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해철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청아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 "내가 너를 얼마나 아꼈는데 감히 나를 배신해?!" 고청아는 바닥에 쓰러져 버렸고 입가에서는 서서히 피가 흘러 나왔다. 그녀는 두 손으로 땅을 짚으며 무릎을 곧게 세웠지만, 눈물이 쏟아져 나왔고 입술은 덜덜 떨렸다. "죄송합니다.. 저는 죄가 많아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굳이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네가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위해철은 그녀를 또 한 번 걷어차며 분노했다. "내가 부모님은 어디에 있냐고 물었을 때 너는 뻔뻔하게 안 계신다 했지 않았느냐!” 고청아는 바닥에 엎드린 채 흐느꼈다. 그녀를 향했던 사랑을 이제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송석석은 옆에서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전날 황제께서 직접 말씀하신 덕분에, 국공부는 이 폭풍우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어 다행이였다. 황제께서 직접 이들을 피해자로 여기셨으니, 쉽게 번복하지는 않으실 것이다. 국공부와 제씨 가문을 마지막에 조사한 것은 역시 옳은 판단이었다. 송석석은 바닥에 엎드려 울고 있는 고청아에게 물었다. "네가 훔친 도면에 갑옷과 궁노기도 있었느냐?" 국공부의 대부분은 무장 출신이었기에, 이 질문의 의도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동시에, 송석석이 결코 자신의 명예나 공로를 탐내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녀가 욕심을 부렸다면, 고청아를 바로 끌고 가 그녀가 궁노기와 갑옷의 도면을 가져갔다고 주장할 수도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공을 세울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송석석이 이렇게 묻는 것은, 고청아가 "없었다"고 답하면 사건이 그나마 수습될 여지가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궁노기와 갑옷이 다른 무기와는 그 의미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모두의 시선이 고청아에게 쏠렸고, 위해철은 눈에 핏발이 서도록 그녀를 응시하며 외쳤다. "생각을 잘하고 대답하거라!" 고청아는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었다. 엷게 물든 붉은 그녀의 입술은 떨리고 있었다."궁노기와 갑옷
위국공이 자리에서 일어나 송석석과 함께 서재로 향했다. 걸음을 옮기던 그가 잠시 멈추고 송석석에게 물었다. "큰아들과 함께 가도 되겠소?" 송석석은 그가 바로 위이준임을 알아 차렸고 또한 그가 위국공의 성에 차지 않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물론이오." 위이준은 당황해 잠시 멍해졌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는 평생토록 부친이 자신을 썩 탐탁치 않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혹 그가 너무 유부단하고 느껴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항상 셋째나 넷째와 상의했었고 그를 부르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넷째가 아닌 자신을 부른 것이다. 너무 예상밖이 없던 거이다.서재에 다다른 위국공은 하인들에게 안정을 돕는 향을 피우게 했다. 성격이 급하고 화가 많은 탓에 이 향을 항상 서재에 두었으나, 오늘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송석석을 위해 준비했다. 그는 송석석이 밖에서 반 시진을 기다리고 물세례까지 맞을 뻔한 일을 모조리 잊기를 바랐다. 자리에 앉은 송석석은 말을 돌리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숨기지 않고 말하겠소. 전날 전하께 보고하였고 상황을 알게 된 전하께서는 고부진의 서녀와 첩들을 모두 피해자로 인정하셨소. 국공부는 그 후에 찾아왔소." 위국공은 잠시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그게 도대체 무슨 뜻이오?" 그러나 위이준은 이미 눈치를 채고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송석석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송 지휘사께서 국공부를 아껴 주신 데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럴 필요는 없소. 나는 국공부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소. 그녀들은 모두 사온의 협박을 받았던 것이고 유청과 같이 생모의 목숨이 사온의 손에 있었으니, 어쩔 수 없이 명령을 따랐던 것이오. 유청과 같은 이는 여러 명이었고 각기 다른 임무를 수행 중이었소. 그러나 국공부의 이 서녀가 가장 위험했던 이유는 장공주부에서 발견된 무기와 갑옷이 병부에서 제작된 것과 유사했기 때문이오. 공부부터 조사하고 전하를 뵈었다면 이 모든 여인들이 공범으로 여겨졌
위국 공부를 하려고 떠난 송석석의 마음이 아직 가벼워지지는 않았다. 내일은 또 제씨 가문으로 가야 했고, 그 외에는 휘왕도 있었다. 사온이 휘왕에게도 사람을 보냈다는 소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송석석은 경위를 대동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사여묵과 함께 방문하여 이 사실을 알릴 계획이었다. 회왕은 자손들이 모두 봉지에 있기에 홀로 돌아왔고, 황제도 그를 경계했다. 특히, 사온의 배후 인물이 아직 밝혀지지 않았기에 황제는 지방에 있는 번왕들에 대한 의심을 떨치지 못했다. 밤이 되어 사여묵은 송석석과 함께 휘왕부로 향했다. 손에는 선물이 들려 있었고 당연히 문병의 명목하에 찾은 것이라 했다.저녁 식사를 마친 휘왕은 소위 '취미 생활'을 즐기고 있었으니, 부중에서 있는 가희들이 번갈아 가며 한창 솜씨를 뽐내고 있었다.그들이 도착했을 때, 의자에 반쯤 드러누운 휘왕이 손으로 팔걸이를 두드리며 가벼운 춤을 추고 있었다. 가희는 얼굴을 가린 채 고금을 연주하며 노래를 불렀는데, 그 목소리는 마치 숲 속에서 날아오르는 꾀꼬리처럼 맑고 아름다웠다. 가희의 가늘고 하얀 손가락이 현을 튕길 때마다 고금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산과 물이 흐르는 듯한 선율에 마음이 평온해지고, 모든 걱정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송석석과 사여묵 역시 이름 모를 선율에 점점 빠져들었다. 한 공연이 끝나자 휘왕은 눈을 떴다. 그제야 두 사람은 가까이 다가가 인사를 올렸다. 그러자 휘왕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늦은 밤에 찾아온 걸 보니 좋은 소식을 가져온 것 같지는 않구나." 사여묵은 손에 든 선물을 살짝 들어 보이며 말했다. "숙부님, 선물을 드리는 일이 어찌 나쁜 일이겠습니까?" 송석석도 미소를 띠며 인사했다. "숙부님께 문안 드립니다." 눈을 가늘게 뜨며 송석석을 바라보던 회왕은 입꼬리를 올렸다."상국의 첫 여성 관리라니, 정말 당당하고 기개가 넘치는 모습이구나. 사내놈들에게 조금도 뒤지지 않는구나." "과찬이십니다, 숙부님." 송석석은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집사가 한 여인과 함께 걸어나왔다. 벚꽃이 수놓인 드레스를 입은 여인은 풍만한 체형에 둥글둥글한 복부가 특히 돋보였다.매우 뚱뚱한 것은 아니었지만,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탓에 더욱 살쪄 보였다. 하지만 아무리 살이 쪘어도 미모는 가릴 수 없었고,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와 뽀얀 피부, 붉은 입술이 그녀의 매력을 더했다. 집사는 이미 그녀에게 귀빈들이 누구인지 말해두었기에 들어오자마자 예를 차렸다."고청영, 두 분께 문안인사 올립니다." 그녀의 눈은 별처럼 반짝였고, 예를 다하고 나서도 밝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 모습은 마치 달콤한 과일처럼 사랑스러웠다. "고청영이라니, 정말 예쁜 이름이구나." 송석석은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는데, 고청영은 다른 고씨 서녀들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그녀는 고청무처럼 요염한 매력을 풍기지도 고청란처럼 강인한 자존심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게다가 고청아처럼 갸냘픈 면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밝고 사랑스러웠다. 맑게 빛나는 눈은 어떤한 상처도 받지 않은 듯했다. 고청영도 웃으며 답했다. "저희들 이름은 모두 예쁩니다. 아버지께서 다른 건 몰라도 학식은 좀 있는 분이거든요. 고청영, 참 예쁜 이름이죠. 하지만 뜻은 그닥 좋지 않습니다. 평생 그림자처럼 살아야 한다는 뜻이잖습니까? 여기 휘왕부에서 충분히 누릴 만큼 누렸습니다. 이제 데려가셔도 됩니다.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너를 데려가려 했다면, 밝은 낮에 경위를 대동하겠지, 늦은 밤에 선물을 들고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청영은 그제서야 눈을 반짝이며 송석석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송 지휘사님은 우리 여인들에게 큰 영광을 안겨주셨습니다. 저도 지휘사님처럼 되고 싶군요... 아니, 이제 그렇게는 될 수 없습니다. 관리는 너무 힘이 드니 차라리 먹고 노는 것이 훨씬 좋을 듯합니다." 송석석은 그만 웃음을 터뜨리며 휘왕을 바라보았다. "예상치 못한 보배를 얻으셨군요. 사랑스러운 여인이 곁에 있으니
휘왕부를 떠난 송석석은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동안 장공주부의 첩들과 서녀들은 마치 무거운 산처럼 그녀의 가슴 위에 올려져 그녀를 숨이 막히게 짓눌렀다.송석석은 여인들이 왜 장공주부로 끌려갔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고, 그들이 불행했던 이유가 장공주 때문이라는 것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녀들은 부모님을 위해 조금의 죄면도 짊어 질 생각이 없었지만, 너무 괴로웠을 것이다.특히나 고통받아 눈빛이 흐려진 여인들은 작은 소리에도 소스라치게 놀라며 온몸을 떨곤 했다.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본 송석석은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그러다가 만난 고청영이 잠시나마 그녀에게 위안을 주었지만 거품과 같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빛을 받아 반짝여 보이긴 했지만 톡 건드리면 금세 어두운 바닥이 드러났다.밤바람이 거세게 불어 마차의 천막이 '퍽퍽'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그녀는 사여묵의 품에 안겼다. 두 사람은 한 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서로의 생각은 다르지만 같은 문제를 곱씹고 있었다. 사온을 공격한 것은 염탐하러 어슬렁 거리던 연왕을 다시 머리 숙이게 했으니 당분간은 도망치려 할 테지만 현재 상황에서 함부로 떠날 수는 없을 것이다. 영태비의 병이 낫지 않았고, 반역 사건도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황제가 사건을 마무리하지 않고 있는 것은 매우 현명한 처사였다. 사건이 종결되지 않고, 사온이 처형되지 않는 한, 연왕은 불안에 떨 수밖에 없었다. 6개월이나 1년 정도야 견딜 수 있겠지만, 시간이 더 길어지면 결국 두 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택할 것이다. 반역의 뜻을 포기하고 조용히 물러나거나 모든 것을 걸고 싸우는 것이다. 연왕에게는 좋은 기회가 찾아왔었다. 하지만 그는 너무 많은 것을 욕심냈으니, 황좌와 명예를 모두를 원했다. 아마 남강을 수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고, 사국인들이 이대로 쉽게 물러날 거라는 것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생각에 잠겼던 두 사람은 동시에 말을 꺼냈다. "당분간은 음지에서.
사여묵은 30분이나 기다렸지만 제상서의 그림자 또한 보지 못해 결국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제 씨 가문은 뭐가 그리 잘났다고 늦게 오는 거지? 어젯밤에 특별히 사람을 보내 알렸는데 오늘 그림자도 보이지 않다니. 분명 오늘 온 사람이 석석이라고 여기고 오지 않는 거야. 위국공부처럼 문전박대 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잘한 건 아니었다.’ 사여묵은 부인을 엄청나게 사랑했다. 그는 자신을 괴롭히면 안 되지만 송석석을 괴롭히는 것은 더욱 안 된다고 생각했다. 화가 난 그는 제상서가 제 씨 가문의 사람들 앞에서 장공주가 그곳에 배치한 사람을 밝혔는데 바로 베상서가 바깥에서 3년 동안 먹여 살린 여자이고, 둘 사이에는 이미 딸이 한 명 있다고 했다. 말을 마친 후, 사여묵은 염 선생을 데리고 떠나 버렸다. 제 씨 가문의 사람들은 서로 자기가 잘못 들은거 아니냐며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제 씨 가문에서는 대학자가 몇 명이나 나왔는데 예의범절이 엄격해서 위국공부 밖은 말할 것도 없고 저택 안에도 첩이 많지 않았다. 게다가 본처와 첩 사이에는 존비가 분명했는데 첩은 본처의 사유재산이니 정처가 관리하고 매 달 첩이 몇 차례 시중을 드는 것은 모두 본처가 안배했다. 그 규칙은 제제사 때부터 줄곧 지켜왔고 제 씨 가문에서는 국법보다 엄격한 규칙이었다. 게다가 제상서는 원래 욕심을 부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첩을 방에도 거의들여놓지 않았고 한 달에 기껏해야 두세 번 정도 가고 나머지는 대부분 본처의 방에서 묵었다. 그들 부부는 금슬이 좋고 화목해서 진성에서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밖에서 외실을 키우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말도 안 돼. 이건 말이 안 된다.” 제씨 가문의 둘째 어르신은 연신 고개를 저으며 모두 놀라 멍해진 제씨 가문의 아들들을 보았다. 특히 제상서의 장남인 제릉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릉서야, 네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이 안에 분명 무슨 오해가 있을 것이야.” 제릉서는 삼품관으로서, 지금은 황제
그러나 제릉서는 바깥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저택의 사람들은 속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저택 안의 식구가 많아서 반드시 조부와 어머니에게 알릴 것이다. 그는 둘째 숙부를 보며 말했다. “둘째 숙부님, 이 일은 제가 송석석에게 가서 증언을 구하고 소식의 출처를 알아보겠습니다. 만약 바깥 소문을 듣고 감히 아버지가 외실을 키운다는 헛소문을 퍼뜨린 것이라면 저도 가만있지 않겠습니다.” “그래, 어서 가보려무나!” 제 씨 가문의 둘째 어르신이 급히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제씨 둘째 어르신은 절대로 형님이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조상의 가르침이 있는데 형님께서 가문의 가주로서 절대로 저택 외에서 첩을 키울 정도로 어리석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제릉서는 말을 타고 경위부로 갔는데, 송석석이 궁으로 불려 갔다는 말만 들을 뿐이였다. 그는 국부라, 언제든지 입궁할 수 있는 권한은 없지만 황후마마를 뵈러 간다고 아뢴다면 황후가 사람을 보내 그를 데리고 들어갈 수는 있었다. 그는 송석석이 아직 궁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즉시 황후에게 보고해 사람을 보내 마중 나오라고 했다. 장춘궁에 도착한 그는 두말하지 않고 황후에게 말했다. “지금 송석석이 황실 서재에 있으니 동생이 사람을 보내 기다리고 있다가 나오면 여기로 모시고 오라고 하게.” “무슨 일입니까?” 오라버니의 엄숙한 기색을 보자 제 황후도 긴장해서 물었다. ‘송석석이 대리사를 협조해서 모역사건을 조사하는데 설마 제씨 가문을 조사해 낸 건 아니겠지?’ “먼저 사람을 보내거라.” 그러자 제황후는 급히 분부했다. “란주야, 어서 가서 황실 서재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송석석이 나오면 바로 장춘궁으로 데려오너라.” 그러자 란주 상궁은 대답하고 바로 떠났다.란주 상궁이 나가자 제황후는 다른 사람들도 모두 내보냈다. 제릉서는 그제야 제황후에게 입을 열었다. “어제 송석석이 경위를 데리고 위국공부로 왔는데 밖에서 반 시진을 기다려서야 저택으로 들어갔
제황후는 다소 언짢은 말투로 말했다. “어쨌든 아버지께서는 절대로 그런 일을 벌일 분이 아닙니다. 분명 그들이 잘못 조사했을 겁니다. 아직 소문이 나지 않았지요?” “아직은 저택의 사람만이 알고 있지. 둘째 숙부께서도 밖으로 소문내지 말라고 명령한 상태고.” 그러자 제황후가 물었다. “그럼 오라버니가 궁으로 들어올 때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돌아오셨습니까?” “내가 외출할 때엔 아버지께서 돌아오시지 않았다. 난 경위부로 송석석을 찾아갔는데 궁으로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그녀에게 물어보려고 부랴부랴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러자 제황후는 냉정하게 말했다. “아무튼 나는 아버지가 밖에서 첩을 들였다는 말을 절대로 믿지 않습니다.” 제릉서도 처음에는 북명왕께서 한 말이라 믿었었다. 그러나 둘째 숙부의 말을 듣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지금은 반신반의한 상태가 되었다. 제릉서는 그 사건은 왕야께서 조사한 것이 아니라 경위가 조사한 것이기에 송석석이 무공은 뛰어나지만 아무래도 여자이니 떠도는 소문을 믿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제씨 가문은 요 몇 년 동안 너무 잘 나가 많은 사람들의 불만을 샀고 종종 나쁜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그는 어쩌면 누군가가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감정이 너무 좋은 것을 보고 질투해서 그런 소문을 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진성 귀족들 사이에서 질투심이 강하고 시비를 걸기 좋아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었다. 제릉서가 말했다. “어쨌든 송석석에게 어디에서 얻은 소식인지 물어봐야지. 그렇지 않으면 어머니가 슬퍼할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명성도 바닥에 떨어질 것이다.” 제황후는 안 그래도 마음속으로 송석석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다. 예전에 황제가 그녀를 입궁시키려 했던 일 때문이었는데 나중에 모든 게 제왕이 북명왕에게 병권을 넘기게 하기 위한 권모술수라는 것을 알았지만 제 황후는 황제가 그녀와 이 일을 얘기할 때 눈에서 발하는 뜨거운 빛을 잊을 수 없었다. 그건 그녀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눈빛이었다. 심지어는 황제가 수민을 볼 때
고청우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역겹다는 눈빛이 새어 나왔다. ‘버러지 같은 놈, 능력도 없고 용맹하지도 못하면 마음이라도 독하게 먹어야 할 거 아니야! 천하의 멍청한 놈!’그러다가 다시 고개를 들고는 반짝이는 눈빛으로 말했다.“역시 저희 서방님은 선하신 분입니다. 제가 서방님을 참 잘 만난 것 같네요.”한편, 결심을 하고 나니 왕표는 되레 마음이 너무 편했다. 그는 고청우의 얼굴을 다정하게 어루만지며 눈앞의 이 여자와 남은 평생 신분을 숨긴 채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상상을 하고 있었다.지금까지 남들이 부러워하는 화려한 삶도 살아봤고 나라를 위해 목숨도 잃을 뻔했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다.목숨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없으니 왕표는 절대 잘못한 게 없으며 더군다나 그가 남강에 있든 없든 별다른 차이는 없었다.어차피 제린과 방천허 등 부하들은 그를 원수로 인정하지도 않으니 말이다. “가서 왕진을 불러오게. 이곳을 떠나기로 했으니 그자와 논의해서 우리 사람들을 전부 데리고 가야지.”왕진은 본래 평서백부의 교두였는데 왕표를 따라 남강 전쟁에 뛰어든 것이었다.왕표는 전에 최씨가 그의 곁에 몰래 사람을 붙였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부인 고청우가 남강에 오고나서 최씨가 심어놓은 사람들을 전부 제거한 것이다.때문에 지금 저택에 남아있는 부하들은 왕표의 믿음을 듬뿍 받고 있는 자들이다.한편, 왕표의 계획을 들은 왕진이 흠칫 놀랐지만 이내 찬성했다.남강에 오기 전, 왕진은 진성에서 더할 나위 없는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었고 평서백부에서 교두로 지내던 나날들은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하지만 왕표를 따라 남강에 오고 나서부터 좋은 술을 마셔본 적도 없고 입맛에 맞는 요리를 먹어본 적도 없었다.지금 그 부귀영화를 누리던 땅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데 그 누가 거절할 수 있을까!더군다나 전쟁이 터져서 왕표가 전장에 나가면 왕진도 따라가서 목숨 걸고 피 터지게 싸울 수밖에 없다.왕진 등 사람들은 정식적인 사병이 아니기에 지금 도망간다고 해도 그들의
몰래 저택 안으로 들어온 무당은 10분 뒤, 다시 뒷문으로 빠져나갔다.한편, 저택에 앉아있던 왕표는 온몸에 힘이 쫙 풀렸으며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조금 전, 무당은 저택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주변을 쓱 훑어보더니 담담하게 한 마디만 뱉었다.“장군님, 부디 몸조심하십시오.”그리고 나서는 고청우가 아무리 울며 빌어도 무당은 입을 꾹 닫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 굿을 해달라고 해도 단호하게 거절하며 소용없는 짓이라고 얘기했다.그러다가 저택을 떠나기 전, 무당은 왕표에게 말을 전했다.“이 땅은 장군의 무덤입니다. 장군님께서는 가족들을 달 대피시키십시오.”무당의 말에 왕표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이 남강 땅에 얼마나 많은 장군의 뼈들이 묻혀 있단 말인가! 더할 나위 없이 용맹하고 전쟁 경험이 많은 송회안 부자도 이 땅에서 목숨을 잃지 않았는가!왕표는 송회안 부자를 존경하지만 두 사람처럼 되고 싶지는 않았다.만약 전장에서 죽는다면 평서백부가 아무리 대대손손 흥한다고 해도 왕표는 전혀 그 영광을 누리지도 못할 것이고 심지어 그의 부인과 아들도 이를 누릴 수 없다.이때, 고청우가 뒤에서 왕표를 끌어안고는 엉엉 울기 시작했다.“서방님, 서방님께서 전장에서 목숨을 잃게 된다면 저와 아들도 서방님을 따라 가겠습니다.”“아니, 난 절대 죽을 수 없어!”눈물을 뚝뚝 흘리는 고청우를 보며 왕표가 큰소리로 외쳤다. 그리고는 고청우의 손을 덥석 잡더니 결심한 듯 말을 이어갔다.“우린 아무도 안 죽을 것이오. 전에도 약속하지 않았소? 전쟁이 일어나면 바로 남강 땅을 떠날 것이오!”흠칫하던 고청우가 당황한 기색으로 왕표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물었다. “하지만 저희가 정녕 이곳을 떠날 수 있을까요? 이 저택에 저희 사람만 있는 건 아닙니다. 더군다나 모든 걸 버리고 몸만 떠날 수는 없지 않습니까?”왕표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안일한 생활을 오랫동안 보낸 왕표는 절대 가난하게 살 수는 없었다.반드시 당당하고 순조롭게 금은보화를 저택 밖으로
한편, 남강에서 왕표는 며칠동안 계속 좌불안석이었다. 그는 사국 병사들이 정말 쳐들어올 줄은 몰랐으며 시씨 가문 도련님이 보낸 서신이 사실일 줄도 전혀 몰랐다.왕표는 방천허 등 사람들과 몇 번이고 논의를 했지만 그자들은 전혀 겁을 먹지 않았으며 쳐들어오면 바로 전쟁을 치르면 된다고 했다.방천허가 보인 자신감에 왕표는 조금이나마 안심이 됐지만 전쟁이 일어난 순간 왕표는 절대 군영에서 지휘만 하고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그리고 방천허 등 병사들에게 정말 그만한 실력이 있는 것일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송씨 가문 군대와 북명군은 평소에도 건방진 태도로 왕표의 지시에 따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병사 훈련을 진행하지 않았기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승산이 높지 못할 것이다.왕표는 자신의 다리를 만지작거렸다. 아직도 비가 내리면 다친 무릎에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으며 전장에서 다리도 잃을 뻔했다.진성으로 돌아가 오랜 시간의 치료를 통해 겨우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긴 했지만 여전히 가끔 다리가 불편했다.왕표는 전장에서 죽음에 이르렀던 그 순간을 여전히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살인으로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고 심지어 칼을 들 힘도 없었다.그뿐만 아니라 몸에 입고 있는 갑옷이 너무 무거웠던 탓에 적에게 공격을 당했을 때 누군가가 구하러 오지 않았다면 왕표는 그 자리에서 목이 잘렸을 것이다.물론 이제 원수가 된 왕표는 굳이 전장에 직접 나갈 필요가 없지만 남강에는 원수가 숨어서 지휘만 하는 게 아니라 직접 앞장서서 싸워야 한다는 전통이 있었다.그 전통을 만든 사람이 바로 송회안과 사여묵이었고, 제린과 방천허도 이 전통을 찬성하는 바였다. 원수가 전장에 직접 나서야만 병사들의 투지와 열정을 끌어올릴 수 있어, 짧은 시간 내에 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바로 그때, 대문이 열리며 고청우가 인삼차를 들고 들어왔다.왕표는 이내 걱정스러운 표정을 숨긴 채 고청우를 쳐다보았고 고청우는 조금 전에 울고 온 듯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
임 태의는 북명왕의 상태가 걱정되어 황실에 남아 밤을 보내려고 했지만 저녁쯤 돌아온 단 신의가 한걸음에 황실로 달려와 북명왕에게 단설환 한 알을 건네 주었다.단설환을 복용한 북명왕은 흉부 통증이 바로 완화되었고 임 태의가 맥을 짚어보니 그가 처방한 약보다 효과가 훨씬 좋았다.임 태의는 오래 전부터 단 신의의 명성을 익히 전해 들었기에 굳이 자신이 황실에 남을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위로 몇 마디를 남긴 뒤 황실을 떠났다.임 태의가 가자마자 단 신의는 북명왕을 위해 처방을 했고 제자를 시켜 약왕당에서 가서 약재를 구해 약을 달이기 시작했다.약을 먹은 사여묵은 가슴에 꽉 막혀 있던 큰 돌멩이가 사라진 기분이었으며 겨우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있었다.“임 태의가 내일도 찾아올 걸세. 때문에 왕야께서 진성을 떠난다고 해도 내일 저녁까지 저택에 계시다가 출발하셔야 하네.”단 신의의 말에 송석석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임 태의께서 내일 다시 장군님의 맥을 짚어본다면 모든 게 들통나는 거 아닙니까?”“사람을 시켜 저택 밖에서 지켜보다가 임 태의가 나타나면 내가 다시 왕야께 약을…”“약을 또 드셔야 한다는 겁니까? 더 이상 중독되면 안 됩니다.”송석석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다급하게 말하자 단 신의가 송석석을 힐끗 쳐다보았다.“그렇게 걱정됐다면 그 반 알도 드시지 못하게 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송석석이 후회 막심한 표정을 지었고 단 신의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남은 반 알을 먹이려는 게 아니네. 현빙환이라는 약이 있는데 조울증을 치료하는 약이라 이 약을 복용하면 맥박이 여전히 이상하게 보일 걸세.”그제야 마음이 놓인 송석석이 다시 물었다.“그 전에 드신 약이 이미 심장을 손상시켰는데 거기에 이 현빙환까지 드시면 몸 상태가 더 악화되지 않겠습니까?”“큰 문제는 없을 것이네. 그래서 치료제로 이런저런 약을 많이 드리지 않았나?”단 신의의 말에 곁에 서있던 동동이가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그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처음부터 왕야께 현빙환을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친위병 몇 명을 거느린 척귀가 임 태의와 오대반과 함께 북명 황실로 향했다.송석석은 며칠동안 공무를 내려놓기로 하고 모든 업무를 필명과 오진에게 맡겼다.시만자도 송석석을 통해 자초지종을 알게 되었고 오늘 임 태의와 오대반이 저택에 왔다는 소식에 시만자는 괜히 어설픈 모습을 들키기 싫어서 나타나지 않았다.임 태의와 오대반은 이내 두 눈이 퉁퉁 부은 송석석을 만나게 되었고 오대반이 조심스럽게 위로했다.“왕비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임 태의가 계시니 왕야께서도 조만간 호전될 것입니다.”“감사합니다.”송석석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한편, 척귀 등 친위병은 왕야와 왕비의 침실에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기에 밖에서 지키고 있었다.척귀는 침실 밖에 나타난 염구진을 보자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다가 물었다.“염 선생, 폐하께서 왕야를 걱정하셔서 이렇게 소인을 보냈습니다. 혹시 왕야께서 예전에도 이런 질병을 앓으신 적이 있으셨습니까? 왜 갑자기 쓰러지신 겁니까?”염구진은 척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왠지 모르게 마음속으로 짜증이 확 났고 요즘 따라 이런 감정을 자주 느끼는 것 같았다.그는 황제의 이러한 조사가 결국 불신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염구진은 짜증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채 담담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왕야께서 이토록 바쁘신데 쓰러지지 않을 수가 없지요. 언젠가 몸이 망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낮에는 대리사에서 공무를 처리하시고 저녁에는 잡다한 일로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저택으로 돌아오십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일찍 조정에 참석하시느라 한 시간도 채 못 주무시는데 몸이 어떻게 건강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노주로 가셨을 때 산속에 숨어 지낸 탓에 추위에 약해지셨고 진성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제대로 휴식을 취하신 적이 없었지요.”척귀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어명을 받고 탐문하러 온 척귀는 지금 이 순간 북명왕이 너무 대단하게 느껴졌으며 북명왕처럼 매일 바쁘게 살면 쓰러지지 않을 사람이 없
저녁쯤, 숙청제가 송석석을 궁으로 불렀고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된 송석석을 보며 숙청제는 사여묵이 아프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다.“너무 걱정하진 말거라. 임 태의가 있으니 상황이 호전될 것이야.”숙청제의 말에 송석석은 영혼을 잃은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감사합니다, 폐하. 소인이 단 신의께 소식을 전했으니 단 신의께서도 곧 돌아오실 겁니다. 단 신의에게 좋은 약이 있으십니다.”“단설환을 얘기하는 것이냐?”숙청제도 단설환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으며 진성에 있는 황족과 세가들은 돌발 상황을 대비하여 한두 알 정도 가지고 있었다.하지만 2년 전부터 이 약은 거의 판매를 하지 않았기에 매우 귀한 약이 되었다.“네.”“단 신의는 언제쯤 돌아올 수 있다고 하더냐? 그 약을 약왕당에서 구할 수는 없는 것이냐?”숙청제의 물음에 송석석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아무리 빨라도 삼일 정도는 걸릴 것입니다. 약왕당에도 현재 이 약을 판매하고 있지 않습니다. 홍작한테서 들었는데 단 신의께서 단설환 두 알을 가지고 계신다고 합니다.”“그럼 단설환 외에는 다른 약이 없느냐?”숙청제는 단설환의 약효가 좋다는 건 인정하지만 들리는 소문처럼 그리 신통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그저 근거 없는 소문에 불과하다고 여겼다.“다른 약은 약효가 그리 좋지 못합니다.”머뭇거리던 송석석은 살짝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전북망 장군님 모친께서도 심각한 심장 질병으로 거의 사망하시기 직전이셨는데 단설환을 드시고 목숨을 부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뒤로 매달 단설환 한두 알씩 드셨다고 하는데 효과가 확실했다고 합니다.”숙청제도 이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지만 이 상황에서 망자를 언급하는 건 재수가 없을 것 같아서 이내 송석석을 위로했다.“임 태의한테서 들었는데 상황이 조금은 호전되고 있으니 치료를 받고 충분히 휴식하면 곧 건강을 회복할 수 있을 터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네, 폐하. 오늘 임 태의가 계셔서 너무 다행이었습니다.”송석석의 눈시울은
어서방에서, 임 태의가 허리를 숙인 채 황제에게 사여묵의 상황을 보고하고 있었다.두 시간 전, 대리사 소경 진이가 북명왕의 옥패를 들고 태병원으로 달려와 북명왕이 갑자기 쓰러졌다고 외쳤다.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숙청제도 이내 보고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소인이 보기엔 갑작스러운 심장 발작으로 의심됩니다. 상황이 매우 위험한데 소인이 도착했을 때 왕야는 이미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 계셨습니다. 침술을 몇 번이나 사용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셨는데 제대로 걷지 못하셔서 마차에 태워 황실로 보내 드렸습니다.”“왜 갑자기 발작을 한 것인가? 전에는 한 번도 이런 병이 있다는 것을 들은 적 없는 것 같은데.”숙청제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으며 속으로 걱정이 되기도 했다. 어찌 됐든 사여묵과 피를 나눈 형제였기에 평소에 의심하고 경계한다고 해도 이런 상황에서는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소인도 황실에 계신 염 선생한테서 들었는데 왕야는 얼마전 진성으로 돌아오고 나서부터 제대로 휴식도 취하지 못했고 가끔 기침을 심하게 했다고 하셨습니다. 가슴이 답답할 때도 있었는데 크게 신경을 쓰지 않으셨습니다. 소인이 보기엔 고뿔이 악화되면서 발작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숙청제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갔지만 조금 의심이 들기도 했다.“고뿔을 앓고 있었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상태가 악화될텐데, 왜 그동안 아무도 몰랐던 것이냐?”“폐하, 염 선생께서는 왕야가 진성에 돌아온 뒤로부터 너무 바빠서 쉴 시간도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고뿔 외에도 마음에 걱정되는 일이 있어서 고뿔을 미처 신경 쓰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고뿔도 사람마다 다릅니다. 평소에 풍채가 좋은 분들은 증상이 확실하게 티가 나지 않아서 자신이 아프다는 것도 잘 모릅니다. 왕야도 그런 상황이었던 것 같습니다.”숙청제는 의학에 대해 전혀 몰랐기에 그저 물을 수밖에 없었다.“그럼 이젠 조금 나아졌느냐?”“폐하, 왕야는 현재 상태가 더 이상 악화되지는 않겠지만 반드시 충분한 휴식을 취하셔야 합니다. 절대 과로해서는
이날 저녁, 송석석은 약왕당에서 받아온 약을 사여묵에게 건넸고 약의 위험성까지 자세하게 얘기했다.사여묵은 망설이는 듯한 송석석의 모습에 환하게 웃으며 위로했다.“이 정도 상해는 충분히 견딜 수 있소. 그리고 원기를 회복할 수 있는 약들도 이렇게 잔뜩 가지고 오지 않았소? 나중에 어의에게 진단만 받으면 바로 단설환을 먹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오. 남강으로 가는 길에도 단 신의의 당부를 잊지 않고 매일 약을 꼬박꼬박 챙겨 먹겠소.”“그래도 결국 독약 아닙니까? 그러지 말고 저희 다른 방법을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요?”송석석이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사여묵이 담담하게 대답했다.“내가 보기엔 지금으로써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소. 단 신의가 말을 무섭게 해서 그렇지 그 정도로 심각한 상해를 입히지 못할 거요. 그렇게 위험한 약이었다면 애당초 꺼내지도 않았겠지.”“그럼 일단 염 선생과 상의라도 해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그럴 필요 없소!”사여묵이 약을 내려놓은 뒤, 커다란 손으로 송석석의 허리를 감싸며 말을 이어갔다.“이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유리하오. 나중에 내가 대리사에서 쓰러지면 진이가 내 옥패를 들고 어의를 찾아갈 것이고 황실로 달려온 어의가 우왕좌왕하는 염 선생을 보아야 의심을 하지 않을 것이오.”송석석은 사여묵의 가슴팍에 기대어 불안한 마음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전 장군님이 너무 걱정됩니다. 몸이 회복되기도 전에 남강으로 출발해야 하는데 가는 내내 제대로 쉴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남강에 가서도 몸 상태가 회복되지 않으면 전장에 어떻게 나가시려고 그러십니까?”송석석의 걱정에 기분이 좋아진 사여묵이 다정하게 웃으며 그녀를 위로했다.“난 왕표를 무조건 대체하겠다는 게 아니오. 일단 제린을 찾아 병사들 속에 숨어 있다가 왕표가 제대로 군을 이끈다면 난 남강 구경이나 하다 올 것이오.”사여묵의 위로에도 송석석은 시름이 놓이지 않았다. 왕표가 군을 제대로 이끌지 못할 거라는 확신 때문에 두 사람이 지금 이런 모험을 하고 있는
화가 난 단 신의는 송석석의 말에 설득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버럭 언성을 높였다.“난 멍청한 사람을 돕지 않소. 당신들은 그런 천하의 멍청이가 따로 없소!”“세상에 이런 멍청이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번 한번만 더 모험하고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약속할게요.”송석석이 환하게 웃으며 말하자 단 신의가 미간을 찌푸렸다.“모험을 하고 싶어도 이제 못할 수도 있소. 돌아오면 황제께서 그 죄를 어떻게 물으실 줄 알고 이러는 것이오. 그러다가 머리가 잘릴 수도 있소.”“정말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고 해도 저에게 방법이 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단 신의는 고집을 부리는 송석석을 보며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말한 것처럼 백성들에게는 두 사람과 같은 멍청이들이 필요하긴 했지만, 단 신의는 그 멍청이가 송석석과 사여묵은 아니길 바랐다.결국 단 신의는 먼지가 뽀얗게 쌓인 작은 상자를 꺼내 먼지를 툭툭 털어내곤 조심스럽게 열었다.상자 안에는 땅콩 만한 검은 알약 하나가 있었다.“똑똑히 기억하시게. 이건 독이오. 이 약을 먹고 나면 맥박이 이상해지고 갑작스러운 발작을 일으키네. 그리고 짧은 시간내에 심장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지. 이건 그저 보여지는 현상이 아니라 실제로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네. 이 약을 먹고 3일 정도 버틸 수 있는데 3일 뒤에는 반드시 단설환을 복용해야 하오. 그러지 않으면 심장에 영구적인 손상을 입을 수도 있소.”단 신의의 말에 송석석이 흠칫 놀란 표정이었다.“정말로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뜻입니까?”“그럼 당연하지. 이건 독이오.”“그럼 단설환을 먹고 나면 바로 정상적인 몸 상태로 돌아올 수 있는 겁니까?”“그렇지 않소. 며칠 동안 안정을 취해야 하네. 눈속임을 하고 나서 바로 출발하면 절대 안 되오.”위험할 수도 있다는 단 신의의 말에 송석석은 단 신의가 건네는 약을 받지 않았다.“그럼 혹시 다른 약은 없는지요? 폐하를 속이고 나서 장군님은 바로 출발하려고 할 겁니다. 실제로 중독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