량소의 재판이 시작되었고, 먼저 영안군주와의 의절을 선고했다. 의절은 은혜를 베푼 승은백부의 체면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결정이었다.그다음은 그가 본처를 학대하여 유산을 초래한 혐의였다. 특히, 낙태된 아이는 황실 군주의 신분을 지녔으며, 황제의 명령도 있었기 때문에 처벌이 더욱 무거워질 수밖에 없었다. 대리사 소경은 량소에게 10년간 흉주로 유배를 보내어 흉주 관아의 관리하에 농지를 개간하며 고역을 치르도록 판결했다.재판장에서는 즉시 판결이 내려졌고, 다음 날부터 바로 형이 집행될 예정이었다. 그러자 승은백부도 더 이상 내려진 판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는 연왕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지만, 연왕은 태후 앞에서 그들의 가문을 위해 청원을 넣었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연왕은 이번에 량소만 처벌하고 그들의 작위는 박탈하지 않겠다고까지 말했다. 더 소란을 피우면 사태를 수습할 수 없다고 경고를 한 것이다.량소가 유배형을 받았다는 사실은 태부인에게 알리지 않았다. 태부인은 단지 그가 감옥에서 고생하지 않는다고만 알고 있었고, 그를 보지 못하는 것에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그 아이는 태부인의 마음속에서 가장 사랑받으며 자란 아이였기 때문이았다.량소가 떠나는 날이 오자 승은백부는 그를 배웅하러 나갔다. 하인이 실수로 말을 흘렸고, 그 소식을 들은 태부인은 그 자리에서 기절해버렸다. 이미 이틀간 단식을 했던 터라 몸이 약해져 있었고, 연로한 나이에다 분노와 슬픔이 겹쳐 결국 반신불수가 되어 입도 제대로 놀리지 못하고 구강마비까지 오고 말았다.한편, 아들인 량소를 배웅하러 간 승은백부부는 아직 이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성 밖에서 량소를 호송하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아들이 족쇄를 차고 있는 모습을 보자, 과거 그의 의기양양한 모습이 떠올랐다. 하지만 지금은 초췌하고 겁에 질린 모습 뿐, 예전의 모습은 아예 찾아볼 수 없었다.승은백부는 그런 그에게 급히 다가가 뇌물을 건네며 잠시 이야기할 기회를 얻었다.량소는 결국 눈물을 펑펑 흘리며 애
량소는 세상을 다 잃은 표정을 지으며 뒤돌아 그의 아버지를 바라보며 결국 말을 꺼냈다. "아버지, 연유를 만날 기회가 있다면, 저에게 한 번이라도 진심이었던 적이 있었는지 물어봐 주세요."승은백부는 이 말을 듣고 너무 놀라 그 자리에서 눈앞이 깜깜해지며 목이 무언가에 막힌 듯 숨이 턱 막히고 말았다. 그는 몸이 비틀거리더니 결국 주저앉고 말았다. 승은백부인은 울음을 터뜨리며 통곡했고, 주변에 있던 많은 백성들이 이를 보고 몰려들었다.원래 승은백부 집안과 회왕부 집안의 일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이제는 수도의 백성들 입방아에 오르락 내리락 거리는 상황이 되었다. 두 사람 중 한 명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었고, 한 명은 눈물을 흘리며 크게 울었지만, 백성들은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양반가의 슬픔과 기쁨을 백성들이 공감할 리 없었으니, 그저 재밌는 이야깃거리 하나 더 생긴 것에 불과했다.승은백부 부부가 집으로 돌아갔을 때 태부인은 이미 정신을 잃고 반신불수가 되어버린 후였다.그들은 모든 하인들에게 태부인 앞에서 입조심하라고 거듭 경고를 했지만, 태부인이 량소 때문에 병이 악화되었다는 소식은 결국 퍼지고 말았다. 이로 인해 량소는 불효자의 명성을 얻게 되었고, 설령 그가 훗날 돌아오더라도 무용지물이 될 뿐이었다.태부인은 반신불수가 된 후 제대로 말을 할 수 없었지만, 하루 종일 량소만을 생각하며 지냈다. 꿈속에서도 몇 번이고 량소가 고통받는 모습을 보았고, 유배 가는 길에서 죽는 꿈을 꾸었다. 그렇게 마음을 졸이며 심신이 지친 그녀는 며칠 지나지 않아 결국 세상을 떠났다.이렇게 태부인이 죽고 난 후, 승은백부 집안은 공주를 제대로 대접하지 못했다는 죄와 불효자의 오명을 짊어지게 되었다. 가문 내 여러 고위직에 있던 아들들 또한 연이어 탄핵을 당했고, 황제는 분노하여 이들을 모두 강등시켜버렸다.비록 승은백부의 작위는 박탈되지 않았지만, 이 일로 인해 그의 가문은 완전히 몰락해 버리고 말았다.사여묵은 회의를 마친 후 승은백부와 마주친 적이 있었다
회왕은 고개를 숙였다. 분노한 기색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팔걸이에 놓인 그의 손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누님 말씀이 옳습니다,""샤린이는 이제 신경 쓰지 마세요. 그 아이는 결국 송석석과 함께 있기를 택하지 않았습니까? 왕부로 돌아오는 걸 원치 않는 듯 보였어요." 장공주가 말했다.회왕은 말이 없었지만, 그의 눈가에는 핏줄이 잔뜩 서려 있었다. 차가워진 분위기를 느낀 연왕이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됐습니다, 승은백부 가문의 일은 이미 끝났지 않았습니까? 이 나라는 더 이상 불효한 관리는 절대 중용하지 않으니, 그들의 좋은 시절도 이제는 다 끝났습니다. 제가 이번에 찾아온 이유는 이방의 일 때문입니다. 그쪽으로 암살자를 보냈는데, 송석석이 그를 도와주었더군요. 그 일로 인해 제 부하들을 잃었습니다.""허나.. 셋째 형님, 지금 이방을 죽이는 건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황제가 장군부에 경위를 보내 지키고 있거든요. 겉으로는 평복을 입었지만, 확인해 보니 확실하게 경위였습니다."회왕도 가만히 듣고 있다가 덧붙였다. "게다가 이방은 매우 교활한 자예요. 장군부에서 한 발짝도 나서지 않더군요.""장군부 사람을 매수해서 독살하는 건 어떻소?" 연왕이 물었다."이미 시도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그녀 곁에는 하인이 한 명뿐이고, 그 외의 사람은 절대 쓰지 않더군요. 게다가 방 안에 들이는 음식은 모두 은침으로 독이 들었는지 확인한다고 들었습니다. 방 안으로는 사람을 함부로 들이지 않더군요."연왕은 웃는 얼굴로 회왕을 바라보며 말했다. "허나 이렇게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암살도 실패하고, 독살도 실패하다니… 보아 하니 형님께서는 이방을 처리할 마음이 없는 것 같군요?"비록 웃으며 말했지만, 그 안에는 실망감이 섞여 있었다. 회왕은 그가 만족하지 않다는 걸 잘 알았다. "다시 방법을 생각해 보겠네.""예, 알겠습니다. 허나 서둘러야 할 겁니다. 서경 황제는 아마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고, 이미 서경 태자가 황제의 곁을 지키고 있다 하더군
그러자 연왕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허나.. 어쨌든 이방이 죽는 것이 가장 좋고, 그 죄목은 소 씨 가문이 지어야 합니다. 이방은 생명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며, 심지어는 교활하기까지 해요. 게다가 많은 사람들의 원한을 샀으니 그녀의 말을 믿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소 씨 가문은 성릉관을 수년 동안 지켰지만, 평민을 죽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만약 누군가가 이를 이용해 그를 구하려 한다면, 오히려 이 사건에서 쉽게 빠져나가고 말 거예요.”회왕이 다시 반문했다. “허나 우리의 목표는 소 씨 가문을 멸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는 단지 성릉관의 장수를 교체하고 소 씨 가문을 밀어내려는 것 뿐입니다.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우리쪽 사람을 성릉관에 배치해야 해요. 지금 왕표가 아직 우리 편이 아니기 때문에우리는 하루라도 빨리 성릉관을 차지해야 해요. 두 곳의 중병을 통제하거나 그들을 전투에 휘말리게 만든다면, 문제는 원만하게 해결될 거예요. 그럼 그때 가서 우리는 원래 계획대로 농민 봉기를 일으켜 황제가 하늘의 분노를 샀다고 소문을 퍼뜨리는 거죠. 그때가 바로 우리가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최고의 시기가 될 거예요.”그가 말을 마치고 차를 들 때, 장공주의 얼굴을 슬쩍 살펴보앗는데 그녀의 얼굴에 순간 분노가 스쳐 지나갔다.역시 장공주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안 됩니다. 소 씨 가문 사람들은 반드시 죽어야 해요.”연왕은 답답한듯 이내 이마를 찌푸렸다. “공주, 감정적으로 행동하지 마세요. 아우가 말한 대로, 우리의 목표는 소 씨 가문이 성릉관에서 철수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죽을지 말지는 우리가 선택할 문제가 아니닙니다!”회왕은 장공주가 반박할 것이라고 생각 했지만, 연왕은 달랐다. 그는 장공주가 자신의 말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게다가 연왕이 말한 대로, 자신이 증오하는 사람들이 하나씩 하나씩 비참하게 죽는 것을 보는 것보다 더 통쾌한 것은 없으니 말이다.연왕은 그녀가 더는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자 계속 말을 이어
만종문, 심청화는 손에 서신을 들고 사숙을 찾아갔다. "사숙, 사여묵 사제가 서신을 보내왔는데 저의 도움이 필요하다며 진성으로 한 번 오라 하였습니다." 사숙은 눈을 감은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아직 화가 풀리지 않았기에 지금 누구도 상종하고 싶지 않았다. 자유롭게 출입하던 자들 또한 발이 묶였고 밖으로 나간 자들 중 돌아오지 않은 이들도 감히 다시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남강 떠나기 전 그는 북산에 집을 짓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었다. 그 땅에 오층 높이의 채성루를 지을 생각이었다. 높은 곳에 올라 달을 볼 수 있고 무공을 연마할 수도 있었다. 특히 경공을 수련하는 데에 가장 최적화된 장소였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내년 봄에 공사를 시작하려고 계획했는데 그들은 이제서야 서둘러 집을 짓고 있는 것이었다.지세가 높고, 맞은편엔 폭포가 있으니 하루라도 빨리 그 풍경을 누리려는 속셈 이었다.하지만 하나같이 별로 대단한 성과는 이루지도 않았으면서, 누리는 것에는 제일 앞장서니 화 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너무 꼴불견이였다. 믿음직스럽지 못한 사형, 임병일은 이미 폐관을 선언하고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있다.숨을 테면 숨어보라지. 꼭 기억해 둘 거라고 다짐한 그였다. 내년까지 채성루가 완공되지 않으면 절대 이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생각이였다. 심청화는 사숙이 말이 없자, 조심스레 다시 일깨웠다."사여묵 사제가 급하게 서신을 보내온 것이니, 분명 중요한 일이 있을 것이옵니다. 제가 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끝나면 바로 돌아오겠습니다." 그에게 별로 대꾸하고 싶지 않았지만 사여묵의 일이라고 하자 사숙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의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심청화는 그 작은 목소리가 사숙의 최대한의 양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사여묵의 일이 아니었더라면 분명 '꺼져라' 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는 급히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지금 바로 하산하겠사옵니다. 만약 일이 발생한다면 사숙께 다시 서신
염 선생도 그 어려움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잠시 생각에 잠긴 후 다시 입을 열었다."이렇게 하지요. 제가 대략적인 세부 사항은 다시 구술하겠습니다." 그러자 심청화는 그를 바라보았다."그녀의 모습이 기억나지 않는 것이로군요, 그렇지요?" 염 선생의 표정은 그닥 좋지 않았다."저는 한때 그녀의 모습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녀의 모습을 세세히 떠올리려 하니 웃는 얼굴과 저를 향해 '오라버니'라 부르며 달려오던 모습만 기억나네요. 세세한 모습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아요." "그렇다면 선생도 그림을 그릴 수 없겠소." 심정화가 말을 이었다."자책할 필요는 없소. 십여 년이 지났으니 잊어버리는 것이 당연한 일이오. 우리 뇌는 고통을 피하려 하기에 그 기억이 고통스러웠다면 그녀를 떠올리는 것 역시 힘든 것이어서 자연히 잊혀지기 마련이오." 그는 염 선생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여주었다."만약 어린 시절의 그녀가 다시 선생 앞에 선다면 선생은 틀림없이 단번에 알아보실 것이오. 다만 사람은 커가는 것이고 여자는 특히 많이 변하는 법이오. 그러니 걱정할 필요 없소. 기억나는 만큼만 말해 주면 되오. 특히 얼굴형, 뼈의 구조가 가장 중요하오. 얼굴의 특징도 마찬가지요. 이를테면 점이나 태어날 때부터 있던 모반이 있는지, 눈썹은 어떤 모양이었는지, 체형도 말씀해 주시오." 염 선생은 왕과 왕비를 바라보았다."두 분께서는 일을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휴식을 취하실 자들도 하시던 일을 계속하거라." 사여묵은 즉시 송석석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가세, 우리는 만금산으로 가자고." 송석석은 흐린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비가 올 것 같사옵니다." 사여묵은 속이 상했다. 비가 오면 만금산에서 일출을 볼 수 없을게 분명했다. 이것은 그가 오래전부터 세웠던 계획인데 여직 이뤄지지 않고 있으니 화가 날 뿐이였다."란이를 보러 가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러자 송석석이 제안했다.
오늘 여러 사람들이 방문에 란이는 급히 옷을 갈아입고 손님을 맞이했다. 그녀의 얼굴을 본 혜태비는 이 아이가 이제 아무렇지도 않구나 싶었다. 얼굴에 드디어 혈색이 돌았기 때문이다.인사를 올리고 자리에 앉은 후, 혜태비가 물으니, 그녀는 방금 전 석소 사저와 함께 무예를 연습하고 있었다고 대답했다. 란이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너무 지루해서 석소 사저께 무술을 배워달라고 졸랐지만, 대단한 것 못 되옵니다.”“무술이라는 건 본래 대단한 건 못 되는 것이다. 너만 그런 게 아니니 신경 쓰지 말거라. 네가 즐거우면 그것으로 그만인 것이다.”너무 솔직한 혜태비의 말에 고 씨 유모는 연신 기침을 크게 했다.여기 있는 사람 대부분이 무술인이 였으니 참으로 상황이 난처해졌다.그러자 혜태비가 고 씨 유모를 흘기며 쏘아붙였다.“기침할 필요 없다. 내가 틀린 말 한 것도 아니지 않느냐? 모든 것이 대단해서만 되는 것이 아니니라. 무술은 실용적이면 된다. 건강도 챙기고 스스로를 지킬 수 있으면 충분하단다. 그러니 란이야, 난 네가 무술을 익히는 것을 지지하느니라.”란이는 민망한 듯 수줍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감사드리옵니다. 실상 제가 제대로 연습한 것도 아니옵니다. 그저 허우적거리며 땀을 조금 흘렸을 뿐인데, 그저 그것만으로도 개운해졌사옵니다." "맞다. 땀을 흘리면 기분이 훨씬 나아지지." 혜태비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겉으로는 경험이 많은 사람처럼 보였지만, 사실 땀 흘리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다. 몸이 끈적거리고 옷에서 냄새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사여묵은 석소 사저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괴로워도 무예를 연습하며 땀을 흘리면 한결 나아지기에 아주 좋은 방법이였다. 그 역시 이전에 친히 느껴본 적 있었다."하지만 몸이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으니 온전히 추스르고 나서 몸을 움직여야 한다. 지금은 너무 오래 연습하지 말거라." 송석석이 다정하게 일깨워주자 석소 사저가 말했다.“제대로 훈련한 것도 아니고 그저 그녀의 상태에 맞
란이의 처소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반나절이 지났다. 석소 사저는 군주께서 휴식해야 하고 비도 그쳤으니 이제 각자 집으로 돌아갈 것을 권했다.제수찬은 눈에 띄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한녕의 손을 잡고 성큼성큼 앞서 걸어갔다. 걷다가 문득 실례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급히 멈춰 서며 길 한켠으로 물러서며 장모님과 매형인 사여묵에게 길을 양보하였다. 혜태비는 사위를 보며 속으로 탄식하였다. ‘결혼할 때는 거위같이 하얗고 깨끗하더니 어느새 검게 그을렸구나. 한녕도 함께 까무잡잡한 것이 촌부가 따로 없구나. 누가 보면 한녕이 농부에게 시집간 줄 알겠어. 그래도 한녕이 좋아하니 그래도 다행이구나. 제씨 가문의 자손이니 봐줘야겠다’송석석은 뒤에서 손을 잡고 걷는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며 참 보기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들이 멈추어 서고 사여묵과 그녀가 앞서 걷게 되었다. 그제야 송석석은 자신도 사여묵과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데, 무언가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제수찬과 한녕은 아주 자연스럽게 방방 뛰다가 몸을 이리저리 비틀면서 살갑게 걷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와 사여묵을 유심히 관찰해보니 맞잡은 두 손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고 축 처진 상태 그대로였다. 마치 두 개의 나무토막이 나란히 붙어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녀는 속으로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사여묵은 정말로 낭만이라고는 없구나.' 왕부로 돌아와 혜태비를 방으로 모신 뒤, 두 사람은 서재로 가서 그들이 그린 그림을 보러 갔다. 초상은 이미 그려져 있었고 옆에 놓여 있었다. 염 선생은 그 옆에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초상만 바라보고 있었다.사여묵과 송석석도 다가가 보니 거기에는 동그란 얼굴에 양 갈래를 한 소녀는 커다란 눈, 작고 오똑한 콧날, 도톰한 입술과 그 입술 위에 작은 점이 하나 있었다.그 옆의 또 다른 초상에는 부부가 그려져 있었고 염 선생과 꼭 닮은 것이 아마도 부모님인 것 같았다.심청화는 여전히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성인 여인의 초상을
이날 저녁, 송석석은 약왕당에서 받아온 약을 사여묵에게 건넸고 약의 위험성까지 자세하게 얘기했다.사여묵은 망설이는 듯한 송석석의 모습에 환하게 웃으며 위로했다.“이 정도 상해는 충분히 견딜 수 있소. 그리고 원기를 회복할 수 있는 약들도 이렇게 잔뜩 가지고 오지 않았소? 나중에 어의에게 진단만 받으면 바로 단설환을 먹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오. 남강으로 가는 길에도 단 신의의 당부를 잊지 않고 매일 약을 꼬박꼬박 챙겨 먹겠소.”“그래도 결국 독약 아닙니까? 그러지 말고 저희 다른 방법을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요?”송석석이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사여묵이 담담하게 대답했다.“내가 보기엔 지금으로써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소. 단 신의가 말을 무섭게 해서 그렇지 그 정도로 심각한 상해를 입히지 못할 거요. 그렇게 위험한 약이었다면 애당초 꺼내지도 않았겠지.”“그럼 일단 염 선생과 상의라도 해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그럴 필요 없소!”사여묵이 약을 내려놓은 뒤, 커다란 손으로 송석석의 허리를 감싸며 말을 이어갔다.“이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유리하오. 나중에 내가 대리사에서 쓰러지면 진이가 내 옥패를 들고 어의를 찾아갈 것이고 황실로 달려온 어의가 우왕좌왕하는 염 선생을 보아야 의심을 하지 않을 것이오.”송석석은 사여묵의 가슴팍에 기대어 불안한 마음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전 장군님이 너무 걱정됩니다. 몸이 회복되기도 전에 남강으로 출발해야 하는데 가는 내내 제대로 쉴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남강에 가서도 몸 상태가 회복되지 않으면 전장에 어떻게 나가시려고 그러십니까?”송석석의 걱정에 기분이 좋아진 사여묵이 다정하게 웃으며 그녀를 위로했다.“난 왕표를 무조건 대체하겠다는 게 아니오. 일단 제린을 찾아 병사들 속에 숨어 있다가 왕표가 제대로 군을 이끈다면 난 남강 구경이나 하다 올 것이오.”사여묵의 위로에도 송석석은 시름이 놓이지 않았다. 왕표가 군을 제대로 이끌지 못할 거라는 확신 때문에 두 사람이 지금 이런 모험을 하고 있는
화가 난 단 신의는 송석석의 말에 설득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버럭 언성을 높였다.“난 멍청한 사람을 돕지 않소. 당신들은 그런 천하의 멍청이가 따로 없소!”“세상에 이런 멍청이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번 한번만 더 모험하고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약속할게요.”송석석이 환하게 웃으며 말하자 단 신의가 미간을 찌푸렸다.“모험을 하고 싶어도 이제 못할 수도 있소. 돌아오면 황제께서 그 죄를 어떻게 물으실 줄 알고 이러는 것이오. 그러다가 머리가 잘릴 수도 있소.”“정말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고 해도 저에게 방법이 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단 신의는 고집을 부리는 송석석을 보며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말한 것처럼 백성들에게는 두 사람과 같은 멍청이들이 필요하긴 했지만, 단 신의는 그 멍청이가 송석석과 사여묵은 아니길 바랐다.결국 단 신의는 먼지가 뽀얗게 쌓인 작은 상자를 꺼내 먼지를 툭툭 털어내곤 조심스럽게 열었다.상자 안에는 땅콩 만한 검은 알약 하나가 있었다.“똑똑히 기억하시게. 이건 독이오. 이 약을 먹고 나면 맥박이 이상해지고 갑작스러운 발작을 일으키네. 그리고 짧은 시간내에 심장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지. 이건 그저 보여지는 현상이 아니라 실제로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네. 이 약을 먹고 3일 정도 버틸 수 있는데 3일 뒤에는 반드시 단설환을 복용해야 하오. 그러지 않으면 심장에 영구적인 손상을 입을 수도 있소.”단 신의의 말에 송석석이 흠칫 놀란 표정이었다.“정말로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뜻입니까?”“그럼 당연하지. 이건 독이오.”“그럼 단설환을 먹고 나면 바로 정상적인 몸 상태로 돌아올 수 있는 겁니까?”“그렇지 않소. 며칠 동안 안정을 취해야 하네. 눈속임을 하고 나서 바로 출발하면 절대 안 되오.”위험할 수도 있다는 단 신의의 말에 송석석은 단 신의가 건네는 약을 받지 않았다.“그럼 혹시 다른 약은 없는지요? 폐하를 속이고 나서 장군님은 바로 출발하려고 할 겁니다. 실제로 중독되
사여묵은 온몸에 힘이 쭉 빠진 채 침대에 앉아 등을 벽에 기대고 있었다.남강에서 돌아와 병권을 황제께 바친 뒤에도 황제는 여전히 사여묵을 의심하고 경계했지만 사여묵은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황제가 의심과 경계를 조금은 풀 수 있도록 사여묵은 지금까지 최대한 언행에 조심했으며 서경과의 담판이 끝나고 나서도 황제 앞에서 일부러 약한 모습을 보였다.나중에 혹시라도 전쟁이 일어났을 때 더 이상 황제의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조심하고 또 조심했는데 황제의 태도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사국이 이번에 다시 쳐들어온 건 사국과 손잡은 내국 역적이 남강에 이미 함정을 파 놓았다는 사실을 폐하께서도 알고 계신 것이오. 그래서 사국은 저렇게 겁도 없이 남강을 계속 공격하고 있는 것이지. 하지만 폐하는 내가 폐하께 대한 위협이 사국 병사들을 물리치는 것보다 더 중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소.”사여묵이 씁쓸하게 웃으며 마지막 남은 술을 벌컥벌컥 마시자, 송석석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황제께서 이런 결정을 하신 게 처음은 아니잖아요.”사여묵은 송석석을 품에 꼭 끌어안은 채 그녀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고 조금 전 혼자 술을 마시고 있을 때부터 계속 이렇게 숨막히는 인고를 견뎌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다.“난 무조건 그런 비극이 다시 일어나게 하지 않을 것이오.”송석석을 놓아준 사여묵은 강경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말을 보탰다.“난 당신처럼 용감하게 변할 것이오.”예전에 송석석이 입궁하여 황제께 상황을 보고했을 때 황제는 그녀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그때 당시 송석석은 마냥 기다리거나 손을 놓은 것이 아니라 홀로 남강까지 찾아갔다.송석석은 그때 자신의 생사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한편, 사여묵의 말을 들은 송석석은 바로 뜻을 알아챘고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전 장군님을 응원합니다. 아무 걱정도 하지 말고 다녀오세요. 폐하께서 아무것도 묻지 않으신다면 전 평소와 같이 진성을 지키고 있을 것이고 만약 폐하께서 죄를 물으신다면 전 북명
사여묵이 방시원을 잘 달래어 돌려보낸 뒤, 염구진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다들 감정이 격해지는 것도 당연합니다. 남강 땅을 되찾기 위해 그들은 청춘을 다 바쳤는데 이제 또 전쟁이 난다고 하니 마음이 안 좋을 수밖에 없지요.”말을 하던 염구진은 고개를 돌려 사여묵을 힐끔 쳐다보았으며 방시원의 마음을 가장 잘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은 사여묵일 것이라고 생각했다.한편, 한참동안 말이 없던 사여묵이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잘 지켜보고 있다가 무슨 소식이 들리면 바로 나에게 보고하게.”“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사여묵은 다시 연주에 관한 일에 대해 물었다.“연주에서 성문을 봉쇄했다고 들었는데 소식은 끊기지 않은 것이오? 혹시 그쪽에서 움직임이 보이지는 않나? 계획대로 행동하고 있는 건가?”“아직 확실한 소식은 접하지 못했지만 소인은 모성을 믿습니다. 계획한대로 잘 하고 있을 겁니다.”“그래. 나도 그자를 믿네.”염구진의 대답에 사여묵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성은 연주 좌부승이었고 연왕이 반역을 도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여묵은 바로 사람을 시켜 모성에게 접근했다.총명하고 무술 실력까지 겸비한 모성은 선황제 때부터 이름을 널리 알렸지만 성격이 너무 오만했기에 아직까지도 직급은 그저 부승이었다. 평소에 시를 즐겨 쓰는 모성은 시문의 대부분 내용이 세상을 향한 불만 표시였기에 연왕은 모성이 조정에 불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여 그를 곁에 두기로 했다.그렇게 모성은 오랜 세월동안 외로운 싸움을 했다. 그 중 더 높은 관직으로 승진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모성은 연왕의 반역죄 증좌를 수집하기 위해 모든 걸 포기하고 연주에 남았다.하지만 연왕은 섣불리 움직이지도 않고 핵심 병력의 상황도 모성에게 전혀 알려주지 않았으며 심지어 중요한 일을 논의할 때에는 모성에게 나가 있으라고 하기도 했다.때문에 모성은 하상지의 잡일을 처리해주면서 간간이 상황을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확실한 증좌가 없는 탓에 모성은 지금까지도 연왕
”소인도 오늘 폐하께 감히 많은 얘기를 드리지는 못했습니다. 혹시 폐하께서 오해하실까 봐 왕야를 찾아가지도 못했지요.”이덕회가 대답하자 목 승상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잘하셨습니다. 병부는 최대한 사적으로 북명왕을 접촉하지 않아야 합니다. 아니면 혹시 병사 감찰대로 폐하께 한 사람을 추천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혹시 왕표 그자가 남강 전쟁 원수를 맡기엔 걱정된다면 방시원 장군을 황제께 추천해보십시오.”“하지만 방시원 장군님은 주군 총병이라 남강 전쟁에 보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방 장군을 보낼 바에는 차라리 방천허와 제린에게 전사를 맡기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내란이 터지고 있는 지금 진성 주군에 대장이 없어서는 안 되는 일이지요.”이덕회의 말에 목 승상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대꾸했다.“도리는 그게 맞지요. 제 말은 폐하께 왕야 한 사람만 추천할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몇 명 더 추천하라는 뜻입니다.”이덕회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술을 살짝 오므렸다.“소인이 솔직한 성격이라 말을 돌려서 할 줄 모르니 그냥 말하겠습니다. 소인이 보기엔 왕야가 가장 적합한 원수인데 어차피 역적은 아직 나라에 위협이 될만한 존재는 아니니까 나중에 목종욱한테 처리하라고 하면 되지요.”“그 어떤 반역자도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일은 그리 단순한 일이 아닙니다. 알다시피 반역자들은 사국 사람들과도 엮여 있습니다. 사국과 손을 잡았다는 건 그만큼 충분한 준비를 해왔다는 뜻이지요. 절대 쉬운 상대가 아닙니다.”목 상승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이덕회가 대답했다.“승상 말씀도 일리가 있는 것 같네요. 그럼 소인 북명왕과 함께 내일 다시 궁으로 가서 폐하를 만나 뵙고 내란에 대해서도 의논해보겠습니다.”“그렇게 합시다!”목 승상이 고개를 끄덕였다.한편, 사청엽은 여전히 옥에 갇혀 있었다. 황제가 아직 명령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사청엽은 자신이 사형을 면치 못할 거라고 확신했다.이날 저녁, 혼인을 앞둔 방시원이 황실을 찾아왔다. 치석
한편, 목종욱은 최선을 다해 산적들을 잡아들이고 있었다. 싹을 다 자르진 못했지만 크게 겁을 먹은 산적들이 산 속에 꽁꽁 숨어서 다시는 문제를 일으키진 않을 것이다. 숙청제도 제린이 보낸 소식을 접했고, 사국 대군들이 변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제린은 사국 대군이 25만 명 정도 된다고 보고를 했고 여전히 빅토르가 대군을 이끌고 있다고 했다.숙청제는 바로 병부 대신들을 불러 남강에서 사국의 25만 대군을 상대로 승산이 있는지 의견을 물었다.이덕회는 황제의 질문 자체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이길 수 있는지 없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최대한 신속하게 전쟁을 이겨야 한다는 것이 관건이다.“폐하, 남강은 오랜 시간의 전사와 왜란으로 지칠 대로 지친 상태입니다. 남강 땅은 아직 전쟁에 버틸 수 있지만 백성들은 더 이상 전쟁을 견딜 힘이 없습니다. 만약 정말 전쟁이 난다면 확실한 한 방으로 빠르게 적을 물리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메뚜기 떼처럼 매년 한 번씩 이렇게 날뛸 것입니다. 이는 저희 남강 지역의 치안에 치명적인 상해를 입힐 수밖에 없습니다.”“그럼 자네 생각엔 송씨 가문 병사들과 북명군이 적들을 신속하게 물리치지 못할 것 같은가?”숙청제의 물음에 이덕회가 바로 대답했다.“이제 송씨 가문 군대아 북명군을 나눌 것도 없습니다. 전부 다 남강 병사들입니다.”이덕회는 숙청제가 남강의 병사들을 모은 게 송씨 가문과 북명왕이라고 생각할까 봐 일부러 강조했지만 숙청제의 생각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만약 남강 전쟁이 오래 전에 끝난 전쟁이고 사여묵이 병권을 상납한지 꽤 오래 됐다면 숙청제는 이런 걱정을 전혀 하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왕표가 군심을 얻지 못하고 있는 지금, 남강에 있는 병사들이 송씨 가문 군대이든 북명군이든 결국 전부 사여묵의 명령에 따르고 있다.사여묵을 남강에 보낸다는 건 병권을 다시 사여묵에게 쥐여주어야 한다는 뜻이다.현재 연왕도 역모를 일으켰고 황제 자리를 대놓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
숙청제가 사여묵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그건 사국이 네 위엄에 겁을 먹은 것이야. 빅토르가 너를 많이 두려워하는 것 같아.”사여묵은 숙청제의 말이 진심이 아니라 살짝 비꼬고 있다는 것을 잘 알기에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황제께서 소인을 너무 높이 평가하고 계신 겁니다. 소인은 그렇게 대단한 능력도 없고 빅토르도 소인에게 겁을 먹어서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전쟁 때문에 너무 많은 걸 잃었기 때문입니다.”“네 말대로 전쟁으로 많은 걸 잃었다면 짧은 시간 내에는 원기를 쉽게 회복할 수 없지 않느냐?”“소인이 감히 추측을 해보자면 사국은 원기를 회복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절대 저희 남강이 순조롭게 발전하는 모습을 보고 있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가끔씩 비열한 수법으로 훼방을 놓아야 정상인데 지금까지 그런 적이 한 번도 없는 게 너무 수상합니다.”숙청제가 사여묵을 빤히 쳐다보다가 물었다.“그럼 네 말은 누군가가 사국과 손잡고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냐?”“그럴 가능성도 있지 않겠습니까?”사여묵은 전에도 숙청제와 이 문제를 분석하고 논의한 적이 있었으며 그때 당시 숙청제도 사여묵의 의심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주관적으로 보았을 때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숙청제는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사여묵은 그런 황제를 힐끗 쳐다보고는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지만 꾹 참았다.사실 숙청제도 왕표가 무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사국을 상대하려면 사여묵을 다시 남강 전장으로 내보내는 게 가장 적합한 선택이라고 생각하고 있다.하지만 숙청제는 쉽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그때 당시 겨우 송석석을 이용하여 사여묵에게서 병권을 빼앗았는데 이렇게 쉽게 다시 내놓을 수가 없었으며 최후의 순간이 오지 않는 이상, 숙청제는 절대 사여묵을 전장에 내보낼 생각이 없었다.때문에 사여묵이 며칠동안 어서방에 남아 숙청제와 이런저런 상의를 해봤지만 숙청제는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어서방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고 아무도 먼저
그날 밤, 연왕은 뜬 눈으로 밤을 지새게 되었다.솔직히 지금 상황은 연왕의 오랜 계획과 차질이 조금 있었다. 지방 지역에서 역모를 일으키고 심지어 진성에 준비된 게 아무것도 없이 무작정 진성까지 쳐들어간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연왕과 무상의 계획은 따로 있었다.일단 병사들을 일정한 수량까지 늘이고 아무도 모르게 서서히 진성 일대로 전이하여 병사들을 안치한 뒤 적절한 시기를 기다릴 생각이었다.그땐 사온이 진성에서 계략을 짜고 있을 것이고 많은 세가들의 지지도 받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해 예전에 고부진의 딸들을 세가에 시집 보냈기에 세가들은 지지할 수밖에 없다.그리고 나서 적절한 시기만 잘 고르면 반드시 성공한다. 진성에 전란이 일어나고 산적과 유랑민들이 판을 칠 때 연왕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성내로 쳐들어가 바로 궁 전체를 포위할 생각이었다.하지만 지금, 갑자기 대석촌에 일이 터져 버려 사청엽이 체포된 탓에 연왕은 급하게 병사들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승산이 너무 낮았기에 연왕도 망설였던 것이며 지방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난다고 해서 진성까지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물론 백성들은 반란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고 한동안 수군거리겠지만 대부분 백성들은 갑작스럽게 일어난 반란과 격문을 그저 우습게 생각할 것이다.그뿐만 아니라 사국에서 남강을 공격한다고 해도 처음 있는 일이 아니고 사국에서 오래 전부터 호시탐탐 야망을 보였기에 황제가 나랏일에 관심이 없어서 일어난 일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그리고 아직 사국과의 전쟁이 일어나지도 않았고 전패했다는 소식도 없기에 상국 무장이 무능하다는 비판을 하기에도 애매했다.나라가 평안하고 백성들이 태평한 상황에서 연주도 꽤 부유한 땅이었기에 괜히 문제를 만들고 싶어도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때문에 모두 그저 연왕이 언제 잡히는지, 언제 역모죄로 목이 잘릴지를 보고 싶어할 뿐이었다. 그리고 상국에는 사국 사람들을 물리친 북명왕이 있기에 다들 역적 따위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으며 되레 연왕이 왜 역모를 일으키
무상이 아니라는 말에 연왕은 회왕에게로 고개를 돌렸고 화들짝 놀란 회왕이 변명하려던 그때, 연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회왕일 리는 없어.”회왕은 의심조차 하지 않는 연왕의 태도에 기분이 조금 묘했다.한편, 연왕은 당연히 회왕을 의심할 리가 없었다. 회왕은 무일푼으로 연주로 왔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진성에서도 아무런 성과도 따내지 못했으며 사온의 비교 대상이 될 자격조차 없었다.회왕이 연주에 온 뒤로 연주 백성들은 회왕을 만나면 겉으로는 왕야라고 부르며 인사를 올리긴 하지만 뒤에서는 다들 그를 만만하게 여기고 아니꼽게 생각했다.때문에 회왕은 절대 마총우를 명령하지 못한다.조금씩 차분해진 연왕은 다시 자리에 앉더니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말했다.“다들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마총우 그자가 귀순한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가 나를 무너트리고 싶어서 일부러 꾸민 짓인가?”여전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무상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마총우가 귀순한 건 절대 아닐 것입니다. 왕야께서 격문을 보낸 지 며칠밖에 되지 않았고 더군다나 저희 병력은 대여섯 군데에 분산되어 있습니다. 전의하는 데만 6개월 넘게 걸렸는데 조정에서 절대 쉽게 조사해낼 수 없을 겁니다. 그런데 조정에서 마총우 그자를 찾아서 귀순 시킨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날 일부러 무너트리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는 거네. 그럼 그자가 누구일 것 같은가?”연왕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연왕이 몇 년 동안 끌어 모은 사람들 중에 황제의 친인척과 세도가들도 있지만 친왕은 연왕과 회와 두 사람밖에 없었다.연왕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상대가 없었다. 연왕의 부하들 중에서 황제의 친인척들이 제일 무능하고 멍청했으며 파장을 일으킬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리고 종합적으로 생각해보았을 때 가장 의심되는 상대는 여전히 무상이었다.하지만 역모의 마음을 품은 연왕이 무상을 끌어들이고 나서 지금까지 무상은 강한 충성심을 보였고 심지어 평소에 연왕에게 쓸만한 제안도 가장 많이 하고 계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