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녕이 결혼하던 날, 제씨 가문에는 매우 떠들썩해졌다. 혼수는 어제 이미 공주부로 보냈지만 혼례식과 잔치는 제씨 저택에서 올렸다. 손님들이 하도 많이 와 제씨 저택의 문턱이 다 밟혀 사라질 정도였다. 장공주가 제씨 저택으로 가기 전에 청란이 한 번 돌아오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림봉아는 공주부의 지하 감옥에 갇혀 있었는데 그 지하 감옥은 비린내가 하도 심해서 매일 한 시간씩 문을 열고 통풍을 했는데 그것도 장공주의 마음이 자비로워서 배푼 결과였다. 그곳에는 림봉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첩들과 잘못을 저지른 하인들이 몇 명 더 있었다. 하인은 그곳에 들어가면 다신 나갈 수 없었다.그곳에서 풍기는 비린내는 피 비린내라 고청란은 들어가자마자 속이 울렁거렸다. 하지만그녀는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곧장 어머니가 수감된 감옥으로 향했다. 이 감옥은 철창으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벽으로 쌓여서 아무도 볼 수 없었다. 감옥 문 아래에는 작은 창이 있었는데 바로 거기로 음식을 넣어주었다. 모두 독방에 살아 함께 이야기를 나눌 사람도 없었다. 각 감방에는 침대와 변기가 있었고, 한 달에 한 번씩 목욕을 할 수 있었는데 부마가 올때청결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또한 만약 한 달 동안 난리를 피우지 않는다면 반나절 동안은 돌아다닐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고청란은 임무를 나가기 전에 장공주의 자비하에 이곳에 와본 적이 있었다. 장공주는 그녀에게 어머니가 얼마나 비참한 지 직접 보여주었다. 향귀가 문을 열라고 하자 고청란은 어머니를 보기 위해 바로 뛰어들어갔다. 감방 안에는 매우 여윈 한 부인이 누워 있었는데 소리를 듣고 기침을 하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 들어온 사람이 자신의 딸이라는 것을 본 그녀는 몸부림치며 벌떡 일어났다. “어머니.” 고청란은 그녀를 껴안고 눈물을 쏟으며 말했다. “그들이 의사를 찾아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왜 아직 기침이 이렇게도 심하신 겁니까..?” 림봉아가 고청란을 확 끌어 안았는데 뼈만 앙상하게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힘이
제씨 가문의 잔치엔 손님들로 붐비었다. 제씨 가주가 지금의 이부상서이기도 하고 셋째 집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황후의 아버지인 제씨 어르신은 진성의 권력자들 중에 초대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초대했다. 그중엔 장군부도 포함되어 있었다. 장군부가 비록 권세가에서 밀려나기 일보직전이긴 하지만 조상 중에 대장군을 배출한 건 사실이고, 그렇지 않았다면 장군부는 지금 없어졌을 것이다. 제상서는 조정의 요원이자 국장이니 대외적으로 당연히 공평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방 씨 가문 또한 당연히 초대를 받았다. 방시원이 돌아온지 사흘 만에 척사 탐정단의 모든 사람에게 황령이 내려왔다. 방시원은 3품 참장으로, 제방은 4품 장군으로 책봉되었다. 그리고 선평후부의 장문수는 정원백으로 책봉을 받았고 그의 부인인 이석은 3품 숙인으로 책봉받았다. 전례를 깨트린 봉작은 장문수가 척사단의 주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비록 체포된 후 모진 고문을 당했지만 한 사람도 말하지 않고 끝까지 견뎌냈다. 숙청제는 이러한 정신으로 군대의 사기를 북돋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는 한쪽 다리를 다쳐서 앞으로 전쟁터에 나갈 수 없게 되었기에 백작의 자리를 주고 아내를 숙인으로 책봉하여 남은 생을 편히 보낼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숙청제는 척사단의 방시원과 제방, 노홍, 그리고 진 씨 가문의 두 아들을 특히나 쓸 계획이었다. 그저 병사인 왕두와 왕오, 그리고 장태 등인도 각자 품계를 올려 황명이 파견되기만을 기다렸다. 방시원은 진성으로 돌아온 후 처음으로 잔치에 참석한 것이었고 처음으로 이렇게 많은 사람을 봐 놀랐다. 방 씨 저택에도 방시원이 돌아온 것을 축하하기 위해 잔치를 열 계획이었지만 그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고 육씨 부인도 그가 정신이 없을 때 손님을 대접하는 것을 원하지 않아 일단 미뤄두었다.방시원의 정신 또한 그다지 좋지 않았다. 진성으로 돌아온 후부터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꿈속에서 그는 여전히 척사 탐정단의 사람이었는데 한 번 깨어나면
“아가씨.” 최 씨의 시녀인 금숙이 왕청여를 불르자 왕청여는 시선을 돌리고 창백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저 사람이 이제 3품 참장이라니.” “아가씨,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남의 일을 의논하는 건 좋지 않습니다.” 금숙은 최 씨를 오랫동안 따라다녔고 최 씨 곁에서 가장 유능한 시녀라 왕청여가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바로 알아채고 귀띔해 주었다. 그러나 왕청여는 금숙의 귀띔을 전혀 듣지 못하고 계속 말했다. “오빠는 남강으로 떠나기 직전에야 황제폐하께서 참장으로 책봉했었지. 참장은 한 곳을 지키는 주장이라는 뜻인데 그는 어디로 파견되는 것일까?” 그러자 금숙은 정색하며 말했다. “아가씨, 아가씨께서 신경 쓰셔야 하는 사람은 전 도련님입니다. 전 도련님도 오늘 여기에 오셨다고 합니다.” “대체 무슨 근거로 책봉한 것이지?” 왕청여는 금숙의 말을 못 들은 듯 씁쓸하게 말했다. “이석의 부군은 작위까지 받고 그는 3품 참장을 책봉받다니. 대체 얼마나 큰 공을 세웠기에 이러는 것일까? 그저 정보를 주고받은 것밖에 없는데 이렇게까지 하다니 전장에서 피 흘리며 싸우는 전사들이 서운해하지는 않을까?” 금숙은 왕청여의 팔을 힘껏 잡고 말했다. “아가씨, 여긴 제씨 가문입니다. 말 조심하십시오.” 팔에서 전해오는 아픔이 왕청여를 정신 들게 했다. 정신을 차린 그녀는 부끄러움과 분노가 교차하여 언짢은 말투로 말했다. “누가 너보고 나를 따라오라고 하였느냐?” 그러자 금숙이 담담하게 말했다. “부인께서 아가씨가 길을 잃을까 봐 저보고 따라가라고 하셨습니다.” 왕청여는 차갑게 말했다. “정말로 내가 길을 잃을까 봐 널 보낸 것이냐? 내가 분수도 모르고 망신을 당해 평서백부의 명성을 손상할까 봐 두려워서 그러는 건 아니고?” “아가씨께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부인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택 안에 사람이 많아 시끄러우신 것이면 저와 함께 정원에 가서 산책을 좀 하시겠습니까? 오늘은 바람이 산들산들 불어 머리를 식히기 좋을 것입니다.
이튿날 왕청여는 한껏 치장을 하고 귀밑머리에 작약 한 송이까지 꽂으며 홍이를 데리고 나갔다. 그리고 어디론가 향했는데, 그곳에 방시원이 있기만을 바랬다. 그곳에 있다면 방시원이 자신을 아직도 사랑한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만금산 아래에는 계곡이 있었는데, 계곡의 시냇물이 만금산에서 비탈을 타고 내려와 작은 폭포를 형성했다. ‘그는 기분이 좋지 않거나 무슨 일이 생겨 결정을 내리기 어려울 때면 이곳에 와서 검술을 연습했지.’ 방시원은 이전에 왕청여를 데리고 이곳에 왔었다. 홍이는 그녀를 부축하여 산에 올랐는데, 인적이 드물어 서서히 두려움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부인, 우린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아직 날씨가 더운데 더 걸을 수 있겠습니까?” “거의 다 왔다.” 왕청여는 몇 년 동안 산길을 걸어본 적이 없어 당연히 힘들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차가운 눈빛으로 홍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내가 누구를 만나든지 아무에게도 말해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그러자 홍이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아직은 규칙을 잘 모르지만 부인께서 이 산에 오는 것은 부적절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특히 여기는 사람도 별로 없으니 위험에 처해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리고 홍이는 왕청여가 비밀스럽게 누구를 만나러 가는지 몰라 갑자기 어젯밤에 금숙 언니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왕청여가 산중턱에 도착했을 때 폭포소리를 듣고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가 여기에 있을까?’ 그녀는 순간 발걸음이 무거워져 앞으로 걸어가기가 너무 두려웠다. ‘그가 없다면 밤새 잠도 못 이루고 그를 생각했던 나만 우스워지는 것 아닌가?’ 왕청여는 심호흡을 몇 번 한 후, 산길을 따라 걸어갔다. 오랫동안 오지 않은 탓에 이곳에이렇게 작은 길이 생긴 줄도 몰랐다. ‘누군가가 이곳의 경치를 발견했나 보군. 예전에 그와 함께 왔을 땐 그가 내 손을 잡고 반 키 높이의 풀을 뛰어넘는 순간 정말 짜릿하고 신선했는데.’ 산길을 굽이돌자 갑자기
왕청여는 울먹이며 말했다. “난 상관하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 무슨 명예가 남아있겠습니까? 장군부의 일을 당신도 들었겠지만 늑대 소굴에 들어간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건 모두 당신 때문입니다. 죽지 않았다면 왜 소식을 전해주지 않았습니까? 시댁에서는 날 처가로 보냈지만 난 처가에서 계속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지금의 묵 승상 부인이 나와 전북망을 위해 중매를 서지 않았다면 난 지금까지도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나는 친정에서도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형수님은 내가 눈에 거슬려서 하루빨리 시집보내려고 하는데 묵 승상 부인이 와서 혼담을 꺼내자 난 거절할 여지조차 없었습니다.” 방시원은 그녀의 말을 듣고 마음이 너무나도 괴로웠다. 그는 자신의 아내가 다른 사람에게 시집간 것뿐만이 아니라 어머니와 가족 모두가 그의 “희생”때문에 슬퍼하고 괴로워했기에 더욱 마음이 아팠다. 특히나 어머니는 전까지도 병석에 누워 있다가 최근에야 조금 나아진 상태였다. 충성과 효도는 비록 양립할 수 없지만 그래도 가족에게 너무 미안했다. 그는 그들에게 최선을 다해 보상하고 싶었지만 예전처럼 생활하기 어려웠다. 집에서까지도 자기도 모르게 긴장한 상태를 유지했었다. 그 와중에 황제폐하께서 중임을 맡겼으니 그는 자신의 생활도 제대로 할 수 없는데 어떻게 황제폐하의 기대 가득한 눈빛을 마주할지 몰랐다. 그렇게 그는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마음이 답답해서 잠시나마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 오늘 검술을 연마하러 온 것이었다. 하지만 왕청여의 말에 그는 실망시킨 사람이 한 명 더 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왕청여에게 할 수 있는 말은 한마디밖에 없었다. “내가 미안하오.” 왕청여가 눈물을 흘리며 냉소했다. “당신이 내게 뭐가 미안하단 말입니까? 당신은 내가 이석보다 못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석은 선평후부의 둘째 공자를 몇 년이나 기다렸고 진 씨 가문의 두 사람도 그렇고...” 그러자 방시원이 고개를 저었다. “난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 없소. 그리고 당
방시원은 고개를 들고 말했다. “그러니까 장군부에서 당신을 학대하고 전북방도 당신에게 잘 대해주지 않는 데다 자객까지 집에 쳐들어와 목숨을 위협해서 이혼을 하려는 것이지, 내가 돌아왔기 때문은 아니란 말이오?” 왕청여가 갑자기 앞으로 다가가 손을 뻗어 그를 껴안자 방시원은 놀라서 황급히 그녀를 밀쳐내고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왕청여는 그의 반응을 보고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가 바로 마음이 아파져 눈물을 흘렸다. “당신은 정말 날 혐오하는군요.” 방시원은 이 말을 무시하고 본론만 꺼냈다. “장군부의 일은 내가 조사하겠소.” 그러자 왕청여가 말했다. “당신이 조사할 필요 없습니다. 정녕 날 못 믿어서 그러는 것입니까? 나는 당신의 대답을 듣고 싶을 뿐입니다. 당신은 내가 혐오스럽습니까? 내가 이혼하면 저를 받아들일 것인지부터 대답해 주십시오.” 방시원은 그녀의 물음에 심호흡을 몇번이나 했지만 결국 대답은 하지 못했다. 그는 이미마음이 혼란스러워진 상태라 일이 분명해지기 전에는 섣불리 대답하기 싫었다. 그는 왕청여에 대한 죄책감 또한 있어 한참 침묵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난 당신이 혐오스럽지 않소. 그리고 그럴 자격도 없소.” 눈물을 머금은 왕청여의 눈동자에서 빛이 났다. “당신의 그 말을 들으니 안심이 됩니다. 내가 해결할 테니 기다려주십시오.” 말을 마친 왕청여는 몸을 돌려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방시원은 당장이라도 그녀를 부르고 싶었지만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말을 떠올리며 자객이 장군부에 쳐들어간 일이 간단하지 않다고 생각해 걱정되기 시작했다. ‘오월과 유월이 죽었으니 왕청여도 죽을 가능성이 아주 높아.’ 그는 무겁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아무런 선택지가 없었다. 그가 왕청여를 저버린 것이니 그녀가 정말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면 이혼을 해도 뭐라고 나무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왕청여가 다시 자신에게 시집을 온다고 해도 거절할 이유가 없고 그녀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왕청여는
최 씨는 머리가 아파 눈을 감고 머리를 문질렀다. 금숙은 계속 설득했다. “부인, 만약 이 일을 방시원에게 알려서 그가 소란을 피우면 우리 평서백부는 더 이상 명성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게다가 부인의 입에서 나간 말이라는 걸 백작께서 아시면 크게 화를 내실 겁니다.” 남강에 있는 자신의 부군을 생각하자 최 씨는 더욱 골치가 아팠다. 예전에 왕표가 진성에 있을 때는 그래도 그녀의 말을 듣고 충고를 하면 실수하지 않았었다. 그들 부부사이에는 의견이 안 맞는 게 많았는데 그녀가 참을성 있게 잘 분석해서 그를 설득해야 말을 들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듣는 척해도 마음속엔 항상 원한을 품고 있었다. 자신보다 시야가 넓은 아내를 받아들이기엔 그의 배짱이 부족했다. ‘사람마다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있고 모든 사람들이 제멋대로 살 수는 없었다. 이석도 지금은 고생 끝에 낙이 온 것이지만 그 전의 몇 년을 어떻게 살았는가? 그녀의 고통을 누가 알 수 있겠는가? 북명왕비도 지금은 왕야와 사랑이 깊어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지만, 그녀가 가족을 모두 잃었을 때의 아픔을 누가 헤아릴 수 있겠는가? 하늘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고난을 줬지만 어떻게 해결하는가에 따라 삶과 미래를 바꿀 수가 있었다. 왕청여처럼 좋은 것만 보고 달려들다가 잘못되면 바로 다른 품으로 돌아서는 사람은 도덕은커녕 사람으로서의 기본적인 양심도 없는 것이였다.’ “금숙아, 나는 평서백부인이니 평서백부를 생각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녀가 장군부와 이혼을 하는 건 반대를 하지 않겠지만 그녀가 방시원에게 들러붙어 목숨으로 바꿔온 부귀를 누리겠다는 것이라면 난 절대로 허락할 수 없다. 그녀는 그것을 누릴 자격이 없고 나도 양심이 찔려 그렇게 둘 수 없다. 방시원이 어떤 사람인지 내가 잘 알고 있지. 이 일은 방 씨 가문의 체면과도 상관있는 일이니 그는 알아도 소란을 피우지 않을 것이다. 다만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은 어머님과 부군, 그리고 왕청여의 원망이겠지.” 그녀
그렇게 다음날, 최 씨는 왕청여를 청하러 사람을 보냈지만 왕청여는 몸이 좋지 않다며 나중에 돌아온다고 전했다. 그녀는 전북망과 이혼하려는 일을 친정에게까지 알리기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전북망은 요즘 야근이라 낮에 잠을 자기 때문에 두 사람은 앉아서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게다가 멀쩡한데 갑자기 이혼하자고 할 순 없으니 무슨 일을 저질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왕청여는 그날 만금산으로 간 후부터 줄곧 피곤한 기분이 자주 들었다. 두 번은 낮잠을 자기 시작해서 전북망이 야근을 갈 때까지 깨어나지 못했는데 홍이가 저녁식사를 하라고 깨워서 겨우 일어났었다.피곤하고 졸리고 속이 울렁거리기까지, 그녀는 달거리 시간이 며칠이나 미뤄져 임신했을까 봐 걱정이 되었다. 날짜를 계산해 보면 그동안 전북망이 매일 문희거에 머물렀을 때가 나왔는데, 그땐 그들이 결혼한 후 가장 사이가 좋았던 기간이었다. 왕청여는 마음이 심란해서 제발 임신하지 말아 달라고 기도를 했다. 그녀는 감히 의사를 청하지 못하고 모자를 쓰고 홍이와 의관에 가서 맥을 짚었다. 복안당의 백발 의사가 웃으며 말했다. “축하합니다. 임신입니다.” 왕청여는 온몸의 피가 거꾸로 쏠리는 것 같았다. 비록 추측은 하고 있었지만 확진을 받으니 여전히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녀는 자신의 팔자가 참 고달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하필 지금이냐고!’ 만약 방시원이 돌아오기 전에 임신했다면 그녀는 절대 다른 마음을 품지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이미 방시원에게 털어놓아 다시는 자신의 야망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녀는 3품 참장의 부인이 되면 이번 생에 영광스럽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하지만 뱃속의 아이가 그녀의 모든 것을 망치려고 했다. 그녀는 넋이 나간 채 친정으로 돌아가 노부인의 방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내보낸 뒤 노부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몇 년 전처럼 고개를 들어 온몸을 떨며 말했다. “어머니, 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저 뱃속의 아이를 남겨둘 수 없습니다.” 노부인
이날 저녁, 송석석은 약왕당에서 받아온 약을 사여묵에게 건넸고 약의 위험성까지 자세하게 얘기했다.사여묵은 망설이는 듯한 송석석의 모습에 환하게 웃으며 위로했다.“이 정도 상해는 충분히 견딜 수 있소. 그리고 원기를 회복할 수 있는 약들도 이렇게 잔뜩 가지고 오지 않았소? 나중에 어의에게 진단만 받으면 바로 단설환을 먹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오. 남강으로 가는 길에도 단 신의의 당부를 잊지 않고 매일 약을 꼬박꼬박 챙겨 먹겠소.”“그래도 결국 독약 아닙니까? 그러지 말고 저희 다른 방법을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요?”송석석이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사여묵이 담담하게 대답했다.“내가 보기엔 지금으로써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소. 단 신의가 말을 무섭게 해서 그렇지 그 정도로 심각한 상해를 입히지 못할 거요. 그렇게 위험한 약이었다면 애당초 꺼내지도 않았겠지.”“그럼 일단 염 선생과 상의라도 해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그럴 필요 없소!”사여묵이 약을 내려놓은 뒤, 커다란 손으로 송석석의 허리를 감싸며 말을 이어갔다.“이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유리하오. 나중에 내가 대리사에서 쓰러지면 진이가 내 옥패를 들고 어의를 찾아갈 것이고 황실로 달려온 어의가 우왕좌왕하는 염 선생을 보아야 의심을 하지 않을 것이오.”송석석은 사여묵의 가슴팍에 기대어 불안한 마음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전 장군님이 너무 걱정됩니다. 몸이 회복되기도 전에 남강으로 출발해야 하는데 가는 내내 제대로 쉴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남강에 가서도 몸 상태가 회복되지 않으면 전장에 어떻게 나가시려고 그러십니까?”송석석의 걱정에 기분이 좋아진 사여묵이 다정하게 웃으며 그녀를 위로했다.“난 왕표를 무조건 대체하겠다는 게 아니오. 일단 제린을 찾아 병사들 속에 숨어 있다가 왕표가 제대로 군을 이끈다면 난 남강 구경이나 하다 올 것이오.”사여묵의 위로에도 송석석은 시름이 놓이지 않았다. 왕표가 군을 제대로 이끌지 못할 거라는 확신 때문에 두 사람이 지금 이런 모험을 하고 있는
화가 난 단 신의는 송석석의 말에 설득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버럭 언성을 높였다.“난 멍청한 사람을 돕지 않소. 당신들은 그런 천하의 멍청이가 따로 없소!”“세상에 이런 멍청이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번 한번만 더 모험하고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약속할게요.”송석석이 환하게 웃으며 말하자 단 신의가 미간을 찌푸렸다.“모험을 하고 싶어도 이제 못할 수도 있소. 돌아오면 황제께서 그 죄를 어떻게 물으실 줄 알고 이러는 것이오. 그러다가 머리가 잘릴 수도 있소.”“정말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고 해도 저에게 방법이 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단 신의는 고집을 부리는 송석석을 보며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말한 것처럼 백성들에게는 두 사람과 같은 멍청이들이 필요하긴 했지만, 단 신의는 그 멍청이가 송석석과 사여묵은 아니길 바랐다.결국 단 신의는 먼지가 뽀얗게 쌓인 작은 상자를 꺼내 먼지를 툭툭 털어내곤 조심스럽게 열었다.상자 안에는 땅콩 만한 검은 알약 하나가 있었다.“똑똑히 기억하시게. 이건 독이오. 이 약을 먹고 나면 맥박이 이상해지고 갑작스러운 발작을 일으키네. 그리고 짧은 시간내에 심장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지. 이건 그저 보여지는 현상이 아니라 실제로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네. 이 약을 먹고 3일 정도 버틸 수 있는데 3일 뒤에는 반드시 단설환을 복용해야 하오. 그러지 않으면 심장에 영구적인 손상을 입을 수도 있소.”단 신의의 말에 송석석이 흠칫 놀란 표정이었다.“정말로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뜻입니까?”“그럼 당연하지. 이건 독이오.”“그럼 단설환을 먹고 나면 바로 정상적인 몸 상태로 돌아올 수 있는 겁니까?”“그렇지 않소. 며칠 동안 안정을 취해야 하네. 눈속임을 하고 나서 바로 출발하면 절대 안 되오.”위험할 수도 있다는 단 신의의 말에 송석석은 단 신의가 건네는 약을 받지 않았다.“그럼 혹시 다른 약은 없는지요? 폐하를 속이고 나서 장군님은 바로 출발하려고 할 겁니다. 실제로 중독되
사여묵은 온몸에 힘이 쭉 빠진 채 침대에 앉아 등을 벽에 기대고 있었다.남강에서 돌아와 병권을 황제께 바친 뒤에도 황제는 여전히 사여묵을 의심하고 경계했지만 사여묵은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황제가 의심과 경계를 조금은 풀 수 있도록 사여묵은 지금까지 최대한 언행에 조심했으며 서경과의 담판이 끝나고 나서도 황제 앞에서 일부러 약한 모습을 보였다.나중에 혹시라도 전쟁이 일어났을 때 더 이상 황제의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조심하고 또 조심했는데 황제의 태도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사국이 이번에 다시 쳐들어온 건 사국과 손잡은 내국 역적이 남강에 이미 함정을 파 놓았다는 사실을 폐하께서도 알고 계신 것이오. 그래서 사국은 저렇게 겁도 없이 남강을 계속 공격하고 있는 것이지. 하지만 폐하는 내가 폐하께 대한 위협이 사국 병사들을 물리치는 것보다 더 중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소.”사여묵이 씁쓸하게 웃으며 마지막 남은 술을 벌컥벌컥 마시자, 송석석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황제께서 이런 결정을 하신 게 처음은 아니잖아요.”사여묵은 송석석을 품에 꼭 끌어안은 채 그녀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고 조금 전 혼자 술을 마시고 있을 때부터 계속 이렇게 숨막히는 인고를 견뎌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다.“난 무조건 그런 비극이 다시 일어나게 하지 않을 것이오.”송석석을 놓아준 사여묵은 강경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말을 보탰다.“난 당신처럼 용감하게 변할 것이오.”예전에 송석석이 입궁하여 황제께 상황을 보고했을 때 황제는 그녀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그때 당시 송석석은 마냥 기다리거나 손을 놓은 것이 아니라 홀로 남강까지 찾아갔다.송석석은 그때 자신의 생사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한편, 사여묵의 말을 들은 송석석은 바로 뜻을 알아챘고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전 장군님을 응원합니다. 아무 걱정도 하지 말고 다녀오세요. 폐하께서 아무것도 묻지 않으신다면 전 평소와 같이 진성을 지키고 있을 것이고 만약 폐하께서 죄를 물으신다면 전 북명
사여묵이 방시원을 잘 달래어 돌려보낸 뒤, 염구진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다들 감정이 격해지는 것도 당연합니다. 남강 땅을 되찾기 위해 그들은 청춘을 다 바쳤는데 이제 또 전쟁이 난다고 하니 마음이 안 좋을 수밖에 없지요.”말을 하던 염구진은 고개를 돌려 사여묵을 힐끔 쳐다보았으며 방시원의 마음을 가장 잘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은 사여묵일 것이라고 생각했다.한편, 한참동안 말이 없던 사여묵이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잘 지켜보고 있다가 무슨 소식이 들리면 바로 나에게 보고하게.”“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사여묵은 다시 연주에 관한 일에 대해 물었다.“연주에서 성문을 봉쇄했다고 들었는데 소식은 끊기지 않은 것이오? 혹시 그쪽에서 움직임이 보이지는 않나? 계획대로 행동하고 있는 건가?”“아직 확실한 소식은 접하지 못했지만 소인은 모성을 믿습니다. 계획한대로 잘 하고 있을 겁니다.”“그래. 나도 그자를 믿네.”염구진의 대답에 사여묵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성은 연주 좌부승이었고 연왕이 반역을 도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여묵은 바로 사람을 시켜 모성에게 접근했다.총명하고 무술 실력까지 겸비한 모성은 선황제 때부터 이름을 널리 알렸지만 성격이 너무 오만했기에 아직까지도 직급은 그저 부승이었다. 평소에 시를 즐겨 쓰는 모성은 시문의 대부분 내용이 세상을 향한 불만 표시였기에 연왕은 모성이 조정에 불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여 그를 곁에 두기로 했다.그렇게 모성은 오랜 세월동안 외로운 싸움을 했다. 그 중 더 높은 관직으로 승진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모성은 연왕의 반역죄 증좌를 수집하기 위해 모든 걸 포기하고 연주에 남았다.하지만 연왕은 섣불리 움직이지도 않고 핵심 병력의 상황도 모성에게 전혀 알려주지 않았으며 심지어 중요한 일을 논의할 때에는 모성에게 나가 있으라고 하기도 했다.때문에 모성은 하상지의 잡일을 처리해주면서 간간이 상황을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확실한 증좌가 없는 탓에 모성은 지금까지도 연왕
”소인도 오늘 폐하께 감히 많은 얘기를 드리지는 못했습니다. 혹시 폐하께서 오해하실까 봐 왕야를 찾아가지도 못했지요.”이덕회가 대답하자 목 승상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잘하셨습니다. 병부는 최대한 사적으로 북명왕을 접촉하지 않아야 합니다. 아니면 혹시 병사 감찰대로 폐하께 한 사람을 추천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혹시 왕표 그자가 남강 전쟁 원수를 맡기엔 걱정된다면 방시원 장군을 황제께 추천해보십시오.”“하지만 방시원 장군님은 주군 총병이라 남강 전쟁에 보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방 장군을 보낼 바에는 차라리 방천허와 제린에게 전사를 맡기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내란이 터지고 있는 지금 진성 주군에 대장이 없어서는 안 되는 일이지요.”이덕회의 말에 목 승상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대꾸했다.“도리는 그게 맞지요. 제 말은 폐하께 왕야 한 사람만 추천할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몇 명 더 추천하라는 뜻입니다.”이덕회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술을 살짝 오므렸다.“소인이 솔직한 성격이라 말을 돌려서 할 줄 모르니 그냥 말하겠습니다. 소인이 보기엔 왕야가 가장 적합한 원수인데 어차피 역적은 아직 나라에 위협이 될만한 존재는 아니니까 나중에 목종욱한테 처리하라고 하면 되지요.”“그 어떤 반역자도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일은 그리 단순한 일이 아닙니다. 알다시피 반역자들은 사국 사람들과도 엮여 있습니다. 사국과 손을 잡았다는 건 그만큼 충분한 준비를 해왔다는 뜻이지요. 절대 쉬운 상대가 아닙니다.”목 상승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이덕회가 대답했다.“승상 말씀도 일리가 있는 것 같네요. 그럼 소인 북명왕과 함께 내일 다시 궁으로 가서 폐하를 만나 뵙고 내란에 대해서도 의논해보겠습니다.”“그렇게 합시다!”목 승상이 고개를 끄덕였다.한편, 사청엽은 여전히 옥에 갇혀 있었다. 황제가 아직 명령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사청엽은 자신이 사형을 면치 못할 거라고 확신했다.이날 저녁, 혼인을 앞둔 방시원이 황실을 찾아왔다. 치석
한편, 목종욱은 최선을 다해 산적들을 잡아들이고 있었다. 싹을 다 자르진 못했지만 크게 겁을 먹은 산적들이 산 속에 꽁꽁 숨어서 다시는 문제를 일으키진 않을 것이다. 숙청제도 제린이 보낸 소식을 접했고, 사국 대군들이 변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제린은 사국 대군이 25만 명 정도 된다고 보고를 했고 여전히 빅토르가 대군을 이끌고 있다고 했다.숙청제는 바로 병부 대신들을 불러 남강에서 사국의 25만 대군을 상대로 승산이 있는지 의견을 물었다.이덕회는 황제의 질문 자체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이길 수 있는지 없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최대한 신속하게 전쟁을 이겨야 한다는 것이 관건이다.“폐하, 남강은 오랜 시간의 전사와 왜란으로 지칠 대로 지친 상태입니다. 남강 땅은 아직 전쟁에 버틸 수 있지만 백성들은 더 이상 전쟁을 견딜 힘이 없습니다. 만약 정말 전쟁이 난다면 확실한 한 방으로 빠르게 적을 물리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메뚜기 떼처럼 매년 한 번씩 이렇게 날뛸 것입니다. 이는 저희 남강 지역의 치안에 치명적인 상해를 입힐 수밖에 없습니다.”“그럼 자네 생각엔 송씨 가문 병사들과 북명군이 적들을 신속하게 물리치지 못할 것 같은가?”숙청제의 물음에 이덕회가 바로 대답했다.“이제 송씨 가문 군대아 북명군을 나눌 것도 없습니다. 전부 다 남강 병사들입니다.”이덕회는 숙청제가 남강의 병사들을 모은 게 송씨 가문과 북명왕이라고 생각할까 봐 일부러 강조했지만 숙청제의 생각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만약 남강 전쟁이 오래 전에 끝난 전쟁이고 사여묵이 병권을 상납한지 꽤 오래 됐다면 숙청제는 이런 걱정을 전혀 하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왕표가 군심을 얻지 못하고 있는 지금, 남강에 있는 병사들이 송씨 가문 군대이든 북명군이든 결국 전부 사여묵의 명령에 따르고 있다.사여묵을 남강에 보낸다는 건 병권을 다시 사여묵에게 쥐여주어야 한다는 뜻이다.현재 연왕도 역모를 일으켰고 황제 자리를 대놓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
숙청제가 사여묵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그건 사국이 네 위엄에 겁을 먹은 것이야. 빅토르가 너를 많이 두려워하는 것 같아.”사여묵은 숙청제의 말이 진심이 아니라 살짝 비꼬고 있다는 것을 잘 알기에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황제께서 소인을 너무 높이 평가하고 계신 겁니다. 소인은 그렇게 대단한 능력도 없고 빅토르도 소인에게 겁을 먹어서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전쟁 때문에 너무 많은 걸 잃었기 때문입니다.”“네 말대로 전쟁으로 많은 걸 잃었다면 짧은 시간 내에는 원기를 쉽게 회복할 수 없지 않느냐?”“소인이 감히 추측을 해보자면 사국은 원기를 회복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절대 저희 남강이 순조롭게 발전하는 모습을 보고 있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가끔씩 비열한 수법으로 훼방을 놓아야 정상인데 지금까지 그런 적이 한 번도 없는 게 너무 수상합니다.”숙청제가 사여묵을 빤히 쳐다보다가 물었다.“그럼 네 말은 누군가가 사국과 손잡고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냐?”“그럴 가능성도 있지 않겠습니까?”사여묵은 전에도 숙청제와 이 문제를 분석하고 논의한 적이 있었으며 그때 당시 숙청제도 사여묵의 의심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주관적으로 보았을 때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숙청제는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사여묵은 그런 황제를 힐끗 쳐다보고는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지만 꾹 참았다.사실 숙청제도 왕표가 무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사국을 상대하려면 사여묵을 다시 남강 전장으로 내보내는 게 가장 적합한 선택이라고 생각하고 있다.하지만 숙청제는 쉽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그때 당시 겨우 송석석을 이용하여 사여묵에게서 병권을 빼앗았는데 이렇게 쉽게 다시 내놓을 수가 없었으며 최후의 순간이 오지 않는 이상, 숙청제는 절대 사여묵을 전장에 내보낼 생각이 없었다.때문에 사여묵이 며칠동안 어서방에 남아 숙청제와 이런저런 상의를 해봤지만 숙청제는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어서방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고 아무도 먼저
그날 밤, 연왕은 뜬 눈으로 밤을 지새게 되었다.솔직히 지금 상황은 연왕의 오랜 계획과 차질이 조금 있었다. 지방 지역에서 역모를 일으키고 심지어 진성에 준비된 게 아무것도 없이 무작정 진성까지 쳐들어간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연왕과 무상의 계획은 따로 있었다.일단 병사들을 일정한 수량까지 늘이고 아무도 모르게 서서히 진성 일대로 전이하여 병사들을 안치한 뒤 적절한 시기를 기다릴 생각이었다.그땐 사온이 진성에서 계략을 짜고 있을 것이고 많은 세가들의 지지도 받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해 예전에 고부진의 딸들을 세가에 시집 보냈기에 세가들은 지지할 수밖에 없다.그리고 나서 적절한 시기만 잘 고르면 반드시 성공한다. 진성에 전란이 일어나고 산적과 유랑민들이 판을 칠 때 연왕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성내로 쳐들어가 바로 궁 전체를 포위할 생각이었다.하지만 지금, 갑자기 대석촌에 일이 터져 버려 사청엽이 체포된 탓에 연왕은 급하게 병사들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승산이 너무 낮았기에 연왕도 망설였던 것이며 지방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난다고 해서 진성까지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물론 백성들은 반란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고 한동안 수군거리겠지만 대부분 백성들은 갑작스럽게 일어난 반란과 격문을 그저 우습게 생각할 것이다.그뿐만 아니라 사국에서 남강을 공격한다고 해도 처음 있는 일이 아니고 사국에서 오래 전부터 호시탐탐 야망을 보였기에 황제가 나랏일에 관심이 없어서 일어난 일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그리고 아직 사국과의 전쟁이 일어나지도 않았고 전패했다는 소식도 없기에 상국 무장이 무능하다는 비판을 하기에도 애매했다.나라가 평안하고 백성들이 태평한 상황에서 연주도 꽤 부유한 땅이었기에 괜히 문제를 만들고 싶어도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때문에 모두 그저 연왕이 언제 잡히는지, 언제 역모죄로 목이 잘릴지를 보고 싶어할 뿐이었다. 그리고 상국에는 사국 사람들을 물리친 북명왕이 있기에 다들 역적 따위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으며 되레 연왕이 왜 역모를 일으키
무상이 아니라는 말에 연왕은 회왕에게로 고개를 돌렸고 화들짝 놀란 회왕이 변명하려던 그때, 연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회왕일 리는 없어.”회왕은 의심조차 하지 않는 연왕의 태도에 기분이 조금 묘했다.한편, 연왕은 당연히 회왕을 의심할 리가 없었다. 회왕은 무일푼으로 연주로 왔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진성에서도 아무런 성과도 따내지 못했으며 사온의 비교 대상이 될 자격조차 없었다.회왕이 연주에 온 뒤로 연주 백성들은 회왕을 만나면 겉으로는 왕야라고 부르며 인사를 올리긴 하지만 뒤에서는 다들 그를 만만하게 여기고 아니꼽게 생각했다.때문에 회왕은 절대 마총우를 명령하지 못한다.조금씩 차분해진 연왕은 다시 자리에 앉더니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말했다.“다들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마총우 그자가 귀순한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가 나를 무너트리고 싶어서 일부러 꾸민 짓인가?”여전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무상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마총우가 귀순한 건 절대 아닐 것입니다. 왕야께서 격문을 보낸 지 며칠밖에 되지 않았고 더군다나 저희 병력은 대여섯 군데에 분산되어 있습니다. 전의하는 데만 6개월 넘게 걸렸는데 조정에서 절대 쉽게 조사해낼 수 없을 겁니다. 그런데 조정에서 마총우 그자를 찾아서 귀순 시킨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날 일부러 무너트리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는 거네. 그럼 그자가 누구일 것 같은가?”연왕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연왕이 몇 년 동안 끌어 모은 사람들 중에 황제의 친인척과 세도가들도 있지만 친왕은 연왕과 회와 두 사람밖에 없었다.연왕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상대가 없었다. 연왕의 부하들 중에서 황제의 친인척들이 제일 무능하고 멍청했으며 파장을 일으킬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리고 종합적으로 생각해보았을 때 가장 의심되는 상대는 여전히 무상이었다.하지만 역모의 마음을 품은 연왕이 무상을 끌어들이고 나서 지금까지 무상은 강한 충성심을 보였고 심지어 평소에 연왕에게 쓸만한 제안도 가장 많이 하고 계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