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성 전체에 대한 순찰을 강화하자 예상대로 왕표가 급하게 모습을 드러냈다.하지만 왕표가 찾아간 사람은 왕청여가 아니라 최숙심이었다.이날 최숙심은 딸에게 자신이 직접 만들어준 옷을 주러 북명 황실에 찾아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소주방 여인들을 위해 이런저런 필요한 물건들을 사기도 했다.눈앞에 갑자기 나타난 왕표를 봤을 때, 최숙심은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왕표는 분명 왕청여에게 자신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최숙심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는데 왜 이렇게 직접 찾아온 건가?’“부인, 나일세.”커다란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왕표가 확실했다. 최숙심은 잠시 넋을 잃고 있다가,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이를 꽉 깨문 채 가까스로 화를 억눌렀다. 몰래 주변을 쓱 살폈는데, 골목 안에는 두 사람 외에 아무도 없었다.최숙심은 왕표가 절대 자신을 찾아오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었는데, 그녀의 판단이 틀려 버린 것이었다. “지금 무슨 말씀하시는 겁니까…?”이를 악문 최숙심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는데, 왕표는 그녀가 자신을 오랜만에 보게 되어 흥분한 거라고 착각했다.왕표는 이내 삿갓을 위로 슬쩍 올려 삐쩍 마른 얼굴을 드러냈다. 왕청여가 말한 것처럼 눈썹은 전부 잘라버렸는데, 그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우스꽝스러 보였다.“부인, 정말 나일세!”왕표는 기대에 찬 눈빛을 하고 있다가 이내 주변을 경계하듯 쳐다보다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인하고 나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가족들이 걱정돼서 이렇게 진성으로 다시 돌아온 거라네. 다들 무사한 걸 보니까 이제 한시름 놓이는군.”하지만 최숙심은 가식적인 왕표의 모습에 헛구역질이 날 정도였다.“진성 곳곳에 당신의 체포 공문서가 붙어있는데 어떻게 감히 진성으로 돌아온 것입니까?”“다들 무사한 걸 봤으니, 이제 이곳을 떠날 생각이오.”왕표는 말을 하며 한걸음 가까이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앞으로 평생 이렇게 여기저기 숨어 다녀야 할지도 모르오. 부인, 내가 예전에 부인에게 많은 잘못
이내 표정을 숨긴 최숙심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얼른 가십시오. 돈을 구하면 바로 서방님을 찾으러 가겠습니다. 아, 그리고 요즘 진성 순찰이 삼엄하니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마십시오.”왕표는 자신을 걱정하는 최숙심의 말을 듣자, 그녀가 밖에서 아무리 대단한 여인이라고 불려도 결국 자신에게 만큼은 마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뿌듯함에 경계심이 완전히 풀렸다.“최대한 3일 안에 마련해주면 고맙겠소.”그러자 최숙심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그건 안 됩니다. 지금 상황이 어려운데, 어떻게 3일 안에 그 큰돈을 마련할 수 있겠습니까?”“우리 딸 지아가 지금 북명 황실에서 지내고 있지 않소? 그러니 난 부인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믿소. 부인의 소식을 기다리겠소. 그리고 내가 부인을 찾아왔다는 말은 아무한테도 하지 마오. 어머니와 왕청여한테도 얘기해서는 안 되오!”말을 마친 왕표는 삿갓을 쓰고는 돌아서서 빠르게 떠났다.표정이 확 어두워진 최숙심은 그를 얼른 따라갔지만 골목 밖에도 순찰하는 경위대가 보이지 않았기에 섣불리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왕표는 궁지에 몰린 순간 백성들을 인질로 잡아 어떻게든 진성을 벗어나려고 할 것이고 만에 하나 왕표가 진성을 빠져나가게 되면 그를 찾아내는 건 더 어려워질 것이다.최숙심은 빠른 걸음으로 소주방에 돌아와 석소를 구석으로 불렀다.“석소 아가씨, 얼른 왕비에게 찾아가서 왕표 그자가 보화사에 여람 스님 신분으로 위장하여 숨어있다고 전하시오.”“네, 지금 바로 다녀오겠습니다.”그렇게 석소가 돌아서서 소주방을 떠나려던 그때, 최숙심이 그를 불러 세웠다.“잠깐만요! 왕비님께 너무 대놓고 보화사에 왕표를 잡으러 가지는 말라고 전해주세요. 저에게 거짓말을 한 것일 수도 있으니 일단 몇 사람만 데리고 가서 상황만 파악해보시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전하세요.”현재 수색이 삼엄해서 왕표는 더 이상 도망갈 곳도 없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조심해야 한다. 이는 최숙심이 공을 세울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고 단번에 확
한편, 송석석은 시만자를 데리고 일반 손님으로 위장한 채 직접 보화사로 향했다. 보화사에 도착한 뒤 절을 올리고 초를 꽂고는 주지 스님을 찾아 신분을 밝힌 뒤, 여람 스님에 관해서 물었다.주지 스님은 바로 지객 스님을 불러왔다. 각지 스님들이 보화사에 찾아와 며칠 묵고 갈 때마다 지객 스님이 그자들을 모셨기 때문에 자세한 상황을 제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보화사는 진성 3대 절 중의 하나일 정도로 꽤 유명했기에, 매년 보화사에 찾아와 경을 들으면서 며칠동안 이곳에 묵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많아도, 실제로 이곳에 머물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었다. 지객 스님은 여람 스님에 대해 인상이 꽤 깊었다. 수련의 경지가 그리 높지 않았기에 원칙대로라면 이곳에서 지낼 수 없는데 몇 년 전부터 남강에서 죽은 이의 영혼들을 제도했기에 그 자비로운 마음을 높이 평가하고 덕행도 많이 쌓았기에 지객 스님은 의례적으로 여람 스님을 받아준 것이다.“며칠동안 매일 여람 스님께서 밖에 돌아다니셨습니다. 진성 내에 전란이 일어나 사상자가 많았기에 여람 스님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죽은 이들의 영혼을 제도하느라 고생이 많았습니다.”지객 스님은 여람 스님을 매우 좋게 평가했다. 송석석은 그런 지객 스님의 말을 조용하게 듣고 있을 뿐, 반박하지는 않았다.그러고는 지객 스님에게 여람 스님을 만나보고 싶다고 얘기하며, 여람 스님을 존경하는 마음에 돈을 기부하며 여람 스님을 위해 따로 절 하나를 지어주고 싶다는 말도 함께 전해달라고 했다.한편, 지객 스님은 송석석과 시만자의 신분을 알지 못했지만, 두 사람이 수수한 옷차림과 달리 기품이 넘쳐 흘렀기에 모 훈작 세가의 부인이나 아가씨일 것이라고 추측해,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후 바로 왕표에게 말을 전했다.왕표는 자신을 찾아온 자가 있다는 말에 흠칫 놀랐다가 절을 만들어주며 돈까지 기부하겠다는 소식에 바로 표정이 환하게 바뀌었다.평서백이었던 왕표는 가문의 번영을 위해 절에 돈을 기부하는 명문 가문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렇게
왕표는 중범죄자이기에 바로 대리사로 이송되어야 하지만, 송석석은 그를 일단 경위부로 압송했다. 경위부에서 심문을 마친 후, 어전에 보고를 올리며 최숙심의 공을 황제에게 잘 얘기한다면,왕준과 현이 하루 빨리 진성으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더군다나 고청우도 아직 경위부에 갇혀 있기에 왕표와 고청우가 만난다면 더욱 많은 일들을 알아낼 수도 있었다.그렇게 고청우와 왕표는 같은 곳에 갇혔으며, 중간에 나무 울타리 하나를 세워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고청우와 왕표가 서로 눈이 마주치자,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으며 왕표가 먼저 이를 갈면서 마구 소리를 질렀다.“천박한 놈! 결국 네 놈 꼴도 이렇게 되었구나! 드디어 벌을 받은 게야!”그러자 고청우가 실눈을 살짝 뜨며,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비아냥거렸다.“내가 천박한 년이면 왕표 너는 뭔데? 나도 벌을 받았지만 너도 결국 이렇게 갇혀 있잖아! 넌 뭐 다를 것 같아?”“이게 다 네 놈 때문이야!”왕표가 울타리 사이로 손을 뻗어 고청우를 잡으려고 허우적거렸고 뒤로 살짝 물러난 고청우는 오아표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코웃음을 쳤다.“버러지 같은 놈!”“네 놈이 감히…! 지금 뭐라고 했느냐! 네 놈이 역적과 손잡고 날 꼬셔서 야반 도주하게 만들지 않았다면 난 지금 남강 원수의 신분으로 잘 살고 있었을 거야! 절대 이런 꼴을 당할 리 없었을 거라고!”왕표가 씩씩거리며 소리를 지르자 고청우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널 꼬셨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넌 결국 죽음이 두려워서 그런 선택을 한 거야. 넌 내가 무엇인가 노리고 접근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잖아. 그런데 내가 아이까지 낳으니 이제 날 곁에 묶어 둘 수 있겠다고 확신한 거지. 이 세상 모든 여자들이 네 본처처럼 아이들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줄 알아? 가족애라는 건 이 세상에서 가장 우스운 거야. 그딴 걸로 날 묶어 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멍청한 놈! 내가 널 버리고 갈 때 분명하게 얘기했잖아. 넌 무능하고 무술 실력도 보잘것없는데
궁으로 들어가 황제에게 자초지종을 보고하자, 최숙심의 딱한 사정을 운운하면서 그녀의 선한 마음씨 또한 찬양했다.그녀의 삶도 이토록 엉망진창인데 힘든 사람들에게 죽도 나눠주고 갈 곳 없는 여인들을 소주방에서 지내게 도와준 사실들을 일일이 읊으면서 감탄했다. 솔직히 숙청제에게는 지금 최숙심처럼 백성들을 교화할 수 있는 모범적인 사람이 필요했다. 때문에 바로 어명을 내려 그녀에게 순금 백 냥과 집 한 채까지 하사했다. 그리고 유방 당했던 왕씨 가문 남자들도 남강 전쟁만 끝나면 북명왕과 함께 진성으로 돌아오는 것에 허락했다.그렇게 최숙심은 죽을 고비를 넘어 인생 역전까지 이뤄냈다!한편, 왕표에게는 요참형이 내려졌고 역적과 손잡고 왕표를 선동한 고청우에게도 똑같은 형을 내렸다. 그러자 숙청제는 예전에 고씨 가문 여인들을 살려준 일이 후회되었다. 고청우를 진작 감옥에 가뒀다면 남강에 이렇게 큰 화란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니 말이다.이후 숙청제는 척귀에게 걱정되니깐 암자에 가끔 가보라고 했는데, 이는 실은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송석석은 척귀를 보자마자 황제가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지 바로 알아차리고는, 사람을 보내 고씨 여인들에게 고청우의 형이 집행될 때 고청우와의 옛정 때문에 잘못된 행동을 저지르지 말라고 확실하게 당부했다.한편, 소주방에 있는 노부인은 자신의 아들인 왕표가 결국 체포되었고 요참형을 받는다는 소식에 큰 충격을 받은 채, 죄 없는 왕청여와 최숙심에게 손가락질을 하면서 갖은 욕설을 퍼부으며 화풀이를 했다. 노부인은 두 사람이 어떻게 가족이며, 서방인 왕표를 배신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점점 더 흥분하다가 결국 최숙심과 왕청여의 뺨을 강하게 내리쳤다.그리고는 지금 당장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왕표를 구해내라고 억지를 부렸다.최숙심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노부인에게 노여움을 풀라고 빌었지만, 노부인은 오히려 점점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최숙심도 더 이상 참지 못해 벌떡 일어나 주막에서 칼을 가져오더니 바닥에 툭 던졌다
그렇게 한참 지나고 나서야 눈물을 그친 노부인은 결국 왕표를 구하는 일은 포기했지만, 그의 형이 집행되기 전에 최후의 만찬을 직접 먹일 것이라고 고집을 부리기 시작했다. 노부인의 눈은 퉁퉁 부었고, 목소리도 심하게 갈라져 있었다.“형이 집행되기 전에 범인은 가족들을 마지막으로 한 번 만날 수 있다는 걸 알아. 그러니까 이것만 하게 해줘. 아들이 마지막으로 배불리 먹고 길을 떠날 수 있게 해줘.”노부인은 다시 최숙심을 쳐다보며 말을 이어갔다.“며느리 너도 자식이 있으니 부모의 마음을 이해할 거야. 세상 사람들 눈에 걔가 백 번 죽어 마땅한 나쁜 놈이라고 해도 나에게는 그저 한없이 어린 아이일 뿐이야.”한참동안 침묵하던 최숙심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어머님, 형이 집행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만난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아시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집행장에서 아들이 요참형을 당하는 모습을 정말 직접 보실 수 있으시겠습니까?”노부인은 온몸을 덜덜 떨면서 대답했다.“네가 가서 북명 왕비에게 부탁을 좀 해보거라. 난 감옥에 가서 아들을 만나고 싶다.”노부인의 말에 고청락이 어이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참 말씀을 쉽게 하시네요. 어머님께서 부탁하면 왕비님께서 무조건 그 부탁을 들어줘야 하시는 겁니까?”“어머님, 전 그런 부탁을 드릴 수 없습니다. 이 일은 왕비께서 결정할 수 있는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최숙심이 대답하자 노부인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술을 꽉 깨문 채 말했다.“집행장이라도 갈 것이다. 절대 내 아들을 굶겨서 하늘나라로 보낼 수는 없어.”“어머니, 오라버니는 안 굶어요. 형이 집행되기 전에 감옥에서 오라버니에게 맛있는 밥을 준비해줄 거예요. 심지어 술도 준비해준다고 들었어요.”왕청여의 말에도 노부인은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그건 달라!”최숙심이 계속 한숨을 살짝 내쉴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곁에서 지켜보던 모종윤이 고청락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집행 당일 날이 되었고, 하늘은 한없이 맑았다.문엄
경위대가 노부인과 최숙심 그리고 왕청여를 처형장 안으로 호송했고 다리에 힘이 쫙 풀린 노부인은 온몸을 덜덜 떨면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이 멍청한 놈아! 넌 우리 집안 조상님들과 네 아버지의 얼굴을 보기 창피하지도 않아? 이제 하늘나라로 가면 어떻게 마주하려고 이런 짓을 저지른 거야!”그러고는 노부인은 엉엉 울면서 왕표의 뺨을 강하게 내리쳤다.한편, 감당할 수 없는 공포에 영혼이 나간 왕표는 어머니를 보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소리를 질렀다.“어머니, 저를 구해주세요! 제발 저를 구해주세요! 전 이대로 죽고 싶지 않다고요!”“네가 이렇게 큰 죄를 저질렀는데 내가 무슨 수로 너를 구해? 황제 폐하께서 너를 얼마나 중히 여기고 믿어줬는데 네가 어찌 이런 배은망덕한 짓을 저지른단 말이냐!”“어머니, 저 정말 잘못했어요. 제 죄를 다 뉘우쳤어요. 다시는 그러지 않을 거예요! 나라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울게요. 제발 이 아들을 살려주세요!”왕표가 오열했지만 노부인은 그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이때, 곁에 서있던 최숙심이 직접 만든 음식과 술을 꺼내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당신과 나 사이에 부부의 연은 끝났지만 어머님과 아이들은 제가 잘 돌볼게요. 그러니 걱정 말고 떠나세요.”왕표는 담담하게 말을 하는 최숙심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네가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와! 서방을 배신한 천박한 년! 감히 나에게 부부의 연을 운운해?”“그래요. 저희는 이제 부부가 아닙니다. 그러니 앞으로 각자 갈 길을 가는 게 좋겠지요.”“나쁜 년!”왕표가 잔뜩 분노한 목소리로 외치자, 이를 들은 백성들이 너도나도 최숙심을 불쌍하게 여겼다. 평생 전전긍긍하면서 왕표를 위해 아들과 딸을 낳고 집안일을 처리하면서 시부모에게도 최선을 다했는데 결국 저런 말을 듣다니.뒤로 한 걸음 물러난 최숙심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편, 고청우는 왕씨 가문의 일에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모여 있는 백성들을 자세하게 쓱 훑었다. 이제 곧 죽을 텐데 정말 아무도
오후 3시 정각, 커다란 판대기가 처형장에 올라왔다. 철로 만들어진 판대기는 매우 단단했으며 상국에서 요참형에 쓰이는 유일한 판대기였기에, 오랫동안 방치되어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었다.문엄 황제 때 요참형이 너무 잔인하다는 평가가 많았기에 죄가 아무리 중한 범인이라고 해도 요참형을 내리지 않았다.하지만 이 형이 현재까지 폐지되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반역자에게 겁을 주기 위한 것이다.요참형을 처형할 때 백성들에게 보여주지 않는 게 원칙이지만 국정을 어지럽히고 역적들과 손을 잡고 나라를 배신한 건 역천 대죄이기에 이러한 방식으로 반역의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들에게 겁을 주려고 했다.왕표는 이내 입고 있던 옷이 전부 벗겨졌고 관원 부하 두 명이 왕표를 판대기에 눕혀 어깨를 꾹 누른 뒤 꿈쩍도 못하게 제압했다.공포에 질린 왕표는 순간 정신을 잃은 채 기절했고 망나니가 대도를 치켜 들자 대부분 사람들이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구경꾼들과 달리 영군오아과 연왕 등 사람들은 전방을 직시하게 고정되어 있었기에 고개를 돌릴 수 없었고 눈을 꼭 감은 채 온몸을 덜덜 떨었다.연왕은 그 중에서 가장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 망나니가 대도를 든 순간 눈을 꽉 감은 연왕은 심지어 비명까지 질렀다.하지만 겁을 먹은 사람들과 달리 추몽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전방만을 직시했다.망나니의 대도가 왕표의 허리를 자른 순간에도 추몽의 표정은 한 치의 변화도 없었다.왕표에 이어 고청우가 처형당할 때에도 그는 눈을 피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비명소리나 흐느끼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듯 왕표와 고청우가 발버둥 치다가 완전히 의식을 잃을 때까지 빤히 지켜 보았다.한편, 왕청여는 왕표가 처형되기 전에 노부인을 데리고 이미 처형장을 떠났고, 최숙심은 처형이 끝나고 나서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최숙심은 결국 왕표가 처형당하는 모습을 보지 않았다. 눈을 꼭 감고 있다가 주변에 모여 있던 백성들이 왕표가 죽었다는 말에 그제야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가족들이 시체를 거둬가지 않으면
상서원과 지안궁에서 벌어진 일은 순식간에 숙청제의 귀에 들어갔다. 그는 마음이 나날로 초조해져갔다.게다가 연일 계략까지 모색하느라 두통이 심해져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플 정도였다.황후의 금족령을 해제한 것도, 대황자를 태자로 책봉하기 위한 준비였다. 태자가 될 인물에게 금족된 어머니가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숙청제는 금족된 황후가 자식을 방치하는 것이 곧 자식을 해치는 일임을 깨달을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착각이었다.황후는 반성하긴 커녕, 오히려 황자가 자신의 곁에 있어야만 자신의 지위를 굳힐 수 있다고 확신할 뿐이었다. 한편, 숙청제는 입맛이 없는듯 저녁 식사를 대충 때운 뒤 약탕을 마셨다. 아무리 지쳐도 약은 반드시 복용해야 했다. 하루라도 더 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매번 죽음이 눈앞에 다가왔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누구나 겪어야 할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항상 죽음은 먼 이야기라 생각했는데 이리도 갑자기, 예고도 없이 다가온 것이니 말이다. 그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국가의 중대사나 미래의 계획 같은 무거운 이야기가 아닌 단순히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며 숨을 돌리며, 마음을 편히 하고 싶었다. 하지만 한참을 머리를 굴린 끝에 떠오른 인물은 단 한 사람, 송석석뿐이었다. 송석석은 부상 치료로 며칠간 어서방에 오지 않았다. 숙청제는 임태의를 불러 침술로 두통을 진정시켰으나, 어지러운 증상과 불안감은 점점 커져만 갔다. 어지러움 때문인지, 검은 하늘이 빙글빙글 도는가 싶더니 금방이라도 자신을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그러다 문득 터무니없는 생각이 떠올랐는데, 그것은 단순한 충동이 아닌 의심할 여지조차 없는 확신이었다.한편, 북명왕부에서 노 집사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급히 달려왔다.“무슨 일이오?” 염 선생이 서재에서 나오며 물었다. 노 집사는 빠르게 계단을 올라가서는 목소리를 낮췄다.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왕비마마를 뵙고 싶다 하시옵니
황후는 시간을 맞춰 다시 상서원으로 간 후, 대황자를 데리고 함께 지안궁으로 가서 태후에게 문안 인사를 올렸다. 앞뒤로 늘어선 수행원들의 위세는 대단했다.대황자마저 어린 환관의 등에 업혀 궁문에 이르러서야 그를 내려놓았다.황후는 의복을 단정히 하고 대황자의 손을 잡고 지안궁으로 들어갔다. 꿇어앉아 예를 올린 후, 태후의 안부를 여쭈어 보았다. 비록 예법은 완벽했으나, 태후는 한동안 그녀에게 일어나라는 말을 하지 않았고 다만 대황자를 불러 물었다. “오늘 태부께 칭찬을 들었느냐?” 그러자 대황자는 태후의 눈치를 살짝 살피더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늘 태부께서 칭찬을 잊으신 것 같사옵니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황후가 서둘러 말을 보탰다. “태부께서는 엄격하시어 쉬이 칭찬을 하시지 않으십니다.” 황후는 태후가 이미 태부와 약속을 해둔 일을 모르고 있었다.대황자가 그날 착실하고 성실히 임하면 수업이 끝날 때 한마디 칭찬을 해 주기로, 그렇지 않으면 칭찬은 없기로 말이다. 이를 통해 태후는 대황자의 하루 태도를 알 수 있었다. 태후는 황후의 말을 무시한 채 담담히 대황자를 향해 말했다. “규율은 기억하고 있느냐?” 그러자 순간 대황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그는 급히 변명하며 말했다. “태부께서는 어머니가 저를 찾으신 것을 못마땅히 여기셔서 칭찬하지 않으신 것 같사옵니다.” “그렇다면 벌을 받아야 하는 건 너냐, 아니면 네 어미냐?” 태후가 묻자, 대황자는 황후를 가리키며 재빨리 말했다. “어머니를 벌하옵소서! 어머니께서는 글을 베끼시는 것을 가장 즐기시옵니다!” “맞습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저는 글을 베끼는 것을 좋고 자식을 가르치지 못한 죄도 있으니 응당 벌을 받아야 하옵니다.” 황후도 서둘러 맞장구를 치자, 태후는 그녀를 흘끗 보더니 금마마에게 명했다. “대황자를 저녁을 차려주고 작은 서재로 보내라. 해시 전까지 모두 베끼지 못하면 출입을 금하라.” 그러자
두 사람은 그렇게 어서방에서 거의 한 시진가량 이야기를 나눴다.태후가 떠난 뒤, 숙청제는 황후의 금족령을 해제하라는 어명을 내릴 뿐, 후궁을 관리하는 권한은 돌려주지 않았다.오대반으로부터 어명을 전해 들은 제황후는 처음엔 믿을 수 없었다. 어째서 갑자기 금족령이 해제했단 말인가?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아마도 자신이 전에 퍼뜨리도록 지시했던 말들이 효과를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후가 살아 있는데, 적자를 태후궁에서 보살피는 것은 규율에 어긋난다는 말이었다.금족령이 해제된 제황후는 감사의 인사는 뒤로하고 대신, 곧장 서대신, 곧장 대황자를 만나러 상서원으로 향했다. 대황자는 황후를 보자마자 봅시 기뻐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태부가 강의를 하고 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새장 속에서 풀려난 새처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녀에게 달려갔다. “어머니, 아들은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었사옵니다! 언제쯤 저를 다시 데려가시겠나이까!” 황후는 허리를 숙여 그의 어깨를 잡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들을 찬찬히 살폈다. 초구를 걸치지 않은 대황자는 많이 야워어 턱선이 뽀쪽하게 드러난 모습에 황후는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어찌 이렇게 수척해졌느냐? 잘 먹지 못한 것이냐?” 대황자는 입을 삐죽이더니 금세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서재에서 돌아가면 황조모께서는 또 글을 외우게 하십니다. 외우지 못하면 밥을 주지 않으시니 황조모궁에 더는 있고 싶지 않아졌습니다. 빨리 돌아가고 싶사옵니다!” 제황후는 태후가 엄격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방금 금족령이 풀린 상황에서 태후와 맞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다만 대황자를 달래며 말했다. “조금만 더 참거라. 어미가 네 부황을 설득할 것이다.” 대황자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말하려다, 안만수 태부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말문을 닫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때 안만수가 제황후에게 예를 갖추며 말했다. “마마, 대황자께서는 수업 중이시옵니다.” 제황후는 안
이튿날, 목 승상은 바로 태의원으로 향하였다. 태의원에서는 모든 태의와 원정이 대기 중이었다. 자리에 앉은 목 승상은 그들을 바라보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딱 한 가지만 묻겠다. 폐하의 병을 치료할 자신이 있느냐?” 태의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 마침내 오원정이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목 승상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없사옵니다.” “조금이라도 말이냐?” 목 승상은 쉽게 납득할 수 없어 다시 물었다. “단 한 가닥의 희망이라도, 혹 다른 방도라도 없단 말이냐?” 모두가 다시 침묵하자, 목 승상의 눈빛은 점차 어두워졌고 그러다 완전히 빛을 잃었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태의원의 명성을 걸고서라면, 이 기한을 2년으로 늘릴 수는 없겠느냐?” 오원정은 얼굴에 깊은 자책감이 서려 있었다. “승상, 폐적증은 발작하면 기세가 매우 심각하여 2년은커녕 1년조차도… 쉽지 않을 것이옵니다.” 이번에는 목 승상이 한참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고는 마침내 한 마디 내뱉었다.“입들 조심하거라.” 그는 천천히 태의원을 나서며 망토를 단단히 여몄다. 이렇게도 빨리 또 연말이 다가왔다. 날씨가 갈수록 추워져 뼛속까지 스며들었다.태후는 겉으로는 아무 일도 모르는 듯했지만, 태의원의 밤새 꺼지지 않는 불을 보고일이 터졌음을 짐작했다. 그녀는 두통을 핑계로 오원정을 불러 진맥을 청했다. 그러자 진맥을 마친 오원정이 말했다. “태후마마께서는 수면이 부족하신 듯하옵니다.” 꼿꼿이 서 있는 그는 태후가 이미 무엇인가를 눈치챘음을 알고 있었다. 궁에서 태후의 눈과 귀를 피해 갈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태후가 알고 싶어 하지 않을 때만 예외였다. 태후는 주변 사람들을 돌려 보내고, 오원정만 남게 했다. 문지방 위로 햇살이 드리웠지만 매서운 바람이 드리워, 그 햇살조차 싸늘하게 느껴졌다. “말해보거라.” 태후는 자리에 앉아, 오원정의 멍든 눈가를 바라보며 말했다. “폐하께서 얼마나 심각한 상황이기에
오늘 밤, 목 승상은 궁에 묵기로 하였다. 한편, 숙청제는 여전히 후궁에 들지 않았으며, 자신의 침전에 돌아가지도 않고 어서방 안의 침상에 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목 승상은 황제가 약을 다 마시는 것을 보고 사탕 하나를 건넸다.숙청제는 사탕을 받아 들고 한참을 바라보다가 눈가에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어릴 적, 부황에게 호되게 꾸짖음을 당하고 나면 승상께서 꼭 사탕 하나를 건네며 격려의 말을 해주시곤 하였지요.” 목 승상도 그를 바라보았다.“그렇습니다. 저 역시 기억하고 있사옵니다. 황상께서 당시 말씀하셨지요. 훗날 현군이 되겠노라고 말입니다.” “혹 승상을 실망시킨 적이 있었는지요?” 숙청제는 사탕을 입에 넣었다. 그로 인해 목소리가 다소 흐릿해졌다. “없사옵니다. 소인에게 폐하는 이미 현군이시옵니다.” 숙청제는 고개를 저으며, 눈에 실망스러운 빛을 띠우고 말했다. “난 현군이 아닙니다. 하고 싶은 일이 아직 많이 남아 있지만 이제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태의원에서 아직 진단을 내리지 않았으니, 폐하께서는 비관하시면 안되옵니다.” 목승상의 위로는 다소 건조하게 느껴졌다. “조금은 아쉽기는 하지만 더 많은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숙청제는 침상에 비스듬히 누운 채 무거운 눈빛으로 말했다. “우선, 태자를 정해야 할 텐데 승상께서는 대황자가 어떠신지요?” 목승상이 답했다. “대황자는 장남이자 중궁의 적자로서, 지금은 태부의 가르침 아래 점점 나아지고 있사옵고 예전의 제멋대로이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시간이 지나면 더욱 믿음직스러운 인물이 될 것입...” 그러자 숙청제가 그의 말을 끊었다. “저는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 현재를 이야기하시지요. 그럼, 이황자는 어떻습니까?” 잠시 생각에 잠기던 목 승상이 답했다. “이황자는 영민하고 총명하지요. 비록 이제 막 학문을 시작하셨으나, 근면하고 배우려는 의지가 강한 점이 눈에 띕니다. 다만 이를 지속할 수 있을지는
너무나도 큰 일이라 송석석은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황제가 만약 승하한다면, 의심할 여지도 없이 대황자가 황위에 오를 것이고, 조만간 태자로 책봉될 것이다. 어린 황제가 즉위한다면, 반드시 보정 대신이 필요할 것이며, 그 수는 한 명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이로 인해 조정은 여러 당파로 갈리게 될 것이고, 혼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컸다. 만약 보정대신을 두지 않는다면, 태후나 제황후가 수렴청정할 것이다. 황후는 야망이 가득한 사람으로, 현재 금족 된 상태에서도 대황자를 위해 계략을 꾸미고 있었다. 제씨 가문의 세력이 너무나 강해져 최근 황제가 억누르고는 있으나, 만약 황제가 승하하고 대황자가 즉위하면 제씨 가문은 다시 힘을 얻게 될 것이었다. 누군들 권력을 탐하지 않겠는가? 목승상은 고령이라 퇴의를 염두에 두고 있었기에, 신황을 위해 나라를 돌보려 해도 상황이 그리 녹록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나중에 벌어질 일들이고 현재 가장 우려되는 것은 황제에게 1년이란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면 그가 승하하기 전에 황후는 대황자를 위해 모든 장애물과 위협을 제거하려 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북명왕부가 가장 큰 위협이었다. 오대반도 이 점을 깨달았는지,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졌다. 그는 황제의 병세를 알게 되었을 때, 오직 북명왕만이 어린 황제를 도와 정국을 안정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만 생각했다.하지만 송석석의 근심 어린 얼굴을 마주하게 되자 그 끔찍한 가능성을 깨닫게 되었다.아니, 이것은 단순한 가능성이 아니었다. 현실이 될 가능성이 너무나도 컸다. “왕비마마, 차라리 떠나시는 것이…” 송석석이 서둘러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 “그만하시옵소서. 지금은 태의조차 확실히 진단 내리지 못하였으니, 어쩌면 단순한 두통이거나 종기일 수도 있사옵니다.” 그녀는 오대반이 조언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혹여 훗날 황제에 대한 자신의 불충함을 느끼고 괴로워할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먼지떨이를 꽉 쥔 오대반은 그녀의 뜻을 바
와야 할 사람들은 모두 만났기에, 이제 송석석은 마음 놓고 쉴 수 있을 것 같았다.간혹 임 태의가 상처 치료와 흉터 제거를 위한 약을 챙겨 찾아오긴 했지만, 그럴 때마다 염 선생이 그를 환대해 주었고 황제께 대신 감사를 전해줄 것을 바랐다. 이날은 임 태의가 오대반과 함께 찾아왔다. 염 선생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는 임 태의에게 흉터 제거에 관련한 질문이 있다며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면서 송석석이 오대반과 단둘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했다. “폐하께서 보내신 것이옵니까?” 송석석이 묻자, 오대반은 손에 든 먼지떨이를 팔꿈치 위에 걸친 채 문밖에 함께 온 친위병들을 힐끗 보며 답했다. “황상께서 보내신 것도 맞고, 내 스스로도 오고 싶었사옵니다. 왕비 마마는 좀 나으셨사옵니까?” 잠시 망설이던 송석석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어때 보이시나요?” 오대반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왕비 마마께서는 통찰력이 깊으시옵니다. 좀 나아진 듯하나, 아직은 거동이 어려우신 것 같습니다만.” 송석석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공공께서 말씀하신 대로, 좀 나아지긴 했으나 아직 걸을 수는 없사옵니다.” “왕비마마께서는 마음 졸이지 마시고, 우선 몸부터 잘 돌보셔야 하옵니다.” 오대반이 위로하자, 송석석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마음이 급하지만 어쩔 수 없지요. 단신의 말로는 골절은 백일이 걸린다 하였으니, 이 백일 동안 잘 요양해야 할 듯하옵니다.” 그때 시만자가 안쪽을 들여다보며 미소를 지었다.“멀리서 보고 척귀대인인 줄 알았는데, 가까이 와보니 내가 착각했군.” 그 말을 들은 친위병들은 그녀가 장기문 대감의 사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서둘러 예를 갖춰 인사했다. 시만자는 그들의 이름을 물은 뒤,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재미있군요. 내 제자들이 그대들 무예가 뛰어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던데, 오늘 잘 만났군. 내 그대들과 몇 수 겨루도록 하지.” 그 말에 친위병들의 눈이 반짝였
안여옥이 몸을 굽히며 작별 인사를 했다.“그럼 더 이상 방해하지 않겠사옵니다.” “살펴 가세요.” 최숙심은 미소를 띈 얼굴로 그녀를 배웅했다. 안여옥이 떠난 후, 최숙심이 왕청여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검은 그림자는 또 다시 후회를 하고 있다는 증거였다.“이미 지난 일을 되새긴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어서 들어가시지요.” 왕청여가 송석석을 문병하러 온 것은 큰 용기를 낸 것이었다. 그녀는 송석석에게 사과와 감사를 동시에 전해야 했기에, 오늘은 그저 형수님들을 따라온 척했지만, 사실은 과거의 모든 일을 마주하기 위해 찾아왔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과대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송석석을 마주할 용기는 냈지만, 안여옥을 보는 순간, 알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쳤다. 마치 무언가로 세게 맞은 듯 머릿속이 하얘졌고, 그 미소조차 억지로 지어낸 것이었다. 심지어 자신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까 두려웠다. 멍하니 형수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간 왕청여는 송석석을 마주한 순간 이미 눈물은 시야를 가렸다. 그녀를 한 번 쳐다보던 송석석은 미소 지으며 자리에 앉으라 권하고 차를 내렸다. 그녀의 다리에 감긴 붕대를 바라보던 최숙심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심하게 다친 것은 아닌지요? 얼마나 많이 아프셨습니까?” 그녀의 진심 어린 염려에 송석석은 오히려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 정도 작은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지요.” “어찌 아프지 않을 수 있겠사옵니까? 듣자 하니 뼈까지 부러졌다던데, 얼마나 오래 요양해야 한답니까? 나중에 걷는 데 지장은 없겠사옵니까?” “이것 보세요. 아주 멀쩡하지 않습니까? 정말로 괜찮습니다. 전장에서의 부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송석석은 태연하게 다리를 살짝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녀의 의연한 모습에 최숙심의 눈이 더더욱 슬퍼졌다. “전장에서 얼마나 힘드셨겠습니까?” “늘 있는 일이지요. 이제 다 나았사옵니다.” 그때 옆에 있던 남희가
그렇게 궁을 떠난 혜태비는 왕부에 들어서자마자 서우와 함께 곧장 송석석에게로 향했다. 계속 입이 근질거렸던 그녀는 송석석과 대화를 마치자마자 돌아서서는 서우가 멀어지기 바쁘게 오늘 궁에서 들은 이야기와 태후가 내린 엄벌 조치를 모두 털어놓았다. 그러자 모든 것을 전해 들은 송석석은 오히려 혜태비를 위로했다. 후궁에 갇혀 있다 싶이 하는 자들이라 너무나 한가해서 그러는 것이라고 그녀처럼 거리를 산책하거나 연극을 보러 갈 수도 없기에 자연스레 이야기를 꾸며내며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을거라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 길고 지루한 나날을 어떻게 보내겠냐며 말이다.하지만 혜태비는 여전히 화가 났다."그렇다 해도 함부로 입을 놀리면 안 되는 것이니라. 게다가 듣기 거북할 정도이니 용서할 수 없느니라. 우리 묵이가 낙동강 오리알이 될 수도 있다니, 이게 사람이 할 소리냔 말이다! 나이만 먹었지. 기본 예의라곤 없는 사람이니라!" 송석석은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 이상함을 느꼈을 때 자신이 곧장 액션을 취하지 않았음이 후회되었다. 하지만 그 탕약을 마시기 전에는 이상하다고 느꼈어도 이렇게까지 심각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고, 도리어 황제가 만종문의 일을 알아내려는 줄로만 여겼다. 지금까지도 황제가 무슨 의도로 그러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원체 생각이 많은 그인지라 생각을 꿰뚫었다는 느낌이 왔어도 크게 어긋날 때가 더욱 많았다. 비록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군정 회의에 직접 참여할 수는 없으니, 전선의 소식은 오직 사매에게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가한 나날들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부상을 입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이들이 문병하러 찾아왔기 때문이다.아프지 않을 때는 알 수 없던 관계망이, 병환에 있게 되니 얼마나 넓은지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저마다 선물 꾸러미와 약재를 한가득 들고 찾아왔다.모두 오래 머물지는 않는다 하였으나 날마다 많은 이들이 찾아오니 일일이 응대해야 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서야 비로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