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811화

Author: 송진
“그때 박한빈 씨는 사실 당신들을 겨냥할 이유가 없었어요.”

성유리의 말에 류수미는 순간 멍해졌다.

“뭐... 뭐라고?”

“설마 아니라고 생각하세요?”

성유리는 의아하다는 듯 류수미를 쳐다보았는데 정말로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마치 정말로 순수한 의문을 품은 아이처럼.

“박한빈 씨가 굳이 사씨 가문까지 끌어들인 건 결국 당신들이 연정우라는 사람의 앞잡이가 되었기 때문이잖아요?”

“만약 당신 말대로 제가 그저 잘 살아가길 바랐다면 그때 연정우 씨가 절 그렇게 끌고 가도록 두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래서 박한빈 씨가 당신들을 겨냥하기로 마음먹은 거고... 나중엔 제가 살아 있다는 걸 당신들도 알게 된 게 결과일 뿐이죠.”

하나하나 조목조목 따지듯 말하는 성유리에게 류수미는 더 이상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사하나 씨 일도 전부 알고 있어요. 그리고 하늘이를 구해준 하나 씨에게 감사하고 있고요.”

“만약 가능하다면... 하나 씨를 대신해 당신들을 잘 돌볼 수도 있었어요.”

“그렇지만 결국 이 은혜는 사하나 씨가 저희 모녀에게 베푼 거죠. 당신들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리 깊은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에요.”

“당신이 악행에 동참하는 순간 전 그 은혜는 이미 다 갚았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지금 사씨 가문의 상황은...  죄송하지만 저는 도와줄 수 없을 것 같네요.”

류수미는 원래 자신만만한 태도로 성유리를 찾아왔다.

그리고 여전히 성유리 앞에서도 늘 당당했다.

그녀는 성유리가 사씨 가문에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성유리가 내뱉은 말 하나하나는 류수미가 반박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그때 류수미는 왜 연정우를 막지 않았을까?

정말 단순히 그를 믿어서였을까?

사실 류수미도 알고 있었다.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류수미는 사하나의 일로 성유리에게 원한이 있었다.

한 사람의 어머니로서, 평생 이 일을 마음에 품고 살 수밖에 없었다.

비록 성유리를 용서했다고 말했지만 밤이 깊어질 때마다 류수미 역시 한순간도 악한 마음이 들지 않은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ocked Chapter

Related chapters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812화

    박한빈이 집에 돌아왔을 때, 성유리는 여전히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너무 집중한 나머지 그녀는 박한빈이 이미 돌아왔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했다.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오기 전까지는.“뭐 보고 있어?”성유리는 깜짝 놀라며 반사적으로 화면을 가렸고 동시에 고개를 돌려 따지듯 박한빈에게 물었다.“왜 박한빈 씨는 발걸음 소리도 안 나요?”박한빈은 성유리의 컴퓨터 화면을 흘끗 내려다보았다.사실 별거 아니었다.그녀가 예전에 작업했던 작품들, 그뿐이었다.그리고 그 작품들을 박한빈은 전부 다 알고 있었다.출판된 것은 물론, 그녀가 그동안 공개한 모든 작품을 이미 다 봤었다.한때 박한빈의 사무실을 드나들던 사람들은 책상 위에서 익숙한 장면을 목격하곤 했다.수많은 서류 더미 사이에 놓인 몇 권의 컬러풀한 만화책.표지에는 한 쌍의 남녀가 다정하게 포옹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그 자체로는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장면이지만 그것이 박한빈이라는 사람과 어울리느냐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그러니 직원들이 몰래 수군거리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박한빈은 그런 말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그리고 지금, 성유리의 컴퓨터 화면을 스치듯 보기만 해도 박한빈은 그녀의 이야기가 어느 부분까지 진행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아, 다음 화에서 남자 주인공이 빗속에서 무릎 꿇고 용서를 비는 장면이 나오겠네.”솔직히 말해 그는 이 작품 속 인물들의 논리와 전개 방식을 이해하기 어려웠다.어떤 면에서는 등장인물들이 전부 미쳐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하지만 성유리가 떠나 있던 몇 년 동안 이 작품 덕분에 안정적인 생활을 했다는 걸 알기에 박한빈은 더 이상 의문을 가지지 않기로 했다.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어도 존재하는 것들이 있다.그리고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의 직업이라면 그는 그것을 존중해야 했다.원래라면 박한빈은 도대체 왜 이런 걸 가리는지 물었을 것이다.이미 출판까지 되었고 영상화도 된 작품인데 이제 와서 숨긴다고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하지만 성유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813화

    하지만 성유리는 금방 말을 덧붙였다.“걱정하지 마세요. 저 정말 안 다쳤으니까. 그냥... 뺨 한 대 맞은 것뿐이에요.”그 말이 끝날 무렵, 성유리는 박한빈이 화를 낼까 봐 불안해져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그러자 박한빈이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그냥 뺨 한 대? 그게 별거 아닌 거 같아? 그럼 뭘 해야 심각하다고 생각할 거야? 네가 장애를 입을 정도로 맞는 걸 봐야 이게 심각하다고 느끼겠다는 거야?”“이곳은 우리 집이야. 누가 와서 너한테 손을 댔는데 내가 그냥 참고 있어야 된다는 거야?”박한빈은 갈수록 점점 더 분노하는 것 같았다.그의 입술은 점점 더 꽉 다물어졌고 급히 몸을 돌려 뭔가 하려는 듯했다.더 불안해진 성유리가 급히 박한빈을 붙잡았다.“뭐 하시려고요?”“손 놔.”“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한빈 씨가 이러면 전 너무 무섭단 말이에요.”성유리가 그렇게 말하자 박한빈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마치 그가 나가버릴까 봐 성유리는 박한빈의 허리를 꽉 껴안고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박한빈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의 표정은 조금 진정된 것 같았다.그래서 성유리는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말했다.“그리고 사실 저도 큰 손해 본 것도 아니야.”“너도 그대로 되돌려줬어?”“그건... 아니에요. 하지만 제가 그 사람한테 따졌죠. 그러니까 그냥 슬퍼하고 절망하며 떠났어요.”성유리가 마치 자랑하는 듯한 표정으로 말하자 박한빈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물었다.“그게 전부야?”“이거면 충분하지 않아요? 그럼 제가 진짜 그 사람이랑 싸워야 한다고 생각하셨어요?”“싸우고 싶으면 싸워.”박한빈은 단호하게 말했다.“그 사람이 진짜 너한테 맞거나 네 손에 의해 장애를 입었다면 내가 뒤처리 해줄게.”성유리는 농담으로 말했을 뿐인데 박한빈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마치 정말 성유리가 어떤 짓을 벌여도 뒤처리를 해줄 것 같은 표정이었다.성유리는 그 표정을 보며 순간적으로 박한빈은 말한 대로 할 수도 있겠다고 믿어버렸다.“그런 일은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814화

    류수미는 바로 병원에 돌아갔다.처음에는 연정우에게 오늘 실버 포레스트에서 일어난 일을 말하려 했으나 병실에 도착했을 때 연정우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간호사에게 물었지만 간호사도 연정우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류수미는 연정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연결음을 계속 들리지만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불안한 마음에 류수미는 저도 모르게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그녀는 침대에 누워있는 남편을 한 번 바라보았다.원래는 감정을 제어할 수 있었지만 사민혁의 얼굴과 흰머리가 보이는 모습을 보자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여보... 이제 우리는 어떡해요?”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은 당연하게도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류수미의 눈가는 더욱 붉어졌고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펑펑 울었다. 바로 그때, 그녀의 전화기가 울리기 시작했다.발신자를 확인한 류수미는 급히 손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그리고 곧 감정을 추스르고 나서야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사모님, 큰일 났습니다.”상대방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말을 이어갔다.“황 대표님이 회사의 자금을 들고 도망쳤어요!”류수미는 그 말을 들었지만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상대방은 류수미의 반응을 기다리며 초조하게 말을 이어갔지만 그녀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몇 초 후에 다시 소리쳤다.“사모님!”“듣고 있어요.”한참 뒤, 류수미는 겨우 대답했는데 목소리는 덜덜 떨리고 있었다.“지금 농담하시는 거죠? 황 대표가 저희랑 얼마나 오래 지내왔는데요? 제 남편이 가장 믿고 따르던 사람이었잖아요. 그런 사람이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사모님, 농담이 아니라 진짜예요.”상대방은 즉시 말을 이어갔다.“황 대표님 이미 하루 종일 연락이 끊긴 상태예요. 방금 경찰에 신고했는데 경찰 측에서는 황 대표가 금성시를 떠났다고 했습니다. 그게 도망친 게 아니라면 뭘까요?”“말도 안 돼...”류수미는 수화기 너머 상대가 하는 말을 듣지 못한 채 계속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해요? 도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815화

    오아시스라고 생각했던 그것은 치명적인 독약이었다.그러니까 연정우는 일부러 류수미를 유혹할 ‘덫’을 던진 것이다.하기야 만약 이런 이유가 아니었다면 류수미 또한 연정우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을 것이다. 필경 믿었던 남편은 이미 혼수상태에 빠져있었으니.류수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연정우를 놓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그를 붙잡는 것이었다.하지만...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으나 목이 꽉 막혀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그때, 옆에서 기계에서 요란한 경고음이 울리기 시작했고 류수미는 그 소리에 바로 고개를 돌렸다.그뿐만 아니라 밖에 있던 의사들도 그 소리를 들었다.그들은 급히 병실로 뛰어와 류수미를 밀쳐내고 응급 처치를 시작했다. 류수미는 핸드폰을 쥔 채, 병상에 누워 있는 남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그때 사민혁은 산소마스크를 쓰고 있었다.며칠 전만 해도 사민혁은 웃으며 류수미에게 말했었다.“내가 어깨의 짐을 내려놓으면 너랑 함께 세계 여행을 떠날 거야. 너도 알지? 너는 여전히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까 내가 그런 방식으로 도와주려고 이러는 거야.”그동안 류수미가 저지른 모든 무례한 일들을 사민혁은 다 받아주고 감싸 주었다. 사실, 성유리의 부상을 입고 연정우가 그녀를 데리고 떠날 때, 사민혁은 반대했었다.그러나 류수미가 그런 사민혁을 막았다.그들이 눈을 마주쳤을 때, 그는 분명히 아내의 눈에서 악의를 봤을 것이다. 그러나 사민혁은 류수미를 질책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오히려 사민혁은 류수미를 부추기듯 응원했고 달래줬었다.류수미는 그 선택으로 인해 그들이 이렇게 큰 대가를 치르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지금 사민혁은 아무런 생명력도 없이 병상에 누워서 의사들이 손을 쓰는 걸 그대로 맡기고 있었다.류수미는 사민혁이 방금 전 전화 내용을 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다.의사들은 분명히 그의 회복 속도가 빨라서 며칠 안에 깨어날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런데 방금 류수미는 갑자기 그런 느낌이 들었다.사민혁은 깨어날 수 없는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816화

    “사민혁 씨가 죽었대.”박한빈이 성유리에게 사망 소식을 전했을 때, 그녀는 멍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서 조금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마치 박한빈이 말한 사람이 누구였는지 깊이 생각하는 듯 보였다.“사민혁 씨는 사하나 씨 아버지야.”성유리의 반응을 눈치챈 박한빈이 바로 대답했다. 그리고 그 말이 떨어지자 성유리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잠시 후, 그녀는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물었다.“왜요? 전에는 분명...”“병원에서는 사민혁 씨가 혼수상태에 빠져있다 심장마비가 도졌다고 했어.”“그 당시 의사들의 응급처치가 정말 빠르게 이루어졌고 사민혁 씨 심장병도 그렇게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어.”“사민혁 씨가 더 살지 못한 이유는... 아마도 본인이 살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일 거야.”박한빈의 목소리는 매우 평온했다.하지만 그의 간단한 설명에 성유리의 몸은 덜덜 떨렸다.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성유리는 겨우 목소리를 찾았다.“그럼 연정우 씨는요? 그 사람은 찾았대요?”박한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경찰이 그를 추적 중이야. 이런 상황에서 연정우 씨가 모습을 드러낼 리는 없을 거고.”“그럼... 류수미 씨는 어떡해요?”성유리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로 물었다.“현재 사씨 가문은 이미 파산한 상태야.”박한빈은 차분하게 말했다. 애초에 그는 원래 사씨 부부에게 별로 좋은 감정을 가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전에 성유리에게 사하나의 일로 압박하고 질타할 때, 박한빈은 그들의 사고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느꼈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하나가 사망한 건 사실이기 때문에 그들을 싫어하더라도 최소한 사하나라는 사람에 대한 측은지심은 있었다.게다가 두 사람은 나이가 많이 들었고 딸을 잃은 그들의 감정이 격해진 것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있었다.그러나 성유리가 실종된 후, 박한빈은 그들을 동정할 이유도 찾지 못했다.그래서 이제 그는 상업적인 관점에서 매우 냉철하게 성유리에게 상황을 설명했다.“회사는 여전히 거대한 빚을 안고 있지만 이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817화

    “마지막으로 사민혁 씨를 배웅하는 것도 제 마음의 안정을 위해서예요.”성유리의 목소리는 아주 낮았는데 마치 박한빈의 귀에 속삭이는 듯했다.박한빈은 고개를 숙여 성유리를 한참을 바라보다가 결국 천천히 대답했다.“알았어. 내가 같이 가줄게.”하지만 박한빈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사민혁의 장례식은 결국 순조롭게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아니, 자세히 말하면 장례식은 시작조차 하지 못했다.사람들이 추모식 현장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장례식의 주인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 사씨 가문에는 연세가 지긋한 어르신 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하지만 정오까지 할머니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결국 누군가 나서서 찾아온 손님들에게 알려주었다.“장례식이 취소되었습니다. 유일한 가족이 병원에 있기에 진행할 수 없어서 장례식은 장례식장 사람들이 대신 맡아서 간소하게 진행할 것입니다.”성유리는 그때 사람들 틈에 서 있었다. 처음에는 할머니가 충격을 받아서 병원에 갔다고 생각했다.그러나 며칠 후, 성유리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유일하게 남은 할머니는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어르신은... 미쳐있었다....“정말 안타깝긴 하다.”정원에서 김서영이 꽃을 손질하며 말했다.“비록 그 사람도 잘못한 일이 있었지만 그전에는... 사실 꽤 괜찮은 사람이었어.”“이 몇 년간 겪은 충격이 너무 컸던 것 같아.”성유리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김서영은 그제야 뭔가 깨달은 듯 재빨리 말을 이어갔다.“내 말은 그런 뜻은 아니고 그냥...”“알아요.”성유리는 빠르게 대답하며 싱긋 웃어 보였다.그러자 김서영은 한숨을 쉬며 계속 말했다.“그냥 세상일이 참 예측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 그래서 말인데... 어떤 일이든 지금 이 순간을 즐겨야 해.”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런데 연정우 그 사람은 여전히 소식이 없나?”“잘 모르겠어요.”김서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그 사람... 너무 무서워. 소리 소문 없이 떠나버렸는데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818화

    에릭이 전화를 끊고 돌아갔을 때, 박한빈은 이미 방문을 활짝 열고 있는 상태였다.그리고는 선장에게 작은 보트를 준비하라고 연락하고 있었다.“어디 가려고?”에릭이 물었다.“집에.”박한빈은 빠르게 대답했다.“이건 축하 파티잖아. 다들 와 있는데 네가 먼저 간다고?”박한빈은 유람선에 있는 사람들을 한 번 쳐다봤다. 그들은 술을 많이 마신 상태기에 딱 봐도 이성을 잃은 사람들 같았다.이런 장면은 박한빈에게 낯설지 않았다. 예전이라면 박한빈은 이곳에 남아 사람들을 구경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었다.“여기엔 너 혼자 있으면 충분해.”박한빈은 단호하게 대답했다.“그게 무슨 말이야?”에릭은 떠나려는 그를 막아서며 말했다.“다들 이렇게 모였는데? 너 때문에 이곳에서 파티를 열게 됐잖아. 그럼 이제 뭐가 더 필요해?”“내가 모든 비용 다 지급할게.”박한빈은 자신을 막아서는 에릭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대답했다.“그것도 안 돼, 내가 뭐 돈이 부족한 사람인 줄 알아?”이내 에릭은 한 일 초의 고민도 없이 거절했다.하지만 박한빈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계속해서 선장에게 작은 보트를 먼저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솔직히 말 지금 집에 돌아가도 네 아내를 볼 수는 없을 거야.”박한빈은 이미 에릭의 존재를 무시하고 있었지만 마지막 말에 발걸음이 뚝 멈췄다.그러더니 뒤돌아서 에릭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너 지금 그게 무슨 말이야?”에릭은 박한빈과 꽤 오랜 시간을 지내왔지만 그들 사이에는 묘한 연대감이 있었다. 에릭은 때때로 박한빈이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는 또 다른 자신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다만 박한빈은 세속적인 틀에서 벗어났고 이제는 무엇을 하든 자신을 즐기기 위해서만 행동했다.반면 에릭은 여전히 그 틀 안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박한빈을 ‘구출’하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지금 보니 그것은 에릭의 일방적인 바람이었던 것 같았다.특히 성유리와의 관계가 더 가까워질수록 박한빈은 점점 더 낯설게 느껴졌다. 에릭에게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819화

    다른 때라면 에릭은 박한빈이 단순히 반박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박한빈의 눈빛은 매우 진지했고 회피하려는 시도도 없었다.에릭은 잠시 박한빈을 응시한 후 옅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너 그렇게 확신하는 거야? 성유리 씨는 단지 연약한 여자일 뿐인데?”그러나 박한빈은 여전히 단호하게 대답했다.“유리가 연약하냐 안 하냐는 상관없어. 나는 유리가 반드시 올 거라는 걸 아니까.”“그럼 만약 성유리 씨가 오지 않으면?”에릭이 다시 물었다.“내 명의의 모든 주식은 네가 가져.”박한빈의 대답에 에릭은 다시 한번 놀랐다. 그는 입을 뻥끗거렸지만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잠시 후, 겨우 정신을 다잡은 에릭이 입을 열었다.“진심이야?”“당연하지.”박한빈은 짧고 간결하게 대답했다.에릭은 침묵하다 갑자기 웃으며 물었다.“설마 이 틈을 타 도망가려는 건 아니지?”그러자 박한빈이 되물었다.“아까 내기 하자고 했잖아. 만약 내가 이기면 넌 뭐 해줄 건데?”에릭은 그가 이렇게 물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이 상황은 자신에게 유리한 게임처럼 보였다.그는 박한빈이 성유리를 좋아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결국 남자라면 누구나 온화하고 예쁜 여자를 좋아하는 법이다.에릭도 성유리가 정말 예쁘다고 인정했다. 그녀의 연약해 보이는 모습은 남자들의 보호 본능을 충분히 자극할 수 있었다.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성유리가 어떻게 홀로 배 위로 온다는 것인지, 에릭은 전혀 믿기지 않았다.게다가 이게 바로 유람선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면 성유리가 신고하면 근처에 의심스러운 배가 나타나면 바로 알 수 있다.그래서 에릭은 성유리가 절대 혼자 올 리가 없다고 여러 번 강조한 것이다.“네가 원하는 게 뭐야?”에릭은 자신이 이길 것이라고 확신했기에 어깨를 으쓱하며 직접 박한빈에게 물었다.“내가 원하는 거는 간단해. 넥스트펀드 5% 주식만 있으면 돼.”박한빈의 대답에 에릭은 다소 놀랐다. 비록 그 주식이 적지 않지만 박한빈이 에릭에게 건 내기는

Latest chapter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957화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성유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고개를 숙인 채 눈을 내리깔았다. 마치 이 모든 일이 자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인 것처럼.박한빈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그리고 그의 시선은 갑자기 성유리의 손목으로 향했는데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역시 이럴 줄 알았어.’박한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서영이 계속 말을 하고 있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전혀 없었다.그는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갔고 차에 올라탄 후 곧바로 운전사에게 시동을 걸라고 지시했다.운전기사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고개만 끄덕인 뒤, 빠르게 출발했다.웅장한 저택은 금세 뒤처졌고 몇 개의 거리를 지나니 복잡한 도시가 펼쳐졌다.박한빈은 그 도시의 반짝이는 네온사인들을 바라보며 마음속에서 화염이 치솟는 느낌을 받았다.그는 너무 답답한 마음에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넥타이를 풀었다.그때 에릭의 전화가 걸려 왔고 박한빈은 답답한 마음을 풀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전화를 받았다.이내 들려오는 에릭의 말에 박한빈은 바로 입꼬리를 쓱 올렸지만 운전기사가 백미러를 한 번이라도 쳐다봤다면 알았을 것이다.박한빈은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 속에는 어떤 감정도 없어 마치 지옥에서 온 악마처럼 보였다.“들어보니까 꽤 흥미롭네.”박한빈이 대답했다.“나도 끼워줘.”“그럼 언제 올 건데?”에릭은 묻다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멈칫했다.“아, 맞다, 너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지? 신혼부부를 떼놓으면 와이프가 싫어하는 거 아니야?”“쯧, 내가 결혼하지 말라고 했지? 대체 왜 그런 결정을 내린 건데? 잘 됐다. 지금 아주 그냥 잡혀 살고 있겠지.”박한빈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세상에서 누가 날 가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그리고 만약 아버지의 유언이 아니었으면 내가 걔랑 결혼했을까?”박한빈의 대답에 에릭은 매우 만족스러워하며 말했다.“빙고! 이래야 박한빈이지. 그럼 요 며칠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956화

    성유리는 처음엔 물밀듯 밀려오는 감정을 억누르려고 했다.하지만 박한빈이 그녀 앞에 국 한 그릇을 내려놓으며 손을 뻗는 순간, 풍겨온 성유정의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그래서 성유리는 그대로 폭발해 버렸다.그녀는 입을 틀어막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갔다.사실 성유리는 저녁도 거의 먹지 못했기에 토할 것도 없는 빈속에서 나오는 건 위액뿐이었다.세면대에 몸을 기댄 채 서 있던 성유리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너무 힘을 준 탓에 세면대를 짚고 있는 손이 창백할 정도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사모님, 괜찮으세요?”문밖에서 가사도우미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성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그러자 도우미가 문을 두드리다 옆에 있는 동료에게 말을 걸었다.“설마 무슨 일 생긴 거 아니겠지?”“임신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심하게 입덧을 해? 앞으로 어쩌려고.”“그러게 말이야.”“근데 뭐... 이해는 가지. 복 많은 도련님의 아기를 가지려면 그만한 고생은 해야 하지 않겠어?”그들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딱 성유리가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일부러 비꼰 건 아닐 수도 있지만 이런 이야기는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도우미들도 눈이 있으니 이 집에서 성유리가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 당연히 느끼고 있을 것이다.집안 어르신인 김난희가 성유리를 싫어하는 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었고 김서영 역시 그저 고인이 된 남편의 뜻을 따라 돌봐주는 척하는 것뿐이라는 것을.박한빈, 그는 아예 성유리를 아내라고 생각조차 한 적이 없었고 그에게 성유리는 한낱 ‘도구’에 가까웠다.그 사실이 너무도 명확하게 떠오르자 성유리는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하지만 그녀의 입꼬리는 너무 굳어 있어서 한참이나 애써도 겨우 떨리는 듯 올라갈 뿐, 미소라고 볼 수도 없었다.거울 속에 비친 성유리의 모습에서 제일 잘 보이는 건 붉게 충혈된 눈동자였다.그러나 눈물은 흐르지는 않았다.왜냐하면 성유리 또한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눈물이라는 건 자신을 아끼는 사람 앞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955화

    그때의 성유리는 진심으로 감동했고 더없이 행복했다.그 순간만큼은 박한빈의 모든 무심함과 냉랭함을 다 용서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하지만 지금의 성유리는 알게 됐다.자신이 박한빈에겐 그저 하나의 장난감이었고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처럼 하찮은 존재였다는 걸.성유리가 처음으로 받은 단 하나의 선물, 그건 결국 성유정이 필요 없다고 내버린 사은품일 뿐이었다.박한빈의 아내는 성유리다.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그녀의 일상에 관심을 가져준 적이 없었고 단 한 번도 성유리의 생각을 진심으로 존중해준 적이 없었다.그러니 성유리가 팔찌를 들고 박한빈에게 보여줬을 때 그렇게 놀란 눈빛을 보였던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그건 성유리가 박한빈의 얼굴에서 본 몇 안 되는 감정의 변화였다.기뻐하는 성유리를 보며 박한빈은 속으로 비웃었을 것이다.이 여자 참 어이없을 정도로 순진하다고, 이 정도 선물에 저렇게 감격하는 바보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박한빈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됐다.그저 그런 사소한 물건 하나면 성유리는 감동해서 눈물을 흘릴 테니까.그녀의 감정과 진심은 박한빈에게 그렇게나 값싸고 하찮은 존재였다....성유정은 돌아오긴 했지만 저녁 식사는 그들과 함께하지 않았다.자신의 물건을 놓고 가서 잠깐 들른 것뿐이라며 떠났고 그 말을 믿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박한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성유리 옆자리에 앉았다.박씨 저택의 주방은 매우 컸다.식사를 하는 사람은 네 명뿐이었지만 여전히 지름 2미터 가까이 되는 원형 테이블을 사용했다.성유리는 자신의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오늘 박한빈이 평소보다 더 가까이 앉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너무 가까워서 박한빈의 향수 냄새가 또렷하게 느껴질 정도였다.그 향은 성유리에게도 익숙한 냄새였다.왜냐하면 그것은 조금 전 성유정이 박한빈을 껴안으며 남긴 향기였으니까.고개를 숙였을 때 성유리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텅 빈 손목뿐이었다.그 위에 끼고 있던 팔찌는 이미 그녀가 스스로 끊어내 버린 상태였다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954화

    방안의 보석을 다 둘러본 뒤, 김서영은 저녁 준비 상황을 보러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성유리는 화장실에 들렀다.손을 씻고 나오는 순간 조금 전 먼저 떠났던 성유정이 다시 돌아와 있는 걸 보게 됐다.지금 그녀는 정원에 서 있었는데 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바로 박한빈이었다.성유정은 눈이 벌겋게 충혈된 채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 비록 성유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지만 작게 떨리는 어깨와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한 눈물만으로도 충분히 짐작이 갔다.박한빈은 성유리 쪽을 등지고 서 있었기 때문에 그의 표정이나 반응은 볼 수 없었다.그런데도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그 장면은 어쩐지 너무 자연스럽고 심지어 눈이 아릴 정도로 잘 어울렸다.성유리는 이제 그만 보고 얼른 돌아서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마치 스스로를 학대하듯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두 사람을 뚫어져라 바라봤다.그리고 이내 성유정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성유정이 팔을 뻗어 박한빈을 끌어안으려는 순간 성유리는 더 이상 가만히 지켜볼 수 없었다.그녀는 마치 도둑처럼 급히 몸을 돌렸고 다급한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사모님, 어디 안 좋으세요?”가사도우미가 가장 먼저 성유리에게서 이상함을 감지했다.성유리는 입술을 꾹 깨물고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목소리를 냈다.“괜찮아요.”“안색이 많이 안 좋아 보이세요. 몸이 불편하신가요?”“아니에요. 그냥... 급히 움직였더니 좀 숨이 차네요. 조금만 쉬면 괜찮을 거예요.”도우미가 또 뭔가 말하려던 그때, 성유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언니.”그 순간, 성유리의 몸이 바짝 굳었지만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았다.성유정은 전혀 개의치 않은 듯, 성큼성큼 걸어와 성유리의 손을 꼭 잡았다.“아까는 내가 잘못했어. 갑자기 들은 소식이라 순간 좀 당황했나 봐.”“언니가 임신했다니... 나 진심으로 너무 기뻐. 언니랑 형부, 꼭 행복해야 해.”성유정의 연기는 늘 어릴 때부터 완벽했다.지금 이 순간, 그녀의 얼굴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953화

    성유정은 박한빈과 성유리의 결혼은 그저 잠깐의 임시방편일 뿐이라고 확신했었다.시간이 지나 어머니가 자신과의 관계를 받아들이게 되면 성유리와 이혼하고 결국 자신 곁으로 돌아올 거라고.그런데 지금 이건... 도대체 뭐란 말인가? 성유리가 임신을 했다는 소식은 진짜 믿고 싶지가 않았다.그들이 정말 한 침대에 누워 잠을 자는 장면을 떠올리자 성유정은 소리 지르고 싶을 만큼 미쳐버릴 것 같았다.아무리 애써 눌러도 눈가는 빨갛게 물들고 목소리는 떨렸으며 얼굴에는 힘들게 억누른 감정이 일그러진 채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성유리는 그런 성유정을 오랫동안 보고 있다 결국 조용히 입을 열었다.“고마워.”그때, 성유정이 김난희에게 얼버무리듯 말했다.“할머니, 저... 생각해 보니 급한 일이 있어서요. 먼저 가볼게요.”이 자리에 성유정은 더는 머물 수 없었다.그래서 김난희에게도 짧게 인사만 남긴 뒤,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집을 나섰다.“쟤 왜 저래?”김난희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러곤 성유리를 돌아보며 말했다.“어쨌든 지금 너한테 가장 중요한 건 아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는 꼭 지켜야 해, 알겠니?”말투엔 여전히 집안 어르신의 권위가 잔뜩 실려 있었는데 마치 아이를 낳는 것이 성유리에게 내려진 대단한 영광이라도 되는 듯한 태도였다.하지만 성유리는 이제 그런 태도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렇기에 몇 번 꾹 참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김서영이 곧 화제를 돌렸다.“며칠 전에 새로 들인 보석이 있는데 같이 올라가서 좀 볼래?”성유리는 김서영의 말에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나섰다.“임신 초기 석 달이 제일 중요해.”계단을 오르며 김서영이 말했다.“원래는 조용히 넘기려 했는데 이젠 아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비밀로 하는 것도 의미가 없겠더라.”“네 일도... 요즘은 좀 줄이는 게 좋겠어. 내가 사람 몇 명 골라서 보낼게. 하루 세 끼 챙겨주고 매일 태아 심장박동이랑 혈압 체크도 해줄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952화

    “유정이 왔니?”성유정은 밥을 얻어먹으러 왔다고 말했지만 김난희는 그래도 너무 반가운지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그리고 성유정 또한 자연스레 김난희의 팔짱을 꼈는데 그 모습이 꼭 진짜 손녀처럼 친밀해 보였다.그러다 성유정은 성유리도 자리에 있는 걸 발견하곤 먼저 인사를 건넸다.“언니도 와 있었네?”성유리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아, 맞다. 오늘이 음력설이지.”성유정은 말하며 자신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요즘 졸업 준비하느라 너무 정신이 없어서 그걸 깜빡했네.”“별일도 아닌데 잘 왔다. 저녁 같이 먹자.”김난희가 성유정의 말에 바로 대답했고 그녀도 군말 없이 수긍했다.그러다 성유리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는 걸 본 성유정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다가가 보려고 했다.하지만 그보다 먼저 김난희가 성유정을 잡아끌며 말했다.“조심해라. 너희 언니 지금 아주 귀하신 몸이시다.”그 말은 진심인지 빈정거림인지 알 수 없었지만 성유정은 순간 멈칫하며 무심코 물었다.“왜요?”김서영이 입술을 다물고 무언가 말하려는 찰나, 김난희가 먼저 나섰다.“어이구, 바보야! 왜겠니? 당연히 네 언니가 임신했으니까 그렇지.”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성유정의 얼굴에 띠고 있던 웃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제자리에 얼어붙은 듯 멍하니 서 있던 성유정은 저도 모르게 두 주먹을 꽉 쥐었다.‘임신? 임신했다고? 언니가... 진짜 임신한 거야? 그럴 리가 없는데?’‘한빈 오빠는 분명 언니를 좋아하지 않았잖아. 엄마 강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결혼한 거 아니었어? 두 사람의 결혼은 명목뿐인 관계라고... 분명히 언니가 그때 인정했었는데?’수많은 생각이 들어 머릿속은 복답했지만 성유정의 시선은 성유리에게 고정돼 있었다.‘이건 너무 갑작스러운 거잖아!’성유정은 가슴 깊숙한 곳을 누군가 날카로운 칼로 찌른 것처럼 아팠고 숨이 막힐 듯한 분노가 치밀었다.그래서 성유리를 바라보는 눈빛에도 그 감정이 그대로 드러났다.표정 관리를 할 틈도 없이 그 눈빛엔 마치 성유리를 갈기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951화

    오늘 밤 박한빈은 꽤 일찍 집에 돌아왔다.성유리가 저녁을 먹으려고 아래층으로 내려왔을 때, 평소와 달리 박한빈이 집에 있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발걸음을 멈췄다.하지만 박한빈은 태연하게 그녀를 불렀다.“밥 먹자.”그제야 성유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네.”결혼한 이후, 두 사람이 이렇게 같이 저녁을 먹는 건 손에 꼽을 정도였다. 물론 매달 한 번씩 박씨 저택에 돌아갈 때면 그들도 함께 식사를 하곤 했다.그렇지만 성유리가 말하는 건 지금처럼 단둘이 있는 상황이었다.비록 아침에 성유정이 그녀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지만 지금 박한빈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성유리는 참 기뻤다.그녀가 바라는 건 사실 정말 많지 않았다.이렇게 박한빈의 곁에 앉아 있을 수 있고 박한빈이 자신을 위해 작은 자리를 내어주며 조금이나마 함께 있어 줄 수 있다면 그걸로 이미 충분히 행복했다.그래서 성유리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저녁을 먹었고 결국 기다리다 못한 박한빈이 먼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일이 좀 있어서 먼저 일어날게. 넌 천천히 먹고 있어.”그 말을 끝으로 박한빈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그는 성유리에게 대답하거나 반응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고 그대로 자리를 떠나버렸다.홀로 남겨진 성유리는 그대로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박한빈은 무언가 생각난 듯 다시 돌아왔다.그리고 이내 작은 상자를 성유리 앞에 내려놓았다.“선물.”예상치 못한 상황에 성유리는 곧장 고개를 들었다.지금 성유리의 눈은 반짝였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박한빈을 바라보았다.성유리의 반응이 너무 컸던 탓인지 박한빈의 눈빛도 순간 흔들렸다.“저... 주시는 거예요?”성유리가 묻고 나서야 박한빈이 정신을 차린 듯 짧게 대답했다.“응.”“고마워요.”성유리는 옅은 미소를 지었고 입꼬리가 올라가며 눈매도 부드럽게 휘어졌다.원래도 예쁘고 화사했던 얼굴이 그 순간 더욱 생기 넘치게 변했다.박한빈은 너무 아름다운 성유리의 모습을 보며 무의식중에 눈을 가늘게 떴다.그와 눈이 마주치는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950화

    “언니!”모든 일이 끝난 후, 성유리가 저택을 떠나려 할 때 성유정의 목소리가 갑자기 뒤에서 들려왔다.성유정은 성유리의 손을 잡고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엄마는 언니가 걱정돼서 그런 거야. 그 방법이 조금 틀렸을 수도 있지만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마.”성유리는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성유정은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걱정 마. 언니랑 한빈 오빠... 아니, 형부 쪽은 내가 잘 설득해 볼게. 둘이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잖아. 형부는 원래 언니한테 별다른 감정이 없었으니까 이런 일은 서두를 필요 없어. 그렇지?”성유정은 정말 진심인 듯 보였지만 그 말속에 성유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 박한빈이 자신에게 감정이 없다는 것을 계속 들먹였다.하지만 성유리는 굳이 짚고 넘어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성유정의 눈을 잠시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고마워.”“나는 언니 동생이니까 고맙다는 말은 하지 마.”성유정은 성유리의 팔짱을 끼며 계속 말했다.“오늘 별일 없지? 우리 둘이 쇼핑이라도 할까?”“아니, 몸이 좀 안 좋아서 쉬고 싶어.”“그렇구나. 원래는 언니랑 가면 형부랑 안 가려고 했는데...”성유정은 끼고 있던 목걸이를 보여주며 말했다.“이거 봐. 형부가 지난번에 사준 건데 2주도 안 돼서 고장 났어. 그래서 오늘 매장에 가서 제대로 얘기해야 돼.”성유리는 입술을 오므리고 있다 성유정에게 물었다.“그걸 왜 나한테 말해?”“언니랑 형부는 부부 사이잖아. 그럼 매장 사람들도 언니를 알 거야. 그리고 형부 카드도 언니한테 있는 거 아니야?”“나한테 없어.”성유리는 단호하게 대답했고 성유정은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하자 실망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렇구나. 그럼 난 먼저 가볼게.”성유리는 더 이상 성유정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바로 돌아서서 떠났다.차가 얼마나 달렸을까, 그녀는 비로소 꽉 쥐고 있던 두 주먹을 풀었는데 손바닥에는 이미 손톱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그 자국이 언제 남았는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949화

    성유정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환하게 웃으며 성유리를 한번 쓱 쳐다보았다.그 눈빛은 겉으로 보기엔 평온해 보였지만 성유리의 눈엔 조금은 도발적인 눈빛으로 보였다.성유리는 성유정의 눈빛의 의미를 잘 알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오히려 성유정이 나타난 것을 감사하게 여겼다.짧은 시간이었지만 윤청하와 점점 서먹해졌기 때문이다. 필경 수년간 엄마로서 윤청하는 성유리에게 애정을 준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그래서 성유정이 등장하자 성유리는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성유리는 성유정의 눈빛을 무시하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성유정은 눈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여전히 방금 전 장면이 마음에 남았는지 식사 중에도 윤청하에게 계속해서 무슨 좋은 일이 있었는지 물어봤다.“그건 신경 쓰지 마. 어차피 나중에 알게 될 거야.”윤청하는 태연하게 대답했고 성유리는 그녀가 이 사실을 성유정에게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그러나 식사를 마친 후 윤청하는 성유리에게 한약 한 그릇을 준비해 주었다.“이건 네 몸을 위한 거야.”윤청하가 계속 말했다.“내가 특별히 좋은 것만 넣었어.”성유리는 윤청하가 부엌에서 뭔가를 바삐 준비하던 이유가 바로 이 한약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아차렸다.그리고 이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물밀듯 밀려왔다.감동을 받은 걸까? 어쩌면 오랜만에 느껴본 모성애 때문에 멍해졌을 수도 있지만 성유리는 잘 알고 있었다. 이 사랑이 순수하지 않다는 것을.윤청하가 원하는 것은 그저 성유리의 뱃속 아이가 성씨 가문과 박씨 가문의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주는 것뿐이었다.“저는...”성유리는 거절하려 했지만 윤청하가 그녀의 말을 뚝 끊어버렸다.“그냥 내 말 들어. 너 지금 너무 말랐어. 임신...”윤청하는 더 말을 이어가려 했지만 성유정의 눈치를 본 후 빠르게 말을 바꿨다.“그건 쉬운 일이 아니야. 먼저 네 몸을 잘 챙기고 난 다음에 아이를 가질 생각을 해야지.”성유리는 그 한약을 마시고 싶지 않았다. 그 약은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