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시원은 고개를 들고 말했다. “그러니까 장군부에서 당신을 학대하고 전북방도 당신에게 잘 대해주지 않는 데다 자객까지 집에 쳐들어와 목숨을 위협해서 이혼을 하려는 것이지, 내가 돌아왔기 때문은 아니란 말이오?” 왕청여가 갑자기 앞으로 다가가 손을 뻗어 그를 껴안자 방시원은 놀라서 황급히 그녀를 밀쳐내고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왕청여는 그의 반응을 보고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가 바로 마음이 아파져 눈물을 흘렸다. “당신은 정말 날 혐오하는군요.” 방시원은 이 말을 무시하고 본론만 꺼냈다. “장군부의 일은 내가 조사하겠소.” 그러자 왕청여가 말했다. “당신이 조사할 필요 없습니다. 정녕 날 못 믿어서 그러는 것입니까? 나는 당신의 대답을 듣고 싶을 뿐입니다. 당신은 내가 혐오스럽습니까? 내가 이혼하면 저를 받아들일 것인지부터 대답해 주십시오.” 방시원은 그녀의 물음에 심호흡을 몇번이나 했지만 결국 대답은 하지 못했다. 그는 이미마음이 혼란스러워진 상태라 일이 분명해지기 전에는 섣불리 대답하기 싫었다. 그는 왕청여에 대한 죄책감 또한 있어 한참 침묵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난 당신이 혐오스럽지 않소. 그리고 그럴 자격도 없소.” 눈물을 머금은 왕청여의 눈동자에서 빛이 났다. “당신의 그 말을 들으니 안심이 됩니다. 내가 해결할 테니 기다려주십시오.” 말을 마친 왕청여는 몸을 돌려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방시원은 당장이라도 그녀를 부르고 싶었지만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말을 떠올리며 자객이 장군부에 쳐들어간 일이 간단하지 않다고 생각해 걱정되기 시작했다. ‘오월과 유월이 죽었으니 왕청여도 죽을 가능성이 아주 높아.’ 그는 무겁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아무런 선택지가 없었다. 그가 왕청여를 저버린 것이니 그녀가 정말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면 이혼을 해도 뭐라고 나무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왕청여가 다시 자신에게 시집을 온다고 해도 거절할 이유가 없고 그녀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왕청여는
최 씨는 머리가 아파 눈을 감고 머리를 문질렀다. 금숙은 계속 설득했다. “부인, 만약 이 일을 방시원에게 알려서 그가 소란을 피우면 우리 평서백부는 더 이상 명성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게다가 부인의 입에서 나간 말이라는 걸 백작께서 아시면 크게 화를 내실 겁니다.” 남강에 있는 자신의 부군을 생각하자 최 씨는 더욱 골치가 아팠다. 예전에 왕표가 진성에 있을 때는 그래도 그녀의 말을 듣고 충고를 하면 실수하지 않았었다. 그들 부부사이에는 의견이 안 맞는 게 많았는데 그녀가 참을성 있게 잘 분석해서 그를 설득해야 말을 들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듣는 척해도 마음속엔 항상 원한을 품고 있었다. 자신보다 시야가 넓은 아내를 받아들이기엔 그의 배짱이 부족했다. ‘사람마다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있고 모든 사람들이 제멋대로 살 수는 없었다. 이석도 지금은 고생 끝에 낙이 온 것이지만 그 전의 몇 년을 어떻게 살았는가? 그녀의 고통을 누가 알 수 있겠는가? 북명왕비도 지금은 왕야와 사랑이 깊어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지만, 그녀가 가족을 모두 잃었을 때의 아픔을 누가 헤아릴 수 있겠는가? 하늘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고난을 줬지만 어떻게 해결하는가에 따라 삶과 미래를 바꿀 수가 있었다. 왕청여처럼 좋은 것만 보고 달려들다가 잘못되면 바로 다른 품으로 돌아서는 사람은 도덕은커녕 사람으로서의 기본적인 양심도 없는 것이였다.’ “금숙아, 나는 평서백부인이니 평서백부를 생각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녀가 장군부와 이혼을 하는 건 반대를 하지 않겠지만 그녀가 방시원에게 들러붙어 목숨으로 바꿔온 부귀를 누리겠다는 것이라면 난 절대로 허락할 수 없다. 그녀는 그것을 누릴 자격이 없고 나도 양심이 찔려 그렇게 둘 수 없다. 방시원이 어떤 사람인지 내가 잘 알고 있지. 이 일은 방 씨 가문의 체면과도 상관있는 일이니 그는 알아도 소란을 피우지 않을 것이다. 다만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은 어머님과 부군, 그리고 왕청여의 원망이겠지.” 그녀
그렇게 다음날, 최 씨는 왕청여를 청하러 사람을 보냈지만 왕청여는 몸이 좋지 않다며 나중에 돌아온다고 전했다. 그녀는 전북망과 이혼하려는 일을 친정에게까지 알리기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전북망은 요즘 야근이라 낮에 잠을 자기 때문에 두 사람은 앉아서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게다가 멀쩡한데 갑자기 이혼하자고 할 순 없으니 무슨 일을 저질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왕청여는 그날 만금산으로 간 후부터 줄곧 피곤한 기분이 자주 들었다. 두 번은 낮잠을 자기 시작해서 전북망이 야근을 갈 때까지 깨어나지 못했는데 홍이가 저녁식사를 하라고 깨워서 겨우 일어났었다.피곤하고 졸리고 속이 울렁거리기까지, 그녀는 달거리 시간이 며칠이나 미뤄져 임신했을까 봐 걱정이 되었다. 날짜를 계산해 보면 그동안 전북망이 매일 문희거에 머물렀을 때가 나왔는데, 그땐 그들이 결혼한 후 가장 사이가 좋았던 기간이었다. 왕청여는 마음이 심란해서 제발 임신하지 말아 달라고 기도를 했다. 그녀는 감히 의사를 청하지 못하고 모자를 쓰고 홍이와 의관에 가서 맥을 짚었다. 복안당의 백발 의사가 웃으며 말했다. “축하합니다. 임신입니다.” 왕청여는 온몸의 피가 거꾸로 쏠리는 것 같았다. 비록 추측은 하고 있었지만 확진을 받으니 여전히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녀는 자신의 팔자가 참 고달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하필 지금이냐고!’ 만약 방시원이 돌아오기 전에 임신했다면 그녀는 절대 다른 마음을 품지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이미 방시원에게 털어놓아 다시는 자신의 야망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녀는 3품 참장의 부인이 되면 이번 생에 영광스럽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하지만 뱃속의 아이가 그녀의 모든 것을 망치려고 했다. 그녀는 넋이 나간 채 친정으로 돌아가 노부인의 방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내보낸 뒤 노부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몇 년 전처럼 고개를 들어 온몸을 떨며 말했다. “어머니, 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저 뱃속의 아이를 남겨둘 수 없습니다.” 노부인
출가 전에 머물던 방으로 돌아온 왕청여는 최 씨가 방씨 가문으로 갔다는 사실을 몰랐기에, 그저 어머니와 함께 그녀를 어떻게 도울지에 대해 의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왕청여는 어머니께서 불같이 화를 내셔도 장군부에서 계속 지내도록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장군부는 그야말로 지옥이었고 유월과 오월이 죽어가던 곳이기도 했으니 말이다.게다가 방시원을 금쪽같이 생각했던 어머니기에 왕청여와 다시 만난다면 분명 기뻐할 것이다.왕청여는 그곳에 잠시 머물다 어머니의 상태가 괜찮아졌다는 말에 급히 장군부로 돌아갔다. 아니면 형수에게 혼날 게 뻔했다.그녀는 엄숙한 얼굴로 설교하는 최 씨가 너무 짜증이 났다. 도대체 무슨 권위로 그런 표정을 하는지, 오라버니 작위 덕분에 백부 부인이 된 것인데 뻔뻔하게 굴었다. 게다가, 왕청여가 친정에 머무르려면 명분이 필요했었다. 부의가 그녀의 체질을 잘 알고 있기에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친정에서 지내며 몸을 돌보겠다고 하면 장군부에서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신중을 기하기 위해 왕청여는 홍이와 함께 약당으로 향했다. 홍이에게 진맥을 받게 하고 약을 짓고 돌아가서 몸이 안 좋다고 말할 생각이였다.그 약들은 당연히 홍이에게 먹일 것이다.약당은 진성에서 가장 큰 의원으로 진료하는 의사만 해도 스무 명이 넘었기에 약당에서 받아온 약이라면 충분히 신뢰를 줄 수 있었다. 사실 홍이는 건강했지만, 8월 초의 맹호 같은 더위로 내열이 쌓여 있었기에 의사는 진맥 후 더위를 풀고 열을 내려주는 차를 몇 첩 지어 주었다.약을 받기 위해 기다리던 중, 왕청여는 약당을 찾은 송석석과 시만자와 마주치고 말았다. 기분이 잡친 왕청여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여기서 만나게 되다니, 진성이 너무나 작다는 생각이 들었다.재빨리 고개를 돌린 왕청여는 그만 너무나 익숙한 실루엣을 보고 말았다!그 순간, 온몸의 피가 거꾸로 흐르는 듯, “윙”하는 소리와 함께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가 떠올렸다. 그 실루엣은 바로 노세진이었다. 하필이면 노세진이
그러자 시만자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물었다. "이렇게 많이 써도 되는 것입니까? 단신 대부께서 노하지 않겠습니까?" 육세진이 억지스런 미소를 띄며 답했다. "괜찮습니다, 왕비께서 친히 가지러 오신 것이니 무엇을 가져가셔도 대부님께서는 노하시지 않으실 겁니다. 이는 전부터 단신 대부께서 허락하셨습니다." "단신의께서 석석을 참으로 각별히 여기시는 듯하네요, 부럽군요." 육세진도 옆에서 듣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단신 대부께서는 왕비를 친딸처럼 여기시지요." "그렇겠지요. 당시 남강 전장에 나갈 적에 약을 잔뜩 짊어지고 온 석석이 그것들 모두 단신 대부께서 주신 것이라 했습니다." 시만자는 송석석에게 팔짱을 끼며 다시 물었다."참, 아까 밖에서 왕청여를 보았는데, 노 선생도 왕청여를 알고 계시지요? 사촌 동생인 방시원씨의 전 부인였지 않습니까?" 그 순간 칼이 한쪽으로 기울더니 당황한 노세진은 그만 손가락을 베이고 말았고 급기야 피가 흘러내렸다. "어찌 그리 조심성이 없으십니까? 얼른 붕대를 감으시지요!" 시만자가 걱정스레 말하자, 육세진은 서둘러 서랍에서 거즈를 꺼내 손가락에 감고는 어색하게 얼버무리며 화제를 돌렸다. "별일 아니니 괜찮습니다. 인삼이 이 정도면 충분하신지요?" "충분합니다." 송석석이 종이에 인삼편을 싸면서 말했다. 대략 일곱 여덟 편은 되어 넉넉했다.“이제 다른 약도 좀 챙겨 주시오. 난 약리학에 대해 잘 알지 못하니 노 선생께서 알아서 주시면 됩니다." 육세진은 약 두 병을 꺼내 건네주다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잘못 들었습니다. 실수하였군요." 그러면서 서둘러 한 병을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고, 또 다른 작은 무광의 도자기 병을 꺼내 건넸다. "이건 '양혈환'이라 하여 기혈을 보하는 데 좋고 또 다른 약은 심장이 두근거리고 불안할 때 쓰이는 것입니다. 밤에 잠이 오지 않을 때 한 알... 혹은 두 알 정도 드시면 됩니다. 해산을 앞두고 가장 중요한 것은 기혈과 기력을
그녀는 이제 왕비였기에 승은백부 사람들 모두 나와 맞이하였다. 송석석은 이러한 의례를 몹시 번거로워해 자주 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형식적인 인사 후 그녀는 바로 란이를 만나러 갔다. 언니가 왔다는 소식에 란이는 무척 기뻐하며 배가 부른 몸을 이끌고 나와 반겼다.송석석도 자연스럽게 그녀의 팔짱을 끼면서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배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배가 많이 불렀는데 불편하지 않느냐?" "괜찮습니다. 다만 밤에 잠을 깊이 자지 못할 뿐입니다." 란이가 웃으며 덧붙였다. "허나 가장 힘든 시기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태교를 위해 침대에서만 누워 지내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거의 토할 지경이었습니다." "다 나아질 것이다." 그녀들이 방에 들어서니 그곳에는 석소 사저와 라 사저가 있었는데, 한 명은 옷을 만들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실을 뜨고 있었다. 그들은 송석석이 온 것을 보자 고개를 번쩍 들며 인사를 건넸다. "왔어?" "그간 무사하셨습니까?" 송석석 또한 공손히 인사를 건넸다.방 안에는 또 다른 여인이 자수를 하고 있었고 북명왕비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일어나 인사하였다. "문연이 북명왕비마마께 인사드리옵니다." 송석석은 그녀를 알아보았다. 문연은 연유와 함께 승은백부로 들어온 상인의 여식이고 단아하며 얌전해 보였다. 송석석도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래." "문연은 저와 자주 함께 시간을 보내주곤 합니다.”란이는 확실이 전보다 많이 밝아진 모습이였다.“저에게 많은 재미난 이야기들을 들려주곤 하지요. 예전에 부친께서 장사 때문에 먼 길을 떠나야 할 때마다 형제들이 번갈아 따라가고 해서 견문이 넓은 편입니다." 그러자 문연은 부끄러워하며 웃었다. "견문이라 하기엔 너무 보잘것없사옵니다." 두 사람이 잘 지내고 있는 것 같고 란이가 많이 밝아진 것을 본 송석석은 마음이 한결 놓였다.그녀는 인삼편과 약을 석소 사저에게 건네며 말했다. "출산할 때 필요할 것이니 잘 보관해
최 씨의 눈을 마주한 방시원은 입을 떼기 어려운 듯 잠시 머뭇거렸다. 이는 남자의 자존심과 관련된 문제라,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것이다."정녕.. 모든 것을 알았단 말이오?" 최 씨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보며 물었다."전부 다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방시원이 한숨을 내쉬며 다시 물었다. "그녀가 제 사촌 형을 흠모하였고, 정표도 주고받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것이 사실입니까?""정표를 주고받았다고?" 최 씨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예 모르고 있었다.그때 자리에서 일어선 방시원이 책상 서랍에서 옥패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것은 그녀가 예전에 살던 방 침대 밑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침대 다리와 벽 사이에 끼여 있었지요. 이 옥패는 제 사촌 형의 것입니다."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침대 밑에서 발견되었으니 아마 잠자기 전에 꺼내서 보곤 했나 봅니다. 마음속 깊이 그리워하고 있었던 거겠지요. 언제부터 그런 마음을 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늘 우리가 서로를 사랑한다고 믿었는데 하지만 그녀는 다른 사람을 품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부인께서도 이미 알고 계셨던 거지요?"그의 말에 최 씨는 가슴이 아팠다. 마음이 너무나 깨끗한 이 남자는 조금의 의심조차 품지 않았다. 침대 밑에서 발견된 옥패를 보고도 그저 그녀가 잠 못 이룰 때 꺼내 보았을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사람으로서, 세상에 대한 의심과 경계를 가지는 것이 당연할 법도 한데, 왕청여에 대해서는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최 씨는 그의 슬픈 눈빛을 더 이상 마주할 수 없어 그냥 모든 것을 털어놓기로 했다. "그대가 남강에 출정한 지 반년쯤 되었을 때, 아가씨가 모친 앞에 무릎을 꿇고 한 달 동안 친정에 머물게 해달라고 청했소. 동시에, 낙태약도 구해달라고도 했소."방시원의 손에 들린 옥패가 바닥에 떨어지며 쨍그랑 소리를 냈다.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버렸다."뭐라 하셨습니까?" 최 씨는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방시원은 한참 뒤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비밀로 할 테니. 부인은 안심하시지요.." 바닥에 떨어진 옥패를 바라보는 최 씨는 순간 두려움에 휩싸였다.이 이야기를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녀는 사실 오랫동안 고민해 왔고 그동안 너무나도 괴로웠다.그렇게 이 일은 묻어둔 지뢰와도 같아 언제 터질지 알 수 없어 두려웠는데 이렇게 다 털어놓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그녀는 방시원이 비밀을 발설하지 않을 것임을 믿었다. 만약 발설하여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평서백부의 죄는 어디까지나 평서백부가 감당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전장의 살육을 겪으며 피비린내 나는 전투 속에서 살아남은 방시원은 서서히 평정을 되찾았다. 그는 최 씨에게 정중히 절했다. "부인께서 가문의 명예를 걸고 진실을 알려 주신 것을 보니, 저를 진심으로 아끼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저는 평서백부가 비난과 비방에 휘말리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이 일은 저로 끝날 것이니 더 이상 아무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저도 사촌 형이나 그녀를 찾아가 따지지 않겠습니다. 그녀가 전북망과 이혼을 하든, 계속 살든 이제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어머니께서 최근 제 혼사에 대해 이야기하셨으니, 이제 그 소식을 널리 퍼뜨려 왕청여가 더 이상 미련을 가지지 않도록 할 생각입니다." 최 씨는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 오랫동안 참아왔던 눈물이었고 더는 참을 수 없었다.세상에 모든 남자가 방시원과 같았다면 모든 여인들은 복 받을 정도로 좋은 사람이였다. 방시원의 눈에도 눈물이 맺혔으나, 그는 강하게 참아내고 있었다. 재혼한 왕청여를 그는 이해하려 했고,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참전한 지 반년도 채 되지 않아 사촌 형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것은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그는 남강 전장에서 편지를 가장 자주 쓰는 사람이었기에 사람들은 그를 두고 '아내바보'라 농담을 던지곤 했다. 그 당시 송 원수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
시만자는 원래 그들의 몸에 더 많은 구멍을 뚫어줄까도 생각했으나 보주의 말을 듣고 멈추기로 했다. 몇 번 더 찌른다면 피가 너무 빨리 흘러 그들이 너무 쉽게 죽을수도 있어서였다.송석석은 조상 묘지 앞의 작은 사당에서 향을 가져와 불을 붙여 향로에 꽂았다. 그러고는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무릎을 꿇고 세 번 큰절을 올렸다. 그녀는 절을 올리면서 먼저 떠난 가족들이 저세상에서 이 장면을 보고 있을 것이라 믿었다.사여묵 역시 향을 피우고는 그녀 옆에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을 잡았는데, 송석석이 이미 눈물범벅이 되어 있어 그는 더욱 마음이 아팠다. 사여묵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범인이 이미 처형되었으니 장모님도 저세상에서 이제는 편히 쉴 수 있을 것이오.”송석석은 그들이 정말로 안식을 얻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그들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비록 복수는 했지만 마음속 고통은 조금도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강해지고 행복해져야만 그들에게 진정한 위로가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서경의 두 정탐꾼은 아직 죽지 않았으나 과다 출혈로 의식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들은 서경 말로 무언가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송석석과 시만자 등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고 오직 사여묵만이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바로 “송구하다”라는 말이었다.그들 역시 자신의 잘못을 알지만 단지 인정하기 싫었을 뿐이었는데, 이제 죽음을 앞두고 있으니 그동안 저지른 일들이 하나하나 떠오르는듯 했다. 송구하다는 말이야말로 그들이 이 묘지 앞에서 비로소 할 말이었다.사여묵이 송석석과 보주에게 전했다. “이자들이 송구스럽다고 말하는구나.”보주는 여태 애써 눈물을 참고 있었는데, 사여묵의 말을 듣자마자 결국 눈물을 터뜨리며 시만자의 품에 와락 안겼다.“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송구스럽다고 해서 이 모든 일이 없어지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보주는 목이 찢어질 듯한 울음을 터뜨리며 외쳤다. 단지 송구하다는 말로 모든 죄
일행은 이상서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고 송석석은 내내 보주의 손을 놓지 않았다.그리고 곧 두 명의 서경 정탐이 끌려 나왔는데 그들의 옷은 이미 너덜너덜해지고 피가 묻어있었으며, 얼굴은 이목구비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부어 있었다. 그들은 땅에 무릎을 꿇고 있었는데 몸이 앞쪽으로 쏠려 거의 넘어져 엎어질 지경이었다.보주는 눈에 핏대를 세운 채 그런 그들을 노려보았다.그녀와 송석석은 단 하루도 진북후부의 멸문에 대한 복수를 잊은 적이 없었다.이제 대세는 정해졌고 그녀도 마침내 가족과 송 부인 등에게 복수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그녀의 가슴 속에 있던 슬픔과 분노는 산을 무너뜨릴 듯한 기세로 솟구쳐 나왔다.보주는 당장 달려가 주먹과 발길질을 퍼붓고 싶었으나 이상서 앞에서 무례하게 굴어 왕야와 아씨의 얼굴을 깎아내릴 수 없었다.이대인이 말했다. “이 두 정탐은 형부에 보내졌을 때까지도 죽음을 각오한 듯 오만한 태도였습니다. 하관이 직접 고문을 한 것은 아니지만, 일부 사람들이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뺨을 몇 대 때렸습니다. 그들의 몸에 난 상처도 이미 잡혀 올 때부터 있었습니다.”그러자 사여묵은 평 사저의 말이 떠올랐다. 그들은 역시나 심하게 맞은 후 여기에 데려온 것이다.사여묵은 가볍게 허리를 굽히고는, 몽동이에게 그들을 데리고 송가의 조상 묘지에 가라고 지시했다.바람에 흔들리는 등불이 그림자를 드리워 날은 앞길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몽동이는 그들을 마차 앞에 묶고 말을 몰았다. 그러던중 송가의 멸문이 떠올릴 때면 그들에게 채찍을 휘둘렀다.송가 조상 묘지 앞에 도착하자, 몽동이는 발로 그들을 묘지 앞으로 걷어찼다.보주도 그들 앞으로 달려가 주먹과 발길질을 퍼부었다. 둥글게 말아 쥔 손바닥이 뺨에 연달아 떨어졌으나 마음속의 분노와 슬픔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모두 그녀를 막지 않았고 그녀가 분노를 표출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언제나 사랑스럽고 순진했던 그녀가 이토록 광기에 휩싸인 모습을 보이자 사람들은 마음 깊
서경 사절들이 경성을 떠난 후, 숙청제는 소 대장군과 전북망에게도 죄를 내렸다.소 대장군은 군 기강을 엄격히 다루지 못한 책임이 있었으나 장기간 성릉관을 지키며 노고가 많았던 점과, 전북망과 이방이 녹분성으로 출정했을 당시 그가 여전히 생사를 오가는 상황이었던 점을 감안해서 성릉관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내도록 했다.또한 어명을 내려 소삼야를 성릉관 총병으로 임명하고 소팔야를 부총병으로 임명하였으며 국경선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이상 성릉관에는 소씨 가문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천명하였다.소승은 마침내 소부에서 나와 입궐하여 숙청제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그의 가족들은 모두 성릉관에 있었기에 파직을 당한 후에도 당연히 성릉관으로 돌아가야 했다. 총지휘관의 자리는 내려놓았으나 그동안의 공로는 영예를 받지 못했음에도 그는 후회가 없었다. 애초에 그가 추구한 것도 이런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전북망 역시 동일한 죄에 처할 뻔했으나 서경에서의 협상 중 중요한 제보를 한 공로를 인정받아 현철군 부사령관으로 강등되었고 3년간 녹동이 삭감하게 했으며, 오월을 정사령관으로 승진시켰다. 더불어 숙청제는 특별히 은혜를 베풀어 북명황실이 서경의 두 정탐조 모두 사적으로 처단할 수 있도록 했다.사여묵은 송석석의 의견을 묻기 위해 돌아갔다. 그녀가 직접 처리할지 아니면 형부에 맡길지를 결정하기 위해서였다.송석석은 보주를 불러 의견을 물었다. 이방은 송가를 멸문시킨 주범이었지만 그들을 잔인하게 학살한 것은 서경의 정탐조들이기 때문이었다.보주는 한 번도 사람을 죽여본 적이 없어 사여묵과 송석석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이를 악물며 말했다. “소인은 그들이 죽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습니다. 송가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말입니다.”그러자 송석석은 심장이 찔리듯 아파왔고 눈가가 뜨거워졌다. “좋다, 널 데려가겠다!”그녀도 한때는 망설였었다. 직접 그들을 죽이기도 싫었고 심지어 그들을 보는 것조차 싫었다. 그들을 보면, 미친 듯이 본가로 달려갔던 날 목격한
이러한 결과는 두 나라 모두에게 이익이었다. 장공주는 돌아가면 많은 일을 준비해야 했기에 국경 문제에서는 절대 물러설 수 없었다. 만약 물러선다면 그녀가 하려는 일은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고 백성들의 지지도 얻지 못할 것이다.조약 서명 다음 날, 서경 사절들이 황제에게 작별 인사를 올리러 궁에 들어왔다. 숙청제는 그들에게 송별연을 베풀 생각이었으나, 장공주는 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즉시 출발 의사를 밝혔고 그도 이를 받아들였다.형부는 이미 이방을 죄수 수레에 태워 회동관으로 보냈는데, 소승이 보이지 않자 서서히 불안에 휩싸여 크게 소리쳤다. “왜 나 혼자인 것이냐! 소승은? 소승도 책임을 져야하지 않겠느냐?” 감랑중은 서둘러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수란석과 함께 인계했다.서경 사절들은 진성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이방을 보게 되었는데 그들의 눈에는 분노의 불길이 가득해 당장이라도 이방을 태워버릴 듯했다.이방은 수레 안에서 몸부림치며 전북망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회동관 밖에는 길게 늘어선 행렬과 경위대, 그리고 송석석과 사여묵도 있었으나 전북망은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소리칠 수도 몸부림칠 수도 없었고 수레 안에서 머리조차 제대로 내밀 수 없었다. 앉아도 서기도 불편한 이 죄수 수레는 마치 옛날에 그녀가 경역을 쇠창살에 가둬놓고 활로 괴롭히던 때 같았다. 그 당시는 통쾌했지만 이제는 두려움만이 가득차 버렸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송석석은 오늘 일부러 보주를 데리고 왔다. 두 여인은 죄수 수레에서 다섯 걸음 떨어진 곳에 서서 이방의 두려움과 혼란을 똑똑히 바라보았다. 보주는 이방을 국공부로 끌고 가서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이방은 이제 서경의 죄인이었기에 그녀가 직접 복수할 수는 없었다. 그녀의 눈에는 그저 이방을 향한 증오와 피 같은 눈물만이 맺혀 있었다.“아씨, 저 계집을 한 대 때려도 되겠습니까? 저는 힘이 약해서 심하게 때리지는 못할 것입니다. 냉옥 장공주께 말씀 좀 전해주실 수 있겠습니까?”송석석은 보주가 이 한 대
송석석은 단 백부의 말에는 뭔가 의미심장한 뜻이 담긴 듯해 잠시 당황했다. 장공주가 그녀를 바라보자 송석석은 담담한 표정으로 장공주의 눈을 마주 보며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평온하게 행동했다.단 백부에게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 있었기에 그가 이런 말을 한 것은 장공주의 속마음을 알아차렸기 때문일 것이다. 단신의가 약을 남기고 떠나려 하자 장공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예를 갖춰 인사했다.“신의님께 감사드립니다. 상국에 다시 오실 기회가 있으면 반드시 성의를 다해 보답하겠습니다.”왠지 모르게 장공주는 그의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송석석은 단신의를 부축하고 청작은 약상자를 메고 각자 갈 길을 갔다. 장공주는 자리에 앉아 금태의가 약병을 열어 검토하는 것을 바라보았으나 시선은 이미 흐려진 상태였다. ‘의사는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치유하는 사람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단신의는 그녀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었다. 여인이 큰 뜻을 품는 것을 남성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 여기지 않고 평등한 관점에서 바라본 듯했다. 그것은 장공주가 오랫동안 추구해 온 바였다.모든 남성이 그녀의 뜻을 반대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에 장공주는 깊이 감동했다. 갓 생겨난 이 생각에 대한 지지와 인정은 그녀에게는 마음을 어루만지는 약과도 같았다.송석석은 단신의를 약왕당에 직접 모셔다 드리기로 했다. 마차 안에서 단신의는 한참 침묵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서경이 변화하면 더 나아질 것이야.”송석석은 그의 숨겨진 뜻을 이해해 장공주의 길이 험난할 것임을 짐작하고 조용히 마음속으로 그녀를 응원했다. 만약 그녀가 황제가 된다면 상국과의 문제도 평화로운 협상을 통해 해결할 수 있어 전쟁도 일어나지 않기에 양국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오후가 되자 협상이 다시 시작되었다. 사전 통보를 받은 사여묵은 곧바로 홍려사로 향했고 이후 궁으로 들어가 상국에 대한 서경의 보상안을 황제로부터 허락받아 협상장으로 돌아갔다. 서경 측에서는 수란석과
다음 날 아침이 밝자 안운여는 송석석을 찾아가 단신의를 불러달라고 부탁했다.한편 고공은 홍려사로 향했고 협상은 오후에 다시 시작될 예정이었다. 단신의는 장공주가 자기를 초대하러 올 것을 예상하고 일찍부터 기다리고 있었다. 송석석이 도착했을 때 단신의는 이미 마차를 준비했고 송석석이 입을 열기도 전에 청작에게 약상자를 준비시키며 말했다. “회동관이라 했느냐?”송석석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백부님, 다 알고 계셨습니까?”“장공주의 두통이 심하니 내가 아니면 남은 협상도 무사히 마치기 어렵다. 돌아가서 필요한 일들을 처리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단신의는 자기 의술에 대해 여전히 확신을 갖고 있었다.송석석은 그와 함께 마차에 오르며 물었다. “장공주의 두통은 어찌 생긴 겁니까? 혹시 편두통입니까?”“편두통도 일부 원인이지. 맥을 짚어보면 장공주의 편두통은 오랫동안 지속된 것으로 아주 심각하더군. 또 오랫동안 책상에 엎드려 일하다 보니 목뼈가 변형되고 혈기가 머리로 공급되지 않아 혈액이 막혀 있는 상태이다. 어젯밤 금태의의 진단이 틀린 건 아니지만 그 향이 잠깐만 막힌 혈을 통하게 했을 뿐이기에 약효가 떨어지면 다시 두통이 시작될 것이다.”“금태의가 정말 이 문제를 몰랐을까요? 수년 동안 치료했는데도 크게 나아지지 않은 이유가 뭘까요?”“침술로는 증상이 호전될 수 있다. 금태의도 공을 들였겠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거지. 게다가 장공주는 무리한 일로 상태가 이미 악화됐으니,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목숨까지 위태로울 수 있다.”단신의는 약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 “일찍이 청작에게 1년 치 약을 준비해 오게 했다. 장공주가 나를 믿는다면 충분히 회복될 수 있다.”송석석은 고개를 끄덕이곤 현재 두 나라의 상황을 떠올렸다. 장공주가 일을 제대로 처리할 수 없다면 상국에도 절대 좋은 일이 아니었다.회동관에 도착하자 단신의와 청작은 안으로 들어갔고 송석석은 밖에서 대기하고, 곧 필명이 교대를 하러 올 것이기에 단신의가 진료를 마치면
서경은 이번에 조건을 낮춰서라도 협상을 조속히 성사시키려 할 것이며, 가장 가능성 높은 방안은 국경선 문제를 양보하거나 잠정적으로 논의에서 제외하는 것이라고 다들 의견을 모았다.염구진이 말했다. "연왕의 여러 차례 계략이 모두 실패한 걸 보면 지금 그가 아주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게 분명합니다. 아마 인맥 대부분도 이제는 사온이 장악하고 있을 테니 사온이 몰락하면 연왕은 정말로 진성에서 손발이 묶인 상황이 될 것입니다."연왕부는 지금 염구진의 말처럼 정말로 속수무책인 상황이었다. 무상은 여러 번이고 회왕과 숨겨둔 다른 인맥을 이용했지만 이제 거의 모두 뿌리째 뽑힌 상태였으며 또 다시 열 명 이상의 사사를 잃고 말았다.그들은 회동관의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단신의가 회동관에 들어간 사실만으로도 이미 계획이 실패했음을 알 수 있었다. 심지어 장공주가 혼수 상태에 빠졌을 때도 구혼선충의 모충은 장공주의 몸속 유충을 제어할 수 없으니 이제 계획이 성공하기는 어려울 것임을 알게 되었다.무상은 비록 실망했지만 냉옥 장공주의 강인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구혼선충의 조종을 이겨내는 일은 매우 어려운데 무공이 뛰어나고 의지가 강한 사내조차도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오직 한 사람만이 구혼선충의 조종을 버텨낼 수 있었다. 그 사람은 비범한 신분과 남다른 강인함을 가진 인물이었다.무상은 이번 상대가 강력한 인물임을 깨닫고 본인의 패배를 순순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냉옥 장공주가 있는 한 서경은 상국과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입니다. 정원제가 즉위한 후 여러 계획을 세우며 여론을 조성했으나 결국 모두 역풍이 되어 돌아올 것입니다. 그는 원래 황위에 관심이 없었고 그의 마음속에는 선황태자가 가장 중요합니다. 가문과 나라는 그 후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여 우리와 동맹을 맺기를 원했지만 이 동맹은 그의 야망에 기반한 것이 아닌 허상에 불과합니다. 동맹이 무너진다면 우리도 연루될 가능성이 높으니 정원제에게 기대를 걸 수는 없습니
향병의 행동에 장공주는 결심을 더욱 굳히고 그들을 불러 모았다. 그러고는 겉옷을 걸친 채로 의자에 앉아 정신을 가다듬고 말했다.“내일 오후에 다시 협상을 재개할 것이니, 조건은 협상 가능하도록 하지요. 너무 고집부릴 필요는 없습니다.”수란석은 눈을 크게 뜨며 반발했다. “협상이라? 어떻게 협상한단 말이오? 설마 그들이 국경을 물러서라고 해도 그걸 가만히 받아들이란 말이오?”장공주는 이미 결심이 선 듯 단호하게 말했다. “국경 문제는 일단 보류할 것입니다. 내일이나 모레 협정을 체결하고 즉시 귀국하는 것이 목표지요.”“그건 안 되오…” 수란석이 강하게 반발하자 장공주는 그를 냉랭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의견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내 결정이니 불만이 있어도 모두 삼가세요.”수란석은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는 소리쳤다. “이건 독단이오! 국경 문제를 보류하면 황제와 조정의 문무백관들, 그리고 백성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것이오?”장공주는 위엄 있는 눈빛으로 그를 단숨에 제압했다. “설명은 내가 하면 되지 수 상서가 할 일이 아닙니다.” 그녀는 조정을 오랜 시간 이끌어온 인물로서 항상 권위와 기세가 넘쳤다. “당장 나가서 초안을 다시 작성하고 상국에 더 많은 보상을 요구하는 대신 국경 문제는 제외하십시오. 그리고 2년 후에 이 문제로 다시 협상하는 것으로 하지요. 나는 협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습니다.”수란석은 이를 악물며 불만을 드러냈다. “나약하오, 정말 나약하오!” 그는 장공주가 서둘러 귀국하려는 이유를 알고 있었기에 속으로 향병을 원망했다. “난 동의할 수 없소. 국경 문제는 분명히 해야 하오.”장공주는 화가 나 향로를 내던지며 강하게 명령했다. “당장 나가서 다시 작성하십시오.”한편, 북명황실의 의논 자리에서는 새로운 국면이 펼쳐졌다. 단신의는 정좌에 앉았고 무소위조차도 그 옆에 앉아 있었다. 만종문의 구성원들은 세력을 등에 업고 몸을 꼿꼿이 세우며 잘난 척했다.그러자 단신의가 설명했다. “이번에 사용된
향병은 뺨을 맞은 얼굴을 가린채 억울함과 분노를 모두 토해냈다. “장공주님. 태자 전하께서 얼마나 비참하게 사망하셨는지 잊으셨습니까? 그건 우리 서경 백성들의 영원한 고통인데 어찌 원수를 갚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태자 전하는 장공주님의 친동생이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모진 선택을 할 수가 있습니까?” 장공주가 움켜쥔 손바닥은 젖어 있었고 불빛에 비친 그녀의 창백한 얼굴은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너는 내가 그를 위해 복수를 하지 않으려고 전쟁을 반대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장공주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더니 눈빛에 노기로 가득 찼다. 그녀는 아직 허약하지만 손을 뻗어 향병을 가리키며 말했다. “향병, 다른 사람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는 이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난 내 모든 계획과 절차를 너에게 말했고, 내가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너도 잘 알고 있지 않느냐? 나를 가장 잘 알아야 하는 사람이 복수에 눈이 멀어 정세를 조금도 파악하지 않다니. 넌 경역에게 충성을 다했으니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거라. 그가 지금 상국과 전쟁이 일어나기를 바라겠느냐?” 그러자 향병이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복수를 하지 않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저도 지금 내우외환의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식량 30만 석과 소성을 요구하시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승리할 수 있으니까요. 장공주님, 저희는 지금 승리로 하늘에 계신 태자를 위로해야 합니다.” 장공주는 오열하는 향병을 보며 말할 수 없는 분노와 침통함을 느꼈다.그녀는 안운여와 곽아정을 올려다보더니 말했다.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너희도 향병의 말에 동의하느냐? 뒤에서 나를 모해할 생각 하지 말고 이 참에 다 말하거라.” 곽아정과 안운여는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장공주님, 동의할 수 없습니다.” 향병은 고개를 돌려 실망스러운 눈빛으로 안운여를 바라보며 말했다. “안운여, 너도 동의하지 않는다는 말이냐? 넌 전하의 보살핌을 잊었느냐? 복수할 생각이 전혀 없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