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마친 김도연은 갑자기 입을 틀어막으며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더니, 잔뜩 겁에 질린 눈으로 송석석을 바라보았다. “방금 그 여인이 문턱을 넘은 지 3년 만에 죽었단 말씀입니까? 게다가 손발이 잘려 죽었다 하였습니까?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녀가 무슨 죄를 저질렀기에 그리도 모질게 대했단 말입니까? 저는 그 여인이 청백한 가문에서 자라 성품이 훌륭해 보여 장공주에게 보낸 것인데. 무엇을 얼마나 잘못했기에, 장공주께서 그토록 대했단 말입니까?” 송석석이 차갑게 말했다. "그녀의 잘못은 그대 눈에 띄었다는 것입니다." "그건..."김도연은 억울했다.“저는 절대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저는 그 여인을 위했던 것입니다. 고후부는 대가였으니, 평민에게 시집가는 것보다는 고후부의 첩이 되는 것이 더 나을 것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송석석은 여전히 냉소적으로 말했다. “그대는 그 여인이 공주부에서 지내게 될 줄 몰랐단 말입니까? 꽤나 교묘하게 피해가는 것 같군요.”김도연은 급히 해명했다.“저는 정말 몰랐습니다. 고부진도 공주부에 살지 않았기에 저는 그 여인 또한 고후부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장공주가 왜 그리 대했는지도 모릅니다.” 평소에 김도연을 돕는 일이 없었던 시민주는 송석석이 큰소리로 호통치는 모습에 위기를 느꼈는지 생전 처음으로 김도연을 위해 나섰다.“송 지휘사님, 저는 김측비가 그 여인은 위해 그런 것이라 믿습니다.” 송석석이 냉소하며 말했다.“좋은 마음이라, 그러면 이 여인이 자발적으로 갔단 말입니까? 아니면 그대가 속여서 끌고 갔습니까?” 김도연은 억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자발적으로 간 것입니다.. 저는 그녀에게 진성으로 가면 고부진의 첩이 될 것이라고 말했고, 그녀와 그녀의 가족 모두 동의한 것입니다. 또한 저는 혼례금도 주엇고 그녀의 친정에서도 혼수를 보탰습니다. 이것은 조사해도 좋습니다.” “당연히 조사할 것입니다
제씨 가문은 오랫동안 관직을 이어왔는데, 지금이 바로 절정기라 볼 수 있었다. 제상서는 이미 선제 시절부터 중용되어 선제의 마음은 눈금 보듯 했지만, 현황의 마음은 도저히 알 수 없었다.황제가 왜 송석석을 현갑군 지휘사로 임명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자리는 매우 중요한 자리여서 북명왕부가 반역의 뜻을 품는다면 할 수 있는 일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그래서 가족회의를 소집해, 가문 사람들을 엄격히 다스리는 것 외에도 송석석에 대한 불만도 표했다."이리도 경거망동하게 굴다가는 진성의 세가들을 모두 뒤집어 놓을 것이다. 억울한 일도 생길 것 같아 두렵구나. 과거에 그녀가 이리도 급하게 공을 세우고 싶어 하는 사람인 줄은 몰랐다. 연왕부에 칼로 겨눴으니 다른 이들을 봐줄 리가 있겠느냐?" 제방과 제수찬도 자리에 있었다. 제상서의 말에 송석석을 위해 변호하려 했으나 말도 꺼내기 전에 제상서가 냉정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너희도 주의해야 할 것이다. 특히 제수찬, 지금 너는 공주와 혼인했고 한녕공주는 북명왕의 친동생이니 그녀 앞에서 말과 행동을 신중히 해야 할 것이다. 공주의 마음이 너에게 있는지, 아니면 친정에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저와 공주는 쉽게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송 지휘사님이 허튼 짓을 하신 것은 아니라고 믿습니다." 그러자 제상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네가 뭘 안단 말이냐? 그녀가 오늘 칼을 꺼내 든 것은 누구의 체면도 신경 쓰지 않겠다는 뜻이다. 황제께서 당장 그녀를 어쩌진 않겠지만, 이렇게 일을 벌이다간 가문들의 체면이 바닥으로 떨어질 것이다. 우리 제씨 가문도 이러한 모욕은 당할 수 없다." 제씨 가문은 도전을 용납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기에 제수찬이 다시 입을 열려 했지만, 제방이 그를 말렸다.가족회의가 끝난 후, 제방과 제수찬은 함께 밖으로 나왔다."왜 말하지 못하게 한 거야? 나는 왕비께서 허튼 일을 하실 리 없다고 믿어. 장공주가 진정 반역을 도모했다면, 분명 그와 연계
왕청여는 현재 아이를 가진 상태였기에 한창 생각이 많고 예민한 시기를 지내고 있었다. 전하께서 전북망에게 내린 승진 소식에 기뻐했지만 송석석이 전북망의 상사라는 것을 알고는 슬픈 마음에 눈물을 흘렸다.왕청여는 전북망의 품속에 기대에 흐느꼈다."내가 그녀를 질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항상 당신 위에 있다는 것이 내키지 않을 뿐입니다. 당신이 장공주의 반역 증거를 찾아냈고 당신이 아니었더라면, 아마 지금까지도 장공주의 반역은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 아닙니까? 그저 억울할 뿐입니다. 왜 당신은 항상 그녀에게 억눌려야만 하는 겁니까? 공을 따지고 전과를 논하더라도 당신이 훨씬 뛰어나지 않습니까? 전하께서는 어찌 한 여인에게 지휘관 자리를 내주실 수 있단 말입니까? 한 여인이 현갑군과 금군, 어전 시위대까지 지휘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대장부들의 자존심이 말이 아니지 말입니다."전북망은 그녀의 흐느끼는 소리에 조금 짜증이 났다. 그는 그날 밤 자객이 누구인지는 잘 알고 있었기에 계속 생각이 났다. 이 공로가 정말 그가 얻은 것인가? 아니, 그자가 내어준 것이다.그는 이미 장공주의 반역을 알고 있었을 것이고 한의절에 모든 것을 세상에 드러내려고 했던 것이다. 그는 단지 마침 서원에 있었기에 우연히 쫓아가 그곳에서 무기들을 발견했을 뿐이다. 왜 북명왕은 직접 폭로하지 않고 경위대와 순방영이 폭로하게 한 것일까? 이 얼마나 큰 공로인데, 왜 이 공로를 경위대와 순방영에 넘겨준 걸까? 군공으로 이미 중책을 짊어진 북명왕에게는 이 정도의 공로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전북망의 눈빛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결국 모든 것은 타고난 신분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그가 서슴없이 버린 것은 그가 목숨을 걸고도 얻지 못할 것들이었다."걱정하지 마시오. 어찌 되었든 승진했잖소."전북망은 애써 씁쓸한 마음을 억누르며 부드러운 미소 지어 보였다."앞으로 당신은 어전 시위 대장의 부인이오." "허나.. 우리 장군부는 언제쯤 다시 영광을 되찾을 수 있
부인이 되어서 감히 남편의 얼굴을 때리다니! 장군부의 문벌을 생각지 않더라도, 평범한 백성들조차 직접 서로의 얼굴은 때리지 않는다.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몸을 몇 번 두드릴 뿐이었다. 어차피 여인의 주먹은 그리 큰 힘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게다가 얼굴을 때린다는 것은 남자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기도 했다.밖에는 하인들도 있었으니, 전북망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 것이다. 이제 승진까지 하여 어전 시위 대장이 되었는데 따귀를 맞는 바람에 조금 남아있던 기쁨마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왕청여는 이를 악문 채 계속해서 눈물을 흘렸다. 그녀도 자신이 조금 지나쳤다는 것을 알았으나, 차마 사과할 면목은 없었다. 전북망은 울분을 삼키며 말했다. "됐소, 그만 나가시오..!" 더 이상 다투고 싶지 않았던 전북망은 그저 분노를 삼킬 수밖에 없었다. 부부간의 불화는 그에게 너무 큰 고통이었고, 너무도 지치게 만들었다. 따귀를 때린 것 때문에 조금은 죄책감을 느낀 왕청여는 그가 냉정하게 내뱉는 한마디에 또다시 마음이 아팠다.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배가 불렀으면서 당신을 돌보며 하루빨리 회복하고 임명식에 참가할 수 있도록 했건만 당신의 태도는 저를 한없이 실망시키고 있군요." 전북망은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더 이상 다투고 싶지 않았기에 대꾸하지 않았다.차가운 그의 태도에 왕청여는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그녀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눈물을 닦으며 한마디 던지고 돌아섰다."그리도 저를 보고 싶지 않으시다니 친정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전북망은 그녀의 친정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왕청여는 알고 있었다. 임신한 몸으로 친정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그는 분명 조급해질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홍이의 부축을 받으며 한참을 걸었지만, 전북망은 그녀를 불러들이라는 명령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분노와 슬픔에 휩싸였다. 전북망은 정말로 그녀를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않는 것이었다. 왕청여는 홧김에 홍이와 함께 친정으로 돌아갔다.갑작스러운
평서백부인이 아직 그 정도로 사리 분별을 못하는 사람은 아니었다.그녀도 자신의 딸이 어떤 품행을 지닌 자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임신한 몸으로 눈물을 흘리며 돌아온 딸을 보니, 마음이 약해졌을 뿐이다.게다가 최근에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고, 예전 일들은 이미 지나갔으니, 어머니로서 줄기차게 그 일만 붙잡고 늘어지고 싶지 않았다.하여 전북망이 왕청여를 소홀히 대하고, 임신한 몸으로 친정에 돌아오겠다고 해도 무관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며느리들을 불러 이 부부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의논하려 했었다.최 씨가 도착했을 때 이미 이방의 남희도 노부인의 방에 앉아 있었다. "형님이 오셨군요!" 자리에서 일어선 남희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오지 않았다면 그녀는 도망갈 궁리를 해야 할 판이었기 때문이다. 최 씨는 남희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노부인께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어머님께 인사드립니다." "그래, 잘 왔다." 정좌에 앉아있는 노부인은 매우 엄숙한 표정을 하고 있었고 그녀의 곁에는 눈물이 마르지 않은 왕청여가 앉아 있었다. 왕청여는 임신한 몸이라 흐느끼며 "형님"이라고만 할 뿐 예는 갖추지 않았다.최 씨는 자리에 앉으며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물었다. "왜 울고 있는 것이냐? 누가 널 괴롭히라고 하였는가?" 왕청여는 본래 친정에 와서 도움을 청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그저 전북망을 겁주려던 것인데 그것이 통하지 않자 뽑은 칼을 도로 집어넣을 순 없어 돌아온 것이다.그런데 어머니를 보자 억울함이 밀려왔다. 하지만 또 작은 일로 친정을 찾은 딸은 되고 싶지 않았기에 전북망이 자신을 일부러 냉대한다며 장군부의 다른 사람들 역시 녀를 가볍게 여긴다고 늘어놓았다.그 말에 어머니는 바로 큰며느리와 작은며느리를 불러들였던 것이다. 엄격하기로 소문난 큰 형님 앞에서 오늘 일을 곧이곧대로 말한다면 자신의 잘못이 분명했다. 하여 최 씨의 질문에는 어머니께 말한 대로 답하지 않았다."조금 다퉈서 며칠 친정에서
자초지종을 알게 된 노부인은 너무 화가 나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너무 분노한 나머지 손가락으로 왕청여를 가리키며 꾸짖기 시작했다."정말로 말도 안 된다! 전서방이 승진했는데 어찌 그것이 좋은 일이 아니란 말이냐? 너는 어째서 자꾸 불길한 말을 하고, 왕비를 끊임없이 거론하느냐? 그쪽에서 네가 그리 언급하는 것을 반기겠느냐? 그리고 내가 언제 남편의 얼굴을 때려도 된다고 가르쳤느냐? 그러고선 염치도 없이 감히 친정으로 돌아와 질질 짜고 있는 것이냐! 나는 지나간 일로 또 다투었다고 걱정하고 있었는데 결국 네가 혼자 난리를 친 것이구나! 전서방이 심하게 다쳤는데, 너는 아내로서 그를 잘 돌보지는 못할망정 몇 마디 말 때문에 그의 따귀를 때리다니, 너는 정말 그 고약한 버릇을 고치지 못하는구나! 내가 너 때문에 제명을 다하지 못하겠다!"왕청여는 고개를 숙였지만, 여전히 억울했다. 하지만 감히 소리내어 반박하지는 못해 그저 흐느낄 뿐이었다. "저도 그 사람과 다투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제가 이리 고생하여 아이를 가졌는데도 그는 여전히 송... 아니, 전 부인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체 어느 누가 참을 수 있겠습니까?" 최 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런 주제에는 다시는 개입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시어머니도 합리적이신 분이라 앞으로 왕청여의 일은 어머님께 맡기고, 자신은 그저 옆에서 조용히 앉아 있기로 했다. 노부인은 왕청여가 아직도 그런 소리를 하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크게 소리쳤다. "그럼, 내가 묻겠다. 전서방이 네 앞에서 늘 그녀 이야기를 꺼내느냐?" 그러자 왕청여는 화가 치밀어 오른듯 즉시 눈을 부릅떴다."그가 감히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럼, 집안 식구들 앞에서 이야기했던 것이냐? 혹 밖에서 떠벌이고 다니느냐?" "장군부에서는 이방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런 말을 꺼내지 않습니다. 밖에서야 감히 말할 리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입 밖으로 굳이 드러내지 않는다고 해도 마음속으로는 생각하고
송석석은 왕청여가 친정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저 최 씨에게 전할 일이 있어 찾아온 것이었고 밤에 방문한 이유는 낮에 사건을 처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평서백부와 공주부는 친밀한 관계가 아니었기에 대낮에 경위대를 이끌고 오는 대신, 밤에 혼자 방문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했다. 대낮에 움직였다면 여느 가문들처럼 경위대를 동원해야 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차별 대우가 될 수 있었다.관복이 아닌 여성복을 입고 있는 송석석의 모습에 최 씨는 살짝 안심하며 말했다. "왕비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시아가씨도 그간 무탈하였습니까?" 시만자는 웃으며 답했다. "부인덕분에 무탈하였습니다." 시만자는 최 씨에게 특별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오늘 많이 피곤했지만, 송석석이 평서백부에 가야 한다는 말을 듣고 그녀도 동행했다.최 씨는 환하게 웃으며 손님을 맞았다. "어서 편히 앉으세요." 그녀는 하인들에게 차를 준비하도록 지시했다. 자리에 앉은 최 씨가 입을 열었다."용건이 있으시다면 사람을 보내 제가 찾아가면 될 것을, 어찌 이렇게 몸소 오신 것입니까?" 송석석은 고개를 저었다."그리 격식을 차리실 필요 없습니다. 오늘 제가 여기에 온 이유는 몇 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어서 입니다." 송석석은 주변에 있는 하인들을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조용히 이야기 나눌 수 있겠습니까?" 최 씨가 금숙에게 눈짓을 보내자 금숙이 즉시 하인들에게 명했다. "모두 나가거라. 더 이상 시중들 필요 없다." 하인들이 자리를 뜨자 최 씨는 송석석을 보며 말했다. "무슨 일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자 송석석이 물었다. "부인은 만씨 가문의 만가다장인 만옥이란 여인에 대해 들어본 적 있으십니까?" 최 씨는 즉시 왕청여의 작은 도련님이 만두를 사던 그날 바므 만옥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때도 이상하게 여겼던 최 씨는 그 만옥이라는 여인이 수상하다고 생각했다. 순간 긴장한 최씨는 숨기지 않
최 씨는 의자 손잡이를 꼭 쥐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심경이 복잡해졌다. '남편을 아는 사람은 아내뿐이니깐...'최 씨의 남편은 남강으로 향하면서 두 명의 첩을 데려갔고, 그곳에서 또 두 명을 들였다. 비록 아직 명분은 없었지만, 이미 그들을 들인 이상 첩으로 삼는 것은 시간문제였다.최 씨는 집안을 엄하게 다스렸기에, 평서백부의 첩들은 항상 그녀를 공경해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다. 하지만, 고청우가 남편에게 접근한다면, 취향에 맞추는 수고조차 필요 없어질 것이다. 그저 꽃다운 기녀의 미모만 드러내도, 남편은 충분히 마음을 빼앗길 것이다.시만자는 최 씨를 조용히 응시했다. 보아하니 그녀도 남편이 고청우의 미모를 쉽게 넘어갈 것임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시만자는 이 상황이 매우 안타까웠다.최 씨는 훌륭한 여성이지만, 그녀는 좋은 남자를 만나지 못했다. 왕표가 아무리 남강을 지키는 장수라고는 하지만 최 씨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최 씨는 온 마음을 다해 집안을 돌보며, 시어머니를 섬기고, 시누이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평서백부를 위협하는 모든 일들을 막아내고 있지만, 그녀는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이내 평정심을 되찾은 최 씨는 송석석에게 감사를 표했다. "귀띔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곧 편지를 보내 주의시키겠습니다." 송석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청우는 이미 이름을 바꾸었고, 사온도 그녀의 정체를 공개한 적이 없기에, 그녀가 평서백부에 어떤 목적으로 접근할지는 아직 불분명합니다." 최 씨는 송석석의 말뜻을 곧바로 이해했다. 고청우는 더 이상 기녀가 아니었고, 장공주도 이미 몰락했으니 이제 자유의 몸이었다. 그녀가 의지할 사람을 찾고자 한다면, 왕표는 그녀에게 훌륭한 보호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고작 그런 이유라면, 최 씨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고청우는 공주부의 서녀이고 이 사실을 대리사와 송 지휘사는 알고 있었다. 그러니 만약 왕표가 그녀와 얽히게 된다면, 사건은 복잡해질 것이다.그
고청우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역겹다는 눈빛이 새어 나왔다. ‘버러지 같은 놈, 능력도 없고 용맹하지도 못하면 마음이라도 독하게 먹어야 할 거 아니야! 천하의 멍청한 놈!’그러다가 다시 고개를 들고는 반짝이는 눈빛으로 말했다.“역시 저희 서방님은 선하신 분입니다. 제가 서방님을 참 잘 만난 것 같네요.”한편, 결심을 하고 나니 왕표는 되레 마음이 너무 편했다. 그는 고청우의 얼굴을 다정하게 어루만지며 눈앞의 이 여자와 남은 평생 신분을 숨긴 채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상상을 하고 있었다.지금까지 남들이 부러워하는 화려한 삶도 살아봤고 나라를 위해 목숨도 잃을 뻔했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다.목숨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없으니 왕표는 절대 잘못한 게 없으며 더군다나 그가 남강에 있든 없든 별다른 차이는 없었다.어차피 제린과 방천허 등 부하들은 그를 원수로 인정하지도 않으니 말이다. “가서 왕진을 불러오게. 이곳을 떠나기로 했으니 그자와 논의해서 우리 사람들을 전부 데리고 가야지.”왕진은 본래 평서백부의 교두였는데 왕표를 따라 남강 전쟁에 뛰어든 것이었다.왕표는 전에 최씨가 그의 곁에 몰래 사람을 붙였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부인 고청우가 남강에 오고나서 최씨가 심어놓은 사람들을 전부 제거한 것이다.때문에 지금 저택에 남아있는 부하들은 왕표의 믿음을 듬뿍 받고 있는 자들이다.한편, 왕표의 계획을 들은 왕진이 흠칫 놀랐지만 이내 찬성했다.남강에 오기 전, 왕진은 진성에서 더할 나위 없는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었고 평서백부에서 교두로 지내던 나날들은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하지만 왕표를 따라 남강에 오고 나서부터 좋은 술을 마셔본 적도 없고 입맛에 맞는 요리를 먹어본 적도 없었다.지금 그 부귀영화를 누리던 땅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데 그 누가 거절할 수 있을까!더군다나 전쟁이 터져서 왕표가 전장에 나가면 왕진도 따라가서 목숨 걸고 피 터지게 싸울 수밖에 없다.왕진 등 사람들은 정식적인 사병이 아니기에 지금 도망간다고 해도 그들의
몰래 저택 안으로 들어온 무당은 10분 뒤, 다시 뒷문으로 빠져나갔다.한편, 저택에 앉아있던 왕표는 온몸에 힘이 쫙 풀렸으며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조금 전, 무당은 저택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주변을 쓱 훑어보더니 담담하게 한 마디만 뱉었다.“장군님, 부디 몸조심하십시오.”그리고 나서는 고청우가 아무리 울며 빌어도 무당은 입을 꾹 닫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 굿을 해달라고 해도 단호하게 거절하며 소용없는 짓이라고 얘기했다.그러다가 저택을 떠나기 전, 무당은 왕표에게 말을 전했다.“이 땅은 장군의 무덤입니다. 장군님께서는 가족들을 달 대피시키십시오.”무당의 말에 왕표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이 남강 땅에 얼마나 많은 장군의 뼈들이 묻혀 있단 말인가! 더할 나위 없이 용맹하고 전쟁 경험이 많은 송회안 부자도 이 땅에서 목숨을 잃지 않았는가!왕표는 송회안 부자를 존경하지만 두 사람처럼 되고 싶지는 않았다.만약 전장에서 죽는다면 평서백부가 아무리 대대손손 흥한다고 해도 왕표는 전혀 그 영광을 누리지도 못할 것이고 심지어 그의 부인과 아들도 이를 누릴 수 없다.이때, 고청우가 뒤에서 왕표를 끌어안고는 엉엉 울기 시작했다.“서방님, 서방님께서 전장에서 목숨을 잃게 된다면 저와 아들도 서방님을 따라 가겠습니다.”“아니, 난 절대 죽을 수 없어!”눈물을 뚝뚝 흘리는 고청우를 보며 왕표가 큰소리로 외쳤다. 그리고는 고청우의 손을 덥석 잡더니 결심한 듯 말을 이어갔다.“우린 아무도 안 죽을 것이오. 전에도 약속하지 않았소? 전쟁이 일어나면 바로 남강 땅을 떠날 것이오!”흠칫하던 고청우가 당황한 기색으로 왕표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물었다. “하지만 저희가 정녕 이곳을 떠날 수 있을까요? 이 저택에 저희 사람만 있는 건 아닙니다. 더군다나 모든 걸 버리고 몸만 떠날 수는 없지 않습니까?”왕표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안일한 생활을 오랫동안 보낸 왕표는 절대 가난하게 살 수는 없었다.반드시 당당하고 순조롭게 금은보화를 저택 밖으로
한편, 남강에서 왕표는 며칠동안 계속 좌불안석이었다. 그는 사국 병사들이 정말 쳐들어올 줄은 몰랐으며 시씨 가문 도련님이 보낸 서신이 사실일 줄도 전혀 몰랐다.왕표는 방천허 등 사람들과 몇 번이고 논의를 했지만 그자들은 전혀 겁을 먹지 않았으며 쳐들어오면 바로 전쟁을 치르면 된다고 했다.방천허가 보인 자신감에 왕표는 조금이나마 안심이 됐지만 전쟁이 일어난 순간 왕표는 절대 군영에서 지휘만 하고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그리고 방천허 등 병사들에게 정말 그만한 실력이 있는 것일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송씨 가문 군대와 북명군은 평소에도 건방진 태도로 왕표의 지시에 따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병사 훈련을 진행하지 않았기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승산이 높지 못할 것이다.왕표는 자신의 다리를 만지작거렸다. 아직도 비가 내리면 다친 무릎에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으며 전장에서 다리도 잃을 뻔했다.진성으로 돌아가 오랜 시간의 치료를 통해 겨우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긴 했지만 여전히 가끔 다리가 불편했다.왕표는 전장에서 죽음에 이르렀던 그 순간을 여전히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살인으로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고 심지어 칼을 들 힘도 없었다.그뿐만 아니라 몸에 입고 있는 갑옷이 너무 무거웠던 탓에 적에게 공격을 당했을 때 누군가가 구하러 오지 않았다면 왕표는 그 자리에서 목이 잘렸을 것이다.물론 이제 원수가 된 왕표는 굳이 전장에 직접 나갈 필요가 없지만 남강에는 원수가 숨어서 지휘만 하는 게 아니라 직접 앞장서서 싸워야 한다는 전통이 있었다.그 전통을 만든 사람이 바로 송회안과 사여묵이었고, 제린과 방천허도 이 전통을 찬성하는 바였다. 원수가 전장에 직접 나서야만 병사들의 투지와 열정을 끌어올릴 수 있어, 짧은 시간 내에 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바로 그때, 대문이 열리며 고청우가 인삼차를 들고 들어왔다.왕표는 이내 걱정스러운 표정을 숨긴 채 고청우를 쳐다보았고 고청우는 조금 전에 울고 온 듯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
임 태의는 북명왕의 상태가 걱정되어 황실에 남아 밤을 보내려고 했지만 저녁쯤 돌아온 단 신의가 한걸음에 황실로 달려와 북명왕에게 단설환 한 알을 건네 주었다.단설환을 복용한 북명왕은 흉부 통증이 바로 완화되었고 임 태의가 맥을 짚어보니 그가 처방한 약보다 효과가 훨씬 좋았다.임 태의는 오래 전부터 단 신의의 명성을 익히 전해 들었기에 굳이 자신이 황실에 남을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위로 몇 마디를 남긴 뒤 황실을 떠났다.임 태의가 가자마자 단 신의는 북명왕을 위해 처방을 했고 제자를 시켜 약왕당에서 가서 약재를 구해 약을 달이기 시작했다.약을 먹은 사여묵은 가슴에 꽉 막혀 있던 큰 돌멩이가 사라진 기분이었으며 겨우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있었다.“임 태의가 내일도 찾아올 걸세. 때문에 왕야께서 진성을 떠난다고 해도 내일 저녁까지 저택에 계시다가 출발하셔야 하네.”단 신의의 말에 송석석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임 태의께서 내일 다시 장군님의 맥을 짚어본다면 모든 게 들통나는 거 아닙니까?”“사람을 시켜 저택 밖에서 지켜보다가 임 태의가 나타나면 내가 다시 왕야께 약을…”“약을 또 드셔야 한다는 겁니까? 더 이상 중독되면 안 됩니다.”송석석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다급하게 말하자 단 신의가 송석석을 힐끗 쳐다보았다.“그렇게 걱정됐다면 그 반 알도 드시지 못하게 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송석석이 후회 막심한 표정을 지었고 단 신의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남은 반 알을 먹이려는 게 아니네. 현빙환이라는 약이 있는데 조울증을 치료하는 약이라 이 약을 복용하면 맥박이 여전히 이상하게 보일 걸세.”그제야 마음이 놓인 송석석이 다시 물었다.“그 전에 드신 약이 이미 심장을 손상시켰는데 거기에 이 현빙환까지 드시면 몸 상태가 더 악화되지 않겠습니까?”“큰 문제는 없을 것이네. 그래서 치료제로 이런저런 약을 많이 드리지 않았나?”단 신의의 말에 곁에 서있던 동동이가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그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처음부터 왕야께 현빙환을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친위병 몇 명을 거느린 척귀가 임 태의와 오대반과 함께 북명 황실로 향했다.송석석은 며칠동안 공무를 내려놓기로 하고 모든 업무를 필명과 오진에게 맡겼다.시만자도 송석석을 통해 자초지종을 알게 되었고 오늘 임 태의와 오대반이 저택에 왔다는 소식에 시만자는 괜히 어설픈 모습을 들키기 싫어서 나타나지 않았다.임 태의와 오대반은 이내 두 눈이 퉁퉁 부은 송석석을 만나게 되었고 오대반이 조심스럽게 위로했다.“왕비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임 태의가 계시니 왕야께서도 조만간 호전될 것입니다.”“감사합니다.”송석석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한편, 척귀 등 친위병은 왕야와 왕비의 침실에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기에 밖에서 지키고 있었다.척귀는 침실 밖에 나타난 염구진을 보자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다가 물었다.“염 선생, 폐하께서 왕야를 걱정하셔서 이렇게 소인을 보냈습니다. 혹시 왕야께서 예전에도 이런 질병을 앓으신 적이 있으셨습니까? 왜 갑자기 쓰러지신 겁니까?”염구진은 척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왠지 모르게 마음속으로 짜증이 확 났고 요즘 따라 이런 감정을 자주 느끼는 것 같았다.그는 황제의 이러한 조사가 결국 불신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염구진은 짜증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채 담담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왕야께서 이토록 바쁘신데 쓰러지지 않을 수가 없지요. 언젠가 몸이 망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낮에는 대리사에서 공무를 처리하시고 저녁에는 잡다한 일로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저택으로 돌아오십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일찍 조정에 참석하시느라 한 시간도 채 못 주무시는데 몸이 어떻게 건강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노주로 가셨을 때 산속에 숨어 지낸 탓에 추위에 약해지셨고 진성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제대로 휴식을 취하신 적이 없었지요.”척귀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어명을 받고 탐문하러 온 척귀는 지금 이 순간 북명왕이 너무 대단하게 느껴졌으며 북명왕처럼 매일 바쁘게 살면 쓰러지지 않을 사람이 없
저녁쯤, 숙청제가 송석석을 궁으로 불렀고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된 송석석을 보며 숙청제는 사여묵이 아프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다.“너무 걱정하진 말거라. 임 태의가 있으니 상황이 호전될 것이야.”숙청제의 말에 송석석은 영혼을 잃은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감사합니다, 폐하. 소인이 단 신의께 소식을 전했으니 단 신의께서도 곧 돌아오실 겁니다. 단 신의에게 좋은 약이 있으십니다.”“단설환을 얘기하는 것이냐?”숙청제도 단설환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으며 진성에 있는 황족과 세가들은 돌발 상황을 대비하여 한두 알 정도 가지고 있었다.하지만 2년 전부터 이 약은 거의 판매를 하지 않았기에 매우 귀한 약이 되었다.“네.”“단 신의는 언제쯤 돌아올 수 있다고 하더냐? 그 약을 약왕당에서 구할 수는 없는 것이냐?”숙청제의 물음에 송석석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아무리 빨라도 삼일 정도는 걸릴 것입니다. 약왕당에도 현재 이 약을 판매하고 있지 않습니다. 홍작한테서 들었는데 단 신의께서 단설환 두 알을 가지고 계신다고 합니다.”“그럼 단설환 외에는 다른 약이 없느냐?”숙청제는 단설환의 약효가 좋다는 건 인정하지만 들리는 소문처럼 그리 신통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그저 근거 없는 소문에 불과하다고 여겼다.“다른 약은 약효가 그리 좋지 못합니다.”머뭇거리던 송석석은 살짝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전북망 장군님 모친께서도 심각한 심장 질병으로 거의 사망하시기 직전이셨는데 단설환을 드시고 목숨을 부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뒤로 매달 단설환 한두 알씩 드셨다고 하는데 효과가 확실했다고 합니다.”숙청제도 이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지만 이 상황에서 망자를 언급하는 건 재수가 없을 것 같아서 이내 송석석을 위로했다.“임 태의한테서 들었는데 상황이 조금은 호전되고 있으니 치료를 받고 충분히 휴식하면 곧 건강을 회복할 수 있을 터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네, 폐하. 오늘 임 태의가 계셔서 너무 다행이었습니다.”송석석의 눈시울은
어서방에서, 임 태의가 허리를 숙인 채 황제에게 사여묵의 상황을 보고하고 있었다.두 시간 전, 대리사 소경 진이가 북명왕의 옥패를 들고 태병원으로 달려와 북명왕이 갑자기 쓰러졌다고 외쳤다.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숙청제도 이내 보고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소인이 보기엔 갑작스러운 심장 발작으로 의심됩니다. 상황이 매우 위험한데 소인이 도착했을 때 왕야는 이미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 계셨습니다. 침술을 몇 번이나 사용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셨는데 제대로 걷지 못하셔서 마차에 태워 황실로 보내 드렸습니다.”“왜 갑자기 발작을 한 것인가? 전에는 한 번도 이런 병이 있다는 것을 들은 적 없는 것 같은데.”숙청제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으며 속으로 걱정이 되기도 했다. 어찌 됐든 사여묵과 피를 나눈 형제였기에 평소에 의심하고 경계한다고 해도 이런 상황에서는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소인도 황실에 계신 염 선생한테서 들었는데 왕야는 얼마전 진성으로 돌아오고 나서부터 제대로 휴식도 취하지 못했고 가끔 기침을 심하게 했다고 하셨습니다. 가슴이 답답할 때도 있었는데 크게 신경을 쓰지 않으셨습니다. 소인이 보기엔 고뿔이 악화되면서 발작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숙청제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갔지만 조금 의심이 들기도 했다.“고뿔을 앓고 있었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상태가 악화될텐데, 왜 그동안 아무도 몰랐던 것이냐?”“폐하, 염 선생께서는 왕야가 진성에 돌아온 뒤로부터 너무 바빠서 쉴 시간도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고뿔 외에도 마음에 걱정되는 일이 있어서 고뿔을 미처 신경 쓰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고뿔도 사람마다 다릅니다. 평소에 풍채가 좋은 분들은 증상이 확실하게 티가 나지 않아서 자신이 아프다는 것도 잘 모릅니다. 왕야도 그런 상황이었던 것 같습니다.”숙청제는 의학에 대해 전혀 몰랐기에 그저 물을 수밖에 없었다.“그럼 이젠 조금 나아졌느냐?”“폐하, 왕야는 현재 상태가 더 이상 악화되지는 않겠지만 반드시 충분한 휴식을 취하셔야 합니다. 절대 과로해서는
이날 저녁, 송석석은 약왕당에서 받아온 약을 사여묵에게 건넸고 약의 위험성까지 자세하게 얘기했다.사여묵은 망설이는 듯한 송석석의 모습에 환하게 웃으며 위로했다.“이 정도 상해는 충분히 견딜 수 있소. 그리고 원기를 회복할 수 있는 약들도 이렇게 잔뜩 가지고 오지 않았소? 나중에 어의에게 진단만 받으면 바로 단설환을 먹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오. 남강으로 가는 길에도 단 신의의 당부를 잊지 않고 매일 약을 꼬박꼬박 챙겨 먹겠소.”“그래도 결국 독약 아닙니까? 그러지 말고 저희 다른 방법을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요?”송석석이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사여묵이 담담하게 대답했다.“내가 보기엔 지금으로써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소. 단 신의가 말을 무섭게 해서 그렇지 그 정도로 심각한 상해를 입히지 못할 거요. 그렇게 위험한 약이었다면 애당초 꺼내지도 않았겠지.”“그럼 일단 염 선생과 상의라도 해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그럴 필요 없소!”사여묵이 약을 내려놓은 뒤, 커다란 손으로 송석석의 허리를 감싸며 말을 이어갔다.“이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유리하오. 나중에 내가 대리사에서 쓰러지면 진이가 내 옥패를 들고 어의를 찾아갈 것이고 황실로 달려온 어의가 우왕좌왕하는 염 선생을 보아야 의심을 하지 않을 것이오.”송석석은 사여묵의 가슴팍에 기대어 불안한 마음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전 장군님이 너무 걱정됩니다. 몸이 회복되기도 전에 남강으로 출발해야 하는데 가는 내내 제대로 쉴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남강에 가서도 몸 상태가 회복되지 않으면 전장에 어떻게 나가시려고 그러십니까?”송석석의 걱정에 기분이 좋아진 사여묵이 다정하게 웃으며 그녀를 위로했다.“난 왕표를 무조건 대체하겠다는 게 아니오. 일단 제린을 찾아 병사들 속에 숨어 있다가 왕표가 제대로 군을 이끈다면 난 남강 구경이나 하다 올 것이오.”사여묵의 위로에도 송석석은 시름이 놓이지 않았다. 왕표가 군을 제대로 이끌지 못할 거라는 확신 때문에 두 사람이 지금 이런 모험을 하고 있는
화가 난 단 신의는 송석석의 말에 설득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버럭 언성을 높였다.“난 멍청한 사람을 돕지 않소. 당신들은 그런 천하의 멍청이가 따로 없소!”“세상에 이런 멍청이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번 한번만 더 모험하고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약속할게요.”송석석이 환하게 웃으며 말하자 단 신의가 미간을 찌푸렸다.“모험을 하고 싶어도 이제 못할 수도 있소. 돌아오면 황제께서 그 죄를 어떻게 물으실 줄 알고 이러는 것이오. 그러다가 머리가 잘릴 수도 있소.”“정말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고 해도 저에게 방법이 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단 신의는 고집을 부리는 송석석을 보며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말한 것처럼 백성들에게는 두 사람과 같은 멍청이들이 필요하긴 했지만, 단 신의는 그 멍청이가 송석석과 사여묵은 아니길 바랐다.결국 단 신의는 먼지가 뽀얗게 쌓인 작은 상자를 꺼내 먼지를 툭툭 털어내곤 조심스럽게 열었다.상자 안에는 땅콩 만한 검은 알약 하나가 있었다.“똑똑히 기억하시게. 이건 독이오. 이 약을 먹고 나면 맥박이 이상해지고 갑작스러운 발작을 일으키네. 그리고 짧은 시간내에 심장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지. 이건 그저 보여지는 현상이 아니라 실제로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네. 이 약을 먹고 3일 정도 버틸 수 있는데 3일 뒤에는 반드시 단설환을 복용해야 하오. 그러지 않으면 심장에 영구적인 손상을 입을 수도 있소.”단 신의의 말에 송석석이 흠칫 놀란 표정이었다.“정말로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뜻입니까?”“그럼 당연하지. 이건 독이오.”“그럼 단설환을 먹고 나면 바로 정상적인 몸 상태로 돌아올 수 있는 겁니까?”“그렇지 않소. 며칠 동안 안정을 취해야 하네. 눈속임을 하고 나서 바로 출발하면 절대 안 되오.”위험할 수도 있다는 단 신의의 말에 송석석은 단 신의가 건네는 약을 받지 않았다.“그럼 혹시 다른 약은 없는지요? 폐하를 속이고 나서 장군님은 바로 출발하려고 할 겁니다. 실제로 중독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