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그것 때문인지, 박한빈은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오늘 날씨 참 좋네요.”아침 식사를 하는 와중, 성유리가 박한빈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저 오늘 사씨 가문에 가고 싶어요. 가도 괜찮을까요?”박한빈은 처음에 성유리가 자신에게 말을 걸자 기뻐했지만 이어진 그녀의 말에 얼굴 표정이 굳어졌다.그러나 성유리는 진지한 눈빛으로 박한빈을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전에 약속했잖아요. 아니면 저한테 거짓말한 거예요?”“거짓말한 적 없어.”박한빈은 대답하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하지만 사씨 가문에 가려는 이유가 뭐지?”“그분들에게 정식으로 사과를 해야 해요.”성유리가 대답했다.“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게 꼭 사과일까?”박한빈은 최근 그녀가 겨우 안정을 되찾은 상황에서, 어떠한 돌발 상황도 발생하지 않기를 바랐다.더구나 지금의 사씨 가문은 분명 성유리를 미워하고 있을 것이 뻔했다.마치 박한빈의 이런 생각을 읽은 듯, 성유리가 말을 덧붙였다.“물론 그분들이 저를 용서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알아요. 하지만... 저도 제 마음의 짐을 조금 덜어내고 싶어요.”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계속 말했다.“그동안... 진심으로 감사했어요.”그 말에 박한빈은 입술을 오므리다 천천히 대답했다.“생각해 볼게.”그러자 성유리는 단호하게 말했다.“저는 오늘 꼭 가야겠어요. 만약 동의하지 않으신다면 오늘 바로 이곳에서 나갈래요. 원래... 여기에 머물 이유도 없으니까요.”그녀의 말에 박한빈은 이를 악물었다.“지금... 협박하는 건가?”“그렇게 느끼신다면 협박 맞아요.”성유리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대답했다.그녀의 태도에 박한빈은 깊게 숨을 들이쉰 뒤 말했다.“좋아. 하지만 지금 바로는 안 돼. 적어도 사씨 가문에 미리 연락은 해야 하니까.”“전 오늘 꼭 가야겠어요.”성유리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박한빈은 그녀가 자신이 동의할 것임을 확신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럼에도 결국 어쩔 수 없이 성유리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그는 더 이상 말
성유리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햇빛을 본 날이 언제였는지도 잊어버렸다.거리의 빨간 장식들과 설렘이 가득한 분위기를 보고서야 깨달았다. 새해가 다가오고 있었다는 것을.그렇다면 사하나가 세상을 떠난 지도 벌써 한 달이 넘은 셈이었다.성유리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사씨 가문 저택은 너무 조용했다.성유리는 이곳에 몇 번 와본 적이 있었다.가끔 사하나가 하늘이를 데리고 이곳에서 놀 때면, 성유리는 직접 하늘이를 데리러 오곤 했다.그럴 때마다 성유리가 문밖에 도착하기도 전에 하늘이가 안에서 즐겁게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류수미는 그런 하늘이를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사하나에게 빨리 결혼하라고 재촉하곤 했다.그리고 사하나는 항상 못마땅하다는 듯 엄마인 류수미의 말에 반박했다.류수미는 겉으로는 꾸짖는 말을 했지만 진심으로 딸을 나무라는 적은 없었다.성유리는 그녀가 사하나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고 있었다.그래서 나중에 사하나가 결혼하기 싫다고 고집했을 때도 류수미는 끝내 그녀에게 강요하지 않았다.하지만 그 깊은 사랑은 사하나의 죽음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성유리.”박한빈의 목소리가 갑자기 들려왔다.그러면서 그는 성유리의 손을 꼭 잡았다.갑작스러운 행동에 성유리는 멈칫하며 고개를 돌렸고 박한빈은 얼굴을 찌푸린 채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저 괜찮아요.”성유리가 금세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 뒤, 차 문을 열고 내리자 박한빈도 곧 따라 내렸다.박한빈이 미리 사씨 가문의 가족들에게 방문을 알렸기에 집안의 도우미들이 매우 공손하게 그들을 맞아주었다.류수미와 달리 사민혁은 비교적 침착하고 이성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그럼에도 그는 웃지 않았다.단지 고개를 살짝 끄덕일 뿐이었다.그의 옷차림은 여전히 깔끔하고 단정했지만 나이가 훨씬 더 들어 보였다.소파에 앉아 있을 때, 사민혁의 등이 다소 굽어 있는 것이 눈에 확 띨 정도였다.“사모님은 어디에 계세요?”성유리가 조용히 물었다.“위층에 있다. 몸 상태가
분명히 사민혁은 자기 아내 상태를 매우 걱정하고 있었다.그는 이내 박한빈을 쳐다보며 물었다.“성유리 씨가 제 아내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겁니까?”박한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저도 잘 모릅니다.”아무도 그 답을 알지 못했기에, 두 사람은 그저 조용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박한빈은 수없이 많은 상황을 상상했다.혹시라도 문제가 생기면 이곳이 어디든 상관없이 바로 방 안으로 뛰어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하지만 의외로 방 안은 계속 조용했다.두 사람의 대화는 마치 차분하게 이루어지는 평범한 대화처럼 느껴졌다.그런데도 박한빈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가득했다.이 조용함이 폭풍 전야 같은 불길한 신호일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곧 큰일이 벌어질 것처럼 느껴졌다.그러나 예상과는 다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성유리가 방에서 걸어 나왔다.놀랍게도 그녀의 얼굴은 이전보다 훨씬 편안해 보였다.마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사람처럼 말이다.사민혁을 마주한 성유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사민혁은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나 성유리는 그의 반응에 신경 쓰지 않고 박한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저희 이제 그만 가요.”박한빈의 머릿속은 여전히 의문투성이였다.하지만 성유리에게 직접 묻지 않고 조용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성유리는 그의 따뜻하고 건조한 손을 잠시 내려다보았지만 아무 말 없이 손을 잡은 채 함께 앞으로 걸어갔다.박한빈이 사민혁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넨 후, 두 사람은 그 집을 나섰다.가는 길에 박한빈이 먼저 성유리에게 물었다.“방금 류수미 씨에게 무슨 말을 했어?”“별거 아니에요.”성유리가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하자 박한빈은 그녀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며칠 전에 하나 씨가 꿈에 나왔어요. 저와 작별 인사를 나누면서 어머니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어요. 그런데 하나 씨는 어머니를 직접 만나러 가지 못했죠. 아마 어머니가 상
박한빈은 원래 성유리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녀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전에 하늘이한테 선물 주고 싶다고 하시지 않았어요?”성유리가 물었다.“지금 사면 되잖아요.”“하늘이가 좋아할까?”박한빈은 망설이며 되물었다.그러자 성유리는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좋아할 거예요. 하늘이는 정말 단순한 아이거든요. 누가 자기를 좋아하는지 또 누가 그렇지 않은지 잘 느끼죠. 또 그렇게 오래 마음에 담아두지도 않아요. 박한빈 씨가 진심으로 다가가면 금방 받아들일 거예요.”성유리는 박한빈을 바라보며 말을 덧붙였다.“박한빈 씨도 하늘이를 사랑하잖아요. 맞죠?”박한빈은 이런 직접적인 질문에 익숙하지 않았다.잠시 멈칫한 그는 천천히, 그러나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성유리는 그런 박한빈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렇다면 하늘이도 느낄 거예요.”“뭘 사면 좋을까?”결국 성유리의 추천으로 박한빈은 하늘이에게 새 그림 도구 세트와 만화책 세트를 선물로 사기로 했다.두 사람이 엔젤 월드로 돌아갔을 때, 하늘이는 무척 신이 나 있었다.그리고 박한빈이 선물을 건네자 놀란 표정으로 멈칫하더니 이내 성유리를 바라보았다.그 눈빛은 마치 그녀의 허락을 구하는 듯했다.성유리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하늘이는 입술을 깨물며 작은 목소리로 고맙다는 인사를 건넨 뒤 선물을 건네받았다.성유리는 하늘이를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이것이 하늘이가 박한빈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신호임을 알았다.잠시 후, 김서영이 성유리에게 다가왔고 그녀의 눈에는 연민의 감정과 안도의 감정이 담겨 있었다.김서영은 아무 말 없이 성유리를 꼭 끌어안고는 등을 토닥여줬다.성유리는 그녀의 품에 가만히 안겨 있다가 김서영이 그녀를 놓아주자 미소 지으며 말했다.“고맙습니다. 그동안 많이 신세를 졌어요.”“신세라니? 하늘이는 원래 내 손녀야. 이렇게 함께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기쁜데.”김서영은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표정이 살짝 바뀌었지만 성유리를 쳐다보니
밤이 깊어지자 거리에 있는 붉은 색의 등불들이 더욱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붉게 물든 풍경은 기쁨을 상징했지만 성유리의 눈에는 마치 선명한 피처럼 보였다.실버 포레스트로 돌아온 뒤, 박한빈은 곧장 서재로 향했다.요즘 그는 서재에서 잠을 자곤 했다.가끔 성유리가 깨어나 박한빈을 볼 때면 그는 침대 옆에 조용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박한빈은 절대 선을 넘지 않았고 오늘 밤도 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원래대로라면 성유리는 씻고 나서 바로 침대로 돌아가 쉬어야 했다.하지만 갑자기 아래층으로 내려가 물 한 잔을 따랐고 서재의 불빛은 여전히 환하게 켜져 있었다.문틈으로 보이는 박한빈은 전화 통화를 하며 키보드를 빠르게 두드리고 있었다.그의 속도는 평소보다 더 빨랐고 행동은 더욱 단호했다.그러다 인기척이 들리자 박한빈의 시선이 곧장 문 쪽으로 향했다.그는 아직 업무 모드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눈빛에 날카로움이 묻어 있었다.하지만 방문한 사람이 성유리임을 알아차리자 박한빈의 표정은 빠르게 바뀌었다.그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모습에 멈췄다.난방이 잘 돼 있는 실내이긴 하지만, 그녀의 옷차림은 다소 “가볍게” 느껴졌다.성유리가 지금 입고 있는 옷은 박한빈이 미리 준비해 둔 옷이었다.그는 성유리와 함께 이곳에서 지낼 것을 예상하고 사계절 옷을 마련해 두었다.하얀 슬립 원피스에 헐렁한 가운을 걸친 그녀는 방금 머리를 감은 듯 젖은 머리칼이 어깨를 따라 내려왔고 그중 몇 가닥은 가슴 위로 흘러내렸다.그리고 성유리의 손에는 물이 담긴 컵이 들려 있었다.“박 대표님?”수화기 너머에서 조심스럽게 박한빈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그제야 박한빈은 어렵사리 시선을 거두고 몇 마디 대화를 마친 후 통화를 끊어버렸다.그 사이 성유리는 물컵을 박한빈 앞에 내려놓으며 물었다.“일하시는 데 방해한 건 아니죠?”“아니야.”박한빈이 재빨리 대답했다.그러나 말을 내뱉고 나서야 자신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약간 쉰 것을 깨달았다.그는 무심결에 헛기침을 하고 자세
성유리는 자연스럽게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있었다.이런 행동은 과거에도 수없이 반복했던 일이었다.하지만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기 때문일까. 지금의 상황과 곧 다가올 순간을 떠올리자 성유리는 갑자기 긴장되기 시작했다.그래서 자연스럽게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지만 어쩔 수 없었다.박한빈은 이내 그녀를 조심스레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성유리는 이미 눈을 질끈 감고 있었지만 예상했던 일이 일어나지 않자 혼란스러워하며 눈을 살며시 떴다.박한빈은 성유리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있었다.그 행동에 성유리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그러자 박한빈은 살짝 미소를 짓더니 그녀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됐어. 이제 푹 자. 나 여기 있으니까.”성유리는 입술을 꼭 다물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원했던 건 이게 아니었으니까.박한빈의 시선과 행동에서 성유리를 향한 감정이 드러나고 있었지만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그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박한빈 씨는 하고 싶지 않아요?”결국 의아함을 참지 못한 성유리가 물었다.그 물음에 박한빈은 잠시 멈칫하더니 성유리의 손을 잡아줬다.“너는 이제 막 회복된 상태잖아. 좀 더 쉬는 게 좋을 것 같아. 이런 일은... 서두를 필요 없어. 앞으로 우리에게는 시간이 많으니까.”박한빈은 성유리에게 설명해 주는 것 같았지만 사실 자기 스스로를 설득하는 것 같았다.그리고 그의 손에는 약간의 힘이 더해졌다. 하지만 이내 성유리가 아플까 봐 겁이 난 듯 서둘러 힘을 풀었다.성유리는 박한빈에게 할 말이 더 있었지만 이내 하려던 말을 삼켰다.어차피 이건 박한빈이 선택한 일이었다.‘난 충분히 노력했어.’박한빈이 원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강요할 이유도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더 이상 미안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성유리는 조용히 눈을 감았고 그저 이렇게 끝내기로 했다.그러나 박한빈의 마음속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그는 속으로 다짐했다.만약 그녀가 한 번 더 요청한다면 이번엔 자신을 억누르지 않겠다고.하
‘곧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거야.’박한빈은 이런 생각을 했다.그렇게 되면 이제부터 두 사람은 행복하게 함께 살 수 있을 것이다.어떤 사람도, 어떤 일도 더 이상 그들을 방해할 수 없을 것이다....성유리는 새벽녘에 눈을 떴다.이 방에 머문 지도 꽤 되었지만 깨어날 때마다 여전히 낯설고 혼란스러웠다.이곳이 경운시가 아니라는 걸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공간이었다.그러니 한빛시에서 벌어진 일도 단순한 악몽이 아니라는 뜻이었다.그건... 실제로 존재하는 일이었다.하지만 이번엔 성유리 혼자가 아니었다.성유리가 고개를 돌리자 바로 옆에 누워 있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그의 손은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있었고 얼굴은 그녀의 목덜미에 파묻혀 있었다.따뜻한 숨결이 목을 스치며 약간의 간지러움을 주었다.성유리는 그 손길을 떼어내지 않고 조용히 옆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그러나 그는 꿈속에서도 철저히 경계심을 유지하는 듯했다.성유리가 잠시 박한빈을 바라보고 있자 그는 눈을 번쩍 떴다.그렇게 둘의 시선이 정확히 마주쳤다.성유리는 순간 멈칫하더니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너...”박한빈이 뭔가 말하려 했지만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성유리가 갑자기 몸을 기울여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밖은 여전히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고 창문 너머로는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하지만 방 안은 난방이 켜져 있어 춥지 않았고 오히려 체온이 점점 더 높아졌다.박한빈의 힘은 강했다. 자신의 허리를 꽉 쥐고 있는 박한빈의 힘에 성유리는 아프기까지 했다.사실 그는 더 부드럽게 하려 했지만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버렸기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처럼 보였다.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풋내기처럼 말이다. 박한빈은 신혼 첫날 밤보다도 더 서툴렀다.그는 예전과 달리 자신의 힘을 조절하지 못했고 성유리가 손톱으로 그의 팔뚝을 꽉 눌렀을 때에야 그는 자신의 행동을 자각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아프게 했어?”성유리는 눈을 감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박한빈은 성유리가 화가 난
성유리가 다시 깨어났을 때, 이미 바깥은 날이 밝아 있었다.그녀는 박한빈이 회사에 갔을 거라 생각했지만 몸을 돌리자 뜻밖에도 그는 여전히 그녀 옆에 있었다.박한빈은 침대 머리맡에 등을 기댄 채 노트북으로 일을 하고 있었고 화면 밝기를 최저로 낮추고 키보드 소리도 최소화한 상태였다.성유리는 놀란 듯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멈칫했다.그때, 박한빈은 금방 성유리의 반응을 알아채고 말했다.“깼어?”그는 노트북을 닫으며 미소를 지었다.“피곤해? 어디 아픈 데는 없어?”그제야 성유리는 몸이 여기저기 쑤시고 아프다는 걸 뒤늦게 느꼈다.하지만 고통은 이제 그녀에게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그래서 성유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괜찮아요.”“배고프면 말해. 먹을 걸 가져오라고 할게.”박한빈이 그렇게 말하며 침대에서 내려가려 하자 성유리가 갑자기 물었다.“오늘 회사 안 가셔도 돼요?”“응. 안 가도 돼.”“사실... 굳이 매일 여기 있으실 필요는 없어요. 저 이제 괜찮아졌으니까요. 대표님께서 매일 출근 안 하시면 정말 괜찮겠어요?”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이 웃음을 터뜨리더니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되물었다.“왜? 내가 회사 말아먹을까 봐 걱정돼?”“걱정 마. 집에서도 다 처리하고 있으니까.”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떨군 채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그녀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자 박한빈은 자리에서 일어나 누군가에게 죽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그리고 한편, 성유리는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나 세면대 앞으로 갔다.화장실에서 나왔을 때 박한빈은 이미 음식을 테이블 위에 차려두고 있었다.“왜 식탁까지 내려가서 안 먹어요?”성유리의 질문에 박한빈은 잠시 멈칫하다가 웃으며 대답했다.“글쎄, 그냥 방에 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박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며 성유리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넓은 테이블과 소파가 있었음에도 박한빈은 굳이 그녀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성유리는 약간 불편해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홍지은은 늘 같은 대답을 반복했다.“성유리는 이런 자리를 좋아하지 않아요. 제가 여러 번 말해봤지만 걔는 원래 이런 곳에 나오길 싫어해서요.”오늘도 그녀는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괜찮아요. 그래도 한번 얼굴을 비추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요? 마침 경매회도 곧 시작하는데 저도 박 대표 부인의 취향이 궁금하네요.”“그러게 말이에요. 어차피 나는 경쟁 상대가 될 수도 없으니까 미리 유리 씨가 뭘 원하는지 알아두고 포기하는 게 낫겠어요.”홍지은도 사람들을 따라 웃으며 말했다.“유리는 오지 않을 거예요. 전에도 물어봤는데 딱히 관심 가는 물건이 없다고 했거든요.”그녀는 태연하게 말을 이어 나가려 했다. 그러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곧 현실은 완전히 뒤집혔다.왜냐하면 그날 경매장에 성유리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올해 금성에서 열리는 첫 대형 경매 행사였다.특히 경매 목록에 포함된 한 세트의 보석이 큰 주목을 받으면서 도시 내에서 일정한 신분을 가진 인사들은 전부 참석했다.사실 성유리는 처음에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그런데 전날 밤, 박한빈과 게임 내기를 했다가 패배하는 바람에 박한빈의 요구 조건을 들어주기로 했다.그 조건이 바로 경매장에 함께 가달라는 것이었다.다만, 박한빈도 굳이 오래 있을 생각은 없다고 했다.“그냥 얼굴만 비추고 가면 돼. 너 피곤해지면 바로 나가자.”그 말을 듣고 나서야 성유리는 마지못해 동행을 허락했다.성유리가 입장하는 순간, 그녀의 시선은 홍지은에게로 향했다.그녀는 칵테일 잔을 들고 주변 사람들과 해맑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비록 남편은 별다른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이런 자리에서만큼은 홍지은에게 자유를 허용했다.어차피 그의 사업 자원 중 상당수가 홍지은의 인맥과 네트워크 덕분에 얻어진 것이었으니까.오늘 그녀는 임신 중임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생기가 넘쳤다.완벽한 메이크업 덕분인지 얼굴에도 빛이 나는 것 같았고 평소보다 더 예뻐 보였다.그런데 이
사실 박한빈은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었다.떠올릴 수 있는 것이라곤 끝없는 공부와 훈련뿐이었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해야 할 것이 많았다.학교 성적은 언제나 최고여야 했고 악기나 골프, 승마를 포함한 다양한 외국어까지 익혀야 했다.어릴 때부터, 사람들은 박한빈의 신분을 부러워했다.박 씨라는 성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영광을 의미했다.하지만 그 영광과 함께 짊어져야 할 무게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만약 지금 그때로 돌아가 다시 선택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떤 삶이 더 나은 것인지조차 그는 확신할 수 없었다.그러나 분명한 것은 박한빈이 평범한 아이로서의 행복을 잃었다는 사실이다.잃을 게 많은 만큼 박한빈은 손에 넣은 것도 많았다.그리고 그는 자신이 짊어졌던 짐을 하늘이에게 만큼은 넘기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그래서 얼마 전, 김서영이 하늘이에게 특별 교육을 시키자고 했을 때 박한빈은 단칼에 거절했다.“박한빈, 네 딸은 분명 앞으로 금성에서 주목받는 존재가 될 거야. 이런 기본적인 것들을 익히지 못하면 그 신분이 아깝지 않겠니?”김서영은 박한빈을 설득하려 했지만 박한빈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뭐가 어떻게 됐든 하늘이는 박한빈의 핏줄이자 친딸이다. 설령 앞으로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더라도 말이다.감히 누가 박한빈의 딸을 무시하고 얕잡아볼 수 있겠는가?그래서 김서영이 뭐라고 하든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그 이야기를 마친 후, 박한빈의 품 안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성유리는 입을 꾹 닫아버렸다.박한빈이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니 그녀는 살짝 찌푸린 미간과 다물린 입술로 조용히 생각에 잠겨있었다.그 모습을 본 박한빈은 순간 자신이 뭔가 실수한 것인가 싶어 물었다.“왜 그래?”“아무것도 아니에요.”성유리는 빠르게 화제를 돌리며 박한빈에게 물었다.“그런데 이거 왜 아직도 안 멈추죠?”“곧 멈출 거야.”박한빈은 짧게 대답하다 문득 깨달았다.“설마... 지금 나를 가슴 아파하는 거야?“아니거든요?”성유리는 전혀 망설
박한빈은 천천히 웃음을 거두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직접 물을 따라왔다.성유리는 그가 자신이 마실 물을 준비하는 줄 알았다.그런데 박한빈이 몸을 휙 돌리곤 성유리에게 컵을 내밀었다.“방금 건 그냥 장난이었어. 재미없었지?”그의 말에 성유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물컵을 받아 들었다.그것만으로도 이미 박한빈에게는 충분한 대답이었다.“푹 쉬어.”박한빈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성유리에게 말했다.성유리는 물 한 모금을 마신 뒤, 컵을 옆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잠깐 나갔다 올게요.”그녀가 문 쪽으로 향하려 하자 박한빈이 손목을 붙잡았다.“어디 가려고?”“정원이요. 햇볕 좀 쬐려고.”“나도 같이 가.”“아까 그렇게 아프다면서 괜찮으세요?”성유리는 박한빈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그 눈빛에는 박한빈을 향한 의심이 가득했다.그러나 박한빈은 개의치 않고 태연하게 말했다.“나도 햇볕 좀 쬐고 싶어. 그리고 의사가 말했잖아? 내 면역력 좋다고.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니래.”‘심각하지 않다?’‘그러면 아까까지는 왜 그렇게 책임지라고 난리였는데?’그 말이 목구멍까지 나오려 했지만 결국 성유리는 하려던 말을 꾹 삼켰다.그녀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박한빈은 마치 그것을 허락이라도 받은 것처럼 성유리의 손을 끌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방에서 본 그대로 오늘 날씨는 유난히 화창했다.햇살 아래, 정원의 회전목마가 선명한 색채를 띠고 있었다.박한빈이 특별히 주문 제작해 놓은 것이라 그런지 원색의 유채가 한층 더 생생해 보였다.그 장면을 바라보던 성유리는 왠지 모르게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듯했다.그런데, 박한빈은 줄곧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그가 보내는 그윽한 시선을 느꼈지만 성유리는 한참을 모른 척했다.박한빈이 먼저 말을 걸기 전까지는.“한번 타볼래?”“뭐를요?”“회전목마.”성유리는 그의 말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제가 어린애도 아니고.”“그럼 어릴 때는 타봤어?”그 질문에 성유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잠시 침
“그럼 자. 난 네가 잠들면 나갈게.”박한빈의 말을 성유리가 철석같이 믿을 리가 없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는 그와 다투는 것도 귀찮았다.그래서 그냥 이불을 끌어당겨 몸을 푹 덮고 등을 돌리고는 박한빈에게서 멀어졌다.사실 처음에는 전혀 졸리지 않았지만 조금 전 박한빈과 한바탕 실랑이를 벌인 탓인지 피곤함이 몰려왔다.머릿속에 들던 생각도 점점 흐려지고 그렇게 결국 잠에 빠져들었다.아니나 다를까, 박한빈의 말을 거짓말이었다.다음 날 아침, 성유리가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바로 옆에 누워 있는 박한빈이었다.그는 한쪽 팔로 그녀를 꼭 끌어안은 채 잠에 들어있었는데 성유리는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당장 박한빈을 밀어내려 했지만 갑자기 그가 몸을 돌려 두어 번 기침을 했다.그리곤 반쯤 감긴 눈으로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나... 너한테서 감기가 옮은 것 같아.”성유리는 그 말에 그대로 멈춰버렸다.하지만 박한빈은 성유리의 손을 잡아 자기 이마에 갖다 댔다.“한번 만져봐. 나 열 나는 거 같지 않아?”성유리는 일단 체온계를 가져와 박한빈의 체온을 재봤다.그러나 체온계에 표시된 건 아주 멀쩡한 수치였다.그 말인즉 박한빈은 열이 안 나고 있다는 것이었고 감기에 걸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그런데도 박한빈은 여전히 몸이 아프다며 자신이 감기에 걸렸으니 여기서 병을 치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이전의 고고하고 차가운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지금은 마치 억지를 부리는 아이 같았다.결국 성유리는 의사를 불러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뿐만 아니라 아예 다른 방으로 옮겨서 지내기로 결심했다.하지만 박한빈은 그녀의 속내를 간파한 듯, 서둘러 앞을 막아섰다.“뭐 하려는 거야?”“방을 옮길 거예요.”성유리는 담담하게 대답을 이어갔다.“의사 선생님께서 교차 감염을 조심해야 한다고 했어요.”“그럼 난 어떡하라고?”“저택에 도우미분들도 많고 의사 선생님도 있잖아요. 박한빈 씨를 돌볼 사람 충분하죠.”“난 다른 사람이 내 몸에 손대는 거 싫어.”
“걱정 마, 엄마 괜찮으니까.”하늘이는 문가에 서서 성유리를 바라보았다.한참을 그러던 아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다시 감기 옮으면 어떡해?”그 말에 성유리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괜찮아, 엄마 마스크 쓰고 있잖아.”그래도 하늘이는 여전히 망설이는 눈치였다.망설이던 아이는 결국 괜찮다는 성유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성유리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시간이 많이 늦었으니까 이제 가서 자. 혼자 잘 수 있겠어?”“응!”하늘이는 성유리의 말에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나 이제 다 컸어.”“그래, 그럼 가서 쉬어.”하늘이는 여전히 아쉬운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섰다.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성유리는 입가에 띠고 있던 미소를 점차 거뒀다.하늘이가 방으로 돌아가 문을 닫은 걸 확인한 뒤에야 성유리도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낮 동안 너무 오래 잠들었던 탓인지 꽤 늦은 시간이었지만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침대에 누운 채 한동안 창밖을 바라보다가 결국 다시 눈을 감고 억지로 잠을 청하려 했다.그런데 그때, 밖에서 들려오는 아주 익숙한 발소리.그걸 듣는 순간 성유리는 순식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그러나 성유리는 눈을 뜨지 않고 그대로 가만히 누워 있었다.곧 남자가 천천히 다가와 침대 곁에 서더니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그제야 성유리는 몸을 뒤로 빼며 경계하듯 눈을 떴다.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에 박한빈은 순간 멈칫했다. 그러나 이내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열은 안 나는지 보려고 했어.”“전 괜찮아요.”성유리는 박한빈이 행여 다른 말을 할까 두려워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박한빈 씨는 서재에서 주무셔아 하는 거 아니었어요?”“잠이 안 와.”“그러면 그냥 조용히 나가주세요. 제 잠까지 방해하지 말고.”성유리는 단호하게 말했지만 박한빈은 미동도 없었다.한동안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그의 모습에 성유리는 점점 짜증이 밀려왔고 손을 뻗어 그를 밀어내려 했다.“빨리 나가시라고요.”
약을 다 먹은 후 잠에 든 성유리는 그날 오후까지 자버렸다.그 덕에 휴대폰에 쌓인 메시지들을 저녁이 되어서야 확인할 수 있었다.메시지에는 여러 가지 내용이 담겨 있었다.어떤 사람들은 홍지은이 올린 사진 속 사람이 성유리가 맞냐고 물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녀가 금성에 돌아온 것을 확인하며 언제 한번 만나 밥을 먹자고 했다.하지만 사실, 성유리가 금성에 돌아온 걸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터였다.지난번 사하나의 장례식 때도 이미 업계 사람들 대부분이 참석했었으니까.다만, 그때 성유리는 사씨 가문 사람들에게 쫓겨난 신세였다.심지어 그 자리에서 불길한 존재라는 말까지 들어야 했다.그랬던 사람들이 이제 와서 이렇게 태도를 180도 바꾸는 건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기회주의적으로 상황에 따라 태도를 바꾸고 손익을 따져 움직이는 건 인간의 본능 같은 것이니까 말이다.게다가 메시지를 보낸 이들의 이름조차 성유리는 대부분 기억나지 않았다.그들이 무슨 말을 하든, 어떻게 생각하든 이젠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예전의 성유리였다면 아무리 그들이 싫어도 박한빈의 아내라는 신분 때문에 억지로라도 상대해 줬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더 이상 그런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들이 어떻게 나오든 이젠 상관없었다.그래서 성유리는 메시지를 한 번 훑어본 뒤, 아무런 답장도 하지 않고 휴대폰을 옆에 툭 던져버렸다.그때, 하늘이가 성유리를 찾으러 방에 들어왔다.아직 감기가 완전히 낫지 않은 터라 혹시라도 다시 옮길까 봐 그녀와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문가에 서 있었다.“엄마, 괜찮아?”하늘이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성유리를 바라보며 물었다.“많이 아파?”성유리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괜찮아. 너는 어때?”“나도 괜찮아! 의사 아저씨가 말했어. 내일이면 완전히 나을 거래! 봐, 나 오늘도 이렇게 멀쩡해!”말을 마친 하늘이는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두 번이나 뛰어 보였다.그 모습을 보던 성유리는 더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이리 와.”“그건
“하늘이가 아팠을 때도...”말을 꺼내던 박한빈 스스로 말을 뚝 멈췄다.박한빈은 알고 있었다. 이미 그 일로 인해 성유리에게 영원히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지금 이 순간, 두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것 자체가 기적 같은 일이었다.가끔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날 때면 그는 성유리를 꼭 끌어안아야만 했다.그래야만 그녀가 정말로 곁에 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지나간 과거에 대해서는 서로 오랫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그런데 오늘, 박한빈이 먼저 그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하지만 성유리는 그때 일을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박한빈이 말을 꺼내자마자 그녀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고 그에게 잡힌 손을 빼려고 애를 쓰는 게 보였다.그러나 박한빈은 마치 성유리가 어떻게 나올지 알고 있었다는 듯 그녀의 손을 더욱 꼭 쥐었다.“그때 내가 잘못한 거 알아.”박한빈은 한층 더 낮아진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그땐 그냥... 너무 화가 났고 받아들이기 싫었어.”“네가 내게 한 번만 져주길 바랐어. 처음 호텔에서도... 난 네가 내게 순순히 져주길 바랐다고.”“그때 네가 내 앞에서 돌연히 동의서에 서명하라고 했을 때 난 마치... 팔려 가는 기분이었어.”“그래서 일부러 버텼던 거야. 그냥 네가 나한테 한 발자국만 양보해 주길 바랐을 뿐이었어.”박한빈은 고개를 푹 숙이며 계속 말했다.“그때 난 정말 형편없었어. 아무리 그래도 하늘이의 목숨을 가지고 그런 식으로 도박을 하듯 행동해서는 안 됐어.”잠시 숨을 고르던 그는 다시 고개를 들어 성유리를 바라봤다.“하지만 유리야, 이거 하나만 믿어 줘. 나도 우리 아이를 사랑해. 내가 너를 이렇게 사랑하는데 어떻게 네 아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그의 진심 어린 말에도 성유리는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사실 성유리도 알고 있었다.지금 자신이 내린 선택과 현재의 태도가 과거의 신념과는 어긋난다는 것을.늘 스스로를 다독이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이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고
홍지은이 올린 사진에는 성유리의 얼굴이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 있었다.하지만 두 사람이 앉아 있는 뒤로 경매장에서 산 조명이 너무 잘 보였다. 업계 사람들은 익명의 구매자가 알려지진 않았지만 사실 다들 눈치 차리고 쉬쉬하고 있을 뿐이었다.거기에 더해 성유리는 전에 이런 활동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많은 사람들은 성유리의 옛날 사진과 홍지은이 올린 사진을 몇 번이나 확인하곤 그 사람이 정말 성유리가 맞다는 것을 확신했다.그렇게 성유리와 박한빈의 사이는 순식간에 퍼졌지만 몸이 불편했던 그녀는 바깥세상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고 있었다.원래 약간의 감기 기운이라고 생각해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점심부터 갑자기 고열에 시달렸다.도우미가 다시 박한빈에게 연락했을 때, 그는 의사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의사는 빠르게 성유리의 체온을 재보고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병원으로 향해 피검사를 해봐야 한다고 말했다.“피검사요? 상황이 그렇게 심각한가요?”박한빈은 의사의 말에 사뭇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아닙니다. 사모님의 지금 상황으론 감기 때문에 생기는 증상이 맞는 것 같은데 피검사를 하면 다른 상황을 더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저는...”“다른 상황이요?”박한빈은 의사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고 그때, 가만히 누워있던 성유리가 입을 열었다.“의사 선생님, 걱정마세요. 저 임신 안 했어요.”그녀의 말에 박한빈은 한껏 당황하며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바라보았다.하지만 성유리는 아주 차분한 말투로 의사에게 계속 말했다.“그러니까 병원 안 가도 돼요. 바로 약 처방 해주세요.”“아... 네.”의사는 잠시 주춤거리다 결정을 내린 듯 성유리에게 하려던 말을 하기 시작했다.“사모님, 어떤 상황엔 생리주기가 일정하다고 해서 임신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임신초기일 수도 있으니까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제대로 된 피임을 하지 않으셨다면...”“저 했어요.”성유리의 대답에 박한빈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계속 피
그의 말에 항상 생글생글 웃던 홍지은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이 문제는... 사실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필경 전에 성유리가 박한빈과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세상에 있는 그저 그런 평범한 사람일 뿐이었으니 말이다.그래서 홍지은은 성유리의 존재를 잊어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에게 뭐라 할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성유리는 지금 엄연히 박한빈의 안사람이자 사모님이다.처음에 이 소식을 접해 들은 홍지은은 거짓말이라고 확신했다. 두 사람이 정말 다시 만난다면 이렇게 조용할 수가 없다고 확신했다.게다가 성유리는 전에 항상 박한빈의 아내 혹은 여자 친구의 신분으로 각종 모임이나 연회에 참석했었다.그러나 최근 몇 년간 홍지은은 성유리의 모습을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다.어젯밤 직접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홍지은은 여전히 믿지 못했을 것이다. 이게 다 박한빈이 한 일이라는 사실을.지금 그의 신분과 지위로 만약 성유리와 다시 만난다는 일이 세상에 공개된다면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것이다.그리고 박한빈은 성유리가 방해받지 않기를 원했다. 다르게 말하면 그는 지금 최선을 다해 성유리를 지켜주고 있었다.이건 어떠한 감정일까?박한빈을 졸졸 따라다니던 여자들이 적지만은 않았을 텐데 그는 시종일관 성유리만 선택했다.그제야 홍지은은 성유리에 대한 박한빈의 감정을 알아차렸다.그게 아니면 왜 어젯밤부터 끈질기게 성유리와 만나겠다고 고집을 부렸겠는가.전에 홍지은이 알던 평범하기 짝이 없던 성유리라면 그녀는 자신이 사과할 가치도, 필요도 없다고 느꼈을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박한빈이 이렇게 단번에 자신의 생각을 맞출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었다.그래서 그의 말에 도무지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멍해 있다 한참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저... 전에 유리가 어디 있는지 못 찾았어요. 그래서 사과를 못했죠.”“그러십니까?”박한빈은 살짝 미소 지으며 홍지은에게 물었지만 그녀는 그 미소가 무엇보다 더 두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