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빈은 오늘 확실히 술을 평소보다 더 많이 마셨었다. 성유리 쪽에서 나온 다음 바로 다른 술집으로 향한 박한빈은 구체적으로 자신이 얼마나 마셨는지 기억조차 못 했다. 하지만 배지수가 박한빈의 눈앞에 나타났을 때, 그는 누구보다 더 정신이 말짱했다. 박한빈은 서훈에게 전화를 걸어 박한빈과 배지수의 일을 잘 처리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지화그룹의 일은 이제 거의 끝을 향해 달리고 있으니 배지수라는 “방패”는 필요하지 않아졌다. 그리고 또 하나, 배지수의 두 눈과 마주쳤을 때 박한빈은 점점 머릿속에 정확한 답안이 떠올랐다. 배지수는 성유리가 절대로 될 수도 없고 그녀를 대체할 수도 없다는 것이 바로 그 답안이다. 그래서 박한빈은 다시 돌아오기를 선택했다. 성유리는 박한빈에게 미쳤다고 말을 했지만 사실 그 또한 자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미치지 않았다면 어떻게 성유리가 제시한 조건들을 망설임도 없이 동의하겠는가? 성유리가 자신을 망치려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박한빈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성유리가 이런 방식으로 자신을 밀어내려 하는 것은 아닌지, 왜 이렇게 매정하게 대하는지 말이다. 아마 성유리가 아직 자신에게 감정이 남아있어 더는 흔들리지 않기 위해 냉정한 태도를 유지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한빈은 그런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들 때마다 이런 자신이 너무 초라해 보이고 웃겼다. 하지만 박한빈은 정신을 다잡아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의 몸 안에서 또 다른 박한빈이 나타나 그러면 안 된다고 목이 터져라 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외침에 박한빈의 또 다른 목소리는 알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대답하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박한빈은 서서히 감았던 눈을 떴다. 방안에 에어컨은 낮은 온도로 틀어져 있어 박한빈은 추워서 몸이 덜덜 떨렸다. 그러나 이내 박한빈은 왜 이렇게 춥다고 느껴지는지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침대에 나 혼자 누워있네?’ 박한빈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맨발로 걸어
그렇지만 않았어도 성유리는 자신을 바꾸려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바뀐 성유리지만 생각했던 만큼 기쁘지도 않았다. 성유리는 기쁘지 않은 원인이 아직 자신의 노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아마 어느 날, 더 이상 올라갈 데가 없을 정도의 위치에 올라간다면 행복할 수 있겠다는 착각도 했다. 성유리는 스스로 확신하지 못했고 주위 어떤 누구도 그녀에게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성유리는 끝이 없이 앞으로 걸어 나가야만 했다. “담배 끊으라고.” 박한빈은 성유리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지 똑같은 말만 반복했다. 성유리는 그런 박한빈의 말에 어이가 없어 웃으며 물었다. “그러는 박한빈 씨는 왜 담배를 안 끊는 건데요?” “좋아. 그럼 나도 너랑 같이 끊을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는 박한빈을 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쳐다보았다. 박한빈은 내뱉은 말을 빠르게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인지라 성유리의 담배 한 갑과 라이터를 바로 쓰레기통에 던졌다. 그리고 어제 벗어놓은 자신의 옷가지 쪽으로 향하더니 주머니 속에서 담배를 꺼내더니 깔끔하게 버렸다. 하지만 손에 들린 라이터는 버리지 않았고 박한빈은 성유리를 바라보며 그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이 라이터는 안 버릴래. 네가 선물로 준거니까.” 성유리는 당연히 아직 그 라이터를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라이터를 봐도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고 정신병자를 보는듯한 눈빛으로 박한빈을 쳐다보고는 방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박한빈은 성유리의 뒤를 조용히 따라갔고 그녀가 화장실로 향할 때도 여전히 뒤에 서 있었다. 성유리는 그런 박한빈을 더는 참아주지 못하겠는지 결국 먼저 말했다. “진짜 머리에 총 맞았어요? 왜 이래요? 저 지금 화장실 갈 거라고요.” “괜찮아. 네 몸 어느 한 부분도 내가 키스하지 않은 데가 없잖아.” 그의 말에 성유리는 옆에 놓인 수건을 들어 박한빈에게 뿌렸다. 박한빈은 재빨리 성유리가 던진 수건을 낚아챘고 그 기회를 틈타 성유
박한빈의 무슨 대답을 했는지 성유리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마지막에 결국 박한빈이 자신의 욕망을 참지 못해 두 사람은 위치를 바꾸었고 아침에 있던 회의는 정말로 참석하지 못했다. 성유리가 회사에 도착했을 때, 정민재가 다가와 회의가 늦춰졌다고 알려줬다. 그녀는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당황하지 않았고 정민재는 이내 다른 업무의 일정을 말해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민재의 두 눈은 끝없이 성유리를 아래위로 훑어보고 있었고 그녀는 그의 시선에 불쾌해져 미간을 찌푸렸다. 성유리가 화를 내려는 순간, 정민재는 성유리의 귀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컨실러 하나 준비해 드릴까요?” 정민재의 말에 성유리는 깜짝 놀랐고 빠르게 자신의 모습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이내 옷깃에 남은 누군가의 흔적을 발견하고는 손으로 가린 후,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보내려고 하였다. [정말 개가 되시려고 이러시는 거예요?] 성유리는 입력한 문자를 보내려고 했지만 망설이다 결국 지워버렸고 무표정한 얼굴로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는 옷깃을 정리했다. 정민재는 어디론가 빠르게 향하더니 컨실러 하나를 사와 성유리에게 건네며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여자 친구한테 물어봤더니 이게 제일 효과가 좋다고 하더라고요.” 성유리는 신경 쓰지 않는척 하며 정민재가 건네는 컨실러를 건네받았다. “저 방금 되게 흥미로운 소식 하나 접해 들었습니다.” 정민재가 반짝이는 눈으로 성유리를 쳐다보며 다시 말했다. “뭔데요?” “배지수 씨가 박 대표님이랑 헤어졌다고 선언했더라고요? 지금 인터넷에 난리가 났습니다.” “그래요?” 성유리는 전혀 놀라지 않았기에 평온한 표정으로 대답했지만 정민재는 순간 입을 꾹 닫아버렸다. 한참을 가만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정민재를 발견한 성유리는 손에 있던 문서를 그에게 휙 던지며 말했다. “하실 말씀 있으시면 말하세요. 그렇게 자꾸 쳐다만 보고 있으면 잘라 버릴 거예요.” “쯧쯧. 이제 좀 급해 나시는 모양입니다?” 정민재는 씩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할 일이 없으신가요? 아니면 너무 적나?” 성유리가 굳은 표정으로 정민재에게 물었다. 그러자 정민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물건을 챙기고는 밖으로 나갔다. 성유리는 그런 정민재에게 시선 한번 주지도 않은 채 컴퓨터 앞에 마주 앉았지만 업무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성유리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고 사무실 입구까지 걸어갔다. 걸어가는 도중 점차 복잡했던 머릿속이 정리되었고 침착해져 성유리는 다시 의자로 돌아가 업무를 계속 보기 시작했다. 해가 어둑어둑한 저녁, 박한빈은 성유리에게 함께 밥을 먹겠냐고 묻는 문자를 보내왔다. 성유리가 답장이 없자 박한빈은 두 통의 문자를 더 보내다가 마지막엔 바로 전화를 걸었다. “저는 아직 일이 있어서요.” 성유리가 대답했다. “무슨 일? 야근이야? 그래도 밥은 먹...” “저는 정우랑 밥 약속이 있어요.” 성유리는 박한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먼저 입을 뗐다. 수화기 너머 박한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성유리는 하루 종일 답답하던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성유리는 박한빈에게 다른 말은 하지도 않고 바로 통화를 끝냈다. 사실 성유리는 오늘 정말 연정우와의 약속이 있었던 터라 일부로 박한빈을 골탕 먹이려는 속셈은 아니었다. 어젯밤 통화를 한 두 사람이지만 나중에 발생한 일들은 연정우는 아직 모르는 것 같았다. 그래도 같이 “일”을 하는 사이기에 성유리는 자신의 지금 상황을 연정우에게 말해줬다. “그래서?” 연정우는 피식 웃으며 계속 물었다. “이제 우리 둘의 관계를 끝내겠다는 말이야?” “끝내고 싶어?” 성유리가 되물었다. 연정우는 예상치 못한 그녀의 물음에 잠시 당황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난 아직 그 사람이랑 공식적인 사이가 아니야. 공식적으로 공개할 생각도 없고. 그래서 우리 사이에 있는 계약은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을 거야.” 성유리의 말을 들은 연정우는 한참 동안 침묵했다. 연정우가 화가 났다고 확신한 성유리는 자신이 규칙을 위반했기에 마땅
성유리가 드림 타운에 도착했을 때에도 집안은 어두컴컴했다. 그녀는 당연하게도 박한빈이 이미 떠나갔다고 생각했지만 스위치를 켜려는 순간, 박한빈의 목소리가 들렸다. “왔어?” 깜짝 놀란 성유리가 펄쩍 뛰며 스위치를 눌렀다. 그러자 거실은 빠르게 환해졌고 성유리는 소파에 앉아 자신을 그윽하게 바라보고 있는 박한빈을 발견했다. “오늘 밤엔 어디 갔었어? 재밌었나?” 성유리는 박한빈의 말에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되물었다. “왜 아직도 안 가셨어요?” “난 내 짐까지 다 갖고 왔는데 나더러 어디로 가라는 말이지?” 박한빈의 대답에 성유리는 그제야 그의 앞에 놓인 커다란 두 개의 캐리어를 발견했다. “누... 누가 당신한테 오라고 했는데요?” 성유리의 물음에 박한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성유리는 짧은 순간이지만 박한빈이 조금 안쓰러워 보였다.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드는 것도 잠시, 성유리는 정신을 다잡았다. ‘진짜 미쳤나 봐. 왜 박한빈 씨가 불쌍해 보이지?’ 성유리는 박한빈과 더 상대하기 싫어 손님이 묵는 방을 손으로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짐은 다 저 안에 놓으세요.” 말을 마친 그녀는 자기 방으로 향하려고 발걸음을 옮겼고 박한빈은 조용히 성유리의 뒤를 따랐다. “뭐 하시려고요?” 성유리는 발걸음을 멈추며 뒤돌아 박한빈을 잔뜩 경계하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위 아플 때 먹는 약 있어?” 박한빈이 자신의 위를 손으로 어루만지며 계속 말했다. “저녁을 안 먹었더니 지금 위가 좀 아프네.” 성유리는 잠시 멈칫하다가 대답했다. “배달시키세요, 요즘은 약도 배달해 주니까.” “난 할 줄 모르는데.” “그럼 비서님한테 사다 달라고 하시던가요.” 단호한 말투로 말을 하던 성유리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굳게 닫아버렸다. 박한빈은 앞에 있는 성유리의 방문을 묵묵히 쳐다보다 갑자기 빠르게 변해버린 사람들의 생활방식이 싫어졌다. 예를 들어 지금 같은 상황에 박한빈은 급하지 않았으니 사실 약을 배달로 시킬 필요
욕실 밖으로 쫓겨난 박한빈의 손에는 여전히 성유리가 던진 수건이 들려 있었다. 수건에서 나는 은은한 향기와 성유리의 화난 모습이 떠오른 박한빈은 웃음이 새어 나왔고 밖으로 발길을 돌렸다. 박한빈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성유리는 더 씻을 마음도 없어져 대충 물로 헹구고 난 뒤. 욕실 가운을 입고 나왔다. 성유리는 박한빈이 아직도 방에 있는 것을 발견했고 그의 발 옆에 놓인 두 개의 캐리어에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안색은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뭐라 화를 내기도 전, 박한빈이 먼저 말을 꺼냈다.“저 방에 다른 물건들이 많아서 짐을 놓을 데가 없어.” 성유리는 순간 연정우가 이 집에서 짐을 뺄 때, 놓고 간 물건들이 떠올라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그 방으로 향해 연정우의 짐을 가지고 자기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박한빈은 성유리의 앞을 가로막아 서며 다시 말했다. “그 물건들 다 어디 갖다 놓으려고?” “당연히 제 방이죠. 쓸데없이 이런 건 왜 묻죠?” “안 돼.” 박한빈은 망설이지도 않고 안 된다며 딱 잘라 대답했다. “아니면 내 짐이랑 네 짐을 같이 놓을까?” 박한빈의 물음에 성유리는 코웃음을 치며 입을 열었다. “지금 무슨 생각하시는 거예요? 잊지 마세요. 지금 연정우 씨야말로 제 남자 친구고 제 애인이에요.” 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은 입을 꾹 닫았다. 그녀는 박한빈이 자신의 말에 전처럼 노발대발 화를 내며 날뛰겠다고 예상했다. 필경 지금까지 박한빈은 성유리에게 미친개 같은 모습도 보여줬었기 때문이다. 성유리의 기억 속, 박한빈은 늘 잔인하고 악랄하고 정신 나간 사람이었다. 그러나 성유리의 예상과는 달리 박한빈은 조용히 성유리를 쳐다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하긴.”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캐리어를 들고 손님방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성유리는 덤덤한 박한빈의 모습에 당황했다. 이내 앞으로 걸어가던 박한빈이 발걸음을 멈추더니 고개를 돌려 성유리에게 물었다. “여기 주소는 어떻게 써야 돼? 약 사야
커다란 냄비에 담긴 면들은 양이 많을 뿐만 아니라 맛도 너무 없었다. 성유리는 지금까지 살면서 이 정도로 맛없는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어 무척이나 당황했다. 결국 성유리는 몸을 일으켜 직접 박한빈에게 다시 면을 끓여주기를 선택했다. 박한빈은 성유리가 다시 요리를 하는 와중에도 계속 그녀의 곁에 서 있었다. 성유리가 입을 열어 박한빈에게 나가서 기다리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박한빈은 마치 성유리의 생각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듯 먼저 말을 꺼냈다. “옆에서 좀 봐두려고. 어떻게 만드는지는 알아야지.” “박 대표님, 이런 일은 대표님 신분에 어울리지 않아요.” 성유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대표님께서 원하신다면 이런 음식을 해줄 여자는 널리고 널렸잖아요.” “나도 알아.” 박한빈은 성유리를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성유리는 아무 말도 없이 다시 끓인 면을 식탁 위에 내려놓고는 뒤돌아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오늘 밤에 연정우 씨랑 말은 했어?” 박한빈이 뒤돌아있는 성유리에게 물었다. “우리 둘 사이 말이야.” “네.” “된대?” “네.” 성유리의 박한빈이 귀찮은 듯 대충 대답을 해줬고 그는 더 이상 뭐라고 말을 걸지 몰랐다. 그녀는 이내 자기 방으로 돌아가 문을 닫았고 박한빈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지만 몸을 돌려 식탁 위에 있는 면을 본 순간, 또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박한빈은 성유리가 아직 자기에게 앙금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필경 전에 박한빈이 늘 성유리에게 상처를 주고 아프게 만들었으니까. 성유리가 박한빈에게 서운해하고 화를 내는 이유 또한 그녀가 박한빈을 신경 쓰고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박한빈은 성유리가 자신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것보다 그녀가 화를 내며 자신을 원망하는 것이 더 나았다. 지금 두 사람이 놓인 처지는 그냥 잠시일 뿐이라고 생각한 박한빈은 사냥감을 손에 넣으려면 천천히 다가가야 한다고 자신을 세뇌했다. 이 넓은 “초원”에서 “사냥감”에게 함부로 다가갔다가는 큰
“성 대표님?” 한참이나 말없이 앉아 있는 성유리를 보던 정민재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그의 목소리에 성유리는 그제야 정신이 드는 듯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당연히 되죠. 박 대표님께서 수고하셨겠어요.” “다 같이 일하는 처지인데 이 정도야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박한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성유리에게 악수를 청했다. 회의실 안에 있던 사람들의 눈에 박한빈은 여전히 만인의 부러움과 질투를 사는 능력자로 보였으니 성유리는 그와 악수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박한빈과 손을 맞잡은 순간, 성유리는 아무도 몰래 그의 손을 꽉 쥐었고 손톱으로 손바닥을 할퀴기까지 했다. 성유리는 분명히 박한빈이 고통을 느껴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봤지만 짧은 인사를 마치고는 뒤돌아 나가버렸다. 박한빈이 말한 조영준은 연성 은행계의 큰 인물이었고 성유리로 놓고 말하면 직접 은행으로 향해 업무를 본다고 해도 조영준을 마주칠 가능성은 없었다. 그러나 박한빈은 달랐다. 성유리는 박한빈이 조영준과 이번에 처음으로 손을 맞잡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두 사람의 사이는 꽤 좋다고 예상했다. 그래서 이번에 박한빈이 특별히 자신을 불러 조항정에게 소개를 시켜주고 도와주려고 한다는 사실을 성유리는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저녁 시간이 다가올 때쯤 박한빈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박한빈은 성유리를 식당까지 데려다주겠다는 말과 상대에게 특별히 성유리 혼자만을 만나라고 부탁했다는 말을 해줬다. 성유리는 예상했던 일이기에 식당으로 가겠다고 했지만 기어코 혼자 운전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박한빈은 그런 성유리를 존중해주며 식당 위치를 찾기 힘들 테니 자신의 차 뒤를 바짝 따라오라고 말했다. 성유리는 아직 전에 박한빈이 술자리에 연성의 길에 아직 익숙해지지 않았다고 말을 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역시나 박한빈은 오늘 성유리가 뒤에 따라오고 있지만 이리저리 길을 헤매며 도통 식당으로 도착하지 못했고 성유리마저 이곳이 어딘지 몰
마음속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인지 불안한 성유리는 박한빈의 대답이 들리지 않자 미간을 찌푸렸다. 박한빈에게 뭐라고 말을 하려던 성유리가 입을 떼기 전, 박한빈은 시원하게 비밀번호와 인증코드를 알려주었다. 그는 성유리기에 컴퓨터로 무슨 일을 할 것인지도 묻지도 않았다. 성유리는 예상치 못한 박한빈의 태도에 알겠다는 짧은 대답을 하고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녀는 빠르게 박한빈이 알려준 비밀번호를 입력했고 컴퓨터 화면이 열리자 배경 화면이 두 사람의 결혼식 사진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당황한 성유리는 멍해졌다가 이내 박한빈과 고명도 사이의 일을 알아내야 한다는 사실이 떠올랐고 이제 와서 이러는 박한빈이 한심하고 웃겼다. 그래서 성유리는 증거들을 찾기 전에 먼저 박한빈의 컴퓨터 배경 화면을 바꿔버렸다. 제일 간단하고 기본 설정인 배경 화면으로 바꾸자 성유리는 기분이 한결 나아졌지만 또 다른 문제에 직면했다. 그 문제는 바로 박한빈이 하나하나 잠가버린 모든 자료와 파일들이었다. 컴퓨터를 쓰겠다고 말했지만 파일들 비밀번호까지 알려달라면 들켜버릴 것이 뻔했다. 성유리는 혼자서 이것저것 입력해 봤지만 다 틀리자 아예 포기해 버렸다. 사무실 책상에서 발견하지 못했으니 뒤에 있는 책장에는 있을 리가 없었다. 성유리는 서재를 다 찾았지만 아무런 수확이 없어 결국 포기하려고 마음먹었다. 그 시각,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박한빈은 여전히 도연제에 돌아오지 않았고 성유리는 입맛이 없어 밥을 먹고 싶지 않았다. 서재에서 나온 성유리는 자연스럽게 복도 끝자락에 있는 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문이 굳게 잠겨있긴 하지만 성유리는 방안 구조와 인테리어를 다 훤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성유리는 결국 그 방안으로 발을 들이지 않았고 문 앞에서 서성이다 아래로 내려갔다. 소파에 누워 눈을 감은 성유리는 박한빈이 언제 들어왔는지도 몰랐다. 서서히 감았던 눈을 뜨자 성유리는 제일 먼저 자신의 볼을 쓰다듬는 누군가의 손길을 느꼈고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정신을 차려
성유리는 자기가 어떻게 병원을 빠져나왔는지도 기억이 안 났다. 이미 금성은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는 무더운 한 여름이었지만 성유리는 전혀 덥지도 않았고 따뜻함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밖에 한참을 서 있던 성유리는 등 뒤로 식은땀이 줄줄 흘러 이빨을 꽉 깨물고 버텼다. 택시는 빠른 속도도 달려 도연제에 도착했다. 눈앞에 있는 익숙하고도 낯선 곳에 성유리는 방금 전 성시원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유일한 기회이자 방법이야.] 성시원은 박한빈에게 위협을 줄 수 있는 방법과 증거를 찾고 싶었고 그 증거로 박한빈을 끌어내리려 했다. 하지만 성유리의 생각은 성시원과 달랐다. 박한빈이라는 사람을 잘 아는 성유리는 그가 행여 다른 사람들에 의해 끌려 내려오더라도 언젠간 꼭 다시 올라와 두 배로 갚을 것 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유리는 박한빈과 비슷한 사람을 대할 때면 꼭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하고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초원에서 만난 두 마리의 맹렬한 맹수는 싸울 때 서로 할퀴고 뜯는 것은 의미가 없다. 서로한테 제일 치명적인 상을 입혀야 승리를 거머쥐는 잔인한 현실에 성유리는 정신을 다잡았다. 차에서 내린 성유리는 이곳에서 2년이라는 시간을 보냈기에 아주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성유리는 이내 박한빈의 서재를 찾았고 아침에 그가 했던 말들 떠올렸다. [오늘 바빠서 못 돌아갈 거야.] 비록 자신이 찾는 서류가 서재에 있을지는 모르지만 성유리에게 있어서 지금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였다. 성유리는 굳게 잠긴 문에 몇 번이나 비밀번호를 입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박한빈의 생일이나 그의 핸드폰 비밀번호, 게다가 성유리 본인의 생일까지 입력해 봤지만 여전히 틀린 비밀번호였다. 성유리는 머릿속 깊은 곳에 있던 기억까지 끄집어내 절대 불가능할 것 같던 숫자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띠릭! 그 순간,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문이 천천히 열렸다. 성유리가 마지막에 입력한 숫자들은 바로 박한빈과 성유리 두
그 말인즉슨 그들이 담판을 짓기 전부터 사실 박한빈은 이런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번 기회를 빌어 성리그룹의 모든 것을 다 삼켜버리고만 싶었다. 모든 일은 성유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지만 박한빈은 성유리가 자신에게 애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성유리는 그런 박한빈의 결정에 아주 침착하고 냉정하게 판단을 내렸다. 필경 그녀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박한빈은 항상 이런 사람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유리는 가끔 박한빈이 자신의 앞에서 온순한 양이 되어 항상 져주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래서 성유리는 전에 자기 마음대로 박한빈을 대하고 그에게 복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했었다. 성유리는 이제 서야 박한빈의 모든 “가면”을 벗겨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런 느낌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괴이했고 이상했지만 웃기게도 성유리는 아직 박한빈의 이런 태도를 볼 때면 마음이 아프고 속상했다. 허나 고통을 호소할 정도로의 아픔은 아니었고 그저 피부가 살짝 날카로운 칼에 긁힌 것 같은 정도였다. 깊은 상처는 아니지만 갓 치유가 된 상처 부위를 또다시 긁혔기에 이런 고통은 새로 생긴 상처보다 더 아프고 쓰렸다. 상처가 깊지 않은 탓에 피는 곧 멈췄기에 반창고를 붙이는 것도 의미가 없다. “정말 그렇다고 해도 결과는 변하지 않아요.” 성유리가 입을 뗐다. “지금 성리 그룹의 상황은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버렸어요. 남들처럼 파산신청이나 할 수 있어도 정말 불행 중 다행이고요.” 평온한 말투로 말을 하는 성유리는 본인조차도 자기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성시원은 성유리의 말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아무 말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그는 성유리의 말에 평소처럼 화를 내지도 못했고 침대에 가만히 누워 천장만 멍하니 쳐다보았다. “몸 잘 챙기세요.” 성유리는 조용히 그를 쳐다보다 짧은 인사말을 하고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때, 성시원이 갑자기 성유리에게 말했다. “사실 방법이 하나 더 남아있어.” 앞으로 뚜벅
이런 상황을 겪어본 적 없던 간병인은 어쩔 줄 몰라 했다.무엇보다 성시원은 금방 의식을 회복한 사람으로서 누구든 지금 흥분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간병인은 성시원을 말릴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그 반면에 성유리는 아주 덤덤했다.그는 데인 종아리에서 퍼져오는 고통을 견디며 천천히 성시원에게 다가갔다.성시원은 생각보다 당돌한 성유리의 모습에 놀랐는지 손에 든 컵을 다시 던지려고 움직였지만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성유리가 그의 손을 단단히 내리누르며 막았다.그리고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간병인을 바라보며 말했다.“잠시 나가주세요.”이 자리가 불편하다고 생각 중이던 간병인은 성유리의 말이 구세주라도 되는 양 곧장 자리를 떴다.성유리가 성시원을 보며 물었다.“지금 회사 상황 다 알고는 계세요?”“알다마다? 이럴 줄 알았어... 이럴 줄 알았다고! 박한빈 그 자식이 어떤 놈인데! 너한테 인주 프로젝트 맡길 때부터 이미 함정이었던 거야! 이거 다 둘이서 짠 거 아니냐? 오늘 이러려고...”“성리 그룹이 이렇게 된 건 인주 프로젝트 때문이 아니에요.”성유리가 성시원의 말을 단칼에 끊었다.“가장 책임을 물어야 할 사람은 고명도와 아버지입니다.”성유진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성시원은 그 말에 넋을 놓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뭐라고?”성시원의 목소리가 낮아지긴 했지만 어떻게든 반박해보기 위해 입을 열려던 찰나, 성유진이 입을 열었다.“아니에요? 만약 고명도가 그 큰 거액을 빼돌려 자금 흐름만 안 끊었어도 성리 그룹이 이런 상태가 됐을까요? 그리고 그런 고명도를 맹목적으로 믿었던 아버지께도 잘못이 있어요. 지금 회사가 주주들 권리랑 악성 채무 관계로 엉망이 되어버린 것도 그동안 아버지께서 너무 무책임했던 결과 아닙니까? 남에게 잘 보이겠다고 딸을 이리저리 내다 팔아가며 이익을 얻으려고 하셨잖아요. 생각 못 해보셨어요? 성리 그룹이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성리가 단번에 수많은 말을 쏟아냈다.그 말에
뒤를 미처 보지 못한 박한빈은 성유리에게서 날아온 베개에 그대로 맞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도,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걸음을 옮겨 집을 나섰다.성유리는 문득 허탈한 감정을 느꼈다.박한빈의 앞에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그의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박한빈에게 던져진 베개처럼 겉으로는 화가 잔뜩 나 있으면서도 사실은 그에게 아무런 피해도 줄 수 없었다.발버둥 칠수록 그저 자신만 우스워질 뿐이었다....결국 성유리는 병원으로 향했다.그녀는 연정우가 밝힌 입장문을 확인했다.연정우는 결혼을 취소했다고 하는 대신 며칠 연기할 예정이라고만 밝히고 자세한 것은 얘기하지 않았다.언제까지 연기할 것인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체면을 지키기 위한 말일 뿐,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무산될 것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성유리는 그 성명을 몇 분 동안 보다가 스크롤을 조금만 더 내려 댓글을 확인하더니 조용히 휴대폰을 껐다.그리고 마침 병원에 도착했다.어제의 소식이 퍼지자 병원 근처에는 기자들이 몰려 있었지만 나름 철저한 병원의 보안 덕분에 그들은 입구 밖에만 몰려 있었다.차에서 내리는 성유리의 모습에 기자들이 웅성거렸다.“업계에서 누가 일부러 성리 그룹을 음해하려고 한다던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성리 그룹의 향후 계획은 뭔가요?”“파산 신청하실 예정인가요?”“아버님께서 깨어나셨나요? 충격이 꽤 크신 것 같은데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수많은 마이크와 카메라가 성유리를 둘러싸자 병원의 보안 요원들이 다가와 간신히 기자들을 저지했다.그리고 성유리는 기자들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침묵으로 인한 추측성 기사가 하나씩 나오기 시작했다.그렇게 나온 기사들은 대부분 그녀의 침묵에 대해 추측하는 내용이었다. 기자들은 아무 말도 못 하는 성유리의 모습에 성리 그룹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처지가 됐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그리고 성시원의 상태로 그다지 좋지
무작정 뺨을 때린 것은 성유리의 자동반사적인 반응이었다.박한빈이 너무 가까이 있었던 탓이다.그리고 박한빈이 정말 막을 생각이 있었다면 그녀의 손을 잡거나 어떻게든 막았겠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어젯밤 뺨에 남긴 자국이 사라지기도 전에 하나가 더 생겨버렸다.정말 웃긴 이야기 속의 주인공처럼 대칭 맞춰 두 뺨에 손자국이 생긴 격이었다.“악몽 꿨어?”박한빈은 아프다는 기색 하나 없이 물었다.하지만 성유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냥 꿈일 뿐이야.”박한빈은 옷을 갈아입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오늘은 내가 좀 바빠서 같이 밥 못 먹을 것 같네. 넌 아버지 뵈러 병원 가 봐. 그리고 연정우랑 결혼 취소했다고도 전하고. 회사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박한빈의 목소리는 짧고도 단호했다.“어떻게 할 생각이야?”성유리가 물었다.박한빈은 단추를 잠그던 동작을 멈추더니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어쨌든 성리 그룹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 이번 일로 주주들 반응도 봤을 거고, 성리 그룹의 문제는 오랜 시간 동안 쌓여온 거야. 본질이 아예 썩어 있다고. 오늘 평가 진행하고 청산해야 할 거 청산할 거야.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어. 네 건 뺏을 생각 없으니까.”박한빈의 말을 듣는 순간, 성유리는 손에 잡히는 베개를 그의 얼굴에 내던졌다.“그럼 성리 그룹은 인수합병하는 거랑 다를 게 뭐야? 어젠 분명 그런 말 없었잖아!”“지금으로선 이게 최선이야.”박한빈은 자신에게 던져진 베개를 잡은 채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지금 상황이 별로 좋지 않아. 성리 그룹은 심각한 적자를 겪고 있고, 회사를 넘기고 싶어도 쉽지 않을 거야. 이 문제를 해결해준 건 나니까 넌 나한테 고마워해야지. 그리고, 난 단지 너희가 지화 그룹에 끼친 손해를 묻지 않겠다고 했을 뿐이지, 성리 그룹을 살려주겠다는 약속은 한 적이 없어. 내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널 위해서야. 너도 알잖아. 네가 성리 그룹에 있는 한, 회장님은 어떻게든 우리 관계를
지금 그 꽃은 이미 시들어 죽어버리고 말았다. 다 죽은 꽃에 뒤늦게 찾아온 햇빛과 보살핌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성유리는 다시 눈을 감았다.하지만 그 순간, 눈을 감으려던 성유리는 화장대 위에 놓여 있는 물건을 발견했다.성유리의 기억이 맞다면 그것은 그녀가 애용하던 브랜드의 스킨케어 제품이었다.뒤이어 창가에 묶여 있는 커튼 끈과 맞은 편 드레스룸의 유리문 너머 걸려 있는 익숙한 옷가지도 눈에 들어왔다.그제야 성유리는 자신이 이곳에 남겨두고 갔던 물건들을 박한빈이 다 옮겨놓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사실 그 물건들은 성유리의 것이 아니었다.옷들은 성유리가 박 대표의 아내라는 칭호에 걸맞을 수 있게 김서영이 사준 옷들이었다. 자신의 돈으로 산 것이 아니라 떠날 때도 굳이 챙겨가지 않았던 것이다.그리고 스킨케어 제품들도... 아마 이젠 유통기한이 다 지나지 않았을까?성유리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욕실에서 들려오던 물소리가 멈췄다.그녀는 생각하는 것을 멈춘 채 눈을 질끈 감았다.어둠 속에서 박한빈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성유리의 옆에 자리 잡고 누웠다.샤워를 금방 마치고 나온 그는 상쾌한 향기를 풍기며 성유리의 허리를 감싼 팔에 점점 힘을 주었다.둘의 피부가 조금의 틈도 없이 단단히 맞닿았다.하지만 박한빈은 더 가까이 붙으려는 듯 힘을 더 주더니 팔을 더 세게 조여왔다. 마치 성유리를 자신의 육체에 완전히 새기기라도 할 것 같았다.그 엄청난 힘에 성유리는 숨을 제대로 쉬기조차 버거웠다.참다못한 성유리가 박한빈의 손등을 몇 번 꼬집으며 말했다.“놔! 아파!”그녀는 여전히 이를 악문 채 말했다.그 말에 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팔의 힘을 어느 정도 느슨하게 풀더니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하지만 그의 몸은 여전히 성유리에게 밀착해 있었고 입술은 수시로 그녀의 피부에 댄 채 가볍게 키스했다.성유리는 박한빈에게 개새끼냐고 묻고 싶었다.하지만 조금 전 그의 뺨을 후려갈겼을 때, 오히려 즐겁
성유리는 자신이 다시 도연제로 돌아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이곳을 떠나던 그 날, 다시 여기로 돌아올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저택에서 일하던 직원들은 박한빈이 모두 내보낸 듯했고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을 때, 집안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박한빈은 성유리를 데리고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안방의 문이 그에 의해 열렸다.안의 가구 배치가 예전보다 조금 달라진 듯했지만 성유리가 자세히 살펴보기도 전에 박한빈은 그녀를 침대에 밀어 눕혔다.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는 표정을 굳힌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그의 행동에서는 다정함이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이런 상황을 이미 예측한 성유리도 그다지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아무런 저항의 의지도 보이지 않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성유리의 무반응이 박한빈을 더욱 불쾌하게 만들기라도 한 듯 그는 고개를 숙이더니 그녀의 목을 세게 물었다.단순한 애무가 아니라 정말 힘껏 문 것이었다.박한빈의 이빨이 피부를 뚫어 피가 새어 나오는 것이 생생히 느껴졌다.성유리는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신음하며 손을 들어 박한빈의 뺨을 힘껏 후려갈겼다.그녀의 손에는 힘이 잔뜩 실려 있었다.며칠 동안 쌓여왔던 모든 분노와 억울함이 이 한 대에 실려 박한빈의 뺨에 닿았다.그렇게 새하얀 그의 얼굴에는 빨간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그 순간, 마음이 약해진 성유리는 자신이 너무 심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출근을 해야 하는 사람인데, 이런 얼굴로 출근한다면 분명 모두의 이목을 끌 게 뻔했다.하지만 박한빈은 그런 것쯤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성유리가 박한빈의 뺨을 내리칠 때, 그는 오히려 웃고 있었다.그 반응에 당황한 성유리는 그저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이윽고 그녀의 입에서 욕이 흘러나왔다.“병신.”박한빈은 성유리가 무슨 말을 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조금 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손길로 그녀를 매만졌다.하지만 그런 다정함이 성유리는
“성...”먼저 입을 연 쪽은 연정우였지만 성유리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두세 걸음 만에 박한빈의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갑시다.”그녀의 목소리는 어딘가 쉬어 있었다.박한빈이 눈을 가늘게 떴다.성유리는 더 생각하지 않고 손을 뻗어 박한빈의 손을 잡아끌었다.박한빈은 저항하지 않은 채 성유리를 따라가려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자리를 뜨려 하던 순간, 연정우가 뒤늦게 정신을 차린 듯 성유리의 다른 한 손을 덥석 잡았다.그 행동에 박한빈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지만 성유리가 그보다 한발 빨리 연정우를 돌아보며 말했다.“너무 고민할 필요 없어. 나도... 널 선택하지 않았으니까.”성유리가 말을 이었다.“지금 성리 그룹이 어떤 상황인지 정우 씨도 잘 알잖아. 이런 상황에 난 회사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가는 수밖에 없어.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제 걱정할 필요 없겠네. 우리... 서로 미안해할 일은 없겠다. 결혼식은... 취소하자.”말을 마친 그녀는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던 연정우의 손을 떼어냈다. 그러고는 박한빈의 손을 다시 쥐더니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 나갔다.술집은 여전히 떠들썩했다.시끄러운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똑같은 유니폼을 입은 화려한 여자들과 환히 웃는 남자들 덕에 공기 중에는 유흥의 분위기가 가득 찼다.이곳에 바로 금성이었다.겉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사실은 차갑기 그지없는 도시였다.이곳에서 매일 누군가는 뭔가를 잃고, 누군가는 상처를 받겠지만 그 아무도 타인의 고통에 관심이 없다.시내 중심가, 그것도 가장 번화하기로 소문난 곳에서도 투자 버블로 인해 투신한 사람이 있었다.그 흩뿌려진 피와 사라진 생명은 사회 뉴스에 짧은 보도 한 줄로 남아 있었다.성유리 역시 그들 중 하나였을 뿐이다.작고 무력하기 짝이 없는 그런 존재.그러니 성유리는 자신이 그 어떤 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바쳐 스스로 높은 자리까지 올라왔다고 생각했지만 박한빈의 손짓 한 번에 짓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