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명왕부, 서재염 선생이 상황을 보고한 후 자리에 앉아 천천히 차 한 모금 마셨다."승은백부가 회왕부에서 나온 후 바로 연왕부로 갔단 말이오?" 사여묵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흠, 역시 우리가 예상한 대로 흘러가는군.. 이들은 모두 장공주와 한통속이었어.""이 회왕이란 자가 너무 깊이 숨어 있어서, 너무 주의깊게 보지 않았던 것 같소.”염 선생이 말했다."내가 지난 몇 년 동안 남강 전장에서 시간을 보냈던 탓에, 경중의 많은 일을 모르고 있었군." "저들이 지금 권세를 잡지 못했기 때문에, 황제가 즉위할 때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군. 당시 성릉관에서 혼란이 있었고, 남강에서 전쟁이 벌어졌으며, 동시에 신황제가 즉위하였으니, 그때가 저들에게는 가장 좋은 기회였을 것이오."그러자 염 선생은 잠시 생각한 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때가 비록 저들에게는 가장 좋은 기회였지만, 제왕에게는 가장 좋은 시기가 아니었소. 그러니 그런 번거로운 일을 스스로 떠맡을 리가 없지 않소. 어렵긴 하지만 상황이 혼란스러웠기에 저들이 성공할 가능성도 컸을 것이오. 이것이 바로 연왕이 야심이 큰 사람임을 증명하는 것이오. 황위를 원하면서도 명성과 민심까지도 원했소. 그래서 그는 이렇게 깊이 숨어 있었던 것이오. 만약 외적을 막고 있을 때 저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면, 설령 황위를 차지하더라도 연왕은 반란을 일으킨 대역 죄인이 되었을 것이오. 무엇이든 다 얻고자 하는 사람은 결국 빈손으로 끝나기 마련이오. 아마 지금쯤 후회하고 있을 것이오." 사여묵은 염 선생의 말에 동의하며 말했다. "일단 계속 주시하는 게 좋겠소만. 왕비의 계획을 먼저 돕고 장공주 쪽을 뒤흔들어 보겠소. 참, 서경 쪽에서는 별다른 말이 없었소?”이것이 바로 염 선생이 오늘 두 번째로 보고해야 할 소식이었다. "수란키가 암살을 당하여 중상을 입고 혼수상태에 빠지고 말았소. 그 전에도 몇 차례 암살 시도가 있었으나, 이번에는 피하지 못했소. 우리 사람을 그곳에 심을 수 있을 지는 모르겠군…""성공
사여묵은 이것이 자신에게 가장 큰 한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잃어버린 여동생을 찾지 못한다면 결코 혼인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알겠소, 이 일은 내가 왕비에게 한 번 이야기해보겠소. 허나 형님께서 이를 받아들일지 장담할 수는 없소. 사실 이 이야기는 좀 황당하게 들리오.”그러자 염 선생은 오히려 평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왕야께서는 그저 소인을 대신해 물어봐 주시면 됩니다. 안 된다고 해도 소인도 실망하지 않겠소이다.”“음, 알겠군.” 사여묵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문제들을 논의한 후 방으로 돌아갔다.이때 송석석 또한 마침 사란에게 다녀온 참이었다. 사여묵과 염 선생의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놀란 기색이 역력하였다. “염 선생에게 어린 시절 실종된 여동생이 있었다니.. 의외입니다. 헌데 이미 홍시를 통해 평 사저에게 편지를 보냈다는데 좀 이상하지 않나요? 왜 직접 편지를 보내 묻지 않았을까요?”사여묵이 웃으며 대답했다. “염 선생께서는 공적인 일과 사적인 일을 분명히 구분하시는 분이오. 홍시를 통해 평 사저에게 편지를 보낸 것은 왕부의 일이지만, 심 형님께 부탁드리는 일은 개인적인 일이니 중재자를 찾으신 것이오.”송석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요… 그럼 제가 대사 형님에게 편지를 보내 물어볼게요. 허나 대사 형님께서 지금 매산에 계신지는 잘 모르겠네요. 그분은 늘 밖으로 나가는 걸 좋아하시니깐요.”사여묵이 웃으며 말했다. “아마 지금쯤은 매산에 계실 거요. 사숙께서 오랜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셨으니, 당분간 매산에서 떠나는 이는 없을 거요.”이상하게도, 사숙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송석석은 여전히 그에 대한 경외심에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두근거렸다. 그녀는 그분을 떠올리며 긴장된 듯 미소를 지었다. “다행히 저는 하산을 해서 혼인할 수 있었던 거네요.” “게다가 당신은 사숙의 유일한 사랑을 받았던 제자와 혼인했으니, 그분께서도 특별히 아끼실 거요.” 사여묵은 자랑스러운 듯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
송석석은 믿기지 않아 잠시 멍해졌다. ‘내가 정말 그랬다고?’그녀는 그와 가까워지는 것을 거부한 적이 없었다. 매일 밤에도 그들은 가까이 지내며 함께 밤을 보냈다. 지금껏 그녀는 그의 가슴품을 떠난 적이 없었다.보주는 그녀가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자 조금은 답답한 마음이 들어 철이 덜 든 것 같은 송석석에게 직접 물었다."아씨, 왕야와 서로 예를 지키는 손님 같은 부부로 남고 싶으세요? 아니면 진정으로 은애하는 부부가 되고 싶으세요?""보주, 너 너무 예민하게 구는 것 아니더냐?" 송석석은 손을 들어 그녀의 이마를 만졌다. "머리가 어떻게 된 거니? 아님 열이라도 나는 거야?"보주는 그만 화가 나서 볼이 부풀어 오르며 눈도 동그랗게 뜬 채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씨, 어서 대답하시지요!"그러자 송석석은 어쩔 수 없이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생각했는데, 이때 그녀의 이마 주변에 몇 가닥의 잔머리가 풀려나와 저녁 햇빛 아래서 반짝였다. "서로 예를 지키는 부부와 진정으로 서로를 은애하는 부부… 때론 둘 다 필요하지 않겠어? 사랑을 하면 서로 존중하지 않게 되는 거야? 굳이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해? 둘 다 가질 수는 없는 거니?""어?" 보주도 잠시 멍해졌다. 둘 다 가질 수 있다고?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보주는 잠시 말을 멈췄다. "하지만 때로는 아씨가 왕야의 감정을 그렇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단 말이에요. 왕야께서는 아씨의 감정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시잖아요. 그저 아씨도 그럴 필요가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던 거예요…”"내가 왜 신경 안 써? 나도 신경 쓰고 있단다.""뭔가 부족해요." 보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둘째 도련님과 둘째 마님께서는 서로를 진정으로 은애하셨어요. 둘째 도련님 부부처럼 아씨도 좀 노력을 하시란 말이예요!"송석석은 매산에서 돌아올 때마다 오빠와 새언니의 다정한 모습을 떠올렸다. 그들은 걸을 때 손을 꼭 잡았고, 앉을 때도 꼭 옆에 앉았으며, 아무도 없을 때 그녀의 오빠는 새언니에게 몰래 입을 맞추기도
량소의 재판이 시작되었고, 먼저 영안군주와의 의절을 선고했다. 의절은 은혜를 베푼 승은백부의 체면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결정이었다.그다음은 그가 본처를 학대하여 유산을 초래한 혐의였다. 특히, 낙태된 아이는 황실 군주의 신분을 지녔으며, 황제의 명령도 있었기 때문에 처벌이 더욱 무거워질 수밖에 없었다. 대리사 소경은 량소에게 10년간 흉주로 유배를 보내어 흉주 관아의 관리하에 농지를 개간하며 고역을 치르도록 판결했다.재판장에서는 즉시 판결이 내려졌고, 다음 날부터 바로 형이 집행될 예정이었다. 그러자 승은백부도 더 이상 내려진 판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는 연왕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지만, 연왕은 태후 앞에서 그들의 가문을 위해 청원을 넣었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연왕은 이번에 량소만 처벌하고 그들의 작위는 박탈하지 않겠다고까지 말했다. 더 소란을 피우면 사태를 수습할 수 없다고 경고를 한 것이다.량소가 유배형을 받았다는 사실은 태부인에게 알리지 않았다. 태부인은 단지 그가 감옥에서 고생하지 않는다고만 알고 있었고, 그를 보지 못하는 것에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그 아이는 태부인의 마음속에서 가장 사랑받으며 자란 아이였기 때문이았다.량소가 떠나는 날이 오자 승은백부는 그를 배웅하러 나갔다. 하인이 실수로 말을 흘렸고, 그 소식을 들은 태부인은 그 자리에서 기절해버렸다. 이미 이틀간 단식을 했던 터라 몸이 약해져 있었고, 연로한 나이에다 분노와 슬픔이 겹쳐 결국 반신불수가 되어 입도 제대로 놀리지 못하고 구강마비까지 오고 말았다.한편, 아들인 량소를 배웅하러 간 승은백부부는 아직 이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성 밖에서 량소를 호송하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아들이 족쇄를 차고 있는 모습을 보자, 과거 그의 의기양양한 모습이 떠올랐다. 하지만 지금은 초췌하고 겁에 질린 모습 뿐, 예전의 모습은 아예 찾아볼 수 없었다.승은백부는 그런 그에게 급히 다가가 뇌물을 건네며 잠시 이야기할 기회를 얻었다.량소는 결국 눈물을 펑펑 흘리며 애
량소는 세상을 다 잃은 표정을 지으며 뒤돌아 그의 아버지를 바라보며 결국 말을 꺼냈다. "아버지, 연유를 만날 기회가 있다면, 저에게 한 번이라도 진심이었던 적이 있었는지 물어봐 주세요."승은백부는 이 말을 듣고 너무 놀라 그 자리에서 눈앞이 깜깜해지며 목이 무언가에 막힌 듯 숨이 턱 막히고 말았다. 그는 몸이 비틀거리더니 결국 주저앉고 말았다. 승은백부인은 울음을 터뜨리며 통곡했고, 주변에 있던 많은 백성들이 이를 보고 몰려들었다.원래 승은백부 집안과 회왕부 집안의 일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이제는 수도의 백성들 입방아에 오르락 내리락 거리는 상황이 되었다. 두 사람 중 한 명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었고, 한 명은 눈물을 흘리며 크게 울었지만, 백성들은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양반가의 슬픔과 기쁨을 백성들이 공감할 리 없었으니, 그저 재밌는 이야깃거리 하나 더 생긴 것에 불과했다.승은백부 부부가 집으로 돌아갔을 때 태부인은 이미 정신을 잃고 반신불수가 되어버린 후였다.그들은 모든 하인들에게 태부인 앞에서 입조심하라고 거듭 경고를 했지만, 태부인이 량소 때문에 병이 악화되었다는 소식은 결국 퍼지고 말았다. 이로 인해 량소는 불효자의 명성을 얻게 되었고, 설령 그가 훗날 돌아오더라도 무용지물이 될 뿐이었다.태부인은 반신불수가 된 후 제대로 말을 할 수 없었지만, 하루 종일 량소만을 생각하며 지냈다. 꿈속에서도 몇 번이고 량소가 고통받는 모습을 보았고, 유배 가는 길에서 죽는 꿈을 꾸었다. 그렇게 마음을 졸이며 심신이 지친 그녀는 며칠 지나지 않아 결국 세상을 떠났다.이렇게 태부인이 죽고 난 후, 승은백부 집안은 공주를 제대로 대접하지 못했다는 죄와 불효자의 오명을 짊어지게 되었다. 가문 내 여러 고위직에 있던 아들들 또한 연이어 탄핵을 당했고, 황제는 분노하여 이들을 모두 강등시켜버렸다.비록 승은백부의 작위는 박탈되지 않았지만, 이 일로 인해 그의 가문은 완전히 몰락해 버리고 말았다.사여묵은 회의를 마친 후 승은백부와 마주친 적이 있었다
회왕은 고개를 숙였다. 분노한 기색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팔걸이에 놓인 그의 손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누님 말씀이 옳습니다,""샤린이는 이제 신경 쓰지 마세요. 그 아이는 결국 송석석과 함께 있기를 택하지 않았습니까? 왕부로 돌아오는 걸 원치 않는 듯 보였어요." 장공주가 말했다.회왕은 말이 없었지만, 그의 눈가에는 핏줄이 잔뜩 서려 있었다. 차가워진 분위기를 느낀 연왕이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됐습니다, 승은백부 가문의 일은 이미 끝났지 않았습니까? 이 나라는 더 이상 불효한 관리는 절대 중용하지 않으니, 그들의 좋은 시절도 이제는 다 끝났습니다. 제가 이번에 찾아온 이유는 이방의 일 때문입니다. 그쪽으로 암살자를 보냈는데, 송석석이 그를 도와주었더군요. 그 일로 인해 제 부하들을 잃었습니다.""허나.. 셋째 형님, 지금 이방을 죽이는 건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황제가 장군부에 경위를 보내 지키고 있거든요. 겉으로는 평복을 입었지만, 확인해 보니 확실하게 경위였습니다."회왕도 가만히 듣고 있다가 덧붙였다. "게다가 이방은 매우 교활한 자예요. 장군부에서 한 발짝도 나서지 않더군요.""장군부 사람을 매수해서 독살하는 건 어떻소?" 연왕이 물었다."이미 시도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그녀 곁에는 하인이 한 명뿐이고, 그 외의 사람은 절대 쓰지 않더군요. 게다가 방 안에 들이는 음식은 모두 은침으로 독이 들었는지 확인한다고 들었습니다. 방 안으로는 사람을 함부로 들이지 않더군요."연왕은 웃는 얼굴로 회왕을 바라보며 말했다. "허나 이렇게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암살도 실패하고, 독살도 실패하다니… 보아 하니 형님께서는 이방을 처리할 마음이 없는 것 같군요?"비록 웃으며 말했지만, 그 안에는 실망감이 섞여 있었다. 회왕은 그가 만족하지 않다는 걸 잘 알았다. "다시 방법을 생각해 보겠네.""예, 알겠습니다. 허나 서둘러야 할 겁니다. 서경 황제는 아마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고, 이미 서경 태자가 황제의 곁을 지키고 있다 하더군
그러자 연왕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허나.. 어쨌든 이방이 죽는 것이 가장 좋고, 그 죄목은 소 씨 가문이 지어야 합니다. 이방은 생명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며, 심지어는 교활하기까지 해요. 게다가 많은 사람들의 원한을 샀으니 그녀의 말을 믿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소 씨 가문은 성릉관을 수년 동안 지켰지만, 평민을 죽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만약 누군가가 이를 이용해 그를 구하려 한다면, 오히려 이 사건에서 쉽게 빠져나가고 말 거예요.”회왕이 다시 반문했다. “허나 우리의 목표는 소 씨 가문을 멸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는 단지 성릉관의 장수를 교체하고 소 씨 가문을 밀어내려는 것 뿐입니다.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우리쪽 사람을 성릉관에 배치해야 해요. 지금 왕표가 아직 우리 편이 아니기 때문에우리는 하루라도 빨리 성릉관을 차지해야 해요. 두 곳의 중병을 통제하거나 그들을 전투에 휘말리게 만든다면, 문제는 원만하게 해결될 거예요. 그럼 그때 가서 우리는 원래 계획대로 농민 봉기를 일으켜 황제가 하늘의 분노를 샀다고 소문을 퍼뜨리는 거죠. 그때가 바로 우리가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최고의 시기가 될 거예요.”그가 말을 마치고 차를 들 때, 장공주의 얼굴을 슬쩍 살펴보앗는데 그녀의 얼굴에 순간 분노가 스쳐 지나갔다.역시 장공주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안 됩니다. 소 씨 가문 사람들은 반드시 죽어야 해요.”연왕은 답답한듯 이내 이마를 찌푸렸다. “공주, 감정적으로 행동하지 마세요. 아우가 말한 대로, 우리의 목표는 소 씨 가문이 성릉관에서 철수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죽을지 말지는 우리가 선택할 문제가 아니닙니다!”회왕은 장공주가 반박할 것이라고 생각 했지만, 연왕은 달랐다. 그는 장공주가 자신의 말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게다가 연왕이 말한 대로, 자신이 증오하는 사람들이 하나씩 하나씩 비참하게 죽는 것을 보는 것보다 더 통쾌한 것은 없으니 말이다.연왕은 그녀가 더는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자 계속 말을 이어
만종문, 심청화는 손에 서신을 들고 사숙을 찾아갔다. "사숙, 사여묵 사제가 서신을 보내왔는데 저의 도움이 필요하다며 진성으로 한 번 오라 하였습니다." 사숙은 눈을 감은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아직 화가 풀리지 않았기에 지금 누구도 상종하고 싶지 않았다. 자유롭게 출입하던 자들 또한 발이 묶였고 밖으로 나간 자들 중 돌아오지 않은 이들도 감히 다시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남강 떠나기 전 그는 북산에 집을 짓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었다. 그 땅에 오층 높이의 채성루를 지을 생각이었다. 높은 곳에 올라 달을 볼 수 있고 무공을 연마할 수도 있었다. 특히 경공을 수련하는 데에 가장 최적화된 장소였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내년 봄에 공사를 시작하려고 계획했는데 그들은 이제서야 서둘러 집을 짓고 있는 것이었다.지세가 높고, 맞은편엔 폭포가 있으니 하루라도 빨리 그 풍경을 누리려는 속셈 이었다.하지만 하나같이 별로 대단한 성과는 이루지도 않았으면서, 누리는 것에는 제일 앞장서니 화 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너무 꼴불견이였다. 믿음직스럽지 못한 사형, 임병일은 이미 폐관을 선언하고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있다.숨을 테면 숨어보라지. 꼭 기억해 둘 거라고 다짐한 그였다. 내년까지 채성루가 완공되지 않으면 절대 이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생각이였다. 심청화는 사숙이 말이 없자, 조심스레 다시 일깨웠다."사여묵 사제가 급하게 서신을 보내온 것이니, 분명 중요한 일이 있을 것이옵니다. 제가 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끝나면 바로 돌아오겠습니다." 그에게 별로 대꾸하고 싶지 않았지만 사여묵의 일이라고 하자 사숙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의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심청화는 그 작은 목소리가 사숙의 최대한의 양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사여묵의 일이 아니었더라면 분명 '꺼져라' 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는 급히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지금 바로 하산하겠사옵니다. 만약 일이 발생한다면 사숙께 다시 서신
그러자 송석석이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왕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아주 잘 대해줍니다. 조카딸의 혼담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집간 부군이 잘 대해준다 하더군요. 다만 그녀는 자신이 두 번 시집갔음에도 처가에 머무는 것이 조카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되어 그러는 모양입니다.”그 말에 전북망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순간 번개처럼 날렵하지만 마음씨 따뜻한 최씨 부인이 떠올랐다. 최씨 부인에게는 적자와 서자녀들이 있었고, 아직 혼담이 정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혼인 문제로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에 시달렸을지 생각하니, 전북망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형수로서의 최씨 부인을 존중하며,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 없었다. 이때 송석석이 그의 생각을 끊었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전북망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우리 단둘이 여기에 있으면, 섭정왕이 질투하지 않을까요?” 송석석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침착하게 답했다. “이 정도 신뢰도 없다면, 제가 어찌 현갑군 지휘사로 오래 근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숨김없이 모든 걸 공유합니다. 이번 만남 역시 그분께 이미 알려두었죠.”송석석이 떠나자 전북망도 따라나섰다. 그는 섭정왕이 어딘가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의심했지만, 정작 별청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마당에서야 섭정왕을 발견했는데, 그는 대장군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송석석을 보자 미소로 맞이하며 불러세우는 섭정왕의 모습에 전북망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진정한 부부란 저런 것일까.'그러나 성릉관이든 진성이든, 남녀의 단독 만남은 명예에 흠이 될 수 있음도 잘 알았다. 특히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은 더욱 조심해야 했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들을 걱정하는가.’자조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왕청여의 제안은 여전히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5일의 고민 시간이 주어졌다. 사여묵과 송석석이 진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최씨 부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답은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 전북망은 송석석과 다시 만났다. 사실 그전에도 송석석이 성릉관으로 갔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서먹해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이 매번 성릉관을 떠날 때마다 몰래 배웅하곤 했다. 전북망은 자신이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늘 송석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방과 왕청여에게도 미안하긴 하지만, 그들과는 서로 감정을 소모하고 다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장군부만 송석석에게 상처를 줬을 뿐, 송석석은 장군부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않았다. 비록 이혼한 후에는 전북망 어머니의 병세에 대해 상관하지 않았지만 큰형수에게 어떻게 단설환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기까지 했다.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는 이미 섭정 왕비가 되어있고 나서였다. 변방의 전사들에겐 양식과 무기가 풍부하고, 봉록까지 올라, 그들에겐 이득이기에 이제는 조정의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었다. 섭정왕은 한때 장수였기에 병사들이 배불리 먹어야만 국토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북망과 송석석이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섭정왕과 함께 소 대장군에게 생신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소 대장군의 눈빛은 여전히 자애롭고 인자했다. 전북망은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그때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면 지금 송석석과 함께 노장군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일 것이라는 후회를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같은 생각인 걸 보니, 자신만 제자리에서 멈춰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송석석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생일잔치가 끝난 후에 송석석이 뜻밖에도 먼저 그를 찾았다. 그와 송석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섭정왕은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걱정되지도 않는가?’전북망은 당황하고 불안해 보였고, 송석석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먼저 입을 열지도 못하고 송석석이 말하기만을 기다리
전북망은 성릉관에서 몇 년 동안 두 번이나 발탁되었고, 지금은 장군의 신분으로 수천 명의 병사를 관리하고 있다. 계속 성릉관에 주둔하고 있어 다시 진성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고, 진성의 부름 없이는 제멋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재혼도 하지 않고 여전히 혼자 살아갔다. 성릉관의 모래바람은 해마다 그의 얼굴에 흔적을 남겨 또래들보다 몇 살이나 더 늙어 보였다. 심지어는 몇 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기에, 진정제를 먹어야만 잘 수 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그때 이방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송석석과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부부가 되었을까? 아마도 우린 귀여운 자녀도 낳았겠지. 그리고 나는 군대에서 열심히 일하고 석석은 가문의 내무를 책임지며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를 돌보고 있었겠지? 설령 내가 승진을 하지 못하고 평생 장군으로만 살아도 그는 날 떠나지 않았겠지.’ 이전의 전북망은 송석석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였는데 자신을 위해 날개를 부러뜨리고 병든 시어머니를 돌보며 군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책임지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그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돌이킬 수도 없었다. 전북망에게는 이미 이방이 있었고 이방을 사랑한다고 했으니, 송석석이 이혼하자고 했을 때 그는 심한 말을 하고 후회하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송석석 또한 후회할 게 없었다. 이혼을 하면서 전북망을 위해 부러뜨렸던 날개가 다시 자라나 전쟁터로 날아가 쉽게 공을 세웠으니까 말이다. 이방은 송석석이 큰 가문의 아가씨인 데다가 부친과 오라버니가 그를 위해 길을 닦아주었기에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의 성공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문이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주된 원인은 아닐 것이다. 만종문에서 송석석의 무공은 거의 최고였는데, 그건 송석석이 그만큼 노력을 했고, 그만큼 땀을 흘렸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북망은 송석석을 존경했지만 그는 자신이 송석석을
어머니께 간청해도 소용이 없자 신이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건 더 심한 꾸지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이가 이 혼사를 반대하는 것은 양지춘과 접촉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양지춘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서 놀며 감정을 쌓으라고 했다. 신이는 가기 싫었지만 어머니가 억지로 그녀를 마차에 태웠고, 심지어는 하녀에게 그녀가 부적절한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엄명했다. 양지춘의 얼굴은 그나마 멀쩡하게 생겼는데, 처음에는 신이를 조금이나마 존중하는 척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신이의 외모와 품평을 논하며 신이가 외모가 예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그를 부인으로 들이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그의 오만한 태도는 신이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아마도 신이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양지춘은 일부러 신이를 마차에 태워주는 척하며 그녀의 엉덩이를 꼬집었다!그 순간 신이는 온몸의 피가 머리 위로 솟구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경박한 눈빛에 신이는 이내 눈물이 쏟아졌고, 모욕감에 온몸을 떨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집에 돌왔는데, 하녀와 마부는 그의 동작을 보지 못한 탓에, 오히려 그가 세심하고 자상하다며 그녀의 어머니 앞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이는 억울해서 어머니에게 그 일을 말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그녀가 일부러 꾸민 말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꾸짖으며 사흘 동안이나 외출을 금지했다. 신이는 그렇게 방에 갇혔고, 매일매일을 눈물로 얼굴을 씻었다. 심지어 그날 선비의 말을 듣고 호수에 뛰어들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내가 양지춘에게 시집가는 것이 물에 빠져 죽는 것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사흘 후, 외출 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신이는 다시 경산사로 가서 같은 핑계로 하녀를 내보냈다. 이번엔 정말 죽을 각오로 호숫가에 간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다시 그 선비를 만났다.그는 쓸쓸하게 호숫가에 앉아 작은
신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나무 그늘에 몸이 가려져 있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초라해 보였고 눈 밑에는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바로 다리 앞에서 그림을 팔던 선비이자, 학정이 말하던 퇴학 해서 기녀를 키우는 학생이었다!“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신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짜증을 냈지만, 그가 한 말을 떠올리자 내심 두려웠다. “나는 여기에 물귀신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거짓말하는 것이겠지요.” 신이는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귀신은 두려웠고 진흙탕에 영원히 깔려 있는 건 더욱 두려웠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가 걸어 나오자 얼굴은 더욱 여위어 보였다. “호숫가의 주변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오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건 사람들이 이곳으로 예불하기 위해 오는 것이지, 경치를 보러 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절을 하고 바로 돌아가니 당연히 보지 못하겠지요.” 신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순간 깊이가 보이지 않는 호수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그는 여전히 굳게 서서 말했다. “예불하는 사람은 천지와 자연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경치가 있다면 반드시 한 번 보러 올 것입니다. 이런 곳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좋은 곳일 텐데 아무도 없다는 게 아기씨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것이 사실인지는 몰랐지만,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감히 그런 무서운 곳에서는 죽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자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절대 쉽게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고 싶어도 살 지 못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 밑은 이내 붉어졌고 눈물이 고여 반짝이는 것 같
신이의 사촌 여동생과 하녀는 신이를 찾으러 돌아왔다. 신이가 하녀보고 이순에게 삼백문을 주라고 하자 이순은 웃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원래는 우연한 만남일 뿐이라 다시는 접점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 조모님의 생신 때 가문 연회에서 공학정이 데리고 온 제자들 중에 이순이 있었다. 강남의 예의 규율은 진성처럼 엄격하지 않아서 연회에 참석할 때 여인들도 앞마당에 갈 수 있었다. 이순은 신이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신이는 그때 면사포를 쓰고 있었고 두 눈만 드러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순은 식사를 하지 않고, 신이의 조모에게 생신 축하 그림만 드린 후에 집에 일이 있다며 작별을 고했다. 그가 떠나자마자 학정이 그를 언급하며 안타까운 말투로 말했다. “총명하긴 한데 진취심이 없어서 계속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걸 여기로 데려와 진취성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사귀게 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로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르다니. 정말 실망이군. 학교를 그만두겠다면, 이젠 마음대로 하라고 해야겠어.” 그러자 신이의 부친이 위로했다.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껜 학생이 많으니 그가 나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학정은 마치 울화가 쌓인 것처럼 말했다. “그는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네. 그런데 진취성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동창에게 돈을 빌리질 않나, 게다가 집에 기녀까지 키우고 있다더군.” 신이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런 사람은 얘기할 가치도 없습니다.” 신이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서 왠지 마음속으로 실망감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날은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같다고 생각해 마음이 갔던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 후, 신이의 혼사도 낙착되었다. 그녀의 약혼자는 회주 지부의 둘째 아들인 양지춘이고, 올해 22살이었다. 22살인데도 결혼하지 않았던 건 첩을 통해 서자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은 가문은 그
그의 이름은 신이었는데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에 대해서 말할 때, 경멸하는 기색을 띠었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모르는 사람까지 모두 침을 뱉으며 뻔뻔하다고 할 정도였다. 알다시피 애인과 야반도주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는 것보다 더 욕먹을 일이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후회하냐고 묻기도 했다. 그녀는 시집간 것을 후회하지 않지만 죄책감을 느끼긴 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시 씨 가문의 명성이 손상되어 형제자매들과 조카들이 혼사에 어려움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신이는 시 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태어날 때부터 온갖 보살핌을 받아왔다. 먹는 것은 물론 모두 산해진미이고, 입는 것도 모두 능라 비단이었다. 게다가 보모님과 오라버니의 총애까지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그녀에겐 한 가지 결함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열네 살 때까지 월사가 오지 않은 것이었다. 많은 의사들을 불러 진찰을 받고 밤낮으로 약을 먹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몸이 차서 그러니 몸조리를 하면 나을 수 있다고 위로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몰래 의사가 부모님께 하는 말을 들었다. 의사는 그가 몸이 차서 그런 병이 생긴 것이 아닌, 아이를 키우는 곳이 어린아이와도 같아서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마치 작은 꽃병과 같아서 꽃을 꽂을 수는 있지만 나무를 심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 건 불가능하다고 비유했다.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건 여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녀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중에 좋은 사람에게 시집가서 부군에게 첩을 들인 후, 첩이 낳은 아이를 친자식처럼 키우라고 조언해주었다.시 씨 가문이라는 후원이 있으면 그녀가 아이를 낳을 수 없어도 아무도 그녀의 지위를 흔들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 씨 가문의 재물은 그녀가 평생 부귀하게 살기에 충분했다. 신이의 조모도 그녀에게 아이를 낳을 수 없으니 자세를 낮춰야 한다고 했다. 시 씨 가문의 딸이라고
추운 겨울이 되자 눈이 내려 성릉관은 하얗게 뒤덮였다. 세상이 마치 깨끗해진 것처럼 보였다. 이황자는 몇 년 동안 너덜너덜한 승복을 입고 발우를 받쳐 들고는, 가는 길에 동냥을 하다가 절을 보면 이틀 묵으며 부처님께 참회하면서 살았다. 사실 그는 원래 있던 절에서 계속 지낼 수 있었다. 편안하진 않지만 풍찬노숙할 필요도 없고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그런 안일한 곳에서는 평생 죄를 씻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계속 길을 걷고 계속 고생해야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했다. 그가 성릉관에 도착했을 때 짚신은 이미 찢겨 있었고 발바닥에는 두꺼운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이제는 신발을 신지 않고도 자갈이 가득한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추운 날씨에는 모든 옷을 껴입어도 추위를 막을 수 없었지만 이미 익숙해진 뒤였다. 그는 눈보라를 맞으며 성릉관에 위치한 감은사로 향했는데, 몇 년 동안 발걸음을 멈춘 적이 없는 탓에 고단함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심지어는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아 그는 눈이 가득 쌓인 길에서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그는 따뜻한 두꺼운 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그가 있는 방에는 숯불이 피워져 있었고, 살짝 열린 창문으로 눈에 눌려 허리가 굽은 나뭇가지가 보였다. 그는 눈동자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렇게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의 마음속에 순간 욕심이 생겨 조금만 더 누워있고 싶어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문이 활짝 열렸다. 그가 벌떡 일어나 앉았는데, 갑자기 눈앞이 핑핑 돌더니 다시 힘없이 침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누워 있거라.” 이때 누군가가 부드러운 말투로 말하면서 약그릇을 그의 침대 옆에 놓았다. 그는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익숙해, 어지러움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돌려보니, 그 사람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서우 형?!’ 그는 자신이 잘못 보았을까 봐 다시 자세히 보려 했지만, 몸이 너무 어지러운
대황자는 봄 사냥 때 숙청제에게 꾸중을 듣고 돌아간 후 앓아누웠다. 당시 이황자와 서우가 모두가 걱정했는데 덕비는 오히려 기뻐했다. 그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황제폐하께서는 분명히 대황자를 싫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덕비는 이황자를 안고 반드시 부지런해야 하고, 태부와 황숙의 말을 잘 듣고 누구보다 잘 배워 황형을 제압해야 한다고 당부까지 했다. 그로 인해 이황자의 마음은 몹시 복잡했다. 덕비가 줄곧 그에게 태자와 황제가 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지 말해주었을 때 비록 그도 마음이 설렜지만 자신과 거리가 먼 얘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금 그와 대황형, 서우 형, 그리고 셋째 동생이 사이가 좋아 도저히 대황형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매일 모순적으로 지내다 보니 오히려 학업이 나빠졌고 승마 연습을 할 때도 여러 번 실수를 했다. 하지만 덕비는 이상하게 그를 탓하지 않았고 며칠 동안 계속 게으르게 하라고 했다. 그렇게 덕비는 이황자를 데리고 복마마를 자주 뵈러 갔고, 복마마 궁전에서 숙청제를 만날 수도 있었다. 덕비는 며칠 동안 그곳을 드나들더니 어느 날 굳은 표정으로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차가운 말투로 청이에게 자신의 보살핌이 없으면 아이가 태어날 수 있는지 보겠다고 했다. 황제폐하를 자주 뵈러 갈 수 없어 아쉬웠지만 이황자는 마음을 가다듬고 공부와 승마술에 전념했다. 이황자는 당시 앞날이 어떻게 될지도 몰랐고, 비록 매일 힘들긴했지만 한편으로는 즐거웠기에, 계속 이렇게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숙청제의 천추세에 승마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니 세 황자와 서우도 가서 겨뤄 보기로 했다. 원래 그런 대회에서 황자들은 재미있게 참석만하면 되지만, 덕비는 그 경기를 몹시 중시했다. 덕비가 이황자에게 마름쇠를 건넬 때, 그는 하늘이 무너져내리는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황자는 원하지 않았다. 그는 절대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대황형의 목숨을 앗으려 하다니, 이황자는 처음으로 어마마마가 무서워졌다.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