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석석도 당연히 잘 알고 있었다. 황제는 송석석이 미리 얘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미 그녀를 탓하고 있는데, 이 상황에서 제 제사까지 경위부에서 사망하면 경위부 전체가 벌을 받게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 당시엔 미리 언질을 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상황이 안 좋다고 해도 상서부에 사람을 보내 요 근래에 남풍관을 엄하게 다스리고 있으니 조심하라고 제 제사에게 말을 전할 수는 없지 않은가?제씨 가문 사람들은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고 되레 송석석이 말도 안 되는 모함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여길 게 뻔하다.송석석은 미간을 확 찌푸리며 말했다.“제 제사께서 남풍관에 방문하기로 선택한 순간부터 언젠가 들킬 날이 있다는 걸 아셨어야지. 감당할 수 없는 일은 저지르지도 말았어야지.”송석석은 제 상서에게 아버지를 다시 한번 설득하라고 얘기했지만 30분 동안 그 어떤 말을 해도 제 제사는 입을 꾹 닫은 채 눈도 뜨지 않았다.제 상서는 아버지에게 약을 먹이려 했지만 제 제사가 입을 꾹 닫고 있었기에 약물은 입가를 통해 전부 옷에 흘러내렸다.차라리 의식이 희미했을 때가 더 나았을 수도 있었다.송석석은 제 제사 곁에서 조용하게 지켜보다가 그의 마음속에 아직 원망이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굳이 경위부에서 죽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제 상서가 아버지에게 황제가 전혀 탓하지 않는다고 말을 해도 제 제사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참다못한 송석석은 제 상서와 나머지 사람들을 전부 방에서 내보낸 뒤, 의자를 끌고 와서 제 제사 앞에 앉았다.“제 제사, 지금 저를 원망하고 계신 게 맞으십니까?”송석석의 물음에도 제 제사는 여전히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한 치의 표정 변화도 없었다.“저를 원망한 게 아니라면 제 제사와 같은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 세상을 원망하고 계신 거지요. 하지만 제사께서는 아무도 원망할 수 없습니다. 이 나라에는 이런 사례에 대한 확실한 법이 제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때문에 제사께서 젊으셨을 때 혼인을
이 충격적인 소문이 퍼지자마자 제 제사를 숭배해왔던 백성들은 크게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제 제사와 안 태부는 상국의 유명한 대학자였는데, 현재 안 태부는 자리에서 물러난 상황이라 조정의 세력에 가담하지도 않았기에, 안여옥에게 문제가 터졌을 때 안씨 가문을 위해 나서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하지만 제 제사는 달랐다. 제 제사의 아들은 사부에서 관직을 맡고 있었기에, 진실을 알지 못하는 관원들이 제씨 가문에게 잘 보이기 위해 너도나도 나서서 함부로 모함하는 광릉후 가문을 엄벌해야 한다고 외쳤다.솔직히 큰 파장을 일으킬만한 일이 아니었지만 그때 당시 남풍관에서 체포된 사람들 중에 관원과 세가 자제들도 많았기에 다들 자신이 비판을 덜 받기 위해 사람들의 관심을 제 제사에게 돌리려고 한 것이었다. 결국 며칠 뒤, 남풍관에서 일하던 몇몇 머슴들이 남풍관에서 제 제사를 본 적이 있다고 증언했고 심지어 이틀에 한 번씩 볼 정도로 자주 방문했다며 말을 덧붙였다.일이 이 지경이 된 이상, 숙청제 선에서 더 이상 해결할 수가 없었다. 숙청제 곁을 지키던 목 승상은 이 일이 사실이기도 하고 계속 숨긴다고 해서 해결되지도 않는다고 하면서 어차피 선황제에게 스승이 더 계시니 다른 스승의 명분을 바로잡는 게 그나마 선황제의 체면을 지키는 일이라고 고했다.숙청제는 이내 백골이 된 용운덕을 선황제의 제사로 임명하고, 위패를 왕실의 종묘로 옮겼다.후대가 없는 용운덕은 문엄 황제가 조정에 통솔하던 때의 탐화랑이었으며 재능이 뛰어난 덕에 관직을 2년 동안 맡았다가 그만두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세상 구경에 전념했다.그러다가 진성에 돌아온 뒤로부터 문엄 황제는 용운덕을 태자의 스승으로 임명했고 그때 당시의 태자가 바로 선황제였다.하지만 2년 뒤, 세상 구경이 너무 간절했던 용운덕이 결국 태자의 스승 자리에서 물러났다.그가 극단적이고 예리한 문장만 고집한 탓에 그때 당시엔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지 못했지만, 나중에 쓰기 시작한 시가 현재 죽어서도 널리 알려지고 있다.용운덕이 사망
제 상서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말했다.“아버지, 폐하께서는 이제 더 이상 우리 제씨 가문을 중히 여기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제가 어찌 북명왕 가문의 심기까지 건드리겠습니까?”“그럼 그냥 죽게 내버려둬. 내가 죽어야 너희들이 살 수 있어.”말을 하던 제 제사는 다시 눈을 지그시 감았고 이렇게 몇 마디 한 것만으로도 너무 힘들었다.한편, 제 황후는 오래 전부터 송석석이 마음에 들지 않았었는데, 송석석이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탓에 제씨 가문은 명성이 무너졌을 뿐만 아니라 황후인 그녀까지도 피해를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제 황후는 밖으로 나가자마자 제 상서를 불러 조용하게 얘기했다.“조부께서 요구하신 대로 송 대감을 불러오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목 승상도 함께 불러오세요. 그래야 송 대감이 조부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사실을 증언해줄 사람이 생길 것 아닙니까?”제 상서가 고개를 번쩍 들고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제 황후를 쳐다보았다.“안 된다. 지금 그게 무슨 말이냐! 그러다가 네 조부께서 정말 사망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는 것이냐!”“아버지, 조부께서 맞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조부가 돌아가셔야 저희 제씨 가문이 살 수 있습니다. 조부께서 살아 계신 한, 저희 제씨 가문은 계속 손가락질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조부께서 사망하시면 조부의 공적을 찬송하는 사람이 생길 것이고 시간이 지나면 다들 남풍관에 관한 일은 잊을 것입니다.”“너 제정신인 것이냐? 그건 그저 네 조부께서 홧김에 한 말일 뿐이다!”그러자 제 황후가 눈물을 닦으며 그를 진정시켰다.“아버지, 일단 제 말을 들어보시지요. 조부께서 이렇게 되신 게 송석석 그 여자 탓이 아닙니까? 조부께서는 그 여자를 원망하고 계신 겁니다. 그래서 만나고 싶다고 얘기하신 것이죠. 송석석 앞에서 생을 마감하시는 게 조부의 복수 수단이고 저희 제씨 가문이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조부께서 이런 결정을 하신 것도 다 생각이 있으신 게 아니겠습
한편, 제 황후의 부름에 송석석은 어안이 벙벙했다.‘왜 갑자기 제 제사를 만나러 오라고 부르는 것이지? 죄를 묻고 싶다면 궁으로 부르면 될 텐데 말이야.’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제 제사를 상대로 송석석은 욕을 먹어도 감히 한 마디도 반박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그러다가 제 제사가 눈앞에서 사망하기라도 하면 송석석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진다. 시만자는 송석석에 제 제사가 며칠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있기에 작은 자극에도 사망할 수 있을 것 같다며 그의 현재 상황을 얘기해주었다. “제 제사께서 설마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봐 달라고 부르는 건 아니겠지? 늙은이가 아주 못됐네!”자초지종을 들은 모신신은 씩씩거리며 독설을 날렸고, 만두는 옆에서 송석석을 말렸다.“가지 않는 게 좋겠어. 황제 폐하의 명도 아니고 황후의 명을 어긴다고 해서 큰일이 날 것 같진 않은데?”하지만 시만자의 의견은 달랐다.“황후의 명을 어기면 황제가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보여도 속으로 체면이 깎였다고 생각할 거야. 가야 돼. 제 제사가 정말 네 앞에서 죽는다고 해도 그건 하늘의 뜻이니 어쩔 수가 없어. 이건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시만자는 숙청제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에 황제 부부의 심기를 함부로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석석아, 내가 너랑 같이 가줄게.”시만자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송석석이 말했다.“네까지 같이 안 가도 돼. 단 신의를 불러서 함께 갈 생각이야. 그리고 제 제사를 만날 때 제 대부인께 같이 있어달라고 부탁할 거야.”제씨 가문이 막무가내인 집안은 아니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당당하게 맞서서 증인을 데리고 가는 게 차라리 나을 수도 있다.“그래, 그럼 내가 단 신의께 찾아가서 같이 가줄 수 있는지 여쭤보고 올게.”모신신의 말에 시만자가 대꾸했다.“여쭤볼 필요도 없어. 단 신의께서 석석에 관한 일이라면 당연히 나서실 거야.”“다행이네!”모신신과 만두는 그리 걱정되지 않았다. 문제가 생긴다면 해결하면 그만이고 정
목 승상이 고개를 숙이며 공손하게 대답했다.“황후 마마의 명을 제가 어찌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그치만 오늘 왕비님께서는 제 제사의 문안을 오신 겁니다. 두 분은 평소에 원한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닌데 충돌이 생길 이유가 전혀 없을 것 같습니다.”산전 수전을 다 겪은 목 승상 앞에서 제 황후의 잔머리는 그저 얕은 수에 불과했다. 황후의 신분을 이용하여 대놓고 송석석을 함정에 빠트리려고 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조부가 이로 인해 사망할 수도 있다는 점을 뻔히 알면서도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목 승상은 냉랭한 눈빛으로 제씨 가문 사람들을 쓱 훑어보았다.“제 제사께서는 참 훌륭한 자제분들을 두셨네요. 여한이 없으시겠습니다.”목 승상의 뜻을 눈치챈 제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푹 숙인 채 감히 목 승상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이때, 곁에서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제 대부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송석석에게 말을 걸었다.“송 대감님, 단 신의를 불러 저희 어르신의 병을 치료해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그녀가 갑자기 이런 말을 할 줄 몰랐던 제 황후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져 버렸다.“어머니, 어의가 조부의 곁을 지키고 있는데 뭐가 걱정이십니까? 아무 의원이나 제 조부의 병을 고칠 자격이 있는 건 아닙니다.”제 황후는 평소에 오만한 자태를 뽐내는 단 신의가 이런 모욕적인 말을 들으면 화가 나서 떠날 줄 알았으며 이번 기회에 송석석만 제대로 짓밟을 수 있다면 단 신의의 심기를 건드리게 된다고 해도 전혀 상관이 없었다.한편, 제 황후의 말에 제씨 가문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제 제사가 평소에 복용하는 약은 대부분 약왕당에서 구매했을 뿐만 아니라 다들 매년 한 번 정도는 단 신의에게서 병을 보곤 했다.단 신의의 의술은 손꼽힐 정도로 뛰어난데 단 신의의 심기를 함부로 건드렸다가 앞으로 약왕당에 발도 들이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버럭 화를 낼 줄 알았던 단 신의는 되레 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황후 마마께 의원
송석석은 문을 열고 침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내부를 쓱 훑어보곤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어르신!”지금 생각해보면 솔직히 제 제사와 송석석 사이에는 개인적인 원한이 전혀 없었으며 그저 우연히 상황이 겹쳤을 뿐이다.서서히 눈을 뜬 제 제사는 잠시 주변을 살피다가 송석석 혼자만 들어온 걸 확인하고 나서야 한숨을 살짝 내쉬었다.몸이 허약한 제 제사는 숨소리마저 미약했고 언제 사망해도 이상하지 않은 모습이었다.상 위에는 약 한 그릇과 죽 한 그릇이 놓여 있었고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걸로 봐서는 누군가가 제 제사에게 먹이려 했지만 제 제사가 거절한 듯했다.“죽을 좀 주시오.”제 제사가 손을 뻗자 송석석은 이내 고개를 돌렸다.“죽을 드시고 싶으신 겁니까? 그럼 제가 얼른 하인을 불러오겠습니다.”이내 침실에 들어온 양기웅은 감격스러운 눈빛으로 송석석을 쳐다보았다. 며칠동안 음식을 전혀 입에 대지 않은 제 제사가 이렇게 죽을 찾는 것만으로도 양기웅은 송석석이 너무 고마웠다.한편, 밖에서 듣고 있던 제 황후는 상황이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자 미간을 확 찌푸렸다.‘조부가 왜 갑자기 죽을 찾는 거지?’제 황후는 일단 지켜 보기로 했고 침실 안에 있던 제 제사는 죽을 절반 정도 먹은 뒤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양기웅에게 이만 나가보라고 했다.양기웅은 절반이나 사라진 죽 그릇을 보며 너무 감격스러워서 눈물이 날 정도였다. 그는 제 제사가 이대로 죽으면 자신도 따라 죽을 것이라고 다짐했었다.인삼죽을 마신 제 제사는 조금 전보다 얼굴이 편해 보였지만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송석석은 경위부 때처럼 의자를 챙겨와 제 제사 침대 곁에 조용하게 앉아있었다.조금 뒤, 힘겹게 눈을 깜빡이던 제 제사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그날 송 대감은 저한테 신념을 견고하게 지키지 못하고 원하는 삶을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고 하셨죠. 제가 오늘 송 대감을 저택으로 부른 건…”말을 하던 제 제사는 힘겨운 듯 잠시 숨을 고르다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송 대감에게
제 제사는 한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지고 있어 금방이라도 버럭 화를 낼 것만 같았다.한편, 밖에서 듣고 있던 제 황후는 화제가 이상한 곳으로 흘러가는 것 같아서 침실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다가 조부의 거친 숨소리가 걸음을 멈추었다.송석석의 말에 충격을 받은 조부는 더할 나위 없는 수치심을 느꼈을 것이고 반드시 송석석에게 확실하게 복수하려고 할 것이다.이미 삶의 의지를 잃은 제 황후는 그저 조부가 화끈한 죽음으로 송석석에게 복수하길 바랄 뿐이었다.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조부는 화를 내지 않았고 되레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하고 있었다.“어쩌면 송 대감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경위부에서 저에게 했던 말은 틀렸습니다. 쟁취한다고 해서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송 대감이 지금 하고 있는 노력도 전부 무용지물이라는 뜻이지요.”제 제사의 말에 송석석이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어르신, 그럼 저와 내기를 하시겠습니까?”“내기요?”흠칫하던 제 제사는 이내 씁쓸하게 웃으면서 물었다.“송 대감이 자신이 이길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저와 어떤 내기를 하고 싶으신 겁니까?”“몇 년이 지나면 어르신은 이 나라 곳곳에서 공방과 여학을 보시게 될 겁니다. 제가 말한 것처럼 세상이 변한다면 제가 이긴 걸로 해주십시오.”“말도 안 되는 소리. 진성에 현재 여학이 있는 건 전부 태후 덕분입니다. 하지만 진성이 아닌 다른 지역에 여학과 공방이 생긴다는 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지요.”제 제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하자 송석석은 조금 가까이 다가가 확신에 찬 표정으로 대꾸했다.“그러니까 어르신, 저와 내기를 합시다. 내기는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저에게 딱 2년만 주십시오.”제 제사는 마음이 조금 흔들렸지만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반문했다. “하지만 우린 상황이 다릅니다. 제가 이루고자 하는 건 훨씬 충격적인 일이지요. 사람들은 영원히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고 이 세상의 인정도 받을 수 없습니다.”“하지만 어르신
송석석이 떠난 이후에도 제 황후는 여전히 분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녀는 한쪽에 앉아 어두운 얼굴로 조부가 약과 인삼탕을 마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심지어 어의들에게 침을 놓아 막힌 혈자리를 뚫게 시키기도 했다. 조부는 단신의가 남긴 약까지 전부 복용했다.한 시진이 채 지나지 않아, 그의 안색이 점점 호전되는 모습을 보였다. 어의들은 그의 마음에 다시금 투지가 생겨, 희망이 보인다는 진단을 내렸다. 제씨 가문 중 누구랄 것 없이 모두가 기뻐했지만, 제 황후만큼은 실망하여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 모습은 제제사가 남풍관에 갔을 때의 얼굴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그녀는 이것이 최후의 수단임을 알았다. 이로 인해 친정의 미움을 사고, 황제의 노여움까지 살 것이라는 사실까지도 이미 알고 있었다.그러나 송석석은 그녀에게 이보다 더 큰 위협이었다. 송석석의 명성이 추락하고 바닥까지 떨어져야만 자신의 황후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드러낼 수 있었다. 그래야 그녀 역시 송석석이 했던 것처럼 여학을 새로 열고, 조정의 관원들과 귀족 딸들을 끌어들여 입학시킴으로써 세가 관원의 힘을 결집하고 대황자의 세력을 강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이전에 자신이 하찮게 여겼던 일도 이제는 다 할 생각이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주저하는 태도를 분명히 알아챘다. 오로지 제씨 가문에 모든 희망을 걸었다가는 문제가 생길 경우 철저히 실패하여 돌이킬 수 없게 될 것이었다.목 승상이 들어와 제제사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오랜 벗이여, 잘 회복하시길 바라네. 이 젊은 것들이 어떻게 소란을 피우는지 지켜보자고. 누군가 소란을 피워야 세상이 흥미진진하지 않겠소."제제사는 약간 감동한 기색을 보였다. 그는 목 승상이 자신을 경멸하고 멸시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그의 태도는 여전히 평소와 같았다.결국 제제사는 버텨냈지만, 영태비는 버티지 못하고 이월 초에 외부에 상소를 발표하며 세상을 떠났다 숙청제는 연왕에게 사람을 보내 그가 돌아와 상을 치를 수 있도록 전갈을 보냈
그러자 송석석이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왕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아주 잘 대해줍니다. 조카딸의 혼담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집간 부군이 잘 대해준다 하더군요. 다만 그녀는 자신이 두 번 시집갔음에도 처가에 머무는 것이 조카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되어 그러는 모양입니다.”그 말에 전북망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순간 번개처럼 날렵하지만 마음씨 따뜻한 최씨 부인이 떠올랐다. 최씨 부인에게는 적자와 서자녀들이 있었고, 아직 혼담이 정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혼인 문제로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에 시달렸을지 생각하니, 전북망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형수로서의 최씨 부인을 존중하며,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 없었다. 이때 송석석이 그의 생각을 끊었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전북망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우리 단둘이 여기에 있으면, 섭정왕이 질투하지 않을까요?” 송석석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침착하게 답했다. “이 정도 신뢰도 없다면, 제가 어찌 현갑군 지휘사로 오래 근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숨김없이 모든 걸 공유합니다. 이번 만남 역시 그분께 이미 알려두었죠.”송석석이 떠나자 전북망도 따라나섰다. 그는 섭정왕이 어딘가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의심했지만, 정작 별청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마당에서야 섭정왕을 발견했는데, 그는 대장군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송석석을 보자 미소로 맞이하며 불러세우는 섭정왕의 모습에 전북망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진정한 부부란 저런 것일까.'그러나 성릉관이든 진성이든, 남녀의 단독 만남은 명예에 흠이 될 수 있음도 잘 알았다. 특히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은 더욱 조심해야 했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들을 걱정하는가.’자조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왕청여의 제안은 여전히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5일의 고민 시간이 주어졌다. 사여묵과 송석석이 진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최씨 부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답은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 전북망은 송석석과 다시 만났다. 사실 그전에도 송석석이 성릉관으로 갔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서먹해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이 매번 성릉관을 떠날 때마다 몰래 배웅하곤 했다. 전북망은 자신이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늘 송석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방과 왕청여에게도 미안하긴 하지만, 그들과는 서로 감정을 소모하고 다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장군부만 송석석에게 상처를 줬을 뿐, 송석석은 장군부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않았다. 비록 이혼한 후에는 전북망 어머니의 병세에 대해 상관하지 않았지만 큰형수에게 어떻게 단설환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기까지 했다.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는 이미 섭정 왕비가 되어있고 나서였다. 변방의 전사들에겐 양식과 무기가 풍부하고, 봉록까지 올라, 그들에겐 이득이기에 이제는 조정의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었다. 섭정왕은 한때 장수였기에 병사들이 배불리 먹어야만 국토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북망과 송석석이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섭정왕과 함께 소 대장군에게 생신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소 대장군의 눈빛은 여전히 자애롭고 인자했다. 전북망은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그때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면 지금 송석석과 함께 노장군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일 것이라는 후회를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같은 생각인 걸 보니, 자신만 제자리에서 멈춰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송석석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생일잔치가 끝난 후에 송석석이 뜻밖에도 먼저 그를 찾았다. 그와 송석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섭정왕은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걱정되지도 않는가?’전북망은 당황하고 불안해 보였고, 송석석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먼저 입을 열지도 못하고 송석석이 말하기만을 기다리
전북망은 성릉관에서 몇 년 동안 두 번이나 발탁되었고, 지금은 장군의 신분으로 수천 명의 병사를 관리하고 있다. 계속 성릉관에 주둔하고 있어 다시 진성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고, 진성의 부름 없이는 제멋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재혼도 하지 않고 여전히 혼자 살아갔다. 성릉관의 모래바람은 해마다 그의 얼굴에 흔적을 남겨 또래들보다 몇 살이나 더 늙어 보였다. 심지어는 몇 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기에, 진정제를 먹어야만 잘 수 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그때 이방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송석석과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부부가 되었을까? 아마도 우린 귀여운 자녀도 낳았겠지. 그리고 나는 군대에서 열심히 일하고 석석은 가문의 내무를 책임지며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를 돌보고 있었겠지? 설령 내가 승진을 하지 못하고 평생 장군으로만 살아도 그는 날 떠나지 않았겠지.’ 이전의 전북망은 송석석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였는데 자신을 위해 날개를 부러뜨리고 병든 시어머니를 돌보며 군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책임지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그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돌이킬 수도 없었다. 전북망에게는 이미 이방이 있었고 이방을 사랑한다고 했으니, 송석석이 이혼하자고 했을 때 그는 심한 말을 하고 후회하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송석석 또한 후회할 게 없었다. 이혼을 하면서 전북망을 위해 부러뜨렸던 날개가 다시 자라나 전쟁터로 날아가 쉽게 공을 세웠으니까 말이다. 이방은 송석석이 큰 가문의 아가씨인 데다가 부친과 오라버니가 그를 위해 길을 닦아주었기에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의 성공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문이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주된 원인은 아닐 것이다. 만종문에서 송석석의 무공은 거의 최고였는데, 그건 송석석이 그만큼 노력을 했고, 그만큼 땀을 흘렸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북망은 송석석을 존경했지만 그는 자신이 송석석을
어머니께 간청해도 소용이 없자 신이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건 더 심한 꾸지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이가 이 혼사를 반대하는 것은 양지춘과 접촉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양지춘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서 놀며 감정을 쌓으라고 했다. 신이는 가기 싫었지만 어머니가 억지로 그녀를 마차에 태웠고, 심지어는 하녀에게 그녀가 부적절한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엄명했다. 양지춘의 얼굴은 그나마 멀쩡하게 생겼는데, 처음에는 신이를 조금이나마 존중하는 척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신이의 외모와 품평을 논하며 신이가 외모가 예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그를 부인으로 들이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그의 오만한 태도는 신이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아마도 신이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양지춘은 일부러 신이를 마차에 태워주는 척하며 그녀의 엉덩이를 꼬집었다!그 순간 신이는 온몸의 피가 머리 위로 솟구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경박한 눈빛에 신이는 이내 눈물이 쏟아졌고, 모욕감에 온몸을 떨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집에 돌왔는데, 하녀와 마부는 그의 동작을 보지 못한 탓에, 오히려 그가 세심하고 자상하다며 그녀의 어머니 앞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이는 억울해서 어머니에게 그 일을 말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그녀가 일부러 꾸민 말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꾸짖으며 사흘 동안이나 외출을 금지했다. 신이는 그렇게 방에 갇혔고, 매일매일을 눈물로 얼굴을 씻었다. 심지어 그날 선비의 말을 듣고 호수에 뛰어들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내가 양지춘에게 시집가는 것이 물에 빠져 죽는 것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사흘 후, 외출 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신이는 다시 경산사로 가서 같은 핑계로 하녀를 내보냈다. 이번엔 정말 죽을 각오로 호숫가에 간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다시 그 선비를 만났다.그는 쓸쓸하게 호숫가에 앉아 작은
신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나무 그늘에 몸이 가려져 있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초라해 보였고 눈 밑에는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바로 다리 앞에서 그림을 팔던 선비이자, 학정이 말하던 퇴학 해서 기녀를 키우는 학생이었다!“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신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짜증을 냈지만, 그가 한 말을 떠올리자 내심 두려웠다. “나는 여기에 물귀신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거짓말하는 것이겠지요.” 신이는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귀신은 두려웠고 진흙탕에 영원히 깔려 있는 건 더욱 두려웠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가 걸어 나오자 얼굴은 더욱 여위어 보였다. “호숫가의 주변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오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건 사람들이 이곳으로 예불하기 위해 오는 것이지, 경치를 보러 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절을 하고 바로 돌아가니 당연히 보지 못하겠지요.” 신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순간 깊이가 보이지 않는 호수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그는 여전히 굳게 서서 말했다. “예불하는 사람은 천지와 자연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경치가 있다면 반드시 한 번 보러 올 것입니다. 이런 곳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좋은 곳일 텐데 아무도 없다는 게 아기씨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것이 사실인지는 몰랐지만,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감히 그런 무서운 곳에서는 죽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자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절대 쉽게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고 싶어도 살 지 못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 밑은 이내 붉어졌고 눈물이 고여 반짝이는 것 같
신이의 사촌 여동생과 하녀는 신이를 찾으러 돌아왔다. 신이가 하녀보고 이순에게 삼백문을 주라고 하자 이순은 웃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원래는 우연한 만남일 뿐이라 다시는 접점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 조모님의 생신 때 가문 연회에서 공학정이 데리고 온 제자들 중에 이순이 있었다. 강남의 예의 규율은 진성처럼 엄격하지 않아서 연회에 참석할 때 여인들도 앞마당에 갈 수 있었다. 이순은 신이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신이는 그때 면사포를 쓰고 있었고 두 눈만 드러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순은 식사를 하지 않고, 신이의 조모에게 생신 축하 그림만 드린 후에 집에 일이 있다며 작별을 고했다. 그가 떠나자마자 학정이 그를 언급하며 안타까운 말투로 말했다. “총명하긴 한데 진취심이 없어서 계속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걸 여기로 데려와 진취성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사귀게 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로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르다니. 정말 실망이군. 학교를 그만두겠다면, 이젠 마음대로 하라고 해야겠어.” 그러자 신이의 부친이 위로했다.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껜 학생이 많으니 그가 나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학정은 마치 울화가 쌓인 것처럼 말했다. “그는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네. 그런데 진취성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동창에게 돈을 빌리질 않나, 게다가 집에 기녀까지 키우고 있다더군.” 신이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런 사람은 얘기할 가치도 없습니다.” 신이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서 왠지 마음속으로 실망감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날은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같다고 생각해 마음이 갔던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 후, 신이의 혼사도 낙착되었다. 그녀의 약혼자는 회주 지부의 둘째 아들인 양지춘이고, 올해 22살이었다. 22살인데도 결혼하지 않았던 건 첩을 통해 서자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은 가문은 그
그의 이름은 신이었는데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에 대해서 말할 때, 경멸하는 기색을 띠었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모르는 사람까지 모두 침을 뱉으며 뻔뻔하다고 할 정도였다. 알다시피 애인과 야반도주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는 것보다 더 욕먹을 일이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후회하냐고 묻기도 했다. 그녀는 시집간 것을 후회하지 않지만 죄책감을 느끼긴 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시 씨 가문의 명성이 손상되어 형제자매들과 조카들이 혼사에 어려움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신이는 시 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태어날 때부터 온갖 보살핌을 받아왔다. 먹는 것은 물론 모두 산해진미이고, 입는 것도 모두 능라 비단이었다. 게다가 보모님과 오라버니의 총애까지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그녀에겐 한 가지 결함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열네 살 때까지 월사가 오지 않은 것이었다. 많은 의사들을 불러 진찰을 받고 밤낮으로 약을 먹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몸이 차서 그러니 몸조리를 하면 나을 수 있다고 위로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몰래 의사가 부모님께 하는 말을 들었다. 의사는 그가 몸이 차서 그런 병이 생긴 것이 아닌, 아이를 키우는 곳이 어린아이와도 같아서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마치 작은 꽃병과 같아서 꽃을 꽂을 수는 있지만 나무를 심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 건 불가능하다고 비유했다.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건 여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녀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중에 좋은 사람에게 시집가서 부군에게 첩을 들인 후, 첩이 낳은 아이를 친자식처럼 키우라고 조언해주었다.시 씨 가문이라는 후원이 있으면 그녀가 아이를 낳을 수 없어도 아무도 그녀의 지위를 흔들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 씨 가문의 재물은 그녀가 평생 부귀하게 살기에 충분했다. 신이의 조모도 그녀에게 아이를 낳을 수 없으니 자세를 낮춰야 한다고 했다. 시 씨 가문의 딸이라고
추운 겨울이 되자 눈이 내려 성릉관은 하얗게 뒤덮였다. 세상이 마치 깨끗해진 것처럼 보였다. 이황자는 몇 년 동안 너덜너덜한 승복을 입고 발우를 받쳐 들고는, 가는 길에 동냥을 하다가 절을 보면 이틀 묵으며 부처님께 참회하면서 살았다. 사실 그는 원래 있던 절에서 계속 지낼 수 있었다. 편안하진 않지만 풍찬노숙할 필요도 없고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그런 안일한 곳에서는 평생 죄를 씻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계속 길을 걷고 계속 고생해야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했다. 그가 성릉관에 도착했을 때 짚신은 이미 찢겨 있었고 발바닥에는 두꺼운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이제는 신발을 신지 않고도 자갈이 가득한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추운 날씨에는 모든 옷을 껴입어도 추위를 막을 수 없었지만 이미 익숙해진 뒤였다. 그는 눈보라를 맞으며 성릉관에 위치한 감은사로 향했는데, 몇 년 동안 발걸음을 멈춘 적이 없는 탓에 고단함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심지어는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아 그는 눈이 가득 쌓인 길에서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그는 따뜻한 두꺼운 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그가 있는 방에는 숯불이 피워져 있었고, 살짝 열린 창문으로 눈에 눌려 허리가 굽은 나뭇가지가 보였다. 그는 눈동자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렇게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의 마음속에 순간 욕심이 생겨 조금만 더 누워있고 싶어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문이 활짝 열렸다. 그가 벌떡 일어나 앉았는데, 갑자기 눈앞이 핑핑 돌더니 다시 힘없이 침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누워 있거라.” 이때 누군가가 부드러운 말투로 말하면서 약그릇을 그의 침대 옆에 놓았다. 그는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익숙해, 어지러움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돌려보니, 그 사람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서우 형?!’ 그는 자신이 잘못 보았을까 봐 다시 자세히 보려 했지만, 몸이 너무 어지러운
대황자는 봄 사냥 때 숙청제에게 꾸중을 듣고 돌아간 후 앓아누웠다. 당시 이황자와 서우가 모두가 걱정했는데 덕비는 오히려 기뻐했다. 그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황제폐하께서는 분명히 대황자를 싫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덕비는 이황자를 안고 반드시 부지런해야 하고, 태부와 황숙의 말을 잘 듣고 누구보다 잘 배워 황형을 제압해야 한다고 당부까지 했다. 그로 인해 이황자의 마음은 몹시 복잡했다. 덕비가 줄곧 그에게 태자와 황제가 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지 말해주었을 때 비록 그도 마음이 설렜지만 자신과 거리가 먼 얘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금 그와 대황형, 서우 형, 그리고 셋째 동생이 사이가 좋아 도저히 대황형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매일 모순적으로 지내다 보니 오히려 학업이 나빠졌고 승마 연습을 할 때도 여러 번 실수를 했다. 하지만 덕비는 이상하게 그를 탓하지 않았고 며칠 동안 계속 게으르게 하라고 했다. 그렇게 덕비는 이황자를 데리고 복마마를 자주 뵈러 갔고, 복마마 궁전에서 숙청제를 만날 수도 있었다. 덕비는 며칠 동안 그곳을 드나들더니 어느 날 굳은 표정으로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차가운 말투로 청이에게 자신의 보살핌이 없으면 아이가 태어날 수 있는지 보겠다고 했다. 황제폐하를 자주 뵈러 갈 수 없어 아쉬웠지만 이황자는 마음을 가다듬고 공부와 승마술에 전념했다. 이황자는 당시 앞날이 어떻게 될지도 몰랐고, 비록 매일 힘들긴했지만 한편으로는 즐거웠기에, 계속 이렇게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숙청제의 천추세에 승마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니 세 황자와 서우도 가서 겨뤄 보기로 했다. 원래 그런 대회에서 황자들은 재미있게 참석만하면 되지만, 덕비는 그 경기를 몹시 중시했다. 덕비가 이황자에게 마름쇠를 건넬 때, 그는 하늘이 무너져내리는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황자는 원하지 않았다. 그는 절대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대황형의 목숨을 앗으려 하다니, 이황자는 처음으로 어마마마가 무서워졌다.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