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이의 처소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반나절이 지났다. 석소 사저는 군주께서 휴식해야 하고 비도 그쳤으니 이제 각자 집으로 돌아갈 것을 권했다.제수찬은 눈에 띄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한녕의 손을 잡고 성큼성큼 앞서 걸어갔다. 걷다가 문득 실례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급히 멈춰 서며 길 한켠으로 물러서며 장모님과 매형인 사여묵에게 길을 양보하였다. 혜태비는 사위를 보며 속으로 탄식하였다. ‘결혼할 때는 거위같이 하얗고 깨끗하더니 어느새 검게 그을렸구나. 한녕도 함께 까무잡잡한 것이 촌부가 따로 없구나. 누가 보면 한녕이 농부에게 시집간 줄 알겠어. 그래도 한녕이 좋아하니 그래도 다행이구나. 제씨 가문의 자손이니 봐줘야겠다’송석석은 뒤에서 손을 잡고 걷는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며 참 보기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들이 멈추어 서고 사여묵과 그녀가 앞서 걷게 되었다. 그제야 송석석은 자신도 사여묵과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데, 무언가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제수찬과 한녕은 아주 자연스럽게 방방 뛰다가 몸을 이리저리 비틀면서 살갑게 걷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와 사여묵을 유심히 관찰해보니 맞잡은 두 손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고 축 처진 상태 그대로였다. 마치 두 개의 나무토막이 나란히 붙어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녀는 속으로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사여묵은 정말로 낭만이라고는 없구나.' 왕부로 돌아와 혜태비를 방으로 모신 뒤, 두 사람은 서재로 가서 그들이 그린 그림을 보러 갔다. 초상은 이미 그려져 있었고 옆에 놓여 있었다. 염 선생은 그 옆에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초상만 바라보고 있었다.사여묵과 송석석도 다가가 보니 거기에는 동그란 얼굴에 양 갈래를 한 소녀는 커다란 눈, 작고 오똑한 콧날, 도톰한 입술과 그 입술 위에 작은 점이 하나 있었다.그 옆의 또 다른 초상에는 부부가 그려져 있었고 염 선생과 꼭 닮은 것이 아마도 부모님인 것 같았다.심청화는 여전히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성인 여인의 초상을
심청화가 고개를 들었다."너희들은 먼저 나가거라. 우리 아직 끝나려면 멀었다. 아직도 많이 손봐야 하기에 아마 한두 십 폭은 그려야 할 수도 있으니라." 사여묵은 의자 위에 놓인 성숙한 여인의 초상화를 바라보며 잠시 멍하니 있었다. 그 초상이 마치 장모님, 즉 송석석의 어머니를 닮은 듯했다. 남강 출정 전에 보았던 장모님의 모습이 아닌, 훨씬 이전의 자신이 반쯤 철이 들었을 때의 장모님 모습인 것 같았다. 그때의 장모님의 얼굴은 매우 둥글고, 웃을 때는 매우 부드러운 인상을 주었다. "가시죠."송석석이 그의 소매를 가볍게 당기자 사여묵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누구랑 많이 닮지 않았소?" "누구와 닮았다는 말씀이신지요?" 송석석은 다시 그림 속 인물을 바라보며 물었으나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사여묵은 그녀가 느끼지 못하는 것을 보고 급히 말을 돌렸다. "내가 잘못 본 것 같소. 나가세. 그들을 방해하지 말아다오." 방을 나서던 사여묵은 순간 어렸을 적 황형과 진북후부에 방문하였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의 진북후부인은 젊었고, 그 시절 송석석도 매산으로 보내지기 전이었다. 여리여리한 그녀는 매우 예쁘고 귀여웠다. 위로 여섯 오라버니를 둔 송석석은 각별한 사랑을 받았고 더불어 성격도 매우 발랄하고 사랑스러웠다. 방금 본 어린 염희진의 초상은 그녀와는 닮지 않았다. 송석석이 훨씬 더 예뻤다. 그러나 의자 위에 놓인 성인 여자의 초상은 확실히 젊었을 적의 장모님을 많이 닮은 것 같았다. 물론 그때 장모님은 초상화 속 인물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분위기가 똑같았다. 하지만 사여묵은 송석석에게 이 말을 감히 꺼내지 못했다. 자칫하면 그녀가 가족을 떠올리며 슬퍼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사여묵은 시간이 아직 이르고, 비도 그쳤으니 만금산에 가자고 물어보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그때 그녀가 보주에게 명하였다. "나는 장방으로 갈 것이니, 몽동이를 불러오너라. 그에게 할 말이 있느니라." 사여묵은 하려던 말을 삼키고, 대신 물었다.
송석석이 깜짝 놀랐다."염 선생께서 장군부에 사람을 심으신 거야?" "당연하지. 진성의 다른 가문에도 있어. 하지만 깊이 스며들지 못한 곳도 있지." "그럼 왜 염 선생께 바로 보고하지 않고 나에게 말하는 거야?" "사형이 와서 줄곧 서재에 계셔서. 난 그분이 왕야의 명을 받고 있으니, 네가 돌아가서 왕야에게 바로 알리면 된다고 생각했어." 송석석은 의아해했다.“근데 왜 너랑 접촉해? 네가 이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거야? 아니면 염 선생께서 정말 너를 이리도 신뢰하시는 거야?" 몽동이는 한껏 으시댔다."당연하지! 나를 그저 사번으로만 알고 있었던 거야? 염 선생께서는 내가 거칠어 보여도 아주 세심한 면이 있다고 하시며 나에게 이 일을 맡기셨어." 말이 끝나자마자 몽동이는 제자리에서 공중회전을 몇 번 하더니 그대로 밖으로 나가버렸다. 송석석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그녀는 늘 몽동이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야생 원숭이처럼 느껴졌다. 병사를 이끄는 교두로서는 충분하지만, 암선과 같은 중요한 임무를 맡기기엔 부족했다. 그런데 염 선생께서 정말로 그에게 이토록 신중한 일을 맡겼다니 놀라웠다. 만약 그가 실수라도 한다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텐데 말이다.방으로 돌아간 송석석은 사여묵에게 몽동이가 보고한 일을 얘기했다. "당신과 염 선생께서 여러 명문 세가에 암선을 심어두었습니까?" 의자에 기댄 사여묵은 손을 뻗어 그녀를 자신의 옆자리에 앉혔다."그렇소. 가능한 곳은 모두 심어두었지. 하지만 각 가문에 심을 수 있는 위치는 다르오. 어떤 곳은 하인이나 시녀로, 어떤 곳은 주인의 곁에서 일하게 했고, 또 어떤 곳은 호위로 있소." 그러자 송석석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렇게나 빠르게 움직였단 말입니까? 요즘 조용한 것 같더니 그동안 이런 일을 준비하고 있었던 거군요?" 사여묵은 여전히 평온한 표정이였다. "우리에겐 뛰어난 이들이 많지만 드러내 놓고 감시하거나 첩보 활동을 할 수는 없소. 그래서
다음 날, 사여묵은 대리사로 돌아갔고, 송석석은 서재로 향했다. 심 사형과 염 선생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하인더러 음식을 들이라고 한뒤 더 이상 그들을 방해하지 않았다.시만자가 그녀에게 몇 마디 하자 송석석은 고개를 끄덕였다."마침 가는 길에 서우를 서원에 데려다줘야겠어." 진소설과 서우는 이제 가장 좋은 친구가 되었다. 진소설은 비록 서원에 입학할 자격은 없었으나, 서우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가는 내내 마차 안은 시끌벅적했다. 송석석은 그저 미소를 머금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가끔 한두 마디만 거들었다. 서원에 도착한 후 마차는 돌아서 유명한 찻집 앞에 멈췄다. 둘은 안으로 들어가서 앉지 않고 옆문으로 나가, 청화 골목에 도착했다. 한 저택 앞에 멈춰 선 시만자가 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고청란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께서는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송석석이 대뜸 물었다. "어떻게 나왔느냐? 너는 계속 림씨 가문에 머물고 있었지 않았느냐? 향귀는 너를 따라오지 않았느냐?" "아버지께서 병환이 있으셔서 돌보러 왔습니다. 향귀는 마침 언니를 찾으러 가야 해서 저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고부진은 당연히 아무런 병이 없었다. 다만 송석석과 의논하려고 이런 핑계를 댄 것이었다. 송석석과 시만자는 서재에서 고부진을 만났다. 병은 없지만 그의 하얀 머리는 흐트러져 있었고, 다소 창백했다. 적어도 외부 사람들이 보기엔 병든 사람처럼 보였다. 의자에 앉은 그는 등이 굽어 있었고 눈에는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고청란이 몸을 숙이며 말했다. "아버지, 왕비님과 시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고부진은 무심하게 대답했다. "보았다." 그러고는 송석석과 시만자를 훑어보며 말했다. "앉으시오." 송석석과 시만자는 인사도 올리지 않고 바로 앉았다. "고청란이 말하길, 그대들이 그녀의 어머니를 구해주려 한다 들었습니다. 어떤 계획인지 제가 알아야겠
고청란의 눈가가 촉촉해졌다."아버지, 어머니를 구해내고 그 독녀를 무너뜨릴 수만 있다면, 저는 만 번 죽어도 사양치 않을 겁니다.." 고부진은 그녀에게 손짓하며 다정하게 말했다. "어리석은 아이로구나, 아비가 한 모든 것은 우리 가족이 잘 살아남길 바라기 때문이지, 그 누구도 죽기를 원해서 그런건 아니느니라." 바닥에 무릎을 꿇은 고청란은 얼굴을 그이 무릎에 묻으며 눈물을 쏟아냈다."아버지! 딸은 그날이 오기만을 오랫동안 기다렸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평안하시고, 저희 자매가 아버지 어머니 곁에서 함께할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눈가마저 붉어진 고부진은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일어나거라. 왕비님께 보고 계신다. 이젠 나이가 들었으니, 더는 아이처럼 굴지 말거라." 고청란은 눈물을 훔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왕비님 죄송합니다." 송석석은 그저 담담히 말했다. "내 계획을 말하기 전에 부마님께서는 먼저 공주가 최근에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려주시지요." 잠시 생각에 잠기던 고부진이 대답했다. "최근 한 여자를 방시원에게 시집보내려 하고 있습니다. 그 여자는 옹현의 한 잡기단 출신이었는데, 상당한 무예를 익히고 있었지요. 잡기단이 망한 후 혼자 살 길을 찾아다니던 중 마적떼에 추격당하게 되었고 장공주가 그녀를 구했습니다. 저에게 또 첩을 들이려는 건가 싶었지만 공주부에서 예의범절을 가르치고 있었지요." "방씨 가문에서 어찌 출신이 불분명한 여자를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장공주는 그 여인에게 신분을 만들어주었을 겁니다. 맞지요?" 고부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녀는 나의 먼 사촌 여동생이 되었고 옹현의 수씨 가문의 딸, 수연이 되었습니다. 방씨 가문에서 조사하더라도 옹현에 있는 수씨 가문 출신으로 나올 겁니다." 옹현은 장공주의 봉지였으니 가짜 신분을 만드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그 여자의 원래 이름은 무엇입니까?" "주아입니다." "지금은 고후부에 거주하고 있습
청화골목을 떠나자마자 시만자가 입을 열었다."네 말이 맞았어. 고부진을 믿을 수 없는 지오. 주아에 대한 정보를 알려준 것 외에는 회왕의 존재조차 털어놓지 않았으니 말이야. 게다가 스스로를 부마라 자칭하면서 신분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있어. 그런데 이상한 것은 어찌하여 우리에게 주아에 관한 이야기를 했을지야." "우리가 이 혼사를 막아주길 바라는 거야. 왜냐하면, 이 혼사는 그의 어머니가 주선한 것이니 이번 일에 연루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지. 또한 고후부인과 방시원의 모친 간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을 바라지 않아. 마음은 고후부에 있지만 림봉아에 얼마나 진심인지, 딸들에게 부성애가 있는지는 그 자신만이 알 거야." 시만자는 격노했다. "그 따위가! 하지만 우리의 계획을 알렸으니 틀림없이 돌아가서 장공주에게 모조리 고할 게 분명해." 송석석의 눈빛에 날카로움이 번졌다. "우리는 10월 15일 하원절이 아닌, 10월 초하루 한의절에 움직일 거야. 그날 장공주는 고승들을 초청하여 세상을 떠난 영혼들을 위한 초복의식을 열 생각이야. 마음이 착한 부인들은 자발적으로 기부하고, 직접 경문을 써서 함께 태우기도 하지. 한의절에 참여하는 이들은 진정으로 자비로운 사람들이지." 송석석은 계속해서 말했다. "반면, 10월 15일 하원절은 웃어른을 초청하는 것이니 모두 자비심을 가진 사람은 아니야. 그들은 이 기회를 빌어 인맥을 쌓고, 황제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야. 왜냐하면, 장공주는 그날 국운의 창성을 기원한다고 대외에 공표할 것이어서 우리가 그날에 움직이는 것은 적절치 않아." 시만자가 웃으며 말했다. "알겠어. 그녀는 우리가 15일에 움직일 것이라 생각하고 한의절에는 방비하지 않을 거란 말이지? 그럼, 다른 계획이 있어?" 송석석은 고개를 저었다."없어. 우린 매산에서 가장 거친 방법을 사용할 거야." 그러자 시만자는 순간 기뻐하며 말했다. "강제 침입이로구나! 얼마나 많은 사람을 들여보낼 생각이야?" 매산에서는 문파 간 갈
차루로 돌아온 그들은 그곳에서 식사와 계산을 마친 후 정문을 나서서 마차에 올라탔다.그렇게 한참 가던 중 어느 한 골목에서 홀연히 뛰어내린 시만자는 잠시 숨어 있다가 길거리로 나와 백성들 틈으로 빠르게 섞여 들어갔다. 요즘 시만자의 차림새는 극히 간소하였다. 장식이라곤 은비녀 하나만 머리에 꽂혀 있을 뿐이었기에 일반 사람이 그녀를 미행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을테지만 경계를 풀어선 안 되었다. 그녀는 이미 무공을 익힌 자라 방씨 가문까지 걷는 것이 그리 피로하지 않았고 다행히 거리도 그리 멀지 않았다.그렇게 방씨 가문에 이르렀을 때, 문 오른편에 마차 한 대가 멈춰 서 있었고, 때마침 방시원이 오 씨를 부축하며 나오고 있었다. 그 뒤에는 방 부인과 시녀 한 명이 뒤따르고 있었다.시만자는 웃으며 말했다. "오호라, 제가 정말로 때맞춰 왔군요. 나가려던 참이였습니까?" 방 부인은 웃으며 말하였다. "오셨습니까? 정말 오랜만입니다." 시만자도 얼굴에 웃음꼿이 활짝 피었다."요즘 바삐 지냈습니다. 오늘에서야 겨우 틈이 나 의모님과 의형을 뵈러 왔는데.. 외출하신겁니까?" 오 씨는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마침 잘 왔다. 우리와 함께 고후부에 가서 그대 의형의 눈을 밝혀주도록 하지." "눈을 밝히라 함은?" 시만자는 속으로 생각하며 말했다. "설마 고후부에서 의형을 위해 아가씨를 소개하려는 것입니까?" 그러자 오 씨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왜 아니겠니? 어제 고후부인이 찾아와 그녀에게 먼 친척 조카가 옹현의 수 씨 가문의 여식인데 인품과 덕행이 훌륭하고 대범하며 예의도 바르다고 했다. 다만 나이가 조금 많다. 원래 혼약이 있었으나, 약혼자가 사망하여 혼사가 무산되었다 하더라. 옹현 같은 작은 고을에서는 겪어 보지 못한 일이고 혼사를 앞두고 남편을 먼저 보내는 것을 보고 남편의 기를 빼앗는 운명을 지녔다 하여 이제껏 혼사가 성사되지 못하였다.하더라. 이번에 고후부인을 찾아온 것도 진성에서 새로운 혼처를 찾기 위함이라 하였다." 시만
고후부는 상국의 오랜 명문 세가였다. 하지만 오래된 가문일수록 곤란한 상황에 더 많이 처하게 되는 법.가족의 대번성 속도는 빠르나, 모든 이들에게 넉넉한 생활을 제공할 식읍은 부족하여 화려하고 부유한 삶을 유지하기 힘들어지고 있었다. 현재의 고후는 고부진의 부친이며, 그의 지도 아래 고후부는 점점 쇠퇴하고 있었다. 이미 여러 대에 걸쳐 부유한 집안이었으나, 엄격했던 가풍은 점점 느슨해져 자손들이 글공부나 무공 연습의 고생을 기피하고 있었다. 어차피 집안의 체면이 있으니, 이들은 부유한 생활을 이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고부진이 장공주와 혼인하지 않았다면, 고후부는 이미 쇠락했을 것이다. 고후도 조정에 관직이 없었고 집안 자제 중에서 오 품 이상의 직위를 가진 이가 드물어지고 있었다.시만자가 고후부에 발을 들이자, 한때 명성이 자자했음을 증명하는 가문에 대한 글들이 여기저기에 새겨져 있었다. 자신들이 잊히지 않기를 바랐던 그들이기에 정홀만 해도 두 곳에 문장이 보였다.정홀의 장식은 다소 낡았으나, 귀한 목재 가구는 세월의 풍파를 겪으면서도 더욱 겸손한 고급스러움을 드러내고 있었다. 혼인 의논에는 여러 사람이 모여 있지 않음이 좋아 고후부인은 그들을 편홀로 초대하고 사람을 시켜 주아를 데려오게 했다.잘 가꾸어진 고후부인의 모습에서 고부진과 몇 가지 닮은 점이 있음을 느끼게 되었고 특히 눈매와 말하는 태도가 많이 똑같았다."차를 드시지요." 그녀의 입가에 띤 미소는 자애로운 기품이 넘쳤지만, 시만자는 그녀의 계획을 이미 알아차린 뒤였다. 주아는 그녀의 친정 사람이 아니었고, 수씨 가문의 성도 따르지 앟았다. 장공주가 미리 손을 쓴 것이다.수씨의 신분을 위조하려면 고후부인의 동의가 있지 않고서야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차를 마시며 소소한 대화를 나누나, 이는 서로를 치켜세우는 말들 뿐이었다. 고후부인은 몇 번이고 방시원을 살펴보았다. 몇일동안 왕청여와의 일이 떠들썩하게 퍼졌고 최근이 되어서야 겨우 잠잠해졌기 때문이다.고후부인은 차를
이날 저녁, 송석석은 약왕당에서 받아온 약을 사여묵에게 건넸고 약의 위험성까지 자세하게 얘기했다.사여묵은 망설이는 듯한 송석석의 모습에 환하게 웃으며 위로했다.“이 정도 상해는 충분히 견딜 수 있소. 그리고 원기를 회복할 수 있는 약들도 이렇게 잔뜩 가지고 오지 않았소? 나중에 어의에게 진단만 받으면 바로 단설환을 먹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오. 남강으로 가는 길에도 단 신의의 당부를 잊지 않고 매일 약을 꼬박꼬박 챙겨 먹겠소.”“그래도 결국 독약 아닙니까? 그러지 말고 저희 다른 방법을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요?”송석석이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사여묵이 담담하게 대답했다.“내가 보기엔 지금으로써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소. 단 신의가 말을 무섭게 해서 그렇지 그 정도로 심각한 상해를 입히지 못할 거요. 그렇게 위험한 약이었다면 애당초 꺼내지도 않았겠지.”“그럼 일단 염 선생과 상의라도 해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그럴 필요 없소!”사여묵이 약을 내려놓은 뒤, 커다란 손으로 송석석의 허리를 감싸며 말을 이어갔다.“이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유리하오. 나중에 내가 대리사에서 쓰러지면 진이가 내 옥패를 들고 어의를 찾아갈 것이고 황실로 달려온 어의가 우왕좌왕하는 염 선생을 보아야 의심을 하지 않을 것이오.”송석석은 사여묵의 가슴팍에 기대어 불안한 마음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전 장군님이 너무 걱정됩니다. 몸이 회복되기도 전에 남강으로 출발해야 하는데 가는 내내 제대로 쉴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남강에 가서도 몸 상태가 회복되지 않으면 전장에 어떻게 나가시려고 그러십니까?”송석석의 걱정에 기분이 좋아진 사여묵이 다정하게 웃으며 그녀를 위로했다.“난 왕표를 무조건 대체하겠다는 게 아니오. 일단 제린을 찾아 병사들 속에 숨어 있다가 왕표가 제대로 군을 이끈다면 난 남강 구경이나 하다 올 것이오.”사여묵의 위로에도 송석석은 시름이 놓이지 않았다. 왕표가 군을 제대로 이끌지 못할 거라는 확신 때문에 두 사람이 지금 이런 모험을 하고 있는
화가 난 단 신의는 송석석의 말에 설득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버럭 언성을 높였다.“난 멍청한 사람을 돕지 않소. 당신들은 그런 천하의 멍청이가 따로 없소!”“세상에 이런 멍청이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번 한번만 더 모험하고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약속할게요.”송석석이 환하게 웃으며 말하자 단 신의가 미간을 찌푸렸다.“모험을 하고 싶어도 이제 못할 수도 있소. 돌아오면 황제께서 그 죄를 어떻게 물으실 줄 알고 이러는 것이오. 그러다가 머리가 잘릴 수도 있소.”“정말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고 해도 저에게 방법이 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단 신의는 고집을 부리는 송석석을 보며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말한 것처럼 백성들에게는 두 사람과 같은 멍청이들이 필요하긴 했지만, 단 신의는 그 멍청이가 송석석과 사여묵은 아니길 바랐다.결국 단 신의는 먼지가 뽀얗게 쌓인 작은 상자를 꺼내 먼지를 툭툭 털어내곤 조심스럽게 열었다.상자 안에는 땅콩 만한 검은 알약 하나가 있었다.“똑똑히 기억하시게. 이건 독이오. 이 약을 먹고 나면 맥박이 이상해지고 갑작스러운 발작을 일으키네. 그리고 짧은 시간내에 심장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지. 이건 그저 보여지는 현상이 아니라 실제로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네. 이 약을 먹고 3일 정도 버틸 수 있는데 3일 뒤에는 반드시 단설환을 복용해야 하오. 그러지 않으면 심장에 영구적인 손상을 입을 수도 있소.”단 신의의 말에 송석석이 흠칫 놀란 표정이었다.“정말로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뜻입니까?”“그럼 당연하지. 이건 독이오.”“그럼 단설환을 먹고 나면 바로 정상적인 몸 상태로 돌아올 수 있는 겁니까?”“그렇지 않소. 며칠 동안 안정을 취해야 하네. 눈속임을 하고 나서 바로 출발하면 절대 안 되오.”위험할 수도 있다는 단 신의의 말에 송석석은 단 신의가 건네는 약을 받지 않았다.“그럼 혹시 다른 약은 없는지요? 폐하를 속이고 나서 장군님은 바로 출발하려고 할 겁니다. 실제로 중독되
사여묵은 온몸에 힘이 쭉 빠진 채 침대에 앉아 등을 벽에 기대고 있었다.남강에서 돌아와 병권을 황제께 바친 뒤에도 황제는 여전히 사여묵을 의심하고 경계했지만 사여묵은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황제가 의심과 경계를 조금은 풀 수 있도록 사여묵은 지금까지 최대한 언행에 조심했으며 서경과의 담판이 끝나고 나서도 황제 앞에서 일부러 약한 모습을 보였다.나중에 혹시라도 전쟁이 일어났을 때 더 이상 황제의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조심하고 또 조심했는데 황제의 태도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사국이 이번에 다시 쳐들어온 건 사국과 손잡은 내국 역적이 남강에 이미 함정을 파 놓았다는 사실을 폐하께서도 알고 계신 것이오. 그래서 사국은 저렇게 겁도 없이 남강을 계속 공격하고 있는 것이지. 하지만 폐하는 내가 폐하께 대한 위협이 사국 병사들을 물리치는 것보다 더 중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소.”사여묵이 씁쓸하게 웃으며 마지막 남은 술을 벌컥벌컥 마시자, 송석석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황제께서 이런 결정을 하신 게 처음은 아니잖아요.”사여묵은 송석석을 품에 꼭 끌어안은 채 그녀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고 조금 전 혼자 술을 마시고 있을 때부터 계속 이렇게 숨막히는 인고를 견뎌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다.“난 무조건 그런 비극이 다시 일어나게 하지 않을 것이오.”송석석을 놓아준 사여묵은 강경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말을 보탰다.“난 당신처럼 용감하게 변할 것이오.”예전에 송석석이 입궁하여 황제께 상황을 보고했을 때 황제는 그녀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그때 당시 송석석은 마냥 기다리거나 손을 놓은 것이 아니라 홀로 남강까지 찾아갔다.송석석은 그때 자신의 생사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한편, 사여묵의 말을 들은 송석석은 바로 뜻을 알아챘고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전 장군님을 응원합니다. 아무 걱정도 하지 말고 다녀오세요. 폐하께서 아무것도 묻지 않으신다면 전 평소와 같이 진성을 지키고 있을 것이고 만약 폐하께서 죄를 물으신다면 전 북명
사여묵이 방시원을 잘 달래어 돌려보낸 뒤, 염구진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다들 감정이 격해지는 것도 당연합니다. 남강 땅을 되찾기 위해 그들은 청춘을 다 바쳤는데 이제 또 전쟁이 난다고 하니 마음이 안 좋을 수밖에 없지요.”말을 하던 염구진은 고개를 돌려 사여묵을 힐끔 쳐다보았으며 방시원의 마음을 가장 잘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은 사여묵일 것이라고 생각했다.한편, 한참동안 말이 없던 사여묵이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잘 지켜보고 있다가 무슨 소식이 들리면 바로 나에게 보고하게.”“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사여묵은 다시 연주에 관한 일에 대해 물었다.“연주에서 성문을 봉쇄했다고 들었는데 소식은 끊기지 않은 것이오? 혹시 그쪽에서 움직임이 보이지는 않나? 계획대로 행동하고 있는 건가?”“아직 확실한 소식은 접하지 못했지만 소인은 모성을 믿습니다. 계획한대로 잘 하고 있을 겁니다.”“그래. 나도 그자를 믿네.”염구진의 대답에 사여묵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성은 연주 좌부승이었고 연왕이 반역을 도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여묵은 바로 사람을 시켜 모성에게 접근했다.총명하고 무술 실력까지 겸비한 모성은 선황제 때부터 이름을 널리 알렸지만 성격이 너무 오만했기에 아직까지도 직급은 그저 부승이었다. 평소에 시를 즐겨 쓰는 모성은 시문의 대부분 내용이 세상을 향한 불만 표시였기에 연왕은 모성이 조정에 불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여 그를 곁에 두기로 했다.그렇게 모성은 오랜 세월동안 외로운 싸움을 했다. 그 중 더 높은 관직으로 승진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모성은 연왕의 반역죄 증좌를 수집하기 위해 모든 걸 포기하고 연주에 남았다.하지만 연왕은 섣불리 움직이지도 않고 핵심 병력의 상황도 모성에게 전혀 알려주지 않았으며 심지어 중요한 일을 논의할 때에는 모성에게 나가 있으라고 하기도 했다.때문에 모성은 하상지의 잡일을 처리해주면서 간간이 상황을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확실한 증좌가 없는 탓에 모성은 지금까지도 연왕
”소인도 오늘 폐하께 감히 많은 얘기를 드리지는 못했습니다. 혹시 폐하께서 오해하실까 봐 왕야를 찾아가지도 못했지요.”이덕회가 대답하자 목 승상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잘하셨습니다. 병부는 최대한 사적으로 북명왕을 접촉하지 않아야 합니다. 아니면 혹시 병사 감찰대로 폐하께 한 사람을 추천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혹시 왕표 그자가 남강 전쟁 원수를 맡기엔 걱정된다면 방시원 장군을 황제께 추천해보십시오.”“하지만 방시원 장군님은 주군 총병이라 남강 전쟁에 보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방 장군을 보낼 바에는 차라리 방천허와 제린에게 전사를 맡기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내란이 터지고 있는 지금 진성 주군에 대장이 없어서는 안 되는 일이지요.”이덕회의 말에 목 승상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대꾸했다.“도리는 그게 맞지요. 제 말은 폐하께 왕야 한 사람만 추천할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몇 명 더 추천하라는 뜻입니다.”이덕회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술을 살짝 오므렸다.“소인이 솔직한 성격이라 말을 돌려서 할 줄 모르니 그냥 말하겠습니다. 소인이 보기엔 왕야가 가장 적합한 원수인데 어차피 역적은 아직 나라에 위협이 될만한 존재는 아니니까 나중에 목종욱한테 처리하라고 하면 되지요.”“그 어떤 반역자도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일은 그리 단순한 일이 아닙니다. 알다시피 반역자들은 사국 사람들과도 엮여 있습니다. 사국과 손을 잡았다는 건 그만큼 충분한 준비를 해왔다는 뜻이지요. 절대 쉬운 상대가 아닙니다.”목 상승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이덕회가 대답했다.“승상 말씀도 일리가 있는 것 같네요. 그럼 소인 북명왕과 함께 내일 다시 궁으로 가서 폐하를 만나 뵙고 내란에 대해서도 의논해보겠습니다.”“그렇게 합시다!”목 승상이 고개를 끄덕였다.한편, 사청엽은 여전히 옥에 갇혀 있었다. 황제가 아직 명령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사청엽은 자신이 사형을 면치 못할 거라고 확신했다.이날 저녁, 혼인을 앞둔 방시원이 황실을 찾아왔다. 치석
한편, 목종욱은 최선을 다해 산적들을 잡아들이고 있었다. 싹을 다 자르진 못했지만 크게 겁을 먹은 산적들이 산 속에 꽁꽁 숨어서 다시는 문제를 일으키진 않을 것이다. 숙청제도 제린이 보낸 소식을 접했고, 사국 대군들이 변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제린은 사국 대군이 25만 명 정도 된다고 보고를 했고 여전히 빅토르가 대군을 이끌고 있다고 했다.숙청제는 바로 병부 대신들을 불러 남강에서 사국의 25만 대군을 상대로 승산이 있는지 의견을 물었다.이덕회는 황제의 질문 자체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이길 수 있는지 없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최대한 신속하게 전쟁을 이겨야 한다는 것이 관건이다.“폐하, 남강은 오랜 시간의 전사와 왜란으로 지칠 대로 지친 상태입니다. 남강 땅은 아직 전쟁에 버틸 수 있지만 백성들은 더 이상 전쟁을 견딜 힘이 없습니다. 만약 정말 전쟁이 난다면 확실한 한 방으로 빠르게 적을 물리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메뚜기 떼처럼 매년 한 번씩 이렇게 날뛸 것입니다. 이는 저희 남강 지역의 치안에 치명적인 상해를 입힐 수밖에 없습니다.”“그럼 자네 생각엔 송씨 가문 병사들과 북명군이 적들을 신속하게 물리치지 못할 것 같은가?”숙청제의 물음에 이덕회가 바로 대답했다.“이제 송씨 가문 군대아 북명군을 나눌 것도 없습니다. 전부 다 남강 병사들입니다.”이덕회는 숙청제가 남강의 병사들을 모은 게 송씨 가문과 북명왕이라고 생각할까 봐 일부러 강조했지만 숙청제의 생각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만약 남강 전쟁이 오래 전에 끝난 전쟁이고 사여묵이 병권을 상납한지 꽤 오래 됐다면 숙청제는 이런 걱정을 전혀 하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왕표가 군심을 얻지 못하고 있는 지금, 남강에 있는 병사들이 송씨 가문 군대이든 북명군이든 결국 전부 사여묵의 명령에 따르고 있다.사여묵을 남강에 보낸다는 건 병권을 다시 사여묵에게 쥐여주어야 한다는 뜻이다.현재 연왕도 역모를 일으켰고 황제 자리를 대놓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
숙청제가 사여묵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그건 사국이 네 위엄에 겁을 먹은 것이야. 빅토르가 너를 많이 두려워하는 것 같아.”사여묵은 숙청제의 말이 진심이 아니라 살짝 비꼬고 있다는 것을 잘 알기에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황제께서 소인을 너무 높이 평가하고 계신 겁니다. 소인은 그렇게 대단한 능력도 없고 빅토르도 소인에게 겁을 먹어서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전쟁 때문에 너무 많은 걸 잃었기 때문입니다.”“네 말대로 전쟁으로 많은 걸 잃었다면 짧은 시간 내에는 원기를 쉽게 회복할 수 없지 않느냐?”“소인이 감히 추측을 해보자면 사국은 원기를 회복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절대 저희 남강이 순조롭게 발전하는 모습을 보고 있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가끔씩 비열한 수법으로 훼방을 놓아야 정상인데 지금까지 그런 적이 한 번도 없는 게 너무 수상합니다.”숙청제가 사여묵을 빤히 쳐다보다가 물었다.“그럼 네 말은 누군가가 사국과 손잡고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냐?”“그럴 가능성도 있지 않겠습니까?”사여묵은 전에도 숙청제와 이 문제를 분석하고 논의한 적이 있었으며 그때 당시 숙청제도 사여묵의 의심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주관적으로 보았을 때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숙청제는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사여묵은 그런 황제를 힐끗 쳐다보고는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지만 꾹 참았다.사실 숙청제도 왕표가 무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사국을 상대하려면 사여묵을 다시 남강 전장으로 내보내는 게 가장 적합한 선택이라고 생각하고 있다.하지만 숙청제는 쉽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그때 당시 겨우 송석석을 이용하여 사여묵에게서 병권을 빼앗았는데 이렇게 쉽게 다시 내놓을 수가 없었으며 최후의 순간이 오지 않는 이상, 숙청제는 절대 사여묵을 전장에 내보낼 생각이 없었다.때문에 사여묵이 며칠동안 어서방에 남아 숙청제와 이런저런 상의를 해봤지만 숙청제는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어서방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고 아무도 먼저
그날 밤, 연왕은 뜬 눈으로 밤을 지새게 되었다.솔직히 지금 상황은 연왕의 오랜 계획과 차질이 조금 있었다. 지방 지역에서 역모를 일으키고 심지어 진성에 준비된 게 아무것도 없이 무작정 진성까지 쳐들어간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연왕과 무상의 계획은 따로 있었다.일단 병사들을 일정한 수량까지 늘이고 아무도 모르게 서서히 진성 일대로 전이하여 병사들을 안치한 뒤 적절한 시기를 기다릴 생각이었다.그땐 사온이 진성에서 계략을 짜고 있을 것이고 많은 세가들의 지지도 받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해 예전에 고부진의 딸들을 세가에 시집 보냈기에 세가들은 지지할 수밖에 없다.그리고 나서 적절한 시기만 잘 고르면 반드시 성공한다. 진성에 전란이 일어나고 산적과 유랑민들이 판을 칠 때 연왕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성내로 쳐들어가 바로 궁 전체를 포위할 생각이었다.하지만 지금, 갑자기 대석촌에 일이 터져 버려 사청엽이 체포된 탓에 연왕은 급하게 병사들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승산이 너무 낮았기에 연왕도 망설였던 것이며 지방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난다고 해서 진성까지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물론 백성들은 반란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고 한동안 수군거리겠지만 대부분 백성들은 갑작스럽게 일어난 반란과 격문을 그저 우습게 생각할 것이다.그뿐만 아니라 사국에서 남강을 공격한다고 해도 처음 있는 일이 아니고 사국에서 오래 전부터 호시탐탐 야망을 보였기에 황제가 나랏일에 관심이 없어서 일어난 일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그리고 아직 사국과의 전쟁이 일어나지도 않았고 전패했다는 소식도 없기에 상국 무장이 무능하다는 비판을 하기에도 애매했다.나라가 평안하고 백성들이 태평한 상황에서 연주도 꽤 부유한 땅이었기에 괜히 문제를 만들고 싶어도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때문에 모두 그저 연왕이 언제 잡히는지, 언제 역모죄로 목이 잘릴지를 보고 싶어할 뿐이었다. 그리고 상국에는 사국 사람들을 물리친 북명왕이 있기에 다들 역적 따위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으며 되레 연왕이 왜 역모를 일으키
무상이 아니라는 말에 연왕은 회왕에게로 고개를 돌렸고 화들짝 놀란 회왕이 변명하려던 그때, 연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회왕일 리는 없어.”회왕은 의심조차 하지 않는 연왕의 태도에 기분이 조금 묘했다.한편, 연왕은 당연히 회왕을 의심할 리가 없었다. 회왕은 무일푼으로 연주로 왔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진성에서도 아무런 성과도 따내지 못했으며 사온의 비교 대상이 될 자격조차 없었다.회왕이 연주에 온 뒤로 연주 백성들은 회왕을 만나면 겉으로는 왕야라고 부르며 인사를 올리긴 하지만 뒤에서는 다들 그를 만만하게 여기고 아니꼽게 생각했다.때문에 회왕은 절대 마총우를 명령하지 못한다.조금씩 차분해진 연왕은 다시 자리에 앉더니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말했다.“다들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마총우 그자가 귀순한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가 나를 무너트리고 싶어서 일부러 꾸민 짓인가?”여전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무상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마총우가 귀순한 건 절대 아닐 것입니다. 왕야께서 격문을 보낸 지 며칠밖에 되지 않았고 더군다나 저희 병력은 대여섯 군데에 분산되어 있습니다. 전의하는 데만 6개월 넘게 걸렸는데 조정에서 절대 쉽게 조사해낼 수 없을 겁니다. 그런데 조정에서 마총우 그자를 찾아서 귀순 시킨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날 일부러 무너트리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는 거네. 그럼 그자가 누구일 것 같은가?”연왕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연왕이 몇 년 동안 끌어 모은 사람들 중에 황제의 친인척과 세도가들도 있지만 친왕은 연왕과 회와 두 사람밖에 없었다.연왕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상대가 없었다. 연왕의 부하들 중에서 황제의 친인척들이 제일 무능하고 멍청했으며 파장을 일으킬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리고 종합적으로 생각해보았을 때 가장 의심되는 상대는 여전히 무상이었다.하지만 역모의 마음을 품은 연왕이 무상을 끌어들이고 나서 지금까지 무상은 강한 충성심을 보였고 심지어 평소에 연왕에게 쓸만한 제안도 가장 많이 하고 계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