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릉서는 방에 들어선 후 모두에게 나오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온 집안의 사람들이 모두 뛰쳐나와 황공한 태도로 자신의 신분을 말했다. 여인도 무릎을 꿇었다. 붉은색 드레스에 팬치색 망토를 두르고 있어 그녀의 작은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다. 그녀는 오늘 사람들이 와서 딸을 데려갈 때부터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상하고 있었다. 물론 그전부터 그녀는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지 알고 있었고, 장공주가 무너졌으니 이제 당연히 밝혀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름이 뭡니까?” 제릉서가 분노로 찬 눈빛으로 물었다. “고청묘.” 그녀의 목소리는 약간 쉬었지만 꽤 매혹적이었고, 제릉서는 여전히 그녀를 노려보며 계속 물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본 게 언제입니까?” 고청묘는 사실대로 대답했다. “어제 오후에 상서께서 이곳에서 한 시진 정도 쉬다 가셨습니다.” 제릉서는 한 대 맞은 듯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제 오후에도 아버지가 왔었다는 말인가? 아버지는 이부를 장관 하시는데 점심엔 대부분 이부 후아에 계셨지. 설마..?’ “그는 항상 정오에 옵니까?” “예, 맞습니다.” 제릉서가 화가 난듯 이를 갈며 물었다. “얼마 만에 한 번 옵니까?” 고청묘는 냉정한 눈빛으로 사실대로 대답했다. “이틀에 한 번씩 오십니다.” “말도 안 돼!” 제릉서는 벌컥 화가 나서 냅다 소리쳤다. 고청묘는 고개를 들어 제릉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믿을 수 없다면 하인들에게 물어보십시오. 그는 딸을 보러 자주 왔습니다.” 제릉서가 째려보자 모든 사람이 너도나도 급히 무릎을 꿇었다.방금 그들은 자신의 신분을 말했었는데, 계산해 보면 시녀 8명, 시종 3명, 유모 2명, 호위 2명, 차부 2명, 정원사 1명, 그리고 조리사 4명 정도가 된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모두 그녀와 그녀의 딸을 모신다는 말인가...?’ 제릉서가 두 마마에게 눈짓을 보내자 두 마마는 즉시 고청묘를 끌고 들어갔다. 고청묘는 소리를 지르지도 않고 매우 협조적이
전숙이 말했다. “그래, 네 아버지는 원래 제1여관이라 불리는 송석석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녀가 네 아버지도 찾지 못한 일을 조사해 내니 네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괴롭겠느냐? 헌데, 그 여자에게 딸이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가서 보지 못했느냐?” 그러자 제릉서가 얼른 답했다. “그거 모두 헛소리입니다. 딸은 없고 오직 그녀와 그녀를 지키는 사람들만 있었습니다.” “그럼 됐다.” 전숙은 그제서야 마음이 놓였다. 제릉서 또한 자신의 어머니가 안심을 하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조부 쪽에는 쉽게 넘어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제제사한테는 제사서가 직접 가서 보고했는데, 제제사는 그의 말을 듣자마자 그의 뺨을 후려치며 꺼지라고 했다. 제제사의 방에서 비틀거리며 나온 제상서는 마음이 착잡해졌다. 그는 이 일은 북명왕을 탓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조정에서 인덕과 겸손했지만 유독 송석석에게만 석연치 않았다. 그가 여관이라는 이유로 치명적인 잘못을 저지른 것이었다. 또한 그는 송석석에게 너무 오만하게 굴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를 안중에 두지도 않았다. 어찌 되었든 그는 대리사에 가서 설명할 건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았다가는 대리사에서 다시 저택으로 찾아오면 그땐 가문의 사람들에게 설명할 방법이 없어질 것이다. 대리사에선 오늘 사온의 서건을 조사했는데, 이번엔 황제폐하의 지시대로 그녀에게 형벌을 가했다. 그녀는 손가락이 부러질 정도로 심한 형벌을 받아 아파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찍소리 하나 하지 않았다.도중에 아파서 기절했다가 다시 깨어난 그녀에게 허약하지만 흉악한 말투로 말했다.“다른 수단이 있다면 다 해보거라.”그녀의 말을 들은 진이도 고려하지 않고 기본적인 형벌은 모두 한 번씩 가했다. 그녀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묵묵히 참아내기만 했다.사람들은 역시나 이런 결과를 예상했다.‘선제께서 혹독한 형벌을 취소하지만 않았어도 그녀가 한 두 명은 자백할 수 있었을 텐데.’황제도 선제가 취소했던 형벌을
제상서는 가시방석에 앉은 듯 고통스러웠지만 그래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왕야님, 황제폐하께서는 이 여자들을 어떻게 처리할 계획이십니까?” 그러자 사여묵은 다소 차갑게 답했다. “그건 송 지휘사에게 물어보십시오. 이 부분은 그녀가 책임지고 있습니다.” 그러자 제 상서는 난처한 표정으로 송석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송 지휘사님…….” 그러자 송석석이 그의 말을 끊어 버렸다. “저는 이미 제 대인께 말했습니다. 그러니 제 씨 가문에서 직접 관리하셔도 되고 경위로 보내 통일로 관리해도 됩니다. 이건 제 상사가 결정하십시오. 제씨 가문에서 관리한다면 그녀들이 진성을 떠난다 거나 다른 사람과 접촉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아직 역모사건의 주모자가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제 상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경위에게 통일로 관리를 맡긴다면 어디로 데려갈 생각 입니까?” “저희가 이미 진성 곳곳의 암자에 연락하여 그녀들을 수용할 만큼 큰 암자가 있는지 알아보고 있는 중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수용할 비용은 고후부와 공주부를 수색해서 얻은 은전으로 지불할 것입니다.” “암자 말입니까?” 제 상서는 두 순으로 무릎을 만지며 생각하는듯 했다. “그렇다면 조건이 그리 좋지는 않겠네요.” “먹고사는 건 보장하지만 호화롭게 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송석석은 잠깐 멈추더니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역모사건이 종결되면 그녀들도 암자를 떠나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루라도 사건이 종결하지 않으면 그녀들은 계속 암자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뜻이군요.” 그러자 송석석이 말했다. “맞습니다. 제 상서께서 안쓰럽다고 생각된다면 가문에 남겨두고 혼자 관리해도 됩니다. 다만 그렇게 해서 문제가 생긴다면 제 상서가 책임져야 하겠지요.” 제 상서가 연신 고개를 저었다. “경위에게 맡기겠습니다.” “제 상서께서 그렇게 결정하셨다면 저희가 사람을 데려갈 것이지만요, 제 상서
그들은 고부진을 심사할 때도 형벌도구를 적지 않게 사용했다. 평시에는 찍소리도 못하던 겁쟁이가 웬일로 강인하게 아무것도 모른다고 딱 잘라 말했다. 그는 자신도 이용당한 것이라고 우겼다.형벌을 받을 때 그는 울부짖었다.“나는 피해자요. 사온이 가장 미안한 사람은 나와 부인, 그리고 내 딸들이오. 사람을 죽이고 다른 가문으로 보내다니 정말 미친 여자요. 이제 그녀도 체포되었으니 나도 드디어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소.”경조부의 공양도 직접 그를 심문하러 왔었다. 경조부는 대리사보다 형벌을 더 많이 사용하고 수단이 더 많았지만 고부진은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잡아뗐다.사건은 아침 조정에서 보고했는데 문무백관들은 모두 듣고 있었다. 모두들 불안하던 예전과 달리 지금은 모두의 마음이 안정되었다.조정에 가지 않던 연왕조차도 사온과 고부진이 아무도 불어내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히려 하인들이 연왕과 회왕이 공주부에 갔었다고 자백했다. 하지만 그들 말고도 진왕과 녕왕, 그리고 회왕마저 갔었다. 그러니 그들이 역모를 꾸민 걸 직접 듣지 못한 이상 증거로 삼을 수 없었다.왜냐하면 오라버니나 동생으로서 누나나 동생을 면회하러 가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기 때문이었다.게다가 연왕은 진성으로 돌아온 후 장공주댁에 한 번 밖에 가지 않았으니 어떤 일도 그를 끌어들일 수 없었다.이 사건도 드디어 중단되었다. 숙청제가 아침 조정에서 명령을 내렸다. 경위가 책임지고 사온을 종인부에 가두고 대리사는 계속 역모사건을 조사하고 언제 배후를 알아내면 언제 사건을 종결할 것이라고 했다.피해를 입은 여자들을 위해 고부진을 처형하고 고후부는 공범이 되어 작위를 회수하고 서민으로 강등되었다. 그러나 숙청제는 그들의 집을 수색하지 않았고 몇 년 동안 장공주의 덕에 모은 재산도 몰수하지 않았다. 다만 그들에게 은자 10만 냥을 내놓아 그 여자들을 안치하도록 했다. 첩은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서녀들은 모두 암자에 남았다. 그들이 먹고 생활하는 돈은 모두 고후부에서 냈다. 이
연왕도 무상과 이 일을 상의했다. 무상은 사람을 파견하는 것을 찬성하지 않았지만 연왕은 사온이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문제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그를 폭로하지 않았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멍청한 군주가 간교하긴. 그렇게 많은 무기와 갑옷을 조사해 내 일벌백계하다니. 사온을 종인부에 가두었으니 사건이 종결되지 않는 한 사여묵이 계속 미친개처럼 본왕을 물어뜯을 것이다. 그러니 사온이 살아있다는 건 나에게 아주 큰 위협이야.” 그러자 무상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위협이긴 하지만 작전이 실패하기라도 한다면 매우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사온은 미친년이니 그땐 바로 당신을 폭로할 것입니다.” “그래서 본왕은 구출의 명목으로 접근한 뒤 기회를 봐서 그녀를 암살할 작정이다.” 하지만 무상은 여전히 반대했다. “그건 너무 위험합니다. 왕야님은 그런 위험을 무릅쓸 필요 없습니다. 왕야님은 매일 궁에 들어가 간호만 하면 됩니다. 다른 일은 일제 상관하지 마십시오. 이게 최상의 방법입니다.” “아무래도 모험이다. 하지만 그녀가 죽지 않으면 난 하루도 편한 잠을 잘 수 없을 것이다.” 연왕의 눈 밑에는 독기가 서려 있었다. “그녀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무상은 그가 결정을 내린 것을 보고 말했다. “왕야님께서 정말로 그렇게 하시겠다면 사사들을 무림 인사로 변장시켜 죄수들을 겁탈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적어도 황제폐하께서는 사온이 무림에서 사람들을 키운 것이라고 추측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엔 송석석이 호성 하는 것이기에 그녀의 눈 밑에서 사람을 죽이거나 구하는 건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해봐야 하지 않겠느냐?” 연왕은 요즘 밤잠을 이루지 못해 많이 초췌해졌는데 외부인들은 어머니 걱정에 지쳤다고 생각했다.그는 계속 말했다. “언제 호송할 것인지 알아보고 10명만 파견하면 될 것이다. 지금은 사온의 사람을 쓸 수 없으니 정보를 알아볼 때 회왕부의 사람을 쓰도록 하거라.” 그러자 무상은 고개를 끄덕
아니나 다를까 석연거리를 지나자 송석석은 사방에서 살기를 느꼈다. 그 살기는 매우 강해서 보통 사람이 맡을 수 없는 피비린내까지 섞여 있었다. 송석석은 이런 느낌에 너무나도 익숙했다. 바로 장군부에 나타났던 사사들의 기운이었다. ‘사부님은 예전에 송석석에게 사사를 양성하는 과정이 매우 가혹하다고 했었지. 살아남은 사람은 짐승의 시체나 사람의 시체를 밟고 나온 자들이었다. 시체가 가득한 피바다에서 빠져나온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무공이 강하고 포악하면서도 짙은 살기와 피비린내를 뿜어내지.’ “모두 경계한다.” 그녀의 목소리는 바람소리를 뚫고 모두의 귀에 떨어졌다. 모든 사람들의 눈빛에는 경계로 가득 찼고 무기를 쥐고 주변의 움직임을 느끼고 있었다. 다시 사거리를 자나자 공기 중에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건 칼날이 칼집을 나와 바람을 스치는 소리였다. “멈춰.” 필명은 손을 들어 대열을 멈추게 하고 부근의 백성들을 해산시켰다. “자객이 있어 위험합니다.” 백성들은 모두 장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사람들이라 많지 않았다. 그들은 필명의 말을 듣고 멍해 있다가 바로 발을 빼서 도망쳤다. 이때 장검 한 자루가 허공을 가르며 송석석을 향해 날아왔다. 송석석은 바로 말에서 날아올라 도화창으로 막자 검이 날아가 땅에 떨어졌다. 그러자 좌우에서 열 명가량의 사람이 날아왔다. 그들은 모두 얼굴을 가린 채 병기를 손에 쥐고 송석석을 향해 돌진했다. 그들의 목적은 오직 송석석뿐인 것 같았다. 송석석은 안색이 굳어지며 재빠르게 검 위로 날아올랐고, 도화창으로 쓸어버리자 검은 땅에 떨어져 진동을 일으켰다. “죽여라.”필명은 검을 들고 앞으로 돌격했다. 경위는 10명을 남겨 마차를 지키게 하고 나머지는 모두 돌진했다.송석석의 도화창으로 막으며 돌진하자 자객들은 연신 후퇴했다. 금창이 땅에 부딪쳐 불꽃이 튀면서 챙그랑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송석석은 바람이 낙엽을 쓸어내리는 것 같이 속도가 빨랐다. 적어도 5명의 자객이 송석석과 싸우
비명소리와 함께 9명의 자객은 재빨리 날아올라 뿔뿔이 흩어졌다. 필명은 자신의 추측이 맞다고 생각했다. 자객들은 사온을 구출하러 온 것이 아니라 죽이러 온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마차를 바라볼 때 멍해졌다. 그 자객은 마차에 끌려들어 갔고 두 발은 이미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송석석은 웃으며 앞으로 다가가 마차의 커튼을 열었다. 필명은 가까이서 보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왕야님?” 마차에는 사여묵 뿐만 아니라 사온도 마차 한쪽에 묶여있었는데 방금 비명을 지른 것이 바로 그녀였다. 그녀는 지금 매서운 눈빛으로 그 자객을 주시하고 있었다. 사여묵은 자객을 잡고 마차에서 내려 필명에게 말했다. “대리사로 데려가거라. 내가 그의 혈을 찍었고 입에 있던 독약도 꺼냈지만 그래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 데려간 후 연근산을 먹이도록 하거라. 이런 사사들은 독을 먹는 것 외에도 스스로 경맥을 끊어 죽을 수 있다.” 필명은 자객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사여묵을 쳐다보았다. ‘왕야님은 언제 마차에 탄 거지? 분명히 사온을 호송하기 전까지 마차엔 아무도 없었는데. 그리고 대리사에서 나온 후에도 경위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송 대인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필명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일단 사람을 종인부로 보내고 다시 얘기하지.” 송석석은 사여묵을 바라보며 승리의 손짓을 하며 말했다. “당신은 섬광을 타고 가십시오. 내가 마차를 타고 같이 가겠습니다.” “그러시오. 나머지는 당신에게 맡기겠소.” 사여묵은 말을 끌며 사온을 쳐다보자 사온도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런다고 내가 말할 줄 아느냐?” 그러자 사여묵은 웃으며 다가가서 조용히 말했다. “당신이 말하든 말든 중요하지 않아. 왜냐하면 우리의 목적은 자객을 잡아서 누군가를 두렵게 만드는 것이니까. 사실 난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 그러자 사온은 전혀 놀라지 않고 비아냥거리듯 입을 열었다. “그럼 가서 황제에게 말하거라. 증거를 제출하란
마차가 종인부에 도착했다. 송석석이 사온을 마차에서 끌어 내리자, 황실의 죄수를 관리하고 있는 유은이 나와 인수인계를 받았다. 인수인계를 마친 후, 유은은 곧바로 사온의 전신에 무거운 쇠사슬을 채우라고 명령했다."황제께서 하명하시길, 사온이 혀를 깨물어 자결하지 못하도록 그녀의 치아를 절반가량 뽑아 버리고 손목과 발목의 힘줄을 끊어 버리라 하셨습니다. 송 대감께서도 함께 감시하시지요. 그래야 돌아가 보고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그러자 사온은 이를 악물며 바락바락 애를 썼다."네가 감히 그럴 수 있겠느냐?"하지만 송석석은 가볍게 무시했다."길을 안내하라." 더는 마차에서의 냉정을 유지할 수 없었던 사온은 끌려가면서도 포효를 멈추지 않았다. 종인부는 매우 넓었고, 동서는 널찍한 골목 하나로 나뉘어 있었는데, 동쪽은 사무를 보는 곳이고 서쪽은 죄수를 가두는 장소였다. 종인부는 황실 종친만을 위한 감옥이었기에 그저 작은 뜰로 구분되어 있었지만 높은 벽으로 둘러싸 경비가 삼엄하였다. 송석석은 이미 금군 통령 왕정에게 금군을 파견해 감시하도록 명했다.금군은 이미 도착했으나 왕정은 보이지 않았다. 유은은 종인부의 관리로 이곳의 죄수를 관리하고 있었다. 종인부에도 경비가 있었지만, 사온은 황제의 특별한 조치로 금군을 따로 더 배치했다.자그마한 뜰에 도착한 사온은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거기에는 이미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었고, 허름한 낮은 탁자 위에는 이를 뽑기 위한 집게와 손발의 힘줄을 끊기 위한 쇠갈고리가 놓여 있었다.“놔라!” 거세게 몸부림치던 사온은 몸을 감싼 무거운 쇠사슬 때문에 그만 균형을 잃고 그대로 앞으로 넘어지고 말았다.이런 일들에 이미 익숙한 듯한 유은은 미동도 없이 담담하게 말했다. "전하께서 비록 너의 공주 신분을 박탈했으나, 여전히 종인부에 보냈구나. 이는 은혜를 베푸신 것이니, 무릎을 꿇음으로써 그 은혜에 감사하거라."말을 마친 유은은 부하들에게 사온을 일으키라고 명령했다. 그 충격에 피를 흘리던 사온의 입술이 다시 터
그러자 송석석이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왕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아주 잘 대해줍니다. 조카딸의 혼담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집간 부군이 잘 대해준다 하더군요. 다만 그녀는 자신이 두 번 시집갔음에도 처가에 머무는 것이 조카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되어 그러는 모양입니다.”그 말에 전북망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순간 번개처럼 날렵하지만 마음씨 따뜻한 최씨 부인이 떠올랐다. 최씨 부인에게는 적자와 서자녀들이 있었고, 아직 혼담이 정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혼인 문제로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에 시달렸을지 생각하니, 전북망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형수로서의 최씨 부인을 존중하며,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 없었다. 이때 송석석이 그의 생각을 끊었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전북망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우리 단둘이 여기에 있으면, 섭정왕이 질투하지 않을까요?” 송석석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침착하게 답했다. “이 정도 신뢰도 없다면, 제가 어찌 현갑군 지휘사로 오래 근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숨김없이 모든 걸 공유합니다. 이번 만남 역시 그분께 이미 알려두었죠.”송석석이 떠나자 전북망도 따라나섰다. 그는 섭정왕이 어딘가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의심했지만, 정작 별청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마당에서야 섭정왕을 발견했는데, 그는 대장군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송석석을 보자 미소로 맞이하며 불러세우는 섭정왕의 모습에 전북망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진정한 부부란 저런 것일까.'그러나 성릉관이든 진성이든, 남녀의 단독 만남은 명예에 흠이 될 수 있음도 잘 알았다. 특히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은 더욱 조심해야 했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들을 걱정하는가.’자조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왕청여의 제안은 여전히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5일의 고민 시간이 주어졌다. 사여묵과 송석석이 진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최씨 부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답은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 전북망은 송석석과 다시 만났다. 사실 그전에도 송석석이 성릉관으로 갔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서먹해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이 매번 성릉관을 떠날 때마다 몰래 배웅하곤 했다. 전북망은 자신이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늘 송석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방과 왕청여에게도 미안하긴 하지만, 그들과는 서로 감정을 소모하고 다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장군부만 송석석에게 상처를 줬을 뿐, 송석석은 장군부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않았다. 비록 이혼한 후에는 전북망 어머니의 병세에 대해 상관하지 않았지만 큰형수에게 어떻게 단설환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기까지 했다.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는 이미 섭정 왕비가 되어있고 나서였다. 변방의 전사들에겐 양식과 무기가 풍부하고, 봉록까지 올라, 그들에겐 이득이기에 이제는 조정의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었다. 섭정왕은 한때 장수였기에 병사들이 배불리 먹어야만 국토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북망과 송석석이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섭정왕과 함께 소 대장군에게 생신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소 대장군의 눈빛은 여전히 자애롭고 인자했다. 전북망은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그때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면 지금 송석석과 함께 노장군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일 것이라는 후회를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같은 생각인 걸 보니, 자신만 제자리에서 멈춰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송석석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생일잔치가 끝난 후에 송석석이 뜻밖에도 먼저 그를 찾았다. 그와 송석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섭정왕은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걱정되지도 않는가?’전북망은 당황하고 불안해 보였고, 송석석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먼저 입을 열지도 못하고 송석석이 말하기만을 기다리
전북망은 성릉관에서 몇 년 동안 두 번이나 발탁되었고, 지금은 장군의 신분으로 수천 명의 병사를 관리하고 있다. 계속 성릉관에 주둔하고 있어 다시 진성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고, 진성의 부름 없이는 제멋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재혼도 하지 않고 여전히 혼자 살아갔다. 성릉관의 모래바람은 해마다 그의 얼굴에 흔적을 남겨 또래들보다 몇 살이나 더 늙어 보였다. 심지어는 몇 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기에, 진정제를 먹어야만 잘 수 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그때 이방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송석석과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부부가 되었을까? 아마도 우린 귀여운 자녀도 낳았겠지. 그리고 나는 군대에서 열심히 일하고 석석은 가문의 내무를 책임지며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를 돌보고 있었겠지? 설령 내가 승진을 하지 못하고 평생 장군으로만 살아도 그는 날 떠나지 않았겠지.’ 이전의 전북망은 송석석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였는데 자신을 위해 날개를 부러뜨리고 병든 시어머니를 돌보며 군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책임지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그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돌이킬 수도 없었다. 전북망에게는 이미 이방이 있었고 이방을 사랑한다고 했으니, 송석석이 이혼하자고 했을 때 그는 심한 말을 하고 후회하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송석석 또한 후회할 게 없었다. 이혼을 하면서 전북망을 위해 부러뜨렸던 날개가 다시 자라나 전쟁터로 날아가 쉽게 공을 세웠으니까 말이다. 이방은 송석석이 큰 가문의 아가씨인 데다가 부친과 오라버니가 그를 위해 길을 닦아주었기에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의 성공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문이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주된 원인은 아닐 것이다. 만종문에서 송석석의 무공은 거의 최고였는데, 그건 송석석이 그만큼 노력을 했고, 그만큼 땀을 흘렸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북망은 송석석을 존경했지만 그는 자신이 송석석을
어머니께 간청해도 소용이 없자 신이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건 더 심한 꾸지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이가 이 혼사를 반대하는 것은 양지춘과 접촉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양지춘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서 놀며 감정을 쌓으라고 했다. 신이는 가기 싫었지만 어머니가 억지로 그녀를 마차에 태웠고, 심지어는 하녀에게 그녀가 부적절한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엄명했다. 양지춘의 얼굴은 그나마 멀쩡하게 생겼는데, 처음에는 신이를 조금이나마 존중하는 척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신이의 외모와 품평을 논하며 신이가 외모가 예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그를 부인으로 들이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그의 오만한 태도는 신이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아마도 신이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양지춘은 일부러 신이를 마차에 태워주는 척하며 그녀의 엉덩이를 꼬집었다!그 순간 신이는 온몸의 피가 머리 위로 솟구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경박한 눈빛에 신이는 이내 눈물이 쏟아졌고, 모욕감에 온몸을 떨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집에 돌왔는데, 하녀와 마부는 그의 동작을 보지 못한 탓에, 오히려 그가 세심하고 자상하다며 그녀의 어머니 앞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이는 억울해서 어머니에게 그 일을 말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그녀가 일부러 꾸민 말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꾸짖으며 사흘 동안이나 외출을 금지했다. 신이는 그렇게 방에 갇혔고, 매일매일을 눈물로 얼굴을 씻었다. 심지어 그날 선비의 말을 듣고 호수에 뛰어들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내가 양지춘에게 시집가는 것이 물에 빠져 죽는 것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사흘 후, 외출 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신이는 다시 경산사로 가서 같은 핑계로 하녀를 내보냈다. 이번엔 정말 죽을 각오로 호숫가에 간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다시 그 선비를 만났다.그는 쓸쓸하게 호숫가에 앉아 작은
신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나무 그늘에 몸이 가려져 있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초라해 보였고 눈 밑에는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바로 다리 앞에서 그림을 팔던 선비이자, 학정이 말하던 퇴학 해서 기녀를 키우는 학생이었다!“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신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짜증을 냈지만, 그가 한 말을 떠올리자 내심 두려웠다. “나는 여기에 물귀신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거짓말하는 것이겠지요.” 신이는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귀신은 두려웠고 진흙탕에 영원히 깔려 있는 건 더욱 두려웠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가 걸어 나오자 얼굴은 더욱 여위어 보였다. “호숫가의 주변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오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건 사람들이 이곳으로 예불하기 위해 오는 것이지, 경치를 보러 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절을 하고 바로 돌아가니 당연히 보지 못하겠지요.” 신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순간 깊이가 보이지 않는 호수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그는 여전히 굳게 서서 말했다. “예불하는 사람은 천지와 자연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경치가 있다면 반드시 한 번 보러 올 것입니다. 이런 곳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좋은 곳일 텐데 아무도 없다는 게 아기씨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것이 사실인지는 몰랐지만,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감히 그런 무서운 곳에서는 죽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자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절대 쉽게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고 싶어도 살 지 못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 밑은 이내 붉어졌고 눈물이 고여 반짝이는 것 같
신이의 사촌 여동생과 하녀는 신이를 찾으러 돌아왔다. 신이가 하녀보고 이순에게 삼백문을 주라고 하자 이순은 웃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원래는 우연한 만남일 뿐이라 다시는 접점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 조모님의 생신 때 가문 연회에서 공학정이 데리고 온 제자들 중에 이순이 있었다. 강남의 예의 규율은 진성처럼 엄격하지 않아서 연회에 참석할 때 여인들도 앞마당에 갈 수 있었다. 이순은 신이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신이는 그때 면사포를 쓰고 있었고 두 눈만 드러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순은 식사를 하지 않고, 신이의 조모에게 생신 축하 그림만 드린 후에 집에 일이 있다며 작별을 고했다. 그가 떠나자마자 학정이 그를 언급하며 안타까운 말투로 말했다. “총명하긴 한데 진취심이 없어서 계속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걸 여기로 데려와 진취성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사귀게 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로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르다니. 정말 실망이군. 학교를 그만두겠다면, 이젠 마음대로 하라고 해야겠어.” 그러자 신이의 부친이 위로했다.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껜 학생이 많으니 그가 나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학정은 마치 울화가 쌓인 것처럼 말했다. “그는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네. 그런데 진취성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동창에게 돈을 빌리질 않나, 게다가 집에 기녀까지 키우고 있다더군.” 신이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런 사람은 얘기할 가치도 없습니다.” 신이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서 왠지 마음속으로 실망감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날은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같다고 생각해 마음이 갔던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 후, 신이의 혼사도 낙착되었다. 그녀의 약혼자는 회주 지부의 둘째 아들인 양지춘이고, 올해 22살이었다. 22살인데도 결혼하지 않았던 건 첩을 통해 서자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은 가문은 그
그의 이름은 신이었는데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에 대해서 말할 때, 경멸하는 기색을 띠었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모르는 사람까지 모두 침을 뱉으며 뻔뻔하다고 할 정도였다. 알다시피 애인과 야반도주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는 것보다 더 욕먹을 일이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후회하냐고 묻기도 했다. 그녀는 시집간 것을 후회하지 않지만 죄책감을 느끼긴 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시 씨 가문의 명성이 손상되어 형제자매들과 조카들이 혼사에 어려움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신이는 시 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태어날 때부터 온갖 보살핌을 받아왔다. 먹는 것은 물론 모두 산해진미이고, 입는 것도 모두 능라 비단이었다. 게다가 보모님과 오라버니의 총애까지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그녀에겐 한 가지 결함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열네 살 때까지 월사가 오지 않은 것이었다. 많은 의사들을 불러 진찰을 받고 밤낮으로 약을 먹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몸이 차서 그러니 몸조리를 하면 나을 수 있다고 위로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몰래 의사가 부모님께 하는 말을 들었다. 의사는 그가 몸이 차서 그런 병이 생긴 것이 아닌, 아이를 키우는 곳이 어린아이와도 같아서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마치 작은 꽃병과 같아서 꽃을 꽂을 수는 있지만 나무를 심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 건 불가능하다고 비유했다.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건 여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녀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중에 좋은 사람에게 시집가서 부군에게 첩을 들인 후, 첩이 낳은 아이를 친자식처럼 키우라고 조언해주었다.시 씨 가문이라는 후원이 있으면 그녀가 아이를 낳을 수 없어도 아무도 그녀의 지위를 흔들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 씨 가문의 재물은 그녀가 평생 부귀하게 살기에 충분했다. 신이의 조모도 그녀에게 아이를 낳을 수 없으니 자세를 낮춰야 한다고 했다. 시 씨 가문의 딸이라고
추운 겨울이 되자 눈이 내려 성릉관은 하얗게 뒤덮였다. 세상이 마치 깨끗해진 것처럼 보였다. 이황자는 몇 년 동안 너덜너덜한 승복을 입고 발우를 받쳐 들고는, 가는 길에 동냥을 하다가 절을 보면 이틀 묵으며 부처님께 참회하면서 살았다. 사실 그는 원래 있던 절에서 계속 지낼 수 있었다. 편안하진 않지만 풍찬노숙할 필요도 없고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그런 안일한 곳에서는 평생 죄를 씻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계속 길을 걷고 계속 고생해야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했다. 그가 성릉관에 도착했을 때 짚신은 이미 찢겨 있었고 발바닥에는 두꺼운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이제는 신발을 신지 않고도 자갈이 가득한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추운 날씨에는 모든 옷을 껴입어도 추위를 막을 수 없었지만 이미 익숙해진 뒤였다. 그는 눈보라를 맞으며 성릉관에 위치한 감은사로 향했는데, 몇 년 동안 발걸음을 멈춘 적이 없는 탓에 고단함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심지어는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아 그는 눈이 가득 쌓인 길에서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그는 따뜻한 두꺼운 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그가 있는 방에는 숯불이 피워져 있었고, 살짝 열린 창문으로 눈에 눌려 허리가 굽은 나뭇가지가 보였다. 그는 눈동자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렇게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의 마음속에 순간 욕심이 생겨 조금만 더 누워있고 싶어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문이 활짝 열렸다. 그가 벌떡 일어나 앉았는데, 갑자기 눈앞이 핑핑 돌더니 다시 힘없이 침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누워 있거라.” 이때 누군가가 부드러운 말투로 말하면서 약그릇을 그의 침대 옆에 놓았다. 그는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익숙해, 어지러움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돌려보니, 그 사람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서우 형?!’ 그는 자신이 잘못 보았을까 봐 다시 자세히 보려 했지만, 몸이 너무 어지러운
대황자는 봄 사냥 때 숙청제에게 꾸중을 듣고 돌아간 후 앓아누웠다. 당시 이황자와 서우가 모두가 걱정했는데 덕비는 오히려 기뻐했다. 그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황제폐하께서는 분명히 대황자를 싫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덕비는 이황자를 안고 반드시 부지런해야 하고, 태부와 황숙의 말을 잘 듣고 누구보다 잘 배워 황형을 제압해야 한다고 당부까지 했다. 그로 인해 이황자의 마음은 몹시 복잡했다. 덕비가 줄곧 그에게 태자와 황제가 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지 말해주었을 때 비록 그도 마음이 설렜지만 자신과 거리가 먼 얘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금 그와 대황형, 서우 형, 그리고 셋째 동생이 사이가 좋아 도저히 대황형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매일 모순적으로 지내다 보니 오히려 학업이 나빠졌고 승마 연습을 할 때도 여러 번 실수를 했다. 하지만 덕비는 이상하게 그를 탓하지 않았고 며칠 동안 계속 게으르게 하라고 했다. 그렇게 덕비는 이황자를 데리고 복마마를 자주 뵈러 갔고, 복마마 궁전에서 숙청제를 만날 수도 있었다. 덕비는 며칠 동안 그곳을 드나들더니 어느 날 굳은 표정으로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차가운 말투로 청이에게 자신의 보살핌이 없으면 아이가 태어날 수 있는지 보겠다고 했다. 황제폐하를 자주 뵈러 갈 수 없어 아쉬웠지만 이황자는 마음을 가다듬고 공부와 승마술에 전념했다. 이황자는 당시 앞날이 어떻게 될지도 몰랐고, 비록 매일 힘들긴했지만 한편으로는 즐거웠기에, 계속 이렇게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숙청제의 천추세에 승마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니 세 황자와 서우도 가서 겨뤄 보기로 했다. 원래 그런 대회에서 황자들은 재미있게 참석만하면 되지만, 덕비는 그 경기를 몹시 중시했다. 덕비가 이황자에게 마름쇠를 건넬 때, 그는 하늘이 무너져내리는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황자는 원하지 않았다. 그는 절대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대황형의 목숨을 앗으려 하다니, 이황자는 처음으로 어마마마가 무서워졌다.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