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여묵이 웃으며 말했다. “황숙께서는 어찌 내가 화났다고 생각하십니까? 설마 황숙께서 나한테 미안한 일을 한 건 아니겠지요?” 연왕은 껄껄 웃으며 그의 앞에서 장난스럽게 손을 흔들었다. “장난치기는.” 그는 먼저 정좌로 다가가 앉더니 말했다. “모두들 서 있지만 말고 앉거라.” 그는 금실로 학을 수놓은 비단옷을 입었고 입술은 약간 물들인 듯 붉었는데 얼굴에는 자신감이 넘치는 미소가 가득했다. 하지만 시만자는 그를 한 눈 보더니 공작새 같다고 생각했다. 모두들 자리에 앉은 후 무상은 사여령과 사여조를 데리고 들어왔는데 두 형제는 원래 송석석과 사여묵을 엄청 좋아했지만 지금은 좀 서먹서먹했다. 그래서 인사를 드린 후 자리에 앉아 어색한 표정으로 감히 사여묵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사여묵은 무상을 훑어보았는데 그는 무상이 연왕 뒤에서 책략을 짜는 참모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그와 연왕 사이에 다툼이 있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두 사람의 눈 가에 여한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결코 좋은 일을 위한 다툼은 아닌 것 같았다. 무술을 익힌 사람이라면 쉽게 감지할 수 있었다. 그는 눈길을 돌려 연왕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황숙께서 갑자기 우리를 황실로 초대하시다니. 혹시 무슨 기쁜 일이 있는 것입니까?” 그러자 연왕은 화가 나 속으로 중얼거렸다. ‘널 초대하진 않았거든!’ 그러고는 시민주를 힐끔 쳐다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북명황실로 여러 번 갔지만 모두 네가 바빠서 만나지 못했으니 차라리 너와 조카며느리를 초대하는 것이 낫겠다 싶어서 그랬지. 식구끼리 자주 만나야 하지 않겠느냐?”사여묵은 웃고 싶은 마음을 겨우 참았다. ‘내가 정말 시간이 없어서 자신을 문전박대했다고 생각하는 건가?’ “황숙의 말씀이 옳습니다. 가족이니 자주 만나야지요.” 사여묵은 그와 이야기를 했고 송석석은 은밀히 그를 관찰했다. 몇 마디를 주고받았을 뿐인데 그의 눈동자는 이미 시만자의 얼굴에 여러 번 떨어
옥경은 송석석을 두려워했지만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화가 난듯 벌떡 일어났다. “송석석, 내 명예를 훼손해서 당신이 얻을 수 있는 게 대체 무엇입니까?!” 그러자 몽동이가 소리쳤다. “무엄하십니다. 일개 현주가 감히 왕비의 이름을 부르다니요!” 그러자 송석석은 손을 들어 몽동이에게 물러가라고 손짓한 다음 옥경을 바라보며 비꼬았다. “그렇게 말을 잘하는데 왜 당신 어머니가 박대를 당하는 것을 보고도 찍소리도 하지 못했답니까? 어머니를 위해 말을 할 수 없다면 적어도 옆에서 정성껏 시중을 들어 당신들을 낳아주고 길러주신 은혜를 갚았어야지요.” 옥경은 노여움을 금치 못했지만 시만자의 눈빛이 차갑게 쓸어오자 그녀는 순간 겁에 질려 욕은 하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게 당신과 무슨 상관입니까? 그렇게 잘 났으면 직접 가서 시중이나 들지 그랬습니까? 누가 입으로는 말 못 합니까? 그래도 사촌 이모인데 왜 직접 가서 시중들지 않았습니까?” 송석석은 냉소하며 말했다. “당신의 말에도 일리가 있군요. 자녀들이 효도를 하지 않고는 다른 사람을 비난할 수도 있었군요. 잘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목 씨 부인께 알려서 잘 선전하도록 부탁해야겠어요.” 그러자 연왕의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말했다. “옥경아, 네 사촌언니에게 무례하게 굴지 말거라.” 옥경은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송석석을 째려보더니 달갑지 않은 말투로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연왕은 마음속으로 옥경 현주보다 더 화가 났다. 왜냐하면 송석석이 이렇게 말하는 건 분명 그가 왕비를 박대했다고 비난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시만자 앞에서 그런 말을 하니 그는 더욱 체면이 서지 않았다.다행히도 사여묵이 오해를 풀었다. “자, 오늘같이 즐거운 날엔 옛이야기를 해서 모두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 맙시다.” 그러자 송석석은 사여묵에게까지 화를 냈다. “내가 틀린 말을 했습니까? 난 사촌 이모가 불쌍해서 그럽니다. 불효녀 둘을 낳은 것도 모자라 불효자식을 둘이나 키웠으니요!” 그러자 연왕의 얼
연왕은 옥경을 꾸짖으며 돌아가서 반성하라고 했다. 측비 김씨 또한 옥영 현주를 불러 함께 자리를 떠났는데, 문을 나서자마자 하녀를 데리고 송석석 일행을 쫓기 시작했다. 비록 저택에 암실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음대로 침입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시민주가 멍청해서 그들에게 이용이라도 당할까 봐 걱정되었다. 무상은 줄곧 사여묵을 몰래 관찰하고 있었는데 그가 왕야와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언짢은 표정으로 힐끔힐끔 밖을 내다보았는데 마치 젊은 부부가 다툰 후 화가 나면서도 상대방을 걱정하는 모습 같았다. 게다가 방금 송석석의 눈빛에 드러난 노여움은 연기하기도 어려웠다. 그러니 송석석이 연황실에 온 목적은 전 연왕비의 화를 풀어주기 위해서 온 것 같았다. 무상은 그것이 송석석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담아두었던 화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이 참에 그녀가 화를 풀 수 있게 하는 것도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여식들이 나갔으니 왕야와 이야기하기도 더 편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여묵아, 어머님은 건강하시지?” 연왕은 사여묵에게 혜 태비의 안부를 물었다. 그러자 사여묵이 말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머니는 건강하십니다. 영태비 어르신께선 어떠십니까?” 연왕은 살짝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말했다. “드디어 좀 나아지셨단다.” 그러자 사여묵이 물었다. “그럼 황숙께선 언제 연주로 돌아가실 예정 이십니까?” 연왕은 큰 소리로 웃더니 말했다. “조카는 황숙이 진성에 머무르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이냐? 왜 그렇게 황급히 황숙을 연주로 돌려보내려고 하는 것이냐?” 사여묵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그냥 물어본 것입니다.” 그러자 무상이 연왕 대신 대답했다. “왕야께선 아무래도 월말이면 연주로 돌아가야 하실 것 같습니다.” 사여묵은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무상의 말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여전히 밖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잠시 침묵이 흐른 후에도 사여묵이 다른 질문을 하지 않아 무상은 그가 온 목적
연황실에서는 물건을 숨길 수 없었다. 숨길 수 있다 하더라도 주고받았던 서신들만 가능했고, 중요한 물건은 숨기거나 소각했다. 싸움을 일으켜서 좋을 건 없으니 서재에 들어가는 게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이 시만자를 초대한 건 다른 사람에게 알릴 수 없는 목적이 있을 것이 분명했다. 전에는 그 목적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지금은 알게 되었다. 오늘 연황실로 오기 전에 원래는 이번 기회에 황실에 무공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많은 지 알아보려고 했다. 그리고 사사가 황실에 있는지, 만약 없다면 다음에 시만자를 다시 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연왕의 마음을 알게 된 지금, 송석석은 시만자를 위험에 빠뜨릴 생각은 없었다. 그 눈빛이 너무 징그러워서 송석석은 생각만 해도 역겨웠다. 하녀들이 줄줄이 달려와 떡을 탁자에 놓자 송석석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대추떡을 든 하녀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그 하녀는 발끝 하나 까딱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측비 김씨가 경계스러운 눈빛으로 송석석을 보자, 송석석이 대추떡을 가리키며 하녀에게 말했다. “이 대추떡은 북명왕께서 가장 좋아하는 것이니 정청으로 보내거라.” 그러자 하녀는 눈을 내리깔고 조용히 답했다. “네.” 하녀는 쟁반을 받쳐 들고 몸을 돌려 떠났는데 발걸음에 흔들림이 조금도 없었다. 그러자 측비 김씨가 피식 웃었다. “두 분께서 정말 금슬이 좋으시나 봅니다. 방금 다투었는데도 왕야께서 좋아하는 대추떡을 기억하고 있다니.” 송석석은 자리에 앉더니 억지웃음을 지으며 여전히 대화를 하기 싫은 태도였다. 심지어 그녀는 몸을 돌려 멀리 걸어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시민주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만자야, 우리 측비 김씨는 무시당하는 것을 가장 좋아한단다.” 측비 김씨는 담담하게 그녀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매일 총애와 권력 다툼만 할 줄 아는 멍청한 년이. 지금은 진성에 잠깐 머무르는 중인데 무슨 권리 다툼할 것이 있다고. 연왕비가 되어서 머리에 든 것이 하나도 없으니 왕야님 체
북명황실로 돌아온 시만자는 마차에서 내려 저택 입구에서 몇 번 뛰며 온몸의 불운을 털어냈지만, 여전히 화가 나서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감히 날 넘보다니! 그의 아들도 나보다 나이가 많은데 말이야, 이 파렴치한 늙은이가.”노 집사는 마침 정면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는데 시만자의 말을 듣더니 한 걸음 물러서서 멍하니 생각했다.‘늙은이가 왜 파렴치하다는 거지?’송석석도 화가 나서 그녀를 끌고 저택으로 들어갔다.“앞으로 연황실에 가지 마. 그 늙은이가 더러운 눈빛으로 네 몸을 몇 번이나 훑었는지 알아? 그저 보기만 했는데도 네가 오염되어 버린 것만 같았다고.”그녀는 오늘 밤에 본 연왕이 예전에 그 야심이 가득했던 연왕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는데 그야말로 색마로 변신한 것 같았다.의사당에 들어서자 사여묵은 연왕이 시만자를 노리고 있다는 말을 염 선생에게 말해주었다. 그러자 염 선생은 그의 말을 듣고 약간 어리둥절해졌다.“설마요? 그렇게나 티가 났다는 말씀입니까?”“그러게. 나도 처음엔 그가 가장한 것이라고 의심했다니까.”사여묵은 돌아오는 마차에서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예전의 조사에 따르면 그는 전혀 여색을 밝히지 않아, 아무리 아름다운 여자라도 그의 눈에 차지 않았다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연주의 관리들도 대부분 여자들을 회유해서 구슬리고 있었는데 그 여자들도 모두 미인이라고 했다. 게다가 그가 시민주와 결혼한 것도 시 씨 가문의 재력과 병기구조와 군마를 위해서였다.그래서 그는 이해가 되지 않아 자리에 앉은 후 송석석에게 물었다.“석석, 혹시 우리가 만난 사람이 진짜 연왕이 아니고, 진짜 연왕은 이미 연주로 돌아갔을 가능성은 없소?” 송석석은 아직 화가 가라앉지 않았지만 얘기를 듣고 자세히 생각해 보니 사여묵의 말에도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 강호의 이용술은 자세히 구분하지 않으면 정말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신기했기 때문이다. 염 선생 또한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알고 있던 연
염 선생은 몽동이의 말이 빗나간 것을 듣고 급히 말했다. “몽 교관, 왕야님을 예로 들면 안 되지요. 물론 그런 남자가 있긴 하겠지만 그건 오늘의 주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하지만 몽둥이는 여전히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계속 말을 이었다. “아무튼 만자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건 찬성합니다. 왜냐하면 결혼을 하지 않으면 상처를 받지 않을 테니까요. 어린 시절의 사랑이 얼마나 뜨거우면 시간이 지난 후에 얼마나 추하게 되니까요. 도금을 한 철은 언젠가 금이 없어지고 녹이 슬기 마련이겠지요. 정이 있어도 그런데 하물며 연왕 같이 계산만 할 줄 알고 사랑해 본 적이 없는 늙은이는 오죽하겠어요? 그런 사람은 만자 같은 여자가 그의 생활 속에 들어와 그의 메마른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그가 하는 큰 일을 도와줄 수 있다면 발정난 숫놈처럼 들러붙을 것입니다.” 그러자 염 선생이 멍하니 듣다가 물었다. “이것도 당신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까?” 온갖 역경을 다 겪지 않고 서야 어찌 이런 상서로운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몽동이는 절대 이런 말을 할 수 없을 것이었다. “네. 사부님께서 아주 많이 말씀해 주셨는데, 한 번 들어 보시겠습니까?” “아니요!”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거절했다. 실은 그들은 들을 생각에 벌써 구역질이 났다. 그들은 몽동이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건 인성에서 분석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인성은 연왕이 예전에 보여주었던 본성보다 더 솔직한 것이었다. 송석석은 오늘 밤 연황실에서 발견한 무공을 익힌 하녀와 하인의 수를 말했다. “하녀는 총 열여덟 명이고 하인은 스물세 명이 있었는데, 하인은 사사 같지 않았습니다. 사사는 엄격한 훈련을 받아서 특히 위험할 때 그들은 무의식적인 방어반응을 하는데 그건 수천 번의 위기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입니다. 오늘 총 세 명의 하녀와 한 명의 하인에게 시험해 보았지만 그들은 갑작스러운 압박감에 기색변화나 신체반응이 전혀 없었습니다. 사여묵은 고개를
사여묵은 다음날 아침 일찍 궁에 들어가 결재한 사건요지를 되찾으며 황제에게 말했다.“석석이 연황실의 난초가 정말 아름답다고 합니다. 그리고 저택에 유능한 사람들이 많아 하녀들까지 모두 무공을 지닌 사람이라고 했습니다.”숙청제는 멍하니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오월이 그렇게 오랫동안 연황실의 뒷조사를 해도 아무런 속내도 찾지 못했는데 그들은 한 번만 갔을 뿐인데 바로 알아냈 다니.오월은 연황실에서 호위를 발견하지 못해 사사들이 주변에 숨어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그리고 사사들은 무공이 뛰어나서 발견하기 어렵다고 여겨 함부로 침입하지 못했다고 했다.숙청제는 잠시 침묵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사사인가?”그러자 사여묵이 웃으며 말했다.“아닙니다.”그러자 숙청제는 그를 보며 퉁명스럽게 물었다.“왜 웃는 것이냐?”사여묵은 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제가 요즘 의미 없이 웃는 것을 좋아합니다.”그러자 숙청제도 그를 보고 웃음이 난듯 장난스럽게 말했다.“그럼 바보 아니냐?”형제는 서로 마주 보더니 바로 얼굴을 돌리고 웃었다. 그 웃음 속엔 알 수 없는 힘이 있어 숙청제의 높은 방어벽에 금이 가게 했다.황제가 사사에 관해서 물어보았다는 건 그의 조사 진행이 아직 거기까지 가지 못했다는 것이고, 그가 물을 수 있다는 건 오월의 조사 진도를 그에게 알려주려는 것이었다. 또한 그에게서 조금의 소식이라도 얻기를 바라는 것이니 어느 정도 그에게 믿음을 가진 것이나 다름없었다.적어도 황제는 자신만의 금고에서 한 발짝 나온 것이었다.저녁 식사자리에서 연왕의 독촉에 시민주는 돈으로 소진 소주방에 대한 소문을 깨트렸다. 소문낸 것과 해명하는 사람이 모두 같은 사람들이었다. 비록 설득력은 없어 보였지만 시민주는 돈을 잃고 말았다. 가의가 소문을 듣고 즉시 시민주를 찾아갔는데 시민주는 그녀를 만나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가의는 연황실 문 앞에서 한바탕 욕설을 퍼부었고 측비 김씨는 소동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하인들에게 가의가 오면 쫓아내라고 분부했다. 결
가의가 공방으로 들어간 다음날, 진성 곳곳에서 가의가 휴직당한 원인과 결과를 전했다.그러자 그녀가 평양후부의 자식을 살해하고 첩실을 용납하지 못해 첩실을 물에 빠뜨려 죽이려고 했다는 소문이 펴지기 시작했다. 소문이 돌기 시작하자 누군가 그녀가 월숫돈을 푼 일도 발설했다. 이런 극악무도한 사람을 평양후부에선 관부로 보내지 않고 내쫓기만 하다니, 그리고 소진소주방은 또 이런 사람을 수용해 잘 대접하고 있다니, 사람들은 점점 이해가 되지 않았다. 송석석은 순방영의 숙정작전의 마무리를 짓고 있어 소진 소주방이 또다시 사람들에게 욕을 먹게 된 일을 몰랐다. 그녀는 숙정작전이 끝나기 전날에야 이 사실을 알고는, 돌아가 시만자에게 물었더니 시만자도 골치가 아픈 듯 말했다. “홍시가 조사해 본 결과 시민주가 푼 소문이 아니라 평양후부에서 소문을 푼 모양이야. 평양후부에서는 가의를 내쫓은 원인을 공개하지 않았잖아. 그러니 평양후부의 사람이 소문을 낸 것이 분명해. 그 사람은 가의를 죽일 작정인 것이야.” 그러자 송석석이 말했다. “가의뿐만 아니라 소진소주방도 죽이려고 하고 있어. 누가 소문을 낸 것인 지 조사해 냈냐? 이렇게 대규모로 사람을 매수해 정보를 흘리려면 돈이 많이 들 것인데 말이야.” 시만자가 대답했다. “평양후부에 네가 아는 사람이 있잖아. 혹시 그 사람이 한 짓은 아닐까?” “전소환 말이냐?” 그러자 송석석은 잠시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 “그녀가 가의와 민소진을 증오할 가능성이 제일 크긴 하지. 공방은 민소진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으니까 공방도 싫었을 테고. 하지만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으면 그녀에겐 그럴 만한 능력이 없어.” 두 사람은 서로 눈이 마주치자 미리 약속이나 한 듯 똑같이 말했다.“조미진?” “조미진?”가의를 증오하는 사람이 한 명 더 있다면 분명 가의 때문에 아이를 잃은 조미진일 것이 분명했다. 원래 송석석도 설사를 하게 하는 약이 어떻게 낙태할 수 있는지 궁금해서 물어보고 싶었지만, 평양후 노부인이 병을 핑계 삼아
그가 앉은 자리는 북당이 이번 협상에서 취한 입장을 대표했다.그는 중립의 위치에 있었다. 송석석은 다시 한 번 국가가 강성한 것이 정말 좋다며 감탄했다. 협상의 처음 부분은 조금 지루했다. 양쪽 모두 똑같은 말을 반복하며 강조하였고, 양쪽의 역관들이 그것을 전달하며, 모두 역사적 문제를 강조했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처음부터 양보를 한다면 계속해서 양보하게 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따라서 첫 번째 협상에서는 아무런 합의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서로의 한계를 시험하는 데 그쳤다. 다음 날, 바로 두 번째 협상이 시작되었다. 역시 초반에는 전날처럼 양쪽에서 강조하는 말들이 오갔다.그러다가 잠시 후, 안풍친왕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이렇게 계속해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두 나라의 국경 문제는 이미 수십 년간 지속되어 왔고, 이것은 하루아침에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우선 국경 문제는 잠시 제쳐두고, 본왕은 두 나라가 서로 친선을 맺고, 서로 침범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확인하고 싶습니다." 그의 말에, 모두 두 나라가 더 이상 분쟁을 일으키지 않기를 바란다며 긍정적인 의사를 내비쳤다. 안풍친왕은 한 장의 목록을 꺼냈다. 그 목록에는 양국의 상품들이 나열되어 있었고, 그 중에는 곡물, 가축, 비단, 직물, 수공예품, 찻잎, 모피, 도자기, 종이, 벼루, 각자의 나라에서만 자생하는 약초, 향료, 청염, 철광, 옥석 광물 등이 있었다. 양쪽은 그것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처음의 긴장감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막대한 이익 앞에서, 어떤 일들은 협상이 가능했다. 협상이 되지 않으면 잠시 미룰 수도 있었다. 수년간의 전쟁은 두 국가의 국고를 이미 소진시켰기에 양쪽 모두 휴식을 취할 필요가 있었다. 북당의 발전 경험에 따르면,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억제하는 것은 뒤처진 생각이며, 농업과 상업을 동시에 중시하는 것이 살길이었다. 상업세 또한 매우 높았다. 안풍친왕의 이 목록 덕분에 두 나라는 국경
하지만 송석석은 서경의 종친과 관리들이 북당이 협상에 개입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놀람이 역력했다.놀란 마음이 지나고 나자, 그들은 기쁨과 자신감을 드러냈다. 그들은 북당이 협상에 참여하는 것이 서경을 위한 든든한 지원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송석석은 이 장면을 보며 오히려 안심을 했다. 정말 그렇다면 원신제가 미리 그들에게 이를 알려줄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협상에 참여하는 관리들에게는 알렸어야 하는데, 그녀가 왜 말을 하지 않았는지이제야 확실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녀도 서로 양보하는 방향으로 가길 원했지만, 궁정의 문무 백관들 중 그녀를 지지하는 이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신복하는 북당 안풍친왕을 초대한 것이었다.이렇게 보니, 어제 원신제가 그녀와 시만자를 궁으로 부른 이유도 이해가 되었다. 처음에 말했던 그런 것들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여성의 과거 시험을 예로 든 것은, 그녀의 많은 결정들이 추진하기 어려운 상황임을 말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여기까지 분석을 마친 송석석은 점점 더 낙관적이게 되었다.궁중 연회가 끝난 후, 북당 사람들은 대접을 받으며 떠났다. 그들은 그 한 끼를 제외하고는 의견을 거의 내비치지 않았으며, 단지 짧은 대화를 나누었을 뿐이었다.그들이 떠난 후, 상국의 사절단도 일어나 인사를 하며 물러났다. 모두가 돌아가서 협상 준비를 해야 했다. 수란키가 제공한 일정을 따르면, 이틀 후부터 협상이 시작될 예정이었다.황궁 별관에 돌아가자, 이덕회는 모두를 모아 앉히고 논의했다.사실상 또 다른 진부한 이야기였다. 이번에도 양보를 해야 한다면, 모두가 지도 위에서 함께 논의해야 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출발하기 전에 황제가 이미 양보의 한계를 설정해 두었기 때문에 더 이상 양보를 하게 되면 돌아가기도 어렵고, 역사적인 죄인이 될 수도 있었다.그래서 아무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으며, 그저 지도만 바라보며 각자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사실 이런 자리에서는 모두 입맛이 그다지 좋지 않기 마련인지라, 많은 음식들이 한 입 먹고 나면 다시 치워지곤 한다.하지만 북당의 사람들은 정말 음식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떤 요리가 나와도 모두 다 먹어버렸으며, 가득 채운 술잔도 순식간에 비웠다. 그들을 시중드는 궁인들도 꽤 힘들었을 것이었다.시만자는 그들이 춘만루에서 먹었던 그 한 끼를 떠올렸다. 그때도 남은 음식이 하나도 없이 모든 것이 비워졌었다.그녀는 송석석에게 무언가 말을 건네고 싶었다. 하지만 식사 소리 외에는 아무 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기에 말을 꺼내기 어려웠다.그러나 그들은 눈짓만으로도 서로가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알아차렸다.시만자는 북당 사람들이 이곳에 등장한 것이 협상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했고, 송석석도 그렇게 생각했다.하지만 그녀는 그들이 중재자로 온 것인지, 아니면 서경을 돕기 위해 온 것인지 확실하게 알 수 없었다. 만약 중재자라면 협상 또한 오래 걸리지 않고 조약을 체결할 수 있을 테니 더 좋을 것이었다.하지만 만약 서경을 돕기 위해 온 것이라면 협상은 공방전이 될 것이 분명했다. 북당이 그들의 방패가 된다면 상국이 협상에서 어려움을 겪을 것이 틀림 없으니 말이다.이덕회와 홍려사경 등 상국의 사절단들은 상황을 어느 정도 눈치챈 듯 했다. 그래서 그들은 처음의 그 기쁨을 잃은 대신 마음속으로 여러 가지를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눈앞의 음식도 별로 먹고 싶지 않은 듯했지만, 모두가 식사를 하고 있었기에 그들도 어쩔 수 없이 천천히 먹었다.이 궁중 연회는 그들이 참석했던 연회 중 가장 이상한 연회였을 것이다. 마치 폭풍이 다가오는 듯한 무서운 고요함이 느껴졌다.궁중에서 준비한 요리는 총 32가지였다. 그러나 각 요리의 양은 매우 적었으며, 궁인들은 음식을 하나씩 들고 들어와서는 다시 하나씩 치워갔다.누군가 술잔을 들고 싶어했지만, 역시 원신제와 마찬가지로 한 번 쓱 훑어본 후, 술잔을 비우고 다시 내려놓고는 식사를 계속했다.마침내 32가지 요리가 모두 올라갔
다음날, 궁중 연회는 신시에 시작되었고, 여전히 수란키가 직접 그들을 맞아 궁으로 안내해주었다.예상했던 대로 즉위식은 이미 끝난 상태였고, 이번 연회의 주요 목적은 국경선의 협상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궁에 들어간 후에도 다른 나라의 사절단을 보지 못했다.궁 안은 황실의 측근과 문무 백관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들은 상국의 사절단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고, 친근한 분위기도 없었다.이런 자리에서는 역관의 도움이 필요했기에 대화의 주제가 그리 넓지 않아, 서로 간단한 인사 정도만 나눌 뿐이었다.다른 나라의 사절단이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입석할 때 원신제가 상국의 사절단에게 말했다."오늘 북당에서 귀빈들이 오십니다. 곧 도착할 것인데, 여러분이 그들과 바로 친해질 것이라 믿습니다."이덕회는 즉시 흥분하며 말했다. "북당의 귀빈이라 하셨습니까? 어떤 분이 오시는지요?"그가 흥분하는 것은 당연했다. 왕이장이 가져온 임양운의 육안총과 포차는 모두 북당에서 개량된 것이었고, 임양운 선생이 북당에서 배운 적이 있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상국의 병부상서로서 그는 정말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싶었다.북당은 상국이 항상 배우고자 했던 본보기였다. 그들의 첨단 무기와 치국책은 상국보다 훨씬 진보적이었다.물론 국가의 상황이 다르기에 모든 것을 배울 수는 없을 테지만, 대화를 깊이 나누면 분명히 얻을 것이 있을 것이었다.원신제는 그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도착하면 알게 될 것입니다."연회는 지루하고 피곤했지만, 북당의 귀빈이 온다면 그 이야기는 달라진다.모두가 기대하고 있을 때, 한 외침이 들렸다.“북당 안풍친왕과 왕비께서 도착하셨습니다!"이덕회는 놀라서 입을 막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눈에는 기쁨이 넘치고 있었다.송석석도 사부로부터 안풍친왕의 호를 들어본 적이 있었다. 사부는 그를 매우 존경한다고 했다. 생각치도 못하게 오늘 그를 만날 수 있으니 그녀도 말할 수 없이 기뻤다.반면, 만두와 몽동이 그들은 비교적 담담했
원신제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씁쓸한 게 한 가지 더 있네. 지금까지 짐은 장공주의 신분으로 여인에게도 과거 시험을 볼 자격이 있어야 한다고 높이 외쳤지. 하지만 황제가 된 지금, 어쩔 수 없이 각 세력들의 이익을 고려해줘야 하고 그자들이 짐에 대한 적대심과 경계를 약화시킬 수밖에 없다네. 짐은 이제 고려한 일이 더 많아졌어. 가끔은 속에 천불이 나서 반대파 세력들의 가슴에 칼을 꽂고 싶기도 하네.”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송석석이 대꾸했다.“사실 한 나라의 황제나 대신들은 남녀를 막론하고 결국 최종 목적은 같지 않겠습니까? 폐하께서도 그렇듯 다들 나라의 안정과 백성들의 평안을 바라고 있는 겁니다. 나라에 영원히 전란이 일어나지 않고 창성해야 폐하께서 원하시는 개혁을 진행하셨을 때 반대의 목소리가 잦아드는 것입니다. 그러니 폐하, 현재 가장 중요한 건 폐하의 자리부터 굳건히 지키시는 겁니다.”대놓고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원신제는 송석석의 말뜻을 확실하게 알아들었다. 현재까지 나라가 혼란에 빠져 있고 각 세력들의 제지도 심하기에 이 국면을 해결하는 것도 충분히 힘든 일이다.황제의 자리도 흔들리고 있는 지금, 원신제가 개혁까지 고집하려는 건 더욱 위험한 일이었기에, 미래가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다.시만자 또한 송석석의 말에 동의하는 바였다.“사실 한 가지 일을 처리하는 데에 방법이 한 가지밖에 없는 건 아닙니다. 강경하게 상대방과 맞서 싸우는 것도 방법이지만 이는 가장 현명하지 못한 하책입니다. 한 사람의 성격도 바꾸기 쉽지 않은데 천 년이나 넘게 지속된 규정을 바꾸는 건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폐하께서 관념의 씨앗을 심으시면 언젠가 누군가가 폐하께서 남긴 발자국을 따라 한 걸음씩 나아갈 것입니다.”잠시 머뭇거리던 시만자는 이내 다시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저와 석석도 매산에서 무술을 공부할 때 그랬습니다. 다들 저희를 비웃고 하찮게 여겼지만 저희는 결국 실력으로 그자들을 한 명씩 쓰러트렸습니다. 구호만 외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실력이
서경의 황궁은 금빛으로 반짝였으며 기세가 어마어마했다. 어둠이 깃든 고요한 밤에는 기 장엄함이 더욱 돋보였다.첫 번째 궁문을 들어서고 나서도 마차는 궁 안을 자유롭게 누빌 수 있었다.궁 안 곳곳에는 커다란 나무들 위에는 등불이 잔뜩 걸려 있어 대낮처럼 밝았으며, 누군가가 몰래 나무 위에 숨어있는다고 해도 너무 밝아서 바로 들킬 정도였다.수란키는 앞장서서 걷다가 한 궁전 밖에 도착했는데, 궁녀 두 명이 다가와 수란키와 서경 언어로 몇 마디 나누다가 고개를 돌려 송석석과 시만자에게 환하게 웃으며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수란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송 대감님, 만자 낭자, 폐하께서 두 분에게 궁전으로 모시라고 하셨습니다.”두 궁녀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송석석과 시만자는 이내 궁전 안으로 들어갔다.휘황찬란한 궁전 내부에는 커다란 조각 기둥이 양측에 세워져 있었으며 그 모습은 압박감이 넘쳤다.원신제는 용상에 앉아 환한 미소로 두 사람을 반겼지만 얼굴에는 피로함이 가득해 보였다.송석석과 시만자는 이내 인사를 올렸고 원신제는 그들에게 편하게 앉으라고 했다.그리고는 송석석을 쳐다보며 말을 걸었다.“짐은 송 대감이 사절단과 함께 이곳으로 온다고 하여 며칠 전부터 계속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보니 너무 반갑네.”송석석은 웃으면서도 진지하게 대답했다.“폐하께서 황위에 오르셨다는 소식을 듣고 소인도 너무 기뻤습니다. 원하는 바를 이루신 걸 감축드립니다.”송석석은 원신제를 힐끔 쳐다보았다. 원신제에게서 냉옥 장공주의 모습이 보였고 예전과 크게 변한 건 없었으며 여전히 피로해 보이고 여전히 진중하고 엄숙했다.냉옥 장공주에게 있어서 황제의 역할이든 실권을 손에 쥔 장공주 역할이든 똑같이 신경 쓸 일이 많을 것이다.“원하는 바를 이루느라 많이 힘들었네. 하지만 다행히도 이제 일처리는 훨씬 쉬워졌네.”원신제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조금 뒤, 궁녀들이 서경 특색이 돋보이는 다과들을 내왔다. 송석석과 시만자는 조금 전에 저녁 식사를 했기에 배가 고프지
서경 수도에 도착했을 땐 8월 13일이었기에, 송석석 일행이 떠난 지 한 달은 족히 넘은 상황이었다. 점심이 되자, 햇빛이 따스하게 비추어졌다.진왕은 마차 안에 몸을 웅크려 누운 채 입성에 진입했다. 하지만 마지막 자객들은 머릿수도 많고 기세도 등등해, 서경 지대에 들어서고 나서도 송석석 일행은 총 일곱 번이나 습격을 당했다. 현갑군은 대부분 부상을 당했고 시만자마저 어깨가 칼에 찔렸지만 다행히 신경까지 다치지는 않았다.진왕이 이렇게까지 크게 논란 건, 자객에게 습격을 당할 당시, 그는 변소 안에 있었다.일을 마치고 변소를 나선 순간, 갑자기 나타난 자객이 검으로 진왕의 가슴을 베었고 그 검을 진왕의 가슴에 꽂으려던 순간, 송석석이 제때에 나타나 손에 들고 있던 검을 한 발 빠르게 자객의 가슴에 꽂았다.하지만, 이내 자객의 머리채를 뒤로 확 잡아당긴 덕분에 진왕은 무사할 수 있었다.그는 가슴팍이 조금 베인 게 전부였지만 큰 중상을 입은 것 마냥 밤새 괴로운 신음소리를 내고 나서야 겨우 진정이 되었다. 수도에 도착하자 수란키가 관원들을 데리고 성문 앞에 서서 진왕을 반겼다. 수란키는 이제 서경의 승상이 되었다.한눈에 송석석을 알아본 수란키는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송 장군님,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여전히 기품이 넘치시네요.”송석석은 말에서 내려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인사를 하며 상대방을 힐끗 살폈다. 솔직히 조금 전에 수란키를 알아보지 못했다.전보다 훨씬 늙어 보였고 백발인 데다가 수염도 허옇게 변해 버렸다. 하지만 눈빛은 여전히 카리스마가 넘쳤고 남강 전장에서 봤을 때보다 되레 활기가 넘쳐 보이기까지 했다.남강 전장에서 봤던 수란키는 온몸에서 분노가 들끓고 있었다. 위엄이 넘치고 엄숙한 그는 삶의 의지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며 그저 복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그런 느낌이었다.“승상께서 이렇게 직접 마중까지 나오시고. 너무 민폐를 끼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되네요.”송석석이 웃으면서 말하자 수란키가 호탕하게 웃었다.“너
한편, 크게 놀란 진왕은 태의를 불러 심신을 안정할 수 있는 약을 처방받았다.송석석이 찾아갔을 때, 진왕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창백한 얼굴에는 핏기가 전혀 보이지 않았으며 덜덜 떨리는 입술로 송석석에게 자객은 어떻게 됐냐고 물었다.송석석이 진왕에게 자객이 도망쳤다고 얘기하고 나서야 그는 조금 안정을 찾은 듯했다.사실 진왕을 보필하는 사람들이 자객이 도망쳤다고 진작 얘기했지만 진왕은 믿지 않았다. 이제 송석석에게서 듣고 나니 그제야 안심이 된 것이다.송석석은 진왕에게 몸조리 잘 하라고 당부한 뒤 방을 나섰다.이와 동시에, 이덕회는 나머지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있었다. 병부 상서인 이덕회는 지금까지 산전 수전 공중전까지 전부 겪어 보기도 했고 또한 왕비와 현갑군을 믿었기에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한편, 매산 출신 몇 명은 한데 모여 전에 성릉관에서 만났던 검은 복장 차림의 무리들을 의심하고 있었다.어쩌면 그자들이 바로 자객일지도 모른다는 의심 말이다.이 의심을 가장 먼저 제기한 건 바로 시만자였다. 그는 그 무리들이 갑자기 사라진 게 너무 수상했고 비밀 경로를 통해 계획적으로 도망친 거라고 확신했다.더군다나 조금 전 자객들도 전부 검은색 옷차림이었기에, 비록 머릿수가 조금 차이 나긴 했지만 그리 이상하지도 않다. 일부 사람들은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을 수도 있으니까.“성릉관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출동했던 건 아마 우리한테 손을 쓰려고 그랬을 가능성이 커. 하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성릉관에서 우리를 죽이면 쉽게 도망칠 수 없을 것 같아서 일단 포기한 거야.”시만자는 분석할수록 자신의 의심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서 고개를 돌려 송석석에게 물었다.“내 말이 맞는 것 같지 않아?”송석석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자들은 아니야. 정확히 얘기하자면 조금 전 자객들은 그자들보다 무술 실력이 확연히 떨어져. 그자들은 성릉관에서도 자유롭게 나타났다가 사라졌어. 그렇게 보면 네 의심이 성립되지 않다는 거지. 그자들은 성릉관에
이날 아침, 송석석 일행은 서경으로 출발했다.송석석은 딱히 아쉬운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나중에 돌아올 때 성릉관을 또 지나야 했기에, 이후에도 외조부 가족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성릉관을 떠나자마자, 평탄한 길이 사라졌다. 여기저기가 다 울퉁불퉁했고 일부러 인위적으로 파괴한 곳도 있었기에 마차가 지나가기엔 무리가 있었다.하지만 진왕은 절대 다시 말을 타려고 하지 않았다. 며칠동안 안정을 취했지만 다리 안쪽의 쓸림 상태가 아직 심했기에 걸을 땐 괜찮아도 말에 타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때문에 성릉관에서 공을 세우고 육아당까지 설립한 진왕은 까탈스럽게 마차를 고집했고 마차가 도무지 지나갈 수 없는 곳은 현갑군이 말에서 내려 마차를 밀면서 힘겹게 전진했다.하지만 불행 중 다행인 건, 현재 양국으로 통하는 길이 개방되었기에 그 길을 따라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산길밖에 없었다면 고귀한 진왕의 엉덩이가 엄청나게 고생했을 것이다.그렇게 겨우 서경 지대에 진입하여 루벌로 향하자, 서경의 관원과 병사들이 그들을 맞이하며 가는 길까지 호송해주었다.송석석 일행들 중에서 통역관을 제외하고는 서경에 와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똑 같은 변경 도시라고 해도, 루벌은 성릉관보다 훨씬 낙후했다. 여기저기에는 망가지고 훼손된 집채가 많았으며 행색이 누추한 거지나 근심이 많아 보이는 백성들도 많았다.송석석은 이 광경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두 나라가 전쟁을 치른 건 사실이지만 이곳까지 침투되지는 않았는데 말이다. 전에 전북망과 이방이 이곳 마을을 공격했다고 해도 공격당한 그 마을만 피해를 받아야지 루벌 전체가 이렇게 엉망진창이 된 것은 말이 안 되었다.루벌의 한 역관에 도착하고 나서야 송석석은 호송하고 있던 관원한테서 그 이유를 듣게 되었다. 수란석이 성릉관에서 전쟁을 일으켰을 때, 후방 공급이 부족한 탓에 병사들이 루벌로 돌아와 약탈을 진행한 것이었다.수란석 당시의 상황이 빅토르와 거의 비슷하다고 했다. 그때 당시 전쟁을 바라는 사람들이 많지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