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석석은 고청영이 정말 특별한 여자라고 생각했었다. 그런 환경에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억울함에 빠져버릴 수 있었지만 잘 살기 위해 노력해 왔기 때문이다. 고청영은 자신의 부친을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가 싫을 뿐이었다. 그녀는 송석석에게 물었다. “송 대인님, 참수를 한 후 시신을 수습해 줄 사람이 없으면 시신은 어디에 버려집니까? 아니면 그를 매달아 대중에게 보여주는 겁니까?” 그러자 송석석이 말했다. “시신을 거둬주는 가족이 없다면 대충 묻어버릴 생각입니다. 그가 역모사건의 주모나 돼야 성문에 걸어 백성들에게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녀는 담담히 말한 후 다시 묻지 않고 휘왕 곁으로 돌아갔다. “집에 아직 먹지 않은 대추 떡이 남았으니 얼른 돌아갑시다. 오래 두면 맛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자 휘왕이 물었다. “정말 보지 않을 것이냐?” 고청영은 여전히 거절했다. “나는 피를 보는 게 두려우니 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휘왕은 그녀를 총애하는 말투로 말했다. “그럼 이만 가자. 내일 널 데리고 호수로 유람하러 가마.” 그녀는 망토를 두르고 말했다. “추운데 무슨 호수입니까? 집에서 난로를 두르고 차를 끓여 마시고 양고기를 구워 먹으면 얼마나 좋은데요.” “나는 널 데리고 기분전환을 하려고 한 건데, 이 계집애가 고마운 줄도 모르고 말이야!” 휘왕은 웃으며 사여묵에게 말했다. “어쩔 수 없군. 난 평생 여자에게 사로잡혀 살 운명인가 보구나. 늙어서도 다름이 없는 걸 보니.” 사여묵은 형장에서 가벼운 분위기를 만들지 말라고 하고 싶었지만 즐거워하는 숙부를 보자 그의 흥을 깨지 않고 싶어졌다. “나도 이번 생은 여자에게 잡혀 살 운명인 것 같습다.” 그러자 휘왕이 사여묵의 어깨를 토닥이더니 말했다. “그래, 넌 어서 가서 참수하거라. 나는 청영과 함께 돌아가겠다.” 사여묵은 마지못해 말했다. “내가 참수하는 게 아니라 저 자가 참수하는 것입니다.” “알겠다.” 휘왕은 웃으며 청영을
고청란은 수육 가게를 차리지 않고 이수암으로 들어가 매입을 맡았다. 이수암은 대부분 몸이 허약한 사람들 뿐이라 장기간 채식만 할 수 없었기에 새로 집을 한 칸 짓고 이수암과 분리해서 그곳에서 육수를 끓여 그곳의 여자들에게 몸을 보양할 수 있게 했다. 고기를 먹고 싶은 사람은 그곳으로 찾아가면 되었다. 이수암의 주지스님에겐 규칙이 있었는데 이수암이나 따로 지은 집에서 모두 직접 살생을 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고청란은 매일같이 산에서 내려가 고기를 사서 짊어지고 산으로 올라왔다. 하지만, 삼일 동안만 팔았을 뿐인데, 이곳의 여자들은 이제 더 이상 고기를 먹지 않았다. 아마도 암자가 그녀들에게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주었으니 신앙심이 생겨 누구의 말도 필요 없이 스스로 고기 먹는 것을 포기했을 수도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수암에 산나물들이 많아서 보양식인 약재를 따서 국을 끓여줄 수 있었다. 그리고 비록 조잡한 물건이지만 관리들도 단삼과 인삼 같은 약재를 보내와서 여자들의 몸을 조리해 줄 수 있었다. 공주부의 사람들 중 처리할 사람은 다 처리한 상태였기에 이젠 방마마만 남았다. 태후는 특별히 지시를 내려 그녀에게 매일 사온에게 음식을 가져다주라고만 할 뿐, 시중을 들게 하지는 않았다. 종인부의 문 오른쪽 아래에는 작은 문이 있었는데 거기로 반찬을 들여보낼 수 있었다. 방마마는 가끔씩 엎드리고 반찬을 들여다주며 장공주를 볼 수 있었고, 방마마에겐 그것도 큰 은혜였다.하지만 서지도 못하고 기어서 올 수밖에 없는 장공주를 보고 있자니 방마마의 마음은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그녀 마음속의 부귀 롭고 오만하며 옷이 조금 더러워지기만 해도 내다 버리던 공주가 지금은 더럽고 악취가 진동하는 곳에 엎드려 먹고 싸니 말이다. 공주의 얼굴은 더 이상 부드럽지 않아졌다. 얼굴엔 주름이 가득했고 흰 머리카락이 검은 머리카락 사이에 섞여 있었는데 검은 머리보다 더 많아 보였다. ‘공주도 이제 늙었구나…’ 공주부의 시위장이었던 도준은 남강으로 보내져 5년 동안
전북망은 부상이 완쾌되고 나서야 정식으로 부임하게 됐다. 그는 우선 그동안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뒤이어 숙청제는 그를 불러다가 한동안 훈계와 조언을 해주면서 그에 대한 충분한 신임을 표명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감격에 겨운 전북망은 눈시울을 붉히며 어서방을 나섰다. 한편 궁 중에는 영시위부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현재 영시위부의 지휘를 맡고 있는 사람이 바로 송석석이었다. 그리하여 전북망은 이 틈을 타 대부분의 시간을 영시위부에서 보내고 있는 송석석을 만나러 가기로 했다. 한때는 부부사이였지만, 이젠 전북망이 직접 한쪽 무릎을 꿇고 송석석을 맞이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렇게 경위 부사 필명, 순방영 오진, 금군 부 사령관 왕정 그리고 어전 시위 사령관 전북망은 한 자리에 모이게 됐다. 전북망은 내심 마음이 매우 복잡했다. 송석석이 자신을 괴롭힐 거라 예상한 것과 반대로, 뜻밖에도 그녀는 담담하게 한마디만 하였다. "그만 일어나게." 이내 전북망은 눈을 깔고는 천천히 일어섰다. "감사합니다, 송 대감님." 그러자 필명이 다가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전 대감의 부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조만간 술판이라도 열어서 축하 의식을 갖는 건 어떨까요?" 필명은 어찌 됐든 한때는 전북망의 상사였기에, 전북망은 시종 그에게 존경심을 품고 있었다. "필 대감 시간이 날 때 한번 안배해 보지." "저뿐만이 아닙니다. 저희 경위에도 또 다른 형제들이 있지 않습니까?" 필명은 웃으며 말했다. "이제 보니 그렇네." 전북망은 어색하게 웃더니 이내 송석석을 흘깃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다음에 저희 집에서 연회석을 차리지요. 여러분들을 초대하겠습니다." "좋소." 왕정도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전 대감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서라도 가야 되지 않겠소? 그나저나 송 대감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군." 줄곧 송석석에 대해 불쾌한 마음을 갖고 있던 왕정은 일부러 이 틈을 타 송석석을 더욱 난처하게 만들려고 했다.
필명이 차갑게 말을 이어갔다. "나는 송 대감이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소. 그 누구든 나보다 능력이 뛰어나면 조금도 불복할 생각이 없소. 게다가 그녀는 무려 황제가 직접 임명한 사람이오. 그런데 자네가 그녀를 거역하려는 건, 곧 성지를 거역하려는 게 아니오? 어떻게 금군을 이렇게 여러 해 동안 맡아오면서도 여전히 오기를 부리고 여자를 업신여길 수가 있소? 사내로 태어났으면, 만일 정말 그 여자를 무너뜨리고 싶다면 자신의 능력으로 제대로 승부를 보는 게 좋지 않겠소?" "이제 와서 보니 그동안 정말 나한테 화가 많이 났나 보오." "자네만 성질이 있는 게 아니란 걸 명심하시오." 이내 필명은 그를 뿌리치고 돌아서 버렸다. 결국 왕정은 아무런 소득 없이 다시 영시위부 내당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고, 그는 여전히 앉아있는 오진과 전북망을 발견하고는 의자에 털썩 앉아 두 사람에게 물었다. "자네들도 모두 저 여자한테 복종하고 있는 건가? 오진 자네는 오래전부터 복종하고 있다는 걸 나도 잘 알고 있소. 저 여자의 말이라면 뭐든지 다 잘 따르더군... 그나저나 전북망 자네 또한 순순히 복종하고 있는 건가? 그래도 두 사람은 헤어진 사이잖소. 그 여자는 다시는 자네를 원하지도 않을 텐데." 그러자 오진이 그를 향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왕정, 자네는 그 입으로 더러운 말을 하지 않으면 죽는 병이라도 걸린 것이오…?!" "내 성격이 원래 이렇게 강직하오. 어떤 상황이든지 솔직히 말하려는 걸 좋아하오. 빙빙 돌려서 말했다가는 마음이 편치 않으니 말이오." "대체 누가 자네의 심기를 건드렸다고 마음이 편치 않다는 거요? 그런 식으로 자신을 높여 평가하지 마오. 강직함은 무슨, 그저 입이 독할 뿐이지." 오진은 한마디 저격을 한 후 곧장 자리를 떠났다. 요 며칠 순방영에도 많은 일이 일어난 탓에, 그는 더 이상 이곳에서 여유를 부릴 시간이 없었다. 결국 전북망과 왕정만 남은 채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매부, 신경 쓰지 말게." 뒤이어 왕정이 먼
전북망은 갓 임관하여 매일처럼 늦게까지 일에 매진하였다. 가끔은 친히 각 처의 궁궐을 순찰하러 나서곤 했지만, 후궁은 제외하였다. 순찰하지 않을 때면 어서방 앞이나 영시위부로 돌아가 교대를 기다렸다가 그날의 일지를 받았다. 교대하는 자들은 반드시 순찰 결과를 기록해야 했으며, 이변이 있으면 기록하고 별다른 일이 없어도 무사하다고 남겨야 했다.그는 유시가 되어야 궁을 떠날 수 있었지만, 항상 유시 말미에 이르러서야 궁을 나섰다. 그날도 마침 궁을 나서다 연왕을 마주쳤던 것이다. 전북망은 연왕이 새벽에 입궐해 밤에 나가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궁문이 닫히기 전에 나갈거라 생각했기에 오늘은 어찌 이리 일찍 출궁하는지 의아했다. 전북망은 다가가 절하며 인사했다."전북망, 황상을 뵈옵니다."연왕은 미소를 띠며 그를 보았다. "아직 장군이 된 것을 축하해주지 못했구나. 나는 늘 자네를 유능한 인재라고 생각해 왔노라. 이제야 빛을 발하게 된 것 같아 기쁘구나. 자네가 앞으로 더욱 번창하길 바라겠노라."전북망은 뜻밖의 칭찬에 약간 놀라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과찬이십니다."연왕은 두 손을 뒤로 깍지 끼고는 말을 이어 나갔다."전 장군, 시간이 되면 부인과 함께 연황실에 들르시게. 황후가 이 도성에 익숙하지 않은 것 같아, 내가 걱정이 많네. 시간을 내어 함께 나가본다면 매우 기뻐할 것일세." 전북망이 대답하였다."폐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만, 아내가 몸에 아이를 품고 있어 외출하기엔 불편할 듯하옵니다.""그렇다면 연황실에 들러 차라도 한잔 나누며 이야기하세. 참으로 경사가 많군. 승진하신 데 이어 곧 아버지가 되실 소식이라니, 또다시 축하의 뜻을 전하네."전북망은 연왕이 온화하다고 느끼면서도, 어쩐지 지나치게 다정한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간단히 감사만 표한 후 화제를 돌렸다."폐하께서는 오늘 왜 이렇게 일찍 출궁하셨습니까?"연왕은 여유롭게 대답했다. "모친께서 일찍이 약을 드시고 잠드셨기에 나도 물
시험 당일, 송석석은 명을 내려 현갑군에 속한 수장들, 심지어 작은 호위장이라 할지라도 당직이 아닌 자들은 모두 출석하라고 명했다. 왕정은 처음에 자신을 겨냥한 것이라 생각하고, 집에서 아내에게 송석석을 두고 한참을 험담하다가 출발하였다. 그는 ‘여자가 참으로 속이 좁구나, 현갑군이 이처럼 속좁은 여인의 손에 맡겨졌으니 앞으로 무슨 일들이 벌어질지 모를 일이다’라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경위부에 도착하고 나서야 이날이 그를 겨냥한 것이 아닌, 모든 수장들을 위한 시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번 시험이 직접 이부의 평가와 연결된다는 사실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오늘 시험에서 참패한다면 이부의 평가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고, 그로 인해 녹봉 삭감이나 강등의 위험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 나올 때 한 번 더 향을 올려 조상님의 가호를 빌어야 했음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전북망 역시 그곳에 있었으나, 그는 이번 시험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갓 부임한 터라 아직 시험을 치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전북망은 남강 전장에서 송석석의 무공을 직접 본 적이 있어 왕정이 절대로 그녀의 상대가 될 수 없음을 알았다. 다만 왕정이 그녀의 손에서 몇 수나 버틸 수 있을지는 궁금할 따름이었다.이날 송석석은 관복 대신 청색 비단 옷을 입고 머리를 청옥관으로 틀어 묶어 관료의 위엄은 덜했지만 어딘가 유연한 학자의 풍모를 풍겼다. 그녀는 돌계단에 올라서서 큰 목소리로 외쳤다.“오늘은 내가 직접 시험을 보겠소. 그대들은 모든 기량을 다해 대결하시오. 각 수장들은 오십 수를 넘기지 못하면 모두 특훈을 받을 것이고, 호위장들은 이십 수를 버티지 못하면 마찬가지로 특훈을 받을 것이오.”그녀의 목소리는 안정적으로 모든 이의 귀에 와닿았고, 현장에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는가 하면 얼굴을 찌푸리는 자도 있었다. 웃음소리를 내는 자들은 송석석의 무공을 모르는 자들이었고, 왕정과 전북망 같은 몇몇 부령들은 이십 수는 고사하고 오십 수를 버틴
그 후로 각자 차례대로 나서기 시작했고, 열두 명의 호위들은 모두 송석석의 손을 거쳐 스무 수를 채우지 못한 채, 대개 십오 수 남짓에서 패배해버리고 말았다. 이윽고 오진이 나서서 사십 수를 버텨냈지만 결국 패했다. 하지만 일어나며 공손히 절을 했는데 자신의 성과에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마지막으로 왕정의 차례가 되었다. 왕정은 그동안 송석석의 수를 주의 깊게 지켜보며 그녀의 기술을 어느 정도 파악했다고 자부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 있게 생각하기를, 오십 수를 버티는 데 문제없으리라 여겼다. 왕정은 다리 기술이 가장 뛰어났기에, 송석석의 다리 기술이 상대적으로 약함을 깨닫고 내심 기뻐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하반신을 집중적으로 노린다면 승산이 있으리라 다짐하였다. 왕정은 몸을 약간 숙이고 주먹을 쥐며 가볍게 발을 굴리며 다리 근육을 풀고는 말하였다. “제 차례군요.” 그러자 송석석은 살짝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답하였다. “그래, 너의 차례다.” 어째서인지 그녀의 미소를 보자마자 왕정은 마음속에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이 일었다. 그녀가 무언가 대단한 기술을 숨기고 자신을 상대로 펼칠 듯한 불안감이 드는 것이었다. “첫 수는 역시 내주도록 하마” 송석석이 말하였다. 그녀는 많은 이들과 싸운 후에도 피곤한 기색 없이 여전히 기운이 넘쳐 보였다. 왕정은 그녀가 준비 태세를 취하는 모습을 보며 첫 수를 허투루 내지르며 발로 찼다. 이 발차기는 본래 정통으로 차는 동작이었으나, 도중에 하단을 노리다 갑작스레 턱을 향하도록 변했다. 대개 상대는 복부나 가슴 부위를 방어할 터이지만, 송석석은 한눈에 이 속임수를 꿰뚫어 보았다. 그녀는 양 팔꿈치를 앞으로 모아 강하게 충격을 가하여 왕정을 튕겨 내었다. 왕정은 다급히 물러나며 공중에서 몸을 한 바퀴 돌려 비로소 자세를 안정시키려 하였으나, 이미 송석석의 연속적인 발차기가 쏟아져 내린 뒤였다. 왕정은 허둥지둥 피하고 막기 위해 되려 불안하게 자세를 잡아 버렸다. 그에 반면 송석석은 안
시만자는 미소를 지으며 몸을 날려 송석석에게 덤벼들었다. 송석석은 몸을 옆으로 돌려 그녀의 공격을 거뜬히 피해냈다. 그런 뒤, 시만자의 팔을 잡아당겼다. 이에 맞서서, 시만자는 송석석의 손을 빠져나가며 허공으로 솟아오르는 듯한 몸짓으로 대응했다.두 사람은 그렇게 백여 차례나 대결을 벌였고, 여전히 승부를 가리기 어려웠다. 그들의 동작은 너무나도 빠르고 강렬하여 사람들이 쉽게 따라잡기 어려웠고, 주먹과 발길질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만이 사방에울려 퍼졌다. 몇 차례 발길질이 옆의 푸른 돌바닥을 가격한 탓에 돌바닥은 순식간에 산산이 부서졌다.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이들의 치열한 대결을 보고 있던 이들은 방금까지 자신들이 치른 무술 시험이 그야말로 겉치레에 불과했음을 깨달았다. 송석석은 사실 마음만 먹으면 몇 수 만에 그들을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백여 차례의 격전 끝에, 두 사람은 서로 물러나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오랜 시간 싸웠음에도 그들은 단지 머리칼만 살짝 흐트러졌을 뿐이었다.전북망은 이 장면을 지켜보며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남강 전장에서 그는 송석석과 시만자의 위력을 목격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전쟁 중이라 힘과 민첩성, 속도만으로 승부가 갈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둘의 대결은 진정한 실력과 기량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이들처럼 빠르고 날렵하게 싸우는 여인을 그는 지금껏 본 적이 없었다.이 여인들은 그야말로 장군 중의 장군이었고, 자신이 그런 보배를 잃었다는 사실에 마음이 쓰라렸다.그는 출정 후 그녀에게 건넨 말이 떠올랐고,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가 그 말을 어떻게 입 밖으로 꺼낼 수 있었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그때 필명이 먼저 반응하여 앞으로 나서더니 무릎을 꿇고 말하였다. “제자 필명. 스승님께 인사 올립니다.”뒤이어 오진 역시 잠시 멈칫하다가 빠르게 무릎을 꿇었다. “제자 오진. 스승님께 절을 올립니다.”두 사람은 단순히 무술을 배우기 위해 고용된 무술 교사의
송석석은 차분하게 질서를 잘 정돈한 뒤, 학생들과 부모님들을 저택으로 돌려보냈고 비밀을 지켜달라는 얘기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 일은 언젠가 소문이 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그러고는 홍현에게 청작과 경조부의 사람을 불러오라고 했다.이 범인은 약을 먹은 게 확실하기에 반드시 매달아서 심문해야 하며 청작을 통해 무슨 약을 먹었는지 확실하게 알아내야 한다.한편, 도망친 범인들도 오진에게 전부 잡혀왔고 그들은 묶여 있는 중년 남성보다 정신이 훨씬 멀쩡해 보였지만 송석석과 홍현을 쳐다보는 눈빛은 여전히 야릇하고 이글거렸다.송석석은 안여옥을 살포시 안아주었고, 이제서야 평정심을 되찾은 안여옥이 되레 송석석을 위로했다.“괜찮아요. 저 괜찮습니다.”“왜 그런 말을 했어요? 선생님은 지금 자신을 망가트린 거라고요.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요?”국태 부인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얼굴이 창백한 안여옥은 가까스로 미소를 지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국태 부인께서 제 걱정을 이리 하시니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 애초부터 혼인할 생각이 없었고 저에게 있어서 명성은 그저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이제 그 짐을 벗어 던졌으니 차라리 잘 된 일이지요.”“그렇지만 모든 화를 혼자서 떠안겠다고 하시니… 사람들이 선생님을 어찌 얘기하고 다닐지 걱정됩니다. 선생님 조부께도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할지…”국태 부인은 안씨 어르신과 오랜 인연을 이어왔다. 이번에 안여옥을 여학 선생으로 데리고 올 때에도 안여옥을 잘 보살피겠다고 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안 그래도 몸이 허약하신 안씨 어르신이 이 얘기를 들으면 충격에 쓰러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다들 안여옥을 위로하기 바빴고 안여옥은 많은 사람들에게 걱정을 끼쳤다는 생각에 얼른 웃으면서 말했다.“전 정말 괜찮습니다. 그리 큰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사람이 살면서 더한 일도 경험하게 될 텐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안여옥은 연신 괜찮다고 했지만 사람
이때, 송석석이 서원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조금 전 밖에 있을 때부터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있었다.송석석이 나타나자 부인들은 우르르 몰려가 송석석에게 이제 어떻게 해야 하냐고 닥달했다. 감히 대놓고 따져 묻지는 못했지만 송석석에게 합리적인 설명을 내놓으라는 뜻으로 말하고 있었다.송석석은 겉으로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분통이 터졌다. 여학 마지막 날에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오늘 서원 대문이 열려 있었던 이유는 학생들과 데리러 온 가문 사람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나올 때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인데 범인들이 이 틈을 노리고 학교 안으로 들이닥칠 줄은 몰랐다.이 일은 분명 여학을 겨냥해서 벌인 일이었다.“이 일은 제가 확실하게 처리하겠습니다.”송석석의 말에 부모들이 너도나도 한 마디씩 보탰다.“왕비님,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실 겁니까?”“그러게요.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였고 쳐다보는 눈이 이렇게 많은데 이 많은 입들을 다 단속할 수 있습니까? 소문이 이상하게 퍼지면 없는 사실도 있는 일처럼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여학에 호위병을 좀 많이 세워둬야 하는 거 아닙니까?”한편, 안여옥은 송석석이 궁지로 몰리자 얼른 눈물을 닦은 뒤, 벌떡 일어나 큰소리로 말했다.“여러분, 걱정하시 마십시오. 한 명도 다친 학생이 없습니다. 저 범인은 그저 저를 잠깐 껴안았을 뿐이지 다른 학생을 해치지 못했습니다.”안여옥의 말에 현장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고 다들 안여옥이 이 일을 이렇게 대놓고 얘기할 줄은 몰랐다.범인이 안여옥을 껴안은 게 사실이라고 해도 이를 숨겨야 하는데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얘기한단 말인가?그러다가 소문이라도 나면 안여옥은 평생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살게 될 수도 있다.이때, 정신을 번쩍 차린 국태 부인이 다급하게 부인했다.“선생님은 범인에게 당하지 않았습니다. 함부로 그런 얘기하지 마세요. 범인은 선생님에게 손을 댈 기회가 없었습니다.”하지만 안여옥은 국태 부인의 말을 따르지 않았
서원에 비명소리가 점점 더 커졌고 홍현은 왕지아를 달랜 뒤 바로 서원으로 뛰어갔다.“함부로 돌아다니지 말고 잘 숨어있으렴.”한편, 서원 안에서 너무 놀란 국태 부인과 정 부인은 재빨리 딸들을 등 뒤로 숨겼고 안여옥과 무씨 아가씨는 손에 긴 몽둥이를 들고 덜덜 떨면서 들이닥친 남자들을 향해 휘둘렀다.두 선생님은 혹시라도 뒤에 있는 여학생들이 다칠까 봐 최선을 다해 막았지만 힘이 부족했다.이때, 한 남자가 주창우를 향해 덮쳤고 화들짝 놀란 주창우가 비명소리를 지르자 안여옥은 몽둥이로 남자를 내리쳤다. 하지만 남자는 겁을 먹긴 커녕, 되레 사악하게 웃으며 안여옥을 향해 달려갔다.홍현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안여옥은 남자에게 강제로 안겨 있었고, 그 남자는 심지어 입을 맞추려고 했다. 겁에 질린 안여옥은 미친 듯이 발버둥쳤지만 힘으로는 이길 수 없어, 결국 손톱으로 남자의 얼굴을 할퀴었다.미간을 확 찌푸린 홍현은 바로 달려가 한 손으로 남자의 등을 확 잡더니 그를 바닥에 내리꽂았고 발로 남자의 배를 힘껏 짓밟았다.극심한 고통에 남자는 바닥을 굴러다녔고 홍현은 무씨 아가씨 손에서 몽둥이를 낚아채더니 남자들을 향해 무섭게 공격했다.안여옥을 침범하려고 했던 남자는 홍현이 휘두른 몽둥이에 다리뼈가 부러졌고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바로 이때, 딸을 데리러 온 가문들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어떻게 된 거예요? 왜 학교 안에 남자들이 들이닥친 겁니까?”서원 안으로 몰려든 사람들은 바닥에 누워 비명을 지르는 남자를 쳐다보았고 여학생들은 너무 큰 충격에 다들 넋이 나간 상태였다.그러다가 부모님을 발견한 여학생들은 엉엉 울면서 각자 가족의 품으로 달려갔다.“어머니, 아버지, 너무 무서워요! 저 남자들이 갑자기 서원으로 뛰어들어와서 안 선생님을 강제로 안았어요.”사람들은 이내 안여옥에게 고개를 돌렸다. 머리가 헝클어진 안여옥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무씨 아가씨 품에서 온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경험이 많은 국태 부
송석석은 이 사실을 염 선생에게 알리자, 염 선생은 흠칫하다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사국 사람들이 어떻게 진성에 진입하게 된 거죠? 심지어 이곳에서 살고 있다니.”송석석이 대답했다.“그래서 나머지 남풍관도 확실하게 조사해봐야 할 것 같아. 그리고 남풍관 주인장도 만나봐야지. 주인이 사국 사람들을 거둬서 남풍관에서 장사를 하는 거니까 아무것도 모르지는 않을 거야.”사국 사람들이 언제 진성에 왔고 누가 데리고 왔으며 무슨 목적으로 온 건지 확실하게 알아내야 했다. 송석석은 나머지 남풍관을 직접 방문해서 조사할 생각이었고, 시만자와 왕이장도 함께 했다.그렇게 며칠 동안 송석석은 남풍관 다섯 군데를 돌아다녔다. 그중 세 군데에 사국 사람들이 있었고 총 열다섯 명이었다.호흡 방식이나 걸음걸이로 보면 열다섯 명 전부 무술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확실히 사국 사람들 외모는 아니었으며 보통 몸매의 남강 사람들 같았다.보아하니 신경 써서 고른 듯했다.불빛이 어두운 환경에서는 사국 사람들을 알아보기 어려웠으며 더군다나 그들은 상국 말을 유창하게 쓰고 있었기에 아무도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다.그리고 세 가게의 주인은 동일인이었으며 그자가 바로 광릉후의 향봉천이다.상의 끝에 송석석 일행은 섣불리 움직이는 대신 사람들을 시켜 몰래 남풍관 가게들을 지켜보라고 했으며 그들의 진정한 목적을 알아내려 했다.그리고 염 선생은 광릉후를 다시 한번 제대로 조사하기 시작했다.광릉후의 향봉천은 남색을 즐기는 자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자를 싫어하지는 않았다. 평범한 사내들과 똑같이 혼인하여 아이도 낳고 첩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향회옥이 바로 향봉천의 막내딸이었다. 사람들은 새로운 사실에 조금 놀란 눈치였다. 평소에 광릉후 사람들의 행실이 조용하고 눈에 잘 띄지도 않았으며 향회옥이 가끔 제자예와 함께 여학에서 문제를 일으킨 것 외에는 그 어떤 추문도 없었다.하지만 그렇게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해 보이는 광릉후에서 남풍관을 세 군데나 운영하고 있는 것도 모자
송석석은 시만자를 의자에 앉히며 대답했다.“오사형이 아주 고맙게 생각하겠네. 하지만 난 맞추고 싶지 않아. 그래서 누굴 봤는데?”“빅토르! 그래, 맞아! 빅토르를 봤어! 그것도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의 빅토르를 봤지!”시만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고 송석석은 이마를 꾹꾹 누르며 다시 물었다.“여러 명의 빅토르를 본 거야 아니면 빅토르를 닮은 사람이 여러 명 있었던 거야? 너 대체 술을 얼마나 마셨길래 이렇게 취한 거야?”“빅토르… 아니야. 빅토르보다 젊었어.”시만자가 머리를 휘청거리며 대답했고 송석석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빅토르를 닮았다는 거지? 그럼 사국 사람들이네?”사국과 상국은 아직 길이 통하지 않았기에 사국 사람들이 상국에 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사국 사람들이 진성에 나타난 것도 모자라 진성에서 살고 있다니.이때, 시만자가 꼬인 혀로 힘겹게 대답했다.“맞… 맞아. 사국 사람들이야. 그런데 어떻게 진성에 사국 사람들이 살고 있는 거지? 남풍관에 숨어 있었는데 왜 남풍관에 갔던 손님들은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않았던 걸까? 내가 그 사람들을 봤다는 건 다른 손님들도 다 봤다는 뜻인데.”송석석은 조금 불안했다. 남풍관을 방문한 손님들은 절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남풍관에 갔었다고 얘기하지 않을텐데 말이다. 하지만 지금 가장 큰 문제는 사국 사람들이 언제 진성에 몰래 들어왔냐는 것이다. 그들은 남풍관에 숨어 있었기에 아무도 그들을 발견하지 못했다.진성에 남풍관이 몇 개가 있지만 전부 비밀리에 운영되고 있었다. 선황제가 확실한 금지령을 내렸기에 엄격하게 조사했지만 숙청제가 황위에 오르고 나서 더 이상 이런 일에 신경을 크게 쓰지 않았다. 물론 엄하게 다루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권장하지도 않았다. 분위기는 선황제 때보다 상대적으로 자유로웠지만 남색은 여전히 이 나라에서 용납되지 않기에 아무도 대놓고 얘기하는 사람은 없었다.언급하는 사람이 없어서 아무도 주의 깊게 지켜보지 않았다.한편, 시만자는 털썩 눕더니 바로 잠이
송석석은 사여묵에게 항상 안전에 조심하고, 스쳐가는 여인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말라며 신신당부했다.사여묵은 질투를 하는 듯한 송석석의 모습에 기분이 좋아서 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내 절대 눈길도 안 줄 테니 걱정하지 마시오.”조금 뒤, 사여묵은 몽동이와 장대성을 데리고 길을 떠났고 혜 태비는 아들의 뒷모습을 몇 번 쳐다보고는 이내 돌아서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염 선생과 양 마마도 돌아갔고 송석석과 시만자만 문 앞에 서서 사여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마음이 허전해?”시만자가 송석석의 어깨를 툭 치며 물었고 송석석은 울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조금.”송석석과 사여묵은 혼사를 치르고 나서 계속 각자 일로 바빴지만 거의 매일 밤 함께 보냈기에 하루도 못 보는 날이 없었다.그런데 최소 두 달은 떨어져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져 송석석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두 달이 참 길게 느껴지네.”“두 달이 길어? 2년도 아니고.”시만자가 송석석의 어깨를 팔로 감싸더니 말을 이어갔다.“내가 보기엔 넌 이 두 달 동안 자유를 만끽해야 돼. 서방이 곁에 없으니 하고 싶은 건 다 해봐야지. 나중에 널 데리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좋은 데도 같이 가야겠네! 내가 왕이장한테서 들었는데 진성에 꽤 괜찮은 주막들이 있대. 한 번쯤 가보고 싶었는데 전에는 북명왕이 있어서 널 부르기 조금 미안했지. 이제 됐네. 두 달 동안 자유이니까 마음껏 즐기자고.”“무슨 주막이길래 서방이 있을 땐 날 못 부른 것이냐? 왕경루 음식보다 맛있어?”의아한 듯 묻던 송석석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됐어. 나 지금 입맛이 없어서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그런 거 아니야! 남풍관이라고 남자들이 장사를 하는 곳이야. 그러니까 우리가 남장을 해서 들어가면…”시만자가 입꼬리를 씩 올리며 말하자 송석석이 걸음을 턱 멈추었다.“뭐야? 너 가봤어? 오사형이 널 데리고 간 거야? 오사형은 지금 어디 있어?”“그자가 날 데리고 가진 않았지. 그저
사여령이 대리사를 나올 땐 허리를 쫙 편 채 눈빛이 단호하고 당당한 모습이었다. 조금 전, 사여묵이 마지막에 그에게 했던 한 마디 덕분이었다.“네가 맡은 바 임무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들었어. 조금만 더 노력하고 버티면 내가 승진을 시켜줄게.”그 순간, 사여령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지금까지 어머니를 제외하고 아무도 그의 능력을 인정해준 적이 없었으며 그를 진심으로 칭찬해준 사람도 없었다.어머니가 사여령을 칭찬하긴 하지만 그건 대부분 위로였다. 어렸을 때부터 문무가 모두 약했던 사여령에게 어머니는 항상 칭찬으로 자신감을 북돋아주었고 나중에 크면 잘하게 될 거라고 위로했다.하지만 그건 그저 위로일 뿐, 인정은 아니었다.지금, 사여령은 진정한 인정을 받았고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았으며 이 길을 계속 갈 수만 있다면 지금보다 더 노력할 자신이 있었다.사여령은 어렸을 때부터 부왕의 예쁨을 받지 못했고 통방이 낳은 자식이라며 늘 차별을 받았었다.그때 당시 부왕은 통방에게 회임하지 못하도록 약을 먹였는데 어찌된 일인지 결국 통방이 회임을 하게 되었고 부왕은 바로 통방에게 낙태약을 먹였지만 어머니의 노력으로 사여령의 친모는 결국 아이를 낳게 되었다.사여령의 어머니는 연왕이 체면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일부러 대놓고 갓난 사여령을 저택으로 데려왔고 연왕은 아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그때부터 사여령의 어머니는 연왕에게 미운 털이 박히게 된 것이다.이런저런 생각에 사여령의 발걸음도 몹시 가벼워졌다. 비록 아버지를 배신했다고 하지만, 심리적으로 부담이 되지도 않았고 미안한 마음도 들지 않았다.사여령이 미안한 건 어머니가 청목암으로 보내졌을 때 따라가지 않았던 점이었다.아버지라는 사람은 아들에게만 몹쓸 짓을 저질렀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에도 빨리 죽지 않는다고 욕설을 퍼부었다.한편, 북명황실 의사당 안의 불빛은 밤새 꺼지지 않았다.사여령한테서 들은 정보에 의하면 노주 한 곳만이 아니며 사여령의 정보도 부족한 부분이
사여령은 한참동안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주먹만 꼭 쥐고 있었고 손바닥에는 어느새 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사여령은 이제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대리사 감옥 관리자가 되고 나서 사여령은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속으로 수천 수백 번을 생각했지만 확실한 답을 얻지 못했다.나중에 진소경이 사여령의 고민을 눈치채고 사여령에게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눈앞에 닥친 일만 잘 해내면 된다고 방법을 제시했기에 사여령은 그 뒤로부터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다.여태까지 답을 얻지 못했기에 갑작스러운 사여묵의 물음에 넋을 잃은 채 앉아있던 사여령은 위엄이 넘치는 사여묵 눈빛에 머릿속이 하얘졌다.덜컥 겁이 난 사여령은 본능적으로 대답했다.“노주에 병사가 정확하게 얼마나 많은지는 모릅니다.”“넌 그걸 어떻게 알았어?”사여묵이 물었고 사여령은 노주에 병사가 있다는 사실을 얘기한 뒤 오히려 마음이 많이 진정되었다.선택을 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사여령이 솔직하게 대답했다.“연주의 왕부에 서재가 두 층으로 되어 있습니다. 전 평소에 2층에서 책을 보는데 가끔 하루 종일 2층에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아래층에서 얘기하는 걸 들은 적이 몇 번 있습니다. 바로 아래층에서 얘기하고 있었지만 서재가 너무 큰 탓에 정확하게는 듣지 못했습니다. 노주에 대한 얘기가 몇 번 나왔고 노주 외에도 옹현, 간현, 부현 그리고 나현 등 지역도 언급된 적이 있습니다. 그 외에 다른 지역도 있는데 지역명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번에는 식량을 노주에 가져가야 한다는 말도 들었습니다.”사여묵은 미간을 찌푸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뭔가 이상한데? 연왕이 여러 지역에서 병사를 키우고 있다고? 그럼 세력이 대체 얼마나 큰 거지? 병사를 키운다는 게 점포를 여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닌데 식량과 무기 공급은 문제가 없는 건가?’사여묵이 사전에 조사한 정보에 따르면 연왕에게는 그럴 만한 세력과 재력이 없었다.옹현과 간현은 그럴 가능성
북명왕 저택에는 호위병 외에 따로 비밀 호위무사를 양성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밖에서 정보를 캐내는 무술 실력이 강한 부하들이 몇 명 있긴 했지만 다들 매우 바빴기에 거의 한 달에 한번 저택으로 돌아와 얻은 정보를 보고하곤 했다.물론 정탐조도 있지만 이들은 적의 동향을 살피는 자들이기에 사적인 일로 움직일 수 없었다.비밀 호위무사를 두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 이유는 사여묵이 남강에 파견되기 전에 이미 큰 전공을 세웠고 현갑군도 거느리고 있었기에 선황제는 사여묵이 저택에 너무 많은 부병을 두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두 번째 이유는 사여묵이 남강 전쟁에 투입되고 나서 이런 부분에 신경 쓸 겨를도 없었기에, 전쟁을 승리하고 돌아왔을 땐 황제의 의심과 경계 때문에 더더욱 비밀 호위무사를 키울 수 없었다.지금 만약 황제가 대외적으로 사여묵을 노주로 정찰을 보낸다고 발표한다면 현갑군에서 병사들을 보낼 수 있지만 아무도 모르게 가는 것이기에 저택에 있는 사람들만 데리고 갈 수 있었다.“제가 같이 갈까요?”송석석의 물음에 사여묵은 피식 웃으며 송석석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괜찮소. 위험한 건 아니오. 그저 정보만 수집하는 일이라 몸을 쓸 일은 없소. 몸을 써야 한다면 우리 몇 명만 가지도 않았을 것이오. 그리고 이제 연말이라 경위부도 사건 사고가 많을 테니 이곳을 지키는 게 좋겠소.”사여묵이 말한 것처럼 연말에 경위부와 순방영은 평소보다 훨씬 일이 많았기에 송석석이 간다는 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하지만 몇 명만 보내기엔 도무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다음날,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심청화는 10일 뒤면 서원도 수업이 끝나니 며칠 앞당겨서 사여묵과 함께 떠날 수 있다고 했다.심청화가 함께 간다고 하니 송석석은 훨씬 마음이 놓였지만 그래도 이 일은 국태 부인과 상의를 해야 한다.심청화가 국태 부인에게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다들 동의했으며 출발까지 아직 3일이나 남았으니 서원 시험만 보면 된다고 했다.심청화는 당연히 진짜 행방을 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