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고부진은 참수를 앞두고 있었고, 참수관은 사여묵이다. 경위들은 선으로 형장을 보호하며 질서를 유지했다. 사여묵은 원래 송석석을 오지 못하게 하려고 했다. 고부진이 괘씸하긴 하지만 주범도 아니고 게다가 목을 베는 장면은 너무 잔인했기에 송석석에게 보여주기 싫었다. 하지만 송석석은 그보다 더 잔인한 상황까지 목격한 사람이었다. 고부진이 주범은 아니지만 공리심에 눈이 멀어 악인을 도왔을 뿐만 아니라 그의 나약함 때문에 많은 사람이 상처를 받았으니 그는 죽어 마땅한 죄인이었다. 그래서 송석석은 무조건 가봐야 한다고 했다. 아침 일찍부터 형장 밖은 사람들로 붐볐다. 정오에 형벌을 집행하기 때문에 경위는 아침 일찍 형장에 도착해 질서를 유지하지 못해서 형장 일대가 소란스러웠다. 심지어 가게의 상인들도 밖에서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겁 많은 백성들은 구경하러 오지 않았다. 그리고 아이들도 구경하는 것을 금지했는데 금지하지 않는다고 해도 부모는 아이들을 이런 곳으로 데려오지 않을 것이었다. 그렇지만 세상 어디에나 구경꾼은 부족하지 않았다. 특히 고부진의 신분은 많은 사람의 주목을 이끌었다. 왜냐하면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참수를 당하는 건 흔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형장은 늘 가을쯤에 사람들로 붐볐다. 사형수들이 가을쯤에 사형을 집행하기 때문이었다. 사시가 되자 필명은 경위를 데리고 와서 질서를 유지했고 형장 주변에 줄을 당겨 경계를 그어 백성들을 모두 선 밖으로 물러나도록 했다. 고부진은 아직 대리사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형장에 가기 전에 대리사에서는 그에게 푸짐한 식사를 대접하고 배불리 먹인 후에 출발할 것이었다. 고무진은 처음엔 두렵지 않았지만 술과 음식이 나오자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먹지도 않고 말도 하지 않았다. 대리사의 허평안이 직접 그를 배웅하러 와서 말했다. “드십시오. 배불리 먹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고 하지 않습니까?”허평안의 말에 고부진은 어리둥절했다. 곧이어 그는 부들부들 떨며 젓가락을 들었다가 내려놓고
고부진은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내 뜻은 아니었습니다. 저에게 다시 한번 선택할 기회를 준다면 절대로 이러지 않을 것입니다. 고후부가 몰락하긴 했지만 기반이 있으니 무너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는 거인 출신이라 진사에 응시할 수도 있으니 내가 갈 수 있는 길은 하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내가 왜 그렇게 어리석은 짓을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원래는 앞길이 창창했는데, 현량하고 숙덕 한 여자를 부인으로 맞아들이고 첩을 두 세명 들여 아들딸을 서너 명 낳으면 가문을 더욱 번영할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내가 지름길이라고 생각했던 게 죽음 길이었을 줄이야.” 그는 충격으로 들고 있던 젓가락을 떨구고 다시 몸을 부들부들 떨며 울었다. 허평안은 담담하게 젓가락을 주워 주며 말했다. “지금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행동이야말로 가장 실질적인 것이지요. 아는 것을 모두 말하면 일말의 희망이 있을 것이고 말하지 않으면 당신은 죽을 것입니다.” 고부진은 얼굴을 가리고 울다가 손을 놓고 소매로 눈물 콧물을 닦아냈다. 고문을 받은 후 그의 동작은 굼뜨고 둔했고 등은 구부려졌다. “난 이미 죽음길에 들어섰습니다. 더 이상 기회는 없습니다.” 허평안은 오랫동안 공문에서 지내면서 각양각색의 악당들을 만나왔다. 많은 사람들이 죽기 직전에 후회하고 모든 것을 자백하며 살 수 있는 기회를 얻으려고 했다. 하지만 고부진은 그런 악당 같지는 않았다. 그는 이성을 잃지 않고 참수형에 직면해서도 이해득실을 따졌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애초에 왜 사운의 이용을 피하지 못했을까? 결국엔 모두 이욕에 눈이 멀어서 그랬던 것이 분명하다. 처음엔 반항했을 수도 있지만 그다음에는 밀당을 하다가 결국 배후에게 조종을 당했을 것이다. 그는 범인이 사온이라고 생각했고 자신이 피해자처럼 행동하면 죄를 면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다. 허평안도 더 이상 그에게 말을 걸지 않고 조용히 기다렸다.나중엔 고부마도 울음을 그치고 고개를 들어 그에게 물었다.
형장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호송차에서 끌려 나와 형장 한가운데로 끌려가 무릎을 꿇렸다. 이때 덩치 큰 사형수가 칼을 들고 그의 곁에 서 있었는데 칼이 빛을 반사하는 것을 본 고부진은 놀라서 몸이 나른 해져 무릎도 제대로 꿇지 못하고 구조를 청하는 눈빛으로 구경하는 백성들을 바라보았다. 형장은 시끌벅적했지만 그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자신의 심장 소리만 들렸다. 그는 자신의 심장이 북을 두드리는 소리 같았고 당장이라도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는 뒤에 있는 참수관인 사여묵을 보지 못하고 그의 소리만 어렴풋이 들리는 것 같아 뒤를 돌아보려 했지만 그의 뒤엔 팻말이 세로로 묶여 있어 고개를 돌릴 수 없고 사형수가 질색을 하는 표정으로 코를 틀어막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제야 자신이 대소변을 실금 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두려움이 순식간에 독사처럼 그의 몸속 살갗을 뚫고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는 너무 두려웠다. 이때 군중 속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고, 그는 기쁜 나머지 쉰 목소리로 외쳤다. “청영아, 청영아…!” 휘왕은 고청영과 함께 줄 밖에 서 있었고, 고청영은 검은 포도알 같은 눈망울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시선은 마주쳤지만 고청영은 부친의 공포와 기쁨을 전혀 느끼지 못한 듯 아무런 감정도 없어 보였다. 이때 휘왕이 옆에 있는 구청영에게 말했다. “먹을 것 좀 갖다 주겠느냐?”그러자 고청영이 말했다.“이미 배불리 드셨을 것입니다.”휘왕이 말했다.“그래, 대리사에서는 참수를 하는 죄인에게 배불리 음식을 먹이긴 하지. 그런데 저 자에게 따로 할 말은 없느냐?”그러자 고청영이 잠시 생각하더니 물었다.“내가 올라가도 됩니까?”“그래, 마지막으로 작별인사 정도는 할 수 있을 거야.”그러자 고청영이 말했다.“한가지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가자, 내가 널 데리고 참수관을 만나러 가마. 참수관이 내 조카라 내 부탁이라면 들어줄 것이다. 그는 나에게서 노인네 냄새가 난다고 하지 않으니 말이다.”“나도 당신이 늙었다고만 했지,
송석석은 고청영이 정말 특별한 여자라고 생각했었다. 그런 환경에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억울함에 빠져버릴 수 있었지만 잘 살기 위해 노력해 왔기 때문이다. 고청영은 자신의 부친을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가 싫을 뿐이었다. 그녀는 송석석에게 물었다. “송 대인님, 참수를 한 후 시신을 수습해 줄 사람이 없으면 시신은 어디에 버려집니까? 아니면 그를 매달아 대중에게 보여주는 겁니까?” 그러자 송석석이 말했다. “시신을 거둬주는 가족이 없다면 대충 묻어버릴 생각입니다. 그가 역모사건의 주모나 돼야 성문에 걸어 백성들에게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녀는 담담히 말한 후 다시 묻지 않고 휘왕 곁으로 돌아갔다. “집에 아직 먹지 않은 대추 떡이 남았으니 얼른 돌아갑시다. 오래 두면 맛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자 휘왕이 물었다. “정말 보지 않을 것이냐?” 고청영은 여전히 거절했다. “나는 피를 보는 게 두려우니 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휘왕은 그녀를 총애하는 말투로 말했다. “그럼 이만 가자. 내일 널 데리고 호수로 유람하러 가마.” 그녀는 망토를 두르고 말했다. “추운데 무슨 호수입니까? 집에서 난로를 두르고 차를 끓여 마시고 양고기를 구워 먹으면 얼마나 좋은데요.” “나는 널 데리고 기분전환을 하려고 한 건데, 이 계집애가 고마운 줄도 모르고 말이야!” 휘왕은 웃으며 사여묵에게 말했다. “어쩔 수 없군. 난 평생 여자에게 사로잡혀 살 운명인가 보구나. 늙어서도 다름이 없는 걸 보니.” 사여묵은 형장에서 가벼운 분위기를 만들지 말라고 하고 싶었지만 즐거워하는 숙부를 보자 그의 흥을 깨지 않고 싶어졌다. “나도 이번 생은 여자에게 잡혀 살 운명인 것 같습다.” 그러자 휘왕이 사여묵의 어깨를 토닥이더니 말했다. “그래, 넌 어서 가서 참수하거라. 나는 청영과 함께 돌아가겠다.” 사여묵은 마지못해 말했다. “내가 참수하는 게 아니라 저 자가 참수하는 것입니다.” “알겠다.” 휘왕은 웃으며 청영을
고청란은 수육 가게를 차리지 않고 이수암으로 들어가 매입을 맡았다. 이수암은 대부분 몸이 허약한 사람들 뿐이라 장기간 채식만 할 수 없었기에 새로 집을 한 칸 짓고 이수암과 분리해서 그곳에서 육수를 끓여 그곳의 여자들에게 몸을 보양할 수 있게 했다. 고기를 먹고 싶은 사람은 그곳으로 찾아가면 되었다. 이수암의 주지스님에겐 규칙이 있었는데 이수암이나 따로 지은 집에서 모두 직접 살생을 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고청란은 매일같이 산에서 내려가 고기를 사서 짊어지고 산으로 올라왔다. 하지만, 삼일 동안만 팔았을 뿐인데, 이곳의 여자들은 이제 더 이상 고기를 먹지 않았다. 아마도 암자가 그녀들에게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주었으니 신앙심이 생겨 누구의 말도 필요 없이 스스로 고기 먹는 것을 포기했을 수도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수암에 산나물들이 많아서 보양식인 약재를 따서 국을 끓여줄 수 있었다. 그리고 비록 조잡한 물건이지만 관리들도 단삼과 인삼 같은 약재를 보내와서 여자들의 몸을 조리해 줄 수 있었다. 공주부의 사람들 중 처리할 사람은 다 처리한 상태였기에 이젠 방마마만 남았다. 태후는 특별히 지시를 내려 그녀에게 매일 사온에게 음식을 가져다주라고만 할 뿐, 시중을 들게 하지는 않았다. 종인부의 문 오른쪽 아래에는 작은 문이 있었는데 거기로 반찬을 들여보낼 수 있었다. 방마마는 가끔씩 엎드리고 반찬을 들여다주며 장공주를 볼 수 있었고, 방마마에겐 그것도 큰 은혜였다.하지만 서지도 못하고 기어서 올 수밖에 없는 장공주를 보고 있자니 방마마의 마음은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그녀 마음속의 부귀 롭고 오만하며 옷이 조금 더러워지기만 해도 내다 버리던 공주가 지금은 더럽고 악취가 진동하는 곳에 엎드려 먹고 싸니 말이다. 공주의 얼굴은 더 이상 부드럽지 않아졌다. 얼굴엔 주름이 가득했고 흰 머리카락이 검은 머리카락 사이에 섞여 있었는데 검은 머리보다 더 많아 보였다. ‘공주도 이제 늙었구나…’ 공주부의 시위장이었던 도준은 남강으로 보내져 5년 동안
전북망은 부상이 완쾌되고 나서야 정식으로 부임하게 됐다. 그는 우선 그동안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뒤이어 숙청제는 그를 불러다가 한동안 훈계와 조언을 해주면서 그에 대한 충분한 신임을 표명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감격에 겨운 전북망은 눈시울을 붉히며 어서방을 나섰다. 한편 궁 중에는 영시위부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현재 영시위부의 지휘를 맡고 있는 사람이 바로 송석석이었다. 그리하여 전북망은 이 틈을 타 대부분의 시간을 영시위부에서 보내고 있는 송석석을 만나러 가기로 했다. 한때는 부부사이였지만, 이젠 전북망이 직접 한쪽 무릎을 꿇고 송석석을 맞이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렇게 경위 부사 필명, 순방영 오진, 금군 부 사령관 왕정 그리고 어전 시위 사령관 전북망은 한 자리에 모이게 됐다. 전북망은 내심 마음이 매우 복잡했다. 송석석이 자신을 괴롭힐 거라 예상한 것과 반대로, 뜻밖에도 그녀는 담담하게 한마디만 하였다. "그만 일어나게." 이내 전북망은 눈을 깔고는 천천히 일어섰다. "감사합니다, 송 대감님." 그러자 필명이 다가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전 대감의 부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조만간 술판이라도 열어서 축하 의식을 갖는 건 어떨까요?" 필명은 어찌 됐든 한때는 전북망의 상사였기에, 전북망은 시종 그에게 존경심을 품고 있었다. "필 대감 시간이 날 때 한번 안배해 보지." "저뿐만이 아닙니다. 저희 경위에도 또 다른 형제들이 있지 않습니까?" 필명은 웃으며 말했다. "이제 보니 그렇네." 전북망은 어색하게 웃더니 이내 송석석을 흘깃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다음에 저희 집에서 연회석을 차리지요. 여러분들을 초대하겠습니다." "좋소." 왕정도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전 대감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서라도 가야 되지 않겠소? 그나저나 송 대감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군." 줄곧 송석석에 대해 불쾌한 마음을 갖고 있던 왕정은 일부러 이 틈을 타 송석석을 더욱 난처하게 만들려고 했다.
필명이 차갑게 말을 이어갔다. "나는 송 대감이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소. 그 누구든 나보다 능력이 뛰어나면 조금도 불복할 생각이 없소. 게다가 그녀는 무려 황제가 직접 임명한 사람이오. 그런데 자네가 그녀를 거역하려는 건, 곧 성지를 거역하려는 게 아니오? 어떻게 금군을 이렇게 여러 해 동안 맡아오면서도 여전히 오기를 부리고 여자를 업신여길 수가 있소? 사내로 태어났으면, 만일 정말 그 여자를 무너뜨리고 싶다면 자신의 능력으로 제대로 승부를 보는 게 좋지 않겠소?" "이제 와서 보니 그동안 정말 나한테 화가 많이 났나 보오." "자네만 성질이 있는 게 아니란 걸 명심하시오." 이내 필명은 그를 뿌리치고 돌아서 버렸다. 결국 왕정은 아무런 소득 없이 다시 영시위부 내당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고, 그는 여전히 앉아있는 오진과 전북망을 발견하고는 의자에 털썩 앉아 두 사람에게 물었다. "자네들도 모두 저 여자한테 복종하고 있는 건가? 오진 자네는 오래전부터 복종하고 있다는 걸 나도 잘 알고 있소. 저 여자의 말이라면 뭐든지 다 잘 따르더군... 그나저나 전북망 자네 또한 순순히 복종하고 있는 건가? 그래도 두 사람은 헤어진 사이잖소. 그 여자는 다시는 자네를 원하지도 않을 텐데." 그러자 오진이 그를 향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왕정, 자네는 그 입으로 더러운 말을 하지 않으면 죽는 병이라도 걸린 것이오…?!" "내 성격이 원래 이렇게 강직하오. 어떤 상황이든지 솔직히 말하려는 걸 좋아하오. 빙빙 돌려서 말했다가는 마음이 편치 않으니 말이오." "대체 누가 자네의 심기를 건드렸다고 마음이 편치 않다는 거요? 그런 식으로 자신을 높여 평가하지 마오. 강직함은 무슨, 그저 입이 독할 뿐이지." 오진은 한마디 저격을 한 후 곧장 자리를 떠났다. 요 며칠 순방영에도 많은 일이 일어난 탓에, 그는 더 이상 이곳에서 여유를 부릴 시간이 없었다. 결국 전북망과 왕정만 남은 채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매부, 신경 쓰지 말게." 뒤이어 왕정이 먼
전북망은 갓 임관하여 매일처럼 늦게까지 일에 매진하였다. 가끔은 친히 각 처의 궁궐을 순찰하러 나서곤 했지만, 후궁은 제외하였다. 순찰하지 않을 때면 어서방 앞이나 영시위부로 돌아가 교대를 기다렸다가 그날의 일지를 받았다. 교대하는 자들은 반드시 순찰 결과를 기록해야 했으며, 이변이 있으면 기록하고 별다른 일이 없어도 무사하다고 남겨야 했다.그는 유시가 되어야 궁을 떠날 수 있었지만, 항상 유시 말미에 이르러서야 궁을 나섰다. 그날도 마침 궁을 나서다 연왕을 마주쳤던 것이다. 전북망은 연왕이 새벽에 입궐해 밤에 나가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궁문이 닫히기 전에 나갈거라 생각했기에 오늘은 어찌 이리 일찍 출궁하는지 의아했다. 전북망은 다가가 절하며 인사했다."전북망, 황상을 뵈옵니다."연왕은 미소를 띠며 그를 보았다. "아직 장군이 된 것을 축하해주지 못했구나. 나는 늘 자네를 유능한 인재라고 생각해 왔노라. 이제야 빛을 발하게 된 것 같아 기쁘구나. 자네가 앞으로 더욱 번창하길 바라겠노라."전북망은 뜻밖의 칭찬에 약간 놀라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과찬이십니다."연왕은 두 손을 뒤로 깍지 끼고는 말을 이어 나갔다."전 장군, 시간이 되면 부인과 함께 연황실에 들르시게. 황후가 이 도성에 익숙하지 않은 것 같아, 내가 걱정이 많네. 시간을 내어 함께 나가본다면 매우 기뻐할 것일세." 전북망이 대답하였다."폐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만, 아내가 몸에 아이를 품고 있어 외출하기엔 불편할 듯하옵니다.""그렇다면 연황실에 들러 차라도 한잔 나누며 이야기하세. 참으로 경사가 많군. 승진하신 데 이어 곧 아버지가 되실 소식이라니, 또다시 축하의 뜻을 전하네."전북망은 연왕이 온화하다고 느끼면서도, 어쩐지 지나치게 다정한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간단히 감사만 표한 후 화제를 돌렸다."폐하께서는 오늘 왜 이렇게 일찍 출궁하셨습니까?"연왕은 여유롭게 대답했다. "모친께서 일찍이 약을 드시고 잠드셨기에 나도 물
그러자 송석석이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왕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아주 잘 대해줍니다. 조카딸의 혼담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집간 부군이 잘 대해준다 하더군요. 다만 그녀는 자신이 두 번 시집갔음에도 처가에 머무는 것이 조카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되어 그러는 모양입니다.”그 말에 전북망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순간 번개처럼 날렵하지만 마음씨 따뜻한 최씨 부인이 떠올랐다. 최씨 부인에게는 적자와 서자녀들이 있었고, 아직 혼담이 정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혼인 문제로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에 시달렸을지 생각하니, 전북망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형수로서의 최씨 부인을 존중하며,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 없었다. 이때 송석석이 그의 생각을 끊었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전북망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우리 단둘이 여기에 있으면, 섭정왕이 질투하지 않을까요?” 송석석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침착하게 답했다. “이 정도 신뢰도 없다면, 제가 어찌 현갑군 지휘사로 오래 근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숨김없이 모든 걸 공유합니다. 이번 만남 역시 그분께 이미 알려두었죠.”송석석이 떠나자 전북망도 따라나섰다. 그는 섭정왕이 어딘가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의심했지만, 정작 별청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마당에서야 섭정왕을 발견했는데, 그는 대장군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송석석을 보자 미소로 맞이하며 불러세우는 섭정왕의 모습에 전북망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진정한 부부란 저런 것일까.'그러나 성릉관이든 진성이든, 남녀의 단독 만남은 명예에 흠이 될 수 있음도 잘 알았다. 특히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은 더욱 조심해야 했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들을 걱정하는가.’자조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왕청여의 제안은 여전히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5일의 고민 시간이 주어졌다. 사여묵과 송석석이 진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최씨 부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답은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 전북망은 송석석과 다시 만났다. 사실 그전에도 송석석이 성릉관으로 갔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서먹해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이 매번 성릉관을 떠날 때마다 몰래 배웅하곤 했다. 전북망은 자신이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늘 송석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방과 왕청여에게도 미안하긴 하지만, 그들과는 서로 감정을 소모하고 다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장군부만 송석석에게 상처를 줬을 뿐, 송석석은 장군부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않았다. 비록 이혼한 후에는 전북망 어머니의 병세에 대해 상관하지 않았지만 큰형수에게 어떻게 단설환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기까지 했다.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는 이미 섭정 왕비가 되어있고 나서였다. 변방의 전사들에겐 양식과 무기가 풍부하고, 봉록까지 올라, 그들에겐 이득이기에 이제는 조정의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었다. 섭정왕은 한때 장수였기에 병사들이 배불리 먹어야만 국토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북망과 송석석이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섭정왕과 함께 소 대장군에게 생신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소 대장군의 눈빛은 여전히 자애롭고 인자했다. 전북망은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그때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면 지금 송석석과 함께 노장군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일 것이라는 후회를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같은 생각인 걸 보니, 자신만 제자리에서 멈춰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송석석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생일잔치가 끝난 후에 송석석이 뜻밖에도 먼저 그를 찾았다. 그와 송석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섭정왕은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걱정되지도 않는가?’전북망은 당황하고 불안해 보였고, 송석석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먼저 입을 열지도 못하고 송석석이 말하기만을 기다리
전북망은 성릉관에서 몇 년 동안 두 번이나 발탁되었고, 지금은 장군의 신분으로 수천 명의 병사를 관리하고 있다. 계속 성릉관에 주둔하고 있어 다시 진성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고, 진성의 부름 없이는 제멋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재혼도 하지 않고 여전히 혼자 살아갔다. 성릉관의 모래바람은 해마다 그의 얼굴에 흔적을 남겨 또래들보다 몇 살이나 더 늙어 보였다. 심지어는 몇 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기에, 진정제를 먹어야만 잘 수 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그때 이방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송석석과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부부가 되었을까? 아마도 우린 귀여운 자녀도 낳았겠지. 그리고 나는 군대에서 열심히 일하고 석석은 가문의 내무를 책임지며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를 돌보고 있었겠지? 설령 내가 승진을 하지 못하고 평생 장군으로만 살아도 그는 날 떠나지 않았겠지.’ 이전의 전북망은 송석석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였는데 자신을 위해 날개를 부러뜨리고 병든 시어머니를 돌보며 군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책임지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그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돌이킬 수도 없었다. 전북망에게는 이미 이방이 있었고 이방을 사랑한다고 했으니, 송석석이 이혼하자고 했을 때 그는 심한 말을 하고 후회하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송석석 또한 후회할 게 없었다. 이혼을 하면서 전북망을 위해 부러뜨렸던 날개가 다시 자라나 전쟁터로 날아가 쉽게 공을 세웠으니까 말이다. 이방은 송석석이 큰 가문의 아가씨인 데다가 부친과 오라버니가 그를 위해 길을 닦아주었기에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의 성공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문이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주된 원인은 아닐 것이다. 만종문에서 송석석의 무공은 거의 최고였는데, 그건 송석석이 그만큼 노력을 했고, 그만큼 땀을 흘렸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북망은 송석석을 존경했지만 그는 자신이 송석석을
어머니께 간청해도 소용이 없자 신이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건 더 심한 꾸지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이가 이 혼사를 반대하는 것은 양지춘과 접촉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양지춘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서 놀며 감정을 쌓으라고 했다. 신이는 가기 싫었지만 어머니가 억지로 그녀를 마차에 태웠고, 심지어는 하녀에게 그녀가 부적절한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엄명했다. 양지춘의 얼굴은 그나마 멀쩡하게 생겼는데, 처음에는 신이를 조금이나마 존중하는 척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신이의 외모와 품평을 논하며 신이가 외모가 예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그를 부인으로 들이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그의 오만한 태도는 신이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아마도 신이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양지춘은 일부러 신이를 마차에 태워주는 척하며 그녀의 엉덩이를 꼬집었다!그 순간 신이는 온몸의 피가 머리 위로 솟구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경박한 눈빛에 신이는 이내 눈물이 쏟아졌고, 모욕감에 온몸을 떨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집에 돌왔는데, 하녀와 마부는 그의 동작을 보지 못한 탓에, 오히려 그가 세심하고 자상하다며 그녀의 어머니 앞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이는 억울해서 어머니에게 그 일을 말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그녀가 일부러 꾸민 말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꾸짖으며 사흘 동안이나 외출을 금지했다. 신이는 그렇게 방에 갇혔고, 매일매일을 눈물로 얼굴을 씻었다. 심지어 그날 선비의 말을 듣고 호수에 뛰어들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내가 양지춘에게 시집가는 것이 물에 빠져 죽는 것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사흘 후, 외출 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신이는 다시 경산사로 가서 같은 핑계로 하녀를 내보냈다. 이번엔 정말 죽을 각오로 호숫가에 간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다시 그 선비를 만났다.그는 쓸쓸하게 호숫가에 앉아 작은
신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나무 그늘에 몸이 가려져 있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초라해 보였고 눈 밑에는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바로 다리 앞에서 그림을 팔던 선비이자, 학정이 말하던 퇴학 해서 기녀를 키우는 학생이었다!“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신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짜증을 냈지만, 그가 한 말을 떠올리자 내심 두려웠다. “나는 여기에 물귀신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거짓말하는 것이겠지요.” 신이는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귀신은 두려웠고 진흙탕에 영원히 깔려 있는 건 더욱 두려웠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가 걸어 나오자 얼굴은 더욱 여위어 보였다. “호숫가의 주변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오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건 사람들이 이곳으로 예불하기 위해 오는 것이지, 경치를 보러 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절을 하고 바로 돌아가니 당연히 보지 못하겠지요.” 신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순간 깊이가 보이지 않는 호수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그는 여전히 굳게 서서 말했다. “예불하는 사람은 천지와 자연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경치가 있다면 반드시 한 번 보러 올 것입니다. 이런 곳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좋은 곳일 텐데 아무도 없다는 게 아기씨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것이 사실인지는 몰랐지만,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감히 그런 무서운 곳에서는 죽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자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절대 쉽게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고 싶어도 살 지 못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 밑은 이내 붉어졌고 눈물이 고여 반짝이는 것 같
신이의 사촌 여동생과 하녀는 신이를 찾으러 돌아왔다. 신이가 하녀보고 이순에게 삼백문을 주라고 하자 이순은 웃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원래는 우연한 만남일 뿐이라 다시는 접점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 조모님의 생신 때 가문 연회에서 공학정이 데리고 온 제자들 중에 이순이 있었다. 강남의 예의 규율은 진성처럼 엄격하지 않아서 연회에 참석할 때 여인들도 앞마당에 갈 수 있었다. 이순은 신이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신이는 그때 면사포를 쓰고 있었고 두 눈만 드러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순은 식사를 하지 않고, 신이의 조모에게 생신 축하 그림만 드린 후에 집에 일이 있다며 작별을 고했다. 그가 떠나자마자 학정이 그를 언급하며 안타까운 말투로 말했다. “총명하긴 한데 진취심이 없어서 계속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걸 여기로 데려와 진취성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사귀게 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로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르다니. 정말 실망이군. 학교를 그만두겠다면, 이젠 마음대로 하라고 해야겠어.” 그러자 신이의 부친이 위로했다.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껜 학생이 많으니 그가 나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학정은 마치 울화가 쌓인 것처럼 말했다. “그는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네. 그런데 진취성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동창에게 돈을 빌리질 않나, 게다가 집에 기녀까지 키우고 있다더군.” 신이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런 사람은 얘기할 가치도 없습니다.” 신이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서 왠지 마음속으로 실망감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날은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같다고 생각해 마음이 갔던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 후, 신이의 혼사도 낙착되었다. 그녀의 약혼자는 회주 지부의 둘째 아들인 양지춘이고, 올해 22살이었다. 22살인데도 결혼하지 않았던 건 첩을 통해 서자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은 가문은 그
그의 이름은 신이었는데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에 대해서 말할 때, 경멸하는 기색을 띠었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모르는 사람까지 모두 침을 뱉으며 뻔뻔하다고 할 정도였다. 알다시피 애인과 야반도주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는 것보다 더 욕먹을 일이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후회하냐고 묻기도 했다. 그녀는 시집간 것을 후회하지 않지만 죄책감을 느끼긴 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시 씨 가문의 명성이 손상되어 형제자매들과 조카들이 혼사에 어려움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신이는 시 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태어날 때부터 온갖 보살핌을 받아왔다. 먹는 것은 물론 모두 산해진미이고, 입는 것도 모두 능라 비단이었다. 게다가 보모님과 오라버니의 총애까지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그녀에겐 한 가지 결함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열네 살 때까지 월사가 오지 않은 것이었다. 많은 의사들을 불러 진찰을 받고 밤낮으로 약을 먹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몸이 차서 그러니 몸조리를 하면 나을 수 있다고 위로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몰래 의사가 부모님께 하는 말을 들었다. 의사는 그가 몸이 차서 그런 병이 생긴 것이 아닌, 아이를 키우는 곳이 어린아이와도 같아서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마치 작은 꽃병과 같아서 꽃을 꽂을 수는 있지만 나무를 심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 건 불가능하다고 비유했다.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건 여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녀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중에 좋은 사람에게 시집가서 부군에게 첩을 들인 후, 첩이 낳은 아이를 친자식처럼 키우라고 조언해주었다.시 씨 가문이라는 후원이 있으면 그녀가 아이를 낳을 수 없어도 아무도 그녀의 지위를 흔들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 씨 가문의 재물은 그녀가 평생 부귀하게 살기에 충분했다. 신이의 조모도 그녀에게 아이를 낳을 수 없으니 자세를 낮춰야 한다고 했다. 시 씨 가문의 딸이라고
추운 겨울이 되자 눈이 내려 성릉관은 하얗게 뒤덮였다. 세상이 마치 깨끗해진 것처럼 보였다. 이황자는 몇 년 동안 너덜너덜한 승복을 입고 발우를 받쳐 들고는, 가는 길에 동냥을 하다가 절을 보면 이틀 묵으며 부처님께 참회하면서 살았다. 사실 그는 원래 있던 절에서 계속 지낼 수 있었다. 편안하진 않지만 풍찬노숙할 필요도 없고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그런 안일한 곳에서는 평생 죄를 씻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계속 길을 걷고 계속 고생해야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했다. 그가 성릉관에 도착했을 때 짚신은 이미 찢겨 있었고 발바닥에는 두꺼운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이제는 신발을 신지 않고도 자갈이 가득한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추운 날씨에는 모든 옷을 껴입어도 추위를 막을 수 없었지만 이미 익숙해진 뒤였다. 그는 눈보라를 맞으며 성릉관에 위치한 감은사로 향했는데, 몇 년 동안 발걸음을 멈춘 적이 없는 탓에 고단함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심지어는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아 그는 눈이 가득 쌓인 길에서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그는 따뜻한 두꺼운 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그가 있는 방에는 숯불이 피워져 있었고, 살짝 열린 창문으로 눈에 눌려 허리가 굽은 나뭇가지가 보였다. 그는 눈동자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렇게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의 마음속에 순간 욕심이 생겨 조금만 더 누워있고 싶어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문이 활짝 열렸다. 그가 벌떡 일어나 앉았는데, 갑자기 눈앞이 핑핑 돌더니 다시 힘없이 침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누워 있거라.” 이때 누군가가 부드러운 말투로 말하면서 약그릇을 그의 침대 옆에 놓았다. 그는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익숙해, 어지러움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돌려보니, 그 사람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서우 형?!’ 그는 자신이 잘못 보았을까 봐 다시 자세히 보려 했지만, 몸이 너무 어지러운
대황자는 봄 사냥 때 숙청제에게 꾸중을 듣고 돌아간 후 앓아누웠다. 당시 이황자와 서우가 모두가 걱정했는데 덕비는 오히려 기뻐했다. 그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황제폐하께서는 분명히 대황자를 싫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덕비는 이황자를 안고 반드시 부지런해야 하고, 태부와 황숙의 말을 잘 듣고 누구보다 잘 배워 황형을 제압해야 한다고 당부까지 했다. 그로 인해 이황자의 마음은 몹시 복잡했다. 덕비가 줄곧 그에게 태자와 황제가 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지 말해주었을 때 비록 그도 마음이 설렜지만 자신과 거리가 먼 얘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금 그와 대황형, 서우 형, 그리고 셋째 동생이 사이가 좋아 도저히 대황형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매일 모순적으로 지내다 보니 오히려 학업이 나빠졌고 승마 연습을 할 때도 여러 번 실수를 했다. 하지만 덕비는 이상하게 그를 탓하지 않았고 며칠 동안 계속 게으르게 하라고 했다. 그렇게 덕비는 이황자를 데리고 복마마를 자주 뵈러 갔고, 복마마 궁전에서 숙청제를 만날 수도 있었다. 덕비는 며칠 동안 그곳을 드나들더니 어느 날 굳은 표정으로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차가운 말투로 청이에게 자신의 보살핌이 없으면 아이가 태어날 수 있는지 보겠다고 했다. 황제폐하를 자주 뵈러 갈 수 없어 아쉬웠지만 이황자는 마음을 가다듬고 공부와 승마술에 전념했다. 이황자는 당시 앞날이 어떻게 될지도 몰랐고, 비록 매일 힘들긴했지만 한편으로는 즐거웠기에, 계속 이렇게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숙청제의 천추세에 승마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니 세 황자와 서우도 가서 겨뤄 보기로 했다. 원래 그런 대회에서 황자들은 재미있게 참석만하면 되지만, 덕비는 그 경기를 몹시 중시했다. 덕비가 이황자에게 마름쇠를 건넬 때, 그는 하늘이 무너져내리는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황자는 원하지 않았다. 그는 절대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대황형의 목숨을 앗으려 하다니, 이황자는 처음으로 어마마마가 무서워졌다.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