속해서 선장에게 작은 보트를 먼저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솔직히 말 지금 집에 돌아가도 네 아내를 볼 수는 없을 거야.”박한빈은 이미 에릭의 존재를 무시하고 있었지만 마지막 말에 발걸음이 뚝 멈췄다.그러더니 뒤돌아서 에릭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너 지금 그게 무슨 말이야?”에릭은 박한빈과 꽤 오랜 시간을 지내왔지만 그들 사이에는 묘한 연대감이 있었다. 에릭은 때때로 박한빈이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는 또 다른 자신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다만 박한빈은 세속적인 틀에서 벗어났고 이제는 무엇을 하든 자신을 즐기기 위해서만 행동했다.반면 에릭은 여전히 그 틀 안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박한빈을 ‘구출’하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지금 보니 그것은 에릭의 일방적인 바람이었던 것 같았다.특히 성유리와의 관계가 더 가까워질수록 박한빈은 점점 더 낯설게 느껴졌다. 에릭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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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라는 요 며칠 계속해서 누군가 자신을 따라다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하지만 뒤를 돌아볼 때마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잠시 불안감이 스쳤지만 이내 스스로를 달랬다.‘내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고... 누가 날 쫓아오겠어?’아라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다. 돈도 많지 않고 외모도 그렇게 눈에 띄는 편이 아니었다.그러니 누군가 아라를 미행할 이유 따위 없었다.애써 잡생각을 정리하고 괜찮다고 생각하며 신경을 끄기로 했다.요즘 아라의 가장 큰 관심사는 주성운이었다.요즘 그는 점점 건강을 회복하고 있었기에 아라가 돈을 모아 주문한 의족도 곧 도착할 예정이었다.의족이 도착하면 주성운은 다시 두 발로 설 수 있고 그들의 삶도 한층 더 나아질 터였다.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두 사람은 결혼을 하고 함께 작은 가게를 열어 조용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그것이 아라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미래였다.공공버스에서 내려 그런 생각에 잠겨 있던 순간,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아라야.”익숙한 이름, 그리고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에 아라의 발걸음이 즉시 멈췄다.그리곤 믿을 수 없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돌렸는데 거기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라를 바라보고 있었다.딱 떨어지는 고급 정장을 입은 채로 눈에 띄는 금발과 짙은 청록색 눈동자를 지닌 남자.남자가 입을 열자 주변의 시선이 일제히 아라에게 쏠리자 아라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에릭이 아라를 찾아온 것이다.순간 아라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갔다.몇 초 후, 그녀는 억지로 평정을 되찾고 조심스럽게 다가섰다.“에... 에릭 씨가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예요?”에릭은 아라를 쳐다만 볼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냥... 지나가는 길인가요?”아라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자연스럽게 상황을 넘기려 했다.“진짜 우연이네요. 근데...”“아니. 특별히 널 찾으러 왔어.”에릭의 대답에 아라는 멈칫했다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저... 저를 왜 찾아오셨어요? 무슨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875화

    “모르지. 방금 에릭이 나한테도 말 안 해줬잖아?”성유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근데 에릭 씨 정도로 돈이 많은 사람이 단순히 재산 문제로 화낼 리는 없고... 그렇다면 그냥 가지고 놀았다는 건가요?”성유리가 이 일에 대해 그렇게 분석하자 박한빈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아마도 그럴걸?”에릭은 매우 만족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덧붙였다.“그 녀석이 예전에 나보고 미쳤다고 난리 치더니 이제야 본인이 제대로 당했네. 아주 좋아.”그렇게 말하면서도 에릭은 뭔가 떠오른 듯 곧바로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아라의 신원을 조사해 보라고 지시했다.그리고는 다시 성유리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이번 연극... 아주 볼만하겠어.”...에릭이 도착한 건 새벽이었지만 박한빈은 당연히 마중을 나가지 않았다.하지만 미리 주소를 알아두었기 때문에 에릭은 공항에서 곧장 이곳으로 쳐들어왔다.현관 벨이 울릴 때, 성유리와 박한빈은 아직 잠들지 않은 상태였다.갑작스러운 초인종 소리에 성유리는 본능적으로 움찔했고 그 바람에 그녀의 손톱이 박한빈의 등을 스치며 얇은 상처를 남겼다.그래서 박한빈 역시 얼굴을 찡그리며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사람 있어요.”성유리가 뭔가 말하려 했지만, 박한빈은 개의치 않고 그녀를 더욱 깊숙이 끌어안았다.그렇지만 벨 소리는 마치 재촉이라도 하듯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성유리는 점점 신경이 곤두섰고 결국 그를 밀어내려 했다.살짝 화가 난 박한빈은 입술을 굳게 다물더니 아예 성유리의 손목을 잡아 머리 위로 눌러버렸다.한편, 에릭은 문 앞에서 꽤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금성은 아직 그렇게 추운 계절이 아니었지만 어릴 때부터 고생을 모르고 자란 그에게 이처럼 문 앞에서 추위를 견디며 기다리는 경험은 그야말로 치욕이었다.그렇게 이를 악물고 서 있다가 마침내 문이 열리고 박한빈이 내려왔는데 그의 표정은 에릭 못지않게 어두웠다.“대체 뭐 하러 온 거야?”박한빈의 목소리에는 짙은 짜증이 배어 있었다.에릭은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874화

    성유리가 아라와 다시 마주친 건 두 달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병원 로비, 휠체어에 앉아 있는 낯선 남성과 아라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본 것이다.남자는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얼굴엔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는 아라에게 무언가를 조용히 이야기했고 아라는 몸을 숙여 그의 말을 경청했다.그러다 말이 끝나자 대놓고 눈알을 굴리며 남자를 향해 장난이 섞인 짜증도 부렸다.아라의 표정은 투덜대는 듯했지만 입가의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그 모습은 성유리가 에릭 곁에서 보았던 아라보다 훨씬 생기 있어 보였다.그래서 성유리는 가만히 그들을 지켜보았다.그런데 아라는 마치 누군가의 시선을 감지한 듯 고개를 들었다.그리고 성유리와 눈이 마주친 순간, 아라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하지만 그 찰나의 경직은 오래가지 않았다.아라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시선을 피하고 다시 남자를 밀며 걸어갔다.그 모습을 보고도 성유리는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어차피 아라는 에릭의 여자 친구였을 뿐이고 지금은 헤어진 듯하니 다른 사람과 함께 있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그런데 아라의 발걸음이 왠지 급해 보였다.마치 무언가를 들키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마치 잘못을 저지르고 들킬까 봐 불안해하는 사람처럼.이상한 아라의 행동에 성유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그때 마침, 박한빈이 성유리의 건강검진 결과를 들고 다가왔다.“유리야.”그녀는 멍하니 서서 생각에 잠겨 있었기에 박한빈의 부름에도 반응하지 못했다.아무리 기다려도 성유리가 반응이 없자 결국 박한빈은 팔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성유리는 그제야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고 박한빈은 그녀의 반응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왜 그래? 얼이 빠져있는 사람처럼.”성유리는 한동안 박한빈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방금 아라 씨를 봤어요.”“아라?”“네. 에릭 씨의 새 여자 친구였던 사람.”그제야 박한빈도 기억이 난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아라 씨가 한국으로 돌아온 것 같아요. 그리고... 다른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873화

    “그래요?”성유리는 잠시 멈칫하다 물었다.“네. 저도 금성 대학 출신이에요. 다만 제가 입학했을 땐 선배님은 이미 졸업하고 결혼하셨더라고요. 나중에 선배님의 작품이 드라마로 만들어졌을 때 교수님이 강의 시간에 소개해 주셨었어요.”아라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전환했다.이야기 소재 자체가 성유리에게는 다소 민망한 주제였지만 덕분에 박한빈과 에릭 사이의 살벌한 분위기가 조금은 누그러지는 듯했다.그런 이유로 성유리는 굳이 더 신경 쓰지 않았다.어쨌든 저녁 식사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이미 밤이 깊었기 때문에 에릭은 두 사람에게 하룻밤 묵고 가라고 권했지만 박한빈은 단칼에 거절했다.에릭은 여전히 냉랭한 박한빈의 태도에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 정 그렇다면 나도 더 붙잡지는 않을게. 집사님, 손님들을 배웅하십시오.”말을 마친 그는 아라를 품에 안고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그리고 박한빈 또한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은 채, 성유리를 데리고 조용히 저택을 나섰다.그 뒷모습을 보며 성유리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이 둘은 한때 명실상부한 파트너였고 지금도 각자의 분야에서 손꼽히는 인물인데 지금 하는 행동은 꼭 유치한 초등학생 같았다.하지만 박한빈이 아직도 에릭에게 앙금을 가지고 있는 듯해 보였기 때문에 성유리는 굳이 이 부분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그저 가만히 그의 손을 잡을 뿐.박한빈은 성유리를 힐끗 보더니 그녀의 손을 잡아 자신의 손바닥 안에 넣고 장난스럽게 주물렀다.그러다 갑자기 입을 열었다.“좀만 기다려 봐.”“뭘요?”성유리가 의아해하며 되물었다.“저 바보 곧 크게 당할 거야.”박한빈의 말에 성유리의 표정이 순간 굳어버렸다.“제가 연정우한테 끌려갔던 건 사실 에릭 씨 탓만 할 수도 없는 일이잖아요. 박한빈 씨랑 에릭 씨는 오랜 시간 알고 지냈는데 굳이 이 일로 계속 싸울 필요는 없지 않아요?”성유리가 말하는 동안 박한빈은 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그러더니 오히려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너 지금 뭐라고 했어?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872화

    사실 에릭에게 여자 친구가 끊긴 적은 없었다.자주 마주칠 일도 없는 성유리조차 그가 여러 명의 여자 친구를 두는 모습을 봐왔을 정도였다.박한빈도 전에 말했었다. 에릭에게 여자 친구란 그저 소모품 같은 존재라고.한동안은 그녀들에게 온갖 애정과 특권을 쏟아붓지만 ‘유효기간’이 지나면 가차 없이 버려버린다고 했다.그 과정에서 단 한 치의 감정도 남기지 않았다.오히려 에릭은 여자들이 잃어버린 것에 절망하고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걸 즐기는 인간쓰레기였다.하지만 성유리는 아라에게만큼은 에릭이 다르게 대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가장 직관적인 증거는 박한빈이 말하기를 이 저택은 에릭의 개인적인 공간이었으며 초대받은 사람만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이다.그럼 아라는?그녀의 태도는 마치 이곳의 여주인 같았다.물론 이건 그저 성유리의 생각일 뿐이었으니 굳이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박한빈과 에릭 사이에는 어딘가 묘한 거리감이 존재하는 듯했다. 그래서인지 저녁 식사 분위기도 화기애애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아라는 에릭 곁에서 마치 길들여진 고양이처럼 얌전하게 행동했다. 그녀는 에릭이 원하는 대로 움직였고 에릭은 그런 아라의 ‘배려심’을 아주 만족스러워하는 듯했다.하지만 성유리는 그런 아라를 보면서 왠지 과거의 자신을 보는 것만 같았다.성유리의 시선을 느낀 것일까, 아라가 고개를 들어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그제야 성유리는 자신의 무례함을 깨닫고 미안하다는 듯 미소를 지은 뒤 조용히 식사에 집중했다.그때, 갑자기 에릭이 입을 열었다.“돌아가면 이제 2세 가질 계획을 세우는 건가?”성유리는 난데없는 대화 주제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아니, 그보다 이 질문을 던진 사람이 에릭이라는 점이 더 황당했다.잠시 에릭이 정말 미친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아무리 그래도 이런 말을 에릭의 입에서 듣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그리고 성유리뿐만 아니라 박한빈 역시 예상치 못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렇지만 그는 성유리보다 훨씬 직설적이었다.“미쳤냐?”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871화

    그녀의 대답에 박한빈의 안색이 더 어두워졌다.“또 다음 있다고?”성유리는 웃으며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 다음은 없을 거니까 걱정 말아요.”박한빈은 뭔가 더 말하려 했지만 바로 그때 운전기사의 안내 소리가 들려왔다.동시에 대기하고 있던 집사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는 궁금증을 잠시 접어두고 성유리를 데리고 차에서 내렸다.“잠깐만요. 저 립스틱 좀 다시 바르고.”성유리는 그의 손을 떼어내려 했지만 박한빈은 그녀의 뜻대로 해주지 않았고 오히려 손을 더욱 단단히 잡았다.“그럴 필요 없어. 그 사람이 무슨 대단한 인물이라고 그렇게 격식을 차려야 해?”박한빈에게는 자신이 여기까지 와준 것만으로도 에릭에게 큰 은혜를 베푼 셈이었다. 그런데 굳이 멋을 낼 필요가 있나?성유리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박한빈이 이끄는 대로 차에서 내렸다.“로얀.”그곳에 있던 집사는 박한빈과 매우 친숙한 듯했다. 반갑게 인사를 건넨 후,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성유리는 고개를 들어 저택의 구조를 살폈다.박한빈이 전에 말했던 것처럼 에릭은 단순히 넥스트의 창립자일 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의 후손이라고 했다.이 저택 역시 그 시절부터 내려온 유산이었다.새하얀 벽과 아치형 창문은 성유리가 동화책에서 본 성과 거의 똑같았다. 천장이 높은 거실 한가운데 걸려 있는 웅장한 샹들리에도 그녀가 떠올린 전형적인 귀족 저택의 이미지와 부합했다.하지만 한 가지, 성유리가 어딘가 위화감을 느낀 것이 있었다.거실에서 차를 따르고 있는 여인.그녀는 푸른빛의 긴 치마를 입고 있었고 머리를 가지런히 틀어 올렸는데 우아한 몸매에 단아한 얼굴, 그리고 전형적인 동양인의 외모를 지닌 여인이었다.낯선 인물의 등장에 성유리는 약간 놀란 듯 눈썹을 살짝 올렸고 박한빈도 마찬가지였다.심지어 박한빈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먼저 물었다.“네가 왜 여기 있어?”성유리는 그제야 박한빈을 돌아봤다.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870화

    성유리와 박한빈이 라온시를 떠나기 전에, 에릭이 그들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그런데 그 식사는 호텔이나 다른 레스토랑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에릭의 개인 별장에서 진행되었는데 마치 성인 사자들이 자신만의 영역을 갖듯 에릭의 별장도 그의 사적인 영역이었다.에릭이 박한빈 혼자 초대한 적이 있지만 성유리와 함께 초대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는 그가 성유리를 인정했다는 뜻이었다.박한빈은 사실 에릭의 인정 따위 필요하지 않았지만 그가 성유리의 존재를 받아들였다는 점을 뜻깊게 생각했다.성유리는 연정우에게 끌려갔던 일을 아직 에릭에게 따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마음속으로 갈등하고 있었지만 그는 성유리에게 직접 연락을 해 초대를 했다.어쩔 수 없이 성유리는 그 뒤에 일어날 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지만 초대에 기꺼이 응하며 박한빈과 함께 가기로 했다.그리고 성유리 또한 에릭의 별장에 흥미를 보이기에 박한빈도 순순히 그녀의 결정을 따랐다.별장 지역에 도착하자마자 성유리는 경비원들이 순찰을 도는 모습을 봤다.그들은 모두 총을 들고 있었고 비록 에릭이 사전에 연락을 했지만 어떤 경비 지점에선 차량을 멈추고 확인을 거친 후에야 통과를 허락했다.“자기가 잘못한 게 너무 많아서 누군가 자신을 암살하려 할까 봐 두려워서 저러는 거야.”성유리는 박한빈의 설명을 듣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그래도 그냥 안전을 위한 거겠죠. 여긴 위험한 곳이니까.”하지만 박한빈의 감정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보안이 그렇게 철저하면 뭐 해? 보디가드들이 엉망이니까 너를 연정우가 납치해 갔잖아. 밥만 축내는 식충이들 같으니라고.”성유리가 그를 달래듯 조용히 말했다.“그때 연정우가 초대장을 구해서 들어온 거였어요.”박한빈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미간을 깊이 찌푸리고 있었다.성유리는 그가 여전히 그때 일을 떠올리며 불안해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그녀가 의식을 잃고 있었던 이틀 동안, 박한빈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그러나 박한빈이 유서를 작성했다는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869화

    “네 어머니께서 알려주셨어.”성유리의 말에 연정우의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렸다.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성유리를 바라보았다.입술을 몇 번 달싹였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내가 어머니한테 말했어. 설령 어머님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해도 박한빈 씨가 결국 널 찾아낼 거라고.”“박한빈 씨 수단이 어떤지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어. 그때가 되면 네 어머니가 원하는 평온한 삶도 불가능해질 거라고.”“하지만 만약 어머니가 내게 네가 있는 곳을 말해 준다면 적어도 지금의 생활은 유지할 수 있을 거라고 했어.”연정우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문득 성유리에게 물었다.“그래서 엄마가 너한테 내 행방을 알려준 거란 말이지?”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연정우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하지만 방금 전의 웃음과는 달랐다.이번에는 한층 더 담담한, 어쩌면 체념이 섞인 듯한 웃음이었다.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의 눈은 붉게 물들어갔고 손도 덜덜 떨렸다.성유리는 그런 그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그러나 바로 그 순간, 연정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이런 말 해주려고 오늘 일부러 찾아온 건가?”그 말에 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렸고 발걸음을 멈췄지만 돌아보지 않았다.연정우는 그녀의 등을 가만히 바라보며 이를 악물고는 다시 말했다.“성유리, 너는 나를 냉혹하다고 해도 좋아. “나를 배은망덕한 놈이라 불러도 좋아. 하지만 내가 평생 수많은 사람들에게 죄를 지었어도 너한테만큼은 아니야!”그의 목소리가 점점 격앙되기 시작했다.“난 널 위해서라면 뭐든 했어. 내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도... 다 널 믿었기 때문이야!”“하지만 넌? 나한테서 그토록 많은 걸 가져가고도 아직도 부족해?!”“이제는 날 이렇게까지 짓밟아야 속이 시원해?”“감옥에서조차 편히 지낼 수 없게 하려는 거냐고!”“너...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잔인해질 수가 있어?”잔인하다는 그 단어가 자신의 입에서 튀어나왔을 때, 연정우 스스로도 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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