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의가 공방으로 들어간 다음날, 진성 곳곳에서 가의가 휴직당한 원인과 결과를 전했다.그러자 그녀가 평양후부의 자식을 살해하고 첩실을 용납하지 못해 첩실을 물에 빠뜨려 죽이려고 했다는 소문이 펴지기 시작했다. 소문이 돌기 시작하자 누군가 그녀가 월숫돈을 푼 일도 발설했다. 이런 극악무도한 사람을 평양후부에선 관부로 보내지 않고 내쫓기만 하다니, 그리고 소진소주방은 또 이런 사람을 수용해 잘 대접하고 있다니, 사람들은 점점 이해가 되지 않았다. 송석석은 순방영의 숙정작전의 마무리를 짓고 있어 소진 소주방이 또다시 사람들에게 욕을 먹게 된 일을 몰랐다. 그녀는 숙정작전이 끝나기 전날에야 이 사실을 알고는, 돌아가 시만자에게 물었더니 시만자도 골치가 아픈 듯 말했다. “홍시가 조사해 본 결과 시민주가 푼 소문이 아니라 평양후부에서 소문을 푼 모양이야. 평양후부에서는 가의를 내쫓은 원인을 공개하지 않았잖아. 그러니 평양후부의 사람이 소문을 낸 것이 분명해. 그 사람은 가의를 죽일 작정인 것이야.” 그러자 송석석이 말했다. “가의뿐만 아니라 소진소주방도 죽이려고 하고 있어. 누가 소문을 낸 것인 지 조사해 냈냐? 이렇게 대규모로 사람을 매수해 정보를 흘리려면 돈이 많이 들 것인데 말이야.” 시만자가 대답했다. “평양후부에 네가 아는 사람이 있잖아. 혹시 그 사람이 한 짓은 아닐까?” “전소환 말이냐?” 그러자 송석석은 잠시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 “그녀가 가의와 민소진을 증오할 가능성이 제일 크긴 하지. 공방은 민소진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으니까 공방도 싫었을 테고. 하지만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으면 그녀에겐 그럴 만한 능력이 없어.” 두 사람은 서로 눈이 마주치자 미리 약속이나 한 듯 똑같이 말했다.“조미진?” “조미진?”가의를 증오하는 사람이 한 명 더 있다면 분명 가의 때문에 아이를 잃은 조미진일 것이 분명했다. 원래 송석석도 설사를 하게 하는 약이 어떻게 낙태할 수 있는지 궁금해서 물어보고 싶었지만, 평양후 노부인이 병을 핑계 삼아
평양후부에서는 장례를 치르고 있는 탓에 송석석도 더 이상 방문요청을 보내지 못했다. 다만 유언비어가 너무 많아 억제하고 싶었는데, 사실이 무엇인지 모르니 억제를 해도 소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홍시도 조사를 마치고 돌아왔는데 소식은 확실히 평양후부에서 전해진 것이라고 했다. 홍시는 자세히 훑어보고 돈까지 지불해서 알아본 결과 그 이야기꾼들의 정보가 평양후부의 하인들에게 얻은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이유는 예전에 가의가 하인들을 구박해서 그들은 가의에게 복수하려고 했다.이야기꾼들도 분개해서 이런 일을 알게 된 이상 가의의 악랄함을 널리 알려야 한다고 했다.홍시가 그게 모두 사실이냐고 묻자 이야기꾼들은 잠시 멍하니 그녀를 보다가 어이 없다는듯 말했다.“당연히 사실이지요! 가의가 누굽니까? 사온의 딸 아닙니까? 황제폐하께서 그녀의 군주 자리까지 폐위시켰으니 그녀가 역모사건에서도 무고한 건 아닐 것입니다. 감히 역모도 꾸밀 수 있는데 저택에서 사람을 몇 명 해치는 게 뭐가 어렵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손에 죽었을 지 모르는 일입니다.”가의라는 두 글자는 이미 죄가 되었다. 홍시는 몇 명에게 더 물었지만 확실한 증거를 알아내지 못해 그대로 보고를 했다.시만자는 오늘 말을 타고 공방에 갔는데 문 앞에 사람이 너무 많이 둘러싸고 있어 들어갈 수 없었다. 그리고 문과 벽엔 썩은 계란과 똥으로 가득 찼다.시만자는 화가 나서 말을 타고 북명황실로 돌아갔다. 돌아가자마자 홍시가 평양후부의 하인이 일을 폭로했고, 이유는 가의가 평시에 그들을 학대해서 복수를 하려는 것이라고 알렸다.그러자 시만자는 화가 치밀어 오른듯 찻잔을 내던지며 소리쳤다.“이런 망할!”송석석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시만자에게 물었다.“너… 가의 만났어?”가의라는 말에 시만자는 다시 화가 치밀어 올라 말했다.“가의는 무슨, 난 공방에 들어가지도 못했어. 생각할수록 화가 나네. 그녀가 그런 짓을 한 게 뭐가 이상하다고, 원래 좋은 사람도 아니었잖아.” 송석석은
시만자는 자기 의견을 고수하며 말했다. “허나 가의를 쫓아내면 우리가 더는 이 소란에 휘말리지 않을 것 아니더냐?”“그럼 그 뒤엔 어찌할 생각이냐? 앞으로도 똑같은 일이 생기면? 사실 나는 가의 일은 오히려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이건 우리에게 시험이나 마찬가지다. 나중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우리에게도 기준이란 게 생길 게 아니냐? 우선 편견은 버리고 사실을 확인한 뒤에 진짜 잘못이 있으면 쫓아내고 아니면 기회를 주는 건 어떠냐?”송석석이 덧붙였다. “편견을 버리는 건 아주 중요해. 쫓겨난 여인들은 죄를 뒤집어쓰기 마련이지. 허나 우리가 미리 결정을 내린다면 아무도 우리를 믿지 못하게 될 것이다.”시만자는 여전히 답답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래. 네 말이 맞다는 거 알아. 나 역시 공방 입장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허나 개인적으로는 가의를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들구나. 그리고 가의는 절대 무고하지 않아. 그러니 그냥 쫓아내면 되지 않겠느냐? 넌 가의가 싫지도 않느냐?”“나도 싫지.” 송석석이 단호하게 말했다.“그럼 된 거 아니냐? 우리가 싫어하는데 왜 공방에 받아들이는 거야? 나는 처음에 큰 그림을 보고 상황을 해결하려고 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까 처음부터 가의랑 시만홍이 문제를 일으킨 거잖느냐. 자신이 공방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니 지금 다 망치려고 하고, 평양후부 사람들마저도 우리를 망가뜨리려고 하고 있어. 생각할수록 화가 나구나.”시만자는 점점 더 화가 솟구쳐 말이 거칠어졌다. “게다가 개인적인 감정으로 사람을 받지 않기로 했지만 우리는 처음부터 선의로 공방을 시작한 건데, 왜 이제 와서 선의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지? 선의가 없으면 공방 자체가 있을 이유가 없지 않느냐!”“그리고 내가 가의를 싫어하는 연유는 가의와 그녀의 어머니가 널 괴롭혔기 때문이야. 제일 화가 나야 할 사람은 넌데 왜 가의를 도와주려고 하는 것이지? 공방이 이런 사람을 받아들일 거면 그냥 문을 닫는 게 나을 것이야!”“너도 싫다고
보주는 이 일이 두 사람 간에 갈등을 일으킨 것에 대해 아쉬워하며 말했다. “그동안 시만자 아씨는 항상 아씨를 지지해 오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 이번엔 한 번 순응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게다가 지금까지도 평양후부의 하인들 말고는 누가 공방을 방해했다는 증거도 없지 않습니까?”송석석은 잠시 생각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떤 일은 천만번을 대비하는 것보다 한 번이라도 만약의 상황을 염두에 두는 게 중요하단다. 보주야, 나한테 생각이 다 있으니 걱정하지 말거라.”송석석은 턱을 괴고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저녁에 공방에 한 번 가볼 생각이다.”홍소는 옆에서 한참을 말없이 지켜보다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왕비님,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그러자 송석석은 고개를 들어 홍소를 바라보며 말했다. “홍소 네가 같이 갈 필요는 없다. 넌 계속 누군가가 돈을 받고 소문을 퍼뜨린 게 아닌지 알아보거라.”“알겠습니다!” 홍소는 고개를 숙이고 서둘러 나갔다.송석석은 다시 노집사를 불러 풍집사에게 가서 가의가 하인들을 학대한 일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그리고 어떤 하인들이 그 일로 문제가 된 것인지 물어보라고 지시했다.화가 난 시만자는 이리저리 정원을 걷다가 정자에서 노래를 듣고 있는 혜태비를 보았다. 그녀에게 다가가려던 찰나 혜태비는 그 모습을 보고 즉시 가녀에게 물러서라고 한 뒤 고씨 유모에게 말했다. “돌아가자꾸나.”“시만자 아씨가 오셨나이다.” 고씨 유모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 말에 혜태비가 말했다. “그러니 그만 돌아가자니깐! 얼굴이 아주 뾰루퉁해 있지 않느냐! 괜히 건드려서 쓸데없는 소리 듣지 말고 얼른 가자꾸나.”정자에 도착한 시만자는 혜태비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녀도 자신의 행동이 너무 성급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정말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직접 고른 문이 망가졌고, 공방의 간판도 엉망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심 사형이 직접 쓴 글인데 송석석은 아쉬운 마음이 하나도 없는
송석석은 정자 밖으로 나가 장미 한 송이를 꺾어 입에 물고는 연달아 세 바퀴를 돌며 공중제비를 했다. 그리고 난간을 넘어 다시 돌아와 시만자 옆에 앉더니 팔을 펼치며 시만자를 향해 입에 문 장미를 내밀었다. 그의 밝은 눈동자엔 웃음이 가득해졌고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시만자는 손으로 꽃을 낚아채며 뾰로통하게 말했다."이제 그만하거라! 왕비란 사람이 이리저리 공중제비나 돌기나 하고, 체통은 내다 버린 것이냐? 창피하게 말이야.""그러게 내가 왜 우리 시만자 아씨의 기분을 건드려서는!" 송석석이 두 볼에 홍조를 띠며 해맑게 웃었다. "그래서 우리 시만자 아씨, 이제 저를 용서해 주시겠나이까?""애초에 진짜 화난 것도 아니었다. 가자, 공방에 가서 가의나 찾아보자." 시만자는 그녀의 팔을 힘껏 꼬집고는 몽동이를 한 번 흘겨보며 말했다."뭘 그리 웃는 게냐? 그러다 턱 빠지겠다!"몽동이는 눈물을 닦으며 웃음을 터뜨렸다."우스워 죽겠다. 완전 원숭이 같구나."송석석과 시만자는 몽동이를 신경 쓰지 않고 정자를 나섰다.시만자는 뒤에서 송석석의 엉덩이를 발로 툭 차고는 욕설을 퍼부었다."이런 망할 놈."그러자 송석석은 뒤돌아 귀여운 얼굴을 찡그리며 장난쳤다."그래도 내 방도가 먹히지 않았느냐?"시만자도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문득 몽동이의 말이 떠올랐는지 이내 서늘해지더니 눈가가 붉어지며 속이 쓰려왔다. 이렇게 즐겁게 떠드는 것도 오랜만이었지만 말이다. 그들은 소진 소주방의 뒷문으로 들어갔다. 앞문에는 여전히 십수 명의 백성들이 모여 욕설을 퍼붓고 난리를 피우고 있었다. 그들은 문에 돌과 헌 신발을 던지고 오물을 뿌리는 중이었다. 송석석은 들어가자마자 이 부근을 살피던 대둔자에게 상황을 물었다. 그는 이 씨 부인이 보낸 사람이었다. 대둔자가 말하기를 한두 시간 간격으로 사람이 교체되는데 그들 중 백성인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고 일부러 시끄럽게 하러 온 사람도 보인다고 했다.대둔자는 백성들이 소란을 일으키기
편청.손마마가 차를 준비하자마자 가의는 벌컥벌컥 마셔 거의 한 주전자나 마셔버렸다. 배가 고프고 목이 말랐지만 그녀는 사람들이 밀고 들어올까 두려워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손마마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말하였다."며칠 전엔 그래도 열심히 일했으니 내가 국수라도 한 그릇 끓여 주지.""고맙소."가의는 작은 목소리로 울먹이며 손마마가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그녀의 눈은 호두처럼 부어 있어 원래 초췌했던 얼굴이 더욱 처량해 보였다."전당할 수 있는 건 다 전당해서 빚을 갚았다." 그녀의 눈빛은 점차 잠잠해졌다.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라 동정받을 가치가 없다. 허나 내가 평양후부에서 도대체 무슨 악행을 저질렀다고 그러는 것이냐? 시어머니는 나를 좋아하지 않고 서방님도 나를 싫어해서 나에겐 아무런 실권도 없다. 어머니가 살아 계셨을 때는 한 달 중 스무날은 공주부에서 지냈다. 어머니가 사고를 당하고 나서는 고가가 무너져 버려 천민 신분이 되었지. 후부에서 나는 계속 참고 또 참아왔다. 마음속으로 아무리 괴로워도 감히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의 눈물은 점차 얼굴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그 조씨가 집에 들어왔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반대할 자격도 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신경 썼을지도 모른다. 전소환이 집에 들어왔을 때 나는 정말 화가 났었다. 송석석, 내가 이런 얘기를 하면 넌 자업자득이라 생각할 것이겠지. 전소환이 처음에 마음에 둔 사람은 바로 사여묵이니 말이다. 그렇다. 이건 전부 내 업보다."그녀는 소매로 눈물과 콧물을 닦으며 말할 수 없는 억울함과 답답함을 보였다."내가 전소환을 때리고 욕한 적이 있긴 하다. 하지만 그건 그녀가 자초한 일 때문이었다. 그녀는 정말 천박해 어떤 수단도 가리지 않았다. 이런 일은 노부인도 알고 계셔서 노부인께서도 그녀에게 많은 벌을 주셨다.""허나 조씨는 나를 한 번도 적대하지 않았고 집에 들어온 뒤로도 늘 얌전하게 지냈다. 나를 보면 늘 공손히 부인이라고 부르면서 말이다. 만약 조씨의 체면을 보
시만자는 이 가의라는 사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나쁘기도 나빴고, 심지어는 어리석기도 했다. 아마 그녀의 어리석음은 그녀의 어머니인 사온이 살아있을 때 이미 뚜렷하게 드러난 것일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는다면 사온이 그렇게 오랫동안 치밀하게 계획한 일을 왜 그녀에게는 아예 알려주지 않았겠는가?이 생각에 시만자가 무심코 물었다.“네 어머니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그건 왜 묻는 것이냐?”가의는 즉시 경계심을 드러내며 그녀를 노려보았다.“나한테 누명을 씌우고 싶은 것이냐? 그렇다면 생각도 하지 말 거라.”가의가 마치 고슴도치처럼 날을 세우는 모습에 시만자는 더는 그녀를 자극하지 않았고 대신 그녀의 집안 시녀들에 대해 물었다.가의는 시녀들에겐 문제가 없다고 단언하며 모두 그녀의 충실한 하인들이라고 답했다.“나는 쫓겨났지만 그 아이들은 데리고 나오지 않았다. 그 아이들이 후부에 있으면 적어도 박대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노부인은 관대하신 분이니 굳이 나와 함께 고생할 필요 없겠지.”그러자 송석석이 물었다. “전소환이 군주님을 해치려 했을 가능성은 생각해 본 적 없으십니까? 도대체 어떻게 약이 바뀌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전소환은 감히 그러지 못할 것이다.”가의는 확신에 차서 말했다.“매사 나에게 의지하며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그랬을 리가.”“해칠 용기가 없는데 밀고를 했단 말입니까?”가의는 잠시 멈칫했지만 본능적으로 전소환을 변호했다.“아마도 들키는 게 두려워서 그랬던 거겠지. 전소환은 단지 설사약만 썼을 뿐 사람을 해치지는 않았으니.”“어쩜 아량이 그리도 넓은 게냐.”시만자가 비꼬듯 말했다.그러자 가의는 그저 고개만 홱 돌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송석석은 뭔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자손 문제가 걸린 일인데 후부에서는 왜 더욱 철저히 조사하지 않으셨습니까?”가의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노부인은 병에 걸렸고 수씨도 곧 죽을 것처럼 기운이 없었다. 그래서
가의는 수년간 수씨와 얽혔던 은혜와 원한을 떠올렸다.수씨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녀는 깨달았다. 사람이 죽으면 등불이 꺼지듯 모든 것이 사라진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수씨가 그녀를 화나게 했던 많은 일들은 사실 그녀의 잘못이 더 컸건만 가의는 매번 트집을 잡기 일쑤였다.한참을 생각하던 그녀는 깊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사실 그녀는 참 괜찮은 사람이었다. 효성스럽고 너그러웠으며 후작을 위해 장남을 낳았고, 심지어는 수년간 후부의 살림도 총괄했지. 작년에 유산하지 않았더라면 몸 상태가 이렇게 악화되진 않았을 것이다.”“… 작년에 유산을 했단 말이냐?” 시만자가 물었다.“그렇다. 그녀는 원래 체질이 좋지 않았다. 의원이 임신은 피하라고 당부했는데 하필 그 시기에 또 아이를 가졌던 것이다. 태아가 선천적으로 약해 결국 지키지 못했고 유산 이후 몸이 더 상하게 되었다. 그 일이 없었다면 이렇게 젊은 나이에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송석석은 문득 노 집사가 풍 집사에게 물었을 때 풍 집사가 이런 일은 언급하지 않았던 것을 떠올렸다. 그는 그저 그녀가 둘째 아이를 낳을 때 병을 얻었다고만 말한 것을 들었다. 즉, 풍 집사는 많은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 집사에게 일부만 전한 것이 분명했다.시만자는 속으로 탄식하며 수씨는 정말 좋은 사람일 거라고 다시금 믿었다. 악독하고 깐깐한 가의조차 그녀를 좋게 평가한다면 그건 진심일 것이 분명한데, 그렇게 총명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 아이를 낳고 몸이 망가졌으니, 참으로 아쉬울 뿐이다.시만자가 다시 물었다.“정말 하인을 죽인 적은 없는 것이냐?”가의는 억울한 표정으로 답했다.“때리고 꾸짖은 적은 있어도 죽인 적은 없다. 허나 노부인이 싫어해서 자주 그런 것도 아니다. 게다가 내 곁에는 대부분 내 지참금으로 데려온 사람들 아니겠느냐? 내가 굳이 내 사람에게 그럴 이유가 뭐 있겠느냐?”마차로 돌아가는 길에 시만자는 가의를 내쫓겠다는 말을 더는 꺼내지 않았다.송석석이 말했다.“우리가 의
그러자 송석석이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왕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아주 잘 대해줍니다. 조카딸의 혼담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집간 부군이 잘 대해준다 하더군요. 다만 그녀는 자신이 두 번 시집갔음에도 처가에 머무는 것이 조카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되어 그러는 모양입니다.”그 말에 전북망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순간 번개처럼 날렵하지만 마음씨 따뜻한 최씨 부인이 떠올랐다. 최씨 부인에게는 적자와 서자녀들이 있었고, 아직 혼담이 정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혼인 문제로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에 시달렸을지 생각하니, 전북망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형수로서의 최씨 부인을 존중하며,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 없었다. 이때 송석석이 그의 생각을 끊었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전북망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우리 단둘이 여기에 있으면, 섭정왕이 질투하지 않을까요?” 송석석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침착하게 답했다. “이 정도 신뢰도 없다면, 제가 어찌 현갑군 지휘사로 오래 근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숨김없이 모든 걸 공유합니다. 이번 만남 역시 그분께 이미 알려두었죠.”송석석이 떠나자 전북망도 따라나섰다. 그는 섭정왕이 어딘가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의심했지만, 정작 별청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마당에서야 섭정왕을 발견했는데, 그는 대장군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송석석을 보자 미소로 맞이하며 불러세우는 섭정왕의 모습에 전북망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진정한 부부란 저런 것일까.'그러나 성릉관이든 진성이든, 남녀의 단독 만남은 명예에 흠이 될 수 있음도 잘 알았다. 특히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은 더욱 조심해야 했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들을 걱정하는가.’자조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왕청여의 제안은 여전히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5일의 고민 시간이 주어졌다. 사여묵과 송석석이 진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최씨 부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답은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 전북망은 송석석과 다시 만났다. 사실 그전에도 송석석이 성릉관으로 갔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서먹해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이 매번 성릉관을 떠날 때마다 몰래 배웅하곤 했다. 전북망은 자신이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늘 송석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방과 왕청여에게도 미안하긴 하지만, 그들과는 서로 감정을 소모하고 다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장군부만 송석석에게 상처를 줬을 뿐, 송석석은 장군부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않았다. 비록 이혼한 후에는 전북망 어머니의 병세에 대해 상관하지 않았지만 큰형수에게 어떻게 단설환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기까지 했다.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는 이미 섭정 왕비가 되어있고 나서였다. 변방의 전사들에겐 양식과 무기가 풍부하고, 봉록까지 올라, 그들에겐 이득이기에 이제는 조정의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었다. 섭정왕은 한때 장수였기에 병사들이 배불리 먹어야만 국토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북망과 송석석이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섭정왕과 함께 소 대장군에게 생신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소 대장군의 눈빛은 여전히 자애롭고 인자했다. 전북망은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그때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면 지금 송석석과 함께 노장군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일 것이라는 후회를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같은 생각인 걸 보니, 자신만 제자리에서 멈춰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송석석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생일잔치가 끝난 후에 송석석이 뜻밖에도 먼저 그를 찾았다. 그와 송석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섭정왕은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걱정되지도 않는가?’전북망은 당황하고 불안해 보였고, 송석석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먼저 입을 열지도 못하고 송석석이 말하기만을 기다리
전북망은 성릉관에서 몇 년 동안 두 번이나 발탁되었고, 지금은 장군의 신분으로 수천 명의 병사를 관리하고 있다. 계속 성릉관에 주둔하고 있어 다시 진성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고, 진성의 부름 없이는 제멋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재혼도 하지 않고 여전히 혼자 살아갔다. 성릉관의 모래바람은 해마다 그의 얼굴에 흔적을 남겨 또래들보다 몇 살이나 더 늙어 보였다. 심지어는 몇 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기에, 진정제를 먹어야만 잘 수 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그때 이방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송석석과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부부가 되었을까? 아마도 우린 귀여운 자녀도 낳았겠지. 그리고 나는 군대에서 열심히 일하고 석석은 가문의 내무를 책임지며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를 돌보고 있었겠지? 설령 내가 승진을 하지 못하고 평생 장군으로만 살아도 그는 날 떠나지 않았겠지.’ 이전의 전북망은 송석석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였는데 자신을 위해 날개를 부러뜨리고 병든 시어머니를 돌보며 군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책임지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그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돌이킬 수도 없었다. 전북망에게는 이미 이방이 있었고 이방을 사랑한다고 했으니, 송석석이 이혼하자고 했을 때 그는 심한 말을 하고 후회하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송석석 또한 후회할 게 없었다. 이혼을 하면서 전북망을 위해 부러뜨렸던 날개가 다시 자라나 전쟁터로 날아가 쉽게 공을 세웠으니까 말이다. 이방은 송석석이 큰 가문의 아가씨인 데다가 부친과 오라버니가 그를 위해 길을 닦아주었기에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의 성공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문이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주된 원인은 아닐 것이다. 만종문에서 송석석의 무공은 거의 최고였는데, 그건 송석석이 그만큼 노력을 했고, 그만큼 땀을 흘렸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북망은 송석석을 존경했지만 그는 자신이 송석석을
어머니께 간청해도 소용이 없자 신이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건 더 심한 꾸지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이가 이 혼사를 반대하는 것은 양지춘과 접촉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양지춘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서 놀며 감정을 쌓으라고 했다. 신이는 가기 싫었지만 어머니가 억지로 그녀를 마차에 태웠고, 심지어는 하녀에게 그녀가 부적절한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엄명했다. 양지춘의 얼굴은 그나마 멀쩡하게 생겼는데, 처음에는 신이를 조금이나마 존중하는 척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신이의 외모와 품평을 논하며 신이가 외모가 예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그를 부인으로 들이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그의 오만한 태도는 신이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아마도 신이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양지춘은 일부러 신이를 마차에 태워주는 척하며 그녀의 엉덩이를 꼬집었다!그 순간 신이는 온몸의 피가 머리 위로 솟구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경박한 눈빛에 신이는 이내 눈물이 쏟아졌고, 모욕감에 온몸을 떨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집에 돌왔는데, 하녀와 마부는 그의 동작을 보지 못한 탓에, 오히려 그가 세심하고 자상하다며 그녀의 어머니 앞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이는 억울해서 어머니에게 그 일을 말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그녀가 일부러 꾸민 말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꾸짖으며 사흘 동안이나 외출을 금지했다. 신이는 그렇게 방에 갇혔고, 매일매일을 눈물로 얼굴을 씻었다. 심지어 그날 선비의 말을 듣고 호수에 뛰어들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내가 양지춘에게 시집가는 것이 물에 빠져 죽는 것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사흘 후, 외출 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신이는 다시 경산사로 가서 같은 핑계로 하녀를 내보냈다. 이번엔 정말 죽을 각오로 호숫가에 간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다시 그 선비를 만났다.그는 쓸쓸하게 호숫가에 앉아 작은
신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나무 그늘에 몸이 가려져 있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초라해 보였고 눈 밑에는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바로 다리 앞에서 그림을 팔던 선비이자, 학정이 말하던 퇴학 해서 기녀를 키우는 학생이었다!“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신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짜증을 냈지만, 그가 한 말을 떠올리자 내심 두려웠다. “나는 여기에 물귀신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거짓말하는 것이겠지요.” 신이는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귀신은 두려웠고 진흙탕에 영원히 깔려 있는 건 더욱 두려웠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가 걸어 나오자 얼굴은 더욱 여위어 보였다. “호숫가의 주변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오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건 사람들이 이곳으로 예불하기 위해 오는 것이지, 경치를 보러 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절을 하고 바로 돌아가니 당연히 보지 못하겠지요.” 신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순간 깊이가 보이지 않는 호수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그는 여전히 굳게 서서 말했다. “예불하는 사람은 천지와 자연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경치가 있다면 반드시 한 번 보러 올 것입니다. 이런 곳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좋은 곳일 텐데 아무도 없다는 게 아기씨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것이 사실인지는 몰랐지만,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감히 그런 무서운 곳에서는 죽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자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절대 쉽게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고 싶어도 살 지 못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 밑은 이내 붉어졌고 눈물이 고여 반짝이는 것 같
신이의 사촌 여동생과 하녀는 신이를 찾으러 돌아왔다. 신이가 하녀보고 이순에게 삼백문을 주라고 하자 이순은 웃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원래는 우연한 만남일 뿐이라 다시는 접점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 조모님의 생신 때 가문 연회에서 공학정이 데리고 온 제자들 중에 이순이 있었다. 강남의 예의 규율은 진성처럼 엄격하지 않아서 연회에 참석할 때 여인들도 앞마당에 갈 수 있었다. 이순은 신이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신이는 그때 면사포를 쓰고 있었고 두 눈만 드러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순은 식사를 하지 않고, 신이의 조모에게 생신 축하 그림만 드린 후에 집에 일이 있다며 작별을 고했다. 그가 떠나자마자 학정이 그를 언급하며 안타까운 말투로 말했다. “총명하긴 한데 진취심이 없어서 계속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걸 여기로 데려와 진취성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사귀게 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로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르다니. 정말 실망이군. 학교를 그만두겠다면, 이젠 마음대로 하라고 해야겠어.” 그러자 신이의 부친이 위로했다.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껜 학생이 많으니 그가 나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학정은 마치 울화가 쌓인 것처럼 말했다. “그는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네. 그런데 진취성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동창에게 돈을 빌리질 않나, 게다가 집에 기녀까지 키우고 있다더군.” 신이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런 사람은 얘기할 가치도 없습니다.” 신이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서 왠지 마음속으로 실망감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날은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같다고 생각해 마음이 갔던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 후, 신이의 혼사도 낙착되었다. 그녀의 약혼자는 회주 지부의 둘째 아들인 양지춘이고, 올해 22살이었다. 22살인데도 결혼하지 않았던 건 첩을 통해 서자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은 가문은 그
그의 이름은 신이었는데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에 대해서 말할 때, 경멸하는 기색을 띠었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모르는 사람까지 모두 침을 뱉으며 뻔뻔하다고 할 정도였다. 알다시피 애인과 야반도주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는 것보다 더 욕먹을 일이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후회하냐고 묻기도 했다. 그녀는 시집간 것을 후회하지 않지만 죄책감을 느끼긴 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시 씨 가문의 명성이 손상되어 형제자매들과 조카들이 혼사에 어려움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신이는 시 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태어날 때부터 온갖 보살핌을 받아왔다. 먹는 것은 물론 모두 산해진미이고, 입는 것도 모두 능라 비단이었다. 게다가 보모님과 오라버니의 총애까지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그녀에겐 한 가지 결함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열네 살 때까지 월사가 오지 않은 것이었다. 많은 의사들을 불러 진찰을 받고 밤낮으로 약을 먹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몸이 차서 그러니 몸조리를 하면 나을 수 있다고 위로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몰래 의사가 부모님께 하는 말을 들었다. 의사는 그가 몸이 차서 그런 병이 생긴 것이 아닌, 아이를 키우는 곳이 어린아이와도 같아서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마치 작은 꽃병과 같아서 꽃을 꽂을 수는 있지만 나무를 심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 건 불가능하다고 비유했다.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건 여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녀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중에 좋은 사람에게 시집가서 부군에게 첩을 들인 후, 첩이 낳은 아이를 친자식처럼 키우라고 조언해주었다.시 씨 가문이라는 후원이 있으면 그녀가 아이를 낳을 수 없어도 아무도 그녀의 지위를 흔들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 씨 가문의 재물은 그녀가 평생 부귀하게 살기에 충분했다. 신이의 조모도 그녀에게 아이를 낳을 수 없으니 자세를 낮춰야 한다고 했다. 시 씨 가문의 딸이라고
추운 겨울이 되자 눈이 내려 성릉관은 하얗게 뒤덮였다. 세상이 마치 깨끗해진 것처럼 보였다. 이황자는 몇 년 동안 너덜너덜한 승복을 입고 발우를 받쳐 들고는, 가는 길에 동냥을 하다가 절을 보면 이틀 묵으며 부처님께 참회하면서 살았다. 사실 그는 원래 있던 절에서 계속 지낼 수 있었다. 편안하진 않지만 풍찬노숙할 필요도 없고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그런 안일한 곳에서는 평생 죄를 씻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계속 길을 걷고 계속 고생해야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했다. 그가 성릉관에 도착했을 때 짚신은 이미 찢겨 있었고 발바닥에는 두꺼운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이제는 신발을 신지 않고도 자갈이 가득한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추운 날씨에는 모든 옷을 껴입어도 추위를 막을 수 없었지만 이미 익숙해진 뒤였다. 그는 눈보라를 맞으며 성릉관에 위치한 감은사로 향했는데, 몇 년 동안 발걸음을 멈춘 적이 없는 탓에 고단함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심지어는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아 그는 눈이 가득 쌓인 길에서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그는 따뜻한 두꺼운 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그가 있는 방에는 숯불이 피워져 있었고, 살짝 열린 창문으로 눈에 눌려 허리가 굽은 나뭇가지가 보였다. 그는 눈동자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렇게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의 마음속에 순간 욕심이 생겨 조금만 더 누워있고 싶어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문이 활짝 열렸다. 그가 벌떡 일어나 앉았는데, 갑자기 눈앞이 핑핑 돌더니 다시 힘없이 침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누워 있거라.” 이때 누군가가 부드러운 말투로 말하면서 약그릇을 그의 침대 옆에 놓았다. 그는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익숙해, 어지러움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돌려보니, 그 사람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서우 형?!’ 그는 자신이 잘못 보았을까 봐 다시 자세히 보려 했지만, 몸이 너무 어지러운
대황자는 봄 사냥 때 숙청제에게 꾸중을 듣고 돌아간 후 앓아누웠다. 당시 이황자와 서우가 모두가 걱정했는데 덕비는 오히려 기뻐했다. 그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황제폐하께서는 분명히 대황자를 싫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덕비는 이황자를 안고 반드시 부지런해야 하고, 태부와 황숙의 말을 잘 듣고 누구보다 잘 배워 황형을 제압해야 한다고 당부까지 했다. 그로 인해 이황자의 마음은 몹시 복잡했다. 덕비가 줄곧 그에게 태자와 황제가 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지 말해주었을 때 비록 그도 마음이 설렜지만 자신과 거리가 먼 얘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금 그와 대황형, 서우 형, 그리고 셋째 동생이 사이가 좋아 도저히 대황형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매일 모순적으로 지내다 보니 오히려 학업이 나빠졌고 승마 연습을 할 때도 여러 번 실수를 했다. 하지만 덕비는 이상하게 그를 탓하지 않았고 며칠 동안 계속 게으르게 하라고 했다. 그렇게 덕비는 이황자를 데리고 복마마를 자주 뵈러 갔고, 복마마 궁전에서 숙청제를 만날 수도 있었다. 덕비는 며칠 동안 그곳을 드나들더니 어느 날 굳은 표정으로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차가운 말투로 청이에게 자신의 보살핌이 없으면 아이가 태어날 수 있는지 보겠다고 했다. 황제폐하를 자주 뵈러 갈 수 없어 아쉬웠지만 이황자는 마음을 가다듬고 공부와 승마술에 전념했다. 이황자는 당시 앞날이 어떻게 될지도 몰랐고, 비록 매일 힘들긴했지만 한편으로는 즐거웠기에, 계속 이렇게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숙청제의 천추세에 승마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니 세 황자와 서우도 가서 겨뤄 보기로 했다. 원래 그런 대회에서 황자들은 재미있게 참석만하면 되지만, 덕비는 그 경기를 몹시 중시했다. 덕비가 이황자에게 마름쇠를 건넬 때, 그는 하늘이 무너져내리는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황자는 원하지 않았다. 그는 절대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대황형의 목숨을 앗으려 하다니, 이황자는 처음으로 어마마마가 무서워졌다.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