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리는 자연스럽게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있었다.이런 행동은 과거에도 수없이 반복했던 일이었다.하지만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기 때문일까. 지금의 상황과 곧 다가올 순간을 떠올리자 성유리는 갑자기 긴장되기 시작했다.그래서 자연스럽게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지만 어쩔 수 없었다.박한빈은 이내 그녀를 조심스레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성유리는 이미 눈을 질끈 감고 있었지만 예상했던 일이 일어나지 않자 혼란스러워하며 눈을 살며시 떴다.박한빈은 성유리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있었다.그 행동에 성유리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그러자 박한빈은 살짝 미소를 짓더니 그녀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됐어. 이제 푹 자. 나 여기 있으니까.”성유리는 입술을 꼭 다물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원했던 건 이게 아니었으니까.박한빈의 시선과 행동에서 성유리를 향한 감정이 드러나고 있었지만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그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박한빈 씨는 하고 싶지 않아요?”결국 의아함을 참지 못한 성유리가 물었다.그 물음에 박한빈은 잠시 멈칫하더니 성유리의 손을 잡아줬다.“너는 이제 막 회복된 상태잖아. 좀 더 쉬는 게 좋을 것 같아. 이런 일은... 서두를 필요 없어. 앞으로 우리에게는 시간이 많으니까.”박한빈은 성유리에게 설명해 주는 것 같았지만 사실 자기 스스로를 설득하는 것 같았다.그리고 그의 손에는 약간의 힘이 더해졌다. 하지만 이내 성유리가 아플까 봐 겁이 난 듯 서둘러 힘을 풀었다.성유리는 박한빈에게 할 말이 더 있었지만 이내 하려던 말을 삼켰다.어차피 이건 박한빈이 선택한 일이었다.‘난 충분히 노력했어.’박한빈이 원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강요할 이유도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더 이상 미안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성유리는 조용히 눈을 감았고 그저 이렇게 끝내기로 했다.그러나 박한빈의 마음속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그는 속으로 다짐했다.만약 그녀가 한 번 더 요청한다면 이번엔 자신을 억누르지 않겠다고.하
‘곧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거야.’박한빈은 이런 생각을 했다.그렇게 되면 이제부터 두 사람은 행복하게 함께 살 수 있을 것이다.어떤 사람도, 어떤 일도 더 이상 그들을 방해할 수 없을 것이다....성유리는 새벽녘에 눈을 떴다.이 방에 머문 지도 꽤 되었지만 깨어날 때마다 여전히 낯설고 혼란스러웠다.이곳이 경운시가 아니라는 걸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공간이었다.그러니 한빛시에서 벌어진 일도 단순한 악몽이 아니라는 뜻이었다.그건... 실제로 존재하는 일이었다.하지만 이번엔 성유리 혼자가 아니었다.성유리가 고개를 돌리자 바로 옆에 누워 있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그의 손은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있었고 얼굴은 그녀의 목덜미에 파묻혀 있었다.따뜻한 숨결이 목을 스치며 약간의 간지러움을 주었다.성유리는 그 손길을 떼어내지 않고 조용히 옆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그러나 그는 꿈속에서도 철저히 경계심을 유지하는 듯했다.성유리가 잠시 박한빈을 바라보고 있자 그는 눈을 번쩍 떴다.그렇게 둘의 시선이 정확히 마주쳤다.성유리는 순간 멈칫하더니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너...”박한빈이 뭔가 말하려 했지만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성유리가 갑자기 몸을 기울여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밖은 여전히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고 창문 너머로는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하지만 방 안은 난방이 켜져 있어 춥지 않았고 오히려 체온이 점점 더 높아졌다.박한빈의 힘은 강했다. 자신의 허리를 꽉 쥐고 있는 박한빈의 힘에 성유리는 아프기까지 했다.사실 그는 더 부드럽게 하려 했지만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버렸기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처럼 보였다.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풋내기처럼 말이다. 박한빈은 신혼 첫날 밤보다도 더 서툴렀다.그는 예전과 달리 자신의 힘을 조절하지 못했고 성유리가 손톱으로 그의 팔뚝을 꽉 눌렀을 때에야 그는 자신의 행동을 자각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아프게 했어?”성유리는 눈을 감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박한빈은 성유리가 화가 난
성유리가 다시 깨어났을 때, 이미 바깥은 날이 밝아 있었다.그녀는 박한빈이 회사에 갔을 거라 생각했지만 몸을 돌리자 뜻밖에도 그는 여전히 그녀 옆에 있었다.박한빈은 침대 머리맡에 등을 기댄 채 노트북으로 일을 하고 있었고 화면 밝기를 최저로 낮추고 키보드 소리도 최소화한 상태였다.성유리는 놀란 듯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멈칫했다.그때, 박한빈은 금방 성유리의 반응을 알아채고 말했다.“깼어?”그는 노트북을 닫으며 미소를 지었다.“피곤해? 어디 아픈 데는 없어?”그제야 성유리는 몸이 여기저기 쑤시고 아프다는 걸 뒤늦게 느꼈다.하지만 고통은 이제 그녀에게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그래서 성유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괜찮아요.”“배고프면 말해. 먹을 걸 가져오라고 할게.”박한빈이 그렇게 말하며 침대에서 내려가려 하자 성유리가 갑자기 물었다.“오늘 회사 안 가셔도 돼요?”“응. 안 가도 돼.”“사실... 굳이 매일 여기 있으실 필요는 없어요. 저 이제 괜찮아졌으니까요. 대표님께서 매일 출근 안 하시면 정말 괜찮겠어요?”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이 웃음을 터뜨리더니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되물었다.“왜? 내가 회사 말아먹을까 봐 걱정돼?”“걱정 마. 집에서도 다 처리하고 있으니까.”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떨군 채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그녀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자 박한빈은 자리에서 일어나 누군가에게 죽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그리고 한편, 성유리는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나 세면대 앞으로 갔다.화장실에서 나왔을 때 박한빈은 이미 음식을 테이블 위에 차려두고 있었다.“왜 식탁까지 내려가서 안 먹어요?”성유리의 질문에 박한빈은 잠시 멈칫하다가 웃으며 대답했다.“글쎄, 그냥 방에 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박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며 성유리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넓은 테이블과 소파가 있었음에도 박한빈은 굳이 그녀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성유리는 약간 불편해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한빈은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성유리만 뚫어져라 쳐다봤다.그 눈빛을 본 성유리는 혹시 그가 자신의 말에 숨은 의도나 계획을 알아차렸을까 봐 마음 졸이고 있었다.하지만 이내, 박한빈이 순순히 동의했다.“그래. 내가 가져다줄게. 언제 필요한데?”“빠르면... 빠를수록 좋죠. 마침 박한빈 씨도 요 며칠 할 일이 없으시지 않나요?”박한빈은 말이 없었다.“오후에 가실래요?”다시 묻는 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더니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조금 강한 박한빈의 힘에 성유리는 뼈마디가 아파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아파요.”“미안. 내가 또 아프게 했네.”박한빈은 금방 사과했지만 목소리에는 어떠한 파동도, 미안하다는 감정도 묻어있지 않았다.성유리가 무슨 말을 더 하려던 때, 박한빈이 먼저 말을 꺼냈다.“그럼 지금 티켓사라고 할게. 아마 오래는 안 걸릴 거야. 저녁에는 돌아올 수 있을 거고.”성유리는 잠깐 멈칫하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노트북이랑 원고 말고 또 필요한 거 있어?”“아니요.”“괜찮아. 도착하면 너한테 영상통화 할게. 받을 거지?”박한빈의 물음에 성유리는 잠시 굳어가는 듯했지만 금세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당연하죠!”“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지금 티켓사라고 한다?”박한빈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려고 방을 나섰고 당일치기였기에 그는 따로 짐을 챙길 필요도 없었기에 준비도 무척이나 빨랐다.성유리는 원래 박한빈더러 경운시에서 하룻밤 자고 오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결국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하도 예민한 사람이니까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거야.’박한빈은 성유리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 그녀의 어떤 거짓말이라도 다 알아차렸고 단번에 진짜 의도를 파악했다.방금 전도 마찬가지로 성유리는 박한빈이 자신의 의도를 알아차린 줄 알았지만 그건 그저 착각이었다.그 시각, 성유리는 저택 안 사람들과 함께 박한빈을 배웅해 주고 있었다.“저녁에 올 거니까 나 기다려야 돼.”박
성유리는 곧 자기 방으로 돌아가 방문을 잠그고는 책상 앞에 마주 앉았다.그리고는 미리 준비한 종이와 연필을 꺼내 들었다. 준비해 둔 종이의 개수와 맞먹게 성유리는 하늘이한테 해줄 말이 많았다.심지어는 하늘이가 새해마다 자신이 쓴 편지를 볼 수 있게 가득 써놓으려는 생각도 했었다.하지만 막상 연필을 집어 드니 도통 무슨 말을 써야 할지 감이 안 잡혔고 머릿속은 하얗게 변해갔다.그러다 문득, 성유리는 사실 자기는 할 말이 그다지 많지 않다고 느꼈다.필경 그녀의 선택은 제일 직접적인 사실이니까, 그리고 하늘이도 자기 같은 나약한 엄마는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그래서 성유리는 엄마로서 하늘이에게 편지를 남길 자격도 없다고 여겨 연필을 천천히 내려놓았다.한참 뒤, 성유리는 다른 서랍을 열어 며칠 동안 몰래 숨겨둔 유리 조각을 꺼냈다.사람을 죽이면 목숨으로 갚는다는 말은 누구라도 다 아는 사실이었다.아무리 부정해도 사하나는 결국 하늘이 때문에 세상을 떠난 것이 확실했고 아직 어린아이에게 성유리는 그 어떠한 상처도, 타격도 주고 싶지 않았다.그러니 사씨 가문에서 원하는 목숨을 성유리는 본인이 갚기로 마음먹었다.이렇게 되면 그들이 두 번 다시는 하늘이가 사하나의 목숨을 앗아갔다는 말을 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어차피 성유리가 자기 생명으로 “빚”을 갚을 거니까.생각에 잠겨있던 성유리는 유리 조각을 손에 들고는 맞은편에 있는 거울을 쳐다봤다.그곳에 있는 커다란 거울은 성유리의 모든 행동을 비추고 있었기에 그녀는 자신의 경동맥을 쉽게 찾아냈다,‘이제 힘껏 그으면 돼.’‘근데 이러면 보기 너무 흉할 텐데.’박한빈이 새로 산 집에서 이렇게 험한 몰골도 죽고 싶지 않았지만 성유리는 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그가 하루 종일 성유리를 지켜보고 모든 말과 동작을 감시하니까.그래서 성유리는 남겨질 집과 박한빈에게 미안한 감정이 가득했다.만약 오늘 그런 핑계를 대 박한빈을 보내지 않았다면 성유리에게는 이런 기회가 주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생각에 잠겨
뒤따라 방으로 들어온 가사도우미들은 펼쳐진 광경에 놀라 비명을 질렀다.하지만 박한빈은 아주 침착했고 담담한 말투로 고개를 돌려 도우미들에게 말했다.“의사 불러오세요.”그 말에 정신이 든 도우미들은 서둘러 움직였고 누군가는 의사를 부르고, 다른 누군가는 성유리를 말리려고 다가왔다.성유리는 그제야 박한빈을 똑바로 쳐다보며 힘겹게 말을 꺼냈다.“역시... 다 알고 계셨던 거죠? 다 맞히셨네요?”박한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조용히 성유리를 품에 끌어안았다.이미 이성을 살짝 잃은 성유리는 그런 박한빈을 힘껏 밀어내며 고래고래 외쳤다.“내 몸에 손대지 마! 이거 놔! 놓으라고! 역시 이럴 줄 알았어. 아까부터 당신은 다 알고 있었던 거지? 일부러 그런 거야?”“제발 나 좀 죽게 내버려두라고! 박한빈, 제발 부탁이야. 나 좀 죽게 해줘.”눈물은 성유리의 볼을 타고 흘러 박한빈의 옷을 적셨지만 그는 여전히 그녀를 꽉 끌어안고 있었다.“절대 너한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할 거야.”박한빈이 입을 열었다.“한빛시는 네가 가자고 해서 간 게 아니야. 스키장도 네가 가라고 해서 간 게 아니고. 눈사태가 벌어진 것도 유리 네 잘못이 아니잖아. 그러니까 네가 이런 책임을 물 이유는 없어.”“그렇지만 하나가 죽었어요! 죽었다고요. 하나가 하늘이 때문에 죽었어요... 만약 걔가 하늘이를 보호하지 않았다면 하나도 살 수 있었어요. 근데...”“그래. 하나 씨가 하늘이를 구해줬어. 그래서 난 하나 씨에게 너무 고마워. 그렇지만 유리 네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잖아. 그러니까 죽을 이유도 없다고.”“그리고 네가 죽는다 해도 하나 씨는 돌아오지 않아. 이건 명확한 사실이고.”박한빈의 목소리는 여전히 냉랭했다. 이럴 때마저도 그는 성유리를 탓하거나 나무라지도 않았다.‘그래서 어젯밤은 나한테 준 보상이었던 건가?’박한빈은 그제야 성유리가 보인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죽으려고 했으니 사씨 가문도 찾아가고 하늘이한테도 갔구나.’그는 성유리가 자신에게 미안한
“어르신, 사모님, 박 대표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사씨 저택, 류수미는 어쩌다 기분이 괜찮아져 밥을 먹고 있었지만 도우미에게서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들어버렸다.류수미는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이를 악문 채로 물었다.“왜 또 왔대요?”“두 분과... 상의할 일이 있다고 하십니다.”“상의? 뭐를 상의하는데요? 가서 말해요. 절대 만나지 않겠다고!”말을 마친 류수미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위층으로 올라갔다.사민혁은 식탁에 마주 앉아 고민하더니 차분한 말투로 도우미에게 말했다.“돌아가시라고 하세요. 오늘은 손님 맞을 기분이 아니라서.”“이미 그렇게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박 대표님께서...”“그럼 됐어요. 거기서 기다릴 거면 기다리라고 하죠.”사민혁은 한마디 말을 끝으로 자리를 떴고 이렇게 하면 박한빈도 곧 떠날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서재에서 한참 동안 책을 읽던 사민혁이 창문을 힐끔 내려다보았고 박한빈이 아직도 밑에서 기다리는 것을 발견했다.오늘 금성의 온도는 너무 낮지 않았지만 눈이 조금 내리고 있어 박한빈이 더욱더 쓸쓸하고 고독해 보였다.사민혁은 그런 박한빈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결국 도우미에게 그를 집안으로 들이라고 했다.“박 대표님, 도대체 무슨 일로 찾아오신 겁니까?”사민혁은 짜증 섞인 말투로 박한빈에게 따지듯 물었다.“이게 지금 며칠 쨉니까? 매일 찾아오시면 어떡하죠? 누가 보면 저희 사씨 가문이 사고라도 친 줄 알겠습니다.”사민혁의 물음에도 박한빈은 그저 옅은 미소만 지을 뿐이었는데 눈이 오는 밖에 오랫동안 서 있은 박한빈의 코는 이미 빨개졌고 귀도 살짝 얼어있었다.하지만 허리는 여전히 꼿꼿하게 핀 상태였고 호흡을 고르던 박한빈은 그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처음 왔을 때랑 똑같은 일입니다. 두 분이 성유리를 한 번만이라도 보셨으면 합니다.”“대체 우리가 왜 걔를 보러 가야 하는 거죠?”사민혁이 대답하기도 전, 한쪽에서 날카로운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류수미는 자기 방에서 사민혁의
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는 몸을 돌렸다.“죄송합니다. 그럼 이만.”운전기사는 계속 대문 밖에서 박한빈을 기다리고 있었다. 원래 기사는 오늘도 박한빈이 하루 종일 사씨 저택에 머물 줄 알았다.그래서 자기가 마실 커피를 사러 갔다 오려고 했지만 시동을 걸기도 전, 박한빈이 저택에서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기사는 얼른 차에서 내려 문을 열어줬고 박한빈은 조용히 차에 올라탔다.굳이 묻지 않아도 운전기사는 박한빈이 오늘도 사하나의 가족을 설득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사실 어찌 보면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필경 핏덩이 같은 딸을 잃은 부모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다른 사람의 생사에 관여할 수 있겠는가?이런 도리는 박한빈 또한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의사조차도 성유리가 아픈 원인이 사하나의 죽음으로 인한 마음의 병이라고 했으니까.박한빈은 성유리를 위해서라면 하늘의 별도 따다 줄 수 있을 정도로 헌신했다. 죽은 사람을 되돌리는 일 빼고는 모든 것을 해줄 수 있었다.그래서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파렴치하지만 유가족을 찾아가 한번, 또 한 번 비는 것뿐이었다.박한빈은 유가족이 성유리를 용서한다는 단 한 마디만 해줬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생각을 했었다.만약 그 사람들이 위로를 건넨다면 성유리가 나아질지 지도 모르니까 말이다.그러니 어떤 수를 쓰든지, 무슨 대가를 치르든지 박한빈은 해야만 했다.이내 박한빈이 탄 차는 실버 포레스트에 도착했고 원래 두 눈을 감고 있던 그는 귀신처럼 도착하자마자 눈을 번쩍 떴다.기사가 문을 열어주기도 전에 박한빈이 직접 문을 열어 차에서 내리자 도우미들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대표님.”도우미들의 손에는 보기 좋은 음식이 들려있었지만 그들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사모님께서... 아무것도 드시지 않으십니다.”박한빈은 아무 말 없이 도우미의 손에서 음식을 건네받았고 그 시각, 성유리는 창문가에 앉아 있었다.비록 집안에 난방이 잘 되긴 하지만 성유리는 옷을
“미안해요. 제가 괜히...”아라가 막 사과하려는 찰나, 그들 등 뒤에 앉아 있던 남자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성유리의 코앞에 손가락을 겨누었다.“아니, 어떻게 이렇게 냉혈하고 무정할 수가 있습니까?”남자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성유리는 깜짝 놀라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아직 상황 파악도 못 했을 때 알리는 이미 그녀 앞까지 다가온 상태였다.“지금 아라 씨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안 보이십니까? 당신이 도와주지 않으면 형한테 그대로 죽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아라 씨가 전에 당신 목숨까지 살려줬다는 거, 잊었어요?”남자의 얼굴은 분노로 물들어 있었고 성유리를 바라보는 눈빛은 마치 자신이 엄청난 배신을 당한 피해자인 것처럼 절절했다.성유리는 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차분하게 되물었다.“그렇게 생각하고 계신다면 왜 당신은 안 도와주는 거죠?”“전...”알리는 한순간 말문이 막혔으니 곧 정신을 차리고 되받아쳤다.“당신들 일에 제가 왜 끼어들어야 합니까? 전 돈이 남아도는 줄 알아요?”“그 사람은 당신 친형이잖아요. 당신이 끼는 게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요? 그리고 당신이 금성에 온 것도 이 일 때문 아닌가요?”성유리는 다툴 생각은 없었고 그저 이성적으로 말했을 뿐이었다.오히려 어조는 담담했고 눈빛엔 약간의 의문이 섞여 있었다.하지만 알리는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못 했고 성유리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아라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번 일에 도와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저는... 이 일은 아라 씨가 가족들과 먼저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게 더 맞다고 생각해요.”아라는 말이 없었다.성유리도 더 머물지 않고 조용히 자신의 짐을 챙겨 일어섰다.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알리가 그 뒤를 따라 나올 줄은.처음엔 또다시 성유리를 욕하려는 줄 알았지만 예상과 달리 알리는 비웃듯 한마디를 툭 던졌다.“위선자, 가식덩어리!”알리의 말을 성유리는 아예 못 들은 척 그냥 걸음을 옮겼다.자신이 무시당한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자리
아라와 성유리는 금성의 한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문을 막 들어서자 성유리는 아라 목에 감겨 있는 스카프를 보고 바로 눈치를 챘다.“그건... 왜 그래요?”아라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용히 스카프를 풀었고 그 아래로는 뚜렷하게 남은 손자국이 드러났다.이미 이틀이나 지났건만 그 자국은 여전히 선명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경악을 금치 못하게 만들었다.그리고 그 자국은 에릭이 당시 얼마나 강하게 목을 졸랐는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증거였다.선명하게 남은 자국을 본 성유리의 얼굴도 바로 굳어졌고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미안해요. 원래 유리 씨한테 이런 말 하려고 한 건 아닌데 솔직히 지금... 누구한테도 털어놓을 데가 없어서...”말하는 아라의 눈가가 서서히 붉어지기 시작했다.“저희 가족은 제 처지를 전혀 이해 못 해요. 아니,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죠. 에릭 씨한테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말을 하는 걸 두려워하고요. 그들한테 중요한 건 제가 에릭 씨랑 빨리 결혼해서 뭔가를 얻는 것뿐이에요.”“제가 행복한지, 이 결혼을 원하는지...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아라가 처한 상황을 성유리는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그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 당장은 그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며칠 전... 제가 에릭 씨한테 이별 통보를 했고 그 사람도 동의했어요.”아라의 말에 성유리는 놀랐지만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참 잘됐네요. 그럼 이제...”하지만 아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런데... 그 사람이 저희 부모님께 이미 결혼 자금으로 돈을 송금했거든요. 에릭 씨는 제가 파혼을 원한다면 그 돈을 전액 돌려줘야 한다는 거예요. 하지만 그 돈은 이미 부모님이 다 써버렸고... 지금 제가 그 돈을 달라고 해도 당연히 안 줄 거고...”여기까지 말했을 때 아라의 의도는 너무도 명확했다.성유리가 아직 입을 떼기 전에 아라가 계속 말했다.“그러니까... 유리 씨가 저 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아라의 목소리는 점점 더 갈라졌다.
아라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변하더니 손으로 그의 팔뚝을 붙잡으며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어 벗어나려 했다.하지만 에릭은 아라에게 그런 기회를 주지 않았고 오히려 그녀를 붙잡고 있는 손에 더 힘을 주었다.그렇게 아라의 숨이 점점 끊겼고 결국 마지막에는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의식이 점점 희미해지는 와중에도 아라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비록 지금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느낀 건... 허무함뿐이었다.설마 자기 인생이 누군가에게 목이 졸려 죽는 걸로 끝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그렇지만 이게 또 나쁘지만은 않았다. 어쩌면 귀찮은 일들을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어차피 집에서는 파혼을 받아들일 리 없었고 에릭의 태도 역시 결혼을 계속 유지하겠다는 쪽은 아닌 듯했다.그렇다고 아라는 평생을 에릭의 ‘부속품’처럼 살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죽는 것도 어쩌면 자신에게는 더 나은 선택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에릭이 갑자기 손에 힘을 풀었다.공기가 한순간에 밀려 들어오며 폐를 터뜨릴 듯 부풀게 만들었다.아라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목을 부여잡은 채 격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숨을 너무 오래 참았던 탓에 눈물과 콧물이 뒤섞여 얼굴이 엉망이 되었고 아라의 모습은 더없이 초라하고 처참했다.그러나 에릭은 힘들어하는 아라를 한 번도 쳐다보지 않은 채 냉정하게 말했다.“파혼하고 싶다고? 좋아. 해.”예상치 못한 에릭의 대답에 아라는 움찔하더니 눈을 번쩍 떴다.“대신, 내가 준 1억 돌려줘.”...“알리!”여자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오자 알리는 발걸음을 뚝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이내 다가오는 여자를 본 순간, 그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곧 웃음을 터뜨렸다.“누가 당신한테 제 이름을 부르라고 했습니까? 말해두는데 당신이 설령 우리 형이랑 결혼한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전 절대 당신 같은 여자를 형수로 인정하지 않을 거고 우리 부모님도 당신을 받아들일 일 없으니까.”알리의 말투는 한없이 차가웠
아라는 터벅터벅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그녀의 뺨에 있던 붉은 자국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여전히 하얀 피부 위에 눈에 띄게 남아 있었다.에릭은 그 시각 호텔에 있었다.그는 아라를 보고 처음에는 잠시 멈칫하다가 금세 눈빛이 다시 싸늘하게 식더니 물었다.“이게 무슨 일이야? 누가 이런 거야?”아라는 에릭의 반응을 보고 알았다. 그는 자신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소유물이 피해를 입은 것에 대한 반응을 보였을 뿐이었다.진정으로 자신을 걱정했다면 예전에 자신이 계단에서 떨어졌을 때도 그런 표정을 지었을 리 없었고 술집에서 자신에게 술을 퍼붓기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런 행동들이야말로 에릭이 자신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증거였다.지금 에릭이 아라의 얼굴의 붉은 자국에 대해 신경을 쓰는 이유는 단지 자신이 소유한 것에 무언가가 손을 대었다는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었다.이것은 아라가 원하는 삶이 아니었다.그녀는 자기가 전혀 무죄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에릭을 속인 것도 사실, 자신이 자발적으로 한 일이었다.그때는 단지 주성운의 병원비를 빨리 마련하고 싶었을 뿐이었다.아라는 자신이 잘못된 방법을 쓴 것이 맞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릭에게도 충분히 마음을 다했다고 생각했다.결국 그것은 하나의 거래였으니 아라는 에릭에게 미안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어차피 에릭은 전에 다른 여자들에게도 그렇게 했던 사람이었지 않나?그저 자신도 그 많은 여자들 중 하나가 되고 싶었던 것뿐이었다.그러나 아라는 한 가지를 깜빡하고 있었다.자신의 무심함이 오히려 에릭의 소유욕과 승부욕을 자극하게 될 거라는 사실을.결국 아라의 모든 예상을 뒤덮고 상황은 이렇게 된 것이다.“누가 그랬는지 말해줘.”에릭이 다시 물었다.그의 목소리는 이미 짜증이 섞인 듯 들렸고 미간을 찌푸리며 아라를 바라보고 있었다.“저희 가족이요.”아라가 순수히 대답했지만 에릭의 얼굴에선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에릭은 자신이 이미 결혼 예물까지 보냈으니 아라는 이미 자신의 소유물
“싫어요.”성유리는 생각할 것도 없이 단칼에 거절했다.그러자 박한빈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왜?”“그때 찍은 사진 안 예뻐요.”“그럼 다시 찍자.”“우리 결혼한 지가 얼마나 됐는데 이제 와서 다시 찍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나는 의미 있다고 보는데.”“당신 원래 사진 찍는 거 싫어하잖아요?”성유리가 의아한 얼굴로 묻자 박한빈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녀는 그의 속내를 간파한 듯 미소를 지었다.“박한빈 씨, 뭐든지 남이 가지고 있는 건 다 가져야겠어요? 애처럼 굴지 마세요.”박한빈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다 손에 들고 있던 청첩장을 옆으로 휙 던졌다.그리고는 외투를 거칠게 벗어던졌다.성유리는 그 행동의 의미를 순간적으로 깨달았고 이내 본능적으로 입을 열었다.“찍어요. 다시 찍자고요. 저희 내일 당장 가서 찍어요.”...아라는 요즘 결혼 준비 때문에 사실상 반강제로 집에 갇혀 지내고 있었다.에릭이 보낸 200억이나 되는 예물이 이미 입금되었다.그 돈으로 아라의 가족은 즉시 새집을 샀고 아버지는 새 차까지 뽑았다.평소엔 거들떠보지도 않던 친척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집에 찾아왔다.거실에서는 그들이 떠들어대는 소리가 천장을 뚫을 기세였다.“내가 뭐랬어? 아라는 딱 봐도 크게 될 애라고! 해외 나간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좋은 신랑감을 데려와?”“그러게 말이야. 형, 이런 사위가 있으면 노후 걱정 끝난 거 아니야?”“하하, 난 그냥 우리 딸 미래를 위해서 한 거지!”아라의 아버지는 흡족한 듯 계속 말했다.“솔직히, 난 우리 딸이 어디 멀리 가는 것도 싫어했어. 그래서 가까운 데서 결혼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애가 직접 데려온 사람이 외국인인 데다 너무 잘해주니까 어쩌겠어? 거절할 수가 없지!”“거절? 그런 걸 거절하는 게 바보지!”“맞아! 이렇게 좋은 결혼... 남들은 꿈도 못 꾸는걸!”“근데 말이야, 아직 형 사위를 직접 본 적이 없네? 이왕 다 모인 김에 같이 식사라도 한 끼 할까?”“식사는 무슨,
성유리가 마련한 집은 작지만 아늑했다.하지만 층이 낮아 창가에 서도 제대로 된 풍경이나 달빛조차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박한빈의 팔을 힘주어 움켜쥐었는데 목소리는 이미 살짝 쉰 상태였다.사실 성유리는 박한빈의 화가 전혀 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조금 전 보였던 불쌍한 척과 반성하는 태도는 결국 밀고 당기기의 한 수였을 뿐이었다.성유리는 다 봤다.손등의 작은 상처 외엔 몸 어디에도 멍 하나 없었다.심지어 그 상처도 벽에 일부러 긁어서 만든 걸지도 몰랐다.지금의 박한빈 성격이라면 충분히 가능했다.그가 원하는 건 단 하나였다.성유리가 안심하고 자신을 집에 들여보내는 것.일단 문을 열어준 순간, 주도권은 박한빈 것이었다.그리고 그는 충분히, 아주 충분히 성유리에게서 ‘보상’을 받아 갔다.바로 지금처럼.성유리는 이미 여러 번 머리까지 저으며 살려달라고 애원했다.하지만 박한빈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점점 더 거칠게, 센 힘으로 성유리를 탐했고 그녀의 생사조차 신경 쓰지 않았다.하는 수 없이 성유리는 그날 밤 박한빈이 듣기 좋아하는 말을 수없이 내뱉었다.다음 날 아침, 스스로 했던 말을 떠올려도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였다.반면, 박한빈은 대단히 만족한 표정으로 말했다.“집 괜찮네. 앞으로 종종 와야겠다.”그 말에 성유리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박한빈이 떠난 뒤, 제일 먼저 한 일은 도어락 비밀번호를 바꾸는 것이었다.그날 밤, 정말 박한빈과 에릭이 싸웠는지는 성유리도 알 수 없었다.다만, 확실한 건 그날 이후 두 사람은 거의 완전히 연락을 끊었다는 것이었다.그리고 에릭과 아라의 결혼 준비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성유리는 이미 청첩장을 받아 두었는데 보낸 사람은 다름 아닌 아라였다.청첩장 안에는 그들과 함께 찍은 웨딩사진도 들어 있었다.사진 속 아라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의자에 앉아 있었고 에릭은 그녀의 뒤에 서서 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린 채 미소를 짓고 있었다.흔한 웨딩 촬영 포즈였지만 성유리는 어딘가 모
갑작스럽게 터진 박한빈의 웃음에 성유리는 멍해졌다.그러다 이내 마치 정신병자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박한빈을 가만히 쳐다봤다.“너 이제 안 화났어?”박한빈이 묻자 성유리는 그제야 자신이 여전히 화가 난 상태여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심지어 집에 가는 것도 싫다고 선언한 상태였다.방금 박한빈이 괜히 상기시켜 주는 바람에 다시 감정을 끌어올리려던 순간, 박한빈은 갑자기 그녀를 확 끌어안았다.“오늘은 내가 잘못했어.”뜻밖에도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는 그의 태도에 성유리는 당황했다.“내가 널 너무 가뒀어.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서 네가 하면 안 된다고 말한 것도 잘못이야.”“난 그냥 네가 너무 걱정됐어. 누군가 너를 속이거나, 혹시 또 위험한 일이 생길까 봐.”진심을 다해 말하는 박한빈을 본 성유리는 할 말을 잃었다.한참을 머뭇거리다 결국 그녀 또한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저도 잘못했어요.”“네가 뭘 잘못했는데?”박한빈은 성유리를 쓱 밀어내곤 그녀와 눈을 맞췄다.그 태도가 너무 명확했기에 성유리가 그의 의도를 모를 수 없었다.‘유도신문 같은 거였구나. 결국 나한테서 이런 대답을 들으려던 거였어.’하지만 이미 말을 꺼낸 이상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사실 저도 그런 곳을 좋아하진 않아요. 그냥... 아라 씨가 너무 불쌍해서 같이 간 거고요.”성유리는 자신이 말한 단어를 다시 떠올렸다.불쌍하다는 말, 그 말을 내뱉는 순간부터 성유리의 마음속에는 복잡한 감정이 얽히고 있었다.집안이 비슷해야 잘 어울린다는 어른들의 말과 사랑하기만 한다면 아무 문제 없다는 말은 어느 정도 정확했다.하지만 그런 문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많이 발생하기 마련이다.마치 아라와 에릭처럼.그들의 차이는 너무도 컸다.그리고 아라의 부모는 에릭을 마치 ‘입장권’처럼 여겼다.결혼을 위한 거액의 지참금조차도 그들에게는 그저 돈벌이 수단이었다.그 결과, 아라는 점점 외딴섬처럼 고립되었다.혼자서는 견디기 힘든 상황에서 단순한 싱글 파티라는 명
성유리가 산 집은 사실 그리 크지 않았다.비록 그녀가 받은 저작권 수익이 적지는 않았지만 땅값이 비싼 금성에서 겨우 방 두 개짜리 작은 아파트 계약금 정도를 마련할 수 있을 뿐이었다.이 집에 박한빈은 한 번도 온 적이 없었다.그리고 성유리는 알았다.그가 이곳을 마음에 들어 할 리가 없다는걸.하지만 박한빈이 모르는 사이 성유리는 이곳을 자신만의 공간으로 잘 꾸며 놓았다.필요한 생활용품들은 모두 근처 마트에서 산 터라 세면을 마친 성유리는 바로 침대에 누웠다.이제야 비로소 자신의 공간이 생겼다.그러니까 마음이 편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눈을 감고 한참 누워 있던 성유리는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어쩐지 어색했다.매일 밤 박한빈과 함께 있다가 오늘 처음으로 혼자 있는 침대가 이렇게 넓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게다가 새로 들여놓은 가구에서는 아직도 약간의 냄새가 났다.결국, 한참을 누워 있던 성유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성유리는 박한빈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려던 것은 아니었다.방금 술집 앞에서 그렇게 큰소리를 쳤는데 이제 와서 돌아가면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그저 잠이 안 와서 아래층 편의점에 가서 뭐라도 사 오려고 했을 뿐이다.하지만 문을 연 순간, 그 앞에 서 있는 박한빈과 마주쳤다.박한빈은 담배를 손에 들고 있었다.아직 피우던 상태였는데 성유리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놀란 듯 급히 담배를 비벼 끄며 변명했다.“나... 지금 막 다시 피우기 시작했어.”그리고는 얼른 담배를 손바닥 안에 꽉 쥐었다.“왜 나왔어?”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언제부터 여기 계셨어요?”그렇지만 곧바로 성유리는 또 다른 걸 깨닫고 다시 물었다.“아니, 제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아셨죠?”“관리실에 알아봤어.”성유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사실 박한빈에게 이걸 물어본 게 실수였다.여기는 금성이다.박한빈이 모르는 일이 있을 리가 없는 금성.아마 성유리가 이 집을 사자마자 관리사무소에서 바
박한빈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성유리는 이미 혼자 앞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어디 가려고?”그는 급히 따라붙으며 물었다.“이제 집에 가야죠.”“나...”“당신이랑 같이 안 가요.”성유리는 단호하게 말했다.“전 제집으로 갈 거예요.”그녀가 말하는 집은 저작권 수익으로 스스로 마련한 집이었다.박한빈은 한때 성유리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굳이 네 명의로 집을 살 필요 있어? 내가 가진 부동산이 얼마든지 있는데? 네가 원하면 하나 넘겨줄 수도 있어.”하지만 성유리는 끝까지 자신의 명의로 집을 장만했다.박한빈은 그때는 그녀의 고집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제야 알 것 같았다.성유리는 어떤 식으로든 그에게 얽매이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예전에는 둘이 싸우면 김서영에게 갔었다.하지만 김서영이 아무리 그녀를 아낀다 해도 결국 박한빈의 어머니였다.이제는?성유리는 더 이상 그런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그녀는 술이 취한 상태라 운전을 할 수 없었기에 별다른 고민 없이 택시를 잡아타고 떠났다.박한빈은 차를 몰고 따라가려 했다.그런데 바로 그 순간 술집 입구에서 보안 요원들이 일제히 2층으로 뛰어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다급하게.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뻔했다.‘쟤가 또 난동을 부렸겠지.’성유리의 차가 멀어지는 것을 보던 박한빈은 짧은 고민 끝에 술집 안으로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역시 그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방 안은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에릭은 테이블이며 술병이며 모조리 집어던졌고 그 자리에 있던 남자들은 처참한 몰골로 쓰러져 있었다.그리고 소파 한쪽에 앉아 있는 아라는 머리카락과 옷이 축축이 젖어 있었다.누가 봐도 에릭이 술을 끼얹은 것이었다.모든 분노를 쏟아낸 에릭은 이제 아라를 데리고 나가려 하고 있었다.하지만 술집 관계자들이 그렇게 쉽게 보내줄 리 없었다.에릭의 눈빛은 점점 더 차가워졌고 당장이라도 난폭하게 부딪칠 듯한 기세였다.그 순간, 박한빈이 앞으로 나섰다.그는 술집 매니저에게 조용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