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당일, 송석석은 명을 내려 현갑군에 속한 수장들, 심지어 작은 호위장이라 할지라도 당직이 아닌 자들은 모두 출석하라고 명했다. 왕정은 처음에 자신을 겨냥한 것이라 생각하고, 집에서 아내에게 송석석을 두고 한참을 험담하다가 출발하였다. 그는 ‘여자가 참으로 속이 좁구나, 현갑군이 이처럼 속좁은 여인의 손에 맡겨졌으니 앞으로 무슨 일들이 벌어질지 모를 일이다’라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경위부에 도착하고 나서야 이날이 그를 겨냥한 것이 아닌, 모든 수장들을 위한 시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번 시험이 직접 이부의 평가와 연결된다는 사실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오늘 시험에서 참패한다면 이부의 평가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고, 그로 인해 녹봉 삭감이나 강등의 위험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 나올 때 한 번 더 향을 올려 조상님의 가호를 빌어야 했음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전북망 역시 그곳에 있었으나, 그는 이번 시험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갓 부임한 터라 아직 시험을 치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전북망은 남강 전장에서 송석석의 무공을 직접 본 적이 있어 왕정이 절대로 그녀의 상대가 될 수 없음을 알았다. 다만 왕정이 그녀의 손에서 몇 수나 버틸 수 있을지는 궁금할 따름이었다.이날 송석석은 관복 대신 청색 비단 옷을 입고 머리를 청옥관으로 틀어 묶어 관료의 위엄은 덜했지만 어딘가 유연한 학자의 풍모를 풍겼다. 그녀는 돌계단에 올라서서 큰 목소리로 외쳤다.“오늘은 내가 직접 시험을 보겠소. 그대들은 모든 기량을 다해 대결하시오. 각 수장들은 오십 수를 넘기지 못하면 모두 특훈을 받을 것이고, 호위장들은 이십 수를 버티지 못하면 마찬가지로 특훈을 받을 것이오.”그녀의 목소리는 안정적으로 모든 이의 귀에 와닿았고, 현장에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는가 하면 얼굴을 찌푸리는 자도 있었다. 웃음소리를 내는 자들은 송석석의 무공을 모르는 자들이었고, 왕정과 전북망 같은 몇몇 부령들은 이십 수는 고사하고 오십 수를 버틴
그 후로 각자 차례대로 나서기 시작했고, 열두 명의 호위들은 모두 송석석의 손을 거쳐 스무 수를 채우지 못한 채, 대개 십오 수 남짓에서 패배해버리고 말았다. 이윽고 오진이 나서서 사십 수를 버텨냈지만 결국 패했다. 하지만 일어나며 공손히 절을 했는데 자신의 성과에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마지막으로 왕정의 차례가 되었다. 왕정은 그동안 송석석의 수를 주의 깊게 지켜보며 그녀의 기술을 어느 정도 파악했다고 자부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 있게 생각하기를, 오십 수를 버티는 데 문제없으리라 여겼다. 왕정은 다리 기술이 가장 뛰어났기에, 송석석의 다리 기술이 상대적으로 약함을 깨닫고 내심 기뻐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하반신을 집중적으로 노린다면 승산이 있으리라 다짐하였다. 왕정은 몸을 약간 숙이고 주먹을 쥐며 가볍게 발을 굴리며 다리 근육을 풀고는 말하였다. “제 차례군요.” 그러자 송석석은 살짝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답하였다. “그래, 너의 차례다.” 어째서인지 그녀의 미소를 보자마자 왕정은 마음속에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이 일었다. 그녀가 무언가 대단한 기술을 숨기고 자신을 상대로 펼칠 듯한 불안감이 드는 것이었다. “첫 수는 역시 내주도록 하마” 송석석이 말하였다. 그녀는 많은 이들과 싸운 후에도 피곤한 기색 없이 여전히 기운이 넘쳐 보였다. 왕정은 그녀가 준비 태세를 취하는 모습을 보며 첫 수를 허투루 내지르며 발로 찼다. 이 발차기는 본래 정통으로 차는 동작이었으나, 도중에 하단을 노리다 갑작스레 턱을 향하도록 변했다. 대개 상대는 복부나 가슴 부위를 방어할 터이지만, 송석석은 한눈에 이 속임수를 꿰뚫어 보았다. 그녀는 양 팔꿈치를 앞으로 모아 강하게 충격을 가하여 왕정을 튕겨 내었다. 왕정은 다급히 물러나며 공중에서 몸을 한 바퀴 돌려 비로소 자세를 안정시키려 하였으나, 이미 송석석의 연속적인 발차기가 쏟아져 내린 뒤였다. 왕정은 허둥지둥 피하고 막기 위해 되려 불안하게 자세를 잡아 버렸다. 그에 반면 송석석은 안
시만자는 미소를 지으며 몸을 날려 송석석에게 덤벼들었다. 송석석은 몸을 옆으로 돌려 그녀의 공격을 거뜬히 피해냈다. 그런 뒤, 시만자의 팔을 잡아당겼다. 이에 맞서서, 시만자는 송석석의 손을 빠져나가며 허공으로 솟아오르는 듯한 몸짓으로 대응했다.두 사람은 그렇게 백여 차례나 대결을 벌였고, 여전히 승부를 가리기 어려웠다. 그들의 동작은 너무나도 빠르고 강렬하여 사람들이 쉽게 따라잡기 어려웠고, 주먹과 발길질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만이 사방에울려 퍼졌다. 몇 차례 발길질이 옆의 푸른 돌바닥을 가격한 탓에 돌바닥은 순식간에 산산이 부서졌다.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이들의 치열한 대결을 보고 있던 이들은 방금까지 자신들이 치른 무술 시험이 그야말로 겉치레에 불과했음을 깨달았다. 송석석은 사실 마음만 먹으면 몇 수 만에 그들을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백여 차례의 격전 끝에, 두 사람은 서로 물러나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오랜 시간 싸웠음에도 그들은 단지 머리칼만 살짝 흐트러졌을 뿐이었다.전북망은 이 장면을 지켜보며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남강 전장에서 그는 송석석과 시만자의 위력을 목격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전쟁 중이라 힘과 민첩성, 속도만으로 승부가 갈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둘의 대결은 진정한 실력과 기량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이들처럼 빠르고 날렵하게 싸우는 여인을 그는 지금껏 본 적이 없었다.이 여인들은 그야말로 장군 중의 장군이었고, 자신이 그런 보배를 잃었다는 사실에 마음이 쓰라렸다.그는 출정 후 그녀에게 건넨 말이 떠올랐고,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가 그 말을 어떻게 입 밖으로 꺼낼 수 있었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그때 필명이 먼저 반응하여 앞으로 나서더니 무릎을 꿇고 말하였다. “제자 필명. 스승님께 인사 올립니다.”뒤이어 오진 역시 잠시 멈칫하다가 빠르게 무릎을 꿇었다. “제자 오진. 스승님께 절을 올립니다.”두 사람은 단순히 무술을 배우기 위해 고용된 무술 교사의
이틀 후, 오진과 그 동료들은 스승을 모시는 예식을 준비하며 시만자를 왕강루로 초대하였다. 왕과 왕비께 증인을 부탁드리는 것이라 예식은 성대하게 준비되었다. 사실 시만자는 그날 집에 돌아온 후 다소 후회하는 마음이 들었다. 본래 성격이 자유롭고 구속받기 싫어했기에 제자를 받아들인다는 사실에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그들보다 나이도 어린 터라 굳이 스승의 위엄을 세우지 않아도 될 것을, 그냥 '심 사부'라 불리며 가르치기만 하면 될 텐데 싶었다. 그래서 거절할 방도를 찾고 있었지만, 그들이 이미 왕강루에서 예식을 준비하였다고 하니 그녀도 도리 없이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런 성대한 예식을 듣고 있자니 무언가 허영심마저 살짝 느껴졌다. 생각을 거듭하던 끝에, 어차피 훗날 적염문을 물려받을 몸이니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였다. 마음을 정한 뒤 그녀는 제자들에게 맞는 무기를 골라잡고, 사여묵과 송석석과 함께 왕강루로 향했다. 시만자는 그들의 절과 차를 받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만 분명히 하지! 너희 셋이 나를 스승으로 모시는 일은 함부로 외부에 퍼트리지 말거라. 그날 너희가 나에게 절한 것을 여러 사람이 보긴 했지만, 차를 올려 정식으로 스승을 모신 일은 아니니, 정식 스승이라 할 순 없다. 오늘 이 예식에서 스승으로 모시기로 하였으니 이제는 우리 몇 사람만 알고 있기로 하자. 바깥에서는 나를 스승이라 부르든, 심 사부라 부르든 상관없다." 그러자 셋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고, 시만자는 준비해 온 무기들을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필명아, 네가 큰형이다. 검법이 상당히 훌륭하더구나. 이 청풍검은 네게 적합할 터이니 검법이 더욱 정진되기를 바란다.""감사합니다, 스승님!" 필명은 두 손으로 검을 받으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오진아, 넌 둘째다. 평소 칼을 자주 사용했지? 이 자금도는 네게 주마.""자금도요?!" 오진은 자금도라는 사실에 기쁨에 들뜬 채 방방 뛰기 일보 직전이었다. 무공을 익히는 이에게 무기가 얼마나 소중한
제자 예식 후 집으로 돌아온 후, 시만자가 송석석에게 말했다.“이번 제자 예식이 어찌 보면 일종의 희극 같지 않니? 나조차도 제대로 제자로서 수행하지 못했는데, 이제 제자를 거두다니. 게다가 그들은 나보다 나이도 훨씬 많고, 현갑군의 군인들이잖아. 내가 가르침이 부족하면, 훗날 네게 누가 될까 걱정이 돼.”송석석은 시만자의 손을 꼭 잡고 그녀를 안심시키며, 먼저 사여묵에게 자리를 비켜달라고 했다. 그리고 시만자와 함께 정원을 거닐며 조용히 말했다.“네가 원치 않는다면, 그냥 이번 예식은 없었던 일로 여겨도 된다. 여전히 그들에게 '심 사부'로만 불리면 되는 거야. 그리고 잘 가르치고 못 가르치고는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사부는 입문만 시켜줘도 충분해. 수행은 각자의 몫이니까. 네가 무공이 출중하고, 이미 그들에게 충분히 존경을 받았으니 만약 그들이 실력을 쌓지 못한다면 그건 그들의 재능 문제지, 네 탓이 아니란다.”시만자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망설이는 것 같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조정의 관료들이잖아. 내가 무림의 방식으로 그들에게 무공을 가르치는 게 과연 괜찮을까?”이에 송석석은 부드럽게 답했다.“황제께서도 당연히 현갑군이 더 강해지기를 바라실 거야. 현갑군과 경사 주둔군은 황성의 방패와 같기 때문이지.”시만자가 작은 목소리로 칭찬했다. “그토록 중요한 군을 감히 너에게 맡기다니, 황제께서도 참 대단하셔.”그러자 송석석은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황제는 아직 반역자를 색출하지 못하셨는데, 북명왕부의 인물들은 반역자가 아니라고 믿고 있는 거지. 어쨌든, 황제는 우리를 이용해 그 반역자를 찾아내려는 거야. 반역자가 드러나지 않더라도, 만약 사태가 터진다면, 우리가 적을 막고 황제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시만자는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내가 보기엔, ‘사냥할 새가 다 떨어지면 활은 장롱에 보관될 운명’일 것 같군.”송석석은 미소 지으며 답했다.“새 사냥이 끝났다는 것은 태평성대가 도래했음을 의미하지
오늘 밤, 드디어 북명왕부 사람들이 모두 모여 저녁을 먹게 되었다. 송석석은 그제야 심청화가 매산으로 돌아가지 않았음을 알게 되어 놀랐다. “대사형, 아직 돌아가지 않으셨습니까?! 전 이미 가신 줄 알았는데요. 제가 인사도 못 드리고 떠나신 줄 알고 어떻게 해야하지 싶었습니다.”그러자 심청화는 송석석의 머리를 콕 쥐어박으며 못마땅하게 말했다. “양심도 없는 것. 몇 번이나 불러도 답이 없어서 난 내가 너한테 실수라도 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날 보지도 못했던 게구나!” 옆에 있던 사여묵은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뒤통수를 쓰다듬고는 대신 변명해 주었다. “요즘 일이 많다 보니 생각에 잠겨 대사형의 부름을 듣지 못한 것 같습니다. 너무 심하게 말씀하지는 마십시오.”사여묵은 비록 예의 바르게 말했지만 말투에는 약간의 원망이 섞여 있었다. 그러자 심청화가 웃으며 말했다. “세게 친 것도 아니고, 석석이도 익숙해져서 괜찮을 것이다. 게다가 석석이를 가장 많이 혼낸 건 다름아닌 네 사부이자 내 사숙이지!” 사여묵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사부님께서 가끔씩 도가 지나치시지요. 제가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심청화는 자리에 앉으며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그는 이 두 사람이 천생연분이라고 확신했다. 사여묵은 송석석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한 덕분에 감정에 무딘 송석석도 서서히 깨우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염선생은 술을 올리라 분부했고 몽동이도 자리에 앉아 함께 식사를 했다. 요즘 왕부 사람들은 하나 같이 바삐 보냈지만 다들 은밀히 행동한 것이라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식사 중엔 술잔이 오가며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져 최근 사건의 어두운 기운이 조금씩 사라져간듯 했다. 문무를 겸비한 염선생은 심청화의 마음에 들고자 술 한 병을 꺼내 들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꺼냈다. “술도 있으니 어찌 비화령을 해보지 않겠습니까?”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몽동이와 시만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동시에 외쳤다.“아이고, 배가 아주 터질 것
이때 염선생이 대답했다. “약은 이미 보내졌으나 무사히 지내고 있는지는 아직 전해진 것이 없다고 합니다.”평소 정치에 간여하지 않던 심청화가 걱정하듯 말했다. “서경의 상황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그렇소. 태자는 이미 국정을 관할하고 있으나 황제는 여전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으니... 현재 조정의 반 수가 태자의 과격한 정책에 반대하고 있소. 태자는 선태자와 형제로서의 정이 깊긴 하지만 선태자의 정치 방침에 전혀 동의하지 않소. 수란키는 예전에는 선태자를 열렬히 지지했기에 그가 살아 있다고 해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오.”“황제의 목숨줄이 참으로 끈질기군요.” 시만자가 굳게 동의하며 말했다. “예! 분명 곧 승하한다고 했는데 여전히 숨을 쉬고 있습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버티고 있는 것일까요?”심청화가 답했다. “물론 대란 때문이지. 선태자는 민심을 얻었고 늙은 황제와 태자 사이의 교대가 거의 완료되었지만, 선태자가 세상을 떠나고 새로운 태자가 들어섰소. 조정의 신하들 대다수가 선태자의 측근이며 새 태자는 수란키조차 지지하지 않으니 모두가 그를 불신하기에 상황이 아주 어지럽다오. 며칠 전 소식에 의하면 이미 음식을 섭취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더니, 아마 지금쯤은 이미 세상을 떠났을지도 모르지. 다만 소식이 아직 전해지지 않았을 뿐이오.”“대사형, 평사저가 전갈이라도 보낸 겁니까?” 심청화는 줄곧 이런 일에 참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송석석은 다소 놀란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그래, 전갈이 왔더군.” “허나...!” 송석석이 묻기도 전에 심청화는 그녀를 애정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뭘 말을 하고 싶은 게냐? 내 사매가 조정의 일에 연루되었는데 내가 어찌 외면한단 말이냐? 그럴 수는 없다!”송석석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모두를 곤경에 빠뜨리게 한 것 같네요. 다들 매산에서 자유롭게 살고 계셨거늘... 대사형은 그림을 그리고 산과 물을 노니셨는데 저 때문에 진성에 몸이 묶여있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사여묵이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스승님도 말씀하셨다시피 석석이는 사부님이 만난 사람 중에 무술 재능이 가장 뛰어난 제자라고 했다. 석석인 많은 무공과 기술을 단 한 번 보고도 익힐 수 있지.” 그러자 심청화가 웃으며 말했다. "비록 그렇게 말씀하시긴 했다만 그 뒤에 한마디 더 하셨어. 석석이는 너무 게을러서 하루 종일 산에서만 뛰어다니고 또 나무에 올라 새집을 뒤지고 구멍을 파서 독사를 잡고, 쥐를 잡아 아이들을 놀라게 한다고 말이야.” 그러자 몽동이가 무표정을 지었다. “저 또한 당해봤습니다. 글쎄 쥐 꼬리를 잡고 달려오더니 제 몸에 던지는 바람에 제가 너무 놀라 울면서 사부님에게 고했지 뭡니까? 아니 근데, 사부님께서는 사내놈이 울면 안 된다고 하시면서 오히려 저를 혼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에 만종문에 가서 따지셨답니다.” 시만자도 이 일을 알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결국 화해가 이루어졌고 1년 치 임대료를 면제받았다지.” 그러자 송석석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서경의 일을 말하는데 내 어린 시절 얘기는 왜 꺼내는 것이냐! 밥이나 먹어!”몽동이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시만자를 보며 말했다. “1년 치를 면제했다니! 그게 사실이더냐? 넌 그걸 어떻게 알게 된 것이지?” “우리 적염문 또한 매산에 있었는데 모를 리가 있겠어? 온 매산이 다 아는 사실이다. 매년 임대료를 낼 때마다 너희 사부님은 너에게 석석이와 한번 겨뤄보라고 하시지?” “아!” 몽동이는 깜짝 놀랐다. “그렇다면 네 말은... 우리 사부님이 판을 짰다는 말이냐? 내가 석석이에게 맞으면 사부님은 그 대가로 임대료를 면제받으셨다는 거지?” 시만자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온 매산이 다 아는 일이야.” 몽동이는 얼굴을 찌푸리고 말했다. “아니, 그럴 리가! 우리 사부님이 얼마나 품위 있고 신중하신 분인데 그런 판을 짠다니! 내가 매번 석석이에게 얻어터졌을 때마다 사부님은 내가 무공이 부족해서 그런 거라 하셨는데 말이다. 무공을
송석석은 차분하게 질서를 잘 정돈한 뒤, 학생들과 부모님들을 저택으로 돌려보냈고 비밀을 지켜달라는 얘기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 일은 언젠가 소문이 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그러고는 홍현에게 청작과 경조부의 사람을 불러오라고 했다.이 범인은 약을 먹은 게 확실하기에 반드시 매달아서 심문해야 하며 청작을 통해 무슨 약을 먹었는지 확실하게 알아내야 한다.한편, 도망친 범인들도 오진에게 전부 잡혀왔고 그들은 묶여 있는 중년 남성보다 정신이 훨씬 멀쩡해 보였지만 송석석과 홍현을 쳐다보는 눈빛은 여전히 야릇하고 이글거렸다.송석석은 안여옥을 살포시 안아주었고, 이제서야 평정심을 되찾은 안여옥이 되레 송석석을 위로했다.“괜찮아요. 저 괜찮습니다.”“왜 그런 말을 했어요? 선생님은 지금 자신을 망가트린 거라고요.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요?”국태 부인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얼굴이 창백한 안여옥은 가까스로 미소를 지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국태 부인께서 제 걱정을 이리 하시니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 애초부터 혼인할 생각이 없었고 저에게 있어서 명성은 그저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이제 그 짐을 벗어 던졌으니 차라리 잘 된 일이지요.”“그렇지만 모든 화를 혼자서 떠안겠다고 하시니… 사람들이 선생님을 어찌 얘기하고 다닐지 걱정됩니다. 선생님 조부께도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할지…”국태 부인은 안씨 어르신과 오랜 인연을 이어왔다. 이번에 안여옥을 여학 선생으로 데리고 올 때에도 안여옥을 잘 보살피겠다고 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안 그래도 몸이 허약하신 안씨 어르신이 이 얘기를 들으면 충격에 쓰러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다들 안여옥을 위로하기 바빴고 안여옥은 많은 사람들에게 걱정을 끼쳤다는 생각에 얼른 웃으면서 말했다.“전 정말 괜찮습니다. 그리 큰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사람이 살면서 더한 일도 경험하게 될 텐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안여옥은 연신 괜찮다고 했지만 사람
이때, 송석석이 서원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조금 전 밖에 있을 때부터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있었다.송석석이 나타나자 부인들은 우르르 몰려가 송석석에게 이제 어떻게 해야 하냐고 닥달했다. 감히 대놓고 따져 묻지는 못했지만 송석석에게 합리적인 설명을 내놓으라는 뜻으로 말하고 있었다.송석석은 겉으로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분통이 터졌다. 여학 마지막 날에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오늘 서원 대문이 열려 있었던 이유는 학생들과 데리러 온 가문 사람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나올 때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인데 범인들이 이 틈을 노리고 학교 안으로 들이닥칠 줄은 몰랐다.이 일은 분명 여학을 겨냥해서 벌인 일이었다.“이 일은 제가 확실하게 처리하겠습니다.”송석석의 말에 부모들이 너도나도 한 마디씩 보탰다.“왕비님,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실 겁니까?”“그러게요.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였고 쳐다보는 눈이 이렇게 많은데 이 많은 입들을 다 단속할 수 있습니까? 소문이 이상하게 퍼지면 없는 사실도 있는 일처럼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여학에 호위병을 좀 많이 세워둬야 하는 거 아닙니까?”한편, 안여옥은 송석석이 궁지로 몰리자 얼른 눈물을 닦은 뒤, 벌떡 일어나 큰소리로 말했다.“여러분, 걱정하시 마십시오. 한 명도 다친 학생이 없습니다. 저 범인은 그저 저를 잠깐 껴안았을 뿐이지 다른 학생을 해치지 못했습니다.”안여옥의 말에 현장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고 다들 안여옥이 이 일을 이렇게 대놓고 얘기할 줄은 몰랐다.범인이 안여옥을 껴안은 게 사실이라고 해도 이를 숨겨야 하는데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얘기한단 말인가?그러다가 소문이라도 나면 안여옥은 평생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살게 될 수도 있다.이때, 정신을 번쩍 차린 국태 부인이 다급하게 부인했다.“선생님은 범인에게 당하지 않았습니다. 함부로 그런 얘기하지 마세요. 범인은 선생님에게 손을 댈 기회가 없었습니다.”하지만 안여옥은 국태 부인의 말을 따르지 않았
서원에 비명소리가 점점 더 커졌고 홍현은 왕지아를 달랜 뒤 바로 서원으로 뛰어갔다.“함부로 돌아다니지 말고 잘 숨어있으렴.”한편, 서원 안에서 너무 놀란 국태 부인과 정 부인은 재빨리 딸들을 등 뒤로 숨겼고 안여옥과 무씨 아가씨는 손에 긴 몽둥이를 들고 덜덜 떨면서 들이닥친 남자들을 향해 휘둘렀다.두 선생님은 혹시라도 뒤에 있는 여학생들이 다칠까 봐 최선을 다해 막았지만 힘이 부족했다.이때, 한 남자가 주창우를 향해 덮쳤고 화들짝 놀란 주창우가 비명소리를 지르자 안여옥은 몽둥이로 남자를 내리쳤다. 하지만 남자는 겁을 먹긴 커녕, 되레 사악하게 웃으며 안여옥을 향해 달려갔다.홍현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안여옥은 남자에게 강제로 안겨 있었고, 그 남자는 심지어 입을 맞추려고 했다. 겁에 질린 안여옥은 미친 듯이 발버둥쳤지만 힘으로는 이길 수 없어, 결국 손톱으로 남자의 얼굴을 할퀴었다.미간을 확 찌푸린 홍현은 바로 달려가 한 손으로 남자의 등을 확 잡더니 그를 바닥에 내리꽂았고 발로 남자의 배를 힘껏 짓밟았다.극심한 고통에 남자는 바닥을 굴러다녔고 홍현은 무씨 아가씨 손에서 몽둥이를 낚아채더니 남자들을 향해 무섭게 공격했다.안여옥을 침범하려고 했던 남자는 홍현이 휘두른 몽둥이에 다리뼈가 부러졌고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바로 이때, 딸을 데리러 온 가문들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어떻게 된 거예요? 왜 학교 안에 남자들이 들이닥친 겁니까?”서원 안으로 몰려든 사람들은 바닥에 누워 비명을 지르는 남자를 쳐다보았고 여학생들은 너무 큰 충격에 다들 넋이 나간 상태였다.그러다가 부모님을 발견한 여학생들은 엉엉 울면서 각자 가족의 품으로 달려갔다.“어머니, 아버지, 너무 무서워요! 저 남자들이 갑자기 서원으로 뛰어들어와서 안 선생님을 강제로 안았어요.”사람들은 이내 안여옥에게 고개를 돌렸다. 머리가 헝클어진 안여옥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무씨 아가씨 품에서 온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경험이 많은 국태 부
송석석은 이 사실을 염 선생에게 알리자, 염 선생은 흠칫하다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사국 사람들이 어떻게 진성에 진입하게 된 거죠? 심지어 이곳에서 살고 있다니.”송석석이 대답했다.“그래서 나머지 남풍관도 확실하게 조사해봐야 할 것 같아. 그리고 남풍관 주인장도 만나봐야지. 주인이 사국 사람들을 거둬서 남풍관에서 장사를 하는 거니까 아무것도 모르지는 않을 거야.”사국 사람들이 언제 진성에 왔고 누가 데리고 왔으며 무슨 목적으로 온 건지 확실하게 알아내야 했다. 송석석은 나머지 남풍관을 직접 방문해서 조사할 생각이었고, 시만자와 왕이장도 함께 했다.그렇게 며칠 동안 송석석은 남풍관 다섯 군데를 돌아다녔다. 그중 세 군데에 사국 사람들이 있었고 총 열다섯 명이었다.호흡 방식이나 걸음걸이로 보면 열다섯 명 전부 무술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확실히 사국 사람들 외모는 아니었으며 보통 몸매의 남강 사람들 같았다.보아하니 신경 써서 고른 듯했다.불빛이 어두운 환경에서는 사국 사람들을 알아보기 어려웠으며 더군다나 그들은 상국 말을 유창하게 쓰고 있었기에 아무도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다.그리고 세 가게의 주인은 동일인이었으며 그자가 바로 광릉후의 향봉천이다.상의 끝에 송석석 일행은 섣불리 움직이는 대신 사람들을 시켜 몰래 남풍관 가게들을 지켜보라고 했으며 그들의 진정한 목적을 알아내려 했다.그리고 염 선생은 광릉후를 다시 한번 제대로 조사하기 시작했다.광릉후의 향봉천은 남색을 즐기는 자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자를 싫어하지는 않았다. 평범한 사내들과 똑같이 혼인하여 아이도 낳고 첩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향회옥이 바로 향봉천의 막내딸이었다. 사람들은 새로운 사실에 조금 놀란 눈치였다. 평소에 광릉후 사람들의 행실이 조용하고 눈에 잘 띄지도 않았으며 향회옥이 가끔 제자예와 함께 여학에서 문제를 일으킨 것 외에는 그 어떤 추문도 없었다.하지만 그렇게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해 보이는 광릉후에서 남풍관을 세 군데나 운영하고 있는 것도 모자
송석석은 시만자를 의자에 앉히며 대답했다.“오사형이 아주 고맙게 생각하겠네. 하지만 난 맞추고 싶지 않아. 그래서 누굴 봤는데?”“빅토르! 그래, 맞아! 빅토르를 봤어! 그것도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의 빅토르를 봤지!”시만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고 송석석은 이마를 꾹꾹 누르며 다시 물었다.“여러 명의 빅토르를 본 거야 아니면 빅토르를 닮은 사람이 여러 명 있었던 거야? 너 대체 술을 얼마나 마셨길래 이렇게 취한 거야?”“빅토르… 아니야. 빅토르보다 젊었어.”시만자가 머리를 휘청거리며 대답했고 송석석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빅토르를 닮았다는 거지? 그럼 사국 사람들이네?”사국과 상국은 아직 길이 통하지 않았기에 사국 사람들이 상국에 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사국 사람들이 진성에 나타난 것도 모자라 진성에서 살고 있다니.이때, 시만자가 꼬인 혀로 힘겹게 대답했다.“맞… 맞아. 사국 사람들이야. 그런데 어떻게 진성에 사국 사람들이 살고 있는 거지? 남풍관에 숨어 있었는데 왜 남풍관에 갔던 손님들은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않았던 걸까? 내가 그 사람들을 봤다는 건 다른 손님들도 다 봤다는 뜻인데.”송석석은 조금 불안했다. 남풍관을 방문한 손님들은 절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남풍관에 갔었다고 얘기하지 않을텐데 말이다. 하지만 지금 가장 큰 문제는 사국 사람들이 언제 진성에 몰래 들어왔냐는 것이다. 그들은 남풍관에 숨어 있었기에 아무도 그들을 발견하지 못했다.진성에 남풍관이 몇 개가 있지만 전부 비밀리에 운영되고 있었다. 선황제가 확실한 금지령을 내렸기에 엄격하게 조사했지만 숙청제가 황위에 오르고 나서 더 이상 이런 일에 신경을 크게 쓰지 않았다. 물론 엄하게 다루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권장하지도 않았다. 분위기는 선황제 때보다 상대적으로 자유로웠지만 남색은 여전히 이 나라에서 용납되지 않기에 아무도 대놓고 얘기하는 사람은 없었다.언급하는 사람이 없어서 아무도 주의 깊게 지켜보지 않았다.한편, 시만자는 털썩 눕더니 바로 잠이
송석석은 사여묵에게 항상 안전에 조심하고, 스쳐가는 여인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말라며 신신당부했다.사여묵은 질투를 하는 듯한 송석석의 모습에 기분이 좋아서 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내 절대 눈길도 안 줄 테니 걱정하지 마시오.”조금 뒤, 사여묵은 몽동이와 장대성을 데리고 길을 떠났고 혜 태비는 아들의 뒷모습을 몇 번 쳐다보고는 이내 돌아서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염 선생과 양 마마도 돌아갔고 송석석과 시만자만 문 앞에 서서 사여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마음이 허전해?”시만자가 송석석의 어깨를 툭 치며 물었고 송석석은 울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조금.”송석석과 사여묵은 혼사를 치르고 나서 계속 각자 일로 바빴지만 거의 매일 밤 함께 보냈기에 하루도 못 보는 날이 없었다.그런데 최소 두 달은 떨어져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져 송석석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두 달이 참 길게 느껴지네.”“두 달이 길어? 2년도 아니고.”시만자가 송석석의 어깨를 팔로 감싸더니 말을 이어갔다.“내가 보기엔 넌 이 두 달 동안 자유를 만끽해야 돼. 서방이 곁에 없으니 하고 싶은 건 다 해봐야지. 나중에 널 데리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좋은 데도 같이 가야겠네! 내가 왕이장한테서 들었는데 진성에 꽤 괜찮은 주막들이 있대. 한 번쯤 가보고 싶었는데 전에는 북명왕이 있어서 널 부르기 조금 미안했지. 이제 됐네. 두 달 동안 자유이니까 마음껏 즐기자고.”“무슨 주막이길래 서방이 있을 땐 날 못 부른 것이냐? 왕경루 음식보다 맛있어?”의아한 듯 묻던 송석석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됐어. 나 지금 입맛이 없어서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그런 거 아니야! 남풍관이라고 남자들이 장사를 하는 곳이야. 그러니까 우리가 남장을 해서 들어가면…”시만자가 입꼬리를 씩 올리며 말하자 송석석이 걸음을 턱 멈추었다.“뭐야? 너 가봤어? 오사형이 널 데리고 간 거야? 오사형은 지금 어디 있어?”“그자가 날 데리고 가진 않았지. 그저
사여령이 대리사를 나올 땐 허리를 쫙 편 채 눈빛이 단호하고 당당한 모습이었다. 조금 전, 사여묵이 마지막에 그에게 했던 한 마디 덕분이었다.“네가 맡은 바 임무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들었어. 조금만 더 노력하고 버티면 내가 승진을 시켜줄게.”그 순간, 사여령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지금까지 어머니를 제외하고 아무도 그의 능력을 인정해준 적이 없었으며 그를 진심으로 칭찬해준 사람도 없었다.어머니가 사여령을 칭찬하긴 하지만 그건 대부분 위로였다. 어렸을 때부터 문무가 모두 약했던 사여령에게 어머니는 항상 칭찬으로 자신감을 북돋아주었고 나중에 크면 잘하게 될 거라고 위로했다.하지만 그건 그저 위로일 뿐, 인정은 아니었다.지금, 사여령은 진정한 인정을 받았고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았으며 이 길을 계속 갈 수만 있다면 지금보다 더 노력할 자신이 있었다.사여령은 어렸을 때부터 부왕의 예쁨을 받지 못했고 통방이 낳은 자식이라며 늘 차별을 받았었다.그때 당시 부왕은 통방에게 회임하지 못하도록 약을 먹였는데 어찌된 일인지 결국 통방이 회임을 하게 되었고 부왕은 바로 통방에게 낙태약을 먹였지만 어머니의 노력으로 사여령의 친모는 결국 아이를 낳게 되었다.사여령의 어머니는 연왕이 체면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일부러 대놓고 갓난 사여령을 저택으로 데려왔고 연왕은 아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그때부터 사여령의 어머니는 연왕에게 미운 털이 박히게 된 것이다.이런저런 생각에 사여령의 발걸음도 몹시 가벼워졌다. 비록 아버지를 배신했다고 하지만, 심리적으로 부담이 되지도 않았고 미안한 마음도 들지 않았다.사여령이 미안한 건 어머니가 청목암으로 보내졌을 때 따라가지 않았던 점이었다.아버지라는 사람은 아들에게만 몹쓸 짓을 저질렀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에도 빨리 죽지 않는다고 욕설을 퍼부었다.한편, 북명황실 의사당 안의 불빛은 밤새 꺼지지 않았다.사여령한테서 들은 정보에 의하면 노주 한 곳만이 아니며 사여령의 정보도 부족한 부분이
사여령은 한참동안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주먹만 꼭 쥐고 있었고 손바닥에는 어느새 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사여령은 이제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대리사 감옥 관리자가 되고 나서 사여령은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속으로 수천 수백 번을 생각했지만 확실한 답을 얻지 못했다.나중에 진소경이 사여령의 고민을 눈치채고 사여령에게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눈앞에 닥친 일만 잘 해내면 된다고 방법을 제시했기에 사여령은 그 뒤로부터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다.여태까지 답을 얻지 못했기에 갑작스러운 사여묵의 물음에 넋을 잃은 채 앉아있던 사여령은 위엄이 넘치는 사여묵 눈빛에 머릿속이 하얘졌다.덜컥 겁이 난 사여령은 본능적으로 대답했다.“노주에 병사가 정확하게 얼마나 많은지는 모릅니다.”“넌 그걸 어떻게 알았어?”사여묵이 물었고 사여령은 노주에 병사가 있다는 사실을 얘기한 뒤 오히려 마음이 많이 진정되었다.선택을 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사여령이 솔직하게 대답했다.“연주의 왕부에 서재가 두 층으로 되어 있습니다. 전 평소에 2층에서 책을 보는데 가끔 하루 종일 2층에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아래층에서 얘기하는 걸 들은 적이 몇 번 있습니다. 바로 아래층에서 얘기하고 있었지만 서재가 너무 큰 탓에 정확하게는 듣지 못했습니다. 노주에 대한 얘기가 몇 번 나왔고 노주 외에도 옹현, 간현, 부현 그리고 나현 등 지역도 언급된 적이 있습니다. 그 외에 다른 지역도 있는데 지역명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번에는 식량을 노주에 가져가야 한다는 말도 들었습니다.”사여묵은 미간을 찌푸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뭔가 이상한데? 연왕이 여러 지역에서 병사를 키우고 있다고? 그럼 세력이 대체 얼마나 큰 거지? 병사를 키운다는 게 점포를 여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닌데 식량과 무기 공급은 문제가 없는 건가?’사여묵이 사전에 조사한 정보에 따르면 연왕에게는 그럴 만한 세력과 재력이 없었다.옹현과 간현은 그럴 가능성
북명왕 저택에는 호위병 외에 따로 비밀 호위무사를 양성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밖에서 정보를 캐내는 무술 실력이 강한 부하들이 몇 명 있긴 했지만 다들 매우 바빴기에 거의 한 달에 한번 저택으로 돌아와 얻은 정보를 보고하곤 했다.물론 정탐조도 있지만 이들은 적의 동향을 살피는 자들이기에 사적인 일로 움직일 수 없었다.비밀 호위무사를 두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 이유는 사여묵이 남강에 파견되기 전에 이미 큰 전공을 세웠고 현갑군도 거느리고 있었기에 선황제는 사여묵이 저택에 너무 많은 부병을 두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두 번째 이유는 사여묵이 남강 전쟁에 투입되고 나서 이런 부분에 신경 쓸 겨를도 없었기에, 전쟁을 승리하고 돌아왔을 땐 황제의 의심과 경계 때문에 더더욱 비밀 호위무사를 키울 수 없었다.지금 만약 황제가 대외적으로 사여묵을 노주로 정찰을 보낸다고 발표한다면 현갑군에서 병사들을 보낼 수 있지만 아무도 모르게 가는 것이기에 저택에 있는 사람들만 데리고 갈 수 있었다.“제가 같이 갈까요?”송석석의 물음에 사여묵은 피식 웃으며 송석석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괜찮소. 위험한 건 아니오. 그저 정보만 수집하는 일이라 몸을 쓸 일은 없소. 몸을 써야 한다면 우리 몇 명만 가지도 않았을 것이오. 그리고 이제 연말이라 경위부도 사건 사고가 많을 테니 이곳을 지키는 게 좋겠소.”사여묵이 말한 것처럼 연말에 경위부와 순방영은 평소보다 훨씬 일이 많았기에 송석석이 간다는 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하지만 몇 명만 보내기엔 도무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다음날,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심청화는 10일 뒤면 서원도 수업이 끝나니 며칠 앞당겨서 사여묵과 함께 떠날 수 있다고 했다.심청화가 함께 간다고 하니 송석석은 훨씬 마음이 놓였지만 그래도 이 일은 국태 부인과 상의를 해야 한다.심청화가 국태 부인에게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다들 동의했으며 출발까지 아직 3일이나 남았으니 서원 시험만 보면 된다고 했다.심청화는 당연히 진짜 행방을 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