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여묵은 잠시 고민하는 척하다 대답했다. “무장들에 대해서는 아직 특별히 의심할 만한 사람은 없습니다.” 썩 만족스러운 답변은 아니었지만 숙청제는 격분하지 않았다. “대리사는 이 사건만 처리하거라, 내가 따로 사람을 보내 조사할 것이다.” “예, 폐하.” 숙청제는 엄지손가락의 옥반지를 돌리며 말했다. “전에 듣기로 당분간 자녀를 가질 생각이 없다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아직 계획이 없습니다.” 숙청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했다. “석석은 현갑군의 부지휘관이고 너는 이미 대리사 경이 되었으니, 현갑군 지휘관 자리는 내려놓거라. 나는 석석이를 현갑군 지휘관으로 임명할 생각이다.” 사여묵은 조금 놀랐다.“폐하, 실권이 있는 자리로 말입니까?” “그렇다. 그 애가 바로 그 자리에 오를 것이다.” 사여묵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폐하, 조정에 여인이 장군으로 임명된 전례는 있으나, 관직을 맡은 선례는 없습니다.” “그런 선례는 만들면 그만이다.” 사여묵은 황제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다. 송석석에게 황실의 치안을 맡기는 것은 그를 더 이상 경계하지 않겠다는 뜻인지, 아니면 의도가 있는 것인지.“석석이는 여고를 세우고 싶다며 일찍 부지휘관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한 적이 있고 명예직이었기에 사직하지 않았던 것일 뿐입니다.” “그러면 사직할 필요는 없고 명예직도 아니니라. 현갑군은 경위와 금군을 포함하고 있으니, 실권을 가지게 될 것이다. 석석이가 나를 실망시키지 않기를 바란다.” 사여묵이 아무 말 없자 숙청제가 웃으며 물었다. “왜 그러느냐? 석석이에 대한 믿음이 없는 것이냐 아니면 감당하지 못할까 두려운 것이냐? 것도 아니면 세상에 보여주고 싶지 않고 집안에만 가두고 싶은 것이냐?” 이에 사여묵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그녀가 하고 싶은 일이라면 무엇이든 지지합니다. 다만 그녀는 관직을 원하지 않았고, 여고를 세우고 싶다는 소망을 말했을 뿐입니다. 폐하, 신하가
숙청제가 떠난 후, 오대반이 어전에 들어갔다. "폐하, 이제 한 식경 후면 조정에 오를 시간입니다. 제가 폐하의 의복을 준비하겠습니다." "여기서 바로 갈아입도록 하겠다." 숙청제가 손짓하자 오대반이 외쳤다."어서 용포를 가져오라. 폐하께서 환복하신다." 잠시 후 궁녀들이 용포와 황관을 들고 줄지어 들어왔다. 오대반은 모두 물러가게 하고 직접 숙청제의 옷을 정리해 주었다. 숙청제의 얼굴에는 여전히 노여움이 서려 있었지만,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보다는 많이 누그러졌다.숙청제는 오대반을 보며 물었다. "왜 내가 석석이를 현갑군 지휘관으로 임명하였는지 아느냐?" 오대반은 용무늬 허리띠를 정리하며 답했다. "폐하의 영명하심에 그저 감탄할 따름입니다. 폐하께서는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으실 것입니다." 숙청제는 양팔을 벌려 그가 겨드랑이 부분을 정리하도록 하며 담담하게 말했다. "장공주가 왜 반역을 꾀했을까? 나를 무너뜨려 얻으려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저는 장공주가 참으로 어리석다고 생각합니다. 폐하께서는 늘 각별히 대해주셨는데 말입니다." "그럴 리 없다 믿었던 장공주가 반역에 가담했다. 그렇다면 내가 누구를 믿을 수 있겠느냐?" 숙청제는 넓은 소매를 흔들며 몸에서 피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려 애썼다. "이번 일은 북명왕부와는 상관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사람들을 공주부로 끌어들일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전각의 등불이 숙청제의 준수한 얼굴을 비추자,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그를 의심하지 않는다. 다만 상황에 대비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군가 먼저 시작하였으니 다른 마음을 품게 된다면 그라면 충분히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왕비에게 현갑군을 맡겨 실권을 주신 것입니까? 이는 그에게 권력을 주는 것과 같지 않습니까?" 오대반은 의아했다.숙청제는 고개를 저으며 냉정한 눈빛으로 말했다. "현갑군은 대부분 그가 직접 선발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여전히 그에게 충
궁을 나선 사여묵은 먼저 돌아가 막 잠이든 염 선생에게 이 일을 알렸다. 그러고는 왕비가 깨어난 후 알리라 했다.이를 들은 염 선생은 잠이 확 달아났다. 왕비가 깨면 그녀에게 부탁해 동생을 만나려 했지만, 이제는 황제의 행동이 도대체 무슨 의도인지 머리를 짜야 했다.이제 잠자기는 글렀다.이튿날 아침, 잠에서 깬 송석석이 옷을 입고 나오자, 염 선생이 직접 찾아와 말했다. "장군께서 다녀가시며 황제께서 왕비님을 현갑군 지휘관으로 임명할 것이라며 경위와 순방영 금군과 어전시위까지 맡기실 계획이라 했습니다. 저는 아직 그 의도를 파악하진 못했습니다." 송석석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실직이라 하였느냐?" "그렇습니다, 실직입니다." 잠시 멍하니 있던 송석석이 말을 이었다. "조정에 여인이 관리를 맡은 적은 없었다. 과거 여장군으로 이름을 날린 이방조차 위소에서만 활동했을 뿐, 조정에서 권력을 쥔 적은 없다. 나 또한 지휘관 자리를 받았다고는 하나, 지금껏 아무 일도 맡지 않았고 단지 녹봉만 더 받았을 뿐이다." 여인이 전장에 나서는 것과 여성이 관직에 서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그녀가 통솔해야 할 것은 단순한 군대가 아니라 현갑군, 그리고 금군, 궁중 호위까지 포함한 막중한 권력을 쥐는 것이었다."황제의 의도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오늘 조정 회의가 끝나면 임명 문서가 곧바로 내려올 것입니다. 게다가 장군께서 전하기를, 황제가 직접 교지를 내릴 거라고 하셨습니다." 송석석은 이번 결정이 다소 의아했지만, 임명이 이루어진다면 수락할 생각이었다. 조정에서 여인이 관직에 오른 일은 이전 왕조에는 존재했다. 다만 우리 조정에는 없을 뿐이다.여성의 지위는 너무도 낮았다. 태후도 항상 이 점을 한탄하셨다. 하여 전에 이방이 여장군이 되었을 때, 태후는 그토록 기뻐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잠시 고민하던 송석석이 말을 이었다. "염 선생, 사실 줄곧 물러서고, 인내하며 양보해 왔던 장군을 황제께서도 다 보고 계셨을 것이다.
자고 일어난 시만자는 조정에서 송석석에게 벼슬을 내렸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현갑군의 지휘관으로서 경위와 순방영 금군을 통솔한다고 말이다.그녀는 꿈인가 싶어 눈을 비비며 물었다.“정말로 망나니가 되려는 거야?”송석석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망나니라니, 괜찮은 관료가 될 수도 있지 않겠어?” “그렇다면 청렴한 대관이 되는 거네.” 시만자는 턱을 괴고는 송석석 주위를 한 바퀴 돌며 덧붙였다.“좋아, 우리 석석이는 청렴한 대관이 되는 거야.”송석석은 둘이 함께 무림을 누비던 시절을 떠올렸다. 그때 무림인들은 지방 관리들이 탐탁지 않았다. 그들은 부패한 관리들을 ‘망나니’라며 혀를 찼었다. 그러나 청렴하고 백성을 진심으로 위하는 관리들에게는 모두 존경을 표했었다. 아쉽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와야 했고, 그로 인해 송석석은 사숙에게 반년 동안 문밖을 나서지 못한다는 벌을 받게 되었다.그 시절을 떠올린 송석석은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관료가 되더니 얼굴이 폈네?”그런 송석석을 보는 시만자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는 오랫동안 송석석이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벼슬 때문이 아니라 이제는 그 지겨운 ‘부덕부언’의 규율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야. 조금 더 자유로워져서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잖아.”시만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맞아. 네가 그동안 세가의 부인들과 있을 때 웃음조차 입 꼭 마물어야 해서 보는 내가 답답할 지경이었어.”그러다 문득 궁금해진 시만자가 다시 물었다.“그런데 왜 황제가 갑자기 너를 관직에 앉히려고 하는 거야? 네가 공을 세우고 돌아왔을 때 이미 관직을 줬어야지. 이제 와서 이러시면 반대하는 대신들이 많을 수밖에 없잖아. 그들은 여인이 조정에 발을 들이는 걸 원치 않을 테니 말이야.”송석석은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대신들의 반대는 황제가 해결해야 할 문제야. 왜 나를 벼슬에 앉히려 하는지 깊이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내가 가까이 다가가야지만 황제도 우리 북명왕부가 그토록 경계할
이날, 진성에서 변고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염구진 가문의 하인들이 장을 보러 나갔다 돌아오며 전하였더니, 염철근은 하인들에게 상관하지 말고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말라고 명하였다. 그의 손자가 북명왕부에서 장사로 있으니 그들은 결코 정치적인 일에 얽히거나, 어떠한 말도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염철근은 그 일은 가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여겼다. 진성에 살며 그들은 한 가지 원칙을 고수해 왔으니, 그것은 말과 행동을 신중히 하여 손자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것이었다.아침 식사를 마친 뒤, 그는 정원에서 햇볕을 쬐고 있었다. 날씨가 점차 추워져 햇살이 점점 더 귀해졌다."소아가 그러기를 아버님께서 아침을 적게 드셨다고 하더이다. 혹 몸이 불편하신 것은 아니 옵니까?" 염구진의 어머니, 진부연이 다가와 공손히 묻자, 염철근은 눈을 떴다. 며느리의 얼굴에 피곤이 가득했다.“입맛이 없는 것뿐이니 별것 아니다. 신경 쓰지 말거라.”염철근은 찌푸린 얼굴로 되물었다."또 악몽을 꾸었느냐?"진부연은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근래 들어 자주 희진이가 보입니다. 어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나이다."염철근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것은 단순한 꿈이 아니라, 염희진이 온갖 고통을 당하는 악몽이었다. 염희진은 손발이 잘리거나 물에 빠지거나 혹은 불에 타는 처참한 모습이었다."생각하는 대로 꿈을 꾼다 하지 않았더냐? 너무 염려한 탓이니라. 좋게 생각해 보거라. 어쩌면 이미 혼인하고 자식도 낳아 평안히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입을 열려던 진부연은 말을 아꼈다. 어둠이 드리운 시아버지의 눈빛을 본 그녀는 그 역시 자신을 위로하려는 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게 생각해 보겠지만 하늘이 가엾이 여겨 다시 희진이를 만나게 한다면 그 어떤 대가라도 기꺼이 치르겠나이다."염철근은 며느리를 위로했다. "너무 많은 생각은 하지 말거라. 세상일은 억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니, 강요하지 않으면 뜻밖에 기쁜 일이 생길 수도 있는 법이니라."
마차는 왕부로 향해 달리고 있었다. 진부연의 손에는 두 층으로 된 나무 도시락이 들려 있었다. 그녀는 온 힘을 다해 감정을 억누르려 했지만, 눈물은 마치 끊어진 구슬처럼 계속해서 흘러내렸다. 18년, 수많은 낮과 밤, 그토록 고통스러웠던 날들 속에서 단 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녀는 매일 후회했다. 더 잘해주지 못한 자신이 미웠다.시부모님과 남편, 아들까지도 염희진을 아끼고 사랑했지만, 그녀는 엄격했다. 그녀의 손바닥을 때리고 금고에 가두어 벌을 준 적도 있었으며 배를 곯게 한 적도 있었다... 많은 일들이 세월속에서 희미해졌지만, 억울함 가득했던 그 슬픈 얼굴, 눈물 흘리던 모습, 매 맞고 잔뜩 주눅이 들었던 어깨까지 너무나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 장면들이 하나하나 모여 그녀의 마음 가장 아픈 곳을 매일같이 도려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아이가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왜 그녀를 꾸짖었을까? 왜 때렸을까? 왜 눈물을 흘리게 했을까? 다른 이들처럼 소중히 대할 수는 없었을까? 마차에서 염 선생은 염희진이 납치된 후의 일들을 하나하나 이야기했다. 듣고 있던 진부연은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아픈 몸인데도 불구하고 숲속에 버려졌으니,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것이었다.하늘이 도운 것이다. 누군가가 그녀를 데려가 살려주었고, 결국 그녀는 무사할 수 있었다.재주를 부리며 살던 날들은 너무나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장난기가 많아 높은 곳을 오르내리곤 했지만, 재주를 배우려면 얼마나 많이 넘어졌을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얼마나 많이 아팠을까? 예쁜 얼굴 때문에 괴롭힘을 당하기도 했다. 하여 어쩔 수 없이 옹현으로 거처를 옮겼다.그런 그녀의 생명의 은인이었던 반주는 그녀가 은혜를 갚기도 전에 해를 당하고 말았다.염희진은 아직 반주가 돌아간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장공주를 따라 진성으로 가면 반주에게 좋은 날이 올 것이라 생각했고 의사의 치료도 받고 돌봐줄 사람도 있을 거라고 여겼다.진부연은 이 세월 동안 악한 자에
해피엔딩만을 선호했던 시만자는 슬픔에 가장 약했다.그녀는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라 그저 염희진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기만 했다.“너무 슬퍼하지 마시오. 생사에는 천명이 있는 법. 반주도 오랫동안 병고에 시달렸고 죽음이 비록 좋은 해방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크게 고통받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시만자는 반주가 진정으로 잠결에 목숨을 잃었기를 바랐다. 사실 염 선생은 그녀에게 반주가 병사했다고 말할 것을 제안했었다. 하지만 사여묵과 송석석이 반대하였다. 그들은 염희진이 누가 반주를 죽였는지 알 권리가 있다고 했다.시만자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누군가 자신의 스승을 죽였다면… 만약, 만약에 말이다. 그녀도 누가 원수인지 알려 했을 것이다. 결코 멍청하게 모른 채로 살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슬퍼하는 염희진의 모습에 시만자는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지금 그대는 오라버니와 할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진성으로 오고 계시는 그대의 아버지를 뵈러 가는 길입니다. 반주께서도 이를 보시면 기뻐하실 겁니다.” 가족과 재회할 것이라는 말에도 염희진의 슬픔은 가시지 않았지만, 며칠 전부터 기다려왔던 만남이기에 기대할 뿐이었다. 시만자에게서 오라버니가 진성에 있다는 말을 듣고 이 만남을 간절히 기다려왔다. 그녀는 줄곧 일곱 살 이전의 기억을 떠올리려 애썼다. 그러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 오라비가 있었다는 것도 기억해 냈다. 그들의 얼굴도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선명했던 기억은 어머니께서 자신의 손바닥을 때리던 장면이었다. 노란색 나무 자로 손바닥을 내려치던 모습이었는데, 너무나 아팠던 기억이다. 하지만 매번 그녀가 맞고 나면 어머니도 눈물을 훔치셨다. 그러면 그녀는 애교를 부리며 어머니를 웃음을 짓게 하려 애썼다. 염희진은 슬픔을 억누르며 눈물을 닦았다. 그들이 자신을 찾아 십팔 년을 헤멨고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짐작할 수 있었기에 이제 더는 그들을 슬프게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슬픔과 억울함이 한꺼번에 몰려왔다.가냘픈 어머니를 껴안은 그녀는 그동안 받았던 상처가 마치 둑이 무너진 강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이렇게 어머니를 껴안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못했다.이어 염 선생이 할아버지를 모시고 다가왔고 그들은 눈물로 인사를 나누었다. 모두들 정청 안으로 들어갔다. 진부연은 여전히 딸의 손을 놓지 않았다. 기억 속에 일곱 살이었던 염희진은 이제 스물다섯이 되었다. 그녀의 기억도 서서히 또렷해졌다. 하지만 기억 속 어머니는 젊고 활기찼었다. 그녀를 꾸짖을 때면 이웃들에게 들릴 정도로 목소리가 우렁찼지만, 이제는 말조차 힘겹게 하시는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이 장면을 보고 있었던 시만자와 송석석은 두 사람은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눈시울을 붉히며 옛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그들의 모습에 두 사람도 가슴이 뭉클해졌다.염 선생은 어릴 때부터 동생을 무진장 아꼈고 여리기만 한 진부연은 한때는 강인한 모습이었으며 어린 시절의 염희진이 장난꾸러기였다. 염희진은 매산에서의 두 사람과 많이 닮아있었다.송석석은 시간을 내어 황제의 임명장을 받아왔다. 임명장은 아직 제대로 펼쳐 보지도 못했지만, 감사의 예는 갖추었다. 오대반이 직접 임명장을 전달하며 몇 마디 나누고 싶어 했지만, 송석석은 이 감동적인 순간을 더 보고 싶어 그더러 잠시 기다리게 했다.시만자의 말처럼 이런 상봉이야말로 가장 감격스러운 것이었다.송석석은 눈물을 닦으며 딸을 품에 꼭 안고 있는 진부연의 모습을 보며 부러워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안길 수 있는 어머니가 없었다.그녀가 몸을 돌리자 혜태비가 바로 뒤에 서 있었다. 혜태비도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그 옆에서 눈물을 닦아주고 있는 고 씨 유모 역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눈물이 맺힌 송석석의 모습이 혜태비는 안쓰러웠다. 그녀는 손을 내밀며 말했다. "이리 오너라!" 송석석은 눈물을 닦으며 다가가자, 혜태비는 그녀를 꼭 껴안아 주었다."이제부터는 내가 너의 어미가 되어줄 것이다." 송석석은 감동
그러자 송석석이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왕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아주 잘 대해줍니다. 조카딸의 혼담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집간 부군이 잘 대해준다 하더군요. 다만 그녀는 자신이 두 번 시집갔음에도 처가에 머무는 것이 조카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되어 그러는 모양입니다.”그 말에 전북망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순간 번개처럼 날렵하지만 마음씨 따뜻한 최씨 부인이 떠올랐다. 최씨 부인에게는 적자와 서자녀들이 있었고, 아직 혼담이 정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혼인 문제로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에 시달렸을지 생각하니, 전북망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형수로서의 최씨 부인을 존중하며,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 없었다. 이때 송석석이 그의 생각을 끊었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전북망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우리 단둘이 여기에 있으면, 섭정왕이 질투하지 않을까요?” 송석석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침착하게 답했다. “이 정도 신뢰도 없다면, 제가 어찌 현갑군 지휘사로 오래 근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숨김없이 모든 걸 공유합니다. 이번 만남 역시 그분께 이미 알려두었죠.”송석석이 떠나자 전북망도 따라나섰다. 그는 섭정왕이 어딘가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의심했지만, 정작 별청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마당에서야 섭정왕을 발견했는데, 그는 대장군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송석석을 보자 미소로 맞이하며 불러세우는 섭정왕의 모습에 전북망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진정한 부부란 저런 것일까.'그러나 성릉관이든 진성이든, 남녀의 단독 만남은 명예에 흠이 될 수 있음도 잘 알았다. 특히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은 더욱 조심해야 했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들을 걱정하는가.’자조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왕청여의 제안은 여전히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5일의 고민 시간이 주어졌다. 사여묵과 송석석이 진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최씨 부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답은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 전북망은 송석석과 다시 만났다. 사실 그전에도 송석석이 성릉관으로 갔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서먹해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이 매번 성릉관을 떠날 때마다 몰래 배웅하곤 했다. 전북망은 자신이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늘 송석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방과 왕청여에게도 미안하긴 하지만, 그들과는 서로 감정을 소모하고 다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장군부만 송석석에게 상처를 줬을 뿐, 송석석은 장군부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않았다. 비록 이혼한 후에는 전북망 어머니의 병세에 대해 상관하지 않았지만 큰형수에게 어떻게 단설환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기까지 했다.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는 이미 섭정 왕비가 되어있고 나서였다. 변방의 전사들에겐 양식과 무기가 풍부하고, 봉록까지 올라, 그들에겐 이득이기에 이제는 조정의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었다. 섭정왕은 한때 장수였기에 병사들이 배불리 먹어야만 국토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북망과 송석석이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섭정왕과 함께 소 대장군에게 생신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소 대장군의 눈빛은 여전히 자애롭고 인자했다. 전북망은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그때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면 지금 송석석과 함께 노장군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일 것이라는 후회를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같은 생각인 걸 보니, 자신만 제자리에서 멈춰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송석석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생일잔치가 끝난 후에 송석석이 뜻밖에도 먼저 그를 찾았다. 그와 송석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섭정왕은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걱정되지도 않는가?’전북망은 당황하고 불안해 보였고, 송석석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먼저 입을 열지도 못하고 송석석이 말하기만을 기다리
전북망은 성릉관에서 몇 년 동안 두 번이나 발탁되었고, 지금은 장군의 신분으로 수천 명의 병사를 관리하고 있다. 계속 성릉관에 주둔하고 있어 다시 진성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고, 진성의 부름 없이는 제멋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재혼도 하지 않고 여전히 혼자 살아갔다. 성릉관의 모래바람은 해마다 그의 얼굴에 흔적을 남겨 또래들보다 몇 살이나 더 늙어 보였다. 심지어는 몇 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기에, 진정제를 먹어야만 잘 수 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그때 이방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송석석과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부부가 되었을까? 아마도 우린 귀여운 자녀도 낳았겠지. 그리고 나는 군대에서 열심히 일하고 석석은 가문의 내무를 책임지며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를 돌보고 있었겠지? 설령 내가 승진을 하지 못하고 평생 장군으로만 살아도 그는 날 떠나지 않았겠지.’ 이전의 전북망은 송석석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였는데 자신을 위해 날개를 부러뜨리고 병든 시어머니를 돌보며 군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책임지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그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돌이킬 수도 없었다. 전북망에게는 이미 이방이 있었고 이방을 사랑한다고 했으니, 송석석이 이혼하자고 했을 때 그는 심한 말을 하고 후회하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송석석 또한 후회할 게 없었다. 이혼을 하면서 전북망을 위해 부러뜨렸던 날개가 다시 자라나 전쟁터로 날아가 쉽게 공을 세웠으니까 말이다. 이방은 송석석이 큰 가문의 아가씨인 데다가 부친과 오라버니가 그를 위해 길을 닦아주었기에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의 성공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문이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주된 원인은 아닐 것이다. 만종문에서 송석석의 무공은 거의 최고였는데, 그건 송석석이 그만큼 노력을 했고, 그만큼 땀을 흘렸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북망은 송석석을 존경했지만 그는 자신이 송석석을
어머니께 간청해도 소용이 없자 신이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건 더 심한 꾸지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이가 이 혼사를 반대하는 것은 양지춘과 접촉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양지춘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서 놀며 감정을 쌓으라고 했다. 신이는 가기 싫었지만 어머니가 억지로 그녀를 마차에 태웠고, 심지어는 하녀에게 그녀가 부적절한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엄명했다. 양지춘의 얼굴은 그나마 멀쩡하게 생겼는데, 처음에는 신이를 조금이나마 존중하는 척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신이의 외모와 품평을 논하며 신이가 외모가 예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그를 부인으로 들이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그의 오만한 태도는 신이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아마도 신이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양지춘은 일부러 신이를 마차에 태워주는 척하며 그녀의 엉덩이를 꼬집었다!그 순간 신이는 온몸의 피가 머리 위로 솟구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경박한 눈빛에 신이는 이내 눈물이 쏟아졌고, 모욕감에 온몸을 떨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집에 돌왔는데, 하녀와 마부는 그의 동작을 보지 못한 탓에, 오히려 그가 세심하고 자상하다며 그녀의 어머니 앞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이는 억울해서 어머니에게 그 일을 말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그녀가 일부러 꾸민 말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꾸짖으며 사흘 동안이나 외출을 금지했다. 신이는 그렇게 방에 갇혔고, 매일매일을 눈물로 얼굴을 씻었다. 심지어 그날 선비의 말을 듣고 호수에 뛰어들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내가 양지춘에게 시집가는 것이 물에 빠져 죽는 것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사흘 후, 외출 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신이는 다시 경산사로 가서 같은 핑계로 하녀를 내보냈다. 이번엔 정말 죽을 각오로 호숫가에 간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다시 그 선비를 만났다.그는 쓸쓸하게 호숫가에 앉아 작은
신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나무 그늘에 몸이 가려져 있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초라해 보였고 눈 밑에는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바로 다리 앞에서 그림을 팔던 선비이자, 학정이 말하던 퇴학 해서 기녀를 키우는 학생이었다!“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신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짜증을 냈지만, 그가 한 말을 떠올리자 내심 두려웠다. “나는 여기에 물귀신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거짓말하는 것이겠지요.” 신이는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귀신은 두려웠고 진흙탕에 영원히 깔려 있는 건 더욱 두려웠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가 걸어 나오자 얼굴은 더욱 여위어 보였다. “호숫가의 주변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오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건 사람들이 이곳으로 예불하기 위해 오는 것이지, 경치를 보러 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절을 하고 바로 돌아가니 당연히 보지 못하겠지요.” 신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순간 깊이가 보이지 않는 호수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그는 여전히 굳게 서서 말했다. “예불하는 사람은 천지와 자연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경치가 있다면 반드시 한 번 보러 올 것입니다. 이런 곳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좋은 곳일 텐데 아무도 없다는 게 아기씨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것이 사실인지는 몰랐지만,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감히 그런 무서운 곳에서는 죽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자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절대 쉽게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고 싶어도 살 지 못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 밑은 이내 붉어졌고 눈물이 고여 반짝이는 것 같
신이의 사촌 여동생과 하녀는 신이를 찾으러 돌아왔다. 신이가 하녀보고 이순에게 삼백문을 주라고 하자 이순은 웃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원래는 우연한 만남일 뿐이라 다시는 접점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 조모님의 생신 때 가문 연회에서 공학정이 데리고 온 제자들 중에 이순이 있었다. 강남의 예의 규율은 진성처럼 엄격하지 않아서 연회에 참석할 때 여인들도 앞마당에 갈 수 있었다. 이순은 신이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신이는 그때 면사포를 쓰고 있었고 두 눈만 드러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순은 식사를 하지 않고, 신이의 조모에게 생신 축하 그림만 드린 후에 집에 일이 있다며 작별을 고했다. 그가 떠나자마자 학정이 그를 언급하며 안타까운 말투로 말했다. “총명하긴 한데 진취심이 없어서 계속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걸 여기로 데려와 진취성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사귀게 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로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르다니. 정말 실망이군. 학교를 그만두겠다면, 이젠 마음대로 하라고 해야겠어.” 그러자 신이의 부친이 위로했다.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껜 학생이 많으니 그가 나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학정은 마치 울화가 쌓인 것처럼 말했다. “그는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네. 그런데 진취성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동창에게 돈을 빌리질 않나, 게다가 집에 기녀까지 키우고 있다더군.” 신이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런 사람은 얘기할 가치도 없습니다.” 신이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서 왠지 마음속으로 실망감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날은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같다고 생각해 마음이 갔던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 후, 신이의 혼사도 낙착되었다. 그녀의 약혼자는 회주 지부의 둘째 아들인 양지춘이고, 올해 22살이었다. 22살인데도 결혼하지 않았던 건 첩을 통해 서자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은 가문은 그
그의 이름은 신이었는데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에 대해서 말할 때, 경멸하는 기색을 띠었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모르는 사람까지 모두 침을 뱉으며 뻔뻔하다고 할 정도였다. 알다시피 애인과 야반도주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는 것보다 더 욕먹을 일이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후회하냐고 묻기도 했다. 그녀는 시집간 것을 후회하지 않지만 죄책감을 느끼긴 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시 씨 가문의 명성이 손상되어 형제자매들과 조카들이 혼사에 어려움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신이는 시 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태어날 때부터 온갖 보살핌을 받아왔다. 먹는 것은 물론 모두 산해진미이고, 입는 것도 모두 능라 비단이었다. 게다가 보모님과 오라버니의 총애까지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그녀에겐 한 가지 결함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열네 살 때까지 월사가 오지 않은 것이었다. 많은 의사들을 불러 진찰을 받고 밤낮으로 약을 먹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몸이 차서 그러니 몸조리를 하면 나을 수 있다고 위로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몰래 의사가 부모님께 하는 말을 들었다. 의사는 그가 몸이 차서 그런 병이 생긴 것이 아닌, 아이를 키우는 곳이 어린아이와도 같아서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마치 작은 꽃병과 같아서 꽃을 꽂을 수는 있지만 나무를 심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 건 불가능하다고 비유했다.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건 여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녀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중에 좋은 사람에게 시집가서 부군에게 첩을 들인 후, 첩이 낳은 아이를 친자식처럼 키우라고 조언해주었다.시 씨 가문이라는 후원이 있으면 그녀가 아이를 낳을 수 없어도 아무도 그녀의 지위를 흔들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 씨 가문의 재물은 그녀가 평생 부귀하게 살기에 충분했다. 신이의 조모도 그녀에게 아이를 낳을 수 없으니 자세를 낮춰야 한다고 했다. 시 씨 가문의 딸이라고
추운 겨울이 되자 눈이 내려 성릉관은 하얗게 뒤덮였다. 세상이 마치 깨끗해진 것처럼 보였다. 이황자는 몇 년 동안 너덜너덜한 승복을 입고 발우를 받쳐 들고는, 가는 길에 동냥을 하다가 절을 보면 이틀 묵으며 부처님께 참회하면서 살았다. 사실 그는 원래 있던 절에서 계속 지낼 수 있었다. 편안하진 않지만 풍찬노숙할 필요도 없고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그런 안일한 곳에서는 평생 죄를 씻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계속 길을 걷고 계속 고생해야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했다. 그가 성릉관에 도착했을 때 짚신은 이미 찢겨 있었고 발바닥에는 두꺼운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이제는 신발을 신지 않고도 자갈이 가득한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추운 날씨에는 모든 옷을 껴입어도 추위를 막을 수 없었지만 이미 익숙해진 뒤였다. 그는 눈보라를 맞으며 성릉관에 위치한 감은사로 향했는데, 몇 년 동안 발걸음을 멈춘 적이 없는 탓에 고단함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심지어는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아 그는 눈이 가득 쌓인 길에서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그는 따뜻한 두꺼운 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그가 있는 방에는 숯불이 피워져 있었고, 살짝 열린 창문으로 눈에 눌려 허리가 굽은 나뭇가지가 보였다. 그는 눈동자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렇게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의 마음속에 순간 욕심이 생겨 조금만 더 누워있고 싶어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문이 활짝 열렸다. 그가 벌떡 일어나 앉았는데, 갑자기 눈앞이 핑핑 돌더니 다시 힘없이 침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누워 있거라.” 이때 누군가가 부드러운 말투로 말하면서 약그릇을 그의 침대 옆에 놓았다. 그는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익숙해, 어지러움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돌려보니, 그 사람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서우 형?!’ 그는 자신이 잘못 보았을까 봐 다시 자세히 보려 했지만, 몸이 너무 어지러운
대황자는 봄 사냥 때 숙청제에게 꾸중을 듣고 돌아간 후 앓아누웠다. 당시 이황자와 서우가 모두가 걱정했는데 덕비는 오히려 기뻐했다. 그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황제폐하께서는 분명히 대황자를 싫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덕비는 이황자를 안고 반드시 부지런해야 하고, 태부와 황숙의 말을 잘 듣고 누구보다 잘 배워 황형을 제압해야 한다고 당부까지 했다. 그로 인해 이황자의 마음은 몹시 복잡했다. 덕비가 줄곧 그에게 태자와 황제가 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지 말해주었을 때 비록 그도 마음이 설렜지만 자신과 거리가 먼 얘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금 그와 대황형, 서우 형, 그리고 셋째 동생이 사이가 좋아 도저히 대황형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매일 모순적으로 지내다 보니 오히려 학업이 나빠졌고 승마 연습을 할 때도 여러 번 실수를 했다. 하지만 덕비는 이상하게 그를 탓하지 않았고 며칠 동안 계속 게으르게 하라고 했다. 그렇게 덕비는 이황자를 데리고 복마마를 자주 뵈러 갔고, 복마마 궁전에서 숙청제를 만날 수도 있었다. 덕비는 며칠 동안 그곳을 드나들더니 어느 날 굳은 표정으로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차가운 말투로 청이에게 자신의 보살핌이 없으면 아이가 태어날 수 있는지 보겠다고 했다. 황제폐하를 자주 뵈러 갈 수 없어 아쉬웠지만 이황자는 마음을 가다듬고 공부와 승마술에 전념했다. 이황자는 당시 앞날이 어떻게 될지도 몰랐고, 비록 매일 힘들긴했지만 한편으로는 즐거웠기에, 계속 이렇게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숙청제의 천추세에 승마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니 세 황자와 서우도 가서 겨뤄 보기로 했다. 원래 그런 대회에서 황자들은 재미있게 참석만하면 되지만, 덕비는 그 경기를 몹시 중시했다. 덕비가 이황자에게 마름쇠를 건넬 때, 그는 하늘이 무너져내리는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황자는 원하지 않았다. 그는 절대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대황형의 목숨을 앗으려 하다니, 이황자는 처음으로 어마마마가 무서워졌다.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