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짝 놀란 송석석은 믿기 힘들다는 듯 물었다. “데려가겠다는 말씀입니까? 부인, 이 아기는 아니… 대체 왜 데려가시려는 겁니까?”아이가 제상서의 자식이 아니라고 말하려던 송석석은 차마 거짓말은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여기까지 온 것을 보면 이미 진실을 알고 있을 것이기에 더더욱 속일 이유가 없었다.제상서 부인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연히 보살피기 위해서지요. 이리도 어린것이 어찌 고생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전숙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아기는 죄가 없지요. 부모를 선택할 수도, 환경을 선택할 수도 없습니다. 잘못을 저지른 건 어른들이니 책임은 그들이 져햐 합니다.”송석석은 그녀의 말에 깊이 공감했고, 또한 그녀가 매우 존경스러웠다. “제상서께서 이 사실을 계십니까? 당신이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까?”전숙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지만 흘러내리지 않았다. “그는 저를 속였다고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저도 처음엔 믿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것이 명확해졌습니다. 생각해 보니 알아내기 어렵지 않았습니다.”“부인이 아기를 데려가더라도 그는 고마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이 일이 드러나게 될 것이지요.”“철저한 준비를 마치고 온 것이니 비밀로 하려거든 얼마든지 감출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아이가 진소유가 낳은 아이라고 할 것입니다. 어차피 잡안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으니, 밖에서 소문이 돌더라도 인정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아닐 테지요.”송석석은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부인의 마음이 불편하시지는 않겠습니까?”전숙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저는 이미 마흔여덟의 아줌마라 세상의 많은 일들을 꿰뚫어 보았지요. 그가 저를 존중하긴 하지만, 남자의 마음은 워낙 넓은 법이니 많은 여자를 품을 수 있지요. 애초부터 독점할 수 없었으니 한 명 더 늘든 줄든 차이는 없습니다.”송석석은 그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혹시 아기의 어미도 데려가려는 생각이십니까?”전숙은 고개를 저었다.“아닙
황혼이 깃들자, 해가 서서히 지며 하늘은 비단처럼 겹겹이 물들어 갔다. 송석석과 시만자는 말을 타고 하산했다.사건이 아직 완전히 끝나지는 않았지만, 잠시나마 한숨을 돌릴 수 있는 순간이었다."내일 고부진이 처형될 텐데, 고씨 가문의 사람들이 나서서 시신을 거두러 올 것 같아?" 시만자가 물었다."잘 모르겠어." 송석석은 아이를 데려가겠다던 제상서 부인의 모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보였고, 그녀의 마음을 읽은 시만자가 다시 물었다.“제상서 부인이 정말로 아이를 데려가겠다고 했어?”“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일시적인 감정에서 한 말인지는 확실하지 않아.”“비록 그 아이들이 모두 사온의 희생양이라 아무런 죄가 없다 해도 왜 이 모든 일들을 그녀가 짊어져야 해? 이 아이의 등장으로 그녀는 기이하고도 힘든 상황에 놓였을 거야. 과거의 행복이 한낱 환영이 된 것 같아 너무 마음이 아파.”“마차에서 내게 만약 이런 상황에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묻더라.”송석석은 말의 고삐를 느슨하게 풀었다. 비탈길을 걷고 있는 번개는 여전히 꽤나 안정적이었다."만약 장군께서 밖에 외실을 두고 아이까지 낳았다면 내가 어떻게 할 것 같아?"시만자는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곧바로 대답했다. "매산에 있던 너라면 아마 그를 없애버리려 모든 힘을 모았겠지만, 지금의 너는 그냥 이혼을 하고 각자 삶을 선택했을 거야."송석석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너와는 너무 가깝게 지내면 안 될 것 같아."그러자 시만자가 그녀를 흘겨보며 말했다."내가 너를 모를까?""그럼 너는 어떻게 할 건데?" 시만자는 그저 웃음만 나왔다."그런 일은 나한테 절대 안 일어나지. 왜냐하면 나는 결혼하지 않을 것이니까 이런 고민을 할 필요도 없어.”"그래." 그러자 시만자가 대뜸 물었다."내가 결혼하지 않으려 하는 것에 대해 너는 어떻게 생각해? 너는 지금 아주 행복하게 살고 있으니까 나한테 결혼을 부추길 수도 있었잖아?"그녀를 한 번 쳐다보던 송석석이 입을 열었다.“그럴 리가? 네 인
먼저 자리에 앉은 전숙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릉서야, 문을 닫거라. 우리 셋이 앉아서 할 이야기가 있으니.”어머니의 태도에서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한 제릉서는 아버지를 한 번 힐끗 쳐다보았다. 하지만 제상서는 혼란스러운 듯한 얼굴이었고 입술은 굳게 닫혀 있었다. 문을 닫은 제릉서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돌아가 자리에 앉았다.전숙은 한 손을 팔걸이에 올려놓고, 다른 한 손은 무릎 위에 가만히 두었다. 그동안 그녀는 풍족한 생활을 누렸고, 남편과의 관계도 좋았기에 동년배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둥근 얼굴에는 고귀한 품위가 깃들어 있었지만, 최근 며칠 부쩍 수척해 보였다.그녀는 제상서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오늘 북명 왕비를 만났습니다.”제상서는 독사에게 물린 듯이 화들짝 놀랐다. “그녀가 당신을 찾았소? 무슨 헛소리를 했든 간에 믿어서는 안 되오!”제상서 부인은 여전히 차분하게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더 이상 반짝이지 않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오히려 품위가 가득했다.“저는 북명 왕비를 잘 알지 못하긴 하지만 그녀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압니다. 게다가 그녀가 저를 찾은 것이 아니고, 조장에 갔을 때 그녀가 아기를 안고 나오는 것을 본 것입니다.”제상서는 입술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급기야 그녀의 시선을 피해버렸다.“아기라니, 그… 그게 대체 무슨 말이오?!”하지만 전숙은 여전히 온화함을 잃지 않았다.“이미 다 알고 있으니 입 아프게 설명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 저는 그 아기를 집으로 데려와 소유에게 맡기려 하였지요. 하지만 왕비께서는 당신들 중 한 사람이 직접 와서 데려가야 한다고 거절하였습니다.”그녀는 아무런 미동도 없었지만, 두 남자는 불가마에 든 개미마냥 안절부절이었다.유독 착잡해진 제상서는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했고 감히 말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제상서 부인이 담담히 말했다. “왜 데려와야 하는지는 당신들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그렇다고 제가 관대하여 이러는 것은 아닙니다. 첫째, 아기
다음 날, 제릉서는 영우를 데리러 곧바로 이수암으로 향했다.마침, 송석석도 있어 제릉서는 잠시 이야기를 나누자고 청하였다. "어머니께서 아기를 잘 돌봐줄 것입니다. 동생들에게도 아낌없는 사랑을 주시는 어머니라서 혹 하대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그 말에 송석석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저와 그대 어머니는 서로 잘 알지는 못하지만, 심중을 털어놓고 이야기하였으니 아기를 홀대하시진 않으리라 믿습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히 하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어제 그대 어머니께서 아기의 이름을 물으시기에 내가 '강아'라 답하였고 영우라는 이름을 계속 쓸지에 대해서는 그대들이 알아서 정하시지요."제릉서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감사드립니다.""그대들이 아이를 데려가기로 하였는데 혹시 고청묘와 만나게 할 생각은 없으십니까?" 제릉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그러지요. 사실 어머님께서도 만약 아버지께서 그녀를 데려오길 원하신다면 어머님께서도 동의하시겠다 하셨습니다."송석석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제 대감께서는 그리 순진한 분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그분은 그대 어머니이지 않습니까? 어머니를 조금 더 소중히 여겨주시고, 그 마음을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제릉서가 급히 설명했다."오해입니다. 제 어머니는 소인배가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상황에 대비해 제씨 가문이 오해받지 않도록 미리 준비하신 것이지요.""오해한 적 없습니다. 그대 어머니께서는 큰 그림을 생각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상처받지 않는 사람으로 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힘든 사람이 아버지라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가장 힘들게 견디고 있는 분은 바로 그대의 어머니이십니다. 그러나 복잡한 마음을 안고도, 그대 가문의 미래를 생각하는 모습은 그대도 본받아야 할 품성입니다." 평소 제씨 가문의 사람들과의 대화를 자제했던 송석석은 어제 만났던 전숙이 너무 착하다고 여겼고, 어렵지 않게 그 이유를 알
하지만 고청묘는 고개를 저었다. "가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여기 머무르고 싶사옵니다.""따님은 제씨 가문에 있는데도 말입니까?" 송석석의 물음에 고청묘가 고개를 살짝 돌렸는데, 긴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알고 있습니다. 그 애는 평범한 아이들처럼 잘 자랄 것이니 걱정되지 않습니다."그녀는 꿈도 꿀 수 없었던 것들이지만 딸은 그 행복을 얻었기에 기뻤다.송석석은 다정하게 말했다."그대가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강요할 수 없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제씨 가무은 명분도 없어 그대를 억지로 데려가지는 못합니다.”맨발로 침대에서 내려온 고청묘는 송석석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울먹거렸다."감사하옵니다. 이 얼마나 큰 의미인지 송 대감께선 모르실 것이옵니다. 머리 위에 드리워진 날카로운 칼날이 사라진 것이지요. 이제 더는 악몽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겠지요?"송석석이 그녀를 일으키며 말했다. "이 사건이 마무리되면 그대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셔도 되니, 조금만 참으시지요." "더 이상 저를 해치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니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침대로 다시 돌아간 고청묘는 가냘픈 미소를 지었지만, 눈물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저는 제상서가 싫습니다. 그가 다가올 때마다 두려웠습니다. 제가 그의 연민을 바란 것도 아니였는데, 그는 너무도 거칠었사옵니다." 고청묘가 옷을 풀어 헤치자, 몸에 남은 이빨 자국을 드러났다. 새로 생긴 것도 있었고 오래된 흔적도 남아 있었다. 가장 끔찍한 것은 부드럽고 새하얀 가슴에 빼곡히 새겨진 흉터들이었다.송석석은 마음 한구석이 쓰라렸다. 누가 그녀들이 피해자가 아니라고 하였던가? 그녀들이야말로 진정 궁지에 몰린 자들이었다. 그에 비해 어쩔 수 없었다고 늘어놓는 고부진은 너무나도 위선적이었다.송석석은 그녀의 옷을 다시 입혀주며 말했다. "이제는 아무도 그대를 괴롭히지 못할 것이니, 안심하고 지내시지요." "감사하옵니다. 정말로 감사드리옵니다. 대감께서 저희를 구하신 것입니다.
이튿날, 고부진은 참수를 앞두고 있었고, 참수관은 사여묵이다. 경위들은 선으로 형장을 보호하며 질서를 유지했다. 사여묵은 원래 송석석을 오지 못하게 하려고 했다. 고부진이 괘씸하긴 하지만 주범도 아니고 게다가 목을 베는 장면은 너무 잔인했기에 송석석에게 보여주기 싫었다. 하지만 송석석은 그보다 더 잔인한 상황까지 목격한 사람이었다. 고부진이 주범은 아니지만 공리심에 눈이 멀어 악인을 도왔을 뿐만 아니라 그의 나약함 때문에 많은 사람이 상처를 받았으니 그는 죽어 마땅한 죄인이었다. 그래서 송석석은 무조건 가봐야 한다고 했다. 아침 일찍부터 형장 밖은 사람들로 붐볐다. 정오에 형벌을 집행하기 때문에 경위는 아침 일찍 형장에 도착해 질서를 유지하지 못해서 형장 일대가 소란스러웠다. 심지어 가게의 상인들도 밖에서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겁 많은 백성들은 구경하러 오지 않았다. 그리고 아이들도 구경하는 것을 금지했는데 금지하지 않는다고 해도 부모는 아이들을 이런 곳으로 데려오지 않을 것이었다. 그렇지만 세상 어디에나 구경꾼은 부족하지 않았다. 특히 고부진의 신분은 많은 사람의 주목을 이끌었다. 왜냐하면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참수를 당하는 건 흔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형장은 늘 가을쯤에 사람들로 붐볐다. 사형수들이 가을쯤에 사형을 집행하기 때문이었다. 사시가 되자 필명은 경위를 데리고 와서 질서를 유지했고 형장 주변에 줄을 당겨 경계를 그어 백성들을 모두 선 밖으로 물러나도록 했다. 고부진은 아직 대리사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형장에 가기 전에 대리사에서는 그에게 푸짐한 식사를 대접하고 배불리 먹인 후에 출발할 것이었다. 고무진은 처음엔 두렵지 않았지만 술과 음식이 나오자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먹지도 않고 말도 하지 않았다. 대리사의 허평안이 직접 그를 배웅하러 와서 말했다. “드십시오. 배불리 먹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고 하지 않습니까?”허평안의 말에 고부진은 어리둥절했다. 곧이어 그는 부들부들 떨며 젓가락을 들었다가 내려놓고
고부진은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내 뜻은 아니었습니다. 저에게 다시 한번 선택할 기회를 준다면 절대로 이러지 않을 것입니다. 고후부가 몰락하긴 했지만 기반이 있으니 무너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는 거인 출신이라 진사에 응시할 수도 있으니 내가 갈 수 있는 길은 하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내가 왜 그렇게 어리석은 짓을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원래는 앞길이 창창했는데, 현량하고 숙덕 한 여자를 부인으로 맞아들이고 첩을 두 세명 들여 아들딸을 서너 명 낳으면 가문을 더욱 번영할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내가 지름길이라고 생각했던 게 죽음 길이었을 줄이야.” 그는 충격으로 들고 있던 젓가락을 떨구고 다시 몸을 부들부들 떨며 울었다. 허평안은 담담하게 젓가락을 주워 주며 말했다. “지금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행동이야말로 가장 실질적인 것이지요. 아는 것을 모두 말하면 일말의 희망이 있을 것이고 말하지 않으면 당신은 죽을 것입니다.” 고부진은 얼굴을 가리고 울다가 손을 놓고 소매로 눈물 콧물을 닦아냈다. 고문을 받은 후 그의 동작은 굼뜨고 둔했고 등은 구부려졌다. “난 이미 죽음길에 들어섰습니다. 더 이상 기회는 없습니다.” 허평안은 오랫동안 공문에서 지내면서 각양각색의 악당들을 만나왔다. 많은 사람들이 죽기 직전에 후회하고 모든 것을 자백하며 살 수 있는 기회를 얻으려고 했다. 하지만 고부진은 그런 악당 같지는 않았다. 그는 이성을 잃지 않고 참수형에 직면해서도 이해득실을 따졌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애초에 왜 사운의 이용을 피하지 못했을까? 결국엔 모두 이욕에 눈이 멀어서 그랬던 것이 분명하다. 처음엔 반항했을 수도 있지만 그다음에는 밀당을 하다가 결국 배후에게 조종을 당했을 것이다. 그는 범인이 사온이라고 생각했고 자신이 피해자처럼 행동하면 죄를 면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다. 허평안도 더 이상 그에게 말을 걸지 않고 조용히 기다렸다.나중엔 고부마도 울음을 그치고 고개를 들어 그에게 물었다.
형장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호송차에서 끌려 나와 형장 한가운데로 끌려가 무릎을 꿇렸다. 이때 덩치 큰 사형수가 칼을 들고 그의 곁에 서 있었는데 칼이 빛을 반사하는 것을 본 고부진은 놀라서 몸이 나른 해져 무릎도 제대로 꿇지 못하고 구조를 청하는 눈빛으로 구경하는 백성들을 바라보았다. 형장은 시끌벅적했지만 그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자신의 심장 소리만 들렸다. 그는 자신의 심장이 북을 두드리는 소리 같았고 당장이라도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는 뒤에 있는 참수관인 사여묵을 보지 못하고 그의 소리만 어렴풋이 들리는 것 같아 뒤를 돌아보려 했지만 그의 뒤엔 팻말이 세로로 묶여 있어 고개를 돌릴 수 없고 사형수가 질색을 하는 표정으로 코를 틀어막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제야 자신이 대소변을 실금 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두려움이 순식간에 독사처럼 그의 몸속 살갗을 뚫고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는 너무 두려웠다. 이때 군중 속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고, 그는 기쁜 나머지 쉰 목소리로 외쳤다. “청영아, 청영아…!” 휘왕은 고청영과 함께 줄 밖에 서 있었고, 고청영은 검은 포도알 같은 눈망울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시선은 마주쳤지만 고청영은 부친의 공포와 기쁨을 전혀 느끼지 못한 듯 아무런 감정도 없어 보였다. 이때 휘왕이 옆에 있는 구청영에게 말했다. “먹을 것 좀 갖다 주겠느냐?”그러자 고청영이 말했다.“이미 배불리 드셨을 것입니다.”휘왕이 말했다.“그래, 대리사에서는 참수를 하는 죄인에게 배불리 음식을 먹이긴 하지. 그런데 저 자에게 따로 할 말은 없느냐?”그러자 고청영이 잠시 생각하더니 물었다.“내가 올라가도 됩니까?”“그래, 마지막으로 작별인사 정도는 할 수 있을 거야.”그러자 고청영이 말했다.“한가지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가자, 내가 널 데리고 참수관을 만나러 가마. 참수관이 내 조카라 내 부탁이라면 들어줄 것이다. 그는 나에게서 노인네 냄새가 난다고 하지 않으니 말이다.”“나도 당신이 늙었다고만 했지,
그러자 송석석이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왕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아주 잘 대해줍니다. 조카딸의 혼담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집간 부군이 잘 대해준다 하더군요. 다만 그녀는 자신이 두 번 시집갔음에도 처가에 머무는 것이 조카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되어 그러는 모양입니다.”그 말에 전북망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순간 번개처럼 날렵하지만 마음씨 따뜻한 최씨 부인이 떠올랐다. 최씨 부인에게는 적자와 서자녀들이 있었고, 아직 혼담이 정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혼인 문제로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에 시달렸을지 생각하니, 전북망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형수로서의 최씨 부인을 존중하며,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 없었다. 이때 송석석이 그의 생각을 끊었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전북망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우리 단둘이 여기에 있으면, 섭정왕이 질투하지 않을까요?” 송석석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침착하게 답했다. “이 정도 신뢰도 없다면, 제가 어찌 현갑군 지휘사로 오래 근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숨김없이 모든 걸 공유합니다. 이번 만남 역시 그분께 이미 알려두었죠.”송석석이 떠나자 전북망도 따라나섰다. 그는 섭정왕이 어딘가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의심했지만, 정작 별청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마당에서야 섭정왕을 발견했는데, 그는 대장군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송석석을 보자 미소로 맞이하며 불러세우는 섭정왕의 모습에 전북망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진정한 부부란 저런 것일까.'그러나 성릉관이든 진성이든, 남녀의 단독 만남은 명예에 흠이 될 수 있음도 잘 알았다. 특히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은 더욱 조심해야 했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들을 걱정하는가.’자조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왕청여의 제안은 여전히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5일의 고민 시간이 주어졌다. 사여묵과 송석석이 진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최씨 부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답은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 전북망은 송석석과 다시 만났다. 사실 그전에도 송석석이 성릉관으로 갔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서먹해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이 매번 성릉관을 떠날 때마다 몰래 배웅하곤 했다. 전북망은 자신이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늘 송석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방과 왕청여에게도 미안하긴 하지만, 그들과는 서로 감정을 소모하고 다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장군부만 송석석에게 상처를 줬을 뿐, 송석석은 장군부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않았다. 비록 이혼한 후에는 전북망 어머니의 병세에 대해 상관하지 않았지만 큰형수에게 어떻게 단설환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기까지 했다.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는 이미 섭정 왕비가 되어있고 나서였다. 변방의 전사들에겐 양식과 무기가 풍부하고, 봉록까지 올라, 그들에겐 이득이기에 이제는 조정의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었다. 섭정왕은 한때 장수였기에 병사들이 배불리 먹어야만 국토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북망과 송석석이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섭정왕과 함께 소 대장군에게 생신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소 대장군의 눈빛은 여전히 자애롭고 인자했다. 전북망은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그때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면 지금 송석석과 함께 노장군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일 것이라는 후회를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같은 생각인 걸 보니, 자신만 제자리에서 멈춰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송석석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생일잔치가 끝난 후에 송석석이 뜻밖에도 먼저 그를 찾았다. 그와 송석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섭정왕은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걱정되지도 않는가?’전북망은 당황하고 불안해 보였고, 송석석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먼저 입을 열지도 못하고 송석석이 말하기만을 기다리
전북망은 성릉관에서 몇 년 동안 두 번이나 발탁되었고, 지금은 장군의 신분으로 수천 명의 병사를 관리하고 있다. 계속 성릉관에 주둔하고 있어 다시 진성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고, 진성의 부름 없이는 제멋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재혼도 하지 않고 여전히 혼자 살아갔다. 성릉관의 모래바람은 해마다 그의 얼굴에 흔적을 남겨 또래들보다 몇 살이나 더 늙어 보였다. 심지어는 몇 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기에, 진정제를 먹어야만 잘 수 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그때 이방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송석석과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부부가 되었을까? 아마도 우린 귀여운 자녀도 낳았겠지. 그리고 나는 군대에서 열심히 일하고 석석은 가문의 내무를 책임지며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를 돌보고 있었겠지? 설령 내가 승진을 하지 못하고 평생 장군으로만 살아도 그는 날 떠나지 않았겠지.’ 이전의 전북망은 송석석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였는데 자신을 위해 날개를 부러뜨리고 병든 시어머니를 돌보며 군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책임지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그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돌이킬 수도 없었다. 전북망에게는 이미 이방이 있었고 이방을 사랑한다고 했으니, 송석석이 이혼하자고 했을 때 그는 심한 말을 하고 후회하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송석석 또한 후회할 게 없었다. 이혼을 하면서 전북망을 위해 부러뜨렸던 날개가 다시 자라나 전쟁터로 날아가 쉽게 공을 세웠으니까 말이다. 이방은 송석석이 큰 가문의 아가씨인 데다가 부친과 오라버니가 그를 위해 길을 닦아주었기에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의 성공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문이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주된 원인은 아닐 것이다. 만종문에서 송석석의 무공은 거의 최고였는데, 그건 송석석이 그만큼 노력을 했고, 그만큼 땀을 흘렸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북망은 송석석을 존경했지만 그는 자신이 송석석을
어머니께 간청해도 소용이 없자 신이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건 더 심한 꾸지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이가 이 혼사를 반대하는 것은 양지춘과 접촉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양지춘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서 놀며 감정을 쌓으라고 했다. 신이는 가기 싫었지만 어머니가 억지로 그녀를 마차에 태웠고, 심지어는 하녀에게 그녀가 부적절한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엄명했다. 양지춘의 얼굴은 그나마 멀쩡하게 생겼는데, 처음에는 신이를 조금이나마 존중하는 척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신이의 외모와 품평을 논하며 신이가 외모가 예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그를 부인으로 들이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그의 오만한 태도는 신이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아마도 신이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양지춘은 일부러 신이를 마차에 태워주는 척하며 그녀의 엉덩이를 꼬집었다!그 순간 신이는 온몸의 피가 머리 위로 솟구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경박한 눈빛에 신이는 이내 눈물이 쏟아졌고, 모욕감에 온몸을 떨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집에 돌왔는데, 하녀와 마부는 그의 동작을 보지 못한 탓에, 오히려 그가 세심하고 자상하다며 그녀의 어머니 앞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이는 억울해서 어머니에게 그 일을 말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그녀가 일부러 꾸민 말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꾸짖으며 사흘 동안이나 외출을 금지했다. 신이는 그렇게 방에 갇혔고, 매일매일을 눈물로 얼굴을 씻었다. 심지어 그날 선비의 말을 듣고 호수에 뛰어들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내가 양지춘에게 시집가는 것이 물에 빠져 죽는 것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사흘 후, 외출 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신이는 다시 경산사로 가서 같은 핑계로 하녀를 내보냈다. 이번엔 정말 죽을 각오로 호숫가에 간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다시 그 선비를 만났다.그는 쓸쓸하게 호숫가에 앉아 작은
신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나무 그늘에 몸이 가려져 있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초라해 보였고 눈 밑에는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바로 다리 앞에서 그림을 팔던 선비이자, 학정이 말하던 퇴학 해서 기녀를 키우는 학생이었다!“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신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짜증을 냈지만, 그가 한 말을 떠올리자 내심 두려웠다. “나는 여기에 물귀신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거짓말하는 것이겠지요.” 신이는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귀신은 두려웠고 진흙탕에 영원히 깔려 있는 건 더욱 두려웠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가 걸어 나오자 얼굴은 더욱 여위어 보였다. “호숫가의 주변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오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건 사람들이 이곳으로 예불하기 위해 오는 것이지, 경치를 보러 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절을 하고 바로 돌아가니 당연히 보지 못하겠지요.” 신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순간 깊이가 보이지 않는 호수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그는 여전히 굳게 서서 말했다. “예불하는 사람은 천지와 자연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경치가 있다면 반드시 한 번 보러 올 것입니다. 이런 곳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좋은 곳일 텐데 아무도 없다는 게 아기씨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것이 사실인지는 몰랐지만,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감히 그런 무서운 곳에서는 죽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자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절대 쉽게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고 싶어도 살 지 못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 밑은 이내 붉어졌고 눈물이 고여 반짝이는 것 같
신이의 사촌 여동생과 하녀는 신이를 찾으러 돌아왔다. 신이가 하녀보고 이순에게 삼백문을 주라고 하자 이순은 웃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원래는 우연한 만남일 뿐이라 다시는 접점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 조모님의 생신 때 가문 연회에서 공학정이 데리고 온 제자들 중에 이순이 있었다. 강남의 예의 규율은 진성처럼 엄격하지 않아서 연회에 참석할 때 여인들도 앞마당에 갈 수 있었다. 이순은 신이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신이는 그때 면사포를 쓰고 있었고 두 눈만 드러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순은 식사를 하지 않고, 신이의 조모에게 생신 축하 그림만 드린 후에 집에 일이 있다며 작별을 고했다. 그가 떠나자마자 학정이 그를 언급하며 안타까운 말투로 말했다. “총명하긴 한데 진취심이 없어서 계속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걸 여기로 데려와 진취성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사귀게 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로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르다니. 정말 실망이군. 학교를 그만두겠다면, 이젠 마음대로 하라고 해야겠어.” 그러자 신이의 부친이 위로했다.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껜 학생이 많으니 그가 나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학정은 마치 울화가 쌓인 것처럼 말했다. “그는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네. 그런데 진취성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동창에게 돈을 빌리질 않나, 게다가 집에 기녀까지 키우고 있다더군.” 신이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런 사람은 얘기할 가치도 없습니다.” 신이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서 왠지 마음속으로 실망감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날은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같다고 생각해 마음이 갔던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 후, 신이의 혼사도 낙착되었다. 그녀의 약혼자는 회주 지부의 둘째 아들인 양지춘이고, 올해 22살이었다. 22살인데도 결혼하지 않았던 건 첩을 통해 서자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은 가문은 그
그의 이름은 신이었는데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에 대해서 말할 때, 경멸하는 기색을 띠었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모르는 사람까지 모두 침을 뱉으며 뻔뻔하다고 할 정도였다. 알다시피 애인과 야반도주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는 것보다 더 욕먹을 일이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후회하냐고 묻기도 했다. 그녀는 시집간 것을 후회하지 않지만 죄책감을 느끼긴 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시 씨 가문의 명성이 손상되어 형제자매들과 조카들이 혼사에 어려움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신이는 시 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태어날 때부터 온갖 보살핌을 받아왔다. 먹는 것은 물론 모두 산해진미이고, 입는 것도 모두 능라 비단이었다. 게다가 보모님과 오라버니의 총애까지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그녀에겐 한 가지 결함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열네 살 때까지 월사가 오지 않은 것이었다. 많은 의사들을 불러 진찰을 받고 밤낮으로 약을 먹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몸이 차서 그러니 몸조리를 하면 나을 수 있다고 위로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몰래 의사가 부모님께 하는 말을 들었다. 의사는 그가 몸이 차서 그런 병이 생긴 것이 아닌, 아이를 키우는 곳이 어린아이와도 같아서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마치 작은 꽃병과 같아서 꽃을 꽂을 수는 있지만 나무를 심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 건 불가능하다고 비유했다.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건 여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녀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중에 좋은 사람에게 시집가서 부군에게 첩을 들인 후, 첩이 낳은 아이를 친자식처럼 키우라고 조언해주었다.시 씨 가문이라는 후원이 있으면 그녀가 아이를 낳을 수 없어도 아무도 그녀의 지위를 흔들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 씨 가문의 재물은 그녀가 평생 부귀하게 살기에 충분했다. 신이의 조모도 그녀에게 아이를 낳을 수 없으니 자세를 낮춰야 한다고 했다. 시 씨 가문의 딸이라고
추운 겨울이 되자 눈이 내려 성릉관은 하얗게 뒤덮였다. 세상이 마치 깨끗해진 것처럼 보였다. 이황자는 몇 년 동안 너덜너덜한 승복을 입고 발우를 받쳐 들고는, 가는 길에 동냥을 하다가 절을 보면 이틀 묵으며 부처님께 참회하면서 살았다. 사실 그는 원래 있던 절에서 계속 지낼 수 있었다. 편안하진 않지만 풍찬노숙할 필요도 없고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그런 안일한 곳에서는 평생 죄를 씻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계속 길을 걷고 계속 고생해야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했다. 그가 성릉관에 도착했을 때 짚신은 이미 찢겨 있었고 발바닥에는 두꺼운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이제는 신발을 신지 않고도 자갈이 가득한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추운 날씨에는 모든 옷을 껴입어도 추위를 막을 수 없었지만 이미 익숙해진 뒤였다. 그는 눈보라를 맞으며 성릉관에 위치한 감은사로 향했는데, 몇 년 동안 발걸음을 멈춘 적이 없는 탓에 고단함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심지어는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아 그는 눈이 가득 쌓인 길에서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그는 따뜻한 두꺼운 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그가 있는 방에는 숯불이 피워져 있었고, 살짝 열린 창문으로 눈에 눌려 허리가 굽은 나뭇가지가 보였다. 그는 눈동자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렇게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의 마음속에 순간 욕심이 생겨 조금만 더 누워있고 싶어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문이 활짝 열렸다. 그가 벌떡 일어나 앉았는데, 갑자기 눈앞이 핑핑 돌더니 다시 힘없이 침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누워 있거라.” 이때 누군가가 부드러운 말투로 말하면서 약그릇을 그의 침대 옆에 놓았다. 그는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익숙해, 어지러움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돌려보니, 그 사람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서우 형?!’ 그는 자신이 잘못 보았을까 봐 다시 자세히 보려 했지만, 몸이 너무 어지러운
대황자는 봄 사냥 때 숙청제에게 꾸중을 듣고 돌아간 후 앓아누웠다. 당시 이황자와 서우가 모두가 걱정했는데 덕비는 오히려 기뻐했다. 그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황제폐하께서는 분명히 대황자를 싫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덕비는 이황자를 안고 반드시 부지런해야 하고, 태부와 황숙의 말을 잘 듣고 누구보다 잘 배워 황형을 제압해야 한다고 당부까지 했다. 그로 인해 이황자의 마음은 몹시 복잡했다. 덕비가 줄곧 그에게 태자와 황제가 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지 말해주었을 때 비록 그도 마음이 설렜지만 자신과 거리가 먼 얘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금 그와 대황형, 서우 형, 그리고 셋째 동생이 사이가 좋아 도저히 대황형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매일 모순적으로 지내다 보니 오히려 학업이 나빠졌고 승마 연습을 할 때도 여러 번 실수를 했다. 하지만 덕비는 이상하게 그를 탓하지 않았고 며칠 동안 계속 게으르게 하라고 했다. 그렇게 덕비는 이황자를 데리고 복마마를 자주 뵈러 갔고, 복마마 궁전에서 숙청제를 만날 수도 있었다. 덕비는 며칠 동안 그곳을 드나들더니 어느 날 굳은 표정으로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차가운 말투로 청이에게 자신의 보살핌이 없으면 아이가 태어날 수 있는지 보겠다고 했다. 황제폐하를 자주 뵈러 갈 수 없어 아쉬웠지만 이황자는 마음을 가다듬고 공부와 승마술에 전념했다. 이황자는 당시 앞날이 어떻게 될지도 몰랐고, 비록 매일 힘들긴했지만 한편으로는 즐거웠기에, 계속 이렇게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숙청제의 천추세에 승마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니 세 황자와 서우도 가서 겨뤄 보기로 했다. 원래 그런 대회에서 황자들은 재미있게 참석만하면 되지만, 덕비는 그 경기를 몹시 중시했다. 덕비가 이황자에게 마름쇠를 건넬 때, 그는 하늘이 무너져내리는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황자는 원하지 않았다. 그는 절대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대황형의 목숨을 앗으려 하다니, 이황자는 처음으로 어마마마가 무서워졌다.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