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아줌마도 그런 거야? 그치만 아줌마는 아직 젊잖아!”“맞아... 아줌마 정말 젊지.”그 말을 하는 성유리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려왔다.성하늘은 그런 성유리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물었다.“그럼 난 이제 다시는 아줌마 못 보는 거야?”“맞아...”“그럼 엄마는 오늘 어디 가?”“엄마는... 아줌마를 마지막으로 배웅해주러 가는 거야.”“나도 같이 가고 싶어.”성하늘이 말했다.성유리는 그런 아이의 부탁을 거절하고 싶었다.사하나의 부모님이 모녀의 참석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사하나 부모의 원망을 성유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지만 성하늘에게 굳이 그런 상황을 보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성하늘에게 ‘사하나를 죽였다’라는 오명을 씌우고 싶지는 않았다.하지만 사하나는 성하늘의 친한 아줌마였다.그녀는 성하늘의 모든 성장 과정을 곁에서 지켜봐 왔다.때때로 성하늘은 성유리보다 사하나와 더 가깝게 지내기도 했다.그리고 사하나는 그런 성하늘을 생명의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냈다.만약 죽은 후에도 바깥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사하나 역시 성하늘이 다시 한번 자신을 불러주길 원하지 않을까?“같이 가자.”생각 정리를 마친 성유리가 성하늘에게 말했다.“하지만 거기 있는 사람들이 우리를 환영하지 않을지도 몰라. 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든 신경 쓰지 않기로 약속해. 할 수 있지?”성하늘이 고개를 끄덕였다.성유리는 입술을 꽉 깨물며 말했다.“아줌마가 하늘이 정말 많이 사랑하는 것도 알지?”“응, 알아.”“그러니까 아줌마도 하늘이가 항상 행복하길 바랄 거야.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절대 휘둘리면 안 돼, 알겠지?”“응.”성하늘이 아주 확고한 표정으로 대답했다.하지만 성유리는 사하나의 가족들이 그들 모녀에게 품은 원한을 과소평가하고 말았다.그들은 성유리와 성하늘이 장례식장 문턱을 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성유리와 성하늘이 함께 차에서 내리는 모습이 보이자마자 사하나의 가족들이 달려와 두 사람을 막아섰다.
성유리는 언제 박한빈이 나타났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그리고 그가 언제 자신을 데리고 떠난 건지도 알 수 없었다.하지만 류수미의 그 절망적인 모습은 계속해서 그녀의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흔히 사람들이 말하곤 한다. 이 세상에 진정한 공감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하지만 그 순간, 성유리는 같은 어머니로서, 딸을 세상 전부로 여기는 처지에서 그녀가 느끼는 절망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류수미가 성하늘을 바라보며 왜 죽은 사람이 성하늘이 아니냐고 따졌을 때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그러던 성유리는 문득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정말 다행히도... 성하늘이 살아남았다고 말이다.하지만 그 생각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사라졌다.뒤늦게 정신을 차린 성유리는 당장이라도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내려치고 싶었다.사하나는 그녀의 가장 절친한 친구였다.그녀가 가장 힘들 때, 제일 많은 도움을 주었던 사람 역시 사하나였다.그런데 어떻게 이토록 이기적으로 굴 수 있는 걸까?어떻게 감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걸까?성유리는 자신이 너무 매정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만약 사하나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분명 달려와 뺨 두 대를 때려줬을 것이다.그리고 언니와 친구가 된 게 후회된다고, 언니랑 친구가 되는 게 아니었다고 하소연할 것이다.그 말이 맞다. 만약 처음부터 성유리와 사하나가 친구가 아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그렇다면 적어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고, 자신 역시 이 일에 연관되지는 않았을 텐데...성유리는 어쩌면 자신이 류수미의 말대로 정말 재수 없는 존재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성유리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그녀 때문에 힘들어지고, 피해를 보았다.그녀에게 잘해줄수록 더 큰 불행을 겪었다.양어머니가 그랬고, 사하나도 그랬다.그러니, 이 모든 것은 성유리 탓이었다.성유리가 그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든 것이다.이런 생각들이 성유리의 머릿속을 끊임없이 맴돌며 그녀를 끈질기게 괴롭혔다.그러다가 성유리는 지금 자신
박한빈은 말을 꺼내며 반대쪽으로 가 물 한 잔을 따라내더니 체온계를 건넸다.하지만 성유리는 그것을 받지도 않고 물었다.“하늘이는 어디 있어?”“우리 엄마한테 맡겼어.”그 말에 성유리는 불만스러운 듯 눈살을 찌푸리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가려 했다.그러자 박한빈이 그런 성유리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너 지금 아프잖아. 지금 이 몸 상태로는 애 못 돌봐. 우리 엄마가 돌봐 주고 있다니까? 설마 못 믿는 거야?”“나 지금 괜찮아.”성유리가 단호하게 말했다.“열도 다 내렸고, 하늘이도 내가 돌볼 거야.”“거울이라도 한 번 보고 얘기하지 그래?”“내가 어떤 모습이든 너랑 무슨 상관인데!”성유리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하며 박한빈을 밀어내려 했다.그때, 박한빈이 물었다.“방금 하나 씨 꿈꾼 거지?”그 이름이 박한빈의 입에서 나오자 성유리는 그 자리에 멍하니 얼어붙었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박한빈을 바라보았다.박한빈 역시 성유리의 눈빛을 그대로 받아내며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장례식 날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기억해?”“무슨... 무슨 장례식?”성유리가 되물었다.“누구 장례식인데?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알잖아, 하나 씨 장례식 말이야.”박한빈은 성유리에게 조금도 빠져나갈 구멍을 주지 않았다.“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잊은 거야?”“안 잊었어!”성유리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서하나 엄마나 우릴 쫓아냈던 거? 그분이 나한테 재수 없는 년이라고 욕한 거?”“나도 알아! 나 재수 없는 년이야! 나한테 오는 사람들, 날 아껴주는 사람들은 다 불행해져, 더 하면 죽기까지 해! 그 와중에도 난 살아남은 게 우리 딸이라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내가 이렇게 이기적인 사람이야! 이제 만족해?”성유리의 목소리는 날카로웠고 크게 떠진 두 눈의 핏줄은 금방이라도 피가 터질 듯 한껏 솟아 있었다.성유리를 바라보던 박한빈이 말했다.“그게 끝이 아니야. 더 생
성유리 역시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사하나는 이제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최근 들어 그녀는 계속해서 사하나의 목소리를 들었다.때로는 평소처럼 성유리와 대화를 나누고 최근 도는 소문들을 들려주며 재잘거렸다.그러다가 또 때로는 울면서 왜 자신을 구하지 않았냐며 따졌다.또 가끔은 다 자신이 원해서 한 일이니 너무 죄책감 느끼지 말라고도 했다.그러다가도 성유리에게 배은망덕한 사람이라는 말을 하며 왜 자신을 죽게 내버려 두었냐고, 왜 하필 자신이 죽어야 했냐며 원망했다.사하나의 모습과 목소리는 끊임없이 성유리의 눈앞에 나타났다.그것은 환각도 아니었다.성유리가 손만 뻗으면 사하나가 정말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하지만 사하나는 분명 죽었다.박한빈은 그런 성유리를 심리상담사에게 데려갔다.하지만 성유리는 심리상담사의 앞에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사하나라는 이름이 언급되는 것을 거부하면서도 계속해서 박한빈에게 그녀의 부모를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그들이 자신을 원망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들을 만나고 싶었다.차라리 사하나의 부모에게 원망 섞인 욕설을 들어야만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해질 것 같았다.“며칠만 기다려. 날씨가 좋아지면 그때 데려다줄게.”박한빈이 대답했다.하지만 성유리는 그런 박한빈을 바라보며 말했다.“거짓말이잖아요.”“아니야.”“저 안 데려다줄 거잖아요. 맞죠?”“난 약속한 건 꼭 지키는 사람이야.”박한빈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결국, 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았다.이곳은 박한빈이 새로 구한 집이었고 성유리도 이 사실을 며칠 전에야 알게 되었다.지금 그녀의 시야에 들어오는 정원에는 푸른 나무들이 서 있었다.한겨울인데 왜 나뭇잎들이 붙어있는 거지?설마... 벌써 새해가 된 건가?그럼 사하나가 세상을 뜬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난 걸까?성유리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지만 굳이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그저 피곤한 표정으로 눈을
박한빈의 말에 하늘이의 손이 뚝 멈추더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우리 엄마 어디로 데려갔어요?”하늘이가 물었다.“엄마 보고 싶어?”되묻는 박한빈의 말에 하늘이는 침묵할 뿐이었다.“아니면 화난 거야?”그러자 박한빈이 다시 말했다.“그날 엄마가 한 일 때문에?”“아니거든요!”이번에 하늘이 금세 대답했지만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저는 절대 엄마한테 화내지 않아요.”“그냥... 엄마가 이젠 나를 싫어하나 봐요.”아이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박한빈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엄마가 널 싫어할 리가 없잖아.”하지만 하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분명, 사하나의 장례식 날 벌어진 일이 하늘에게 큰 상처로 남아 있는 게 분명했다.하늘이가 알던 엄마는 어릴 적부터 자신을 지켜주던 사람이었고 무슨 잘못을 해도 크게 나무라지 않았던 엄마였다.그러나 그날 보인 엄마의 모습은 너무 낯설었기에 하늘이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왜 사람들이 자신이 죽어야 한다고 말했는지, 그리고 왜 믿었던 엄마마저 그렇게 생각했는지.“엄마가 지금 좀 아파서 그런 거야.”박한빈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엄마는 가장 친한 친구를 잃었어.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거야. 그래서 지금 병이 난 거고.”그 말에 하늘이는 고개를 돌려 박한빈을 바라봤다.“그러니까 엄마를 너무 탓하지 마.”박한빈은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지금까지는 네가 엄마의 보호를 받았잖아. 이번에는 네가 엄마를 보호해 주면 안 될까?”“어떻게... 보호해요?”“엄마를 도와줘.”박한빈이 말했다.“엄마가 병을 이겨낼 수 있게 돕고 깊은 어둠속에서 나올 수 있게 도와줘. 그러면 되는 거야.”하늘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그를 쳐다봤는데 마치 어떻게 해야 할지 묻는 듯한 눈빛이었다.그 모습을 본 박한빈은 미소를 지으며 계속 말했다.“그냥 엄마를 행복하게 해 주면 돼. 이건 네가 할 수 있는 일이잖아. 그렇지?”하늘은 아무
다음 날, 날씨는 너무도 화장했다.박한빈은 다른 사람더러 성유리를 정원으로 데려가 햇볕을 쬐도록 했다.성유리는 이 제안에 별다른 이의 없이 따랐지만 여전히 기운 없는 모습이었다.그러던 중, 하늘이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엄마!”그 목소리를 듣자 성유리는 온몸이 덜덜 떨려왔다.그리고는 재빨리 고개를 휙 돌렸다.하늘이는 예쁜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단정하게 땋은 채 흥분한 얼굴로 성유리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하지만 성유리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그 행동은 마치 무언가 무서운 존재를 본 것처럼 다급했다.하늘이는 그 모습을 보고 멈칫하더니 점차 발걸음을 멈추었다.그리고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성유리를 바라보았다.성유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그때 박한빈이 빠르게 하늘이 곁으로 다가와 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하늘이의 눈가는 여전히 빨갰지만 애써 정신을 다잡으며 눈물을 닦아냈다.그리고 다시 성유리 쪽으로 한 걸음씩 걸어갔다.성유리는 계속 뒤로 물러서고 싶었지만 하늘이가 상처받을까 봐 애써 자신의 정신을 붙들었다.그러던 중, 하늘이가 바로 앞까지 다가와 다시 한번 성유리를 불렀다.“엄마...”그 목소리에는 이미 울음이 섞여 있었다.성유리는 하늘이를 잠시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하지만 하늘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엄마, 나 좀 안아줘. 응?”성유리는 아이의 말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지만 하늘이는 기다리지 않고 손을 뻗어 그녀를 꼭 안았다.아직 하늘이의 손은 작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온 힘을 다해 성유리를 감싸안았다.그러자 성유리의 굳어 있던 몸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엄마, 많이 보고 싶었어.”하늘이가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엄마랑 같이 있고 싶어. 엄마, 나 버리지 마. 응?”“나 이제 까불지도 않고 말도 잘 들을게. 이모랑 스키 타러 가지도 않을게. 나...”하늘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성유리의 표정이
아마 그것 때문인지, 박한빈은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오늘 날씨 참 좋네요.”아침 식사를 하는 와중, 성유리가 박한빈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저 오늘 사씨 가문에 가고 싶어요. 가도 괜찮을까요?”박한빈은 처음에 성유리가 자신에게 말을 걸자 기뻐했지만 이어진 그녀의 말에 얼굴 표정이 굳어졌다.그러나 성유리는 진지한 눈빛으로 박한빈을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전에 약속했잖아요. 아니면 저한테 거짓말한 거예요?”“거짓말한 적 없어.”박한빈은 대답하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하지만 사씨 가문에 가려는 이유가 뭐지?”“그분들에게 정식으로 사과를 해야 해요.”성유리가 대답했다.“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게 꼭 사과일까?”박한빈은 최근 그녀가 겨우 안정을 되찾은 상황에서, 어떠한 돌발 상황도 발생하지 않기를 바랐다.더구나 지금의 사씨 가문은 분명 성유리를 미워하고 있을 것이 뻔했다.마치 박한빈의 이런 생각을 읽은 듯, 성유리가 말을 덧붙였다.“물론 그분들이 저를 용서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알아요. 하지만... 저도 제 마음의 짐을 조금 덜어내고 싶어요.”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계속 말했다.“그동안... 진심으로 감사했어요.”그 말에 박한빈은 입술을 오므리다 천천히 대답했다.“생각해 볼게.”그러자 성유리는 단호하게 말했다.“저는 오늘 꼭 가야겠어요. 만약 동의하지 않으신다면 오늘 바로 이곳에서 나갈래요. 원래... 여기에 머물 이유도 없으니까요.”그녀의 말에 박한빈은 이를 악물었다.“지금... 협박하는 건가?”“그렇게 느끼신다면 협박 맞아요.”성유리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대답했다.그녀의 태도에 박한빈은 깊게 숨을 들이쉰 뒤 말했다.“좋아. 하지만 지금 바로는 안 돼. 적어도 사씨 가문에 미리 연락은 해야 하니까.”“전 오늘 꼭 가야겠어요.”성유리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박한빈은 그녀가 자신이 동의할 것임을 확신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럼에도 결국 어쩔 수 없이 성유리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그는 더 이상 말
성유리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햇빛을 본 날이 언제였는지도 잊어버렸다.거리의 빨간 장식들과 설렘이 가득한 분위기를 보고서야 깨달았다. 새해가 다가오고 있었다는 것을.그렇다면 사하나가 세상을 떠난 지도 벌써 한 달이 넘은 셈이었다.성유리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사씨 가문 저택은 너무 조용했다.성유리는 이곳에 몇 번 와본 적이 있었다.가끔 사하나가 하늘이를 데리고 이곳에서 놀 때면, 성유리는 직접 하늘이를 데리러 오곤 했다.그럴 때마다 성유리가 문밖에 도착하기도 전에 하늘이가 안에서 즐겁게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류수미는 그런 하늘이를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사하나에게 빨리 결혼하라고 재촉하곤 했다.그리고 사하나는 항상 못마땅하다는 듯 엄마인 류수미의 말에 반박했다.류수미는 겉으로는 꾸짖는 말을 했지만 진심으로 딸을 나무라는 적은 없었다.성유리는 그녀가 사하나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고 있었다.그래서 나중에 사하나가 결혼하기 싫다고 고집했을 때도 류수미는 끝내 그녀에게 강요하지 않았다.하지만 그 깊은 사랑은 사하나의 죽음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성유리.”박한빈의 목소리가 갑자기 들려왔다.그러면서 그는 성유리의 손을 꼭 잡았다.갑작스러운 행동에 성유리는 멈칫하며 고개를 돌렸고 박한빈은 얼굴을 찌푸린 채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저 괜찮아요.”성유리가 금세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 뒤, 차 문을 열고 내리자 박한빈도 곧 따라 내렸다.박한빈이 미리 사씨 가문의 가족들에게 방문을 알렸기에 집안의 도우미들이 매우 공손하게 그들을 맞아주었다.류수미와 달리 사민혁은 비교적 침착하고 이성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그럼에도 그는 웃지 않았다.단지 고개를 살짝 끄덕일 뿐이었다.그의 옷차림은 여전히 깔끔하고 단정했지만 나이가 훨씬 더 들어 보였다.소파에 앉아 있을 때, 사민혁의 등이 다소 굽어 있는 것이 눈에 확 띨 정도였다.“사모님은 어디에 계세요?”성유리가 조용히 물었다.“위층에 있다. 몸 상태가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성유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고개를 숙인 채 눈을 내리깔았다. 마치 이 모든 일이 자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인 것처럼.박한빈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그리고 그의 시선은 갑자기 성유리의 손목으로 향했는데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역시 이럴 줄 알았어.’박한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서영이 계속 말을 하고 있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전혀 없었다.그는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갔고 차에 올라탄 후 곧바로 운전사에게 시동을 걸라고 지시했다.운전기사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고개만 끄덕인 뒤, 빠르게 출발했다.웅장한 저택은 금세 뒤처졌고 몇 개의 거리를 지나니 복잡한 도시가 펼쳐졌다.박한빈은 그 도시의 반짝이는 네온사인들을 바라보며 마음속에서 화염이 치솟는 느낌을 받았다.그는 너무 답답한 마음에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넥타이를 풀었다.그때 에릭의 전화가 걸려 왔고 박한빈은 답답한 마음을 풀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전화를 받았다.이내 들려오는 에릭의 말에 박한빈은 바로 입꼬리를 쓱 올렸지만 운전기사가 백미러를 한 번이라도 쳐다봤다면 알았을 것이다.박한빈은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 속에는 어떤 감정도 없어 마치 지옥에서 온 악마처럼 보였다.“들어보니까 꽤 흥미롭네.”박한빈이 대답했다.“나도 끼워줘.”“그럼 언제 올 건데?”에릭은 묻다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멈칫했다.“아, 맞다, 너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지? 신혼부부를 떼놓으면 와이프가 싫어하는 거 아니야?”“쯧, 내가 결혼하지 말라고 했지? 대체 왜 그런 결정을 내린 건데? 잘 됐다. 지금 아주 그냥 잡혀 살고 있겠지.”박한빈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세상에서 누가 날 가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그리고 만약 아버지의 유언이 아니었으면 내가 걔랑 결혼했을까?”박한빈의 대답에 에릭은 매우 만족스러워하며 말했다.“빙고! 이래야 박한빈이지. 그럼 요 며칠
성유리는 처음엔 물밀듯 밀려오는 감정을 억누르려고 했다.하지만 박한빈이 그녀 앞에 국 한 그릇을 내려놓으며 손을 뻗는 순간, 풍겨온 성유정의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그래서 성유리는 그대로 폭발해 버렸다.그녀는 입을 틀어막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갔다.사실 성유리는 저녁도 거의 먹지 못했기에 토할 것도 없는 빈속에서 나오는 건 위액뿐이었다.세면대에 몸을 기댄 채 서 있던 성유리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너무 힘을 준 탓에 세면대를 짚고 있는 손이 창백할 정도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사모님, 괜찮으세요?”문밖에서 가사도우미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성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그러자 도우미가 문을 두드리다 옆에 있는 동료에게 말을 걸었다.“설마 무슨 일 생긴 거 아니겠지?”“임신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심하게 입덧을 해? 앞으로 어쩌려고.”“그러게 말이야.”“근데 뭐... 이해는 가지. 복 많은 도련님의 아기를 가지려면 그만한 고생은 해야 하지 않겠어?”그들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딱 성유리가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일부러 비꼰 건 아닐 수도 있지만 이런 이야기는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도우미들도 눈이 있으니 이 집에서 성유리가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 당연히 느끼고 있을 것이다.집안 어르신인 김난희가 성유리를 싫어하는 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었고 김서영 역시 그저 고인이 된 남편의 뜻을 따라 돌봐주는 척하는 것뿐이라는 것을.박한빈, 그는 아예 성유리를 아내라고 생각조차 한 적이 없었고 그에게 성유리는 한낱 ‘도구’에 가까웠다.그 사실이 너무도 명확하게 떠오르자 성유리는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하지만 그녀의 입꼬리는 너무 굳어 있어서 한참이나 애써도 겨우 떨리는 듯 올라갈 뿐, 미소라고 볼 수도 없었다.거울 속에 비친 성유리의 모습에서 제일 잘 보이는 건 붉게 충혈된 눈동자였다.그러나 눈물은 흐르지는 않았다.왜냐하면 성유리 또한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눈물이라는 건 자신을 아끼는 사람 앞
그때의 성유리는 진심으로 감동했고 더없이 행복했다.그 순간만큼은 박한빈의 모든 무심함과 냉랭함을 다 용서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하지만 지금의 성유리는 알게 됐다.자신이 박한빈에겐 그저 하나의 장난감이었고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처럼 하찮은 존재였다는 걸.성유리가 처음으로 받은 단 하나의 선물, 그건 결국 성유정이 필요 없다고 내버린 사은품일 뿐이었다.박한빈의 아내는 성유리다.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그녀의 일상에 관심을 가져준 적이 없었고 단 한 번도 성유리의 생각을 진심으로 존중해준 적이 없었다.그러니 성유리가 팔찌를 들고 박한빈에게 보여줬을 때 그렇게 놀란 눈빛을 보였던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그건 성유리가 박한빈의 얼굴에서 본 몇 안 되는 감정의 변화였다.기뻐하는 성유리를 보며 박한빈은 속으로 비웃었을 것이다.이 여자 참 어이없을 정도로 순진하다고, 이 정도 선물에 저렇게 감격하는 바보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박한빈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됐다.그저 그런 사소한 물건 하나면 성유리는 감동해서 눈물을 흘릴 테니까.그녀의 감정과 진심은 박한빈에게 그렇게나 값싸고 하찮은 존재였다....성유정은 돌아오긴 했지만 저녁 식사는 그들과 함께하지 않았다.자신의 물건을 놓고 가서 잠깐 들른 것뿐이라며 떠났고 그 말을 믿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박한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성유리 옆자리에 앉았다.박씨 저택의 주방은 매우 컸다.식사를 하는 사람은 네 명뿐이었지만 여전히 지름 2미터 가까이 되는 원형 테이블을 사용했다.성유리는 자신의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오늘 박한빈이 평소보다 더 가까이 앉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너무 가까워서 박한빈의 향수 냄새가 또렷하게 느껴질 정도였다.그 향은 성유리에게도 익숙한 냄새였다.왜냐하면 그것은 조금 전 성유정이 박한빈을 껴안으며 남긴 향기였으니까.고개를 숙였을 때 성유리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텅 빈 손목뿐이었다.그 위에 끼고 있던 팔찌는 이미 그녀가 스스로 끊어내 버린 상태였다
방안의 보석을 다 둘러본 뒤, 김서영은 저녁 준비 상황을 보러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성유리는 화장실에 들렀다.손을 씻고 나오는 순간 조금 전 먼저 떠났던 성유정이 다시 돌아와 있는 걸 보게 됐다.지금 그녀는 정원에 서 있었는데 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바로 박한빈이었다.성유정은 눈이 벌겋게 충혈된 채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 비록 성유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지만 작게 떨리는 어깨와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한 눈물만으로도 충분히 짐작이 갔다.박한빈은 성유리 쪽을 등지고 서 있었기 때문에 그의 표정이나 반응은 볼 수 없었다.그런데도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그 장면은 어쩐지 너무 자연스럽고 심지어 눈이 아릴 정도로 잘 어울렸다.성유리는 이제 그만 보고 얼른 돌아서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마치 스스로를 학대하듯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두 사람을 뚫어져라 바라봤다.그리고 이내 성유정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성유정이 팔을 뻗어 박한빈을 끌어안으려는 순간 성유리는 더 이상 가만히 지켜볼 수 없었다.그녀는 마치 도둑처럼 급히 몸을 돌렸고 다급한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사모님, 어디 안 좋으세요?”가사도우미가 가장 먼저 성유리에게서 이상함을 감지했다.성유리는 입술을 꾹 깨물고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목소리를 냈다.“괜찮아요.”“안색이 많이 안 좋아 보이세요. 몸이 불편하신가요?”“아니에요. 그냥... 급히 움직였더니 좀 숨이 차네요. 조금만 쉬면 괜찮을 거예요.”도우미가 또 뭔가 말하려던 그때, 성유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언니.”그 순간, 성유리의 몸이 바짝 굳었지만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았다.성유정은 전혀 개의치 않은 듯, 성큼성큼 걸어와 성유리의 손을 꼭 잡았다.“아까는 내가 잘못했어. 갑자기 들은 소식이라 순간 좀 당황했나 봐.”“언니가 임신했다니... 나 진심으로 너무 기뻐. 언니랑 형부, 꼭 행복해야 해.”성유정의 연기는 늘 어릴 때부터 완벽했다.지금 이 순간, 그녀의 얼굴
성유정은 박한빈과 성유리의 결혼은 그저 잠깐의 임시방편일 뿐이라고 확신했었다.시간이 지나 어머니가 자신과의 관계를 받아들이게 되면 성유리와 이혼하고 결국 자신 곁으로 돌아올 거라고.그런데 지금 이건... 도대체 뭐란 말인가? 성유리가 임신을 했다는 소식은 진짜 믿고 싶지가 않았다.그들이 정말 한 침대에 누워 잠을 자는 장면을 떠올리자 성유정은 소리 지르고 싶을 만큼 미쳐버릴 것 같았다.아무리 애써 눌러도 눈가는 빨갛게 물들고 목소리는 떨렸으며 얼굴에는 힘들게 억누른 감정이 일그러진 채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성유리는 그런 성유정을 오랫동안 보고 있다 결국 조용히 입을 열었다.“고마워.”그때, 성유정이 김난희에게 얼버무리듯 말했다.“할머니, 저... 생각해 보니 급한 일이 있어서요. 먼저 가볼게요.”이 자리에 성유정은 더는 머물 수 없었다.그래서 김난희에게도 짧게 인사만 남긴 뒤,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집을 나섰다.“쟤 왜 저래?”김난희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러곤 성유리를 돌아보며 말했다.“어쨌든 지금 너한테 가장 중요한 건 아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는 꼭 지켜야 해, 알겠니?”말투엔 여전히 집안 어르신의 권위가 잔뜩 실려 있었는데 마치 아이를 낳는 것이 성유리에게 내려진 대단한 영광이라도 되는 듯한 태도였다.하지만 성유리는 이제 그런 태도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렇기에 몇 번 꾹 참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김서영이 곧 화제를 돌렸다.“며칠 전에 새로 들인 보석이 있는데 같이 올라가서 좀 볼래?”성유리는 김서영의 말에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나섰다.“임신 초기 석 달이 제일 중요해.”계단을 오르며 김서영이 말했다.“원래는 조용히 넘기려 했는데 이젠 아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비밀로 하는 것도 의미가 없겠더라.”“네 일도... 요즘은 좀 줄이는 게 좋겠어. 내가 사람 몇 명 골라서 보낼게. 하루 세 끼 챙겨주고 매일 태아 심장박동이랑 혈압 체크도 해줄
“유정이 왔니?”성유정은 밥을 얻어먹으러 왔다고 말했지만 김난희는 그래도 너무 반가운지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그리고 성유정 또한 자연스레 김난희의 팔짱을 꼈는데 그 모습이 꼭 진짜 손녀처럼 친밀해 보였다.그러다 성유정은 성유리도 자리에 있는 걸 발견하곤 먼저 인사를 건넸다.“언니도 와 있었네?”성유리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아, 맞다. 오늘이 음력설이지.”성유정은 말하며 자신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요즘 졸업 준비하느라 너무 정신이 없어서 그걸 깜빡했네.”“별일도 아닌데 잘 왔다. 저녁 같이 먹자.”김난희가 성유정의 말에 바로 대답했고 그녀도 군말 없이 수긍했다.그러다 성유리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는 걸 본 성유정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다가가 보려고 했다.하지만 그보다 먼저 김난희가 성유정을 잡아끌며 말했다.“조심해라. 너희 언니 지금 아주 귀하신 몸이시다.”그 말은 진심인지 빈정거림인지 알 수 없었지만 성유정은 순간 멈칫하며 무심코 물었다.“왜요?”김서영이 입술을 다물고 무언가 말하려는 찰나, 김난희가 먼저 나섰다.“어이구, 바보야! 왜겠니? 당연히 네 언니가 임신했으니까 그렇지.”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성유정의 얼굴에 띠고 있던 웃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제자리에 얼어붙은 듯 멍하니 서 있던 성유정은 저도 모르게 두 주먹을 꽉 쥐었다.‘임신? 임신했다고? 언니가... 진짜 임신한 거야? 그럴 리가 없는데?’‘한빈 오빠는 분명 언니를 좋아하지 않았잖아. 엄마 강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결혼한 거 아니었어? 두 사람의 결혼은 명목뿐인 관계라고... 분명히 언니가 그때 인정했었는데?’수많은 생각이 들어 머릿속은 복답했지만 성유정의 시선은 성유리에게 고정돼 있었다.‘이건 너무 갑작스러운 거잖아!’성유정은 가슴 깊숙한 곳을 누군가 날카로운 칼로 찌른 것처럼 아팠고 숨이 막힐 듯한 분노가 치밀었다.그래서 성유리를 바라보는 눈빛에도 그 감정이 그대로 드러났다.표정 관리를 할 틈도 없이 그 눈빛엔 마치 성유리를 갈기
오늘 밤 박한빈은 꽤 일찍 집에 돌아왔다.성유리가 저녁을 먹으려고 아래층으로 내려왔을 때, 평소와 달리 박한빈이 집에 있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발걸음을 멈췄다.하지만 박한빈은 태연하게 그녀를 불렀다.“밥 먹자.”그제야 성유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네.”결혼한 이후, 두 사람이 이렇게 같이 저녁을 먹는 건 손에 꼽을 정도였다. 물론 매달 한 번씩 박씨 저택에 돌아갈 때면 그들도 함께 식사를 하곤 했다.그렇지만 성유리가 말하는 건 지금처럼 단둘이 있는 상황이었다.비록 아침에 성유정이 그녀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지만 지금 박한빈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성유리는 참 기뻤다.그녀가 바라는 건 사실 정말 많지 않았다.이렇게 박한빈의 곁에 앉아 있을 수 있고 박한빈이 자신을 위해 작은 자리를 내어주며 조금이나마 함께 있어 줄 수 있다면 그걸로 이미 충분히 행복했다.그래서 성유리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저녁을 먹었고 결국 기다리다 못한 박한빈이 먼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일이 좀 있어서 먼저 일어날게. 넌 천천히 먹고 있어.”그 말을 끝으로 박한빈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그는 성유리에게 대답하거나 반응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고 그대로 자리를 떠나버렸다.홀로 남겨진 성유리는 그대로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박한빈은 무언가 생각난 듯 다시 돌아왔다.그리고 이내 작은 상자를 성유리 앞에 내려놓았다.“선물.”예상치 못한 상황에 성유리는 곧장 고개를 들었다.지금 성유리의 눈은 반짝였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박한빈을 바라보았다.성유리의 반응이 너무 컸던 탓인지 박한빈의 눈빛도 순간 흔들렸다.“저... 주시는 거예요?”성유리가 묻고 나서야 박한빈이 정신을 차린 듯 짧게 대답했다.“응.”“고마워요.”성유리는 옅은 미소를 지었고 입꼬리가 올라가며 눈매도 부드럽게 휘어졌다.원래도 예쁘고 화사했던 얼굴이 그 순간 더욱 생기 넘치게 변했다.박한빈은 너무 아름다운 성유리의 모습을 보며 무의식중에 눈을 가늘게 떴다.그와 눈이 마주치는
“언니!”모든 일이 끝난 후, 성유리가 저택을 떠나려 할 때 성유정의 목소리가 갑자기 뒤에서 들려왔다.성유정은 성유리의 손을 잡고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엄마는 언니가 걱정돼서 그런 거야. 그 방법이 조금 틀렸을 수도 있지만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마.”성유리는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성유정은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걱정 마. 언니랑 한빈 오빠... 아니, 형부 쪽은 내가 잘 설득해 볼게. 둘이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잖아. 형부는 원래 언니한테 별다른 감정이 없었으니까 이런 일은 서두를 필요 없어. 그렇지?”성유정은 정말 진심인 듯 보였지만 그 말속에 성유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 박한빈이 자신에게 감정이 없다는 것을 계속 들먹였다.하지만 성유리는 굳이 짚고 넘어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성유정의 눈을 잠시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고마워.”“나는 언니 동생이니까 고맙다는 말은 하지 마.”성유정은 성유리의 팔짱을 끼며 계속 말했다.“오늘 별일 없지? 우리 둘이 쇼핑이라도 할까?”“아니, 몸이 좀 안 좋아서 쉬고 싶어.”“그렇구나. 원래는 언니랑 가면 형부랑 안 가려고 했는데...”성유정은 끼고 있던 목걸이를 보여주며 말했다.“이거 봐. 형부가 지난번에 사준 건데 2주도 안 돼서 고장 났어. 그래서 오늘 매장에 가서 제대로 얘기해야 돼.”성유리는 입술을 오므리고 있다 성유정에게 물었다.“그걸 왜 나한테 말해?”“언니랑 형부는 부부 사이잖아. 그럼 매장 사람들도 언니를 알 거야. 그리고 형부 카드도 언니한테 있는 거 아니야?”“나한테 없어.”성유리는 단호하게 대답했고 성유정은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하자 실망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렇구나. 그럼 난 먼저 가볼게.”성유리는 더 이상 성유정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바로 돌아서서 떠났다.차가 얼마나 달렸을까, 그녀는 비로소 꽉 쥐고 있던 두 주먹을 풀었는데 손바닥에는 이미 손톱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그 자국이 언제 남았는
성유정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환하게 웃으며 성유리를 한번 쓱 쳐다보았다.그 눈빛은 겉으로 보기엔 평온해 보였지만 성유리의 눈엔 조금은 도발적인 눈빛으로 보였다.성유리는 성유정의 눈빛의 의미를 잘 알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오히려 성유정이 나타난 것을 감사하게 여겼다.짧은 시간이었지만 윤청하와 점점 서먹해졌기 때문이다. 필경 수년간 엄마로서 윤청하는 성유리에게 애정을 준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그래서 성유정이 등장하자 성유리는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성유리는 성유정의 눈빛을 무시하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성유정은 눈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여전히 방금 전 장면이 마음에 남았는지 식사 중에도 윤청하에게 계속해서 무슨 좋은 일이 있었는지 물어봤다.“그건 신경 쓰지 마. 어차피 나중에 알게 될 거야.”윤청하는 태연하게 대답했고 성유리는 그녀가 이 사실을 성유정에게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그러나 식사를 마친 후 윤청하는 성유리에게 한약 한 그릇을 준비해 주었다.“이건 네 몸을 위한 거야.”윤청하가 계속 말했다.“내가 특별히 좋은 것만 넣었어.”성유리는 윤청하가 부엌에서 뭔가를 바삐 준비하던 이유가 바로 이 한약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아차렸다.그리고 이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물밀듯 밀려왔다.감동을 받은 걸까? 어쩌면 오랜만에 느껴본 모성애 때문에 멍해졌을 수도 있지만 성유리는 잘 알고 있었다. 이 사랑이 순수하지 않다는 것을.윤청하가 원하는 것은 그저 성유리의 뱃속 아이가 성씨 가문과 박씨 가문의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주는 것뿐이었다.“저는...”성유리는 거절하려 했지만 윤청하가 그녀의 말을 뚝 끊어버렸다.“그냥 내 말 들어. 너 지금 너무 말랐어. 임신...”윤청하는 더 말을 이어가려 했지만 성유정의 눈치를 본 후 빠르게 말을 바꿨다.“그건 쉬운 일이 아니야. 먼저 네 몸을 잘 챙기고 난 다음에 아이를 가질 생각을 해야지.”성유리는 그 한약을 마시고 싶지 않았다. 그 약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