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빈은 말을 꺼내며 반대쪽으로 가 물 한 잔을 따라내더니 체온계를 건넸다.하지만 성유리는 그것을 받지도 않고 물었다.“하늘이는 어디 있어?”“우리 엄마한테 맡겼어.”그 말에 성유리는 불만스러운 듯 눈살을 찌푸리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가려 했다.그러자 박한빈이 그런 성유리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너 지금 아프잖아. 지금 이 몸 상태로는 애 못 돌봐. 우리 엄마가 돌봐 주고 있다니까? 설마 못 믿는 거야?”“나 지금 괜찮아.”성유리가 단호하게 말했다.“열도 다 내렸고, 하늘이도 내가 돌볼 거야.”“거울이라도 한 번 보고 얘기하지 그래?”“내가 어떤 모습이든 너랑 무슨 상관인데!”성유리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하며 박한빈을 밀어내려 했다.그때, 박한빈이 물었다.“방금 하나 씨 꿈꾼 거지?”그 이름이 박한빈의 입에서 나오자 성유리는 그 자리에 멍하니 얼어붙었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박한빈을 바라보았다.박한빈 역시 성유리의 눈빛을 그대로 받아내며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장례식 날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기억해?”“무슨... 무슨 장례식?”성유리가 되물었다.“누구 장례식인데?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알잖아, 하나 씨 장례식 말이야.”박한빈은 성유리에게 조금도 빠져나갈 구멍을 주지 않았다.“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잊은 거야?”“안 잊었어!”성유리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서하나 엄마나 우릴 쫓아냈던 거? 그분이 나한테 재수 없는 년이라고 욕한 거?”“나도 알아! 나 재수 없는 년이야! 나한테 오는 사람들, 날 아껴주는 사람들은 다 불행해져, 더 하면 죽기까지 해! 그 와중에도 난 살아남은 게 우리 딸이라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내가 이렇게 이기적인 사람이야! 이제 만족해?”성유리의 목소리는 날카로웠고 크게 떠진 두 눈의 핏줄은 금방이라도 피가 터질 듯 한껏 솟아 있었다.성유리를 바라보던 박한빈이 말했다.“그게 끝이 아니야. 더 생
성유리 역시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사하나는 이제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최근 들어 그녀는 계속해서 사하나의 목소리를 들었다.때로는 평소처럼 성유리와 대화를 나누고 최근 도는 소문들을 들려주며 재잘거렸다.그러다가 또 때로는 울면서 왜 자신을 구하지 않았냐며 따졌다.또 가끔은 다 자신이 원해서 한 일이니 너무 죄책감 느끼지 말라고도 했다.그러다가도 성유리에게 배은망덕한 사람이라는 말을 하며 왜 자신을 죽게 내버려 두었냐고, 왜 하필 자신이 죽어야 했냐며 원망했다.사하나의 모습과 목소리는 끊임없이 성유리의 눈앞에 나타났다.그것은 환각도 아니었다.성유리가 손만 뻗으면 사하나가 정말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하지만 사하나는 분명 죽었다.박한빈은 그런 성유리를 심리상담사에게 데려갔다.하지만 성유리는 심리상담사의 앞에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사하나라는 이름이 언급되는 것을 거부하면서도 계속해서 박한빈에게 그녀의 부모를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그들이 자신을 원망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들을 만나고 싶었다.차라리 사하나의 부모에게 원망 섞인 욕설을 들어야만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해질 것 같았다.“며칠만 기다려. 날씨가 좋아지면 그때 데려다줄게.”박한빈이 대답했다.하지만 성유리는 그런 박한빈을 바라보며 말했다.“거짓말이잖아요.”“아니야.”“저 안 데려다줄 거잖아요. 맞죠?”“난 약속한 건 꼭 지키는 사람이야.”박한빈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결국, 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았다.이곳은 박한빈이 새로 구한 집이었고 성유리도 이 사실을 며칠 전에야 알게 되었다.지금 그녀의 시야에 들어오는 정원에는 푸른 나무들이 서 있었다.한겨울인데 왜 나뭇잎들이 붙어있는 거지?설마... 벌써 새해가 된 건가?그럼 사하나가 세상을 뜬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난 걸까?성유리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지만 굳이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그저 피곤한 표정으로 눈을
박한빈의 말에 하늘이의 손이 뚝 멈추더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우리 엄마 어디로 데려갔어요?”하늘이가 물었다.“엄마 보고 싶어?”되묻는 박한빈의 말에 하늘이는 침묵할 뿐이었다.“아니면 화난 거야?”그러자 박한빈이 다시 말했다.“그날 엄마가 한 일 때문에?”“아니거든요!”이번에 하늘이 금세 대답했지만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저는 절대 엄마한테 화내지 않아요.”“그냥... 엄마가 이젠 나를 싫어하나 봐요.”아이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박한빈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엄마가 널 싫어할 리가 없잖아.”하지만 하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분명, 사하나의 장례식 날 벌어진 일이 하늘에게 큰 상처로 남아 있는 게 분명했다.하늘이가 알던 엄마는 어릴 적부터 자신을 지켜주던 사람이었고 무슨 잘못을 해도 크게 나무라지 않았던 엄마였다.그러나 그날 보인 엄마의 모습은 너무 낯설었기에 하늘이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왜 사람들이 자신이 죽어야 한다고 말했는지, 그리고 왜 믿었던 엄마마저 그렇게 생각했는지.“엄마가 지금 좀 아파서 그런 거야.”박한빈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엄마는 가장 친한 친구를 잃었어.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거야. 그래서 지금 병이 난 거고.”그 말에 하늘이는 고개를 돌려 박한빈을 바라봤다.“그러니까 엄마를 너무 탓하지 마.”박한빈은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지금까지는 네가 엄마의 보호를 받았잖아. 이번에는 네가 엄마를 보호해 주면 안 될까?”“어떻게... 보호해요?”“엄마를 도와줘.”박한빈이 말했다.“엄마가 병을 이겨낼 수 있게 돕고 깊은 어둠속에서 나올 수 있게 도와줘. 그러면 되는 거야.”하늘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그를 쳐다봤는데 마치 어떻게 해야 할지 묻는 듯한 눈빛이었다.그 모습을 본 박한빈은 미소를 지으며 계속 말했다.“그냥 엄마를 행복하게 해 주면 돼. 이건 네가 할 수 있는 일이잖아. 그렇지?”하늘은 아무
다음 날, 날씨는 너무도 화장했다.박한빈은 다른 사람더러 성유리를 정원으로 데려가 햇볕을 쬐도록 했다.성유리는 이 제안에 별다른 이의 없이 따랐지만 여전히 기운 없는 모습이었다.그러던 중, 하늘이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엄마!”그 목소리를 듣자 성유리는 온몸이 덜덜 떨려왔다.그리고는 재빨리 고개를 휙 돌렸다.하늘이는 예쁜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단정하게 땋은 채 흥분한 얼굴로 성유리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하지만 성유리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그 행동은 마치 무언가 무서운 존재를 본 것처럼 다급했다.하늘이는 그 모습을 보고 멈칫하더니 점차 발걸음을 멈추었다.그리고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성유리를 바라보았다.성유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그때 박한빈이 빠르게 하늘이 곁으로 다가와 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하늘이의 눈가는 여전히 빨갰지만 애써 정신을 다잡으며 눈물을 닦아냈다.그리고 다시 성유리 쪽으로 한 걸음씩 걸어갔다.성유리는 계속 뒤로 물러서고 싶었지만 하늘이가 상처받을까 봐 애써 자신의 정신을 붙들었다.그러던 중, 하늘이가 바로 앞까지 다가와 다시 한번 성유리를 불렀다.“엄마...”그 목소리에는 이미 울음이 섞여 있었다.성유리는 하늘이를 잠시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하지만 하늘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엄마, 나 좀 안아줘. 응?”성유리는 아이의 말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지만 하늘이는 기다리지 않고 손을 뻗어 그녀를 꼭 안았다.아직 하늘이의 손은 작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온 힘을 다해 성유리를 감싸안았다.그러자 성유리의 굳어 있던 몸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엄마, 많이 보고 싶었어.”하늘이가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엄마랑 같이 있고 싶어. 엄마, 나 버리지 마. 응?”“나 이제 까불지도 않고 말도 잘 들을게. 이모랑 스키 타러 가지도 않을게. 나...”하늘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성유리의 표정이
아마 그것 때문인지, 박한빈은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오늘 날씨 참 좋네요.”아침 식사를 하는 와중, 성유리가 박한빈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저 오늘 사씨 가문에 가고 싶어요. 가도 괜찮을까요?”박한빈은 처음에 성유리가 자신에게 말을 걸자 기뻐했지만 이어진 그녀의 말에 얼굴 표정이 굳어졌다.그러나 성유리는 진지한 눈빛으로 박한빈을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전에 약속했잖아요. 아니면 저한테 거짓말한 거예요?”“거짓말한 적 없어.”박한빈은 대답하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하지만 사씨 가문에 가려는 이유가 뭐지?”“그분들에게 정식으로 사과를 해야 해요.”성유리가 대답했다.“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게 꼭 사과일까?”박한빈은 최근 그녀가 겨우 안정을 되찾은 상황에서, 어떠한 돌발 상황도 발생하지 않기를 바랐다.더구나 지금의 사씨 가문은 분명 성유리를 미워하고 있을 것이 뻔했다.마치 박한빈의 이런 생각을 읽은 듯, 성유리가 말을 덧붙였다.“물론 그분들이 저를 용서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알아요. 하지만... 저도 제 마음의 짐을 조금 덜어내고 싶어요.”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계속 말했다.“그동안... 진심으로 감사했어요.”그 말에 박한빈은 입술을 오므리다 천천히 대답했다.“생각해 볼게.”그러자 성유리는 단호하게 말했다.“저는 오늘 꼭 가야겠어요. 만약 동의하지 않으신다면 오늘 바로 이곳에서 나갈래요. 원래... 여기에 머물 이유도 없으니까요.”그녀의 말에 박한빈은 이를 악물었다.“지금... 협박하는 건가?”“그렇게 느끼신다면 협박 맞아요.”성유리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대답했다.그녀의 태도에 박한빈은 깊게 숨을 들이쉰 뒤 말했다.“좋아. 하지만 지금 바로는 안 돼. 적어도 사씨 가문에 미리 연락은 해야 하니까.”“전 오늘 꼭 가야겠어요.”성유리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박한빈은 그녀가 자신이 동의할 것임을 확신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럼에도 결국 어쩔 수 없이 성유리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그는 더 이상 말
성유리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햇빛을 본 날이 언제였는지도 잊어버렸다.거리의 빨간 장식들과 설렘이 가득한 분위기를 보고서야 깨달았다. 새해가 다가오고 있었다는 것을.그렇다면 사하나가 세상을 떠난 지도 벌써 한 달이 넘은 셈이었다.성유리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사씨 가문 저택은 너무 조용했다.성유리는 이곳에 몇 번 와본 적이 있었다.가끔 사하나가 하늘이를 데리고 이곳에서 놀 때면, 성유리는 직접 하늘이를 데리러 오곤 했다.그럴 때마다 성유리가 문밖에 도착하기도 전에 하늘이가 안에서 즐겁게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류수미는 그런 하늘이를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사하나에게 빨리 결혼하라고 재촉하곤 했다.그리고 사하나는 항상 못마땅하다는 듯 엄마인 류수미의 말에 반박했다.류수미는 겉으로는 꾸짖는 말을 했지만 진심으로 딸을 나무라는 적은 없었다.성유리는 그녀가 사하나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고 있었다.그래서 나중에 사하나가 결혼하기 싫다고 고집했을 때도 류수미는 끝내 그녀에게 강요하지 않았다.하지만 그 깊은 사랑은 사하나의 죽음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성유리.”박한빈의 목소리가 갑자기 들려왔다.그러면서 그는 성유리의 손을 꼭 잡았다.갑작스러운 행동에 성유리는 멈칫하며 고개를 돌렸고 박한빈은 얼굴을 찌푸린 채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저 괜찮아요.”성유리가 금세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 뒤, 차 문을 열고 내리자 박한빈도 곧 따라 내렸다.박한빈이 미리 사씨 가문의 가족들에게 방문을 알렸기에 집안의 도우미들이 매우 공손하게 그들을 맞아주었다.류수미와 달리 사민혁은 비교적 침착하고 이성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그럼에도 그는 웃지 않았다.단지 고개를 살짝 끄덕일 뿐이었다.그의 옷차림은 여전히 깔끔하고 단정했지만 나이가 훨씬 더 들어 보였다.소파에 앉아 있을 때, 사민혁의 등이 다소 굽어 있는 것이 눈에 확 띨 정도였다.“사모님은 어디에 계세요?”성유리가 조용히 물었다.“위층에 있다. 몸 상태가
분명히 사민혁은 자기 아내 상태를 매우 걱정하고 있었다.그는 이내 박한빈을 쳐다보며 물었다.“성유리 씨가 제 아내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겁니까?”박한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저도 잘 모릅니다.”아무도 그 답을 알지 못했기에, 두 사람은 그저 조용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박한빈은 수없이 많은 상황을 상상했다.혹시라도 문제가 생기면 이곳이 어디든 상관없이 바로 방 안으로 뛰어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하지만 의외로 방 안은 계속 조용했다.두 사람의 대화는 마치 차분하게 이루어지는 평범한 대화처럼 느껴졌다.그런데도 박한빈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가득했다.이 조용함이 폭풍 전야 같은 불길한 신호일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곧 큰일이 벌어질 것처럼 느껴졌다.그러나 예상과는 다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성유리가 방에서 걸어 나왔다.놀랍게도 그녀의 얼굴은 이전보다 훨씬 편안해 보였다.마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사람처럼 말이다.사민혁을 마주한 성유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사민혁은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나 성유리는 그의 반응에 신경 쓰지 않고 박한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저희 이제 그만 가요.”박한빈의 머릿속은 여전히 의문투성이였다.하지만 성유리에게 직접 묻지 않고 조용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성유리는 그의 따뜻하고 건조한 손을 잠시 내려다보았지만 아무 말 없이 손을 잡은 채 함께 앞으로 걸어갔다.박한빈이 사민혁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넨 후, 두 사람은 그 집을 나섰다.가는 길에 박한빈이 먼저 성유리에게 물었다.“방금 류수미 씨에게 무슨 말을 했어?”“별거 아니에요.”성유리가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하자 박한빈은 그녀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며칠 전에 하나 씨가 꿈에 나왔어요. 저와 작별 인사를 나누면서 어머니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어요. 그런데 하나 씨는 어머니를 직접 만나러 가지 못했죠. 아마 어머니가 상
박한빈은 원래 성유리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녀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전에 하늘이한테 선물 주고 싶다고 하시지 않았어요?”성유리가 물었다.“지금 사면 되잖아요.”“하늘이가 좋아할까?”박한빈은 망설이며 되물었다.그러자 성유리는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좋아할 거예요. 하늘이는 정말 단순한 아이거든요. 누가 자기를 좋아하는지 또 누가 그렇지 않은지 잘 느끼죠. 또 그렇게 오래 마음에 담아두지도 않아요. 박한빈 씨가 진심으로 다가가면 금방 받아들일 거예요.”성유리는 박한빈을 바라보며 말을 덧붙였다.“박한빈 씨도 하늘이를 사랑하잖아요. 맞죠?”박한빈은 이런 직접적인 질문에 익숙하지 않았다.잠시 멈칫한 그는 천천히, 그러나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성유리는 그런 박한빈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렇다면 하늘이도 느낄 거예요.”“뭘 사면 좋을까?”결국 성유리의 추천으로 박한빈은 하늘이에게 새 그림 도구 세트와 만화책 세트를 선물로 사기로 했다.두 사람이 엔젤 월드로 돌아갔을 때, 하늘이는 무척 신이 나 있었다.그리고 박한빈이 선물을 건네자 놀란 표정으로 멈칫하더니 이내 성유리를 바라보았다.그 눈빛은 마치 그녀의 허락을 구하는 듯했다.성유리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하늘이는 입술을 깨물며 작은 목소리로 고맙다는 인사를 건넨 뒤 선물을 건네받았다.성유리는 하늘이를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이것이 하늘이가 박한빈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신호임을 알았다.잠시 후, 김서영이 성유리에게 다가왔고 그녀의 눈에는 연민의 감정과 안도의 감정이 담겨 있었다.김서영은 아무 말 없이 성유리를 꼭 끌어안고는 등을 토닥여줬다.성유리는 그녀의 품에 가만히 안겨 있다가 김서영이 그녀를 놓아주자 미소 지으며 말했다.“고맙습니다. 그동안 많이 신세를 졌어요.”“신세라니? 하늘이는 원래 내 손녀야. 이렇게 함께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기쁜데.”김서영은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표정이 살짝 바뀌었지만 성유리를 쳐다보니
성유리의 대답은 홍지은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자신이 기대했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기에 그녀는 한순간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랐다.하지만 성유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말을 마친 뒤, 곧바로 돌아서서 걸어갔고 박한빈이 곧장 성유리의 뒤를 따라갔다.떠나기 전, 그는 단 한 번도 홍지은을 쳐다보지 않았다.하지만 홍지은은 알았다.그동안 애써 쌓아 올린 모든 것이 이제 완전히 무너졌다는 것을.그러나 생각보다 더 아무렇지도 않았다.어차피 시궁창뿐인 인생이 여기서 훨씬 나빠진다고 한들 얼마나 더 나빠질까?그렇다고 혼자만 괴로울 수는 없었다.그러니 죽더라도 반드시 한 사람은 끌어내릴 것이다.성유리가 대체 무슨 자격으로 그런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건지 홍지은은 아직 모른다.세상 그 누가 행복하게 지낸다 해도 괜찮다.‘성유리는 절대 안 돼.’...성유리는 다시 경매장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곧장 복도 끝까지 걸어가 엘리베이터를 탔다.그리고 뒤따라오던 박한빈도 곧바로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지만 옆에 조용히 서서 성유리만 쳐다봤다.엘리베이터의 거울 속에 두 사람의 모습은 또렷이 비치고 있었다.하지만 성유리는 내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는데 아무 말도, 반응도 없었다.박한빈은 그런 그녀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 순간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그는 발신자조차 확인하지 않은 채, 울리는 전화를 바로 끊어버렸다.그러나 상대는 집요하게 전화를 걸어왔다.연달아 몇 번을 끊었음에도 전화는 계속해서 울렸다.그렇게 주차장까지 도착했을 때, 성유리가 먼저 떠날까 봐 조바심이 난 박한빈은 그녀의 팔을 붙잡고서야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입니까?”날카로운 그의 목소리에 상대방이 순간 움찔하는 기색이었지만 잠시 후 조심스럽게 묻기 시작했다.“박 대표님, 저예요. 왜 말도 없이 먼저 가셨습니까? 저...”박한빈은 상대의 말을 채 듣지도 않고는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행여 핸드폰이 또다시 울릴까 봐 박한빈은 이번에 아예 전원을 꺼버
홍지은의 말에도 박한빈은 여전히 침묵했고 아까보다 더 얼굴을 찌푸렸다.눈빛에 그득히 담겨있는 혐오와 무시의 감정은 선명히 드러났지만 박한빈은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바로 맞은편에 서 있던 홍지은도 당연히 그의 감정을 알아차렸지만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계속 말했다.“진짜예요. 박 대표님, 제가 증명할 수 있어요. 제 남편은...”“꺼져.”단 두 글자뿐인 박한빈의 대답에 홍지은은 할 말을 잃었다.하지만 사실... 신경 쓰이는 건 박한빈의 대답이 아니라 사람들이 보내는 시선이었다.홍지은은 알고 있었다. 만약 지금 자기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처지가 더 난감해진다는 사실을.그러나 박한빈은 홍지은에게 그럴 기회조차 주지 않았고 바로 몸을 일으키더니 자리를 떠버렸다.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던 홍지은은 박한빈의 뒷모습을 쳐다보다 갑자기 이런 말을 꺼냈다.“박한빈 씨, 계속 이러신다면... 제가 유리한테 그 일들을 다 알려줘도 제 탓은 하지 마세요.”그녀의 말에 박한빈의 발걸음이 뚝 멈췄고 이내 고개를 돌려 홍지은을 쳐다봤다.그러자 홍지은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제가 아예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시나 본데... 그때 유정 씨가 임신했던 아이 말이에요. 박 대표님 아이 맞죠?”그녀의 말에 박한빈은 다시 고개를 휙 돌렸다. 홍지은을 쳐다보는 그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날카로웠고 냉랭했다.그의 눈빛에 홍지은은 가슴이 철렁했지만 이내 허리를 꼿꼿하게 펴며 말했다.“지금 유정 씨가 잡혀있긴 하지만 그 일들이 다 끝이 난 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그때 유리가 잃었던 아이도... 사실 박한빈 씨는 다 알고 있었잖아요. 유정 씨가 그랬다는 걸.”홍지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박한빈의 뒤에서 물건 하나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쿵!그 소리에 박한빈이 뒤돌아보자 성유리가 머지않은 곳에 서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성유리는 박한빈에게 시선을 보내지 않은 채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을 주웠다.고개를 숙이고 있는 탓에 그녀의 표정은
그리고 이내 홍지은은 자신의 자리에서 성유리와 박한빈이 보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금성에서 제일가는 큰 인물은 박한빈은 당연하게도 가장 앞에 있는 좌석에 앉아 있었지만 무대 위에 전시되는 물건엔 흥미가 없어 보였다.홍지은이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을 때, 박한빈도 마침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바라보고 있었다.잠시 멈칫하던 그는 다정하게 성유리 귓가에 얽혀있는 머리카락을 정리해 줬다.그저 연인 사이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행동이지만 박한빈은 헝클어진 머리카락들을 일일이 다 풀어줬다.만약 홍지은이 직접 본 게 아니라면 그녀는 꿈에서도 박한빈이 이런 일을 한다고는 예상하지 못할 것이다.너무 놀란 홍지은이 옆에 있는 사람에게 박한빈 좀 보라는 말을 하려고 하는 순간, 성유리는 퉁명스럽게 그의 손을 밀쳐냈다.그리고는 박한빈을 슬쩍 째려봤지만 그는 화를 내기도 커녕 오히려 미소 지으며 그녀에게 귓속말을 했다.꽤 거리가 있던 홍지은과 두 사람이기에 그녀는 박한빈의 말을 들을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옆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저기 좀 봐요. 두 사람 사이 너무 좋아 보이지 않아요? 유리가 평소에 집 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 게 혹시 박 대표님께서 쟤를 숨겨두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한다니까요.”홍지은의 옆에 있는 사람은 그녀와 비슷한 나이대인 여성이었다. 그녀는 금성에서 거주하는 현지 사람이 아니었고 결혼한 남자도 업계에서 중하층에 속하는 위치였다.전에 그녀는 홍지은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썼지만 지금 막상 말을 거니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그렇게 홍지은의 미소와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정 사모님?”상대는 여전히 침묵했지만 이내 정연화는 다른 사람들과 웃으며 대화를 나눴다.홍지은은 그들이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듣지 못했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자기에게 향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선명히 들려오는 웃음소리들은 ‘화살’이 되어 홍지은의 가슴 깊숙한 곳을 찌르고 있었고 흐르는 ‘피’조차 그녀에게는 차갑게 느껴졌다.입술을 뻥긋거리
홍지은은 마치 성유리와 떨어질 래야 떨어질 수 없는 절친이라는 듯 능글맞게 대꾸했다.그리고 앞에 서 있던 사람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그녀는 발 빠르게 성유리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박한빈은 경매에 참석한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성유리는 미소를 지은 채 그의 곁을 지켰다.사실 그녀는 웃고는 있었지만 이미 정신은 다른 곳에 팔려있는 상태였고 상대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그래서 홍지은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 처음엔 미처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난 네가 안 올 줄 알았어. 예전에는 이런 장소에 오는 거 별로라고 했잖아.”홍지은은 아주 자연스럽게 성유리의 손을 잡으며 말을 걸었지만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잡힌 손을 빼냈다.성유리가 대답하기도 전에 홍지은은 고개를 돌려 박한빈을 보며 계속 말했다.“어머? 박 대표님도 오셨어요? 오랜만이네요.”만약 이런 장소에서 다른 사람이 먼저 말을 걸었다면 아무리 싫어도 박한빈은 몇 마디 대답은 해줬었다.그렇지만 유독 오늘따라 그는 대답하기가 내키지 않았다. 다르게 말하자면 말을 건 상대가 홍지은이라서 싫었다.필경 홍지은을 볼 때면 성유리가 지나간 과거의 일을 다시 떠올리니까 말이다.그게 두려워서일까, 아니면 찔리는 구석이 있어서일까, 박한빈은 성유리가 홍지은을 마주치는 것을 허락하고 싶지 않았다.그저 오다가다 마주친다고 하더라도.그래서 박한빈은 성유리를 자기 쪽으로 가까이 끌어당겼고 홍지은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그녀와 함께 떠나버렸다.박한빈은 홍지은이 자신의 대답을 들을 자격도, 자기가 대답해 줄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대답을 하지 않은 것 또한 당연한 일이라고 여겼다.제자리에 서 있던 홍지은의 반응과 표정이 어떻게 변해가던 박한빈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박 대표님!”이내 다른 사람이 박한빈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네자 그는 미소 지으며 상대에게 성유리를 소개해 줬다.“여기는 제 아내 되는 사람입니다. 성유리라고 하고요.”“안녕하세요. 사모님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홍지은은 늘 같은 대답을 반복했다.“성유리는 이런 자리를 좋아하지 않아요. 제가 여러 번 말해봤지만 걔는 원래 이런 곳에 나오길 싫어해서요.”오늘도 그녀는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괜찮아요. 그래도 한번 얼굴을 비추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요? 마침 경매회도 곧 시작하는데 저도 박 대표 부인의 취향이 궁금하네요.”“그러게 말이에요. 어차피 나는 경쟁 상대가 될 수도 없으니까 미리 유리 씨가 뭘 원하는지 알아두고 포기하는 게 낫겠어요.”홍지은도 사람들을 따라 웃으며 말했다.“유리는 오지 않을 거예요. 전에도 물어봤는데 딱히 관심 가는 물건이 없다고 했거든요.”그녀는 태연하게 말을 이어 나가려 했다. 그러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곧 현실은 완전히 뒤집혔다.왜냐하면 그날 경매장에 성유리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올해 금성에서 열리는 첫 대형 경매 행사였다.특히 경매 목록에 포함된 한 세트의 보석이 큰 주목을 받으면서 도시 내에서 일정한 신분을 가진 인사들은 전부 참석했다.사실 성유리는 처음에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그런데 전날 밤, 박한빈과 게임 내기를 했다가 패배하는 바람에 박한빈의 요구 조건을 들어주기로 했다.그 조건이 바로 경매장에 함께 가달라는 것이었다.다만, 박한빈도 굳이 오래 있을 생각은 없다고 했다.“그냥 얼굴만 비추고 가면 돼. 너 피곤해지면 바로 나가자.”그 말을 듣고 나서야 성유리는 마지못해 동행을 허락했다.성유리가 입장하는 순간, 그녀의 시선은 홍지은에게로 향했다.그녀는 칵테일 잔을 들고 주변 사람들과 해맑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비록 남편은 별다른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이런 자리에서만큼은 홍지은에게 자유를 허용했다.어차피 그의 사업 자원 중 상당수가 홍지은의 인맥과 네트워크 덕분에 얻어진 것이었으니까.오늘 그녀는 임신 중임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생기가 넘쳤다.완벽한 메이크업 덕분인지 얼굴에도 빛이 나는 것 같았고 평소보다 더 예뻐 보였다.그런데 이
사실 박한빈은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었다.떠올릴 수 있는 것이라곤 끝없는 공부와 훈련뿐이었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해야 할 것이 많았다.학교 성적은 언제나 최고여야 했고 악기나 골프, 승마를 포함한 다양한 외국어까지 익혀야 했다.어릴 때부터, 사람들은 박한빈의 신분을 부러워했다.박 씨라는 성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영광을 의미했다.하지만 그 영광과 함께 짊어져야 할 무게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만약 지금 그때로 돌아가 다시 선택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떤 삶이 더 나은 것인지조차 그는 확신할 수 없었다.그러나 분명한 것은 박한빈이 평범한 아이로서의 행복을 잃었다는 사실이다.잃을 게 많은 만큼 박한빈은 손에 넣은 것도 많았다.그리고 그는 자신이 짊어졌던 짐을 하늘이에게 만큼은 넘기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그래서 얼마 전, 김서영이 하늘이에게 특별 교육을 시키자고 했을 때 박한빈은 단칼에 거절했다.“박한빈, 네 딸은 분명 앞으로 금성에서 주목받는 존재가 될 거야. 이런 기본적인 것들을 익히지 못하면 그 신분이 아깝지 않겠니?”김서영은 박한빈을 설득하려 했지만 박한빈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뭐가 어떻게 됐든 하늘이는 박한빈의 핏줄이자 친딸이다. 설령 앞으로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더라도 말이다.감히 누가 박한빈의 딸을 무시하고 얕잡아볼 수 있겠는가?그래서 김서영이 뭐라고 하든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그 이야기를 마친 후, 박한빈의 품 안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성유리는 입을 꾹 닫아버렸다.박한빈이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니 그녀는 살짝 찌푸린 미간과 다물린 입술로 조용히 생각에 잠겨있었다.그 모습을 본 박한빈은 순간 자신이 뭔가 실수한 것인가 싶어 물었다.“왜 그래?”“아무것도 아니에요.”성유리는 빠르게 화제를 돌리며 박한빈에게 물었다.“그런데 이거 왜 아직도 안 멈추죠?”“곧 멈출 거야.”박한빈은 짧게 대답하다 문득 깨달았다.“설마... 지금 나를 가슴 아파하는 거야?“아니거든요?”성유리는 전혀 망설
박한빈은 천천히 웃음을 거두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직접 물을 따라왔다.성유리는 그가 자신이 마실 물을 준비하는 줄 알았다.그런데 박한빈이 몸을 휙 돌리곤 성유리에게 컵을 내밀었다.“방금 건 그냥 장난이었어. 재미없었지?”그의 말에 성유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물컵을 받아 들었다.그것만으로도 이미 박한빈에게는 충분한 대답이었다.“푹 쉬어.”박한빈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성유리에게 말했다.성유리는 물 한 모금을 마신 뒤, 컵을 옆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잠깐 나갔다 올게요.”그녀가 문 쪽으로 향하려 하자 박한빈이 손목을 붙잡았다.“어디 가려고?”“정원이요. 햇볕 좀 쬐려고.”“나도 같이 가.”“아까 그렇게 아프다면서 괜찮으세요?”성유리는 박한빈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그 눈빛에는 박한빈을 향한 의심이 가득했다.그러나 박한빈은 개의치 않고 태연하게 말했다.“나도 햇볕 좀 쬐고 싶어. 그리고 의사가 말했잖아? 내 면역력 좋다고.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니래.”‘심각하지 않다?’‘그러면 아까까지는 왜 그렇게 책임지라고 난리였는데?’그 말이 목구멍까지 나오려 했지만 결국 성유리는 하려던 말을 꾹 삼켰다.그녀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박한빈은 마치 그것을 허락이라도 받은 것처럼 성유리의 손을 끌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방에서 본 그대로 오늘 날씨는 유난히 화창했다.햇살 아래, 정원의 회전목마가 선명한 색채를 띠고 있었다.박한빈이 특별히 주문 제작해 놓은 것이라 그런지 원색의 유채가 한층 더 생생해 보였다.그 장면을 바라보던 성유리는 왠지 모르게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듯했다.그런데, 박한빈은 줄곧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그가 보내는 그윽한 시선을 느꼈지만 성유리는 한참을 모른 척했다.박한빈이 먼저 말을 걸기 전까지는.“한번 타볼래?”“뭐를요?”“회전목마.”성유리는 그의 말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제가 어린애도 아니고.”“그럼 어릴 때는 타봤어?”그 질문에 성유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잠시 침
“그럼 자. 난 네가 잠들면 나갈게.”박한빈의 말을 성유리가 철석같이 믿을 리가 없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는 그와 다투는 것도 귀찮았다.그래서 그냥 이불을 끌어당겨 몸을 푹 덮고 등을 돌리고는 박한빈에게서 멀어졌다.사실 처음에는 전혀 졸리지 않았지만 조금 전 박한빈과 한바탕 실랑이를 벌인 탓인지 피곤함이 몰려왔다.머릿속에 들던 생각도 점점 흐려지고 그렇게 결국 잠에 빠져들었다.아니나 다를까, 박한빈의 말을 거짓말이었다.다음 날 아침, 성유리가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바로 옆에 누워 있는 박한빈이었다.그는 한쪽 팔로 그녀를 꼭 끌어안은 채 잠에 들어있었는데 성유리는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당장 박한빈을 밀어내려 했지만 갑자기 그가 몸을 돌려 두어 번 기침을 했다.그리곤 반쯤 감긴 눈으로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나... 너한테서 감기가 옮은 것 같아.”성유리는 그 말에 그대로 멈춰버렸다.하지만 박한빈은 성유리의 손을 잡아 자기 이마에 갖다 댔다.“한번 만져봐. 나 열 나는 거 같지 않아?”성유리는 일단 체온계를 가져와 박한빈의 체온을 재봤다.그러나 체온계에 표시된 건 아주 멀쩡한 수치였다.그 말인즉 박한빈은 열이 안 나고 있다는 것이었고 감기에 걸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그런데도 박한빈은 여전히 몸이 아프다며 자신이 감기에 걸렸으니 여기서 병을 치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이전의 고고하고 차가운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지금은 마치 억지를 부리는 아이 같았다.결국 성유리는 의사를 불러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뿐만 아니라 아예 다른 방으로 옮겨서 지내기로 결심했다.하지만 박한빈은 그녀의 속내를 간파한 듯, 서둘러 앞을 막아섰다.“뭐 하려는 거야?”“방을 옮길 거예요.”성유리는 담담하게 대답을 이어갔다.“의사 선생님께서 교차 감염을 조심해야 한다고 했어요.”“그럼 난 어떡하라고?”“저택에 도우미분들도 많고 의사 선생님도 있잖아요. 박한빈 씨를 돌볼 사람 충분하죠.”“난 다른 사람이 내 몸에 손대는 거 싫어.”
“걱정 마, 엄마 괜찮으니까.”하늘이는 문가에 서서 성유리를 바라보았다.한참을 그러던 아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다시 감기 옮으면 어떡해?”그 말에 성유리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괜찮아, 엄마 마스크 쓰고 있잖아.”그래도 하늘이는 여전히 망설이는 눈치였다.망설이던 아이는 결국 괜찮다는 성유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성유리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시간이 많이 늦었으니까 이제 가서 자. 혼자 잘 수 있겠어?”“응!”하늘이는 성유리의 말에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나 이제 다 컸어.”“그래, 그럼 가서 쉬어.”하늘이는 여전히 아쉬운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섰다.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성유리는 입가에 띠고 있던 미소를 점차 거뒀다.하늘이가 방으로 돌아가 문을 닫은 걸 확인한 뒤에야 성유리도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낮 동안 너무 오래 잠들었던 탓인지 꽤 늦은 시간이었지만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침대에 누운 채 한동안 창밖을 바라보다가 결국 다시 눈을 감고 억지로 잠을 청하려 했다.그런데 그때, 밖에서 들려오는 아주 익숙한 발소리.그걸 듣는 순간 성유리는 순식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그러나 성유리는 눈을 뜨지 않고 그대로 가만히 누워 있었다.곧 남자가 천천히 다가와 침대 곁에 서더니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그제야 성유리는 몸을 뒤로 빼며 경계하듯 눈을 떴다.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에 박한빈은 순간 멈칫했다. 그러나 이내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열은 안 나는지 보려고 했어.”“전 괜찮아요.”성유리는 박한빈이 행여 다른 말을 할까 두려워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박한빈 씨는 서재에서 주무셔아 하는 거 아니었어요?”“잠이 안 와.”“그러면 그냥 조용히 나가주세요. 제 잠까지 방해하지 말고.”성유리는 단호하게 말했지만 박한빈은 미동도 없었다.한동안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그의 모습에 성유리는 점점 짜증이 밀려왔고 손을 뻗어 그를 밀어내려 했다.“빨리 나가시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