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제250화

작가: 송진
“박 대표가 복수할까 봐 두렵지 않아?”

전화기에서 연정우의 어쩔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수 없어.”

성유리의 대답은 단호했다.

“지난번 네가 왜 병원에 갔는지 잊지 마.”

연정훈이 귀띔했다.

성유리는 잊지 않았지만 왠지 확신이 있었다.

박한빈처럼 교만한 사람이 오늘 밤의 일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을 것이며 아마 앞으로... 다시는 그녀를 만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실은 약속해도 돼. 부모님은 내가 설명할게.”

연정우가 말했다.

“됐어. 실은 너도 내가 만든 핑계일 뿐이야. 난 아예 대답할 생각이 없었어.”

성유리가 대답했다.

“왜? 혹시... 아직도 그 사람에게 감정이 있어?”

“고통을 자양분으로 삼는 감정을 말하는 거야? 너도 한 사람을 좋아해 봤고 상처도 받아봤으니 사람마다 상처를 받는 차수에는... 한계가 있어. 난 이미 그를 믿을 수 없어.”

자신에 관한 이야기 때문인지 연정우의 목소리는 조용해졌다. 한참 후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만약 박 대표가 동의한다면 어쩔래?”

“장난해? 그 사람은 박한빈이야. 피라미드 최정상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놀잇감으로 되어 모욕받고 짓밟힐 수 있겠어?”

“너 일부러 그랬어?”

“응. 일부러 그랬어.”

성유리는 아주 시원스럽게 인정했다.

그녀는 자신이 다른 말로 거절하면 박한빈이 절대 단념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성유리는 이런 밀당에 지쳤는데 이렇게 처리해야만 깔끔하게 이 관계를 정돈할 수 있었다.

연정우와 전화를 마친 후 성유리는 술잔에 담긴 술을 다 마셨고 그녀의 머리카락도 거의 다 말랐다. 불을 끄고 침실로 돌아가서 자려고 할 때 갑자기 초인종 소리가 다시 울렸다.

성유리는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누구세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그녀는 문 앞의 CCTV를 열었다.

박한빈은 검은색 외투를 벗고 흰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옷은 헐렁하고 머리카락도 눈에 띄게 헝클어져 있었다.

성유리가 문을 열지 않자 그는 안달이 났는지 손으로 문을 두드렸다.

성유리는 CCTV를 끄고 문을 열었다.
잠긴 챕터
GoodNovel에서 계속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여 앱을 다운로드하세요

관련 챕터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251화

    성유리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생각뿐이었다. 이런 조건은 정상적인 사로를 가진 사람이라면 다 동의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게다가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박한빈이었다. 어릴 때부터 사람들한테 떠받들리며 성장했고 커서도 세상을 지배할 수도 있는 능력을 갖춘 박한빈이지 않은가? 너무 놀란 탓에 성유리는 갑자기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한참 뒤, 성유리는 정신을 다잡고 박한빈에게 물었다. “박한빈 씨, 지금 본인이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아세요?” “알아.” “술 취하셨어요.” 성유리는 재빨리 반응하고는 박한빈을 한쪽으로 밀어냈다. “안 취했어.” 박한빈의 대답에 성유리는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물었다. “하지만 몸에서 술 냄새가 너무 나는데요?” “안 취했다니까! 나 지금 정신도 말짱해.” 박한빈은 대답하는 동시에 성유리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며 중얼거렸다. “지금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그럼 제가 왜 이러는지, 목적이 뭔지는 아세요?” 성유리가 박한빈에게 묻자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박한빈 씨를 제 곁에서 밀어내려고 이러는 거죠. 이렇게 만나서 대화를 나눈다고 해도 저는 절대로 다시 박한빈 씨를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 심지어는 당신의 이런 감정을 이용해 쓸 만한 가치를 다 뽑아낸 다음 차버릴 거고. 이런데도 동의하시는가요?” 성유리가 냉정한 말투로 말을 해나가자 박한빈은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난 좋아.” 깔끔하고 짧은 박한빈의 대답은 마치 한 뭉치의 솜이 되어 성유리의 가슴을 틀어막는 것 같았다. ‘이건 내가 예상한 대답이 아닌데?’ 방금 전, 성유리와 연정우가 말한 것처럼 성유리는 꿈에서도 박한빈이 동의를 할 줄을 몰랐다. 심지어 성유리 본인마저 자기가 하는 말이 어처구니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박한빈은 주저하지도 않고 바로 동의했다. “술은 얼마나 마신 거예요?”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며 진정을 한 성유리가 박한빈에게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252화

    박한빈은 오늘 확실히 술을 평소보다 더 많이 마셨었다. 성유리 쪽에서 나온 다음 바로 다른 술집으로 향한 박한빈은 구체적으로 자신이 얼마나 마셨는지 기억조차 못 했다. 하지만 배지수가 박한빈의 눈앞에 나타났을 때, 그는 누구보다 더 정신이 말짱했다. 박한빈은 서훈에게 전화를 걸어 박한빈과 배지수의 일을 잘 처리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지화그룹의 일은 이제 거의 끝을 향해 달리고 있으니 배지수라는 “방패”는 필요하지 않아졌다. 그리고 또 하나, 배지수의 두 눈과 마주쳤을 때 박한빈은 점점 머릿속에 정확한 답안이 떠올랐다. 배지수는 성유리가 절대로 될 수도 없고 그녀를 대체할 수도 없다는 것이 바로 그 답안이다. 그래서 박한빈은 다시 돌아오기를 선택했다. 성유리는 박한빈에게 미쳤다고 말을 했지만 사실 그 또한 자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미치지 않았다면 어떻게 성유리가 제시한 조건들을 망설임도 없이 동의하겠는가? 성유리가 자신을 망치려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박한빈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성유리가 이런 방식으로 자신을 밀어내려 하는 것은 아닌지, 왜 이렇게 매정하게 대하는지 말이다. 아마 성유리가 아직 자신에게 감정이 남아있어 더는 흔들리지 않기 위해 냉정한 태도를 유지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한빈은 그런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들 때마다 이런 자신이 너무 초라해 보이고 웃겼다.  하지만 박한빈은 정신을 다잡아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의 몸 안에서 또 다른 박한빈이 나타나 그러면 안 된다고 목이 터져라 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외침에 박한빈의 또 다른 목소리는 알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대답하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박한빈은 서서히 감았던 눈을 떴다. 방안에 에어컨은 낮은 온도로 틀어져 있어 박한빈은 추워서 몸이 덜덜 떨렸다. 그러나 이내 박한빈은 왜 이렇게 춥다고 느껴지는지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침대에 나 혼자 누워있네?’ 박한빈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맨발로 걸어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253화

    그렇지만 않았어도 성유리는 자신을 바꾸려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바뀐 성유리지만 생각했던 만큼 기쁘지도 않았다. 성유리는 기쁘지 않은 원인이 아직 자신의 노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아마 어느 날, 더 이상 올라갈 데가 없을 정도의 위치에 올라간다면 행복할 수 있겠다는 착각도 했다. 성유리는 스스로 확신하지 못했고 주위 어떤 누구도 그녀에게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성유리는 끝이 없이 앞으로 걸어 나가야만 했다. “담배 끊으라고.” 박한빈은 성유리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지 똑같은 말만 반복했다. 성유리는 그런 박한빈의 말에 어이가 없어 웃으며 물었다. “그러는 박한빈 씨는 왜 담배를 안 끊는 건데요?” “좋아. 그럼 나도 너랑 같이 끊을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는 박한빈을 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쳐다보았다. 박한빈은 내뱉은 말을 빠르게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인지라 성유리의 담배 한 갑과 라이터를 바로 쓰레기통에 던졌다. 그리고 어제 벗어놓은 자신의 옷가지 쪽으로 향하더니 주머니 속에서 담배를 꺼내더니 깔끔하게 버렸다. 하지만 손에 들린 라이터는 버리지 않았고 박한빈은 성유리를 바라보며 그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이 라이터는 안 버릴래. 네가 선물로 준거니까.” 성유리는 당연히 아직 그 라이터를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라이터를 봐도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고 정신병자를 보는듯한 눈빛으로 박한빈을 쳐다보고는 방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박한빈은 성유리의 뒤를 조용히 따라갔고 그녀가 화장실로 향할 때도 여전히 뒤에 서 있었다. 성유리는 그런 박한빈을 더는 참아주지 못하겠는지 결국 먼저 말했다. “진짜 머리에 총 맞았어요? 왜 이래요? 저 지금 화장실 갈 거라고요.” “괜찮아. 네 몸 어느 한 부분도 내가 키스하지 않은 데가 없잖아.” 그의 말에 성유리는 옆에 놓인 수건을 들어 박한빈에게 뿌렸다. 박한빈은 재빨리 성유리가 던진 수건을 낚아챘고 그 기회를 틈타 성유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254화

    박한빈의 무슨 대답을 했는지 성유리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마지막에 결국 박한빈이 자신의 욕망을 참지 못해 두 사람은 위치를 바꾸었고 아침에 있던 회의는 정말로 참석하지 못했다. 성유리가 회사에 도착했을 때, 정민재가 다가와 회의가 늦춰졌다고 알려줬다. 그녀는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당황하지 않았고 정민재는 이내 다른 업무의 일정을 말해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민재의 두 눈은 끝없이 성유리를 아래위로 훑어보고 있었고 그녀는 그의 시선에 불쾌해져 미간을 찌푸렸다. 성유리가 화를 내려는 순간, 정민재는 성유리의 귀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컨실러 하나 준비해 드릴까요?” 정민재의 말에 성유리는 깜짝 놀랐고 빠르게 자신의 모습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이내 옷깃에 남은 누군가의 흔적을 발견하고는 손으로 가린 후,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보내려고 하였다. [정말 개가 되시려고 이러시는 거예요?] 성유리는 입력한 문자를 보내려고 했지만 망설이다 결국 지워버렸고 무표정한 얼굴로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는 옷깃을 정리했다. 정민재는 어디론가 빠르게 향하더니 컨실러 하나를 사와 성유리에게 건네며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여자 친구한테 물어봤더니 이게 제일 효과가 좋다고 하더라고요.” 성유리는 신경 쓰지 않는척 하며 정민재가 건네는 컨실러를 건네받았다. “저 방금 되게 흥미로운 소식 하나 접해 들었습니다.” 정민재가 반짝이는 눈으로 성유리를 쳐다보며 다시 말했다. “뭔데요?” “배지수 씨가 박 대표님이랑 헤어졌다고 선언했더라고요? 지금 인터넷에 난리가 났습니다.” “그래요?” 성유리는 전혀 놀라지 않았기에 평온한 표정으로 대답했지만 정민재는 순간 입을 꾹 닫아버렸다. 한참을 가만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정민재를 발견한 성유리는 손에 있던 문서를 그에게 휙 던지며 말했다. “하실 말씀 있으시면 말하세요. 그렇게 자꾸 쳐다만 보고 있으면 잘라 버릴 거예요.” “쯧쯧. 이제 좀 급해 나시는 모양입니다?” 정민재는 씩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255화

    “할 일이 없으신가요? 아니면 너무 적나?” 성유리가 굳은 표정으로 정민재에게 물었다. 그러자 정민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물건을 챙기고는 밖으로 나갔다. 성유리는 그런 정민재에게 시선 한번 주지도 않은 채 컴퓨터 앞에 마주 앉았지만 업무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성유리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고 사무실 입구까지 걸어갔다. 걸어가는 도중 점차 복잡했던 머릿속이 정리되었고 침착해져 성유리는 다시 의자로 돌아가 업무를 계속 보기 시작했다. 해가 어둑어둑한 저녁, 박한빈은 성유리에게 함께 밥을 먹겠냐고 묻는 문자를 보내왔다. 성유리가 답장이 없자 박한빈은 두 통의 문자를 더 보내다가 마지막엔 바로 전화를 걸었다. “저는 아직 일이 있어서요.” 성유리가 대답했다. “무슨 일? 야근이야? 그래도 밥은 먹...” “저는 정우랑 밥 약속이 있어요.” 성유리는 박한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먼저 입을 뗐다. 수화기 너머 박한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성유리는 하루 종일 답답하던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성유리는 박한빈에게 다른 말은 하지도 않고 바로 통화를 끝냈다. 사실 성유리는 오늘 정말 연정우와의 약속이 있었던 터라 일부로 박한빈을 골탕 먹이려는 속셈은 아니었다. 어젯밤 통화를 한 두 사람이지만 나중에 발생한 일들은 연정우는 아직 모르는 것 같았다. 그래도 같이 “일”을 하는 사이기에 성유리는 자신의 지금 상황을 연정우에게 말해줬다. “그래서?” 연정우는 피식 웃으며 계속 물었다. “이제 우리 둘의 관계를 끝내겠다는 말이야?” “끝내고 싶어?” 성유리가 되물었다. 연정우는 예상치 못한 그녀의 물음에 잠시 당황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난 아직 그 사람이랑 공식적인 사이가 아니야. 공식적으로 공개할 생각도 없고. 그래서 우리 사이에 있는 계약은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을 거야.” 성유리의 말을 들은 연정우는 한참 동안 침묵했다. 연정우가 화가 났다고 확신한 성유리는 자신이 규칙을 위반했기에 마땅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256화

    성유리가 드림 타운에 도착했을 때에도 집안은 어두컴컴했다. 그녀는 당연하게도 박한빈이 이미 떠나갔다고 생각했지만 스위치를 켜려는 순간, 박한빈의 목소리가 들렸다. “왔어?” 깜짝 놀란 성유리가 펄쩍 뛰며 스위치를 눌렀다. 그러자 거실은 빠르게 환해졌고 성유리는 소파에 앉아 자신을 그윽하게 바라보고 있는 박한빈을 발견했다. “오늘 밤엔 어디 갔었어? 재밌었나?” 성유리는 박한빈의 말에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되물었다. “왜 아직도 안 가셨어요?” “난 내 짐까지 다 갖고 왔는데 나더러 어디로 가라는 말이지?” 박한빈의 대답에 성유리는 그제야 그의 앞에 놓인 커다란 두 개의 캐리어를 발견했다. “누... 누가 당신한테 오라고 했는데요?” 성유리의 물음에 박한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성유리는 짧은 순간이지만 박한빈이 조금 안쓰러워 보였다.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드는 것도 잠시, 성유리는 정신을 다잡았다. ‘진짜 미쳤나 봐. 왜 박한빈 씨가 불쌍해 보이지?’ 성유리는 박한빈과 더 상대하기 싫어 손님이 묵는 방을 손으로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짐은 다 저 안에 놓으세요.” 말을 마친 그녀는 자기 방으로 향하려고 발걸음을 옮겼고 박한빈은 조용히 성유리의 뒤를 따랐다. “뭐 하시려고요?” 성유리는 발걸음을 멈추며 뒤돌아 박한빈을 잔뜩 경계하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위 아플 때 먹는 약 있어?” 박한빈이 자신의 위를 손으로 어루만지며 계속 말했다. “저녁을 안 먹었더니 지금 위가 좀 아프네.” 성유리는 잠시 멈칫하다가 대답했다. “배달시키세요, 요즘은 약도 배달해 주니까.” “난 할 줄 모르는데.” “그럼 비서님한테 사다 달라고 하시던가요.” 단호한 말투로 말을 하던 성유리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굳게 닫아버렸다. 박한빈은 앞에 있는 성유리의 방문을 묵묵히 쳐다보다 갑자기 빠르게 변해버린 사람들의 생활방식이 싫어졌다. 예를 들어 지금 같은 상황에 박한빈은 급하지 않았으니 사실 약을 배달로 시킬 필요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257화

    욕실 밖으로 쫓겨난 박한빈의 손에는 여전히 성유리가 던진 수건이 들려 있었다. 수건에서 나는 은은한 향기와 성유리의 화난 모습이 떠오른 박한빈은 웃음이 새어 나왔고 밖으로 발길을 돌렸다. 박한빈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성유리는 더 씻을 마음도 없어져 대충 물로 헹구고 난 뒤. 욕실 가운을 입고 나왔다. 성유리는 박한빈이 아직도 방에 있는 것을 발견했고 그의 발 옆에 놓인 두 개의 캐리어에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안색은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뭐라 화를 내기도 전, 박한빈이 먼저 말을 꺼냈다.“저 방에 다른 물건들이 많아서 짐을 놓을 데가 없어.” 성유리는 순간 연정우가 이 집에서 짐을 뺄 때, 놓고 간 물건들이 떠올라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그 방으로 향해 연정우의 짐을 가지고 자기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박한빈은 성유리의 앞을 가로막아 서며 다시 말했다. “그 물건들 다 어디 갖다 놓으려고?” “당연히 제 방이죠. 쓸데없이 이런 건 왜 묻죠?” “안 돼.” 박한빈은 망설이지도 않고 안 된다며 딱 잘라 대답했다. “아니면 내 짐이랑 네 짐을 같이 놓을까?” 박한빈의 물음에 성유리는 코웃음을 치며 입을 열었다. “지금 무슨 생각하시는 거예요? 잊지 마세요. 지금 연정우 씨야말로 제 남자 친구고 제 애인이에요.” 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은 입을 꾹 닫았다. 그녀는 박한빈이 자신의 말에 전처럼 노발대발 화를 내며 날뛰겠다고 예상했다. 필경 지금까지 박한빈은 성유리에게 미친개 같은 모습도 보여줬었기 때문이다. 성유리의 기억 속, 박한빈은 늘 잔인하고 악랄하고 정신 나간 사람이었다. 그러나 성유리의 예상과는 달리 박한빈은 조용히 성유리를 쳐다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하긴.”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캐리어를 들고 손님방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성유리는 덤덤한 박한빈의 모습에 당황했다. 이내 앞으로 걸어가던 박한빈이 발걸음을 멈추더니 고개를 돌려 성유리에게 물었다. “여기 주소는 어떻게 써야 돼? 약 사야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258화

    커다란 냄비에 담긴 면들은 양이 많을 뿐만 아니라 맛도 너무 없었다. 성유리는 지금까지 살면서 이 정도로 맛없는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어 무척이나 당황했다. 결국 성유리는 몸을 일으켜 직접 박한빈에게 다시 면을 끓여주기를 선택했다. 박한빈은 성유리가 다시 요리를 하는 와중에도 계속 그녀의 곁에 서 있었다. 성유리가 입을 열어 박한빈에게 나가서 기다리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박한빈은 마치 성유리의 생각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듯 먼저 말을 꺼냈다. “옆에서 좀 봐두려고. 어떻게 만드는지는 알아야지.” “박 대표님, 이런 일은 대표님 신분에 어울리지 않아요.” 성유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대표님께서 원하신다면 이런 음식을 해줄 여자는 널리고 널렸잖아요.” “나도 알아.” 박한빈은 성유리를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성유리는 아무 말도 없이 다시 끓인 면을 식탁 위에 내려놓고는 뒤돌아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오늘 밤에 연정우 씨랑 말은 했어?” 박한빈이 뒤돌아있는 성유리에게 물었다. “우리 둘 사이 말이야.” “네.” “된대?” “네.” 성유리의 박한빈이 귀찮은 듯 대충 대답을 해줬고 그는 더 이상 뭐라고 말을 걸지 몰랐다. 그녀는 이내 자기 방으로 돌아가 문을 닫았고 박한빈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지만 몸을 돌려 식탁 위에 있는 면을 본 순간, 또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박한빈은 성유리가 아직 자기에게 앙금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필경 전에 박한빈이 늘 성유리에게 상처를 주고 아프게 만들었으니까. 성유리가 박한빈에게 서운해하고 화를 내는 이유 또한 그녀가 박한빈을 신경 쓰고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박한빈은 성유리가 자신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것보다 그녀가 화를 내며 자신을 원망하는 것이 더 나았다. 지금 두 사람이 놓인 처지는 그냥 잠시일 뿐이라고 생각한 박한빈은 사냥감을 손에 넣으려면 천천히 다가가야 한다고 자신을 세뇌했다. 이 넓은 “초원”에서 “사냥감”에게 함부로 다가갔다가는 큰

최신 챕터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675화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홍지은은 늘 같은 대답을 반복했다.“성유리는 이런 자리를 좋아하지 않아요. 제가 여러 번 말해봤지만 걔는 원래 이런 곳에 나오길 싫어해서요.”오늘도 그녀는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괜찮아요. 그래도 한번 얼굴을 비추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요? 마침 경매회도 곧 시작하는데 저도 박 대표 부인의 취향이 궁금하네요.”“그러게 말이에요. 어차피 나는 경쟁 상대가 될 수도 없으니까 미리 유리 씨가 뭘 원하는지 알아두고 포기하는 게 낫겠어요.”홍지은도 사람들을 따라 웃으며 말했다.“유리는 오지 않을 거예요. 전에도 물어봤는데 딱히 관심 가는 물건이 없다고 했거든요.”그녀는 태연하게 말을 이어 나가려 했다. 그러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곧 현실은 완전히 뒤집혔다.왜냐하면 그날 경매장에 성유리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올해 금성에서 열리는 첫 대형 경매 행사였다.특히 경매 목록에 포함된 한 세트의 보석이 큰 주목을 받으면서 도시 내에서 일정한 신분을 가진 인사들은 전부 참석했다.사실 성유리는 처음에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그런데 전날 밤, 박한빈과 게임 내기를 했다가 패배하는 바람에 박한빈의 요구 조건을 들어주기로 했다.그 조건이 바로 경매장에 함께 가달라는 것이었다.다만, 박한빈도 굳이 오래 있을 생각은 없다고 했다.“그냥 얼굴만 비추고 가면 돼. 너 피곤해지면 바로 나가자.”그 말을 듣고 나서야 성유리는 마지못해 동행을 허락했다.성유리가 입장하는 순간, 그녀의 시선은 홍지은에게로 향했다.그녀는 칵테일 잔을 들고 주변 사람들과 해맑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비록 남편은 별다른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이런 자리에서만큼은 홍지은에게 자유를 허용했다.어차피 그의 사업 자원 중 상당수가 홍지은의 인맥과 네트워크 덕분에 얻어진 것이었으니까.오늘 그녀는 임신 중임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생기가 넘쳤다.완벽한 메이크업 덕분인지 얼굴에도 빛이 나는 것 같았고 평소보다 더 예뻐 보였다.그런데 이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674화

    사실 박한빈은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었다.떠올릴 수 있는 것이라곤 끝없는 공부와 훈련뿐이었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해야 할 것이 많았다.학교 성적은 언제나 최고여야 했고 악기나 골프, 승마를 포함한 다양한 외국어까지 익혀야 했다.어릴 때부터, 사람들은 박한빈의 신분을 부러워했다.박 씨라는 성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영광을 의미했다.하지만 그 영광과 함께 짊어져야 할 무게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만약 지금 그때로 돌아가 다시 선택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떤 삶이 더 나은 것인지조차 그는 확신할 수 없었다.그러나 분명한 것은 박한빈이 평범한 아이로서의 행복을 잃었다는 사실이다.잃을 게 많은 만큼 박한빈은 손에 넣은 것도 많았다.그리고 그는 자신이 짊어졌던 짐을 하늘이에게 만큼은 넘기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그래서 얼마 전, 김서영이 하늘이에게 특별 교육을 시키자고 했을 때 박한빈은 단칼에 거절했다.“박한빈, 네 딸은 분명 앞으로 금성에서 주목받는 존재가 될 거야. 이런 기본적인 것들을 익히지 못하면 그 신분이 아깝지 않겠니?”김서영은 박한빈을 설득하려 했지만 박한빈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뭐가 어떻게 됐든 하늘이는 박한빈의 핏줄이자 친딸이다. 설령 앞으로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더라도 말이다.감히 누가 박한빈의 딸을 무시하고 얕잡아볼 수 있겠는가?그래서 김서영이 뭐라고 하든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그 이야기를 마친 후, 박한빈의 품 안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성유리는 입을 꾹 닫아버렸다.박한빈이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니 그녀는 살짝 찌푸린 미간과 다물린 입술로 조용히 생각에 잠겨있었다.그 모습을 본 박한빈은 순간 자신이 뭔가 실수한 것인가 싶어 물었다.“왜 그래?”“아무것도 아니에요.”성유리는 빠르게 화제를 돌리며 박한빈에게 물었다.“그런데 이거 왜 아직도 안 멈추죠?”“곧 멈출 거야.”박한빈은 짧게 대답하다 문득 깨달았다.“설마... 지금 나를 가슴 아파하는 거야?“아니거든요?”성유리는 전혀 망설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673화

    박한빈은 천천히 웃음을 거두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직접 물을 따라왔다.성유리는 그가 자신이 마실 물을 준비하는 줄 알았다.그런데 박한빈이 몸을 휙 돌리곤 성유리에게 컵을 내밀었다.“방금 건 그냥 장난이었어. 재미없었지?”그의 말에 성유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물컵을 받아 들었다.그것만으로도 이미 박한빈에게는 충분한 대답이었다.“푹 쉬어.”박한빈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성유리에게 말했다.성유리는 물 한 모금을 마신 뒤, 컵을 옆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잠깐 나갔다 올게요.”그녀가 문 쪽으로 향하려 하자 박한빈이 손목을 붙잡았다.“어디 가려고?”“정원이요. 햇볕 좀 쬐려고.”“나도 같이 가.”“아까 그렇게 아프다면서 괜찮으세요?”성유리는 박한빈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그 눈빛에는 박한빈을 향한 의심이 가득했다.그러나 박한빈은 개의치 않고 태연하게 말했다.“나도 햇볕 좀 쬐고 싶어. 그리고 의사가 말했잖아? 내 면역력 좋다고.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니래.”‘심각하지 않다?’‘그러면 아까까지는 왜 그렇게 책임지라고 난리였는데?’그 말이 목구멍까지 나오려 했지만 결국 성유리는 하려던 말을 꾹 삼켰다.그녀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박한빈은 마치 그것을 허락이라도 받은 것처럼 성유리의 손을 끌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방에서 본 그대로 오늘 날씨는 유난히 화창했다.햇살 아래, 정원의 회전목마가 선명한 색채를 띠고 있었다.박한빈이 특별히 주문 제작해 놓은 것이라 그런지 원색의 유채가 한층 더 생생해 보였다.그 장면을 바라보던 성유리는 왠지 모르게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듯했다.그런데, 박한빈은 줄곧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그가 보내는 그윽한 시선을 느꼈지만 성유리는 한참을 모른 척했다.박한빈이 먼저 말을 걸기 전까지는.“한번 타볼래?”“뭐를요?”“회전목마.”성유리는 그의 말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제가 어린애도 아니고.”“그럼 어릴 때는 타봤어?”그 질문에 성유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잠시 침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672화

    “그럼 자. 난 네가 잠들면 나갈게.”박한빈의 말을 성유리가 철석같이 믿을 리가 없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는 그와 다투는 것도 귀찮았다.그래서 그냥 이불을 끌어당겨 몸을 푹 덮고 등을 돌리고는 박한빈에게서 멀어졌다.사실 처음에는 전혀 졸리지 않았지만 조금 전 박한빈과 한바탕 실랑이를 벌인 탓인지 피곤함이 몰려왔다.머릿속에 들던 생각도 점점 흐려지고 그렇게 결국 잠에 빠져들었다.아니나 다를까, 박한빈의 말을 거짓말이었다.다음 날 아침, 성유리가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바로 옆에 누워 있는 박한빈이었다.그는 한쪽 팔로 그녀를 꼭 끌어안은 채 잠에 들어있었는데 성유리는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당장 박한빈을 밀어내려 했지만 갑자기 그가 몸을 돌려 두어 번 기침을 했다.그리곤 반쯤 감긴 눈으로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나... 너한테서 감기가 옮은 것 같아.”성유리는 그 말에 그대로 멈춰버렸다.하지만 박한빈은 성유리의 손을 잡아 자기 이마에 갖다 댔다.“한번 만져봐. 나 열 나는 거 같지 않아?”성유리는 일단 체온계를 가져와 박한빈의 체온을 재봤다.그러나 체온계에 표시된 건 아주 멀쩡한 수치였다.그 말인즉 박한빈은 열이 안 나고 있다는 것이었고 감기에 걸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그런데도 박한빈은 여전히 몸이 아프다며 자신이 감기에 걸렸으니 여기서 병을 치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이전의 고고하고 차가운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지금은 마치 억지를 부리는 아이 같았다.결국 성유리는 의사를 불러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뿐만 아니라 아예 다른 방으로 옮겨서 지내기로 결심했다.하지만 박한빈은 그녀의 속내를 간파한 듯, 서둘러 앞을 막아섰다.“뭐 하려는 거야?”“방을 옮길 거예요.”성유리는 담담하게 대답을 이어갔다.“의사 선생님께서 교차 감염을 조심해야 한다고 했어요.”“그럼 난 어떡하라고?”“저택에 도우미분들도 많고 의사 선생님도 있잖아요. 박한빈 씨를 돌볼 사람 충분하죠.”“난 다른 사람이 내 몸에 손대는 거 싫어.”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671화

    “걱정 마, 엄마 괜찮으니까.”하늘이는 문가에 서서 성유리를 바라보았다.한참을 그러던 아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다시 감기 옮으면 어떡해?”그 말에 성유리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괜찮아, 엄마 마스크 쓰고 있잖아.”그래도 하늘이는 여전히 망설이는 눈치였다.망설이던 아이는 결국 괜찮다는 성유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성유리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시간이 많이 늦었으니까 이제 가서 자. 혼자 잘 수 있겠어?”“응!”하늘이는 성유리의 말에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나 이제 다 컸어.”“그래, 그럼 가서 쉬어.”하늘이는 여전히 아쉬운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섰다.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성유리는 입가에 띠고 있던 미소를 점차 거뒀다.하늘이가 방으로 돌아가 문을 닫은 걸 확인한 뒤에야 성유리도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낮 동안 너무 오래 잠들었던 탓인지 꽤 늦은 시간이었지만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침대에 누운 채 한동안 창밖을 바라보다가 결국 다시 눈을 감고 억지로 잠을 청하려 했다.그런데 그때, 밖에서 들려오는 아주 익숙한 발소리.그걸 듣는 순간 성유리는 순식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그러나 성유리는 눈을 뜨지 않고 그대로 가만히 누워 있었다.곧 남자가 천천히 다가와 침대 곁에 서더니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그제야 성유리는 몸을 뒤로 빼며 경계하듯 눈을 떴다.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에 박한빈은 순간 멈칫했다. 그러나 이내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열은 안 나는지 보려고 했어.”“전 괜찮아요.”성유리는 박한빈이 행여 다른 말을 할까 두려워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박한빈 씨는 서재에서 주무셔아 하는 거 아니었어요?”“잠이 안 와.”“그러면 그냥 조용히 나가주세요. 제 잠까지 방해하지 말고.”성유리는 단호하게 말했지만 박한빈은 미동도 없었다.한동안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그의 모습에 성유리는 점점 짜증이 밀려왔고 손을 뻗어 그를 밀어내려 했다.“빨리 나가시라고요.”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670화

    약을 다 먹은 후 잠에 든 성유리는 그날 오후까지 자버렸다.그 덕에 휴대폰에 쌓인 메시지들을 저녁이 되어서야 확인할 수 있었다.메시지에는 여러 가지 내용이 담겨 있었다.어떤 사람들은 홍지은이 올린 사진 속 사람이 성유리가 맞냐고 물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녀가 금성에 돌아온 것을 확인하며 언제 한번 만나 밥을 먹자고 했다.하지만 사실, 성유리가 금성에 돌아온 걸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터였다.지난번 사하나의 장례식 때도 이미 업계 사람들 대부분이 참석했었으니까.다만, 그때 성유리는 사씨 가문 사람들에게 쫓겨난 신세였다.심지어 그 자리에서 불길한 존재라는 말까지 들어야 했다.그랬던 사람들이 이제 와서 이렇게 태도를 180도 바꾸는 건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기회주의적으로 상황에 따라 태도를 바꾸고 손익을 따져 움직이는 건 인간의 본능 같은 것이니까 말이다.게다가 메시지를 보낸 이들의 이름조차 성유리는 대부분 기억나지 않았다.그들이 무슨 말을 하든, 어떻게 생각하든 이젠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예전의 성유리였다면 아무리 그들이 싫어도 박한빈의 아내라는 신분 때문에 억지로라도 상대해 줬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더 이상 그런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들이 어떻게 나오든 이젠 상관없었다.그래서 성유리는 메시지를 한 번 훑어본 뒤, 아무런 답장도 하지 않고 휴대폰을 옆에 툭 던져버렸다.그때, 하늘이가 성유리를 찾으러 방에 들어왔다.아직 감기가 완전히 낫지 않은 터라 혹시라도 다시 옮길까 봐 그녀와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문가에 서 있었다.“엄마, 괜찮아?”하늘이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성유리를 바라보며 물었다.“많이 아파?”성유리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괜찮아. 너는 어때?”“나도 괜찮아! 의사 아저씨가 말했어. 내일이면 완전히 나을 거래! 봐, 나 오늘도 이렇게 멀쩡해!”말을 마친 하늘이는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두 번이나 뛰어 보였다.그 모습을 보던 성유리는 더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이리 와.”“그건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669화

    “하늘이가 아팠을 때도...”말을 꺼내던 박한빈 스스로 말을 뚝 멈췄다.박한빈은 알고 있었다. 이미 그 일로 인해 성유리에게 영원히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지금 이 순간, 두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것 자체가 기적 같은 일이었다.가끔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날 때면 그는 성유리를 꼭 끌어안아야만 했다.그래야만 그녀가 정말로 곁에 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지나간 과거에 대해서는 서로 오랫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그런데 오늘, 박한빈이 먼저 그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하지만 성유리는 그때 일을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박한빈이 말을 꺼내자마자 그녀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고 그에게 잡힌 손을 빼려고 애를 쓰는 게 보였다.그러나 박한빈은 마치 성유리가 어떻게 나올지 알고 있었다는 듯 그녀의 손을 더욱 꼭 쥐었다.“그때 내가 잘못한 거 알아.”박한빈은 한층 더 낮아진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그땐 그냥... 너무 화가 났고 받아들이기 싫었어.”“네가 내게 한 번만 져주길 바랐어. 처음 호텔에서도... 난 네가 내게 순순히 져주길 바랐다고.”“그때 네가 내 앞에서 돌연히 동의서에 서명하라고 했을 때 난 마치... 팔려 가는 기분이었어.”“그래서 일부러 버텼던 거야. 그냥 네가 나한테 한 발자국만 양보해 주길 바랐을 뿐이었어.”박한빈은 고개를 푹 숙이며 계속 말했다.“그때 난 정말 형편없었어. 아무리 그래도 하늘이의 목숨을 가지고 그런 식으로 도박을 하듯 행동해서는 안 됐어.”잠시 숨을 고르던 그는 다시 고개를 들어 성유리를 바라봤다.“하지만 유리야, 이거 하나만 믿어 줘. 나도 우리 아이를 사랑해. 내가 너를 이렇게 사랑하는데 어떻게 네 아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그의 진심 어린 말에도 성유리는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사실 성유리도 알고 있었다.지금 자신이 내린 선택과 현재의 태도가 과거의 신념과는 어긋난다는 것을.늘 스스로를 다독이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이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고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668화

    홍지은이 올린 사진에는 성유리의 얼굴이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 있었다.하지만 두 사람이 앉아 있는 뒤로 경매장에서 산 조명이 너무 잘 보였다. 업계 사람들은 익명의 구매자가 알려지진 않았지만 사실 다들 눈치 차리고 쉬쉬하고 있을 뿐이었다.거기에 더해 성유리는 전에 이런 활동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많은 사람들은 성유리의 옛날 사진과 홍지은이 올린 사진을 몇 번이나 확인하곤 그 사람이 정말 성유리가 맞다는 것을 확신했다.그렇게 성유리와 박한빈의 사이는 순식간에 퍼졌지만 몸이 불편했던 그녀는 바깥세상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고 있었다.원래 약간의 감기 기운이라고 생각해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점심부터 갑자기 고열에 시달렸다.도우미가 다시 박한빈에게 연락했을 때, 그는 의사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의사는 빠르게 성유리의 체온을 재보고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병원으로 향해 피검사를 해봐야 한다고 말했다.“피검사요? 상황이 그렇게 심각한가요?”박한빈은 의사의 말에 사뭇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아닙니다. 사모님의 지금 상황으론 감기 때문에 생기는 증상이 맞는 것 같은데 피검사를 하면 다른 상황을 더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저는...”“다른 상황이요?”박한빈은 의사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고 그때, 가만히 누워있던 성유리가 입을 열었다.“의사 선생님, 걱정마세요. 저 임신 안 했어요.”그녀의 말에 박한빈은 한껏 당황하며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바라보았다.하지만 성유리는 아주 차분한 말투로 의사에게 계속 말했다.“그러니까 병원 안 가도 돼요. 바로 약 처방 해주세요.”“아... 네.”의사는 잠시 주춤거리다 결정을 내린 듯 성유리에게 하려던 말을 하기 시작했다.“사모님, 어떤 상황엔 생리주기가 일정하다고 해서 임신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임신초기일 수도 있으니까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제대로 된 피임을 하지 않으셨다면...”“저 했어요.”성유리의 대답에 박한빈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계속 피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667화

    그의 말에 항상 생글생글 웃던 홍지은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이 문제는... 사실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필경 전에 성유리가 박한빈과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세상에 있는 그저 그런 평범한 사람일 뿐이었으니 말이다.그래서 홍지은은 성유리의 존재를 잊어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에게 뭐라 할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성유리는 지금 엄연히 박한빈의 안사람이자 사모님이다.처음에 이 소식을 접해 들은 홍지은은 거짓말이라고 확신했다. 두 사람이 정말 다시 만난다면 이렇게 조용할 수가 없다고 확신했다.게다가 성유리는 전에 항상 박한빈의 아내 혹은 여자 친구의 신분으로 각종 모임이나 연회에 참석했었다.그러나 최근 몇 년간 홍지은은 성유리의 모습을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다.어젯밤 직접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홍지은은 여전히 믿지 못했을 것이다. 이게 다 박한빈이 한 일이라는 사실을.지금 그의 신분과 지위로 만약 성유리와 다시 만난다는 일이 세상에 공개된다면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것이다.그리고 박한빈은 성유리가 방해받지 않기를 원했다. 다르게 말하면 그는 지금 최선을 다해 성유리를 지켜주고 있었다.이건 어떠한 감정일까?박한빈을 졸졸 따라다니던 여자들이 적지만은 않았을 텐데 그는 시종일관 성유리만 선택했다.그제야 홍지은은 성유리에 대한 박한빈의 감정을 알아차렸다.그게 아니면 왜 어젯밤부터 끈질기게 성유리와 만나겠다고 고집을 부렸겠는가.전에 홍지은이 알던 평범하기 짝이 없던 성유리라면 그녀는 자신이 사과할 가치도, 필요도 없다고 느꼈을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박한빈이 이렇게 단번에 자신의 생각을 맞출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었다.그래서 그의 말에 도무지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멍해 있다 한참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저... 전에 유리가 어디 있는지 못 찾았어요. 그래서 사과를 못했죠.”“그러십니까?”박한빈은 살짝 미소 지으며 홍지은에게 물었지만 그녀는 그 미소가 무엇보다 더 두려웠다.

앱에서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세요.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