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병의 행동에 장공주는 결심을 더욱 굳히고 그들을 불러 모았다. 그러고는 겉옷을 걸친 채로 의자에 앉아 정신을 가다듬고 말했다.“내일 오후에 다시 협상을 재개할 것이니, 조건은 협상 가능하도록 하지요. 너무 고집부릴 필요는 없습니다.”수란석은 눈을 크게 뜨며 반발했다. “협상이라? 어떻게 협상한단 말이오? 설마 그들이 국경을 물러서라고 해도 그걸 가만히 받아들이란 말이오?”장공주는 이미 결심이 선 듯 단호하게 말했다. “국경 문제는 일단 보류할 것입니다. 내일이나 모레 협정을 체결하고 즉시 귀국하는 것이 목표지요.”“그건 안 되오…” 수란석이 강하게 반발하자 장공주는 그를 냉랭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의견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내 결정이니 불만이 있어도 모두 삼가세요.”수란석은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는 소리쳤다. “이건 독단이오! 국경 문제를 보류하면 황제와 조정의 문무백관들, 그리고 백성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것이오?”장공주는 위엄 있는 눈빛으로 그를 단숨에 제압했다. “설명은 내가 하면 되지 수 상서가 할 일이 아닙니다.” 그녀는 조정을 오랜 시간 이끌어온 인물로서 항상 권위와 기세가 넘쳤다. “당장 나가서 초안을 다시 작성하고 상국에 더 많은 보상을 요구하는 대신 국경 문제는 제외하십시오. 그리고 2년 후에 이 문제로 다시 협상하는 것으로 하지요. 나는 협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습니다.”수란석은 이를 악물며 불만을 드러냈다. “나약하오, 정말 나약하오!” 그는 장공주가 서둘러 귀국하려는 이유를 알고 있었기에 속으로 향병을 원망했다. “난 동의할 수 없소. 국경 문제는 분명히 해야 하오.”장공주는 화가 나 향로를 내던지며 강하게 명령했다. “당장 나가서 다시 작성하십시오.”한편, 북명황실의 의논 자리에서는 새로운 국면이 펼쳐졌다. 단신의는 정좌에 앉았고 무소위조차도 그 옆에 앉아 있었다. 만종문의 구성원들은 세력을 등에 업고 몸을 꼿꼿이 세우며 잘난 척했다.그러자 단신의가 설명했다. “이번에 사용된
서경은 이번에 조건을 낮춰서라도 협상을 조속히 성사시키려 할 것이며, 가장 가능성 높은 방안은 국경선 문제를 양보하거나 잠정적으로 논의에서 제외하는 것이라고 다들 의견을 모았다.염구진이 말했다. "연왕의 여러 차례 계략이 모두 실패한 걸 보면 지금 그가 아주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게 분명합니다. 아마 인맥 대부분도 이제는 사온이 장악하고 있을 테니 사온이 몰락하면 연왕은 정말로 진성에서 손발이 묶인 상황이 될 것입니다."연왕부는 지금 염구진의 말처럼 정말로 속수무책인 상황이었다. 무상은 여러 번이고 회왕과 숨겨둔 다른 인맥을 이용했지만 이제 거의 모두 뿌리째 뽑힌 상태였으며 또 다시 열 명 이상의 사사를 잃고 말았다.그들은 회동관의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단신의가 회동관에 들어간 사실만으로도 이미 계획이 실패했음을 알 수 있었다. 심지어 장공주가 혼수 상태에 빠졌을 때도 구혼선충의 모충은 장공주의 몸속 유충을 제어할 수 없으니 이제 계획이 성공하기는 어려울 것임을 알게 되었다.무상은 비록 실망했지만 냉옥 장공주의 강인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구혼선충의 조종을 이겨내는 일은 매우 어려운데 무공이 뛰어나고 의지가 강한 사내조차도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오직 한 사람만이 구혼선충의 조종을 버텨낼 수 있었다. 그 사람은 비범한 신분과 남다른 강인함을 가진 인물이었다.무상은 이번 상대가 강력한 인물임을 깨닫고 본인의 패배를 순순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냉옥 장공주가 있는 한 서경은 상국과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입니다. 정원제가 즉위한 후 여러 계획을 세우며 여론을 조성했으나 결국 모두 역풍이 되어 돌아올 것입니다. 그는 원래 황위에 관심이 없었고 그의 마음속에는 선황태자가 가장 중요합니다. 가문과 나라는 그 후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여 우리와 동맹을 맺기를 원했지만 이 동맹은 그의 야망에 기반한 것이 아닌 허상에 불과합니다. 동맹이 무너진다면 우리도 연루될 가능성이 높으니 정원제에게 기대를 걸 수는 없습니
다음 날 아침이 밝자 안운여는 송석석을 찾아가 단신의를 불러달라고 부탁했다.한편 고공은 홍려사로 향했고 협상은 오후에 다시 시작될 예정이었다. 단신의는 장공주가 자기를 초대하러 올 것을 예상하고 일찍부터 기다리고 있었다. 송석석이 도착했을 때 단신의는 이미 마차를 준비했고 송석석이 입을 열기도 전에 청작에게 약상자를 준비시키며 말했다. “회동관이라 했느냐?”송석석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백부님, 다 알고 계셨습니까?”“장공주의 두통이 심하니 내가 아니면 남은 협상도 무사히 마치기 어렵다. 돌아가서 필요한 일들을 처리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단신의는 자기 의술에 대해 여전히 확신을 갖고 있었다.송석석은 그와 함께 마차에 오르며 물었다. “장공주의 두통은 어찌 생긴 겁니까? 혹시 편두통입니까?”“편두통도 일부 원인이지. 맥을 짚어보면 장공주의 편두통은 오랫동안 지속된 것으로 아주 심각하더군. 또 오랫동안 책상에 엎드려 일하다 보니 목뼈가 변형되고 혈기가 머리로 공급되지 않아 혈액이 막혀 있는 상태이다. 어젯밤 금태의의 진단이 틀린 건 아니지만 그 향이 잠깐만 막힌 혈을 통하게 했을 뿐이기에 약효가 떨어지면 다시 두통이 시작될 것이다.”“금태의가 정말 이 문제를 몰랐을까요? 수년 동안 치료했는데도 크게 나아지지 않은 이유가 뭘까요?”“침술로는 증상이 호전될 수 있다. 금태의도 공을 들였겠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거지. 게다가 장공주는 무리한 일로 상태가 이미 악화됐으니,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목숨까지 위태로울 수 있다.”단신의는 약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 “일찍이 청작에게 1년 치 약을 준비해 오게 했다. 장공주가 나를 믿는다면 충분히 회복될 수 있다.”송석석은 고개를 끄덕이곤 현재 두 나라의 상황을 떠올렸다. 장공주가 일을 제대로 처리할 수 없다면 상국에도 절대 좋은 일이 아니었다.회동관에 도착하자 단신의와 청작은 안으로 들어갔고 송석석은 밖에서 대기하고, 곧 필명이 교대를 하러 올 것이기에 단신의가 진료를 마치면
송석석은 단 백부의 말에는 뭔가 의미심장한 뜻이 담긴 듯해 잠시 당황했다. 장공주가 그녀를 바라보자 송석석은 담담한 표정으로 장공주의 눈을 마주 보며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평온하게 행동했다.단 백부에게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 있었기에 그가 이런 말을 한 것은 장공주의 속마음을 알아차렸기 때문일 것이다. 단신의가 약을 남기고 떠나려 하자 장공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예를 갖춰 인사했다.“신의님께 감사드립니다. 상국에 다시 오실 기회가 있으면 반드시 성의를 다해 보답하겠습니다.”왠지 모르게 장공주는 그의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송석석은 단신의를 부축하고 청작은 약상자를 메고 각자 갈 길을 갔다. 장공주는 자리에 앉아 금태의가 약병을 열어 검토하는 것을 바라보았으나 시선은 이미 흐려진 상태였다. ‘의사는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치유하는 사람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단신의는 그녀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었다. 여인이 큰 뜻을 품는 것을 남성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 여기지 않고 평등한 관점에서 바라본 듯했다. 그것은 장공주가 오랫동안 추구해 온 바였다.모든 남성이 그녀의 뜻을 반대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에 장공주는 깊이 감동했다. 갓 생겨난 이 생각에 대한 지지와 인정은 그녀에게는 마음을 어루만지는 약과도 같았다.송석석은 단신의를 약왕당에 직접 모셔다 드리기로 했다. 마차 안에서 단신의는 한참 침묵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서경이 변화하면 더 나아질 것이야.”송석석은 그의 숨겨진 뜻을 이해해 장공주의 길이 험난할 것임을 짐작하고 조용히 마음속으로 그녀를 응원했다. 만약 그녀가 황제가 된다면 상국과의 문제도 평화로운 협상을 통해 해결할 수 있어 전쟁도 일어나지 않기에 양국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오후가 되자 협상이 다시 시작되었다. 사전 통보를 받은 사여묵은 곧바로 홍려사로 향했고 이후 궁으로 들어가 상국에 대한 서경의 보상안을 황제로부터 허락받아 협상장으로 돌아갔다. 서경 측에서는 수란석과
이러한 결과는 두 나라 모두에게 이익이었다. 장공주는 돌아가면 많은 일을 준비해야 했기에 국경 문제에서는 절대 물러설 수 없었다. 만약 물러선다면 그녀가 하려는 일은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고 백성들의 지지도 얻지 못할 것이다.조약 서명 다음 날, 서경 사절들이 황제에게 작별 인사를 올리러 궁에 들어왔다. 숙청제는 그들에게 송별연을 베풀 생각이었으나, 장공주는 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즉시 출발 의사를 밝혔고 그도 이를 받아들였다.형부는 이미 이방을 죄수 수레에 태워 회동관으로 보냈는데, 소승이 보이지 않자 서서히 불안에 휩싸여 크게 소리쳤다. “왜 나 혼자인 것이냐! 소승은? 소승도 책임을 져야하지 않겠느냐?” 감랑중은 서둘러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수란석과 함께 인계했다.서경 사절들은 진성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이방을 보게 되었는데 그들의 눈에는 분노의 불길이 가득해 당장이라도 이방을 태워버릴 듯했다.이방은 수레 안에서 몸부림치며 전북망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회동관 밖에는 길게 늘어선 행렬과 경위대, 그리고 송석석과 사여묵도 있었으나 전북망은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소리칠 수도 몸부림칠 수도 없었고 수레 안에서 머리조차 제대로 내밀 수 없었다. 앉아도 서기도 불편한 이 죄수 수레는 마치 옛날에 그녀가 경역을 쇠창살에 가둬놓고 활로 괴롭히던 때 같았다. 그 당시는 통쾌했지만 이제는 두려움만이 가득차 버렸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송석석은 오늘 일부러 보주를 데리고 왔다. 두 여인은 죄수 수레에서 다섯 걸음 떨어진 곳에 서서 이방의 두려움과 혼란을 똑똑히 바라보았다. 보주는 이방을 국공부로 끌고 가서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이방은 이제 서경의 죄인이었기에 그녀가 직접 복수할 수는 없었다. 그녀의 눈에는 그저 이방을 향한 증오와 피 같은 눈물만이 맺혀 있었다.“아씨, 저 계집을 한 대 때려도 되겠습니까? 저는 힘이 약해서 심하게 때리지는 못할 것입니다. 냉옥 장공주께 말씀 좀 전해주실 수 있겠습니까?”송석석은 보주가 이 한 대
서경 사절들이 경성을 떠난 후, 숙청제는 소 대장군과 전북망에게도 죄를 내렸다.소 대장군은 군 기강을 엄격히 다루지 못한 책임이 있었으나 장기간 성릉관을 지키며 노고가 많았던 점과, 전북망과 이방이 녹분성으로 출정했을 당시 그가 여전히 생사를 오가는 상황이었던 점을 감안해서 성릉관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내도록 했다.또한 어명을 내려 소삼야를 성릉관 총병으로 임명하고 소팔야를 부총병으로 임명하였으며 국경선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이상 성릉관에는 소씨 가문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천명하였다.소승은 마침내 소부에서 나와 입궐하여 숙청제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그의 가족들은 모두 성릉관에 있었기에 파직을 당한 후에도 당연히 성릉관으로 돌아가야 했다. 총지휘관의 자리는 내려놓았으나 그동안의 공로는 영예를 받지 못했음에도 그는 후회가 없었다. 애초에 그가 추구한 것도 이런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전북망 역시 동일한 죄에 처할 뻔했으나 서경에서의 협상 중 중요한 제보를 한 공로를 인정받아 현철군 부사령관으로 강등되었고 3년간 녹동이 삭감하게 했으며, 오월을 정사령관으로 승진시켰다. 더불어 숙청제는 특별히 은혜를 베풀어 북명황실이 서경의 두 정탐조 모두 사적으로 처단할 수 있도록 했다.사여묵은 송석석의 의견을 묻기 위해 돌아갔다. 그녀가 직접 처리할지 아니면 형부에 맡길지를 결정하기 위해서였다.송석석은 보주를 불러 의견을 물었다. 이방은 송가를 멸문시킨 주범이었지만 그들을 잔인하게 학살한 것은 서경의 정탐조들이기 때문이었다.보주는 한 번도 사람을 죽여본 적이 없어 사여묵과 송석석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이를 악물며 말했다. “소인은 그들이 죽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습니다. 송가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말입니다.”그러자 송석석은 심장이 찔리듯 아파왔고 눈가가 뜨거워졌다. “좋다, 널 데려가겠다!”그녀도 한때는 망설였었다. 직접 그들을 죽이기도 싫었고 심지어 그들을 보는 것조차 싫었다. 그들을 보면, 미친 듯이 본가로 달려갔던 날 목격한
일행은 이상서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고 송석석은 내내 보주의 손을 놓지 않았다.그리고 곧 두 명의 서경 정탐이 끌려 나왔는데 그들의 옷은 이미 너덜너덜해지고 피가 묻어있었으며, 얼굴은 이목구비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부어 있었다. 그들은 땅에 무릎을 꿇고 있었는데 몸이 앞쪽으로 쏠려 거의 넘어져 엎어질 지경이었다.보주는 눈에 핏대를 세운 채 그런 그들을 노려보았다.그녀와 송석석은 단 하루도 진북후부의 멸문에 대한 복수를 잊은 적이 없었다.이제 대세는 정해졌고 그녀도 마침내 가족과 송 부인 등에게 복수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그녀의 가슴 속에 있던 슬픔과 분노는 산을 무너뜨릴 듯한 기세로 솟구쳐 나왔다.보주는 당장 달려가 주먹과 발길질을 퍼붓고 싶었으나 이상서 앞에서 무례하게 굴어 왕야와 아씨의 얼굴을 깎아내릴 수 없었다.이대인이 말했다. “이 두 정탐은 형부에 보내졌을 때까지도 죽음을 각오한 듯 오만한 태도였습니다. 하관이 직접 고문을 한 것은 아니지만, 일부 사람들이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뺨을 몇 대 때렸습니다. 그들의 몸에 난 상처도 이미 잡혀 올 때부터 있었습니다.”그러자 사여묵은 평 사저의 말이 떠올랐다. 그들은 역시나 심하게 맞은 후 여기에 데려온 것이다.사여묵은 가볍게 허리를 굽히고는, 몽동이에게 그들을 데리고 송가의 조상 묘지에 가라고 지시했다.바람에 흔들리는 등불이 그림자를 드리워 날은 앞길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몽동이는 그들을 마차 앞에 묶고 말을 몰았다. 그러던중 송가의 멸문이 떠올릴 때면 그들에게 채찍을 휘둘렀다.송가 조상 묘지 앞에 도착하자, 몽동이는 발로 그들을 묘지 앞으로 걷어찼다.보주도 그들 앞으로 달려가 주먹과 발길질을 퍼부었다. 둥글게 말아 쥔 손바닥이 뺨에 연달아 떨어졌으나 마음속의 분노와 슬픔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모두 그녀를 막지 않았고 그녀가 분노를 표출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언제나 사랑스럽고 순진했던 그녀가 이토록 광기에 휩싸인 모습을 보이자 사람들은 마음 깊
시만자는 원래 그들의 몸에 더 많은 구멍을 뚫어줄까도 생각했으나 보주의 말을 듣고 멈추기로 했다. 몇 번 더 찌른다면 피가 너무 빨리 흘러 그들이 너무 쉽게 죽을수도 있어서였다.송석석은 조상 묘지 앞의 작은 사당에서 향을 가져와 불을 붙여 향로에 꽂았다. 그러고는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무릎을 꿇고 세 번 큰절을 올렸다. 그녀는 절을 올리면서 먼저 떠난 가족들이 저세상에서 이 장면을 보고 있을 것이라 믿었다.사여묵 역시 향을 피우고는 그녀 옆에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을 잡았는데, 송석석이 이미 눈물범벅이 되어 있어 그는 더욱 마음이 아팠다. 사여묵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범인이 이미 처형되었으니 장모님도 저세상에서 이제는 편히 쉴 수 있을 것이오.”송석석은 그들이 정말로 안식을 얻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그들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비록 복수는 했지만 마음속 고통은 조금도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강해지고 행복해져야만 그들에게 진정한 위로가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서경의 두 정탐꾼은 아직 죽지 않았으나 과다 출혈로 의식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들은 서경 말로 무언가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송석석과 시만자 등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고 오직 사여묵만이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바로 “송구하다”라는 말이었다.그들 역시 자신의 잘못을 알지만 단지 인정하기 싫었을 뿐이었는데, 이제 죽음을 앞두고 있으니 그동안 저지른 일들이 하나하나 떠오르는듯 했다. 송구하다는 말이야말로 그들이 이 묘지 앞에서 비로소 할 말이었다.사여묵이 송석석과 보주에게 전했다. “이자들이 송구스럽다고 말하는구나.”보주는 여태 애써 눈물을 참고 있었는데, 사여묵의 말을 듣자마자 결국 눈물을 터뜨리며 시만자의 품에 와락 안겼다.“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송구스럽다고 해서 이 모든 일이 없어지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보주는 목이 찢어질 듯한 울음을 터뜨리며 외쳤다. 단지 송구하다는 말로 모든 죄
사실 이런 자리에서는 모두 입맛이 그다지 좋지 않기 마련인지라, 많은 음식들이 한 입 먹고 나면 다시 치워지곤 한다.하지만 북당의 사람들은 정말 음식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떤 요리가 나와도 모두 다 먹어버렸으며, 가득 채운 술잔도 순식간에 비웠다. 그들을 시중드는 궁인들도 꽤 힘들었을 것이었다.시만자는 그들이 춘만루에서 먹었던 그 한 끼를 떠올렸다. 그때도 남은 음식이 하나도 없이 모든 것이 비워졌었다.그녀는 송석석에게 무언가 말을 건네고 싶었다. 하지만 식사 소리 외에는 아무 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기에 말을 꺼내기 어려웠다.그러나 그들은 눈짓만으로도 서로가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알아차렸다.시만자는 북당 사람들이 이곳에 등장한 것이 협상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했고, 송석석도 그렇게 생각했다.하지만 그녀는 그들이 중재자로 온 것인지, 아니면 서경을 돕기 위해 온 것인지 확실하게 알 수 없었다. 만약 중재자라면 협상 또한 오래 걸리지 않고 조약을 체결할 수 있을 테니 더 좋을 것이었다.하지만 만약 서경을 돕기 위해 온 것이라면 협상은 공방전이 될 것이 분명했다. 북당이 그들의 방패가 된다면 상국이 협상에서 어려움을 겪을 것이 틀림 없으니 말이다.이덕회와 홍려사경 등 상국의 사절단들은 상황을 어느 정도 눈치챈 듯 했다. 그래서 그들은 처음의 그 기쁨을 잃은 대신 마음속으로 여러 가지를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눈앞의 음식도 별로 먹고 싶지 않은 듯했지만, 모두가 식사를 하고 있었기에 그들도 어쩔 수 없이 천천히 먹었다.이 궁중 연회는 그들이 참석했던 연회 중 가장 이상한 연회였을 것이다. 마치 폭풍이 다가오는 듯한 무서운 고요함이 느껴졌다.궁중에서 준비한 요리는 총 32가지였다. 그러나 각 요리의 양은 매우 적었으며, 궁인들은 음식을 하나씩 들고 들어와서는 다시 하나씩 치워갔다.누군가 술잔을 들고 싶어했지만, 역시 원신제와 마찬가지로 한 번 쓱 훑어본 후, 술잔을 비우고 다시 내려놓고는 식사를 계속했다.마침내 32가지 요리가 모두 올라갔
다음날, 궁중 연회는 신시에 시작되었고, 여전히 수란키가 직접 그들을 맞아 궁으로 안내해주었다.예상했던 대로 즉위식은 이미 끝난 상태였고, 이번 연회의 주요 목적은 국경선의 협상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궁에 들어간 후에도 다른 나라의 사절단을 보지 못했다.궁 안은 황실의 측근과 문무 백관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들은 상국의 사절단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고, 친근한 분위기도 없었다.이런 자리에서는 역관의 도움이 필요했기에 대화의 주제가 그리 넓지 않아, 서로 간단한 인사 정도만 나눌 뿐이었다.다른 나라의 사절단이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입석할 때 원신제가 상국의 사절단에게 말했다."오늘 북당에서 귀빈들이 오십니다. 곧 도착할 것인데, 여러분이 그들과 바로 친해질 것이라 믿습니다."이덕회는 즉시 흥분하며 말했다. "북당의 귀빈이라 하셨습니까? 어떤 분이 오시는지요?"그가 흥분하는 것은 당연했다. 왕이장이 가져온 임양운의 육안총과 포차는 모두 북당에서 개량된 것이었고, 임양운 선생이 북당에서 배운 적이 있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상국의 병부상서로서 그는 정말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싶었다.북당은 상국이 항상 배우고자 했던 본보기였다. 그들의 첨단 무기와 치국책은 상국보다 훨씬 진보적이었다.물론 국가의 상황이 다르기에 모든 것을 배울 수는 없을 테지만, 대화를 깊이 나누면 분명히 얻을 것이 있을 것이었다.원신제는 그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도착하면 알게 될 것입니다."연회는 지루하고 피곤했지만, 북당의 귀빈이 온다면 그 이야기는 달라진다.모두가 기대하고 있을 때, 한 외침이 들렸다.“북당 안풍친왕과 왕비께서 도착하셨습니다!"이덕회는 놀라서 입을 막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눈에는 기쁨이 넘치고 있었다.송석석도 사부로부터 안풍친왕의 호를 들어본 적이 있었다. 사부는 그를 매우 존경한다고 했다. 생각치도 못하게 오늘 그를 만날 수 있으니 그녀도 말할 수 없이 기뻤다.반면, 만두와 몽동이 그들은 비교적 담담했
원신제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씁쓸한 게 한 가지 더 있네. 지금까지 짐은 장공주의 신분으로 여인에게도 과거 시험을 볼 자격이 있어야 한다고 높이 외쳤지. 하지만 황제가 된 지금, 어쩔 수 없이 각 세력들의 이익을 고려해줘야 하고 그자들이 짐에 대한 적대심과 경계를 약화시킬 수밖에 없다네. 짐은 이제 고려한 일이 더 많아졌어. 가끔은 속에 천불이 나서 반대파 세력들의 가슴에 칼을 꽂고 싶기도 하네.”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송석석이 대꾸했다.“사실 한 나라의 황제나 대신들은 남녀를 막론하고 결국 최종 목적은 같지 않겠습니까? 폐하께서도 그렇듯 다들 나라의 안정과 백성들의 평안을 바라고 있는 겁니다. 나라에 영원히 전란이 일어나지 않고 창성해야 폐하께서 원하시는 개혁을 진행하셨을 때 반대의 목소리가 잦아드는 것입니다. 그러니 폐하, 현재 가장 중요한 건 폐하의 자리부터 굳건히 지키시는 겁니다.”대놓고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원신제는 송석석의 말뜻을 확실하게 알아들었다. 현재까지 나라가 혼란에 빠져 있고 각 세력들의 제지도 심하기에 이 국면을 해결하는 것도 충분히 힘든 일이다.황제의 자리도 흔들리고 있는 지금, 원신제가 개혁까지 고집하려는 건 더욱 위험한 일이었기에, 미래가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다.시만자 또한 송석석의 말에 동의하는 바였다.“사실 한 가지 일을 처리하는 데에 방법이 한 가지밖에 없는 건 아닙니다. 강경하게 상대방과 맞서 싸우는 것도 방법이지만 이는 가장 현명하지 못한 하책입니다. 한 사람의 성격도 바꾸기 쉽지 않은데 천 년이나 넘게 지속된 규정을 바꾸는 건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폐하께서 관념의 씨앗을 심으시면 언젠가 누군가가 폐하께서 남긴 발자국을 따라 한 걸음씩 나아갈 것입니다.”잠시 머뭇거리던 시만자는 이내 다시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저와 석석도 매산에서 무술을 공부할 때 그랬습니다. 다들 저희를 비웃고 하찮게 여겼지만 저희는 결국 실력으로 그자들을 한 명씩 쓰러트렸습니다. 구호만 외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실력이
서경의 황궁은 금빛으로 반짝였으며 기세가 어마어마했다. 어둠이 깃든 고요한 밤에는 기 장엄함이 더욱 돋보였다.첫 번째 궁문을 들어서고 나서도 마차는 궁 안을 자유롭게 누빌 수 있었다.궁 안 곳곳에는 커다란 나무들 위에는 등불이 잔뜩 걸려 있어 대낮처럼 밝았으며, 누군가가 몰래 나무 위에 숨어있는다고 해도 너무 밝아서 바로 들킬 정도였다.수란키는 앞장서서 걷다가 한 궁전 밖에 도착했는데, 궁녀 두 명이 다가와 수란키와 서경 언어로 몇 마디 나누다가 고개를 돌려 송석석과 시만자에게 환하게 웃으며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수란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송 대감님, 만자 낭자, 폐하께서 두 분에게 궁전으로 모시라고 하셨습니다.”두 궁녀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송석석과 시만자는 이내 궁전 안으로 들어갔다.휘황찬란한 궁전 내부에는 커다란 조각 기둥이 양측에 세워져 있었으며 그 모습은 압박감이 넘쳤다.원신제는 용상에 앉아 환한 미소로 두 사람을 반겼지만 얼굴에는 피로함이 가득해 보였다.송석석과 시만자는 이내 인사를 올렸고 원신제는 그들에게 편하게 앉으라고 했다.그리고는 송석석을 쳐다보며 말을 걸었다.“짐은 송 대감이 사절단과 함께 이곳으로 온다고 하여 며칠 전부터 계속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보니 너무 반갑네.”송석석은 웃으면서도 진지하게 대답했다.“폐하께서 황위에 오르셨다는 소식을 듣고 소인도 너무 기뻤습니다. 원하는 바를 이루신 걸 감축드립니다.”송석석은 원신제를 힐끔 쳐다보았다. 원신제에게서 냉옥 장공주의 모습이 보였고 예전과 크게 변한 건 없었으며 여전히 피로해 보이고 여전히 진중하고 엄숙했다.냉옥 장공주에게 있어서 황제의 역할이든 실권을 손에 쥔 장공주 역할이든 똑같이 신경 쓸 일이 많을 것이다.“원하는 바를 이루느라 많이 힘들었네. 하지만 다행히도 이제 일처리는 훨씬 쉬워졌네.”원신제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조금 뒤, 궁녀들이 서경 특색이 돋보이는 다과들을 내왔다. 송석석과 시만자는 조금 전에 저녁 식사를 했기에 배가 고프지
서경 수도에 도착했을 땐 8월 13일이었기에, 송석석 일행이 떠난 지 한 달은 족히 넘은 상황이었다. 점심이 되자, 햇빛이 따스하게 비추어졌다.진왕은 마차 안에 몸을 웅크려 누운 채 입성에 진입했다. 하지만 마지막 자객들은 머릿수도 많고 기세도 등등해, 서경 지대에 들어서고 나서도 송석석 일행은 총 일곱 번이나 습격을 당했다. 현갑군은 대부분 부상을 당했고 시만자마저 어깨가 칼에 찔렸지만 다행히 신경까지 다치지는 않았다.진왕이 이렇게까지 크게 논란 건, 자객에게 습격을 당할 당시, 그는 변소 안에 있었다.일을 마치고 변소를 나선 순간, 갑자기 나타난 자객이 검으로 진왕의 가슴을 베었고 그 검을 진왕의 가슴에 꽂으려던 순간, 송석석이 제때에 나타나 손에 들고 있던 검을 한 발 빠르게 자객의 가슴에 꽂았다.하지만, 이내 자객의 머리채를 뒤로 확 잡아당긴 덕분에 진왕은 무사할 수 있었다.그는 가슴팍이 조금 베인 게 전부였지만 큰 중상을 입은 것 마냥 밤새 괴로운 신음소리를 내고 나서야 겨우 진정이 되었다. 수도에 도착하자 수란키가 관원들을 데리고 성문 앞에 서서 진왕을 반겼다. 수란키는 이제 서경의 승상이 되었다.한눈에 송석석을 알아본 수란키는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송 장군님,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여전히 기품이 넘치시네요.”송석석은 말에서 내려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인사를 하며 상대방을 힐끗 살폈다. 솔직히 조금 전에 수란키를 알아보지 못했다.전보다 훨씬 늙어 보였고 백발인 데다가 수염도 허옇게 변해 버렸다. 하지만 눈빛은 여전히 카리스마가 넘쳤고 남강 전장에서 봤을 때보다 되레 활기가 넘쳐 보이기까지 했다.남강 전장에서 봤던 수란키는 온몸에서 분노가 들끓고 있었다. 위엄이 넘치고 엄숙한 그는 삶의 의지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며 그저 복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그런 느낌이었다.“승상께서 이렇게 직접 마중까지 나오시고. 너무 민폐를 끼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되네요.”송석석이 웃으면서 말하자 수란키가 호탕하게 웃었다.“너
한편, 크게 놀란 진왕은 태의를 불러 심신을 안정할 수 있는 약을 처방받았다.송석석이 찾아갔을 때, 진왕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창백한 얼굴에는 핏기가 전혀 보이지 않았으며 덜덜 떨리는 입술로 송석석에게 자객은 어떻게 됐냐고 물었다.송석석이 진왕에게 자객이 도망쳤다고 얘기하고 나서야 그는 조금 안정을 찾은 듯했다.사실 진왕을 보필하는 사람들이 자객이 도망쳤다고 진작 얘기했지만 진왕은 믿지 않았다. 이제 송석석에게서 듣고 나니 그제야 안심이 된 것이다.송석석은 진왕에게 몸조리 잘 하라고 당부한 뒤 방을 나섰다.이와 동시에, 이덕회는 나머지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있었다. 병부 상서인 이덕회는 지금까지 산전 수전 공중전까지 전부 겪어 보기도 했고 또한 왕비와 현갑군을 믿었기에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한편, 매산 출신 몇 명은 한데 모여 전에 성릉관에서 만났던 검은 복장 차림의 무리들을 의심하고 있었다.어쩌면 그자들이 바로 자객일지도 모른다는 의심 말이다.이 의심을 가장 먼저 제기한 건 바로 시만자였다. 그는 그 무리들이 갑자기 사라진 게 너무 수상했고 비밀 경로를 통해 계획적으로 도망친 거라고 확신했다.더군다나 조금 전 자객들도 전부 검은색 옷차림이었기에, 비록 머릿수가 조금 차이 나긴 했지만 그리 이상하지도 않다. 일부 사람들은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을 수도 있으니까.“성릉관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출동했던 건 아마 우리한테 손을 쓰려고 그랬을 가능성이 커. 하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성릉관에서 우리를 죽이면 쉽게 도망칠 수 없을 것 같아서 일단 포기한 거야.”시만자는 분석할수록 자신의 의심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서 고개를 돌려 송석석에게 물었다.“내 말이 맞는 것 같지 않아?”송석석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자들은 아니야. 정확히 얘기하자면 조금 전 자객들은 그자들보다 무술 실력이 확연히 떨어져. 그자들은 성릉관에서도 자유롭게 나타났다가 사라졌어. 그렇게 보면 네 의심이 성립되지 않다는 거지. 그자들은 성릉관에
이날 아침, 송석석 일행은 서경으로 출발했다.송석석은 딱히 아쉬운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나중에 돌아올 때 성릉관을 또 지나야 했기에, 이후에도 외조부 가족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성릉관을 떠나자마자, 평탄한 길이 사라졌다. 여기저기가 다 울퉁불퉁했고 일부러 인위적으로 파괴한 곳도 있었기에 마차가 지나가기엔 무리가 있었다.하지만 진왕은 절대 다시 말을 타려고 하지 않았다. 며칠동안 안정을 취했지만 다리 안쪽의 쓸림 상태가 아직 심했기에 걸을 땐 괜찮아도 말에 타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때문에 성릉관에서 공을 세우고 육아당까지 설립한 진왕은 까탈스럽게 마차를 고집했고 마차가 도무지 지나갈 수 없는 곳은 현갑군이 말에서 내려 마차를 밀면서 힘겹게 전진했다.하지만 불행 중 다행인 건, 현재 양국으로 통하는 길이 개방되었기에 그 길을 따라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산길밖에 없었다면 고귀한 진왕의 엉덩이가 엄청나게 고생했을 것이다.그렇게 겨우 서경 지대에 진입하여 루벌로 향하자, 서경의 관원과 병사들이 그들을 맞이하며 가는 길까지 호송해주었다.송석석 일행들 중에서 통역관을 제외하고는 서경에 와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똑 같은 변경 도시라고 해도, 루벌은 성릉관보다 훨씬 낙후했다. 여기저기에는 망가지고 훼손된 집채가 많았으며 행색이 누추한 거지나 근심이 많아 보이는 백성들도 많았다.송석석은 이 광경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두 나라가 전쟁을 치른 건 사실이지만 이곳까지 침투되지는 않았는데 말이다. 전에 전북망과 이방이 이곳 마을을 공격했다고 해도 공격당한 그 마을만 피해를 받아야지 루벌 전체가 이렇게 엉망진창이 된 것은 말이 안 되었다.루벌의 한 역관에 도착하고 나서야 송석석은 호송하고 있던 관원한테서 그 이유를 듣게 되었다. 수란석이 성릉관에서 전쟁을 일으켰을 때, 후방 공급이 부족한 탓에 병사들이 루벌로 돌아와 약탈을 진행한 것이었다.수란석 당시의 상황이 빅토르와 거의 비슷하다고 했다. 그때 당시 전쟁을 바라는 사람들이 많지 않
소 팔야는 곧바로 송석석이 말한대로 지시를 내렸고 이 지시를 실행에 옮긴 사람은 바로 전북망이었다. 그는 서둘러 부하들을 데리고 여기저기 수색하기 시작했다.송석석이 성릉관에 왔다는 사실은 전북망도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녀를 맞이하던 그날, 그는 멀리 서서 지켜볼 뿐, 가까이 다가가지는 않았다.하지만 거리가 너무 먼 탓에 전북망은 송석석을 정확히 보지도 못했고 그저 그림자만 볼 수 있었다.전북망은 자신이 지금 참 쓸모없는 짓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느껴지기도 했다. 송석석은 이제 자신과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이고 진성의 일과 관련된 사람은 이제 멀리해야했기 때문이다. 한편, 시절단은 성릉관에서 잠시 쉬는 사이에도 담판의 기교에 대해 상의했으며 상황 모의도 여러 번 해보았다.이번 담판이 저번에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어렵지는 않았지만 절대적으로 쉬운 건 아니었다. 이는 여제가 계속 마음에 두고 있던 일이기에 쉽게 타협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씨 가문에서도 상대방이 몰래 사람을 보내 사절단의 책략을 몰래 엿듣는 것은 아닌지 걱정됐다. 사절단의 책략을 알게 된다면 상대방은 그에 맞는 대책을 미리 준비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상국은 열세에 처하게 된다.때문에 소 팔야는 전북망에게 반드시 철저하게 관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몰래 침입한 사람이 있으면 무조건 찾아내야 하고 이와 동시에 사절단 곁에서 시중을 드는 하인들 사이에도 첩자가 있을 수 있으니 확실하게 조사해야 한다고 했다.이틀 동안 수색했지만 전북망은 수확이 없었다. 그리고 수부를 샅샅이 수색했지만 위장술을 쓰거나 몰래 정보를 외부에 빼돌리는 사람도 없었다.전북망이 유일하게 알아낸 정보는 검은 복장을 입은 사람들이 춘만루에서 밥을 한 번 먹은 적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들이 춘만루를 떠난 뒤, 이들을 목격했다는 가게 주인도 있었지만 어디에 묵었고 어디로 갔는지는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서른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심지어 전부 검은 복장을 차려 입었는데 이렇게 쥐도 새도 모르게
춘만루는 오늘 손님들로 꽉 차 있었다. 가게가 그리 크지 않기도 했고, 다른 손님들도 있었을 뿐만 아니라, 조금 전 낭자가 데리고 오겠다고 했던 검은 복장을 입은 남자들까지 가게 안 나머지 자리를 전부 차지했다.송석석과 시만자 그리고 남자까지 앉을 자리가 없었기에 가게 주인은 급하게 작은 탁자 하나를 펴서 가게 앞에 자리를 마련했다.그렇게 세 사람은 일행들과 떨어져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이때, 남자가 미안한 목소리로 송석석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저자들은 전부 제 일행입니다. 저와 똑같이 이틀 전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거든요. 혹시 불편하시다면 저자들에게 가게 앞에서 기다리라고 하겠습니다. 나중에 저자들에게 호빵이나 하나씩 나눠줘도 충분합니다.”멈칫하던 시만자는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럴 필요 없어요. 편하게 드시고 싶은 거 시키시면 됩니다.”남자가 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낭자는 정말 얼굴도 예쁘시고 마음도 선하시군요. 그럼 저희 편하게 시키겠습니다.”“그… 그래요.”고개를 끄덕이던 시만자는 가게 안에 앉아있던 사람들을 힐끗 쳐다보았다. 이자들의 옷차림은 꽤 눈에 띄었으며 옷소매에 수놓은 글씨들이 보이기도 했다.하지만 옷이 구겨지고 먼지도 많이 묻었기에 수놓은 글씨를 정확하게 확인할 수 없었다.그렇게 한참동안 쳐다본 시만자는 그제야 이자들의 옷에 수놓은 글씨들이 각자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중에서 흑영위나 전광위 등 글씨들이 보이기도 했다.이자들은 예의가 없거나 우악스럽지는 않았다. 각자 자리를 찾은 뒤 자신들에게 밥을 사준 시만자와 송석석에게 일제히 고개를 숙여 감사인사를 했다.거의 대부분 사람들이 머리가 하얬지만 얼굴은 불그스름한 게 나이가 그렇게 많아 보이지는 않았다.그 중에서 생김새가 매우 추악한 사람들도 몇 명 있었으며 쳐다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송석석과 시만자 그리고 몽동이는 서로를 힐끔 쳐다보다가 왠지 이 식사자리가 자신들의 마음에서 우러러 나온 게 아니라는 기분이 들었다.송석석은 식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