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 설명할 수 없는 슬픔과 억울함이 한꺼번에 몰려왔다.가냘픈 어머니를 껴안은 그녀는 그동안 받았던 상처가 마치 둑이 무너진 강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이렇게 어머니를 껴안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못했다.이어 염 선생이 할아버지를 모시고 다가왔고 그들은 눈물로 인사를 나누었다. 모두들 정청 안으로 들어갔다. 진부연은 여전히 딸의 손을 놓지 않았다. 기억 속에 일곱 살이었던 염희진은 이제 스물다섯이 되었다. 그녀의 기억도 서서히 또렷해졌다. 하지만 기억 속 어머니는 젊고 활기찼었다. 그녀를 꾸짖을 때면 이웃들에게 들릴 정도로 목소리가 우렁찼지만, 이제는 말조차 힘겹게 하시는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이 장면을 보고 있었던 시만자와 송석석은 두 사람은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눈시울을 붉히며 옛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그들의 모습에 두 사람도 가슴이 뭉클해졌다.염 선생은 어릴 때부터 동생을 무진장 아꼈고 여리기만 한 진부연은 한때는 강인한 모습이었으며 어린 시절의 염희진이 장난꾸러기였다. 염희진은 매산에서의 두 사람과 많이 닮아있었다.송석석은 시간을 내어 황제의 임명장을 받아왔다. 임명장은 아직 제대로 펼쳐 보지도 못했지만, 감사의 예는 갖추었다. 오대반이 직접 임명장을 전달하며 몇 마디 나누고 싶어 했지만, 송석석은 이 감동적인 순간을 더 보고 싶어 그더러 잠시 기다리게 했다.시만자의 말처럼 이런 상봉이야말로 가장 감격스러운 것이었다.송석석은 눈물을 닦으며 딸을 품에 꼭 안고 있는 진부연의 모습을 보며 부러워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안길 수 있는 어머니가 없었다.그녀가 몸을 돌리자 혜태비가 바로 뒤에 서 있었다. 혜태비도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그 옆에서 눈물을 닦아주고 있는 고 씨 유모 역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눈물이 맺힌 송석석의 모습이 혜태비는 안쓰러웠다. 그녀는 손을 내밀며 말했다. "이리 오너라!" 송석석은 눈물을 닦으며 다가가자, 혜태비는 그녀를 꼭 껴안아 주었다."이제부터는 내가 너의 어미가 되어줄 것이다." 송석석은 감동
다과를 비운 오대반이 차를 한잔 더하고 있었다. 그녀가 들어오자, 오대반은 환하게 웃으며 일어나 예를 갖췄다. 송석석은 곧장 그의 손을 받쳐주며 말했다. "예는 필요 없습니다. 어서 앉으시지요." 오대반이 그녀를 여러모로 도와주고 있었기에 오늘이 감사를 표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오대반이 자리에 앉자, 송석석은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그동안 재 어머니를 도와주신 것에 대해 정말 감사드립니다. 제가 왕부에 시집온 후에도, 왕야를 위해 황상께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시어 깊이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오대반은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송석석을 바라보았다. "왕비께서 이렇게 감사를 표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몇 가지 드릴 말씀이 있어 기다린 것입니다." 송석석은 자리에 앉으며 상냥하게 답했다. "말씀하시지요." 오대반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왕비께서는 그저 최선을 다해 맡은 일을 수행하면 되는 것입니다. 폐하께서 왕비님을 믿고 쓰기로 했다면, 그것은 매우 큰 신뢰인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부부는 절대 마음이 갈라지면 안 되고 어떤 일이 있더라도 서로를 믿고, 함께 의논해야 합니다. 이익이나 권력 때문에 틈이 생기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고, 서로 신뢰하고 협력해야 합니다." 송석석은 오대반의 말을 곱씹으며 그가 전하고자 하는 뜻을 생각해 보았다. 황제가 최대한으로 신뢰한다 해도, 어느 정도일지는 알 수 없었다. 절대적으로 그녀를 믿을 수는 없을 것이다. 설령 추구하는 목표가 같더라도 절대적인 신뢰는 존재하지 않으니까.게다가 본래 의심이 많은 황제이기에 어느 정도의 신뢰도 감지덕지였다. 그리고 부부 사이의 신뢰가 중요하다 함은 권력이나 이익을 둘러싸고 갈등이 생길 수 있음을 경고하는 것이었다.그와 사여묵은 부부이고 함께 조정에 나아가 관직에 있으니 큰 방향은 같을지라도 간혹 의견이 다를 수 있고 때로는 부딪힐 수도 있었다. 게다가 현갑군의 지휘사로 황제의 명을 따르는
오늘 장공주부는 아수라장이었다.장공주를 포함한 모든 관리들이 전부 잡혀갔고, 집안의 노비들은 일단 장공주 댁에 임시로 머물게 하고 대리사에서 사람을 보내 감시하고 있었다. 나중에 심문할 자는 모두 데려가 문초할 예정이었다. 경위와 순방영이 철수하고, 사건은 대리사에 넘겨졌다. 대리사 소경 진이 여인들에게 집으로 소식을 전하게 하고, 사건이 마무리되면 장공주 댁에서 해산시키고 보상해 줄 것이라 전하였다. 림봉아는 집이 진성이라 먼저 귀가하도록 하였고 고청란이 직접 맞이하러 왔다.그녀는 마치 꿈을 꾸는 듯한 느낌이었다. 십오일이 아닌 초하루에 움직일 줄은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왕비께서는 그녀에게조차 계획을 숨긴 것이다. 고청란은 왕비가 자신을 믿지 않았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그녀는 모든 것을 왕비에게 말해 주었고, 심지어 아버지까지 데려갔건만, 왕비는 계획을 끝까지 숨겼던 것이다. 집으로 가는 마차 안에서, 림봉아가 그녀에게 말하기 전까지는 화를 억제할 수 없었다."네 아버지는 애초에 왕비와 협력할 마음이 없었다. 그이는 너희가 십오일에 실행할 계획을 이미 장공주에게 알렸단다. 만약 계획이 앞당겨지지 않았다면,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고청란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께서 저를 배신하셨단 말입니까? 그건 저를 죽음으로 몰수도 있는 것인데 말입니까?" 림봉아는 딸의 어깨에 힘없이 기대며 눈물을 흘렸다. "그는 딸들을 이용할 뿐이다. 장공주와 똑같은 인간일 뿐이지." "하지만… 어머니를 가장 사랑하지 않았습니까?" 어머니의 눈물을 닦아주던 고청란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어머니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어머니께서 감옥에서 나올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하셨단 말입니다." "사내의 말을 온전히 믿을 것은 아니니라. 온전히 믿었다가는 파멸을 맞게 될 것이다." 림봉아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처음에는 미모를 보고 몇 년간 마음을 두기는 하였겠지. 하지
듣고 있던 고청란은 마음이 차갑게 식어갔다."그럴 리 없습니다. 만약 정말로 권세가를 찾으려 했다면, 전에 량소가 적합하지 않았습니까? 심지어 그는 언니를 정말로 사랑했지 않았습니까?"림봉아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량소는 승은백부의 세자이자 탐화랑이지. 하지만 그가 아내로 맞이한 것은 회왕부의 영안 군주다. 그러니 청우가 정실부인이 될 희망은 없다. 게다가 량소는 말로만 사랑한다고 정작 그녀를 위해 아무것도 해 준 것이 없었느니라. 그리 애지중지하면서도 평처로조차 들이지 못했다."고청란은 순간 멈칫했다."평처요?"마차는 서서히 앞으로 나아갔고 림봉아는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그래, 평처여야만 정실부인이 죽으면 승격될 기회가 있는 것이다. 평처가 되지 못하고 단지 첩이라면, 정실부인이 죽는다 해도 정실로 올라갈 수 없느니라. 청우는 첩이 될 수 있지만, 평생 첩으로만 남는 것은 견딜 수 없다고 하더구나."고청란은 마음이 복잡해졌다. "언니가 첩이 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누구든 첩이 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게다가 언니는 어머니를 위해 계속 이용당해 왔으니, 언니도 참 불쌍합니다."고청란의 어깨에 기댄 림봉아는 호흡이 점점 가빠지고, 기침도 점점 거세졌다. 그러다 결국 피까지 토해냈다.고청란은 어머니의 등을 다독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어찌 이리도 심하게 기침하시는 겁니까? 분명히 대부를 모셔 왔다 하지 않으셨습니까?"림봉아는 더러워진 소매로 입가의 피를 닦으며 힘없이 웃었다. "어미는 곧 나을 것이니 걱정 말거라. 어미의 말을 꼭 기억해라. 앞으로 청우가 무슨 일을 시키든 절대 받아들이지 말아라. 명심하거라, 그 어떤 것도 절대 받아들여선 안 된다."고청란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공주부도 이미 무너졌으니, 저에게 시킬 일도 없습니다. 진성을 떠나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새로 시작하면 됩니다."고청란의 손을 잡은 림봉아는 가쁜 숨을 몰아쉬더니 엄히 경고했다."어미 말을 꼭 기
오늘 대리사에게 가장 바쁜 하루였다.대리시경이 명령을 내리자, 모든 사람들의 휴가는 취소되었다. 대리승 허평안도 부모상을 치르기 위해 본가로 돌아갔던 대리승 허평안은 관직을 유지할 수 있을지 걱정하던 차에 반역 사건이 터졌고 왕야가 상소를 올려 그를 복직시켰다. 허평안은 즉시 환복하고 대리사로 향했다.장공주와 고부진은 대리사로 끌려왔다. 사여묵이 직접 장공주를 심문하였고 진이가 고부진을 심문하였다. 그 외 관리인, 노비, 부의, 하인들은 대리승 허평안과 대리정 노정의가 맡았다.사여묵은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장공주를 심문하기에 앞서 공주부의 무기들을 모두 대리사로 옮겨 증거로 삼았다. 그러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이미 심문을 시작하였다.해가 질 때까지 겨우 몇 사람 심문하였다. 사여묵은 교대로 심문하라는 명령을 내려 심문이 멈추지 않도록 하였다. 진이는 심문한 내용을 정리하여 사여묵에게 보고하였다.사여묵이 살펴보니, 정보는 매우 적었다. 그가 고부진의 자료를 꺼내 들었지만 가득한 물음에 비해 답변은 거의 없었고, 많은 것들은 "모르겠다"로 일관하고 있었다.진이는 머리가 아팠다."고부진은 모른다고만 일관하며 지하 감옥에 있던 여인들과 후원에 감시받던 여자들이 자기 첩들이라는 것만 인정했습니다. 그 무기들과 장공주의 반역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더군요."사여묵은 고부진의 증언을 한쪽에 내려놓았다."아직 진실이 드러나지 않았으니 자백하지 않겠지." 그는 방 마마와 도준의 것을 집어 들었다."방 마마는 장공주 곁에 오래 있었던 심복이다. 그리고 도준은 공주부의 시위장이지. 이들은 뭐라 하였느냐?""방 마마는 충격이 컸는지 입버릇처럼 ‘그럴 리 없다’만 되풀이하며,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도준은 많은 것을 자백했지만, 대부분 사소한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장공주가 누구와 빈번하게 왕래했는지, 어떻게 첩들을 괴롭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첩들이 아이를 낳으면 물에 빠트리거나, 목 조르거나, 던지는 등 온갖 방식으로 죽였다고 합
사여묵은 미간을 찌푸렸다.‘자백이 아주 상세한 것을 보니 죽음이 실로 두려웠나 보군.’고청우가 어떻게 그를 유혹하였고, 어떤 말들로 그를 궁지로 몰았는지, 어찌하여 위험을 무릅쓰면서가지 림봉아를 해치게 되었는지, 사용한 약과 병세가 언제쯤 악화되는지, 언제쯤 죽을 것인지까지 세세하게 털어놓았다.양백은 고청우가 더 이상 장공주의 통제 아래에 있고 싶지 않아 아예 자신의 생모를 독살하려 했다고 추측하였다.사여묵은 사건을 처리한 날이 얼마 되지 않았으나, 금방 문제점을 알아챘다. “고청우가 장공주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면, 어머니를 죽이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여기엔 모순이 존재한다. 장공주가 그녀를 통제한 수단이 바로 그녀의 어머니였으니, 만약 고청우가 어머니의 생사에 신경 쓰지 않았다면, 승은백부 량소를 앞세워 장공주의 통제를 벗어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설령 그녀가 첩이 되기 싫어 량소에게서 돈을 뜯어 멀리 도망쳤다면, 장공주도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결국… 그녀는 정말로 극단적이었구나, 양부의가 이미 예순 가까이 되었는데 말이다.”대리사에 오래 있어 온갖 인간을 만나봤던 진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였다. “고청우는 어릴 적부터 이런 쪽으로 길러졌으니, 자신의 외모와 몸을 거래의 도구로 삼은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사옵니다.”“그녀를 데려와 심문하거라.” “이미 사람을 보냈습니다. 고부진은 고청우에 대해서는 숨김없이 불었습니다. 그녀가 만가다장에 있다고 솔직히 말했지만, 애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떠난 후였습니다. 인력이 부족하여 사람을 충분히 배치하지 못했습니다.”대리사는 평소 사건을 처리하기에 인력이 충분하였으나 이번 사건은 연루된 사람이 점점 많아질 것이었다. 만약 신속히 이들을 통제하지 못하면, 중요한 인물들이 도망치기 쉬운 상황이었다. 장공주는 진성에서 오랜 세월 권력을 다졌으니, 분명 적지 않은 대관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매년 그 많은 은화를 접대에 쏟아붓지 않았을 것이다. 무기와 갑옷
송석석도 아직 잠들지 않았고, 보주는 그녀의 관복을 다림질하고 있었다. 이 관복은 본래 현갑군 부지휘사 시절의 것이었고 그저 명목상의 직책에 불과하여 실제로 입을 일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실제로 입게 될 줄은 몰랐다. 4마리 야수가 박힌 관복에 별도의 무기는 하사받지 못했다. 검은 비단 모자에는 구슬이 박혀 있었으니 이제 더 이상 여자 옷차림은 할 수 없게 된 것이다.보주는 내심 기뻐하고 있었다. 예전에 전북망이 평처를 들이겠다며 송석석을 무시했던 것이 분했지만 이제 아가씨께서 관직에 오르게 되었다. 비록 지휘사가 무관이긴 하지만, 더 이상 군영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보주는 그동안 쌓였던 억울함이 모두 풀리는 듯했다."어떻게 되었습니까? 알아내셨습니까?"돌아온 사여묵에 송석석이 급히 다가갔다.하지만 사여묵은 그녀의 관복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습니다. "이건 부지휘사의 관복이오. 하지만 이제 당신은 정지휘사요.""상관없습니다. 일단 이걸 입으렵니다." 송석석은 담담하게 덧붙였다."내일 아침에 입궁해야 하고, 그 후 현갑군 위소로 가서 모든 일을 접수할 것입니다. 당신은 바빠서 자리하지 못할 테지요?"사여묵은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웃었다. "나는 남강으로 간 이후로 현갑군의 일을 거의 돌보지 않았으니, 당신이 필명을 다스릴 수 있다면, 다른 사람들도 잘 다스릴 수 있을 것이오. 아니면, 조금 불안한가? 내가 함께 가야 하오?""아닙니다. 전혀 긴장되지 않습니다." 송석석은 사여묵의 약간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며 답했다. 이 모습을 본 보주와 명주는 재빨리 물러났다."전장에서 적을 베고도 긴장하지 않았으니, 지휘사 직책은 손쉽게 해낼 것 같소." 사여묵은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축하하오. 당신은 우리나라 개국 이래 첫 번째로 조정에 진출한 여관이 되었소."송석석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미소를 지었다. "황제께서 즉흥적으로 내리신 명일 수도 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이유를 들어
"고청우의 행방은 아마 홍시 일행이 알 수 있겠지만 추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리도 큰 사건이 벌어졌으니, 분명 진성에 머물며 대기하고 있을 것입니다."사여묵이 고개를 끄덕였다."내가 돌아온 것은 그들에게 연왕부와 회왕부를 감시하게 하기 위함이오. 비록 그들이 당분간 함부로 움직이지는 않겠지만, 이 무기들의 제조와 운반에는 많은 사람들이 연루되었을 것이고 지하 감옥이 아직 차지 않았으니, 아마 여전히 무언가를 진행 중일 것이오. 장공주부가 무너진 후, 연왕이나 회왕이 이 일을 떠맡지 않을 수 없을 것이오. 우선 그들을 감시하시오.""알겠습니다. 제가 만자에게 전하겠습니다." 사여묵은 씻기 위해 하인에게 뜨거운 물을 준비하게 했다.환복하고 나니 반시정도는 눈을 붙일 수 있었다.염 선생은 그가 돌아온 것을 알고 사건에 대해 물어보려 했으나, 사여묵이 곧 다시 대리사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을 듣고 기다리기로 했다. 그와 함께 대리사로 향할 생각이었다.염 선생은 왕부의 장사로서 대리사 소속은 아니었으나, 왕의 곁에서 조언을 제공할 수 있었다. 왕비 또한 관직을 맡았으니, 왕부는 자연스레 노 집사와 양 마마에게 넘어갔다. 다행히도 최근 심청화 선생이 왕부에 머물고 있었기에, 많은 일에 있어 자문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사여묵은 긴 의자에 누웠다. 그는 눈을 감자마자 곧바로 잠이 들었는데, 이는 피곤해서라기보다는 사건이 끝나기 전까지 제대로 된 휴식은 사치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장에서 언제든 잠을 잘 수 있는 능력을 익혔고, 몸을 즉시 이완시키며 회복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반 시진이 지나 사여묵이 깨어났을 때, 염 선생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송석석은 그에게 관복을 입혀 주며, 그의 흐트러진 머리도 빠르게 정리해 주었다. "양 마마가 다과를 준비했습니다. 가져가서 배가 고프면 몇 개씩 드세요.""알겠소." 사여묵은 미지근한 물로 입을 헹구고 나서야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이제 떠나야겠소. 아마 내일도 함께 식사를 할 수 없
이날 저녁, 송석석은 약왕당에서 받아온 약을 사여묵에게 건넸고 약의 위험성까지 자세하게 얘기했다.사여묵은 망설이는 듯한 송석석의 모습에 환하게 웃으며 위로했다.“이 정도 상해는 충분히 견딜 수 있소. 그리고 원기를 회복할 수 있는 약들도 이렇게 잔뜩 가지고 오지 않았소? 나중에 어의에게 진단만 받으면 바로 단설환을 먹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오. 남강으로 가는 길에도 단 신의의 당부를 잊지 않고 매일 약을 꼬박꼬박 챙겨 먹겠소.”“그래도 결국 독약 아닙니까? 그러지 말고 저희 다른 방법을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요?”송석석이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사여묵이 담담하게 대답했다.“내가 보기엔 지금으로써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소. 단 신의가 말을 무섭게 해서 그렇지 그 정도로 심각한 상해를 입히지 못할 거요. 그렇게 위험한 약이었다면 애당초 꺼내지도 않았겠지.”“그럼 일단 염 선생과 상의라도 해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그럴 필요 없소!”사여묵이 약을 내려놓은 뒤, 커다란 손으로 송석석의 허리를 감싸며 말을 이어갔다.“이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유리하오. 나중에 내가 대리사에서 쓰러지면 진이가 내 옥패를 들고 어의를 찾아갈 것이고 황실로 달려온 어의가 우왕좌왕하는 염 선생을 보아야 의심을 하지 않을 것이오.”송석석은 사여묵의 가슴팍에 기대어 불안한 마음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전 장군님이 너무 걱정됩니다. 몸이 회복되기도 전에 남강으로 출발해야 하는데 가는 내내 제대로 쉴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남강에 가서도 몸 상태가 회복되지 않으면 전장에 어떻게 나가시려고 그러십니까?”송석석의 걱정에 기분이 좋아진 사여묵이 다정하게 웃으며 그녀를 위로했다.“난 왕표를 무조건 대체하겠다는 게 아니오. 일단 제린을 찾아 병사들 속에 숨어 있다가 왕표가 제대로 군을 이끈다면 난 남강 구경이나 하다 올 것이오.”사여묵의 위로에도 송석석은 시름이 놓이지 않았다. 왕표가 군을 제대로 이끌지 못할 거라는 확신 때문에 두 사람이 지금 이런 모험을 하고 있는
화가 난 단 신의는 송석석의 말에 설득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버럭 언성을 높였다.“난 멍청한 사람을 돕지 않소. 당신들은 그런 천하의 멍청이가 따로 없소!”“세상에 이런 멍청이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번 한번만 더 모험하고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약속할게요.”송석석이 환하게 웃으며 말하자 단 신의가 미간을 찌푸렸다.“모험을 하고 싶어도 이제 못할 수도 있소. 돌아오면 황제께서 그 죄를 어떻게 물으실 줄 알고 이러는 것이오. 그러다가 머리가 잘릴 수도 있소.”“정말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고 해도 저에게 방법이 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단 신의는 고집을 부리는 송석석을 보며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말한 것처럼 백성들에게는 두 사람과 같은 멍청이들이 필요하긴 했지만, 단 신의는 그 멍청이가 송석석과 사여묵은 아니길 바랐다.결국 단 신의는 먼지가 뽀얗게 쌓인 작은 상자를 꺼내 먼지를 툭툭 털어내곤 조심스럽게 열었다.상자 안에는 땅콩 만한 검은 알약 하나가 있었다.“똑똑히 기억하시게. 이건 독이오. 이 약을 먹고 나면 맥박이 이상해지고 갑작스러운 발작을 일으키네. 그리고 짧은 시간내에 심장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지. 이건 그저 보여지는 현상이 아니라 실제로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네. 이 약을 먹고 3일 정도 버틸 수 있는데 3일 뒤에는 반드시 단설환을 복용해야 하오. 그러지 않으면 심장에 영구적인 손상을 입을 수도 있소.”단 신의의 말에 송석석이 흠칫 놀란 표정이었다.“정말로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뜻입니까?”“그럼 당연하지. 이건 독이오.”“그럼 단설환을 먹고 나면 바로 정상적인 몸 상태로 돌아올 수 있는 겁니까?”“그렇지 않소. 며칠 동안 안정을 취해야 하네. 눈속임을 하고 나서 바로 출발하면 절대 안 되오.”위험할 수도 있다는 단 신의의 말에 송석석은 단 신의가 건네는 약을 받지 않았다.“그럼 혹시 다른 약은 없는지요? 폐하를 속이고 나서 장군님은 바로 출발하려고 할 겁니다. 실제로 중독되
사여묵은 온몸에 힘이 쭉 빠진 채 침대에 앉아 등을 벽에 기대고 있었다.남강에서 돌아와 병권을 황제께 바친 뒤에도 황제는 여전히 사여묵을 의심하고 경계했지만 사여묵은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황제가 의심과 경계를 조금은 풀 수 있도록 사여묵은 지금까지 최대한 언행에 조심했으며 서경과의 담판이 끝나고 나서도 황제 앞에서 일부러 약한 모습을 보였다.나중에 혹시라도 전쟁이 일어났을 때 더 이상 황제의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조심하고 또 조심했는데 황제의 태도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사국이 이번에 다시 쳐들어온 건 사국과 손잡은 내국 역적이 남강에 이미 함정을 파 놓았다는 사실을 폐하께서도 알고 계신 것이오. 그래서 사국은 저렇게 겁도 없이 남강을 계속 공격하고 있는 것이지. 하지만 폐하는 내가 폐하께 대한 위협이 사국 병사들을 물리치는 것보다 더 중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소.”사여묵이 씁쓸하게 웃으며 마지막 남은 술을 벌컥벌컥 마시자, 송석석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황제께서 이런 결정을 하신 게 처음은 아니잖아요.”사여묵은 송석석을 품에 꼭 끌어안은 채 그녀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고 조금 전 혼자 술을 마시고 있을 때부터 계속 이렇게 숨막히는 인고를 견뎌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다.“난 무조건 그런 비극이 다시 일어나게 하지 않을 것이오.”송석석을 놓아준 사여묵은 강경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말을 보탰다.“난 당신처럼 용감하게 변할 것이오.”예전에 송석석이 입궁하여 황제께 상황을 보고했을 때 황제는 그녀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그때 당시 송석석은 마냥 기다리거나 손을 놓은 것이 아니라 홀로 남강까지 찾아갔다.송석석은 그때 자신의 생사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한편, 사여묵의 말을 들은 송석석은 바로 뜻을 알아챘고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전 장군님을 응원합니다. 아무 걱정도 하지 말고 다녀오세요. 폐하께서 아무것도 묻지 않으신다면 전 평소와 같이 진성을 지키고 있을 것이고 만약 폐하께서 죄를 물으신다면 전 북명
사여묵이 방시원을 잘 달래어 돌려보낸 뒤, 염구진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다들 감정이 격해지는 것도 당연합니다. 남강 땅을 되찾기 위해 그들은 청춘을 다 바쳤는데 이제 또 전쟁이 난다고 하니 마음이 안 좋을 수밖에 없지요.”말을 하던 염구진은 고개를 돌려 사여묵을 힐끔 쳐다보았으며 방시원의 마음을 가장 잘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은 사여묵일 것이라고 생각했다.한편, 한참동안 말이 없던 사여묵이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잘 지켜보고 있다가 무슨 소식이 들리면 바로 나에게 보고하게.”“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사여묵은 다시 연주에 관한 일에 대해 물었다.“연주에서 성문을 봉쇄했다고 들었는데 소식은 끊기지 않은 것이오? 혹시 그쪽에서 움직임이 보이지는 않나? 계획대로 행동하고 있는 건가?”“아직 확실한 소식은 접하지 못했지만 소인은 모성을 믿습니다. 계획한대로 잘 하고 있을 겁니다.”“그래. 나도 그자를 믿네.”염구진의 대답에 사여묵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성은 연주 좌부승이었고 연왕이 반역을 도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여묵은 바로 사람을 시켜 모성에게 접근했다.총명하고 무술 실력까지 겸비한 모성은 선황제 때부터 이름을 널리 알렸지만 성격이 너무 오만했기에 아직까지도 직급은 그저 부승이었다. 평소에 시를 즐겨 쓰는 모성은 시문의 대부분 내용이 세상을 향한 불만 표시였기에 연왕은 모성이 조정에 불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여 그를 곁에 두기로 했다.그렇게 모성은 오랜 세월동안 외로운 싸움을 했다. 그 중 더 높은 관직으로 승진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모성은 연왕의 반역죄 증좌를 수집하기 위해 모든 걸 포기하고 연주에 남았다.하지만 연왕은 섣불리 움직이지도 않고 핵심 병력의 상황도 모성에게 전혀 알려주지 않았으며 심지어 중요한 일을 논의할 때에는 모성에게 나가 있으라고 하기도 했다.때문에 모성은 하상지의 잡일을 처리해주면서 간간이 상황을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확실한 증좌가 없는 탓에 모성은 지금까지도 연왕
”소인도 오늘 폐하께 감히 많은 얘기를 드리지는 못했습니다. 혹시 폐하께서 오해하실까 봐 왕야를 찾아가지도 못했지요.”이덕회가 대답하자 목 승상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잘하셨습니다. 병부는 최대한 사적으로 북명왕을 접촉하지 않아야 합니다. 아니면 혹시 병사 감찰대로 폐하께 한 사람을 추천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혹시 왕표 그자가 남강 전쟁 원수를 맡기엔 걱정된다면 방시원 장군을 황제께 추천해보십시오.”“하지만 방시원 장군님은 주군 총병이라 남강 전쟁에 보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방 장군을 보낼 바에는 차라리 방천허와 제린에게 전사를 맡기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내란이 터지고 있는 지금 진성 주군에 대장이 없어서는 안 되는 일이지요.”이덕회의 말에 목 승상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대꾸했다.“도리는 그게 맞지요. 제 말은 폐하께 왕야 한 사람만 추천할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몇 명 더 추천하라는 뜻입니다.”이덕회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술을 살짝 오므렸다.“소인이 솔직한 성격이라 말을 돌려서 할 줄 모르니 그냥 말하겠습니다. 소인이 보기엔 왕야가 가장 적합한 원수인데 어차피 역적은 아직 나라에 위협이 될만한 존재는 아니니까 나중에 목종욱한테 처리하라고 하면 되지요.”“그 어떤 반역자도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일은 그리 단순한 일이 아닙니다. 알다시피 반역자들은 사국 사람들과도 엮여 있습니다. 사국과 손을 잡았다는 건 그만큼 충분한 준비를 해왔다는 뜻이지요. 절대 쉬운 상대가 아닙니다.”목 상승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이덕회가 대답했다.“승상 말씀도 일리가 있는 것 같네요. 그럼 소인 북명왕과 함께 내일 다시 궁으로 가서 폐하를 만나 뵙고 내란에 대해서도 의논해보겠습니다.”“그렇게 합시다!”목 승상이 고개를 끄덕였다.한편, 사청엽은 여전히 옥에 갇혀 있었다. 황제가 아직 명령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사청엽은 자신이 사형을 면치 못할 거라고 확신했다.이날 저녁, 혼인을 앞둔 방시원이 황실을 찾아왔다. 치석
한편, 목종욱은 최선을 다해 산적들을 잡아들이고 있었다. 싹을 다 자르진 못했지만 크게 겁을 먹은 산적들이 산 속에 꽁꽁 숨어서 다시는 문제를 일으키진 않을 것이다. 숙청제도 제린이 보낸 소식을 접했고, 사국 대군들이 변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제린은 사국 대군이 25만 명 정도 된다고 보고를 했고 여전히 빅토르가 대군을 이끌고 있다고 했다.숙청제는 바로 병부 대신들을 불러 남강에서 사국의 25만 대군을 상대로 승산이 있는지 의견을 물었다.이덕회는 황제의 질문 자체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이길 수 있는지 없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최대한 신속하게 전쟁을 이겨야 한다는 것이 관건이다.“폐하, 남강은 오랜 시간의 전사와 왜란으로 지칠 대로 지친 상태입니다. 남강 땅은 아직 전쟁에 버틸 수 있지만 백성들은 더 이상 전쟁을 견딜 힘이 없습니다. 만약 정말 전쟁이 난다면 확실한 한 방으로 빠르게 적을 물리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메뚜기 떼처럼 매년 한 번씩 이렇게 날뛸 것입니다. 이는 저희 남강 지역의 치안에 치명적인 상해를 입힐 수밖에 없습니다.”“그럼 자네 생각엔 송씨 가문 병사들과 북명군이 적들을 신속하게 물리치지 못할 것 같은가?”숙청제의 물음에 이덕회가 바로 대답했다.“이제 송씨 가문 군대아 북명군을 나눌 것도 없습니다. 전부 다 남강 병사들입니다.”이덕회는 숙청제가 남강의 병사들을 모은 게 송씨 가문과 북명왕이라고 생각할까 봐 일부러 강조했지만 숙청제의 생각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만약 남강 전쟁이 오래 전에 끝난 전쟁이고 사여묵이 병권을 상납한지 꽤 오래 됐다면 숙청제는 이런 걱정을 전혀 하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왕표가 군심을 얻지 못하고 있는 지금, 남강에 있는 병사들이 송씨 가문 군대이든 북명군이든 결국 전부 사여묵의 명령에 따르고 있다.사여묵을 남강에 보낸다는 건 병권을 다시 사여묵에게 쥐여주어야 한다는 뜻이다.현재 연왕도 역모를 일으켰고 황제 자리를 대놓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
숙청제가 사여묵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그건 사국이 네 위엄에 겁을 먹은 것이야. 빅토르가 너를 많이 두려워하는 것 같아.”사여묵은 숙청제의 말이 진심이 아니라 살짝 비꼬고 있다는 것을 잘 알기에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황제께서 소인을 너무 높이 평가하고 계신 겁니다. 소인은 그렇게 대단한 능력도 없고 빅토르도 소인에게 겁을 먹어서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전쟁 때문에 너무 많은 걸 잃었기 때문입니다.”“네 말대로 전쟁으로 많은 걸 잃었다면 짧은 시간 내에는 원기를 쉽게 회복할 수 없지 않느냐?”“소인이 감히 추측을 해보자면 사국은 원기를 회복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절대 저희 남강이 순조롭게 발전하는 모습을 보고 있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가끔씩 비열한 수법으로 훼방을 놓아야 정상인데 지금까지 그런 적이 한 번도 없는 게 너무 수상합니다.”숙청제가 사여묵을 빤히 쳐다보다가 물었다.“그럼 네 말은 누군가가 사국과 손잡고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냐?”“그럴 가능성도 있지 않겠습니까?”사여묵은 전에도 숙청제와 이 문제를 분석하고 논의한 적이 있었으며 그때 당시 숙청제도 사여묵의 의심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주관적으로 보았을 때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숙청제는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사여묵은 그런 황제를 힐끗 쳐다보고는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지만 꾹 참았다.사실 숙청제도 왕표가 무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사국을 상대하려면 사여묵을 다시 남강 전장으로 내보내는 게 가장 적합한 선택이라고 생각하고 있다.하지만 숙청제는 쉽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그때 당시 겨우 송석석을 이용하여 사여묵에게서 병권을 빼앗았는데 이렇게 쉽게 다시 내놓을 수가 없었으며 최후의 순간이 오지 않는 이상, 숙청제는 절대 사여묵을 전장에 내보낼 생각이 없었다.때문에 사여묵이 며칠동안 어서방에 남아 숙청제와 이런저런 상의를 해봤지만 숙청제는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어서방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고 아무도 먼저
그날 밤, 연왕은 뜬 눈으로 밤을 지새게 되었다.솔직히 지금 상황은 연왕의 오랜 계획과 차질이 조금 있었다. 지방 지역에서 역모를 일으키고 심지어 진성에 준비된 게 아무것도 없이 무작정 진성까지 쳐들어간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연왕과 무상의 계획은 따로 있었다.일단 병사들을 일정한 수량까지 늘이고 아무도 모르게 서서히 진성 일대로 전이하여 병사들을 안치한 뒤 적절한 시기를 기다릴 생각이었다.그땐 사온이 진성에서 계략을 짜고 있을 것이고 많은 세가들의 지지도 받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해 예전에 고부진의 딸들을 세가에 시집 보냈기에 세가들은 지지할 수밖에 없다.그리고 나서 적절한 시기만 잘 고르면 반드시 성공한다. 진성에 전란이 일어나고 산적과 유랑민들이 판을 칠 때 연왕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성내로 쳐들어가 바로 궁 전체를 포위할 생각이었다.하지만 지금, 갑자기 대석촌에 일이 터져 버려 사청엽이 체포된 탓에 연왕은 급하게 병사들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승산이 너무 낮았기에 연왕도 망설였던 것이며 지방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난다고 해서 진성까지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물론 백성들은 반란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고 한동안 수군거리겠지만 대부분 백성들은 갑작스럽게 일어난 반란과 격문을 그저 우습게 생각할 것이다.그뿐만 아니라 사국에서 남강을 공격한다고 해도 처음 있는 일이 아니고 사국에서 오래 전부터 호시탐탐 야망을 보였기에 황제가 나랏일에 관심이 없어서 일어난 일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그리고 아직 사국과의 전쟁이 일어나지도 않았고 전패했다는 소식도 없기에 상국 무장이 무능하다는 비판을 하기에도 애매했다.나라가 평안하고 백성들이 태평한 상황에서 연주도 꽤 부유한 땅이었기에 괜히 문제를 만들고 싶어도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때문에 모두 그저 연왕이 언제 잡히는지, 언제 역모죄로 목이 잘릴지를 보고 싶어할 뿐이었다. 그리고 상국에는 사국 사람들을 물리친 북명왕이 있기에 다들 역적 따위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으며 되레 연왕이 왜 역모를 일으키
무상이 아니라는 말에 연왕은 회왕에게로 고개를 돌렸고 화들짝 놀란 회왕이 변명하려던 그때, 연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회왕일 리는 없어.”회왕은 의심조차 하지 않는 연왕의 태도에 기분이 조금 묘했다.한편, 연왕은 당연히 회왕을 의심할 리가 없었다. 회왕은 무일푼으로 연주로 왔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진성에서도 아무런 성과도 따내지 못했으며 사온의 비교 대상이 될 자격조차 없었다.회왕이 연주에 온 뒤로 연주 백성들은 회왕을 만나면 겉으로는 왕야라고 부르며 인사를 올리긴 하지만 뒤에서는 다들 그를 만만하게 여기고 아니꼽게 생각했다.때문에 회왕은 절대 마총우를 명령하지 못한다.조금씩 차분해진 연왕은 다시 자리에 앉더니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말했다.“다들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마총우 그자가 귀순한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가 나를 무너트리고 싶어서 일부러 꾸민 짓인가?”여전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무상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마총우가 귀순한 건 절대 아닐 것입니다. 왕야께서 격문을 보낸 지 며칠밖에 되지 않았고 더군다나 저희 병력은 대여섯 군데에 분산되어 있습니다. 전의하는 데만 6개월 넘게 걸렸는데 조정에서 절대 쉽게 조사해낼 수 없을 겁니다. 그런데 조정에서 마총우 그자를 찾아서 귀순 시킨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날 일부러 무너트리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는 거네. 그럼 그자가 누구일 것 같은가?”연왕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연왕이 몇 년 동안 끌어 모은 사람들 중에 황제의 친인척과 세도가들도 있지만 친왕은 연왕과 회와 두 사람밖에 없었다.연왕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상대가 없었다. 연왕의 부하들 중에서 황제의 친인척들이 제일 무능하고 멍청했으며 파장을 일으킬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리고 종합적으로 생각해보았을 때 가장 의심되는 상대는 여전히 무상이었다.하지만 역모의 마음을 품은 연왕이 무상을 끌어들이고 나서 지금까지 무상은 강한 충성심을 보였고 심지어 평소에 연왕에게 쓸만한 제안도 가장 많이 하고 계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