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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7화

작가: 송진
“그럼 아줌마도 그런 거야? 그치만 아줌마는 아직 젊잖아!”

“맞아... 아줌마 정말 젊지.”

그 말을 하는 성유리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려왔다.

성하늘은 그런 성유리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물었다.

“그럼 난 이제 다시는 아줌마 못 보는 거야?”

“맞아...”

“그럼 엄마는 오늘 어디 가?”

“엄마는... 아줌마를 마지막으로 배웅해주러 가는 거야.”

“나도 같이 가고 싶어.”

성하늘이 말했다.

성유리는 그런 아이의 부탁을 거절하고 싶었다.

사하나의 부모님이 모녀의 참석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하나 부모의 원망을 성유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지만 성하늘에게 굳이 그런 상황을 보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성하늘에게 ‘사하나를 죽였다’라는 오명을 씌우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하나는 성하늘의 친한 아줌마였다.

그녀는 성하늘의 모든 성장 과정을 곁에서 지켜봐 왔다.

때때로 성하늘은 성유리보다 사하나와 더 가깝게 지내기도 했다.

그리고 사하나는 그런 성하늘을 생명의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냈다.

만약 죽은 후에도 바깥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사하나 역시 성하늘이 다시 한번 자신을 불러주길 원하지 않을까?

“같이 가자.”

생각 정리를 마친 성유리가 성하늘에게 말했다.

“하지만 거기 있는 사람들이 우리를 환영하지 않을지도 몰라. 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든 신경 쓰지 않기로 약속해. 할 수 있지?”

성하늘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유리는 입술을 꽉 깨물며 말했다.

“아줌마가 하늘이 정말 많이 사랑하는 것도 알지?”

“응, 알아.”

“그러니까 아줌마도 하늘이가 항상 행복하길 바랄 거야.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절대 휘둘리면 안 돼, 알겠지?”

“응.”

성하늘이 아주 확고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성유리는 사하나의 가족들이 그들 모녀에게 품은 원한을 과소평가하고 말았다.

그들은 성유리와 성하늘이 장례식장 문턱을 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성유리와 성하늘이 함께 차에서 내리는 모습이 보이자마자 사하나의 가족들이 달려와 두 사람을 막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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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유리는 도인국에서 사하나를 처음 만났던 때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성유리는 혼자 도인국으로 여행을 떠났다.그리고 사하나는 그곳에서 유학 중이었고 둘은 온라인에서 만나게 되었다. 사하는 기꺼이 성유리의 가이드가 되어주었고 그녀와 함께 여러 곳을 함께 다녀주었다.그 당시 성유리는 끝없는 자기혐오와 우울 속에 빠져있는 상태였다.하지만 사하나는 그런 성유리의 곁에서 충실히 가이드 역할을 해주었고 굳이 그녀의 사정을 묻지도 않았고, 부질없는 위로도 건네지 않았다.초반에는 성유리 역시 사하나가 열심히 아르바이트하며 살아가는 유학생인 줄 알았다.그런 사하나가 대기업의 딸이었다는 사실은 뒤늦게야 알게 되었다.분명 온갖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자랐을 테지만 사하나에게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부잣집 딸 특유의 거만함이라거나 불량함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그녀는 의리 있고 열정적이었으며 착한 사람이었다.성하늘이 태어나던 때, 사하나는 성유리에게 딸이 어떤 사람처럼 자랐으면 좋겠냐는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그때, 성유리는 사하나의 두 눈을 바라보며 사하나 같은 사람으로 자라났으면 좋겠다는 대답을 해주었다.그 대답을 들은 사하나는 꽤 놀라는 기색을 보이며 겸손한 반응을 보였다.하지만 그때 성유리의 답변은 진심이었다.성유리는 성하늘이 사하나처럼 사랑받으며 자라 세상을 순수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가끔은 거침없이 행동해도 미움받지 않는 그런 사람이 되길 원했다.그녀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표현을 아끼지 않았으면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굳이 숨기지 않는 사람이었다.사하나는 성유리가 어렸을 적부터 가장 바라왔던 성격의 소유자였다.성유리는 이미 그 기회를 놓쳐버렸다.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딸 만큼은 사하나처럼 자라나길 바랐다.그런데 그렇게 소중한 아이가... 왜 죽어야 했을까?사하나의 어머니인 류수미가 성유리에게 물었었다. 사하나가 구출되었던 그때, 어떤 상태였는지 알긴 하냐고.그때까지만 해도 성유리는 미처 알지 못했다.그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625화

    박한빈은 성유리는 자기 쪽으로 확 끌어당기며 말했다.“사모님, 정신이 어떻게 된 것 같네요.”박한빈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지만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차갑고도 매서운 기세는 이내 주위 사람들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사민혁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이제 그만해.”“내가 뭘 그만해? 왜? 이젠 당신까지 저 사람 눈치를 보는 거야? 박한빈, 다른 사람들은 그쪽한테 벌벌 떨지 몰라도, 난 아니야!”“내 딸이 저렇게 됐는데, 겁날 게 뭐가 있어!”박한빈은 완전히 이성을 잃은 듯한 류수민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는 시선을 돌려 사민혁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성유리를 이끌고 자리를 떴다.성유리의 머릿속은 완전히 텅 비어버렸다.무슨 말을 해야 할지, 무슨 행동을 해야 할지 도무지 갈피가 잡히지 않아 그저 꼭두각시처럼 박한빈의 손에 이끌려 앞으로 걸어가기만 했다.곧이어 그녀는 병상 위에 누워 있는 성하늘을 발견했다.병상 위에 힘없이 누워 있는 아이의 모습을 성유리는 이미 질리도록 봐 왔었다.성하늘이 방금 수술을 끝냈던 때였다.그때까지만 해도 성유리는 그저 기계에 표기되어 있던 수치들을 하루하루 바라보며 새로운 삶에 대한 설렘과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하지만 지금, 성유리의 머릿속에는 조금 전 류수미가 했던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성유리는 견딜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버렸다.류수미는 이미 잔뜩 지친 몰골로 사민혁의 어깨에 기댄 채 몸을 떨며 흐느끼고 있었다.성유리는 같은 엄마로서 그 누구보다 류수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그래서인지 안정된 성하늘의 심장박동을 보면서도 온전히 기뻐할 수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축 숙인 채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하나 상태... 많이 안 좋은 거겠지?”“아까 어머님이 했던 말도 다 사실인 거겠지?”“그러니까, 우리 하늘이가 이렇게 빨리 구조될 수 있었던 것도 다 하나 덕분이었던 거야?”“난 그것도 모르고 사고 났을 때 하나 생각은 하지도 못했어. 내 새끼만 걱정하고, 하나 원망만 했지. 왜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624화

    “이번 눈사태로 인한 사망자와 실종자가 꽤 많아.”박한빈이 성유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치채고 말했다.“지금 스키장에 인터뷰해줄 사람이 남지 않아서, 기자들도 병원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거야.”그 말에 성유리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사람들이... 죽었단 말이에요?”“응, 너무 갑자기 일어난 일이었고, 스키장 측에서도 적절한 조치를 마련하지 못했나 봐. 관광객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했고 아직도 행방불명인 사람들이 많아.”박한빈은 성유리의 질문에 대답해주며 차를 지하 주차장에 세웠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초조해했던 성유리였지만 막상 병원에 도착하니 함부로 걸음을 옮기지 못했다.박한빈이 알려준 잔인한 현실 때문인지, 아니면 방금 꿨던 꿈 때문이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성유리의 몸은 계속해서 떨려왔지만 그녀의 두 다리는 의지와 상관없이 계속 앞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곧이어 성유리는 응급실 앞으로 도착했다.박한빈은 계속해서 그녀의 뒤를 따랐다.성유리의 눈에 빨간 불빛이 들어오던 그 순간, 누군가가 그녀를 향해 달려왔다.성유리가 반응하기도 전에 박한빈이 그녀를 재빨리 옆으로 끌어당겼다.성유리를 향해 달려온 누군가의 매서운 손길은 그대로 박한빈의 뺨 위로 떨어졌다.“이게 무슨 짓이에요?”다른 누군가가 또 성유리를 향해 달려왔지만 금방 가로막혔다.하지만 성유리를 향해 달려오던 여자는 쉽게 물러서지 않았고 이내 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이라고! 왜 가만히 있던 애를 여기까지 데리고 와서 이 사달이 나게 만들어! 하나가 이렇게 된 건 다 너 때문이야! 고작 26살밖에 안 된 앤데, 아직 결혼도 못 한 내 딸을!”류수미의 목소리는 잔뜩 쉬어 한껏 거칠고 날카로워져 있었다.그녀는 이미 모든 기운이 다 빠져버린 듯 몇 마디 더 외치다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그녀의 남편인 사민혁이 곁에서 류수미를 부축해 주었다.성유리는 그저 멍하니 자리에 서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그 아무도 이런 일이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623화

    성유리의 손에는 힘이 담겨 있었다.예전에도 박한빈에게 손을 댄 적이 있긴 했지만 온전히 박한빈을 향한 악감정 때문에 힘껏 내리친 적은 없었다.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성유리는 온 힘을 실어 박한빈의 뺨을 쳤다.성유리의 손길에 박한빈의 뺨은 빠른 속도로 붉어졌다.그런 박한빈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성유리가 그를 밀어내며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두 사람 이미 찾았어.”그 말에 성유리의 걸음이 멈췄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물었다.“그게 정말이야?”“응.”“두 사람 지금 어디 있는데? 하늘이는 괜찮대? 지금 어디 있는 거야?”성유리는 박한빈의 앞으로 달려가며 두서없이 말을 내뱉었다.“왜 나 만나러 안 왔대? 설마 내가 찾으러 안 가서 화났대? 너 뭐 숨기는 거 있지?”“그 두 사람 지금 병원에 있대. 눈사태 날 때 산속 동굴로 피신해서 목숨은 건졌지만 동굴 입구가 거의 막혀 있어서 구조대가 진입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나 봐. 어쨌든 지금 구조돼서 응급실로 실려 갔어.”박한빈은 성유리의 어깨를 꽉 감싼 채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그의 차분하고도 느린 말투에서 어떻게든 성유리를 진정시켜 보려는 정성이 느껴졌다.성유리는 박한빈을 바라보며 물었다.“그럼... 아직도 의식은 없다는 거지?”“그래.”“목숨에 아무 문제 없는 건 맞고?”박한빈은 성유리의 질문에 잠시 침묵을 유지하다가 다시 대답했다.“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줄 거야.”“하늘이 보러 가고 싶어.”성유리의 모습은 조금 전보다 어느 정도 진정된 것 같았지만 잔뜩 쉰 목에서는 여전히 거친 소리가 났다.잠시 그녀를 내려다보던 박한빈이 말했다.“지금 상태가 별로 안 좋은 것 같으니까 내일 가는 게 좋겠어.”“난 지금 당장 보러 가고 싶다고!”방금까지만 해도 진정된 것 같았던 성유리는 다시 폭발하듯 소리를 지르며 박한빈을 밀어냈다.그녀가 문밖으로 나가려던 그때, 박한빈이 다시 한번 성유리를 붙잡았다.“알겠으니까 내가 데려다줄게.”“나 혼자 갈 수 있어.”“어느 병원인지는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622화

    성유리는 박한빈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의사를 마주한 순간, 박한빈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바로 알 수 있었던 그녀는 본능적으로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하지만 박한빈은 이미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성유리의 동공이 겁에 질린 듯 순간적으로 수축하더니 더는 생각하지도 않고 곧장 박한빈을 밀치며 밖으로 나가기 위해 몸부림쳤다.하지만 성유리는 박한빈의 손아귀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었다. 박한빈 한 사람도 못 당해내던 성유리가 많은 사람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을 리 만무했다.결국, 그녀는 강제로 침대 위에 눕혀졌고 의사는 그녀에게 투여할 진정제를 준비하고 있었다.“이거 놔! 박한빈, 이거 놓으라니까! 내가 뭘 하든 너랑 대체 무슨 상관인데? 당장 이 손 놓으라고!”성유리가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며 외쳤다. 날카로운 그녀의 목소리는 뭔가를 뚫고 나갈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하지만 그들의 움직임에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다.곧이어 의사가 준비한 진정제의 바늘이 망설임 없이 성유리의 피부를 뚫고 들어왔다.“이 개자식아! 박한빈, 넌 진짜 더럽게 이기적인 새끼야! 내가 하늘이 찾고 싶다는데, 하늘이 찾겠다는데 그걸 네가 무슨 자격으로 막아... 네가 너무 역겨워... 역겨워서 미칠 것 같다고!”성유리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곧이어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약해지더니 몸부림치던 힘도 사라져만 갔다.그렇게 성유리를 잡고 있던 사람들의 손길도 사라졌지만 박한빈은 여전히 그녀를 침대 위로 누르고 있었다.성유리의 말을 듣고 있던 박한빈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그래, 마음껏 역겨워해.”“난 그냥... 네가 살아있어만 주면 돼.”살아있어만 달라고?성유리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만에 하나 정말 성하늘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성유리에게는 이 세상을 살아갈 이유도, 의미도 없었다.이 모든 게 다 자신의 실수처럼 느껴졌다.이 모든 일이 다 자신의 잘못 같았다.지금 성유리는 그저 성하늘을 찾고 싶을 뿐이었다.그런데 박한빈은 대체 왜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621화

    성유리는 어딘가 혼란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박한빈에게 물었다.“마음의 준비라뇨? 무슨 마음의 준비요? 저는 한빈 씨가 무슨 얘길 하는지 모르겠는데요.”“아, 맞다. 하나한테 전화 해봐야겠어요. 하나가 지금 하늘이랑 같이 있을 거예요. 분명히 하나는 하늘이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을 거라고요.”“한빈 씨는 모르겠죠, 하늘이가 착해 보여도 얼마나 장난꾸러기인지.”“하늘이, 금방 걸음마 뗐을 때부터 여기저기 숨는 걸 좋아했어요. 어느 날에는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 가 있었는데,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방을 한참이나 뒤졌어요. 결국, 경찰까지 부르고 나서야 침대 밑에 숨어 있던 애를 찾아냈죠.”“그래도 우리 하늘이 정말 착한 아이예요. 제가 그때 너무 놀랐다는 건 아는 건지, 그 후부터는 다시 저 걱정 안 시켰거든요.”“하늘이는 어렸을 때부터 몸이 정말 약했어요. 자주 아팠고, 열이 날 때는 제가 밤새 끌어안아 줘야 했어요.”“저는 그렇게 하늘이를 계속 안아줬죠. 품에 안겼던 하늘이는 아주 작고 소중했어요. 물론 엄청 피곤했는데, 그래도 저는 너무 좋았어요. 저랑 피가 섞인 아이였고, 제가 아이의 세상이었으니까요.”“하지만 하늘이는 몰랐을 거예요. 제 세상도 하늘이였다는 걸. 저는 정말 하늘이 없으면 못 살아요...”성유리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그녀는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 연락처를 뒤졌다.성유리는 사하나의 연락처를 찾고 있었다.그녀는 사하나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지만 계속해서 떨려오는 손에 사하나의 연락처를 찾을 수 없었다.“왜 이러지? 하나 번호가 안 나와요.”성유리가 박한빈에게 물었다.“분명히 여기 있었는데... 하나도 하늘이한테는 엄마랑 다름없는 존재거든요. 계속 연락했었는데, 왜 없지? 한빈 씨...”성유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이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를 품에 꽉 끌어안았다.힘을 실어 꽉 끌어안는 박한빈의 손길에 성유리는 숨쉬기조차 힘들었다.그런데도 성유리는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그녀는 그저 멍하니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620화

    성유리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눈앞에 보이는 것은 그저 새하얀 눈뿐이었다.여기가 어디인지,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그러던 중, 성하늘의 목소리가 들렸다.“엄마, 나 여기 있어. 빨리 나 찾아봐!”즐거운 듯한 아이의 목소리가 성유리의 이성을 돌려놨다.맞다... 성유리는 성하늘을 찾아야 했다.하지만 성하늘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성유리는 성하늘과 함께 수도 없이 숨바꼭질하며 놀았다.참을성이 부족하던 성하늘은 숨어 있다가도 몰래 나와 힐끔힐끔 성유리를 살펴보곤 했다.성유리 역시 매번 어디에 숨어 있을지 뻔했던 성하늘을 일부러 모른 척하며 과장된 몸짓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아이의 행방을 묻곤 했다.그럴 때면 성하늘은 즐거운 듯한 웃음을 지었다. 성유리가 “어렵게” 성하늘을 찾아내면 아이는 자신을 못 찾았던 엄마를 바보라며 놀리곤 했다.하지만 이번엔 놀이가 아니었다. 성하늘이 정말 보이지 않았다.성유리는 계속해서 성하늘의 이름을 불렀다.분명 성하늘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그녀의 귀를 맴돌고 있었다.“엄마, 빨리 나 찾아보라니까!”“하늘아, 어딨니? 장난 그만 치고 나와. 엄마가 정말 널 못 찾겠어서 그래!”성유리가 목이 터져라 외쳤다. 하지만 성하늘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성유리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하늘아! 들리니? 하늘아!”하지만 그런 성유리의 말에 대답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그녀의 눈앞에 보이는 건 그저 새하얗기만 한 눈뿐이었다.그 새하얀 세상을 멍하니 바라보던 성유리는 순간적으로 병원을 떠올렸다.성하늘이 병에 걸렸을 때, 성유리는 하얀 천장과 벽을 보며 홀로 간절히 기도하곤 했다.성유리는 그때마다 맹세했다. 성하늘이 다시 건강을 되찾기만 한다면 항상 아이의 곁에 있어 줄 것이라고,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떨어지지 않을 거라고.하지만 성하늘은 다시 자취를 감췄다.“하늘아...”성유리는 끊임없이 몸부림치다 눈을 번쩍 떴다. 눈앞에 보이는 희미한 노란 빛이 그녀를 혼란스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619화

    여자의 말에 끝나기도 전에 곁에 있던 그녀의 남편이 여자를 세게 끌어당겼다.그제야 여자는 자신이 말실수했다는 것을 깨닫고 서둘러 입을 틀어막았다.“아이고, 내가 또 말실수했네. 너무 걱정 마요, 하늘이 분명 괜찮을 테니까.”하지만 지금 성유리의 귀에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그녀의 머릿속에는 오직 지금도 시간이 계속해서 흘러가고 있다는 생각뿐이었다.눈사태로 발이 묶인 사람들이라면 밖에서 자신들을 얼마나 애타게 찾고 있을지 모를 리 없었다. 별일 없었다면 지금쯤 연락이 왔어야 했다.하지만 여태껏 아무런 연락도 없이 감감무소식이었다.사하나의 휴대폰은 여전히 꺼져있었다.감정 없이 차가운 음성 알림이 반복될 때마다 성유리는 점점 더 깊은 절망 속으로 빠져들었다.어떻게 정신을 잃지도 않고 버티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눈사태가 멈추자 구조대가 현장에 도착했다.직원들이 다급히 구조대에게 달려가 상황을 설명했고 뒤늦게 정신을 차린 성유리는 곧장 그들의 뒤를 따랐다.“사모님,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하지만 성유리는 빠르게 제지당했다.“언제 다시 눈사태가 일어날지 모르니까 사모님께선...”“제 친구랑 딸이 저쪽에 있어요.”성유리의 목소리는 이미 잔뜩 쉬어 거칠어져 있었고 거친 목소리 안에는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제발 저도 같이 가게 해주세요.”사실 성유리는 아까부터 최대한 본인의 감정을 있는 힘껏 억누르고 있었다.그녀는 어떻게든 이성의 끈을 놓지 않으려 애썼다.안 그랬으면 눈사태가 일어난 순간, 사람들이 말리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곧장 달려나갔을 것이다.이곳에 가만히 대기하고 있던 것만으로 그녀는 자신의 인내심을 최대로 발휘한 상태였다.성유리는 여전히 일말의 희망을 품고 있었다. 호텔로 돌아가 보면 사하나와 성하늘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그리고 마침내 성유리를 만난 두 사람이 모든 게 다 장난이었다는 가벼운 말을 해주기만 바랐다.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런 게 아니었다.지금까지도... 아무런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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