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리는 자연스럽게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있었다.이런 행동은 과거에도 수없이 반복했던 일이었다.하지만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기 때문일까. 지금의 상황과 곧 다가올 순간을 떠올리자 성유리는 갑자기 긴장되기 시작했다.그래서 자연스럽게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지만 어쩔 수 없었다.박한빈은 이내 그녀를 조심스레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성유리는 이미 눈을 질끈 감고 있었지만 예상했던 일이 일어나지 않자 혼란스러워하며 눈을 살며시 떴다.박한빈은 성유리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있었다.그 행동에 성유리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그러자 박한빈은 살짝 미소를 짓더니 그녀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됐어. 이제 푹 자. 나 여기 있으니까.”성유리는 입술을 꼭 다물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원했던 건 이게 아니었으니까.박한빈의 시선과 행동에서 성유리를 향한 감정이 드러나고 있었지만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그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박한빈 씨는 하고 싶지 않아요?”결국 의아함을 참지 못한 성유리가 물었다.그 물음에 박한빈은 잠시 멈칫하더니 성유리의 손을 잡아줬다.“너는 이제 막 회복된 상태잖아. 좀 더 쉬는 게 좋을 것 같아. 이런 일은... 서두를 필요 없어. 앞으로 우리에게는 시간이 많으니까.”박한빈은 성유리에게 설명해 주는 것 같았지만 사실 자기 스스로를 설득하는 것 같았다.그리고 그의 손에는 약간의 힘이 더해졌다. 하지만 이내 성유리가 아플까 봐 겁이 난 듯 서둘러 힘을 풀었다.성유리는 박한빈에게 할 말이 더 있었지만 이내 하려던 말을 삼켰다.어차피 이건 박한빈이 선택한 일이었다.‘난 충분히 노력했어.’박한빈이 원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강요할 이유도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더 이상 미안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성유리는 조용히 눈을 감았고 그저 이렇게 끝내기로 했다.그러나 박한빈의 마음속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그는 속으로 다짐했다.만약 그녀가 한 번 더 요청한다면 이번엔 자신을 억누르지 않겠다고.하
‘곧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거야.’박한빈은 이런 생각을 했다.그렇게 되면 이제부터 두 사람은 행복하게 함께 살 수 있을 것이다.어떤 사람도, 어떤 일도 더 이상 그들을 방해할 수 없을 것이다....성유리는 새벽녘에 눈을 떴다.이 방에 머문 지도 꽤 되었지만 깨어날 때마다 여전히 낯설고 혼란스러웠다.이곳이 경운시가 아니라는 걸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공간이었다.그러니 한빛시에서 벌어진 일도 단순한 악몽이 아니라는 뜻이었다.그건... 실제로 존재하는 일이었다.하지만 이번엔 성유리 혼자가 아니었다.성유리가 고개를 돌리자 바로 옆에 누워 있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그의 손은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있었고 얼굴은 그녀의 목덜미에 파묻혀 있었다.따뜻한 숨결이 목을 스치며 약간의 간지러움을 주었다.성유리는 그 손길을 떼어내지 않고 조용히 옆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그러나 그는 꿈속에서도 철저히 경계심을 유지하는 듯했다.성유리가 잠시 박한빈을 바라보고 있자 그는 눈을 번쩍 떴다.그렇게 둘의 시선이 정확히 마주쳤다.성유리는 순간 멈칫하더니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너...”박한빈이 뭔가 말하려 했지만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성유리가 갑자기 몸을 기울여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밖은 여전히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고 창문 너머로는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하지만 방 안은 난방이 켜져 있어 춥지 않았고 오히려 체온이 점점 더 높아졌다.박한빈의 힘은 강했다. 자신의 허리를 꽉 쥐고 있는 박한빈의 힘에 성유리는 아프기까지 했다.사실 그는 더 부드럽게 하려 했지만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버렸기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처럼 보였다.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풋내기처럼 말이다. 박한빈은 신혼 첫날 밤보다도 더 서툴렀다.그는 예전과 달리 자신의 힘을 조절하지 못했고 성유리가 손톱으로 그의 팔뚝을 꽉 눌렀을 때에야 그는 자신의 행동을 자각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아프게 했어?”성유리는 눈을 감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박한빈은 성유리가 화가 난
성유리가 다시 깨어났을 때, 이미 바깥은 날이 밝아 있었다.그녀는 박한빈이 회사에 갔을 거라 생각했지만 몸을 돌리자 뜻밖에도 그는 여전히 그녀 옆에 있었다.박한빈은 침대 머리맡에 등을 기댄 채 노트북으로 일을 하고 있었고 화면 밝기를 최저로 낮추고 키보드 소리도 최소화한 상태였다.성유리는 놀란 듯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멈칫했다.그때, 박한빈은 금방 성유리의 반응을 알아채고 말했다.“깼어?”그는 노트북을 닫으며 미소를 지었다.“피곤해? 어디 아픈 데는 없어?”그제야 성유리는 몸이 여기저기 쑤시고 아프다는 걸 뒤늦게 느꼈다.하지만 고통은 이제 그녀에게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그래서 성유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괜찮아요.”“배고프면 말해. 먹을 걸 가져오라고 할게.”박한빈이 그렇게 말하며 침대에서 내려가려 하자 성유리가 갑자기 물었다.“오늘 회사 안 가셔도 돼요?”“응. 안 가도 돼.”“사실... 굳이 매일 여기 있으실 필요는 없어요. 저 이제 괜찮아졌으니까요. 대표님께서 매일 출근 안 하시면 정말 괜찮겠어요?”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이 웃음을 터뜨리더니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되물었다.“왜? 내가 회사 말아먹을까 봐 걱정돼?”“걱정 마. 집에서도 다 처리하고 있으니까.”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떨군 채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그녀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자 박한빈은 자리에서 일어나 누군가에게 죽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그리고 한편, 성유리는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나 세면대 앞으로 갔다.화장실에서 나왔을 때 박한빈은 이미 음식을 테이블 위에 차려두고 있었다.“왜 식탁까지 내려가서 안 먹어요?”성유리의 질문에 박한빈은 잠시 멈칫하다가 웃으며 대답했다.“글쎄, 그냥 방에 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박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며 성유리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넓은 테이블과 소파가 있었음에도 박한빈은 굳이 그녀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성유리는 약간 불편해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한빈은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성유리만 뚫어져라 쳐다봤다.그 눈빛을 본 성유리는 혹시 그가 자신의 말에 숨은 의도나 계획을 알아차렸을까 봐 마음 졸이고 있었다.하지만 이내, 박한빈이 순순히 동의했다.“그래. 내가 가져다줄게. 언제 필요한데?”“빠르면... 빠를수록 좋죠. 마침 박한빈 씨도 요 며칠 할 일이 없으시지 않나요?”박한빈은 말이 없었다.“오후에 가실래요?”다시 묻는 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더니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조금 강한 박한빈의 힘에 성유리는 뼈마디가 아파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아파요.”“미안. 내가 또 아프게 했네.”박한빈은 금방 사과했지만 목소리에는 어떠한 파동도, 미안하다는 감정도 묻어있지 않았다.성유리가 무슨 말을 더 하려던 때, 박한빈이 먼저 말을 꺼냈다.“그럼 지금 티켓사라고 할게. 아마 오래는 안 걸릴 거야. 저녁에는 돌아올 수 있을 거고.”성유리는 잠깐 멈칫하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노트북이랑 원고 말고 또 필요한 거 있어?”“아니요.”“괜찮아. 도착하면 너한테 영상통화 할게. 받을 거지?”박한빈의 물음에 성유리는 잠시 굳어가는 듯했지만 금세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당연하죠!”“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지금 티켓사라고 한다?”박한빈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려고 방을 나섰고 당일치기였기에 그는 따로 짐을 챙길 필요도 없었기에 준비도 무척이나 빨랐다.성유리는 원래 박한빈더러 경운시에서 하룻밤 자고 오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결국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하도 예민한 사람이니까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거야.’박한빈은 성유리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 그녀의 어떤 거짓말이라도 다 알아차렸고 단번에 진짜 의도를 파악했다.방금 전도 마찬가지로 성유리는 박한빈이 자신의 의도를 알아차린 줄 알았지만 그건 그저 착각이었다.그 시각, 성유리는 저택 안 사람들과 함께 박한빈을 배웅해 주고 있었다.“저녁에 올 거니까 나 기다려야 돼.”박
성유리는 곧 자기 방으로 돌아가 방문을 잠그고는 책상 앞에 마주 앉았다.그리고는 미리 준비한 종이와 연필을 꺼내 들었다. 준비해 둔 종이의 개수와 맞먹게 성유리는 하늘이한테 해줄 말이 많았다.심지어는 하늘이가 새해마다 자신이 쓴 편지를 볼 수 있게 가득 써놓으려는 생각도 했었다.하지만 막상 연필을 집어 드니 도통 무슨 말을 써야 할지 감이 안 잡혔고 머릿속은 하얗게 변해갔다.그러다 문득, 성유리는 사실 자기는 할 말이 그다지 많지 않다고 느꼈다.필경 그녀의 선택은 제일 직접적인 사실이니까, 그리고 하늘이도 자기 같은 나약한 엄마는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그래서 성유리는 엄마로서 하늘이에게 편지를 남길 자격도 없다고 여겨 연필을 천천히 내려놓았다.한참 뒤, 성유리는 다른 서랍을 열어 며칠 동안 몰래 숨겨둔 유리 조각을 꺼냈다.사람을 죽이면 목숨으로 갚는다는 말은 누구라도 다 아는 사실이었다.아무리 부정해도 사하나는 결국 하늘이 때문에 세상을 떠난 것이 확실했고 아직 어린아이에게 성유리는 그 어떠한 상처도, 타격도 주고 싶지 않았다.그러니 사씨 가문에서 원하는 목숨을 성유리는 본인이 갚기로 마음먹었다.이렇게 되면 그들이 두 번 다시는 하늘이가 사하나의 목숨을 앗아갔다는 말을 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어차피 성유리가 자기 생명으로 “빚”을 갚을 거니까.생각에 잠겨있던 성유리는 유리 조각을 손에 들고는 맞은편에 있는 거울을 쳐다봤다.그곳에 있는 커다란 거울은 성유리의 모든 행동을 비추고 있었기에 그녀는 자신의 경동맥을 쉽게 찾아냈다,‘이제 힘껏 그으면 돼.’‘근데 이러면 보기 너무 흉할 텐데.’박한빈이 새로 산 집에서 이렇게 험한 몰골도 죽고 싶지 않았지만 성유리는 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그가 하루 종일 성유리를 지켜보고 모든 말과 동작을 감시하니까.그래서 성유리는 남겨질 집과 박한빈에게 미안한 감정이 가득했다.만약 오늘 그런 핑계를 대 박한빈을 보내지 않았다면 성유리에게는 이런 기회가 주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생각에 잠겨
뒤따라 방으로 들어온 가사도우미들은 펼쳐진 광경에 놀라 비명을 질렀다.하지만 박한빈은 아주 침착했고 담담한 말투로 고개를 돌려 도우미들에게 말했다.“의사 불러오세요.”그 말에 정신이 든 도우미들은 서둘러 움직였고 누군가는 의사를 부르고, 다른 누군가는 성유리를 말리려고 다가왔다.성유리는 그제야 박한빈을 똑바로 쳐다보며 힘겹게 말을 꺼냈다.“역시... 다 알고 계셨던 거죠? 다 맞히셨네요?”박한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조용히 성유리를 품에 끌어안았다.이미 이성을 살짝 잃은 성유리는 그런 박한빈을 힘껏 밀어내며 고래고래 외쳤다.“내 몸에 손대지 마! 이거 놔! 놓으라고! 역시 이럴 줄 알았어. 아까부터 당신은 다 알고 있었던 거지? 일부러 그런 거야?”“제발 나 좀 죽게 내버려두라고! 박한빈, 제발 부탁이야. 나 좀 죽게 해줘.”눈물은 성유리의 볼을 타고 흘러 박한빈의 옷을 적셨지만 그는 여전히 그녀를 꽉 끌어안고 있었다.“절대 너한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할 거야.”박한빈이 입을 열었다.“한빛시는 네가 가자고 해서 간 게 아니야. 스키장도 네가 가라고 해서 간 게 아니고. 눈사태가 벌어진 것도 유리 네 잘못이 아니잖아. 그러니까 네가 이런 책임을 물 이유는 없어.”“그렇지만 하나가 죽었어요! 죽었다고요. 하나가 하늘이 때문에 죽었어요... 만약 걔가 하늘이를 보호하지 않았다면 하나도 살 수 있었어요. 근데...”“그래. 하나 씨가 하늘이를 구해줬어. 그래서 난 하나 씨에게 너무 고마워. 그렇지만 유리 네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잖아. 그러니까 죽을 이유도 없다고.”“그리고 네가 죽는다 해도 하나 씨는 돌아오지 않아. 이건 명확한 사실이고.”박한빈의 목소리는 여전히 냉랭했다. 이럴 때마저도 그는 성유리를 탓하거나 나무라지도 않았다.‘그래서 어젯밤은 나한테 준 보상이었던 건가?’박한빈은 그제야 성유리가 보인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죽으려고 했으니 사씨 가문도 찾아가고 하늘이한테도 갔구나.’그는 성유리가 자신에게 미안한
“어르신, 사모님, 박 대표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사씨 저택, 류수미는 어쩌다 기분이 괜찮아져 밥을 먹고 있었지만 도우미에게서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들어버렸다.류수미는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이를 악문 채로 물었다.“왜 또 왔대요?”“두 분과... 상의할 일이 있다고 하십니다.”“상의? 뭐를 상의하는데요? 가서 말해요. 절대 만나지 않겠다고!”말을 마친 류수미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위층으로 올라갔다.사민혁은 식탁에 마주 앉아 고민하더니 차분한 말투로 도우미에게 말했다.“돌아가시라고 하세요. 오늘은 손님 맞을 기분이 아니라서.”“이미 그렇게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박 대표님께서...”“그럼 됐어요. 거기서 기다릴 거면 기다리라고 하죠.”사민혁은 한마디 말을 끝으로 자리를 떴고 이렇게 하면 박한빈도 곧 떠날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서재에서 한참 동안 책을 읽던 사민혁이 창문을 힐끔 내려다보았고 박한빈이 아직도 밑에서 기다리는 것을 발견했다.오늘 금성의 온도는 너무 낮지 않았지만 눈이 조금 내리고 있어 박한빈이 더욱더 쓸쓸하고 고독해 보였다.사민혁은 그런 박한빈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결국 도우미에게 그를 집안으로 들이라고 했다.“박 대표님, 도대체 무슨 일로 찾아오신 겁니까?”사민혁은 짜증 섞인 말투로 박한빈에게 따지듯 물었다.“이게 지금 며칠 쨉니까? 매일 찾아오시면 어떡하죠? 누가 보면 저희 사씨 가문이 사고라도 친 줄 알겠습니다.”사민혁의 물음에도 박한빈은 그저 옅은 미소만 지을 뿐이었는데 눈이 오는 밖에 오랫동안 서 있은 박한빈의 코는 이미 빨개졌고 귀도 살짝 얼어있었다.하지만 허리는 여전히 꼿꼿하게 핀 상태였고 호흡을 고르던 박한빈은 그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처음 왔을 때랑 똑같은 일입니다. 두 분이 성유리를 한 번만이라도 보셨으면 합니다.”“대체 우리가 왜 걔를 보러 가야 하는 거죠?”사민혁이 대답하기도 전, 한쪽에서 날카로운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류수미는 자기 방에서 사민혁의
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는 몸을 돌렸다.“죄송합니다. 그럼 이만.”운전기사는 계속 대문 밖에서 박한빈을 기다리고 있었다. 원래 기사는 오늘도 박한빈이 하루 종일 사씨 저택에 머물 줄 알았다.그래서 자기가 마실 커피를 사러 갔다 오려고 했지만 시동을 걸기도 전, 박한빈이 저택에서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기사는 얼른 차에서 내려 문을 열어줬고 박한빈은 조용히 차에 올라탔다.굳이 묻지 않아도 운전기사는 박한빈이 오늘도 사하나의 가족을 설득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사실 어찌 보면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필경 핏덩이 같은 딸을 잃은 부모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다른 사람의 생사에 관여할 수 있겠는가?이런 도리는 박한빈 또한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의사조차도 성유리가 아픈 원인이 사하나의 죽음으로 인한 마음의 병이라고 했으니까.박한빈은 성유리를 위해서라면 하늘의 별도 따다 줄 수 있을 정도로 헌신했다. 죽은 사람을 되돌리는 일 빼고는 모든 것을 해줄 수 있었다.그래서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파렴치하지만 유가족을 찾아가 한번, 또 한 번 비는 것뿐이었다.박한빈은 유가족이 성유리를 용서한다는 단 한 마디만 해줬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생각을 했었다.만약 그 사람들이 위로를 건넨다면 성유리가 나아질지 지도 모르니까 말이다.그러니 어떤 수를 쓰든지, 무슨 대가를 치르든지 박한빈은 해야만 했다.이내 박한빈이 탄 차는 실버 포레스트에 도착했고 원래 두 눈을 감고 있던 그는 귀신처럼 도착하자마자 눈을 번쩍 떴다.기사가 문을 열어주기도 전에 박한빈이 직접 문을 열어 차에서 내리자 도우미들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대표님.”도우미들의 손에는 보기 좋은 음식이 들려있었지만 그들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사모님께서... 아무것도 드시지 않으십니다.”박한빈은 아무 말 없이 도우미의 손에서 음식을 건네받았고 그 시각, 성유리는 창문가에 앉아 있었다.비록 집안에 난방이 잘 되긴 하지만 성유리는 옷을
그의 말에 항상 생글생글 웃던 홍지은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이 문제는... 사실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필경 전에 성유리가 박한빈과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세상에 있는 그저 그런 평범한 사람일 뿐이었으니 말이다.그래서 홍지은은 성유리의 존재를 잊어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에게 뭐라 할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성유리는 지금 엄연히 박한빈의 안사람이자 사모님이다.처음에 이 소식을 접해 들은 홍지은은 거짓말이라고 확신했다. 두 사람이 정말 다시 만난다면 이렇게 조용할 수가 없다고 확신했다.게다가 성유리는 전에 항상 박한빈의 아내 혹은 여자 친구의 신분으로 각종 모임이나 연회에 참석했었다.그러나 최근 몇 년간 홍지은은 성유리의 모습을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다.어젯밤 직접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홍지은은 여전히 믿지 못했을 것이다. 이게 다 박한빈이 한 일이라는 사실을.지금 그의 신분과 지위로 만약 성유리와 다시 만난다는 일이 세상에 공개된다면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것이다.그리고 박한빈은 성유리가 방해받지 않기를 원했다. 다르게 말하면 그는 지금 최선을 다해 성유리를 지켜주고 있었다.이건 어떠한 감정일까?박한빈을 졸졸 따라다니던 여자들이 적지만은 않았을 텐데 그는 시종일관 성유리만 선택했다.그제야 홍지은은 성유리에 대한 박한빈의 감정을 알아차렸다.그게 아니면 왜 어젯밤부터 끈질기게 성유리와 만나겠다고 고집을 부렸겠는가.전에 홍지은이 알던 평범하기 짝이 없던 성유리라면 그녀는 자신이 사과할 가치도, 필요도 없다고 느꼈을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박한빈이 이렇게 단번에 자신의 생각을 맞출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었다.그래서 그의 말에 도무지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멍해 있다 한참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저... 전에 유리가 어디 있는지 못 찾았어요. 그래서 사과를 못했죠.”“그러십니까?”박한빈은 살짝 미소 지으며 홍지은에게 물었지만 그녀는 그 미소가 무엇보다 더 두려웠다.
홍지은은 구렁이 담 넘듯이 능글맞게 핸드폰을 꺼내더니 성유리에게 반응할 틈도 주지 않은 채 셔터를 눌렀다.성유리는 셔터가 눌리는 소리가 들리자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홍지은과의 거리를 더 넓혔다.“아, 맞다. 어젯밤 제가 했던 말은 다 진심이었어.”홍지은은 원하던 두 사람의 사진을 찍고 난 뒤, 핸드폰을 다시 집어넣으며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전에... 내가 너무 어려서 철이 안 들었나 봐. 게다가 그때는 나랑 유정 씨 사이가 꽤 괜찮았잖아?”“나는 단순한 사람이라 유정 씨가 뭐라고 하면 그 말을 다 믿었어. 근데 누가 알기나 했겠어? 유정 씨가 그렇게 나쁜 *이라는 걸.”“뭐가 어떻게 됐든 내가 유리 너한테 큰 상처를 준 건 맞아. 그래서 진심으로 정중하게 사과하고 싶어. 정말... 미안해.”홍지은은 몸을 일으키더니 성유리에게 고개 숙여 사과하려고 허리를 굽혔다.그녀의 행동에 성유리는 행여나 임산부인 홍지은이 자기 배에 머리를 부딪힐까 봐 두려워 얼른 막았다.“이미 다 지나간 일이에요.”홍지은의 갑작스러운 행동을 막고자 성유리는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정말? 이 말은 나를 용서한다는 말이야?”성유리의 대답에 홍지은은 잔뜩 흥분하며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진짜 잘 됐다! 사실 전부터 알고 있었어. 유리 네가 유정 씨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는 걸. 친구로 삼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란 것도 알았어.”“필경 우리야말로 진짜 같은 업계에 있는 사람들 아니겠어? 한 사람 성격이 어떤지, 인성이 어떤지는 사실 태어날 때부터 결정된 거지.”“네가 진짜 성씨 가문의 아가씨잖아. 아니야? 그러니까 사실 우리 둘이 가장 좋은 친구가 되었어야 해.”홍지은은 성유리에게 계속해서 “미끼”를 던졌다. 마치 그녀가 물기를 기다리는 어부처럼.성유리가 아무리 자기 손을 빼내려고 애를 써도 홍지은은 아랑곳하지 않았다.원래 몸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던 성유리기에 더는 홍지은을 마주할 힘이 없어졌다.그 순간, 다행히도 박한빈이 아래층으로 내려왔다.“박...
박한빈은 성유리가 보내는 무언의 “나무람”을 못 본 척하며 온도계를 다시 손에 넣었다.“음, 확실히 열은 없네. 그냥 감기 초기 증상인가 봐.”박한빈은 말로는 괜찮다고 했지만 뒤돌아 바로 의사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리고 그때, 아래층에 있던 도우미 한 명이 올라와 박한빈에게 말했다.“박 대표님, 손님 한 분이 오셨습니다.”박한빈은 그 말에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누군데요?”“저도 모르겠습니다. 근데 그분 성이 홍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사모님과 친구 사이라고 하시던데...”박한빈은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힐끔 쳐다봤고 그녀는 금세 찾아온 손님의 정체를 알아차렸다.“홍지은 씨?”“홍지은이 누구야?”박한빈의 물음에도 성유리는 침묵했다. 그러다 그녀의 눈빛을 발견한 순간, 그는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그는 홍지은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제야 떠올랐다. 그녀는 바로 전에 성유정이랑 잘 어울려 다니던 친구였다.이런 일은 이미 박한빈과 성유리 사이에서 잊힌 지 오래였기에 그는 홍지은이 이런 방식으로 다시 나타날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홍지은 씨가 왜 너를 찾아온 거지?”박한빈은 얼른 화제를 돌리며 성유리에게 물었다.“저도 몰라요.”“그럼 그냥 가라고 하자.”박한빈은 금세 결정을 내렸다.‘괜히 그때 일이 생각나게 하면 안 돼. 아니면 또 화낼 테니까.’그는 도우미에게 찾아온 손님을 떠나보내는 말을 했지만 돌아온 도우미는 많이 난감해하며 말했다.“그게... 손님께서 떠나기를 거부하십니다. 무조건 사모님을 만나 봬야 한다면서...”“게다가 임산부인 것 같습니다.”도우미의 말에 성유리는 입술을 오므리고 고민하다 결국 한번 만나기로 결정했다.“제가 가볼게요.”“아니면 내가 갈까?”만약 예전 같았으면 박한빈은 바로 내려가 손님을 내보냈겠지만 행여나 전에 일들에 연루될까 아무런 행동도, 선택도 쉽사리 내리지 못했다.자신의 눈치를 살피며 묻는 박한빈의 말에도 그녀는 침묵했고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바로 걸음
홍지은과의 우연한 만남은 성유리에게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만약 오늘 하늘이가 갑자기 고열에 시달리지 않았다면, 성유리가 급히 아이가 다니는 유치원에 가지 않았더라면 두 사람은 마주치지도 않았을 것이다.전에 심하게 아팠던 적이 있는 하늘이기에 성유리는 아이가 작은 병에 걸리기만 해도 극도로 긴장됐다.다행히 오늘 의사가 그저 감기에 걸려 열이 나는 것뿐이라는 진단을 내렸고 성유리는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그러던 중, 홍지은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나중에 시간 되면 같이 밥이나 먹을까?”성유리는 그녀의 제안에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필경 두 사람 사이는 함께 마주 앉아 밥을 먹을 정도로 친한 사이가 아니었으니 말이다.하지만 홍지은은 눈치가 없는 건지 계속 성유리에게 말했다.“전에는 내가 잘못했지. 근데 그거 다 성유정한테 속은 거야. 나도 나중에 알아차렸어. 그때... 너한테 못 할 짓을 했다는 걸.”“그래서 정식으로 너한테 사과하고 싶었어.”홍지은의 사과의 말을 들은 성유리는 어이가 없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그럴 필요 없어요.”성유리는 마땅히 거절할 변명이 떠오르지 않아 대충 얼버무렸다.“제가 요즘 많이 바빠서요.”“그냥 밥 한 끼 먹는데 그렇게 오래 안 걸리잖아.”홍지은은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성유리를 난감하게 만드는 말을 내뱉었다.“아니면... 내가 그렇게 싫어? 밥도 같이 먹기 싫을 정도로?”“아니요. 너무 멀리 가셨네요.”성유리가 차분한 말투로 그녀의 말에 대답을 이어 나갔다.“전 홍지은 씨가 생각하는 것만큼 당신을 싫어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같이 밥 한 끼 먹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그럴 필요가 정말 없기 때문에.”“다른 일 없으시면 먼저 끊을게요.”말을 마친 성유리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는데 다행히 홍지은에게서 두 번째 전화가 걸려 오지 않았다.성유리는 핸드폰을 무음모드로 바꿔놓고 하늘이의 옆에 살며시 다가가 누웠다.이미 오랜 시간 동안 아이와 함께 잠에 든 적이 없는 성유리지만 아이는
신영지는 홍지은의 말을 채 듣지도 않고 대답을 이어갔다.“그리고 오늘은 그저 평범하게 다 같이 차나 마시며 간단한 일상 대화를 나누는 날이에요. 이렇게 진지한 대화를 나눌 장소가 아니고.”“그럼 저희 다시 날 잡고 얘기 나눌까요?”홍지은은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며 신영지에게 물었다.“연락처가 어떻게 되세요? 통화가 불편하시면 문자라도...”신영지가 미간을 찌푸리며 거절하려는 찰나, 옆에 있던 사람이 먼저 말했다.“아이고. 곧 사진 찍는데 두 분이서 무슨 얘기를 그렇게 나누세요? 저기 키 크신 분, 뒤에 분 막으셨어요. 뒤로 가서 서세요.”그 사람이 말한 키 큰 분은 바로 홍지은이었다.그녀의 표정은 살짝 굳어있었지만 옆에 사람들이 하나둘 재촉하자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사진은 금방 찍었는데 홍지은은 자신의 얼굴이 다른 사람에게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는 것과 표정도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발견했다.그러나 당연하게도 홍지은의 상태가 어떤지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신영지는 홍지은에게 연락처를 주지도 않았고 캐톡 친구를 추가할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사진을 다 찍고 나서 바로 자리를 떴다.그녀가 떠나자 다른 사람들도 급한 일이 있다며 자리를 비웠고 그로 인해 며칠간 할 말을 준비한 홍지은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모임 장소인 찻집에서 나온 홍지은은 남편이 이미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어때? 신영지 씨는 봤어? 말은 걸었고?”딱 봐도 야윈 남자가 홍지은에게 다가와 문을 열어주며 묻자 그녀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말하긴 뭘 말해? 오늘 모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는 알아?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어! 말도 안 걸어준다고.”“그래? 그럼 어떡하지? 공장 일... 마땅한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으면 정말 끝이야.”남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홍지은에게 계속 물었다.“넌 다른 생각을 해볼 생각도 안 하는 거야?”“내가 무슨 생각을 할 수 있는데?”홍지은은 남자의 말에 화가 난 듯 언성을 높였다.“네가 남자잖아!
“성유리.”뒤에서 들려오는 부름 소리에 성유리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봤다.상대방은 빠르게 그녀 쪽으로 다가왔고 체구보다 큰 치마를 입고 있음에도 살이 전보다 더 쪘다는 게 한눈에 알렸다.“정말 유리 맞네? 난 내가 잘못 본 줄 알았어.”상대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지만 성유리는 그녀와 친구라 하기에도 애매한 사이였기에 차분히 대답했다.“오랜만이네요. 홍지은 씨.”“확실히 오랜만이긴 하지.”홍지은은 성유리를 아래위로 쭉 훑어보며 말했다.“전에 다른 사람들이 유리 네가 돌아왔다고 말은 했었어. 근데 네가 여러 모임 장소에도 나타나지 않아 난 그 사람들이 거짓말한다고 생각했지.”성유리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홍지은을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그러니까 박한빈 씨가 결국 너를 선택한 거지? 정말 의외네. 사람들 다 박한빈 씨가 너랑 원하지 않는 결혼을 했다고 생각했어. 근데 이렇게 서로 감정이 생길 줄은 아무도 몰랐네.”“홍지은 씨?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 가요?”성유리는 옛날얘기를 자꾸 꺼내는 것이 싫어 홍지은의 말을 뚝 끊어버렸다.그리고 그때, 유치원 안에서 누군가 급히 달려 나오더니 성유리에게 말했다.“죄송합니다. 너무 오래 기다리셨죠? 이쪽으로 모실게요.”“감사합니다.”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홍지은을 힐끔 쳐다봤는데 마치 다른 일이 더 있냐고 묻는 것 같았다.홍지은은 성유리에게 공손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과 사방을 번갈아 가며 둘러보다 억지로 미소 지으며 입을 뗐다.“일은 무슨. 그냥 갑자기 너를 봐서... 인사하러 온 거야.”“네. 그럼 저 먼저 가볼게요.”성유리는 짧은 대답을 마치고는 바로 뒤돌아섰고 홍지은은 제 자리에 서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표정이 점점 더 굳어졌다.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홍지은은 핸드폰이 울리고 나서야 다른 일이 있다는 게 떠올라 얼른 차에 올라탔다.오늘 모임은 미르시의 신영지가 주최한 것이다.얼굴을 자주 보이는 사람은 거의 다 큰 인물들이 아니었고 홍지은은 그중에서도 나이가
“이거 다 실버 포레스트로 가져가서 화분과 흙을 새로 갈아주고 싶고요. 그래도 돼요?”성유리는 또박또박 말하며 박한빈과 시종일관 눈을 맞췄고 진지하게 그의 의견을 묻고 있었다.그 모습을 보고 잠시 멈칫하던 박한빈이 대답했다.“응. 그래도 돼.”“네. 그럼 우리 날 잡고 이사 가요. 하늘이도 우리랑 같이 가는 거로 하고요. 어머님께서 그동안 하늘이 보살피느라 많이 힘드셨을 거예요.”성유리는 여전히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이번엔 박한빈이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왜 그렇게 보세요?”아무런 대답도 없이 뚫어져라 자신만 쳐다보고 있는 박한빈을 본 성유리가 의아함을 느껴 물었다.결국, 망설이던 박한빈은 솔직하게 묻기를 선택했다.“오늘 어디 갔다 왔어?”그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성유리의 표정도 살짝 굳어졌다.박한빈은 그녀의 표정을 발견하고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이내 성유리가 입을 열었다.“다 알고 계셨네요. 맞아요?”“...”“오늘 하나 씨한테 다녀왔어요. 그리고... 하나 씨 부모님도 만났고요.”성유리는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그분들이 저한테 먼저 말을 걸었어요.”“뭐라고 했는데?”박한빈은 사하나 부모님의 태도를 직접 봤기에 그들이 성유리한테 못된 말을 내뱉어도 이상하게 느껴지진 않았다.두 사람의 악의는 박한빈이 충분히 견딜 수 있는 것들이었지만 그는 그 악의들을 성유리가 맞닥뜨리지 않기를 희망했다.이제 겨우 회복이 돼가는 성유리가 걱정되지만 않았다면 박한빈은 지금 당장 사씨 저택으로 쳐들어갔을 것이다.그들이 목숨값을 원한다면 박한빈은 자신의 생명을 포기할 수도 있다. 성유리만 무사하다면 말이다.만약 유가족들이 끝까지 놓아주지 않고 버틴다면...박한빈이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을 때, 성유리가 계속 말했다.“두 분이... 저를 용서한 것 같아요.”갑작스러운 말에 박한빈은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마치 자신의 귀를 의심하듯 박한빈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쳐다봤고 그녀 역시 그를 보고 있었다.“그게 무슨 뜻이야?”“
성유리는 눈앞에 있는 사람을 조용히 쳐다볼 뿐이었다.류수미를 쳐다보는 그녀의 눈빛은 마치 이해를 전혀 못 했다는 듯 의아했고 괴이하기도 했다.한편, 성유리를 가만히 바라보던 류수미는 시선을 돌리며 계속 말했다.“저번에 김서영 씨가 한 말... 다 맞는 말이더라. 이번 일엔... 유리 네 책임이 하나도 없어.”“너를 너무 몰아붙인 거랑 독한 말을 퍼부은 거에 대해선 우리가 사과할게.”“염치없지만 용서해 줘. 나한텐... 딸이 하나 한 명이었어. 금이야 옥이야 지금까지 키웠는데 이렇게 빨리 가버릴 줄은 몰랐네.”“떠나기 전에도 유서 한 장 남기지 못한 우리 딸이... 너무 가여워서 견딜 수가 없었어.”류수미는 울지 않으려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지 못했고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성유리 또한 눈시울이 붉어졌다.입술을 꾹 다물고 있던 성유리는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나서야 목소리를 되찾았다.그리고는 공손하게 두 사람에게 허리 숙여 인사하며 입을 열었다.“죄송해요. 정말 진심으로... 사죄드리겠습니다.”“그리고 사실 감사하다는 인사를 늘 드리고 싶었어요. 하나 씨한테도.”“제 딸을 구해줘서 고맙다고... 너무 감사하다고 하고 싶어요.”“아무리 보상해도 보상이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아요. 필경 제가 무슨 짓을 하든 하나 씨는 돌아오지 않으니까. 하지만...”성유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류수미가 그녀의 손을 꼭 잡아줬다.전에 하얗고 부드럽던 류수미의 손은 이제 주름이 잡혀 한눈에 봐도 나이 든 사람 손 같아 보였다.고개를 숙이고 있던 성유리에게 류수미가 울먹이며 말했다.“그럼 잘 살아.”“김서영 씨가 그날 했던 말처럼 넌 잘 살아. 우리 하나 몫까지.”...박한빈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도우미에게 물었다.“성유리 오늘 어디 갔습니까?”그의 안색은 어두워져 있었고 목소리는 무척 날카로웠다.도우미는 박한빈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아마 사하나 씨한테 다녀온 것 같아요.”박한빈은 아무 말도 없이
그는 그저 조용히 성유리를 품에 끌어안았고 그렇게 밤 내내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박한빈은 어느 때보다 더 자신의 마음과 성유리의 마음이 가까이 붙어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성유리가 다시 사하나의 부모님을 봤을 때는 청명절이 다가올 무렵이었다.사민혁과 류슈미가 자신을 마주치기 싫어한다는 것을 알기에 성유리는 특별히 청명절 전날에 사하나를 찾아갔다.하늘이도 함께.아이는 이미 한 달째 유치원에 다니던 상황이었고 생각보다 더 잘 적응해 갔다.지금껏 하늘이는 죽음이 뭘 의미하는지 몰랐기에 사하나의 영정사진을 마주하자 많이 의아해했다.마치 전에 늘 자기랑 나가 놀던 이모가, 늘 치마나 선물을 사주던 이모가 왜 이곳에 누워있는지 몰라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성유리는 준비한 꽃다발을 사하나의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그녀는 사하나에게 할 말을 미리 준비했었다. 심지어 행여 잊어버리고 못 한 말들이 있을까 봐 메모지에 며칠 전부터 적어두기까지 했다.하지만 막상 사하나의 무덤을 마주 서고 나니 목이 꽉 막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메모지에 적어둔 익숙한 글자들을 몇 번이나 봐도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고 그렇게 멍하니 사하나의 사진만 바라보고 있었다.그때, 뒤에서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 성유리는 잔뜩 굳은 채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사하나의 부모님은 먼발치에서 성유리와 하늘이를 보고 있었는데 그들 또한 오늘 두 사람이 찾아올 줄은 몰랐던 눈치였다.성유리는 무의식 간에 하늘이를 자신의 뒤로 숨겼지만 이런 행동이 류수미와 사민혁을 더 화나게 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러나 본능적인 모성애로 그런 행동을 해버렸고 정신을 차리고 나서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성유리의 예상과는 달리 항상 원망이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던 사하나의 부모님은 오늘따라 유달리 조용했다.심지어는 왜 이곳에 찾아왔냐고 따져 묻지도 않았고 뚜벅뚜벅 두 사람이 서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그들의 반응에 성유리는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단 한 가지는 똑바로 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