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청란의 눈가가 촉촉해졌다."아버지, 어머니를 구해내고 그 독녀를 무너뜨릴 수만 있다면, 저는 만 번 죽어도 사양치 않을 겁니다.." 고부진은 그녀에게 손짓하며 다정하게 말했다. "어리석은 아이로구나, 아비가 한 모든 것은 우리 가족이 잘 살아남길 바라기 때문이지, 그 누구도 죽기를 원해서 그런건 아니느니라." 바닥에 무릎을 꿇은 고청란은 얼굴을 그이 무릎에 묻으며 눈물을 쏟아냈다."아버지! 딸은 그날이 오기만을 오랫동안 기다렸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평안하시고, 저희 자매가 아버지 어머니 곁에서 함께할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눈가마저 붉어진 고부진은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일어나거라. 왕비님께 보고 계신다. 이젠 나이가 들었으니, 더는 아이처럼 굴지 말거라." 고청란은 눈물을 훔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왕비님 죄송합니다." 송석석은 그저 담담히 말했다. "내 계획을 말하기 전에 부마님께서는 먼저 공주가 최근에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려주시지요." 잠시 생각에 잠기던 고부진이 대답했다. "최근 한 여자를 방시원에게 시집보내려 하고 있습니다. 그 여자는 옹현의 한 잡기단 출신이었는데, 상당한 무예를 익히고 있었지요. 잡기단이 망한 후 혼자 살 길을 찾아다니던 중 마적떼에 추격당하게 되었고 장공주가 그녀를 구했습니다. 저에게 또 첩을 들이려는 건가 싶었지만 공주부에서 예의범절을 가르치고 있었지요." "방씨 가문에서 어찌 출신이 불분명한 여자를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장공주는 그 여인에게 신분을 만들어주었을 겁니다. 맞지요?" 고부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녀는 나의 먼 사촌 여동생이 되었고 옹현의 수씨 가문의 딸, 수연이 되었습니다. 방씨 가문에서 조사하더라도 옹현에 있는 수씨 가문 출신으로 나올 겁니다." 옹현은 장공주의 봉지였으니 가짜 신분을 만드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그 여자의 원래 이름은 무엇입니까?" "주아입니다." "지금은 고후부에 거주하고 있습
청화골목을 떠나자마자 시만자가 입을 열었다."네 말이 맞았어. 고부진을 믿을 수 없는 지오. 주아에 대한 정보를 알려준 것 외에는 회왕의 존재조차 털어놓지 않았으니 말이야. 게다가 스스로를 부마라 자칭하면서 신분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있어. 그런데 이상한 것은 어찌하여 우리에게 주아에 관한 이야기를 했을지야." "우리가 이 혼사를 막아주길 바라는 거야. 왜냐하면, 이 혼사는 그의 어머니가 주선한 것이니 이번 일에 연루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지. 또한 고후부인과 방시원의 모친 간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을 바라지 않아. 마음은 고후부에 있지만 림봉아에 얼마나 진심인지, 딸들에게 부성애가 있는지는 그 자신만이 알 거야." 시만자는 격노했다. "그 따위가! 하지만 우리의 계획을 알렸으니 틀림없이 돌아가서 장공주에게 모조리 고할 게 분명해." 송석석의 눈빛에 날카로움이 번졌다. "우리는 10월 15일 하원절이 아닌, 10월 초하루 한의절에 움직일 거야. 그날 장공주는 고승들을 초청하여 세상을 떠난 영혼들을 위한 초복의식을 열 생각이야. 마음이 착한 부인들은 자발적으로 기부하고, 직접 경문을 써서 함께 태우기도 하지. 한의절에 참여하는 이들은 진정으로 자비로운 사람들이지." 송석석은 계속해서 말했다. "반면, 10월 15일 하원절은 웃어른을 초청하는 것이니 모두 자비심을 가진 사람은 아니야. 그들은 이 기회를 빌어 인맥을 쌓고, 황제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야. 왜냐하면, 장공주는 그날 국운의 창성을 기원한다고 대외에 공표할 것이어서 우리가 그날에 움직이는 것은 적절치 않아." 시만자가 웃으며 말했다. "알겠어. 그녀는 우리가 15일에 움직일 것이라 생각하고 한의절에는 방비하지 않을 거란 말이지? 그럼, 다른 계획이 있어?" 송석석은 고개를 저었다."없어. 우린 매산에서 가장 거친 방법을 사용할 거야." 그러자 시만자는 순간 기뻐하며 말했다. "강제 침입이로구나! 얼마나 많은 사람을 들여보낼 생각이야?" 매산에서는 문파 간 갈
차루로 돌아온 그들은 그곳에서 식사와 계산을 마친 후 정문을 나서서 마차에 올라탔다.그렇게 한참 가던 중 어느 한 골목에서 홀연히 뛰어내린 시만자는 잠시 숨어 있다가 길거리로 나와 백성들 틈으로 빠르게 섞여 들어갔다. 요즘 시만자의 차림새는 극히 간소하였다. 장식이라곤 은비녀 하나만 머리에 꽂혀 있을 뿐이었기에 일반 사람이 그녀를 미행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을테지만 경계를 풀어선 안 되었다. 그녀는 이미 무공을 익힌 자라 방씨 가문까지 걷는 것이 그리 피로하지 않았고 다행히 거리도 그리 멀지 않았다.그렇게 방씨 가문에 이르렀을 때, 문 오른편에 마차 한 대가 멈춰 서 있었고, 때마침 방시원이 오 씨를 부축하며 나오고 있었다. 그 뒤에는 방 부인과 시녀 한 명이 뒤따르고 있었다.시만자는 웃으며 말했다. "오호라, 제가 정말로 때맞춰 왔군요. 나가려던 참이였습니까?" 방 부인은 웃으며 말하였다. "오셨습니까? 정말 오랜만입니다." 시만자도 얼굴에 웃음꼿이 활짝 피었다."요즘 바삐 지냈습니다. 오늘에서야 겨우 틈이 나 의모님과 의형을 뵈러 왔는데.. 외출하신겁니까?" 오 씨는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마침 잘 왔다. 우리와 함께 고후부에 가서 그대 의형의 눈을 밝혀주도록 하지." "눈을 밝히라 함은?" 시만자는 속으로 생각하며 말했다. "설마 고후부에서 의형을 위해 아가씨를 소개하려는 것입니까?" 그러자 오 씨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왜 아니겠니? 어제 고후부인이 찾아와 그녀에게 먼 친척 조카가 옹현의 수 씨 가문의 여식인데 인품과 덕행이 훌륭하고 대범하며 예의도 바르다고 했다. 다만 나이가 조금 많다. 원래 혼약이 있었으나, 약혼자가 사망하여 혼사가 무산되었다 하더라. 옹현 같은 작은 고을에서는 겪어 보지 못한 일이고 혼사를 앞두고 남편을 먼저 보내는 것을 보고 남편의 기를 빼앗는 운명을 지녔다 하여 이제껏 혼사가 성사되지 못하였다.하더라. 이번에 고후부인을 찾아온 것도 진성에서 새로운 혼처를 찾기 위함이라 하였다." 시만
고후부는 상국의 오랜 명문 세가였다. 하지만 오래된 가문일수록 곤란한 상황에 더 많이 처하게 되는 법.가족의 대번성 속도는 빠르나, 모든 이들에게 넉넉한 생활을 제공할 식읍은 부족하여 화려하고 부유한 삶을 유지하기 힘들어지고 있었다. 현재의 고후는 고부진의 부친이며, 그의 지도 아래 고후부는 점점 쇠퇴하고 있었다. 이미 여러 대에 걸쳐 부유한 집안이었으나, 엄격했던 가풍은 점점 느슨해져 자손들이 글공부나 무공 연습의 고생을 기피하고 있었다. 어차피 집안의 체면이 있으니, 이들은 부유한 생활을 이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고부진이 장공주와 혼인하지 않았다면, 고후부는 이미 쇠락했을 것이다. 고후도 조정에 관직이 없었고 집안 자제 중에서 오 품 이상의 직위를 가진 이가 드물어지고 있었다.시만자가 고후부에 발을 들이자, 한때 명성이 자자했음을 증명하는 가문에 대한 글들이 여기저기에 새겨져 있었다. 자신들이 잊히지 않기를 바랐던 그들이기에 정홀만 해도 두 곳에 문장이 보였다.정홀의 장식은 다소 낡았으나, 귀한 목재 가구는 세월의 풍파를 겪으면서도 더욱 겸손한 고급스러움을 드러내고 있었다. 혼인 의논에는 여러 사람이 모여 있지 않음이 좋아 고후부인은 그들을 편홀로 초대하고 사람을 시켜 주아를 데려오게 했다.잘 가꾸어진 고후부인의 모습에서 고부진과 몇 가지 닮은 점이 있음을 느끼게 되었고 특히 눈매와 말하는 태도가 많이 똑같았다."차를 드시지요." 그녀의 입가에 띤 미소는 자애로운 기품이 넘쳤지만, 시만자는 그녀의 계획을 이미 알아차린 뒤였다. 주아는 그녀의 친정 사람이 아니었고, 수씨 가문의 성도 따르지 앟았다. 장공주가 미리 손을 쓴 것이다.수씨의 신분을 위조하려면 고후부인의 동의가 있지 않고서야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차를 마시며 소소한 대화를 나누나, 이는 서로를 치켜세우는 말들 뿐이었다. 고후부인은 몇 번이고 방시원을 살펴보았다. 몇일동안 왕청여와의 일이 떠들썩하게 퍼졌고 최근이 되어서야 겨우 잠잠해졌기 때문이다.고후부인은 차를
주아는 복잡한 감정을 감추고 시녀를 따라나섰다.이제는 그저 방씨 가문에서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방시원의 현재 신분으로는 누군들 아내로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녀의 신분은 모두 가짜였다.정홀에 도착하자 그녀는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사뿐사뿐 걸음을 옮겼다. 단순히 걷는 법을 배우는 데에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후부인은 웃음을 띠며 입을 열었다. “연아, 얼른 두 분께 인사드리거라.” 주아는 오 씨와 방 부인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올렸다.“소녀, 두 분을 뵙게 되어 기쁩니다.” “이분은 방참장이시고 옆에 분은 노부인의 의녀, 시 아가씨이다.” 조금 전 시만자가 들어올 때, 오 씨가 시만자의 신분을 소개하였다.부채로 가린 채 얼굴만 살짝 비추는 정도라 교태는 부릴 수 없어 그저 평범하게 인사하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신 만자도 그녀를 바라보며 답례하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방시원 역시 손을 모아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시만자는 그녀의 단정한 외모를 살폈다. 큰 눈과 두툼하지도 얇지도 않은 입술, 매력이 돋보이는 곡선이 아름다웠고 입술 위 작은 점에서 은근한 장난기가 있어 보였다.그녀의 미모는 출중하였지만, 귀족 여성의 품격은 보이지 않고 여기저기 누비고 다닐 정도의 대범함이 깃들어 있었다.그렇다고 야만스럽다는 말은 아니었다. 그녀의 예의범절은 나무랄 데가 없었으니 말이다. 다만 한때 강호에서 생계를 유지하던 기운은 감추기 어려운 것이었고 시만자도 많이 보아왔다.사실, 송석석에게도 규칙에 얽매인 자유로움을 지니고 있었고 가끔씩 드러났다. 이 점에서 송석석과 많이 닮아있었다.비슷하다고 느끼기 시작한 시만자는 다시 한번 그녀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알 수 없는 이 친숙함, 그녀는 심지어 주아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예의 있는 미세한 동작들이 너무나 익숙했다. 마치 고후부인과 고부진이 닮은 것처럼 말이다. 고후부인은 고부진의 어머니
오 씨가 마음에 든다고 말하려는 그때, 방 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는 참으로 훌륭한 분이신 것 같아 저희도 마음에 듭니다. 다만 결혼은 중대한 일이니 서두른다고 되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각자 돌아가서 물어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아가씨께서도 태도를 명확히 하지 않으셨고 오늘 겨우 한 번 뵈었기에 먼저 그녀의 뜻을 물어보는 것이 옳을 듯하옵니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지요. 제가 즉시 물어보게 하겠습니다.” 그러자 방 부인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급할 것 없습니다. 만약 사람을 시켜서 물어보게 된다면, 거절하자니 거스르게 될 까 걱정일테고 동의하자니 여자로서의 체면도 있으니 부끄러워할 것입니다. 이미 두번정도 만났으니 한 번만 더 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부모님도 진성에 계시지 않으니, 그녀의 의사가 가장 중요하지요. 고후부인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맞는 말만 하는 방 부인에 고후부인도 차마 반박할 수 없었다. 모두가 귀족 가문이다 보니 혼사 논의에 경솔할 수 없었다.그러나 급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오 씨는 방 부인의 의도를 알 수 없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녀의 말도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가서 물어본다고 해도 그녀는 거절하는 것이 나을지 아니면 받아들이는게 나을지 갈피를 잡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만약 마음에 든다고 해서 승낙해버리면 결혼하고 싶어 안달 난 인상을 주게 될 것이니 소녀로서 내킬 리 없다.그러다 훗날 맘에 들기라도 하는 날에 부득이하게 “싫다”고 했던 말을 거두어들일 수는 없는 것이다.시만자는 방천허의 아내를 참으로 존경하였다. 항상 일을 철저하게 처리하기에 이러한 신중함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오 씨도 웃으며 거들었다.“맞습니다, 두 사람이 인연이라면 어떤 방법으로도 도망갈 수 없는 것이지요. 하루 이틀이야 상관없다고 봅니다.” 이렇게 된 이상 고후부인도 마지못해 웃으며 응했다. “말씀하신 대로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러면 이틀 후에 다시 방문하도록 하지
그녀들이 나간 뒤, 시만자는 그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연왕, 회왕과 장공주의 음모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시만자도 어느 정도 보류한 상태에서 말을 꺼냈기에 한의절의 계획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야기를 듣고 난 방시원이 자신의 조사를 바탕으로 접근했고, 그러자 진실에 거의 가까워져서 그녀들이 장공주 쪽에서부터 손을 쓸 것이라 짐작했다. 연왕의 세력이 연주에 있으니, 진성에는 전적으로 장공주와 회왕에게 의존해야 했다.장공주의 신분으로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고 장공주가 진성에서 그를 위해 여러 일을 도모하고 있었다. 장공주가 없었다면 연왕은 오른팔을 잃게 되었을 것이다. 회왕 또한 깊숙한 곳에 잡입한 상태라 누구와 접촉했는지 알 길이 없었다.방시원은 그제야 왕께서 북명왕부와의 잦은 접촉을 삼가하라 한 이유를 이해하였다. 처음에는 단순히 황제가 그들을 경계할 것을 방지한다고 여겼지만 이제와 생각해 보니 서로 관계를 맺지 않아야만 그를 위해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었다.비록 왕께서 직접 말씀하시지 않았고, 시만자도 언급하지 않았지만, 치석은 왕께서 남긴 후수라고 굳게 믿었다. 이 사건을 자세히 되새기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사실 고부진도 내가 그 주아를 아내로 맞는 것을 반대하고 있는 것이지?” “그는 고후부를 끌어들이는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만약 실로 무슨 일이 생긴다면 방 씨 가문은 고후부를 원망할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는 자신의 가문을 위해 고민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해했다. 그럼 나는 이 혼인을 일단 미뤄두겠다. 장공주가 의심할 수 없게, 또한 고부진도 지나치게 안심할 수 없을 만큼 잘 조절하겠다.” 시만자가 웃으며 말했다. “오늘 저는 이 문제를 알리러 왔으나 주아를 만날 수 있어 뜻밖이었습니다. 고부진이 말하기를 주아의 본래 신분은 잡기단의 일원이었고 나중에 잡기단이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 해체되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여인은 스스로 생계를 유지하다 결국 마적에게 찍혔고 이를 장공주가 구해 주었지
닮았다..정말 너무 닮았다! 얼굴형, 눈썹, 눈, 코, 입술의 그 붉은 점까지, 오늘 본 주아와 완전히 똑같이 생겼다. 그녀는 순간 숨이 콱 막히는 것 같았다. 이건 너무 말이 되지 않았다.심지어 그가 주아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토록 생생하게 그려냈으니 놀랄만도 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염 선생과 심청화를 바라보았다. 그들 또한 마침 한 폭의 그림 앞에 서 있었다.“이건 어떻소? 만약 잘 살고 있는 것이라면 이렇게 둥글게 생겼을 것이오.” “그리고 이 그림도 마찬가지요. 단지 눈썹과 머리 모양을 바꿨을 뿐이오. 옆에 이 그림속에서는 비교적 힘든 생활을 해 배고프고 따뜻한 옷도 입지 못하여 비쩍 말랐소.” 심청화는 염 선생에게 하나하나 설명하며 시만자에게 손을 흔들었다.“만자 너는 저쪽으로 가 있거라. 방해 된다.” 시만자는 눈앞의 그림을 가리키며 애써 자신의 목소리를 찾으려 했다.“이 사람을 제가 오늘 봤습니다!” 그러자 네 사람의 시선이 그녀가 가리킨 그림을 동시에 바라보았다. 시만자는 침을 삼키며 심청화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동공은 흔들리고 있었다. “혹시 오늘 저를 따라 고후부에 간 것입니까? 보았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어찌 이리도 똑같을 수 있단 말입니까? 심지어 옷 색깔까지 동일합니다.” 한편, 염 선생은 평생 이토록 격렬한 감정은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는 평소의 격조도 지킬 겨를이 없이 성별의 경계도 무시한 채 두 손으로 시만자의 어깨를 꽉 잡고 힘껏 흔들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정녕 고후부에서 이와 똑같이 생긴 사람을 보았단 말입니까?” 시만자는 깜짝 놀라고 말았고, 눈알이 튀어나올 듯한 염 선생을 보며 본능적으로 외쳤다. “석석아!” 사여묵이 급히 다가와 염 선생을 떼어냈다. “자네 무례하지 말게.” 시만자의 손을 잡은 송석석이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고후부에 갔었어? 누구를 봤단 말이야? 고후부에서 이 그림 속 인물과 닮은 그 사람이 대체
정말 형부에 눌러 앉으려는 건가? 신기하기도 하지. 보통 사람은 하루라도 빨리 형부라는 곳을 떠나는 게 정상인데 왜 아직도 형부에 붙어있는 걸까?너무 이상한 일이었다. "왜 일까요?""모르겠소. 오늘 이 대인이 사건 기록을 전하며 말했는데 전북망이 유실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하루에 밥도 한 끼만 먹으며 매일 거기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했소. 원래는 하루만 있을 거라고 했는데 지금은 아예 나가려고 하지 않는다고 하였소.""정말 이상합니다. 혹시 직위마저 포기한 겁니까?" 황제의 처분이 아니라는 말에 송석석도 바로 화제를 바꿨다. "협상 중에 일어난 일들을 폐하에게 보고한 후, 폐하는 조사하지 않으셨습니까?"정영수의 암살 시도는 어찌어찌 넘어갔지만 향병이 장공주에게 독을 준 일은 예전에 비주 사건과 똑같은 독이었으므로 황제도 연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조사는 반드시 할 거요. 아마 오월이가 조사할 것 같소."대리사에서는 비록 반역 사건을 다루고 있긴 하지만 공식적으로 공개되지 않은 일이라 황제는 대리사에게 조사를 맡기지 않을 생각이었다.보주가 들어와 남은 음식을 치우자 궁녀 영씨가 말했다. "왕야님, 왕비님, 목욕은 일찍 준비하셔야 합니다."최근 협상 때문에 사여묵이 살이 빠진 것 같아 궁녀 영씨는 심히 걱정하고 있었다. 협상이 끝났으니 이제는 잘 회복해야 하는데 말이다. 사여묵은 잠시 눈을 깜박이더니 송석석의 손등에 손을 올리고 새끼손톱으로 송석석의 손목 피부를 스치며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빨리 준비해야겠소."설마 이 동작은…?송석석의 얼굴은 즉시 빨개졌고 귀끝까지 붉어져 급히 손을 뺐다.궁녀 영씨와 보주도 있는 데 왜 이리 가벼운 행동을 한 거지?궁녀 영씨는 그 모습에 몰래 웃으며 뒤돌아섰고 보주는 잠시 멈칫하더니 송석석의 얼굴이 갑자기 빨개진 이유를 궁금해했다.보주는 의아한 듯 궁녀 영씨의 뒷모습을 한 번 쳐다봤다. "궁녀 영씨는 왜 웃으시는 겁니까?"송석석이 급히 일어서며 말했다. "아무것도
송석석이 말했다. “나도 생각해 본 적은 있지만 지금은 아직 그 단계가 아니니 그 문제는 나중에 고민하자꾸나. 정말 안 되면 다른 곳에 팔아버리면 그만이니 큰 문제는 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중요한 건 우리가 첫걸음도 제대로 떼지 못했다는 것이야.”“그래,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다니... 여학은 더 힘들지 않겠느냐?”“아니다, 여학은 자리가 늘 부족할 정도로 인기가 많다.” 송석석이 말했다.그러자 시만자가 턱을 괴며 말했다. “그래. 기분이 좋지 않으니 오늘 밤 네 제자들에게 추가 훈련을 시켜야겠다.”송석석이 가볍게 웃었다. “시 사부, 어서 공지를 내려라. 네 제자들은 무공에 대한 열정이 아주 대단하더구나.”시만자도 웃으며 말했다. “장기문이 제일 부지런하다. 이 녀석은 항상 최선을 다해 발전도 빠르지. 무공을 배우기에 정말 좋은 자질이야. 어릴 때 사부를 만났다면 지금쯤 무공이 얼마나 뛰어났을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제야 배우는 걸 보니 조금 아쉬울 뿐이다.”그 후, 송석석은 평서백부로 향했고, 시만자는 가죽 채찍을 들고 네 제자들에게 추가 훈련을 시켰다.최씨가 송석석의 말을 듣자마자 기꺼이 도와주겠다고 하자 송석석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웃었다. “부인이 도와주시니 이제 마음이 놓입니다.”“여인은 살기가 너무 힘드니 도울 수 있으면 돕는 게 복을 쌓는 일이지요.” 최씨는 깊은 슬픔이 깃든 눈빛으로 말했다. 지난번 만났을 때는 그렇게 힘들어 보이지 않았었는데 이번에는 왠지 걱정이 가득해 보였다.송석석은 그녀의 표정을 보고 한가지 의문이 들었다. “부인, 무슨 일이 있으신겝니까? 괜찮으시면 말씀해 보십시오.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최씨도 그녀를 여러 번이고 도왔기에 그녀는 진심으로 최씨에게 보답하고 싶었다. 최씨는 씁쓸하게 웃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몇 가지 작은 문제가 있긴 하다만 왕비님께 걱정을 끼칠 일은 아닙니다.”송석석도 더는 묻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 그때, 하녀가 급히 뛰어와 말
소진 소주방은 모든 준비가 완료되어 언제든 사람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덕회 부인은 다과회를 열어 이 사실을 알렸고 곧 백성들의 입에도 소주방이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비록 말은 많았지만 이혼당한 부인 중 누구도 소주방에 발을 들이는 용기를 내지 못했다.시만자는 의아해하며 홍시와 함께 조사를 진행한 끝에 많은 이혼당한 부인들이 암자에 머무르며 고된 일에 시달렸고, 심지어 때로는 끼니조차 거르는 상황임을 알게 되었다. 물론 친정으로 돌아간 여인들도 있지만 가족들에게 시달리며 고달픈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3월 10일 십자리강에서는 여성의 시신이 발견되었는데 경조부의 조사 결과 자식이 없다는 이유로 이혼당한 자수공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시만자는 참을 수 없는 마음에 곧바로 송석석을 찾으러 경위부로 달려갔다.송석석은 다급히 달려온 그녀를 위로하며 말했다. “이 일은 본래부터 매우 어려운 일이다. 우리 소주방에 아직 아무도 들어오지 않은 이유는 모두가 첫 번째 사람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지. 소주방에 들어가면 세상 사람들에게 자기가 이혼당한 부인임을 알리는 셈이 될 테니. 그걸 이겨내기 힘든 것이야.”"소주방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해서 사람들이 이혼당했다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시만자는 속이 상해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녀는 소진 소주방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그녀들을 위해 살길을 마련해 주려 했지만 기꺼이 죽음을 택하면서도 소주방에 들어오지 않는 이들 때문에 마음이 아팠다."조금만 더 인내심을 가지려무나. 처음부터 쉽지 않을 거라는 걸 우리도 알고 있었지 않느냐. 아직 시작 단계일 뿐이고 강에 투신한 그 여인도 아마 절망한 끝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그래도 살아남는 게 더 중요한 일인데 왜 그리 어리석은 선택을 한 걸까." 시만자는 답답함과 좌절감에 잠시 고개를 숙였다.송석석은 그녀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만지며 위로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겪어보지 않았으니 우리가 그들
안태부와 목 승상은 왕부에 남아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다. 음식은 매우 푸짐했고 좋은 술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양 마마는 손수 장수 찐빵을 만들었는데 그 위에 찍은 붉은 점이 마치 눈 위에 떨어진 한 송이 붉은 매화처럼 보였다.소 대장군은 무척 기뻐하며 술자리를 즐겼다. 식사 중 그들은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람들과 전 노장군에 대한 이야기까지 나누었다. 목 승상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때 내가 전 노장군을 생각해 전북망의 중매를 서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말이오. 두 사람이 원수가 될 줄은 생각도 못 했소. 정말 후회스럽군.”"사람마다 각자의 운명이 있는 법이오."안태부가 말했다. 그러고는 소 대장군을 보며 한 마디 덧붙였다. "우리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젊은 사람들 일에 신경 쓰지 말고 우리 몸이나 건강하게 지키며 자손들과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는 게 좋지 않겠소?"이 말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 지금의 황제는 젊고 기반이 불안정하며 또 일부 노신을 새로운 신하로 물갈이를 할 것이 뻔했다. 세월이 바뀌면 세상도 변하는 법이니 이미 물러났다면 그저 평범한 노인으로 사는 것도 괜찮은 일이었다.소 대장군이 웃으며 말했다. "태부의 말씀에 일리가 있으니 그리하는 것이 맞을 것이오." 이젠 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더군다나 그도 이제 나이를 먹어 성릉관을 지키긴 힘들었다. 다행히도 현재 총사령관 자리는 삼랑이 맡고 있으니 당장 무장을 바꿀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소가군은 여전히 성릉관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그들은 한껏 술을 마시다가 늦은 밤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목 승상은 소 대장군의 손을 잡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번 이별이 마지막일지도 모르니 몸 건강히 지내게나, 친구.""자네도 몸조심하게!" 소 대장군은 공손히 인사하며 송별했다. 비록 술을 많이 마셨으나 여전히 산처럼 우뚝 서 있는 모습이었다.사여묵도 소 대장군과 함께 그들을 배웅했는데, 문득 고개를 돌려보니 남씨가 란이의 손을
북명황실에 도착한 란이는 외조부와 남씨를 보더니 눈물을 참지 못하고 무릎을 꿇어 큰절을 올렸다. 소 대장군과 남씨는 무의식적으로 문밖을 바라보았으나 한동안 아무도 보이지 않자 잠시 실망한 기색이 스쳤다.하지만 그들은 금세 다시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남씨는 웃으며 그녀를 부축해 일으켰다. "바보 같은 것, 대체 왜 울고 있느냐? 외조부를 무사히 만났으니 기쁜 게 아니더냐?"그러자 란이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기쁩니다, 너무 기뻐서 그러는 겁니다."소 대장군은 외손녀가 겪은 고난을 알기에 눈가에 연민이 가득했다. "란이야, 어서 이리 오렴. 어디 찬찬히 보자꾸나."소 대장군의 말투에서 느껴지는 따뜻함을 듣자, 순간 어머니의 냉담함이 떠올라란이는 가슴이 아려 눈물이 다시 흘렀다. "외조부님, 란이는 석석이 언니가 도와주고 있어서 괜찮습니다."소 대장군은 송석석을 한 번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도 많은 고통을 겪으면서도 사촌동생을 돌봐주고 있었던 것이다."너희가 서로 도울 수 있다니 외조부는 정말 기쁘다. 앞으로도 그렇게 서로 의지하거라.""예, 외조부의 말씀 꼭 명심하겠습니다." 송석석과 란이는 동시에 대답했다. 그녀들은 서로를 한 번 바라보더니 이별의 슬픔을 억누른 채 최대한 밝게 웃어 보였다.잠시 이야기를 나누던 중 소 대장군은 묻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그가 머뭇거리는 모습에 남씨가 란이에게 물었다. "란이야, 네 어머니는 왜 오지 않은 것이냐?"란이가 대답하려는 순간 사여묵이 목 승상과 안태부를 모시고 들어왔다. 그러자 소 대장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안태부, 목 승상, 모두 오랜만이오. 그간 모두 무탈하셨소?"안태부는 예를 갖추며 인사하고 목 승상은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밖으로 나가더니 조금 있다가 다시 돌아왔다.그는 미소를 지으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소 대장군, 잠시 실례하겠소."송석석은 남씨와 란이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한 후 바로 자리
란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외조부께서 내일이면 성릉관으로 돌아가십니다. 연세가 많으시니 이번에 뵙지 못한다면 아마 다음이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게다가 이번 생신은 혼자 서쪽 별당에서 보내셨다고요. 어머니께서 함께 가셔서 오래도록 건강하시라고 축복해 드리고 싶지 않으십니까?”하지만 회왕비는 여전히 눈물을 닦으며 걱정할 뿐이었다. “아니야, 나는 못 가겠다. 게다가 그날 석석이가 찾아뵙지 않았을까?”란이는 답답해하며 말했다. “어머니,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날 외조부님 생신에 언니는 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때는 협상이 시작되지도 않았고 폐하께서도 아직 조치를 취하지 않으셨으니까요. 그런 부적절한 시기에 절대 그럴 수 없었을 것입니다.”회왕비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울먹였다.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하다는 것이냐? 어차피 대단한 날도 아니고 이제 와서 생일상 한 번 올려드린다고 달라지는 건 없지 않느냐? 네외조부님께서 막 돌아오셨을 때 물론 나도 찾아뵈려고 했다. 하지만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누가 막아서 돌아와야 했으니, 나는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한다.”요즘 들어 마음의 평정을 잘 유지하고 있었던 란이었지만, 이 말을 듣고는 한동안 말문이 막혔다. 잠시 후, 그녀는 정신을 가다듬고 실망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됐습니다. 그럼 저도 더는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단지 마음이 여리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냉정하실 줄은 몰랐습니다.”그러자 회왕비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거의 세상이 무너지듯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를 한 번 뵙는 게 그렇게 중요한 일이더냐? 네가 냉정하지 않다면 어째서 네 어미가 이렇게 힘든 처지에 놓인 건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느냐? 네 부왕께서 나를 버리셨다. 집의 금은보화를 다 가져가 버렸어. 나는 이제 가진게 아무것도 없단다.”란이는 자리를 뜨려다가 어머니가 이토록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다시 설득해 보려 했다. “부왕의 일은 따로 알아보면 됩니다. 그게 어머니가 외조부를 뵙는
저녁 식사 후, 소 대장군과 사여묵은 오랫동안 서재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송석석은 처음에 들어가서 듣고 싶었지만 소 대장군이 남자들끼리의 이야기니 그녀가 들어오면 불편할 것 같다고 하여 어쩔 수 없이 물러나야만 했다. 결국, 송석석은 평 사저와 대사형을 찾아갔다.저녁 식사 중에 사숙은 자신도 매산으로 돌아갈 예정이니 함께 가자며, 특히 대사형에게 엄격히 명령하고 돌아가도록 했다. 대사형이 왕부에 머무는 동안 많은 사람이 그를 찾아와 왕부가 소란스러워졌기 때문이다. 사실 대사형을 찾는 이들은 대부분 조정의 그림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기에 사숙은 그런 인물들과 너무 가까이 지내면 안 된다고 말했다.또한 그의 제자 사여묵에게 해를 끼칠까 우려가 되어 그들에게 반드시 왕부를 떠나라고 엄숙하게 지시했다.평 사저는 뒤에서 몰래 사숙은 일이 필요할 때만 부려 먹고 일이 끝나면 귀찮아 한다며 볼멘소리를 했다. 평 사저는 평소에 남을 험담하는 일이 없지만 유일하게 사숙에 대해서만은 뒷말을 하였는데, 그것도 직접 말하지 못하고 조용히 중얼거릴 뿐이었다."정말로 돌아가야 합니까? 며칠 더 머무르실 수는 없습니까…?" 그러자 송석석이 사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물었다."돌아가기 싫어도 가야 한다. 사숙님이 명령을 내리셨잖니." 평무종은 어린 사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사실 우리가 오래 머무는 것도 좋지 않다. 평소에도 사부님은 우리가 자주 너를 찾는 걸 좋아하지 않으셨으니 말이다. 우린 강호인이라 왕부에 강호인이 많이 드나드는 것도 좋지 않고, 너에게 민폐가 될 것이다.""전혀 민폐라 생각되지 않습니다. 전 그저 모두가 제 곁에 있어 주는 게 좋습니다!" 송석석이 불만스럽다는 듯 말했다. "사숙님 혼자만 돌아가라고 하십시오."그러자 평무종은 그만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조용히 말하거라. 사숙님께 들키면 나중에 벌을 받을 것이야."송석석은 고개를 들어 머리를 매만지며 말했다. "왕부에선 사숙님이 저에게 벌주지 않을 겁니다.
시만자는 원래 그들의 몸에 더 많은 구멍을 뚫어줄까도 생각했으나 보주의 말을 듣고 멈추기로 했다. 몇 번 더 찌른다면 피가 너무 빨리 흘러 그들이 너무 쉽게 죽을수도 있어서였다.송석석은 조상 묘지 앞의 작은 사당에서 향을 가져와 불을 붙여 향로에 꽂았다. 그러고는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무릎을 꿇고 세 번 큰절을 올렸다. 그녀는 절을 올리면서 먼저 떠난 가족들이 저세상에서 이 장면을 보고 있을 것이라 믿었다.사여묵 역시 향을 피우고는 그녀 옆에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을 잡았는데, 송석석이 이미 눈물범벅이 되어 있어 그는 더욱 마음이 아팠다. 사여묵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범인이 이미 처형되었으니 장모님도 저세상에서 이제는 편히 쉴 수 있을 것이오.”송석석은 그들이 정말로 안식을 얻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그들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비록 복수는 했지만 마음속 고통은 조금도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강해지고 행복해져야만 그들에게 진정한 위로가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서경의 두 정탐꾼은 아직 죽지 않았으나 과다 출혈로 의식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들은 서경 말로 무언가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송석석과 시만자 등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고 오직 사여묵만이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바로 “송구하다”라는 말이었다.그들 역시 자신의 잘못을 알지만 단지 인정하기 싫었을 뿐이었는데, 이제 죽음을 앞두고 있으니 그동안 저지른 일들이 하나하나 떠오르는듯 했다. 송구하다는 말이야말로 그들이 이 묘지 앞에서 비로소 할 말이었다.사여묵이 송석석과 보주에게 전했다. “이자들이 송구스럽다고 말하는구나.”보주는 여태 애써 눈물을 참고 있었는데, 사여묵의 말을 듣자마자 결국 눈물을 터뜨리며 시만자의 품에 와락 안겼다.“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송구스럽다고 해서 이 모든 일이 없어지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보주는 목이 찢어질 듯한 울음을 터뜨리며 외쳤다. 단지 송구하다는 말로 모든 죄
일행은 이상서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고 송석석은 내내 보주의 손을 놓지 않았다.그리고 곧 두 명의 서경 정탐이 끌려 나왔는데 그들의 옷은 이미 너덜너덜해지고 피가 묻어있었으며, 얼굴은 이목구비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부어 있었다. 그들은 땅에 무릎을 꿇고 있었는데 몸이 앞쪽으로 쏠려 거의 넘어져 엎어질 지경이었다.보주는 눈에 핏대를 세운 채 그런 그들을 노려보았다.그녀와 송석석은 단 하루도 진북후부의 멸문에 대한 복수를 잊은 적이 없었다.이제 대세는 정해졌고 그녀도 마침내 가족과 송 부인 등에게 복수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그녀의 가슴 속에 있던 슬픔과 분노는 산을 무너뜨릴 듯한 기세로 솟구쳐 나왔다.보주는 당장 달려가 주먹과 발길질을 퍼붓고 싶었으나 이상서 앞에서 무례하게 굴어 왕야와 아씨의 얼굴을 깎아내릴 수 없었다.이대인이 말했다. “이 두 정탐은 형부에 보내졌을 때까지도 죽음을 각오한 듯 오만한 태도였습니다. 하관이 직접 고문을 한 것은 아니지만, 일부 사람들이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뺨을 몇 대 때렸습니다. 그들의 몸에 난 상처도 이미 잡혀 올 때부터 있었습니다.”그러자 사여묵은 평 사저의 말이 떠올랐다. 그들은 역시나 심하게 맞은 후 여기에 데려온 것이다.사여묵은 가볍게 허리를 굽히고는, 몽동이에게 그들을 데리고 송가의 조상 묘지에 가라고 지시했다.바람에 흔들리는 등불이 그림자를 드리워 날은 앞길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몽동이는 그들을 마차 앞에 묶고 말을 몰았다. 그러던중 송가의 멸문이 떠올릴 때면 그들에게 채찍을 휘둘렀다.송가 조상 묘지 앞에 도착하자, 몽동이는 발로 그들을 묘지 앞으로 걷어찼다.보주도 그들 앞으로 달려가 주먹과 발길질을 퍼부었다. 둥글게 말아 쥔 손바닥이 뺨에 연달아 떨어졌으나 마음속의 분노와 슬픔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모두 그녀를 막지 않았고 그녀가 분노를 표출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언제나 사랑스럽고 순진했던 그녀가 이토록 광기에 휩싸인 모습을 보이자 사람들은 마음 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