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다음날, 최 씨는 왕청여를 청하러 사람을 보냈지만 왕청여는 몸이 좋지 않다며 나중에 돌아온다고 전했다. 그녀는 전북망과 이혼하려는 일을 친정에게까지 알리기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전북망은 요즘 야근이라 낮에 잠을 자기 때문에 두 사람은 앉아서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게다가 멀쩡한데 갑자기 이혼하자고 할 순 없으니 무슨 일을 저질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왕청여는 그날 만금산으로 간 후부터 줄곧 피곤한 기분이 자주 들었다. 두 번은 낮잠을 자기 시작해서 전북망이 야근을 갈 때까지 깨어나지 못했는데 홍이가 저녁식사를 하라고 깨워서 겨우 일어났었다.피곤하고 졸리고 속이 울렁거리기까지, 그녀는 달거리 시간이 며칠이나 미뤄져 임신했을까 봐 걱정이 되었다. 날짜를 계산해 보면 그동안 전북망이 매일 문희거에 머물렀을 때가 나왔는데, 그땐 그들이 결혼한 후 가장 사이가 좋았던 기간이었다. 왕청여는 마음이 심란해서 제발 임신하지 말아 달라고 기도를 했다. 그녀는 감히 의사를 청하지 못하고 모자를 쓰고 홍이와 의관에 가서 맥을 짚었다. 복안당의 백발 의사가 웃으며 말했다. “축하합니다. 임신입니다.” 왕청여는 온몸의 피가 거꾸로 쏠리는 것 같았다. 비록 추측은 하고 있었지만 확진을 받으니 여전히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녀는 자신의 팔자가 참 고달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하필 지금이냐고!’ 만약 방시원이 돌아오기 전에 임신했다면 그녀는 절대 다른 마음을 품지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이미 방시원에게 털어놓아 다시는 자신의 야망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녀는 3품 참장의 부인이 되면 이번 생에 영광스럽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하지만 뱃속의 아이가 그녀의 모든 것을 망치려고 했다. 그녀는 넋이 나간 채 친정으로 돌아가 노부인의 방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내보낸 뒤 노부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몇 년 전처럼 고개를 들어 온몸을 떨며 말했다. “어머니, 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저 뱃속의 아이를 남겨둘 수 없습니다.” 노부인
출가 전에 머물던 방으로 돌아온 왕청여는 최 씨가 방씨 가문으로 갔다는 사실을 몰랐기에, 그저 어머니와 함께 그녀를 어떻게 도울지에 대해 의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왕청여는 어머니께서 불같이 화를 내셔도 장군부에서 계속 지내도록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장군부는 그야말로 지옥이었고 유월과 오월이 죽어가던 곳이기도 했으니 말이다.게다가 방시원을 금쪽같이 생각했던 어머니기에 왕청여와 다시 만난다면 분명 기뻐할 것이다.왕청여는 그곳에 잠시 머물다 어머니의 상태가 괜찮아졌다는 말에 급히 장군부로 돌아갔다. 아니면 형수에게 혼날 게 뻔했다.그녀는 엄숙한 얼굴로 설교하는 최 씨가 너무 짜증이 났다. 도대체 무슨 권위로 그런 표정을 하는지, 오라버니 작위 덕분에 백부 부인이 된 것인데 뻔뻔하게 굴었다. 게다가, 왕청여가 친정에 머무르려면 명분이 필요했었다. 부의가 그녀의 체질을 잘 알고 있기에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친정에서 지내며 몸을 돌보겠다고 하면 장군부에서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신중을 기하기 위해 왕청여는 홍이와 함께 약당으로 향했다. 홍이에게 진맥을 받게 하고 약을 짓고 돌아가서 몸이 안 좋다고 말할 생각이였다.그 약들은 당연히 홍이에게 먹일 것이다.약당은 진성에서 가장 큰 의원으로 진료하는 의사만 해도 스무 명이 넘었기에 약당에서 받아온 약이라면 충분히 신뢰를 줄 수 있었다. 사실 홍이는 건강했지만, 8월 초의 맹호 같은 더위로 내열이 쌓여 있었기에 의사는 진맥 후 더위를 풀고 열을 내려주는 차를 몇 첩 지어 주었다.약을 받기 위해 기다리던 중, 왕청여는 약당을 찾은 송석석과 시만자와 마주치고 말았다. 기분이 잡친 왕청여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여기서 만나게 되다니, 진성이 너무나 작다는 생각이 들었다.재빨리 고개를 돌린 왕청여는 그만 너무나 익숙한 실루엣을 보고 말았다!그 순간, 온몸의 피가 거꾸로 흐르는 듯, “윙”하는 소리와 함께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가 떠올렸다. 그 실루엣은 바로 노세진이었다. 하필이면 노세진이
그러자 시만자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물었다. "이렇게 많이 써도 되는 것입니까? 단신 대부께서 노하지 않겠습니까?" 육세진이 억지스런 미소를 띄며 답했다. "괜찮습니다, 왕비께서 친히 가지러 오신 것이니 무엇을 가져가셔도 대부님께서는 노하시지 않으실 겁니다. 이는 전부터 단신 대부께서 허락하셨습니다." "단신의께서 석석을 참으로 각별히 여기시는 듯하네요, 부럽군요." 육세진도 옆에서 듣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단신 대부께서는 왕비를 친딸처럼 여기시지요." "그렇겠지요. 당시 남강 전장에 나갈 적에 약을 잔뜩 짊어지고 온 석석이 그것들 모두 단신 대부께서 주신 것이라 했습니다." 시만자는 송석석에게 팔짱을 끼며 다시 물었다."참, 아까 밖에서 왕청여를 보았는데, 노 선생도 왕청여를 알고 계시지요? 사촌 동생인 방시원씨의 전 부인였지 않습니까?" 그 순간 칼이 한쪽으로 기울더니 당황한 노세진은 그만 손가락을 베이고 말았고 급기야 피가 흘러내렸다. "어찌 그리 조심성이 없으십니까? 얼른 붕대를 감으시지요!" 시만자가 걱정스레 말하자, 육세진은 서둘러 서랍에서 거즈를 꺼내 손가락에 감고는 어색하게 얼버무리며 화제를 돌렸다. "별일 아니니 괜찮습니다. 인삼이 이 정도면 충분하신지요?" "충분합니다." 송석석이 종이에 인삼편을 싸면서 말했다. 대략 일곱 여덟 편은 되어 넉넉했다.“이제 다른 약도 좀 챙겨 주시오. 난 약리학에 대해 잘 알지 못하니 노 선생께서 알아서 주시면 됩니다." 육세진은 약 두 병을 꺼내 건네주다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잘못 들었습니다. 실수하였군요." 그러면서 서둘러 한 병을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고, 또 다른 작은 무광의 도자기 병을 꺼내 건넸다. "이건 '양혈환'이라 하여 기혈을 보하는 데 좋고 또 다른 약은 심장이 두근거리고 불안할 때 쓰이는 것입니다. 밤에 잠이 오지 않을 때 한 알... 혹은 두 알 정도 드시면 됩니다. 해산을 앞두고 가장 중요한 것은 기혈과 기력을
그녀는 이제 왕비였기에 승은백부 사람들 모두 나와 맞이하였다. 송석석은 이러한 의례를 몹시 번거로워해 자주 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형식적인 인사 후 그녀는 바로 란이를 만나러 갔다. 언니가 왔다는 소식에 란이는 무척 기뻐하며 배가 부른 몸을 이끌고 나와 반겼다.송석석도 자연스럽게 그녀의 팔짱을 끼면서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배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배가 많이 불렀는데 불편하지 않느냐?" "괜찮습니다. 다만 밤에 잠을 깊이 자지 못할 뿐입니다." 란이가 웃으며 덧붙였다. "허나 가장 힘든 시기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태교를 위해 침대에서만 누워 지내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거의 토할 지경이었습니다." "다 나아질 것이다." 그녀들이 방에 들어서니 그곳에는 석소 사저와 라 사저가 있었는데, 한 명은 옷을 만들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실을 뜨고 있었다. 그들은 송석석이 온 것을 보자 고개를 번쩍 들며 인사를 건넸다. "왔어?" "그간 무사하셨습니까?" 송석석 또한 공손히 인사를 건넸다.방 안에는 또 다른 여인이 자수를 하고 있었고 북명왕비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일어나 인사하였다. "문연이 북명왕비마마께 인사드리옵니다." 송석석은 그녀를 알아보았다. 문연은 연유와 함께 승은백부로 들어온 상인의 여식이고 단아하며 얌전해 보였다. 송석석도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래." "문연은 저와 자주 함께 시간을 보내주곤 합니다.”란이는 확실이 전보다 많이 밝아진 모습이였다.“저에게 많은 재미난 이야기들을 들려주곤 하지요. 예전에 부친께서 장사 때문에 먼 길을 떠나야 할 때마다 형제들이 번갈아 따라가고 해서 견문이 넓은 편입니다." 그러자 문연은 부끄러워하며 웃었다. "견문이라 하기엔 너무 보잘것없사옵니다." 두 사람이 잘 지내고 있는 것 같고 란이가 많이 밝아진 것을 본 송석석은 마음이 한결 놓였다.그녀는 인삼편과 약을 석소 사저에게 건네며 말했다. "출산할 때 필요할 것이니 잘 보관해
최 씨의 눈을 마주한 방시원은 입을 떼기 어려운 듯 잠시 머뭇거렸다. 이는 남자의 자존심과 관련된 문제라,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것이다."정녕.. 모든 것을 알았단 말이오?" 최 씨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보며 물었다."전부 다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방시원이 한숨을 내쉬며 다시 물었다. "그녀가 제 사촌 형을 흠모하였고, 정표도 주고받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것이 사실입니까?""정표를 주고받았다고?" 최 씨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예 모르고 있었다.그때 자리에서 일어선 방시원이 책상 서랍에서 옥패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것은 그녀가 예전에 살던 방 침대 밑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침대 다리와 벽 사이에 끼여 있었지요. 이 옥패는 제 사촌 형의 것입니다."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침대 밑에서 발견되었으니 아마 잠자기 전에 꺼내서 보곤 했나 봅니다. 마음속 깊이 그리워하고 있었던 거겠지요. 언제부터 그런 마음을 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늘 우리가 서로를 사랑한다고 믿었는데 하지만 그녀는 다른 사람을 품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부인께서도 이미 알고 계셨던 거지요?"그의 말에 최 씨는 가슴이 아팠다. 마음이 너무나 깨끗한 이 남자는 조금의 의심조차 품지 않았다. 침대 밑에서 발견된 옥패를 보고도 그저 그녀가 잠 못 이룰 때 꺼내 보았을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사람으로서, 세상에 대한 의심과 경계를 가지는 것이 당연할 법도 한데, 왕청여에 대해서는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최 씨는 그의 슬픈 눈빛을 더 이상 마주할 수 없어 그냥 모든 것을 털어놓기로 했다. "그대가 남강에 출정한 지 반년쯤 되었을 때, 아가씨가 모친 앞에 무릎을 꿇고 한 달 동안 친정에 머물게 해달라고 청했소. 동시에, 낙태약도 구해달라고도 했소."방시원의 손에 들린 옥패가 바닥에 떨어지며 쨍그랑 소리를 냈다.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버렸다."뭐라 하셨습니까?" 최 씨는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방시원은 한참 뒤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비밀로 할 테니. 부인은 안심하시지요.." 바닥에 떨어진 옥패를 바라보는 최 씨는 순간 두려움에 휩싸였다.이 이야기를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녀는 사실 오랫동안 고민해 왔고 그동안 너무나도 괴로웠다.그렇게 이 일은 묻어둔 지뢰와도 같아 언제 터질지 알 수 없어 두려웠는데 이렇게 다 털어놓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그녀는 방시원이 비밀을 발설하지 않을 것임을 믿었다. 만약 발설하여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평서백부의 죄는 어디까지나 평서백부가 감당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전장의 살육을 겪으며 피비린내 나는 전투 속에서 살아남은 방시원은 서서히 평정을 되찾았다. 그는 최 씨에게 정중히 절했다. "부인께서 가문의 명예를 걸고 진실을 알려 주신 것을 보니, 저를 진심으로 아끼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저는 평서백부가 비난과 비방에 휘말리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이 일은 저로 끝날 것이니 더 이상 아무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저도 사촌 형이나 그녀를 찾아가 따지지 않겠습니다. 그녀가 전북망과 이혼을 하든, 계속 살든 이제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어머니께서 최근 제 혼사에 대해 이야기하셨으니, 이제 그 소식을 널리 퍼뜨려 왕청여가 더 이상 미련을 가지지 않도록 할 생각입니다." 최 씨는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 오랫동안 참아왔던 눈물이었고 더는 참을 수 없었다.세상에 모든 남자가 방시원과 같았다면 모든 여인들은 복 받을 정도로 좋은 사람이였다. 방시원의 눈에도 눈물이 맺혔으나, 그는 강하게 참아내고 있었다. 재혼한 왕청여를 그는 이해하려 했고,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참전한 지 반년도 채 되지 않아 사촌 형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것은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그는 남강 전장에서 편지를 가장 자주 쓰는 사람이었기에 사람들은 그를 두고 '아내바보'라 농담을 던지곤 했다. 그 당시 송 원수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
아직 이 사실을 알지 못한 왕청여는 장군부로 돌아가 전에 노부인과 전북망에게 몸이 불편해서 의사에게 진찰받았더니, 암살 사건으로 인해 크게 놀라 심장이 불안정하고, 한동안 요양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전했다.그러자 전북망은 전혀 의심하지 않고, 오히려 큰 죄책감을 느꼈다. 암살 사건으로 인해 그녀가 충격을 받았고, 또한 유월과 오월의 죽음으로 인해 슬픔에 잠겨 건강이 나빠진 것이라고 생각한 전북망은 몸조리를 잘하라고만 당부하였다.왕청여는 며칠 몸을 추스르고, 곧장 친정으로 돌아가려 했다.하지만 그렇게 사흘이 흐른 뒤, 방시원이 혼사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부엌에서 일하는 하인이 수군대는 소리로 인해 알게 되었다. 그녀는 믿을 수 없었다. 방시원은 그녀와 이미 약속했고 결코 신의를 저버릴 자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분명히 장군부에서의 암살 사건을 조사했을 터이니 절대 자신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 굳게 믿었던 것이다.하여 그녀는 두 하녀를 불러들여 큰소리로 꾸짖었다. "평소 집 안에서 나가질 않는데, 대체 어디서 방 장군이 혼사를 준비한다는 소리를 들은 것이냐? 또다시 그런 헛소문을 퍼뜨린다면, 너희 혀를 뽑아버릴 것이니라!" 하녀들은 그저 청소나 하는 이들로, 평소 왕청여의 방에 잘 드나들지도 않았다. 그녀가 무섭게 꾸짖는 그들은 두려움에 떨었다."헛소문이 아니옵니다. 장을 보러 갔다 온 이가 말하길, 그 소식은 이미 널리 퍼진 상태고, 귀한 집 여식들이 방 장군과 혼인하려 한다고 했사옵니다." "말도 안 된다!" 왕청여는 급기야 실성하며 소리쳤다. 그 소리에 하녀들은 놀라 급히 무릎을 꿇었다. "소인이 실언하였습니다!" 왕청여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즉시 홍이와 함께 친정으로 향했다. 그날 화가 난 어머니께서 쓰러졌지만 뒤돌아보지도 않고 떠났다. 그렇게 떠난 그녀가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온 것을 보고 그녀는 또다시 분노가 치밀기 시작했다."네가 여기엔 또 어쩐 일이냐?" "어머니," 왕청여는 눈이 충혈되어
왕청여는 그만 절망에 빠져 버렸다. 친정에서도, 시댁에서도 그녀를 도와줄 이는 없었다. 삶이 이토록 비참하고 절망스러운데 더 살아갈 이유가 있을까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방시원은 결코 신의를 저버릴 사람이 아니라고 굳게 믿었고, 여전히 자신에게 애정을 품고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며 반드시 직접 물어보아야 겠다고 생각했다.지금 자신의 처지에 그를 찾아가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녀는 더 이상 그런 것들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마차를 타고 곧장 방씨 가문으로 향했고,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문지기가 그녀를 보고는 무심결에 예전에 부르던 방식대로 불러 버렸다. "아가… 아, 전부인." 왕청여는 눈살을 찌푸리며 문지기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어디서 그런 못난 눈썰미를 갖고 있는 것이냐? 전 부인이 웬 말이냐? 방시원이 안에 있느냐?" 당황한 문지기가 재빨리 대답했다."계십니다!" 그녀는 홍이와 함께 대문을 통과하여 당당히 안으로 들어섰다. 겁에 질린 홍이는 다리가 덜덜 떨려서 왕청여를 막을 수 없었다. 어찌 여기에 온 단 말이지?이러다가 장군부에서 알게 되면 정말 큰일인데 말이다.왕청여의 행동은 방씨 가문 사람들을 모두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이미 한 집안이 아닌데, 어찌 아무런 기별도 없이 쳐들어오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혼사를 준비 중인 방시원을 찾아오다니, 이러고서야 어찌 혼사가 성사되겠는가? 왕청여에 조금의 정은 남아 있었던 오 씨는 이제는 그마저도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방부인은 누구도 이 일을 밖에 알리지 말라고 명령했고, 왕청여의 마차도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옮기게 했다.오 씨는 방시원이 왕청여를 만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왕청여는 이미 결심한 듯 자리를 지키며 떠날 생각도 하지 않는듯 했다. 오 씨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으며 오로지 방시원만을 찾았다.이토록 고집스러운 왕청여를 본 적이 없었던
이날 저녁, 송석석은 약왕당에서 받아온 약을 사여묵에게 건넸고 약의 위험성까지 자세하게 얘기했다.사여묵은 망설이는 듯한 송석석의 모습에 환하게 웃으며 위로했다.“이 정도 상해는 충분히 견딜 수 있소. 그리고 원기를 회복할 수 있는 약들도 이렇게 잔뜩 가지고 오지 않았소? 나중에 어의에게 진단만 받으면 바로 단설환을 먹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오. 남강으로 가는 길에도 단 신의의 당부를 잊지 않고 매일 약을 꼬박꼬박 챙겨 먹겠소.”“그래도 결국 독약 아닙니까? 그러지 말고 저희 다른 방법을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요?”송석석이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사여묵이 담담하게 대답했다.“내가 보기엔 지금으로써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소. 단 신의가 말을 무섭게 해서 그렇지 그 정도로 심각한 상해를 입히지 못할 거요. 그렇게 위험한 약이었다면 애당초 꺼내지도 않았겠지.”“그럼 일단 염 선생과 상의라도 해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그럴 필요 없소!”사여묵이 약을 내려놓은 뒤, 커다란 손으로 송석석의 허리를 감싸며 말을 이어갔다.“이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유리하오. 나중에 내가 대리사에서 쓰러지면 진이가 내 옥패를 들고 어의를 찾아갈 것이고 황실로 달려온 어의가 우왕좌왕하는 염 선생을 보아야 의심을 하지 않을 것이오.”송석석은 사여묵의 가슴팍에 기대어 불안한 마음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전 장군님이 너무 걱정됩니다. 몸이 회복되기도 전에 남강으로 출발해야 하는데 가는 내내 제대로 쉴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남강에 가서도 몸 상태가 회복되지 않으면 전장에 어떻게 나가시려고 그러십니까?”송석석의 걱정에 기분이 좋아진 사여묵이 다정하게 웃으며 그녀를 위로했다.“난 왕표를 무조건 대체하겠다는 게 아니오. 일단 제린을 찾아 병사들 속에 숨어 있다가 왕표가 제대로 군을 이끈다면 난 남강 구경이나 하다 올 것이오.”사여묵의 위로에도 송석석은 시름이 놓이지 않았다. 왕표가 군을 제대로 이끌지 못할 거라는 확신 때문에 두 사람이 지금 이런 모험을 하고 있는
화가 난 단 신의는 송석석의 말에 설득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버럭 언성을 높였다.“난 멍청한 사람을 돕지 않소. 당신들은 그런 천하의 멍청이가 따로 없소!”“세상에 이런 멍청이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번 한번만 더 모험하고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약속할게요.”송석석이 환하게 웃으며 말하자 단 신의가 미간을 찌푸렸다.“모험을 하고 싶어도 이제 못할 수도 있소. 돌아오면 황제께서 그 죄를 어떻게 물으실 줄 알고 이러는 것이오. 그러다가 머리가 잘릴 수도 있소.”“정말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고 해도 저에게 방법이 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단 신의는 고집을 부리는 송석석을 보며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말한 것처럼 백성들에게는 두 사람과 같은 멍청이들이 필요하긴 했지만, 단 신의는 그 멍청이가 송석석과 사여묵은 아니길 바랐다.결국 단 신의는 먼지가 뽀얗게 쌓인 작은 상자를 꺼내 먼지를 툭툭 털어내곤 조심스럽게 열었다.상자 안에는 땅콩 만한 검은 알약 하나가 있었다.“똑똑히 기억하시게. 이건 독이오. 이 약을 먹고 나면 맥박이 이상해지고 갑작스러운 발작을 일으키네. 그리고 짧은 시간내에 심장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지. 이건 그저 보여지는 현상이 아니라 실제로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네. 이 약을 먹고 3일 정도 버틸 수 있는데 3일 뒤에는 반드시 단설환을 복용해야 하오. 그러지 않으면 심장에 영구적인 손상을 입을 수도 있소.”단 신의의 말에 송석석이 흠칫 놀란 표정이었다.“정말로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뜻입니까?”“그럼 당연하지. 이건 독이오.”“그럼 단설환을 먹고 나면 바로 정상적인 몸 상태로 돌아올 수 있는 겁니까?”“그렇지 않소. 며칠 동안 안정을 취해야 하네. 눈속임을 하고 나서 바로 출발하면 절대 안 되오.”위험할 수도 있다는 단 신의의 말에 송석석은 단 신의가 건네는 약을 받지 않았다.“그럼 혹시 다른 약은 없는지요? 폐하를 속이고 나서 장군님은 바로 출발하려고 할 겁니다. 실제로 중독되
사여묵은 온몸에 힘이 쭉 빠진 채 침대에 앉아 등을 벽에 기대고 있었다.남강에서 돌아와 병권을 황제께 바친 뒤에도 황제는 여전히 사여묵을 의심하고 경계했지만 사여묵은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황제가 의심과 경계를 조금은 풀 수 있도록 사여묵은 지금까지 최대한 언행에 조심했으며 서경과의 담판이 끝나고 나서도 황제 앞에서 일부러 약한 모습을 보였다.나중에 혹시라도 전쟁이 일어났을 때 더 이상 황제의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조심하고 또 조심했는데 황제의 태도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사국이 이번에 다시 쳐들어온 건 사국과 손잡은 내국 역적이 남강에 이미 함정을 파 놓았다는 사실을 폐하께서도 알고 계신 것이오. 그래서 사국은 저렇게 겁도 없이 남강을 계속 공격하고 있는 것이지. 하지만 폐하는 내가 폐하께 대한 위협이 사국 병사들을 물리치는 것보다 더 중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소.”사여묵이 씁쓸하게 웃으며 마지막 남은 술을 벌컥벌컥 마시자, 송석석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황제께서 이런 결정을 하신 게 처음은 아니잖아요.”사여묵은 송석석을 품에 꼭 끌어안은 채 그녀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고 조금 전 혼자 술을 마시고 있을 때부터 계속 이렇게 숨막히는 인고를 견뎌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다.“난 무조건 그런 비극이 다시 일어나게 하지 않을 것이오.”송석석을 놓아준 사여묵은 강경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말을 보탰다.“난 당신처럼 용감하게 변할 것이오.”예전에 송석석이 입궁하여 황제께 상황을 보고했을 때 황제는 그녀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그때 당시 송석석은 마냥 기다리거나 손을 놓은 것이 아니라 홀로 남강까지 찾아갔다.송석석은 그때 자신의 생사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한편, 사여묵의 말을 들은 송석석은 바로 뜻을 알아챘고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전 장군님을 응원합니다. 아무 걱정도 하지 말고 다녀오세요. 폐하께서 아무것도 묻지 않으신다면 전 평소와 같이 진성을 지키고 있을 것이고 만약 폐하께서 죄를 물으신다면 전 북명
사여묵이 방시원을 잘 달래어 돌려보낸 뒤, 염구진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다들 감정이 격해지는 것도 당연합니다. 남강 땅을 되찾기 위해 그들은 청춘을 다 바쳤는데 이제 또 전쟁이 난다고 하니 마음이 안 좋을 수밖에 없지요.”말을 하던 염구진은 고개를 돌려 사여묵을 힐끔 쳐다보았으며 방시원의 마음을 가장 잘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은 사여묵일 것이라고 생각했다.한편, 한참동안 말이 없던 사여묵이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잘 지켜보고 있다가 무슨 소식이 들리면 바로 나에게 보고하게.”“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사여묵은 다시 연주에 관한 일에 대해 물었다.“연주에서 성문을 봉쇄했다고 들었는데 소식은 끊기지 않은 것이오? 혹시 그쪽에서 움직임이 보이지는 않나? 계획대로 행동하고 있는 건가?”“아직 확실한 소식은 접하지 못했지만 소인은 모성을 믿습니다. 계획한대로 잘 하고 있을 겁니다.”“그래. 나도 그자를 믿네.”염구진의 대답에 사여묵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성은 연주 좌부승이었고 연왕이 반역을 도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여묵은 바로 사람을 시켜 모성에게 접근했다.총명하고 무술 실력까지 겸비한 모성은 선황제 때부터 이름을 널리 알렸지만 성격이 너무 오만했기에 아직까지도 직급은 그저 부승이었다. 평소에 시를 즐겨 쓰는 모성은 시문의 대부분 내용이 세상을 향한 불만 표시였기에 연왕은 모성이 조정에 불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여 그를 곁에 두기로 했다.그렇게 모성은 오랜 세월동안 외로운 싸움을 했다. 그 중 더 높은 관직으로 승진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모성은 연왕의 반역죄 증좌를 수집하기 위해 모든 걸 포기하고 연주에 남았다.하지만 연왕은 섣불리 움직이지도 않고 핵심 병력의 상황도 모성에게 전혀 알려주지 않았으며 심지어 중요한 일을 논의할 때에는 모성에게 나가 있으라고 하기도 했다.때문에 모성은 하상지의 잡일을 처리해주면서 간간이 상황을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확실한 증좌가 없는 탓에 모성은 지금까지도 연왕
”소인도 오늘 폐하께 감히 많은 얘기를 드리지는 못했습니다. 혹시 폐하께서 오해하실까 봐 왕야를 찾아가지도 못했지요.”이덕회가 대답하자 목 승상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잘하셨습니다. 병부는 최대한 사적으로 북명왕을 접촉하지 않아야 합니다. 아니면 혹시 병사 감찰대로 폐하께 한 사람을 추천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혹시 왕표 그자가 남강 전쟁 원수를 맡기엔 걱정된다면 방시원 장군을 황제께 추천해보십시오.”“하지만 방시원 장군님은 주군 총병이라 남강 전쟁에 보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방 장군을 보낼 바에는 차라리 방천허와 제린에게 전사를 맡기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내란이 터지고 있는 지금 진성 주군에 대장이 없어서는 안 되는 일이지요.”이덕회의 말에 목 승상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대꾸했다.“도리는 그게 맞지요. 제 말은 폐하께 왕야 한 사람만 추천할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몇 명 더 추천하라는 뜻입니다.”이덕회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술을 살짝 오므렸다.“소인이 솔직한 성격이라 말을 돌려서 할 줄 모르니 그냥 말하겠습니다. 소인이 보기엔 왕야가 가장 적합한 원수인데 어차피 역적은 아직 나라에 위협이 될만한 존재는 아니니까 나중에 목종욱한테 처리하라고 하면 되지요.”“그 어떤 반역자도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일은 그리 단순한 일이 아닙니다. 알다시피 반역자들은 사국 사람들과도 엮여 있습니다. 사국과 손을 잡았다는 건 그만큼 충분한 준비를 해왔다는 뜻이지요. 절대 쉬운 상대가 아닙니다.”목 상승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이덕회가 대답했다.“승상 말씀도 일리가 있는 것 같네요. 그럼 소인 북명왕과 함께 내일 다시 궁으로 가서 폐하를 만나 뵙고 내란에 대해서도 의논해보겠습니다.”“그렇게 합시다!”목 승상이 고개를 끄덕였다.한편, 사청엽은 여전히 옥에 갇혀 있었다. 황제가 아직 명령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사청엽은 자신이 사형을 면치 못할 거라고 확신했다.이날 저녁, 혼인을 앞둔 방시원이 황실을 찾아왔다. 치석
한편, 목종욱은 최선을 다해 산적들을 잡아들이고 있었다. 싹을 다 자르진 못했지만 크게 겁을 먹은 산적들이 산 속에 꽁꽁 숨어서 다시는 문제를 일으키진 않을 것이다. 숙청제도 제린이 보낸 소식을 접했고, 사국 대군들이 변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제린은 사국 대군이 25만 명 정도 된다고 보고를 했고 여전히 빅토르가 대군을 이끌고 있다고 했다.숙청제는 바로 병부 대신들을 불러 남강에서 사국의 25만 대군을 상대로 승산이 있는지 의견을 물었다.이덕회는 황제의 질문 자체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이길 수 있는지 없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최대한 신속하게 전쟁을 이겨야 한다는 것이 관건이다.“폐하, 남강은 오랜 시간의 전사와 왜란으로 지칠 대로 지친 상태입니다. 남강 땅은 아직 전쟁에 버틸 수 있지만 백성들은 더 이상 전쟁을 견딜 힘이 없습니다. 만약 정말 전쟁이 난다면 확실한 한 방으로 빠르게 적을 물리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메뚜기 떼처럼 매년 한 번씩 이렇게 날뛸 것입니다. 이는 저희 남강 지역의 치안에 치명적인 상해를 입힐 수밖에 없습니다.”“그럼 자네 생각엔 송씨 가문 병사들과 북명군이 적들을 신속하게 물리치지 못할 것 같은가?”숙청제의 물음에 이덕회가 바로 대답했다.“이제 송씨 가문 군대아 북명군을 나눌 것도 없습니다. 전부 다 남강 병사들입니다.”이덕회는 숙청제가 남강의 병사들을 모은 게 송씨 가문과 북명왕이라고 생각할까 봐 일부러 강조했지만 숙청제의 생각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만약 남강 전쟁이 오래 전에 끝난 전쟁이고 사여묵이 병권을 상납한지 꽤 오래 됐다면 숙청제는 이런 걱정을 전혀 하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왕표가 군심을 얻지 못하고 있는 지금, 남강에 있는 병사들이 송씨 가문 군대이든 북명군이든 결국 전부 사여묵의 명령에 따르고 있다.사여묵을 남강에 보낸다는 건 병권을 다시 사여묵에게 쥐여주어야 한다는 뜻이다.현재 연왕도 역모를 일으켰고 황제 자리를 대놓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
숙청제가 사여묵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그건 사국이 네 위엄에 겁을 먹은 것이야. 빅토르가 너를 많이 두려워하는 것 같아.”사여묵은 숙청제의 말이 진심이 아니라 살짝 비꼬고 있다는 것을 잘 알기에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황제께서 소인을 너무 높이 평가하고 계신 겁니다. 소인은 그렇게 대단한 능력도 없고 빅토르도 소인에게 겁을 먹어서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전쟁 때문에 너무 많은 걸 잃었기 때문입니다.”“네 말대로 전쟁으로 많은 걸 잃었다면 짧은 시간 내에는 원기를 쉽게 회복할 수 없지 않느냐?”“소인이 감히 추측을 해보자면 사국은 원기를 회복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절대 저희 남강이 순조롭게 발전하는 모습을 보고 있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가끔씩 비열한 수법으로 훼방을 놓아야 정상인데 지금까지 그런 적이 한 번도 없는 게 너무 수상합니다.”숙청제가 사여묵을 빤히 쳐다보다가 물었다.“그럼 네 말은 누군가가 사국과 손잡고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냐?”“그럴 가능성도 있지 않겠습니까?”사여묵은 전에도 숙청제와 이 문제를 분석하고 논의한 적이 있었으며 그때 당시 숙청제도 사여묵의 의심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주관적으로 보았을 때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숙청제는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사여묵은 그런 황제를 힐끗 쳐다보고는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지만 꾹 참았다.사실 숙청제도 왕표가 무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사국을 상대하려면 사여묵을 다시 남강 전장으로 내보내는 게 가장 적합한 선택이라고 생각하고 있다.하지만 숙청제는 쉽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그때 당시 겨우 송석석을 이용하여 사여묵에게서 병권을 빼앗았는데 이렇게 쉽게 다시 내놓을 수가 없었으며 최후의 순간이 오지 않는 이상, 숙청제는 절대 사여묵을 전장에 내보낼 생각이 없었다.때문에 사여묵이 며칠동안 어서방에 남아 숙청제와 이런저런 상의를 해봤지만 숙청제는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어서방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고 아무도 먼저
그날 밤, 연왕은 뜬 눈으로 밤을 지새게 되었다.솔직히 지금 상황은 연왕의 오랜 계획과 차질이 조금 있었다. 지방 지역에서 역모를 일으키고 심지어 진성에 준비된 게 아무것도 없이 무작정 진성까지 쳐들어간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연왕과 무상의 계획은 따로 있었다.일단 병사들을 일정한 수량까지 늘이고 아무도 모르게 서서히 진성 일대로 전이하여 병사들을 안치한 뒤 적절한 시기를 기다릴 생각이었다.그땐 사온이 진성에서 계략을 짜고 있을 것이고 많은 세가들의 지지도 받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해 예전에 고부진의 딸들을 세가에 시집 보냈기에 세가들은 지지할 수밖에 없다.그리고 나서 적절한 시기만 잘 고르면 반드시 성공한다. 진성에 전란이 일어나고 산적과 유랑민들이 판을 칠 때 연왕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성내로 쳐들어가 바로 궁 전체를 포위할 생각이었다.하지만 지금, 갑자기 대석촌에 일이 터져 버려 사청엽이 체포된 탓에 연왕은 급하게 병사들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승산이 너무 낮았기에 연왕도 망설였던 것이며 지방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난다고 해서 진성까지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물론 백성들은 반란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고 한동안 수군거리겠지만 대부분 백성들은 갑작스럽게 일어난 반란과 격문을 그저 우습게 생각할 것이다.그뿐만 아니라 사국에서 남강을 공격한다고 해도 처음 있는 일이 아니고 사국에서 오래 전부터 호시탐탐 야망을 보였기에 황제가 나랏일에 관심이 없어서 일어난 일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그리고 아직 사국과의 전쟁이 일어나지도 않았고 전패했다는 소식도 없기에 상국 무장이 무능하다는 비판을 하기에도 애매했다.나라가 평안하고 백성들이 태평한 상황에서 연주도 꽤 부유한 땅이었기에 괜히 문제를 만들고 싶어도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때문에 모두 그저 연왕이 언제 잡히는지, 언제 역모죄로 목이 잘릴지를 보고 싶어할 뿐이었다. 그리고 상국에는 사국 사람들을 물리친 북명왕이 있기에 다들 역적 따위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으며 되레 연왕이 왜 역모를 일으키
무상이 아니라는 말에 연왕은 회왕에게로 고개를 돌렸고 화들짝 놀란 회왕이 변명하려던 그때, 연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회왕일 리는 없어.”회왕은 의심조차 하지 않는 연왕의 태도에 기분이 조금 묘했다.한편, 연왕은 당연히 회왕을 의심할 리가 없었다. 회왕은 무일푼으로 연주로 왔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진성에서도 아무런 성과도 따내지 못했으며 사온의 비교 대상이 될 자격조차 없었다.회왕이 연주에 온 뒤로 연주 백성들은 회왕을 만나면 겉으로는 왕야라고 부르며 인사를 올리긴 하지만 뒤에서는 다들 그를 만만하게 여기고 아니꼽게 생각했다.때문에 회왕은 절대 마총우를 명령하지 못한다.조금씩 차분해진 연왕은 다시 자리에 앉더니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말했다.“다들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마총우 그자가 귀순한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가 나를 무너트리고 싶어서 일부러 꾸민 짓인가?”여전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무상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마총우가 귀순한 건 절대 아닐 것입니다. 왕야께서 격문을 보낸 지 며칠밖에 되지 않았고 더군다나 저희 병력은 대여섯 군데에 분산되어 있습니다. 전의하는 데만 6개월 넘게 걸렸는데 조정에서 절대 쉽게 조사해낼 수 없을 겁니다. 그런데 조정에서 마총우 그자를 찾아서 귀순 시킨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날 일부러 무너트리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는 거네. 그럼 그자가 누구일 것 같은가?”연왕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연왕이 몇 년 동안 끌어 모은 사람들 중에 황제의 친인척과 세도가들도 있지만 친왕은 연왕과 회와 두 사람밖에 없었다.연왕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상대가 없었다. 연왕의 부하들 중에서 황제의 친인척들이 제일 무능하고 멍청했으며 파장을 일으킬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리고 종합적으로 생각해보았을 때 가장 의심되는 상대는 여전히 무상이었다.하지만 역모의 마음을 품은 연왕이 무상을 끌어들이고 나서 지금까지 무상은 강한 충성심을 보였고 심지어 평소에 연왕에게 쓸만한 제안도 가장 많이 하고 계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