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만자는 그녀의 코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불타는 듯한 눈빛으로 말했다."시민주, 내가 경고하는데 또다시 가의를 도와 우리 공방에 불리한 소문을 퍼뜨리면 네 혀를 뽑아버릴 거야."시만자는 말을 마치고 옷소매를 휙 털며 큰 보폭으로 걸어 나갔다.그녀는 단 한 순간도 연왕을 쳐다보지 않았다.문 밖에서는 시위들이 모여있었는데, 연왕은 뒤돌아 손을 들어 그들에게 물러나라는 신호를 보냈다.시만자는 차갑게 흘겨보고는 홱 돌아서 떠났다.연왕은 그런 시만자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는데, 그녀의 붉은 옷이 눈부시게 빛났다. 일 처리는 신속하고 단호했으며 두려움도 없이 당당했다. 그녀의 눈에서 사람을 두려워하거나 의식하는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런 당찬 태도를 지닌 여인이야 말로 바로 연왕이 진정으로 원했던 시씨 가문의 사람이었다."시만자가 저를 때렸는데 왜 그냥 가게 두셨어요?" 시민주는 얼굴을 감싼 채 서러움에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한쪽 뺨은 이미 부어올라 있었다. 울어서 눈물에 젖은 모습이 마치 비에 젖은 꽃 같았다.연왕은 시선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방금까지 있었던 다정함과 온기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같은 시씨 가문의 여인인데 왜 이렇게 다른지 의문스러웠다."왕야!" 시민주는 그가 다시 차갑고 냉담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마음이 불안해졌다. 한 발짝 더 다가서며 방금 전의 다정함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첩의 얼굴이 너무 아픕니다. 왕야께서 첩을 위해 이 억울함을 풀어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연왕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미간이 펴지지 않았다."방금 그녀가 말한 것이 사실이오? 가의를 도와 소진 소주방에 불리한 소문을 퍼뜨렸는 게 대체 무슨 말이오?"시민주는 가의에게 돈을 빌려주어 고리대금을 돌린 사실을 연왕에게 알리지 않았다. 연왕이 이를 용인할지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신씨 가문에서는 이런 일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다. 이제 그가 차가운 얼굴로 따지자 그녀는 더욱 두려워졌다."저
연왕이 서재로 돌아오자 무상은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으며 일어서 물었다."시만자가 무슨 일로 온 것입니까? 왕비님께서 그녀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습니까?"연왕은 차갑게 대답했다."쓸모없는 여자다. 몰래 가의와 어울린 것도 모자라 감히 가의를 도와 송석석과 대립하다니."무상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그녀를 맞아들이신 것 자체가 실수입니다. 그녀는 시씨 가문에서 별로 중요한 존재가 아닐뿐더러 시철진조차 그녀를 위해 왕야와의 관계를 돈독히 할 마음이 없으니… 다른 도움은 더 기대할 것도 없습니다."연왕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본왕이 그녀가 이토록 멍청할 줄은 어찌 알았겠느냐? 같은 시씨 가문이라지만 시만자는 그녀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뛰어나다."연왕은 자리에 앉아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그의 눈빛에는 음험하고 독살스러운 기운이 가득했다."시만자는 방금 이곳에 와서 그녀의 뺨을 때리고 한마디 경고만 남긴 뒤 떠났다. 당당하고 깔끔한 모습이었지. 본왕은 그녀를 볼 때마다 한없이 아쉬울 뿐이다. 만약 본왕이 그녀를 맞아들였더라면 시씨 가문의 전폭적인 지원뿐 아니라 시만자라는 유능한 조력자까지 얻을 수 있었을 텐데. 시만자 한 명이 본왕에게 얼마나 많은 이득을 줄 수 있는지 감히 상상도 안 된다!"무상이 말했다."지금은 사방이 호랑이와 이리로 둘러싸여 있어서 더욱 신중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당분간 북명왕부 사람들을 건드려서는 안 됩니다."하지만 연왕은 여전히 자신의 계획에 빠져 있을 뿐이었다. "왕비가 무능하다면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어진 사람에게 넘기면 될 일 아닌가."그러자 무상이 놀라며 서둘러 막았다. "왕야, 설마…… 그건 절대 불가합니다! 시만자는 마치 강렬한 야생마와 같습니다. 지금은 결코 길들일 수 없는 상태입니다."연왕은 여전히 단호했다. "본왕은 이미 선택의 여지가 없다. 사온이 없어진 뒤로 이 진성에서 발을 붙이는 것조차 힘들어졌지 않나. 시민주는 아무 쓸모도 없고, 측비 김씨는 정비가 아니니 명문가의
연왕은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고청우는 이미 왕표의 마음속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잡았지만 그가 아직 군심은 얻지못하지 않았소? 그리고 서경에서도 모의를 해야 하니 이 일은 조급하게 해서는 안 되오. 지금으로서는 침착하게 기다리는 수밖에 없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순 없으니 시민주가 쓸모없다면 시만자로 바꿔 버리면 그만이오. 나는 당신의 말에 동의하지 않소. 시민주와 송석석이 모두 왕비이니 나는 시만자가 왕비의 자리에 욕심이 없다는 것을 믿지 않소. 그런 마음이 높은 여자는 더 높은 자리에 오르려는 야망이 있어서 일반 남자는 눈에 차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설득해도 그는 전혀 듣지 않고 자신의 계획에만 몰두했다. ‘자신의 순결을 개의치 않는 여자가 어디 있단 말이오? 그에게 몸을 줬는데 화를 내기라도 하겠소? 그녀가 왕비의 자리에 오르면 누구보다 기뻐할 것이오.’ 송석석은 일찍 황실로 돌아왔다. 홍시가 송석석에게 시만자가 연황실로 갔다는 보고를 할 때 그녀는 오진과 상의 중이었다. 그래서 상의가 끝난 후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시만자도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비록 뺨을 때릴 땐 마음이 후련했지만 곧이어 걱정이 밀려왔다. 그녀는 자신을 걱정해서가 아닌, 왕야와 석석에게 폐를 끼칠까 봐 두려웠다. 황제가 사람을 파견해 연황실을 주시하라고 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송석석은 그녀를 위로하려고 급히 돌아온 것인데 그녀가 먼저 후회하고 있을줄도 모르고 손을 잡고 말했다. “너 연황실에 가서 소란을 피웠니?” 시만자는 답답한 듯 말했다. “응. 가서 시민주의 뺨을 때렸어.”그러자 송석석은 웃으며 물었다.“속이 후련하더냐?”“후련한 것도 잠시뿐이었지, 너와 왕야에게 폐를 끼칠 것 같아 무서워.”송석석은 시만자를 의자에 눌러 앉히고 일단 보주에게 제비집을 한 잔 가져오라고 하고 시만자에게 말했다.“아무 문제없을 것이야. 설령 문제가 있다고 해도 우리가 해결할 수 있으니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말은 그렇게 해도 이번엔 내가 너
별청에서 시만자는 진심으로 사과하는 연왕비를 냉담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자기가 사촌 언니를 잘 알지 못했다면 정말 믿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말이야. 언니를 믿어줘. 가의가 내 앞에 와서 울며 불며 정의를 찾아달라고 부탁하는 바람에 내가 마음이 약해져서 도왔던 것이야. 어제 네가 돌아간 후에 왕야께서 이 일로 날 엄청 꾸짖었단다. 공방은 여자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니 내가 오명을 씌우면 안 되는 것이라고. 언니가 잘못했으니 용서해 줄 수 있겠니?” 시만자는 그녀가 말한 한 글자도 믿지 않았다. 그녀가 잠깐 마음이 약해져서 가의를 도왔다는 말이 믿겨지지 않았고, 연왕이 공방은 여자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곳이라고 했다는 것도 믿지 않았다. ‘송석석의 사촌 이모인 전 연왕비가 어떻게 살해되었는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가 어떻게 모를 리가 있겠어?’ 시만자는 담담한 표정으로 그녀의 말을 듣고 그녀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며 사촌 언니가 연왕비가 되더니 다른 건 몰라도 연기하나는 제대로 배웠다고 생각했다. “말이야 누구든 듣기 좋게 할 수 있지. 사과하러 오면서 왜 미리 편지를 보내지 않았어? 내가 꼭 저택에 있을 줄은 어떻게 알고?” 그러자 시민주의 얼굴이 굳어졌다. ‘방금 감정 연기에만 집중하느라 이런 자세한 것까지 물을 줄은 몰랐네.’다행히도 춘행이 옆에서 그녀를 위해 무릎을 꿇고 말했다. “시 아가씨, 왕비께서는 어젯밤에 밤새 울면서도 감히 사과하러 올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왕야께서 잘못을 저질렀으니 인정하고 시 아가씨의 용서를 빌어야 자매의 감정을 상하지 않는다고 해서 왕비께서 선물을 준비해서 사과하러 온 것입니다. 시 아가씨께서 저택에 없다면 원래 시 아가씨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참이었습니다.” 하지만 시만자는 여전히 그녀의 말을 눈곱만큼도 믿지 않는듯 했다. 시만자는 어제 자신의 행동이 무모하다고 느낀 후, 밤에 침대에 누워 무슨 일이든 충동적으로 하면 안 된다며 반성했다. 그래서 그녀는 시민주의 사과 뒤에 무엇이 숨
다음날 조회 후, 사여묵은 최근에 재심된 사건을 가지고 황실 서재에 가서 알현하고는, 전례에 따라 역모 사건 조사의 진행 상황도 보고했다. 역모 사건이 아직 종결되지 않아 대리사는 여전히 조사에 집중해서 간격을 두고 보고를 해야 했다. 하지만 그것도 단지 절차를 밟는 것뿐이었다. 지금 가장 의심스러운 사람은 바로 연왕이었지만 황제는 줄곧 대리사에 조사를 지시하지 않았고 공개적으로 이 일을 언급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사여묵이 분명히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숙청제는 사건을 훑어보더니 역모사건의 진전에 대해 말했다. “여전히 진전이 없는 것 같군.” 그러자 사여묵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황제가 명령을 내려야 진전이 있겠지.’ “그럼 계속 조사하거라.” “네.” 숙청제는 사여묵이 대답하고도 떠나지 않는 모습을 보고 물었다. “또 무슨 일이 있느냐?” 그러자 사여묵이 웃으며 말했다. “중요한 일은 아니지만, 연 황숙께서 오늘 밤 제 일가를 연황실로 초대했습니다.” 숙청제는 고개를 들고 약간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웃으며 말했다. “황숙이 진성으로 돌아온 지 꽤 되었으니 네가 후배로서 그를 초대해야 마땅하지만 그가 먼저 너를 초대했으니 가보거라.” 사여묵은 흰 이빨을 드러내며 흐뭇한 표정으로 답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숙청제의 표정은 모처럼 따뜻했다. “그래, 연황실에 많은 진기한 꽃을 심었다고 하던데 가서 잘 구경해 보거라.” 사여묵도 여전히 웃음을 보였다. “저도 그럴 생각입니다.”“승상이 날 기다리고 있으니 이만 가보거라.” “예, 그럼 전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사여묵은 인사를 하고 몸을 굽히며 나갔다. 숙청제는 그의 뒷모습을 보자, 입가에 웃음이 가시지 않았고 마음속이 왠지 후련해진 것 같았다. 역모사건이 일어난 후부터 그의 마음속에는 항상 큰 돌덩이가 깔려있는 느낌이 들었다. 모든 사람이 수상하게 느껴졌는데, 연왕에게까지 의심이 몰리자 마음속의 돌덩이는 더 무거워져 숨조차 쉴 수가
무상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다른 여자라면 왕야의 약을 써도 되겠지만 시만자는 보통 약으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자 연왕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모두 감정을 주체할 수 없게 하는 약 아닌가? 당신 것은 뭐가 다르단 말인가?” 그러자 무상이 말했다. “왕야님의 약은 사실 감정을 주체할 수 없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감정이 생기게 할 뿐입니다. 하지만 제 약은 묘독의 일종이라 독소가 뇌를 마비시켜 그녀와 결합한 사람에게 감정이 생기게 할 수 있습니다.” 연왕은 기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좋은 약이 있으면서 왜 진작에 내놓지 않았는가? 그녀가 나에게 감정만 생긴다면 내 바람이 곧 그녀의 바람이 될 것이 아닌가?” 그러자 무상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왕야님, 감정을 얽매는 것이란 심지에 어긋나는 일이기에 짧은 시간 동안 밖에 유지할 수 없습니다.” “얼마나 버틸 수 있는가?” “열흘이나 보름 정도로 예상 됩니다.” 도자기 병을 받은 연왕의 눈 밑엔 어두운 빛이 번쩍였다. “효과가 지난 후 약을 계속 쓰면 시간을 연장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무상은 눈썹을 찌푸리고 말했다. “아무래도 독이다 보니 신체에 손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약을 세 번 복용한 선례가 있었는데 중독된 사람은 치매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독을 많이 사용하면 뇌가 손상되어 바보가 되어 사망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연왕은 냉담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바보가 되면 더 통제하기 쉽지 않느냐? 그렇게 된다면 시 씨 가문에서 나보고 그녀에게 잘해달라고 빌겠지!” 무상은 그가 점점 편파적인 선택을 하려는 것을 보고 주의를 주었다. “왕야님, 비록 성공은 사람이 하는 데 달렸다고 하지만 모든 계획을 한 사람만 통해서 통제한다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입니다. 자칫하면 역효과가 날 수도 있으니까요.” 무상은 시만자가 어느 정도 무게는 있지만 시 씨 가문과 송석석이 물러날 만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일은 너무 위험해서 잘못하면 역효과가 날 수도 있었
유시가 되자 북명황실의 마차 두 대가 연황실 입구에 도착했다. 마차가 도착하자 문지기는 급히 들어가서 알렸고, 연황실은 중문을 열고 그들을 맞이했다. 평시에 흔히 열지 않는 중문을 연 것을 보면 얼마나 성대하게 준비했는지 알 수가 있었다. 시민주와 측비 김씨는 옥경과 옥영 두 현주를 데리고 문 앞에서 맞이했다. 시만자는 여식이기 때문에 사여조와 사여령은 나오지 않았다. 두 대의 마차를 보았을 때 측비 김씨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연왕의 계획을 모두 알고 있어서 오늘 밤에 오는 사람이 시만자일 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갑자기 마차가 두대나 온 것이었다. 그 마차에서 사여묵과 송석석이 내리는 것을 보자, 그녀는 완전히 멍해졌고 얼굴에 피어났던 웃음이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시만자만 초대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측비 김씨는 이를 갈며 옆에 있는 시민주에게 물었다. 하지만 시민주는 기뻤다. 그녀는 왕야께서 시만자만 초대했지만 지금은 사여묵과 송석석까지 왔으니 더 기뻐할 것이라 생각했다. 기뻐하던 중에 측비 김씨의 말투에 화가 난 그녀는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져 버렸다. “넌 나와 말하는 태도가 그게 뭐냐? 내가 체면이 있으니 초대했지 않았느냐? 초대할 능력이 없으면 입이나 다물어라.” 측비 김씨는 미련한 여자와 상대하기 싫어 옆에 있는 하녀에게 분부했다. “어서 들어가 왕야께 아뢰어라.” 하녀는 명을 받들고 급히 뛰어 들어갔다. 연왕은 하녀가 아뢰는 말을 듣고 놀라 서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라고? 사여묵과 송석석도 왔다니?!” 그는 오늘 서재에 있을 예정이니 시만자를 만나러 가지 않고 측비 김씨와 시민주에게 두 군주를 모시고 접대하도록 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시만자가 약을 마신 후에 측비 김씨가 그녀를 들여보낼 것이었다.연왕의 놀라움과 분노에 비해 무상은 오히려 기뻐하며 말했다. “왕야님, 이건 분명 좋은 기회일 것입니다. 전에 북명황실에 여러 번 갔었지만 대접을 받지 못했고 개인적으로 사여묵에게 약속을 잡아도 나오지 않았지
무상은 마음이 놓이지 않아 계속 그를 말릴 뿐이었다. “왕야님, 큰일을 이루고 나면 어떤 여자가 나타나지 않겠습니까? 그때가 되면 시만자도 눈에 차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자 연왕은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억울함이 밀려온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됐다. 난 근 몇 년 동안 극도로 자제하며 욕망을 억누르고 있었다. 조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으니까. 지금까지 정말로 내가 마음에 드는 여자가 없었는 줄 아느냐? 본왕은 여자에 얽매이다가는 일을 그르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참아온 것이란 말이다. 그리고 시만자는 다르다. 그녀는 유일하게 내가 좋아하는 동시에 날 도와줄 수 있는 여자란 말이다. 그녀는 연왕비의 자리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다.” 그의 말은 들은 무상은 놀라움과 분노를 참지 못하고 처음으로 엄격한 어조로 말했다. “왕야님께서 마음에 든다는 것은 시만자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까? 만약 정말 그런 마음이라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왕야님의 비열한 행동을 감추기 위한 핑계입니다. 왕야님께서 정말로 그녀를 사랑한다면 그녀의 결백을 훼손하는 방식으로 그녀를 얻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심지어 내가 왕야님께 이 약의 최종 결과가 치명적일 것이라고 말할 때도 왕야님은 조금도 주저하시지 않았습니다.” 무상의 말에 속내를 들켜버린 듯한 연왕은 화가 나서 아예 감추려 하지도 않았다. “내가 정말 그런 생각이라면 또 어떠냐? 감히 내가 비열하다고 할 것인가? 다른 남자들은 첩이며 외실이며 여색을 밝히는데 나 이 정도면 욕심을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그저 어쩌다 한 번 참지 못한 걸 가지고 굳이 이렇게까지 말을 해야 하겠느냐? 넌 내 참모일 뿐이야, 내가 어떤 짓을 하든 네가 참견할 바가 아니란 말이다.” “왕야님,” 무상은 입을 다물기는커녕 더욱 냉혹하게 말했다. “왕야님의 추구가 첩과 외실들이라면 내가 왕야님을 모시고 절정을 향할 복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왕야님께서 소원을 이루고 앞길이 창창하길 바라겠습니다.” 무상의 말이 끝나자 서재는 쥐 죽은 듯
그가 앉은 자리는 북당이 이번 협상에서 취한 입장을 대표했다.그는 중립의 위치에 있었다. 송석석은 다시 한 번 국가가 강성한 것이 정말 좋다며 감탄했다. 협상의 처음 부분은 조금 지루했다. 양쪽 모두 똑같은 말을 반복하며 강조하였고, 양쪽의 역관들이 그것을 전달하며, 모두 역사적 문제를 강조했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처음부터 양보를 한다면 계속해서 양보하게 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따라서 첫 번째 협상에서는 아무런 합의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서로의 한계를 시험하는 데 그쳤다. 다음 날, 바로 두 번째 협상이 시작되었다. 역시 초반에는 전날처럼 양쪽에서 강조하는 말들이 오갔다.그러다가 잠시 후, 안풍친왕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이렇게 계속해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두 나라의 국경 문제는 이미 수십 년간 지속되어 왔고, 이것은 하루아침에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우선 국경 문제는 잠시 제쳐두고, 본왕은 두 나라가 서로 친선을 맺고, 서로 침범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확인하고 싶습니다." 그의 말에, 모두 두 나라가 더 이상 분쟁을 일으키지 않기를 바란다며 긍정적인 의사를 내비쳤다. 안풍친왕은 한 장의 목록을 꺼냈다. 그 목록에는 양국의 상품들이 나열되어 있었고, 그 중에는 곡물, 가축, 비단, 직물, 수공예품, 찻잎, 모피, 도자기, 종이, 벼루, 각자의 나라에서만 자생하는 약초, 향료, 청염, 철광, 옥석 광물 등이 있었다. 양쪽은 그것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처음의 긴장감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막대한 이익 앞에서, 어떤 일들은 협상이 가능했다. 협상이 되지 않으면 잠시 미룰 수도 있었다. 수년간의 전쟁은 두 국가의 국고를 이미 소진시켰기에 양쪽 모두 휴식을 취할 필요가 있었다. 북당의 발전 경험에 따르면,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억제하는 것은 뒤처진 생각이며, 농업과 상업을 동시에 중시하는 것이 살길이었다. 상업세 또한 매우 높았다. 안풍친왕의 이 목록 덕분에 두 나라는 국경
하지만 송석석은 서경의 종친과 관리들이 북당이 협상에 개입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놀람이 역력했다.놀란 마음이 지나고 나자, 그들은 기쁨과 자신감을 드러냈다. 그들은 북당이 협상에 참여하는 것이 서경을 위한 든든한 지원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송석석은 이 장면을 보며 오히려 안심을 했다. 정말 그렇다면 원신제가 미리 그들에게 이를 알려줄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협상에 참여하는 관리들에게는 알렸어야 하는데, 그녀가 왜 말을 하지 않았는지이제야 확실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녀도 서로 양보하는 방향으로 가길 원했지만, 궁정의 문무 백관들 중 그녀를 지지하는 이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신복하는 북당 안풍친왕을 초대한 것이었다.이렇게 보니, 어제 원신제가 그녀와 시만자를 궁으로 부른 이유도 이해가 되었다. 처음에 말했던 그런 것들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여성의 과거 시험을 예로 든 것은, 그녀의 많은 결정들이 추진하기 어려운 상황임을 말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여기까지 분석을 마친 송석석은 점점 더 낙관적이게 되었다.궁중 연회가 끝난 후, 북당 사람들은 대접을 받으며 떠났다. 그들은 그 한 끼를 제외하고는 의견을 거의 내비치지 않았으며, 단지 짧은 대화를 나누었을 뿐이었다.그들이 떠난 후, 상국의 사절단도 일어나 인사를 하며 물러났다. 모두가 돌아가서 협상 준비를 해야 했다. 수란키가 제공한 일정을 따르면, 이틀 후부터 협상이 시작될 예정이었다.황궁 별관에 돌아가자, 이덕회는 모두를 모아 앉히고 논의했다.사실상 또 다른 진부한 이야기였다. 이번에도 양보를 해야 한다면, 모두가 지도 위에서 함께 논의해야 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출발하기 전에 황제가 이미 양보의 한계를 설정해 두었기 때문에 더 이상 양보를 하게 되면 돌아가기도 어렵고, 역사적인 죄인이 될 수도 있었다.그래서 아무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으며, 그저 지도만 바라보며 각자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사실 이런 자리에서는 모두 입맛이 그다지 좋지 않기 마련인지라, 많은 음식들이 한 입 먹고 나면 다시 치워지곤 한다.하지만 북당의 사람들은 정말 음식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떤 요리가 나와도 모두 다 먹어버렸으며, 가득 채운 술잔도 순식간에 비웠다. 그들을 시중드는 궁인들도 꽤 힘들었을 것이었다.시만자는 그들이 춘만루에서 먹었던 그 한 끼를 떠올렸다. 그때도 남은 음식이 하나도 없이 모든 것이 비워졌었다.그녀는 송석석에게 무언가 말을 건네고 싶었다. 하지만 식사 소리 외에는 아무 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기에 말을 꺼내기 어려웠다.그러나 그들은 눈짓만으로도 서로가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알아차렸다.시만자는 북당 사람들이 이곳에 등장한 것이 협상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했고, 송석석도 그렇게 생각했다.하지만 그녀는 그들이 중재자로 온 것인지, 아니면 서경을 돕기 위해 온 것인지 확실하게 알 수 없었다. 만약 중재자라면 협상 또한 오래 걸리지 않고 조약을 체결할 수 있을 테니 더 좋을 것이었다.하지만 만약 서경을 돕기 위해 온 것이라면 협상은 공방전이 될 것이 분명했다. 북당이 그들의 방패가 된다면 상국이 협상에서 어려움을 겪을 것이 틀림 없으니 말이다.이덕회와 홍려사경 등 상국의 사절단들은 상황을 어느 정도 눈치챈 듯 했다. 그래서 그들은 처음의 그 기쁨을 잃은 대신 마음속으로 여러 가지를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눈앞의 음식도 별로 먹고 싶지 않은 듯했지만, 모두가 식사를 하고 있었기에 그들도 어쩔 수 없이 천천히 먹었다.이 궁중 연회는 그들이 참석했던 연회 중 가장 이상한 연회였을 것이다. 마치 폭풍이 다가오는 듯한 무서운 고요함이 느껴졌다.궁중에서 준비한 요리는 총 32가지였다. 그러나 각 요리의 양은 매우 적었으며, 궁인들은 음식을 하나씩 들고 들어와서는 다시 하나씩 치워갔다.누군가 술잔을 들고 싶어했지만, 역시 원신제와 마찬가지로 한 번 쓱 훑어본 후, 술잔을 비우고 다시 내려놓고는 식사를 계속했다.마침내 32가지 요리가 모두 올라갔
다음날, 궁중 연회는 신시에 시작되었고, 여전히 수란키가 직접 그들을 맞아 궁으로 안내해주었다.예상했던 대로 즉위식은 이미 끝난 상태였고, 이번 연회의 주요 목적은 국경선의 협상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궁에 들어간 후에도 다른 나라의 사절단을 보지 못했다.궁 안은 황실의 측근과 문무 백관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들은 상국의 사절단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고, 친근한 분위기도 없었다.이런 자리에서는 역관의 도움이 필요했기에 대화의 주제가 그리 넓지 않아, 서로 간단한 인사 정도만 나눌 뿐이었다.다른 나라의 사절단이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입석할 때 원신제가 상국의 사절단에게 말했다."오늘 북당에서 귀빈들이 오십니다. 곧 도착할 것인데, 여러분이 그들과 바로 친해질 것이라 믿습니다."이덕회는 즉시 흥분하며 말했다. "북당의 귀빈이라 하셨습니까? 어떤 분이 오시는지요?"그가 흥분하는 것은 당연했다. 왕이장이 가져온 임양운의 육안총과 포차는 모두 북당에서 개량된 것이었고, 임양운 선생이 북당에서 배운 적이 있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상국의 병부상서로서 그는 정말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싶었다.북당은 상국이 항상 배우고자 했던 본보기였다. 그들의 첨단 무기와 치국책은 상국보다 훨씬 진보적이었다.물론 국가의 상황이 다르기에 모든 것을 배울 수는 없을 테지만, 대화를 깊이 나누면 분명히 얻을 것이 있을 것이었다.원신제는 그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도착하면 알게 될 것입니다."연회는 지루하고 피곤했지만, 북당의 귀빈이 온다면 그 이야기는 달라진다.모두가 기대하고 있을 때, 한 외침이 들렸다.“북당 안풍친왕과 왕비께서 도착하셨습니다!"이덕회는 놀라서 입을 막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눈에는 기쁨이 넘치고 있었다.송석석도 사부로부터 안풍친왕의 호를 들어본 적이 있었다. 사부는 그를 매우 존경한다고 했다. 생각치도 못하게 오늘 그를 만날 수 있으니 그녀도 말할 수 없이 기뻤다.반면, 만두와 몽동이 그들은 비교적 담담했
원신제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씁쓸한 게 한 가지 더 있네. 지금까지 짐은 장공주의 신분으로 여인에게도 과거 시험을 볼 자격이 있어야 한다고 높이 외쳤지. 하지만 황제가 된 지금, 어쩔 수 없이 각 세력들의 이익을 고려해줘야 하고 그자들이 짐에 대한 적대심과 경계를 약화시킬 수밖에 없다네. 짐은 이제 고려한 일이 더 많아졌어. 가끔은 속에 천불이 나서 반대파 세력들의 가슴에 칼을 꽂고 싶기도 하네.”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송석석이 대꾸했다.“사실 한 나라의 황제나 대신들은 남녀를 막론하고 결국 최종 목적은 같지 않겠습니까? 폐하께서도 그렇듯 다들 나라의 안정과 백성들의 평안을 바라고 있는 겁니다. 나라에 영원히 전란이 일어나지 않고 창성해야 폐하께서 원하시는 개혁을 진행하셨을 때 반대의 목소리가 잦아드는 것입니다. 그러니 폐하, 현재 가장 중요한 건 폐하의 자리부터 굳건히 지키시는 겁니다.”대놓고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원신제는 송석석의 말뜻을 확실하게 알아들었다. 현재까지 나라가 혼란에 빠져 있고 각 세력들의 제지도 심하기에 이 국면을 해결하는 것도 충분히 힘든 일이다.황제의 자리도 흔들리고 있는 지금, 원신제가 개혁까지 고집하려는 건 더욱 위험한 일이었기에, 미래가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다.시만자 또한 송석석의 말에 동의하는 바였다.“사실 한 가지 일을 처리하는 데에 방법이 한 가지밖에 없는 건 아닙니다. 강경하게 상대방과 맞서 싸우는 것도 방법이지만 이는 가장 현명하지 못한 하책입니다. 한 사람의 성격도 바꾸기 쉽지 않은데 천 년이나 넘게 지속된 규정을 바꾸는 건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폐하께서 관념의 씨앗을 심으시면 언젠가 누군가가 폐하께서 남긴 발자국을 따라 한 걸음씩 나아갈 것입니다.”잠시 머뭇거리던 시만자는 이내 다시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저와 석석도 매산에서 무술을 공부할 때 그랬습니다. 다들 저희를 비웃고 하찮게 여겼지만 저희는 결국 실력으로 그자들을 한 명씩 쓰러트렸습니다. 구호만 외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실력이
서경의 황궁은 금빛으로 반짝였으며 기세가 어마어마했다. 어둠이 깃든 고요한 밤에는 기 장엄함이 더욱 돋보였다.첫 번째 궁문을 들어서고 나서도 마차는 궁 안을 자유롭게 누빌 수 있었다.궁 안 곳곳에는 커다란 나무들 위에는 등불이 잔뜩 걸려 있어 대낮처럼 밝았으며, 누군가가 몰래 나무 위에 숨어있는다고 해도 너무 밝아서 바로 들킬 정도였다.수란키는 앞장서서 걷다가 한 궁전 밖에 도착했는데, 궁녀 두 명이 다가와 수란키와 서경 언어로 몇 마디 나누다가 고개를 돌려 송석석과 시만자에게 환하게 웃으며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수란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송 대감님, 만자 낭자, 폐하께서 두 분에게 궁전으로 모시라고 하셨습니다.”두 궁녀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송석석과 시만자는 이내 궁전 안으로 들어갔다.휘황찬란한 궁전 내부에는 커다란 조각 기둥이 양측에 세워져 있었으며 그 모습은 압박감이 넘쳤다.원신제는 용상에 앉아 환한 미소로 두 사람을 반겼지만 얼굴에는 피로함이 가득해 보였다.송석석과 시만자는 이내 인사를 올렸고 원신제는 그들에게 편하게 앉으라고 했다.그리고는 송석석을 쳐다보며 말을 걸었다.“짐은 송 대감이 사절단과 함께 이곳으로 온다고 하여 며칠 전부터 계속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보니 너무 반갑네.”송석석은 웃으면서도 진지하게 대답했다.“폐하께서 황위에 오르셨다는 소식을 듣고 소인도 너무 기뻤습니다. 원하는 바를 이루신 걸 감축드립니다.”송석석은 원신제를 힐끔 쳐다보았다. 원신제에게서 냉옥 장공주의 모습이 보였고 예전과 크게 변한 건 없었으며 여전히 피로해 보이고 여전히 진중하고 엄숙했다.냉옥 장공주에게 있어서 황제의 역할이든 실권을 손에 쥔 장공주 역할이든 똑같이 신경 쓸 일이 많을 것이다.“원하는 바를 이루느라 많이 힘들었네. 하지만 다행히도 이제 일처리는 훨씬 쉬워졌네.”원신제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조금 뒤, 궁녀들이 서경 특색이 돋보이는 다과들을 내왔다. 송석석과 시만자는 조금 전에 저녁 식사를 했기에 배가 고프지
서경 수도에 도착했을 땐 8월 13일이었기에, 송석석 일행이 떠난 지 한 달은 족히 넘은 상황이었다. 점심이 되자, 햇빛이 따스하게 비추어졌다.진왕은 마차 안에 몸을 웅크려 누운 채 입성에 진입했다. 하지만 마지막 자객들은 머릿수도 많고 기세도 등등해, 서경 지대에 들어서고 나서도 송석석 일행은 총 일곱 번이나 습격을 당했다. 현갑군은 대부분 부상을 당했고 시만자마저 어깨가 칼에 찔렸지만 다행히 신경까지 다치지는 않았다.진왕이 이렇게까지 크게 논란 건, 자객에게 습격을 당할 당시, 그는 변소 안에 있었다.일을 마치고 변소를 나선 순간, 갑자기 나타난 자객이 검으로 진왕의 가슴을 베었고 그 검을 진왕의 가슴에 꽂으려던 순간, 송석석이 제때에 나타나 손에 들고 있던 검을 한 발 빠르게 자객의 가슴에 꽂았다.하지만, 이내 자객의 머리채를 뒤로 확 잡아당긴 덕분에 진왕은 무사할 수 있었다.그는 가슴팍이 조금 베인 게 전부였지만 큰 중상을 입은 것 마냥 밤새 괴로운 신음소리를 내고 나서야 겨우 진정이 되었다. 수도에 도착하자 수란키가 관원들을 데리고 성문 앞에 서서 진왕을 반겼다. 수란키는 이제 서경의 승상이 되었다.한눈에 송석석을 알아본 수란키는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송 장군님,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여전히 기품이 넘치시네요.”송석석은 말에서 내려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인사를 하며 상대방을 힐끗 살폈다. 솔직히 조금 전에 수란키를 알아보지 못했다.전보다 훨씬 늙어 보였고 백발인 데다가 수염도 허옇게 변해 버렸다. 하지만 눈빛은 여전히 카리스마가 넘쳤고 남강 전장에서 봤을 때보다 되레 활기가 넘쳐 보이기까지 했다.남강 전장에서 봤던 수란키는 온몸에서 분노가 들끓고 있었다. 위엄이 넘치고 엄숙한 그는 삶의 의지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며 그저 복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그런 느낌이었다.“승상께서 이렇게 직접 마중까지 나오시고. 너무 민폐를 끼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되네요.”송석석이 웃으면서 말하자 수란키가 호탕하게 웃었다.“너
한편, 크게 놀란 진왕은 태의를 불러 심신을 안정할 수 있는 약을 처방받았다.송석석이 찾아갔을 때, 진왕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창백한 얼굴에는 핏기가 전혀 보이지 않았으며 덜덜 떨리는 입술로 송석석에게 자객은 어떻게 됐냐고 물었다.송석석이 진왕에게 자객이 도망쳤다고 얘기하고 나서야 그는 조금 안정을 찾은 듯했다.사실 진왕을 보필하는 사람들이 자객이 도망쳤다고 진작 얘기했지만 진왕은 믿지 않았다. 이제 송석석에게서 듣고 나니 그제야 안심이 된 것이다.송석석은 진왕에게 몸조리 잘 하라고 당부한 뒤 방을 나섰다.이와 동시에, 이덕회는 나머지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있었다. 병부 상서인 이덕회는 지금까지 산전 수전 공중전까지 전부 겪어 보기도 했고 또한 왕비와 현갑군을 믿었기에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한편, 매산 출신 몇 명은 한데 모여 전에 성릉관에서 만났던 검은 복장 차림의 무리들을 의심하고 있었다.어쩌면 그자들이 바로 자객일지도 모른다는 의심 말이다.이 의심을 가장 먼저 제기한 건 바로 시만자였다. 그는 그 무리들이 갑자기 사라진 게 너무 수상했고 비밀 경로를 통해 계획적으로 도망친 거라고 확신했다.더군다나 조금 전 자객들도 전부 검은색 옷차림이었기에, 비록 머릿수가 조금 차이 나긴 했지만 그리 이상하지도 않다. 일부 사람들은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을 수도 있으니까.“성릉관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출동했던 건 아마 우리한테 손을 쓰려고 그랬을 가능성이 커. 하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성릉관에서 우리를 죽이면 쉽게 도망칠 수 없을 것 같아서 일단 포기한 거야.”시만자는 분석할수록 자신의 의심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서 고개를 돌려 송석석에게 물었다.“내 말이 맞는 것 같지 않아?”송석석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자들은 아니야. 정확히 얘기하자면 조금 전 자객들은 그자들보다 무술 실력이 확연히 떨어져. 그자들은 성릉관에서도 자유롭게 나타났다가 사라졌어. 그렇게 보면 네 의심이 성립되지 않다는 거지. 그자들은 성릉관에
이날 아침, 송석석 일행은 서경으로 출발했다.송석석은 딱히 아쉬운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나중에 돌아올 때 성릉관을 또 지나야 했기에, 이후에도 외조부 가족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성릉관을 떠나자마자, 평탄한 길이 사라졌다. 여기저기가 다 울퉁불퉁했고 일부러 인위적으로 파괴한 곳도 있었기에 마차가 지나가기엔 무리가 있었다.하지만 진왕은 절대 다시 말을 타려고 하지 않았다. 며칠동안 안정을 취했지만 다리 안쪽의 쓸림 상태가 아직 심했기에 걸을 땐 괜찮아도 말에 타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때문에 성릉관에서 공을 세우고 육아당까지 설립한 진왕은 까탈스럽게 마차를 고집했고 마차가 도무지 지나갈 수 없는 곳은 현갑군이 말에서 내려 마차를 밀면서 힘겹게 전진했다.하지만 불행 중 다행인 건, 현재 양국으로 통하는 길이 개방되었기에 그 길을 따라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산길밖에 없었다면 고귀한 진왕의 엉덩이가 엄청나게 고생했을 것이다.그렇게 겨우 서경 지대에 진입하여 루벌로 향하자, 서경의 관원과 병사들이 그들을 맞이하며 가는 길까지 호송해주었다.송석석 일행들 중에서 통역관을 제외하고는 서경에 와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똑 같은 변경 도시라고 해도, 루벌은 성릉관보다 훨씬 낙후했다. 여기저기에는 망가지고 훼손된 집채가 많았으며 행색이 누추한 거지나 근심이 많아 보이는 백성들도 많았다.송석석은 이 광경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두 나라가 전쟁을 치른 건 사실이지만 이곳까지 침투되지는 않았는데 말이다. 전에 전북망과 이방이 이곳 마을을 공격했다고 해도 공격당한 그 마을만 피해를 받아야지 루벌 전체가 이렇게 엉망진창이 된 것은 말이 안 되었다.루벌의 한 역관에 도착하고 나서야 송석석은 호송하고 있던 관원한테서 그 이유를 듣게 되었다. 수란석이 성릉관에서 전쟁을 일으켰을 때, 후방 공급이 부족한 탓에 병사들이 루벌로 돌아와 약탈을 진행한 것이었다.수란석 당시의 상황이 빅토르와 거의 비슷하다고 했다. 그때 당시 전쟁을 바라는 사람들이 많지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