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주는 이 일이 두 사람 간에 갈등을 일으킨 것에 대해 아쉬워하며 말했다. “그동안 시만자 아씨는 항상 아씨를 지지해 오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 이번엔 한 번 순응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게다가 지금까지도 평양후부의 하인들 말고는 누가 공방을 방해했다는 증거도 없지 않습니까?”송석석은 잠시 생각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떤 일은 천만번을 대비하는 것보다 한 번이라도 만약의 상황을 염두에 두는 게 중요하단다. 보주야, 나한테 생각이 다 있으니 걱정하지 말거라.”송석석은 턱을 괴고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저녁에 공방에 한 번 가볼 생각이다.”홍소는 옆에서 한참을 말없이 지켜보다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왕비님,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그러자 송석석은 고개를 들어 홍소를 바라보며 말했다. “홍소 네가 같이 갈 필요는 없다. 넌 계속 누군가가 돈을 받고 소문을 퍼뜨린 게 아닌지 알아보거라.”“알겠습니다!” 홍소는 고개를 숙이고 서둘러 나갔다.송석석은 다시 노집사를 불러 풍집사에게 가서 가의가 하인들을 학대한 일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그리고 어떤 하인들이 그 일로 문제가 된 것인지 물어보라고 지시했다.화가 난 시만자는 이리저리 정원을 걷다가 정자에서 노래를 듣고 있는 혜태비를 보았다. 그녀에게 다가가려던 찰나 혜태비는 그 모습을 보고 즉시 가녀에게 물러서라고 한 뒤 고씨 유모에게 말했다. “돌아가자꾸나.”“시만자 아씨가 오셨나이다.” 고씨 유모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 말에 혜태비가 말했다. “그러니 그만 돌아가자니깐! 얼굴이 아주 뾰루퉁해 있지 않느냐! 괜히 건드려서 쓸데없는 소리 듣지 말고 얼른 가자꾸나.”정자에 도착한 시만자는 혜태비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녀도 자신의 행동이 너무 성급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정말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직접 고른 문이 망가졌고, 공방의 간판도 엉망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심 사형이 직접 쓴 글인데 송석석은 아쉬운 마음이 하나도 없는
송석석은 정자 밖으로 나가 장미 한 송이를 꺾어 입에 물고는 연달아 세 바퀴를 돌며 공중제비를 했다. 그리고 난간을 넘어 다시 돌아와 시만자 옆에 앉더니 팔을 펼치며 시만자를 향해 입에 문 장미를 내밀었다. 그의 밝은 눈동자엔 웃음이 가득해졌고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시만자는 손으로 꽃을 낚아채며 뾰로통하게 말했다."이제 그만하거라! 왕비란 사람이 이리저리 공중제비나 돌기나 하고, 체통은 내다 버린 것이냐? 창피하게 말이야.""그러게 내가 왜 우리 시만자 아씨의 기분을 건드려서는!" 송석석이 두 볼에 홍조를 띠며 해맑게 웃었다. "그래서 우리 시만자 아씨, 이제 저를 용서해 주시겠나이까?""애초에 진짜 화난 것도 아니었다. 가자, 공방에 가서 가의나 찾아보자." 시만자는 그녀의 팔을 힘껏 꼬집고는 몽동이를 한 번 흘겨보며 말했다."뭘 그리 웃는 게냐? 그러다 턱 빠지겠다!"몽동이는 눈물을 닦으며 웃음을 터뜨렸다."우스워 죽겠다. 완전 원숭이 같구나."송석석과 시만자는 몽동이를 신경 쓰지 않고 정자를 나섰다.시만자는 뒤에서 송석석의 엉덩이를 발로 툭 차고는 욕설을 퍼부었다."이런 망할 놈."그러자 송석석은 뒤돌아 귀여운 얼굴을 찡그리며 장난쳤다."그래도 내 방도가 먹히지 않았느냐?"시만자도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문득 몽동이의 말이 떠올랐는지 이내 서늘해지더니 눈가가 붉어지며 속이 쓰려왔다. 이렇게 즐겁게 떠드는 것도 오랜만이었지만 말이다. 그들은 소진 소주방의 뒷문으로 들어갔다. 앞문에는 여전히 십수 명의 백성들이 모여 욕설을 퍼붓고 난리를 피우고 있었다. 그들은 문에 돌과 헌 신발을 던지고 오물을 뿌리는 중이었다. 송석석은 들어가자마자 이 부근을 살피던 대둔자에게 상황을 물었다. 그는 이 씨 부인이 보낸 사람이었다. 대둔자가 말하기를 한두 시간 간격으로 사람이 교체되는데 그들 중 백성인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고 일부러 시끄럽게 하러 온 사람도 보인다고 했다.대둔자는 백성들이 소란을 일으키기
편청.손마마가 차를 준비하자마자 가의는 벌컥벌컥 마셔 거의 한 주전자나 마셔버렸다. 배가 고프고 목이 말랐지만 그녀는 사람들이 밀고 들어올까 두려워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손마마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말하였다."며칠 전엔 그래도 열심히 일했으니 내가 국수라도 한 그릇 끓여 주지.""고맙소."가의는 작은 목소리로 울먹이며 손마마가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그녀의 눈은 호두처럼 부어 있어 원래 초췌했던 얼굴이 더욱 처량해 보였다."전당할 수 있는 건 다 전당해서 빚을 갚았다." 그녀의 눈빛은 점차 잠잠해졌다.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라 동정받을 가치가 없다. 허나 내가 평양후부에서 도대체 무슨 악행을 저질렀다고 그러는 것이냐? 시어머니는 나를 좋아하지 않고 서방님도 나를 싫어해서 나에겐 아무런 실권도 없다. 어머니가 살아 계셨을 때는 한 달 중 스무날은 공주부에서 지냈다. 어머니가 사고를 당하고 나서는 고가가 무너져 버려 천민 신분이 되었지. 후부에서 나는 계속 참고 또 참아왔다. 마음속으로 아무리 괴로워도 감히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의 눈물은 점차 얼굴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그 조씨가 집에 들어왔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반대할 자격도 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신경 썼을지도 모른다. 전소환이 집에 들어왔을 때 나는 정말 화가 났었다. 송석석, 내가 이런 얘기를 하면 넌 자업자득이라 생각할 것이겠지. 전소환이 처음에 마음에 둔 사람은 바로 사여묵이니 말이다. 그렇다. 이건 전부 내 업보다."그녀는 소매로 눈물과 콧물을 닦으며 말할 수 없는 억울함과 답답함을 보였다."내가 전소환을 때리고 욕한 적이 있긴 하다. 하지만 그건 그녀가 자초한 일 때문이었다. 그녀는 정말 천박해 어떤 수단도 가리지 않았다. 이런 일은 노부인도 알고 계셔서 노부인께서도 그녀에게 많은 벌을 주셨다.""허나 조씨는 나를 한 번도 적대하지 않았고 집에 들어온 뒤로도 늘 얌전하게 지냈다. 나를 보면 늘 공손히 부인이라고 부르면서 말이다. 만약 조씨의 체면을 보
시만자는 이 가의라는 사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나쁘기도 나빴고, 심지어는 어리석기도 했다. 아마 그녀의 어리석음은 그녀의 어머니인 사온이 살아있을 때 이미 뚜렷하게 드러난 것일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는다면 사온이 그렇게 오랫동안 치밀하게 계획한 일을 왜 그녀에게는 아예 알려주지 않았겠는가?이 생각에 시만자가 무심코 물었다.“네 어머니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그건 왜 묻는 것이냐?”가의는 즉시 경계심을 드러내며 그녀를 노려보았다.“나한테 누명을 씌우고 싶은 것이냐? 그렇다면 생각도 하지 말 거라.”가의가 마치 고슴도치처럼 날을 세우는 모습에 시만자는 더는 그녀를 자극하지 않았고 대신 그녀의 집안 시녀들에 대해 물었다.가의는 시녀들에겐 문제가 없다고 단언하며 모두 그녀의 충실한 하인들이라고 답했다.“나는 쫓겨났지만 그 아이들은 데리고 나오지 않았다. 그 아이들이 후부에 있으면 적어도 박대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노부인은 관대하신 분이니 굳이 나와 함께 고생할 필요 없겠지.”그러자 송석석이 물었다. “전소환이 군주님을 해치려 했을 가능성은 생각해 본 적 없으십니까? 도대체 어떻게 약이 바뀌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전소환은 감히 그러지 못할 것이다.”가의는 확신에 차서 말했다.“매사 나에게 의지하며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그랬을 리가.”“해칠 용기가 없는데 밀고를 했단 말입니까?”가의는 잠시 멈칫했지만 본능적으로 전소환을 변호했다.“아마도 들키는 게 두려워서 그랬던 거겠지. 전소환은 단지 설사약만 썼을 뿐 사람을 해치지는 않았으니.”“어쩜 아량이 그리도 넓은 게냐.”시만자가 비꼬듯 말했다.그러자 가의는 그저 고개만 홱 돌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송석석은 뭔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자손 문제가 걸린 일인데 후부에서는 왜 더욱 철저히 조사하지 않으셨습니까?”가의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노부인은 병에 걸렸고 수씨도 곧 죽을 것처럼 기운이 없었다. 그래서
가의는 수년간 수씨와 얽혔던 은혜와 원한을 떠올렸다.수씨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녀는 깨달았다. 사람이 죽으면 등불이 꺼지듯 모든 것이 사라진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수씨가 그녀를 화나게 했던 많은 일들은 사실 그녀의 잘못이 더 컸건만 가의는 매번 트집을 잡기 일쑤였다.한참을 생각하던 그녀는 깊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사실 그녀는 참 괜찮은 사람이었다. 효성스럽고 너그러웠으며 후작을 위해 장남을 낳았고, 심지어는 수년간 후부의 살림도 총괄했지. 작년에 유산하지 않았더라면 몸 상태가 이렇게 악화되진 않았을 것이다.”“… 작년에 유산을 했단 말이냐?” 시만자가 물었다.“그렇다. 그녀는 원래 체질이 좋지 않았다. 의원이 임신은 피하라고 당부했는데 하필 그 시기에 또 아이를 가졌던 것이다. 태아가 선천적으로 약해 결국 지키지 못했고 유산 이후 몸이 더 상하게 되었다. 그 일이 없었다면 이렇게 젊은 나이에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송석석은 문득 노 집사가 풍 집사에게 물었을 때 풍 집사가 이런 일은 언급하지 않았던 것을 떠올렸다. 그는 그저 그녀가 둘째 아이를 낳을 때 병을 얻었다고만 말한 것을 들었다. 즉, 풍 집사는 많은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 집사에게 일부만 전한 것이 분명했다.시만자는 속으로 탄식하며 수씨는 정말 좋은 사람일 거라고 다시금 믿었다. 악독하고 깐깐한 가의조차 그녀를 좋게 평가한다면 그건 진심일 것이 분명한데, 그렇게 총명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 아이를 낳고 몸이 망가졌으니, 참으로 아쉬울 뿐이다.시만자가 다시 물었다.“정말 하인을 죽인 적은 없는 것이냐?”가의는 억울한 표정으로 답했다.“때리고 꾸짖은 적은 있어도 죽인 적은 없다. 허나 노부인이 싫어해서 자주 그런 것도 아니다. 게다가 내 곁에는 대부분 내 지참금으로 데려온 사람들 아니겠느냐? 내가 굳이 내 사람에게 그럴 이유가 뭐 있겠느냐?”마차로 돌아가는 길에 시만자는 가의를 내쫓겠다는 말을 더는 꺼내지 않았다.송석석이 말했다.“우리가 의
풍 집사와 대화를 끝낸 노 집사는 가의가 실제로 하인을 학대하고 구타한 적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풍 집사가 수씨에 대해 이야기하며 한바탕 눈물을 쏟았다고 했다.수씨는 평양후부에서 매우 인망이 높았으며 가의가 아니었더라면 정실 자리를 차지했을지도 모른다면서 말이다.홍시도 돌아왔지만 별다른 단서를 얻지 못했다. 그녀는 평양후부의 하인들에게도 물었지만 그들은 철저히 침묵했다.단 가의에게 학대당했다고 주장하는 몇몇 사람들 외에는 누구도 가의에 대해 나쁜 말을 하지 않았다.이로써 평양후부의 하인 관리와 내부 사생활 보호가 철저하다는 것이 드러났다.그러니 오히려 몇몇 사람이 의도적으로 가의를 비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평양후부에서는 별다른 단서를 못 찾았지만 이번 외부에서 퍼진 유언비어는 몇몇 거자들이 공방을 비난하는 글을 쓰면서 시작된 것이었어요.”“거자들이라니? 그들이 누구란 말이냐?”“조사해 보니 모두 제상서의 제자들이었습니다.”“제상서?”시만자는 한동안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네, 이부상서이자 황후의 부친이다.”“그 사람이구나.” 송석석이 말하고 나서야 기억이 난 시만자는 점점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근데 왜 그런 짓을 한 거지?”송석석이 담담히 말했다.“여인들의 권익을 위해 목소리를 내고 길을 열어주는 일은 원래 황후의 일이지 않더냐.”“허나 황후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비난받기 딱 좋은 일에 황후가 왜 나선단 말이냐?”“지금은 비난받기만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공방도 인정받을 날이 올 것이야.그렇게 되면 내가 북명왕비로서 황후의 자리를 위협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그랬겠지.”홍시가 동의하며 말했다.“맞습니다. 황후는 가만히 있어도 국모로서 백성의 지지를 받고 있지만 만약 왕비가 나서서 이런 일을 성공시킨다면 황후의 위상이 흔들릴 테니까요.”시만자가 화를 내며 말했다.“그럼 그냥 지지한다고 하면 되지 않더냐!”“지금 황후는 태자가 정해지기 전이라 비난을 감당할 여유가 없어.”“본인은 아무것도
밤이 깊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여묵은 사람을 시켜 상서부로 방문첩을 보냈다.“내 사제와 맞서려 들다니 오늘 밤 제대로 눈 붙일 생각은 하지 말라고 전해라.”송석석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내일 저도 함께 동행해 제대부인께 인사를 드리는 것이 좋겠군요.”“좋소.”사여묵은 그녀를 품 안에 끌어안고는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나지막이 말했다. “사월이 되었건만 우리가 단 하루도 들놀이를 나간 적이 없다네. 나와 혼인하고 고생만 하게 해서 매번 송구스러울 뿐이오.”송석석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기대고는, 문득 그가 산에서 굴러내리던 일이 떠올라 웃음을 터트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그때처럼 또 썰매를 타고 싶은 겁니까? 하지만 지금은 눈도 없을 텐데 말입니다.”“아니오, 아니오!”사여묵은 크게 당황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을 더는 듣지 않겠다는 듯 강렬하게 입을 맞추며 말문을 닫아버렸다.마침 야식을 들고 들어온 궁녀 영씨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황급히 뛰쳐나가는 보주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두 사람은 부딪힐 뻔했지만 궁녀 영씨는 웃으며 보주를 나무랐다.“어쩜 이렇게 덜렁대느냐?”궁녀 영씨는 몇 발짝 걸어 방 안으로 들어갔다. 가리개를 젖히는 순간 궁녀 영씨는 그 자리에서 몸을 홱 돌리더니 이내 야식 쟁반을 들고 방을 나섰다.하긴 저런 상황에 야식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겠지. 궁녀 영씨는 살며시 문을 닫으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별빛이 가득했고 초승달은 옅은 구름 속에 숨어 쑥스러운 듯 세상과 마주하길 꺼리는 듯했다.…제부.제상서는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태사 의자에 앉아 있었다.한밤중에 북명왕이 방문첩을 보냈으니 그가 불쾌함을 느끼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예의가 있다고 하기엔 밤중에 방문첩을 보냈고 예의가 없다고 하기엔 하필 밤중에 방문첩을 보냈으니 무슨 일 때문인지 제상서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이번 일은 평양후부에서 먼저 문제를 일으킨 것이라 보통 사람은 평양후부에서 멈췄을 것이겠지만, 북명왕
송석석은 그녀가 진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성의 없는 말과 진심을 구분하는 건 그녀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대부인께서는 황후마마의 생모이십니다. 만약 소진 소주방이 황후마마께서 주도하시는 사업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입니다.”제대부인은 살짝 멈칫하며 말했다.“왕비님, 소진 소주방만 성공한다면, 장차 역사가 기억할 대업이 될 것입니다. 이미 시작하셨으니 난관이 있더라도 왕비님께는 그리 어렵지 않을 거라 믿습니다.”송석석이 부드럽게 답했다.“쉬운 일이기도 하고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결국 모두 관념을 바꾸는 일 아니겠습니까?”제대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정말 쉽지 않은 일이군요. 하지만 왕비님께서 이미 온갖 비난을 감수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찌 황후마마와 공을 나누려 하십니까?”송석석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이 일에서 공로를 논하는 건 너무 속된 일이라 생각합니다. 순조롭게 시행되는 것이 백성을 위한 대업 아니겠습니까?”제대부인은 그녀의 담대한 답변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한참을 침묵하더니 마침내 감탄하며 말했다.“왕비님이 이처럼 넓은 아량과 안목을 가지셨다니 참으로 귀합니다.”“대부인께서 황후마마께 이 말씀을 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송석석은 목적을 가지고 이곳에 왔다. 여학이 태후의 지원을 받고 있으니 공방도 황후가 주도한다면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었다. 제대부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감사합니다, 왕비님. 제가 황후마마께 전하겠습니다.”하지만 제대부인의 평온한 목소리를 듣자, 송석석은 황후가 이 일에 관심을 가질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직감했다.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묻기로 했다.“만약 황후마마께서 흥미를 보이지 않으신다면 대부인께서 관심이 있으십니까?”두 사람은 정자에 이르렀고 자리에 앉은 제대부인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저는 집안일에 얽매여 왕비님의 기대에 부응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그 말에 송석석도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기대에 부
이튿날 아침, 송석석은 경위부로 돌아갔는데, 회왕비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이번에 회왕이 진성으로 잡혀왔을 때, 그의 아들은 아직 잡히지 않았기에 목종욱은 여전히 병사들을 이끌고 회왕의 아들을 수색하고 있었다.회왕비는 자신의 아들도 왕표처럼 요참형에 처형당할까 봐 걱정되어 급하게 송석석을 찾아온 것이다.사실 전에 회왕이 진성으로 압송되었을 때에도 회왕비가 란이를 찾아가 송석석에게 도움을 청해보라고 시켰지만 란이는 단호하게 거절했었다. 심지어 송석석 앞에서 단 한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기에, 송석석도 석소 사저를 통해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회왕비가 재빨리 송석석에게 다가가 조급한 표정으로 말했다.“석석아! 이모가 너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 일단 조용한 데 가서 얘기 좀 할까?”“지금 처리할 일이 많아서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송석석이 돌아서서 떠나려고 하자 회왕비는 얼른 두 팔을 활짝 벌려 다시 그녀의 앞을 막았다.“몇 마디만 하면 돼. 네가 네 사촌 오라버니를 좀 살려주면 안 돼? 네 사촌 오라버니는 아무 잘못이 없어. 걔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어. 전부 걔 아버지 때문에 벌어진 일이야. 제발 네가 좀 구해줘!”송석석은 눈시울이 붉어진 회왕비를 보며 예전에 외할아버지가 진성으로 돌아와 관아에 갇혀 있었을 때 회왕비가 단 한번도 외할아버지를 보러 가지 않았던 일이 떠올랐다.송석석은 이기적이고 냉정하며 나약한 회왕비와 단 한 마디도 섞고 싶지 않았으며 회왕비를 슬쩍 피해 경위부 안으로 들어갔고 경위대에게 회왕비를 쫓아내라고 지시했다.이때 등 뒤에서 회왕비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석석아, 너 어찌 이리 인정머리가 없을 수 있느냐? 네가 어렸을 때 이모가 너에게 얼마나 잘해줬는데 벌써 다 잊은 거야?”송석석이 뒤도 안 돌아보자 회왕비는 더욱더 큰소리로 외쳤다.“송석석, 네 어머니는 나를 제일 사랑하고 아꼈다! 네가 날 이렇게 모른 척하면 분명 네 어머니 상심이 클 것이다!”자신의 어머니가 언급되자, 걸음을 멈춘 송석석은 싸늘하게 굳은
한편, 송석석은 서재에서 편지 한 장을 쓴 뒤, 편지를 염구진에게 주면서 사람을 시켜 남강에 있는 사여묵에게 전달하라고 했다. 송석석은 현재 남강의 상황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빅토르는 병사들만 끌어 모을 뿐 공격도 하지 않고 물러서지도 않은 채 대치를 하고 있었다. 빅토르가 시간을 끌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남강 전쟁에 참여하겠다고 황제에게 먼저 얘기한 빅토르는 전쟁을 이기지 못하면 군령에 의해 처벌을 받겠다는 서약서까지 썼지만 사청엄이 반역에 성공하지 못했기에 빅토르에게 성을 나눠줄 수 없었고 빅토르도 공을 세울 수 없었다.이대로 섣불리 자신의 나라로 돌아갔다가 자신이 쓴 서약서 때문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빅토르는 초원과 연합하여 자신의 퇴로를 확보하려고 했지만 초원은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초원은 애초부터 전쟁을 싫어했을 뿐만 아니라 중간에 끼어 마음을 졸이면서 어렵게 생존하고 있었기에 반드시 중립을 유지해야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만약 둘 중 한 나라를 반드시 선택해야 한다면 초원은 반드시 상국을 선택할 것이다.전에 사제가 송석석에게 보낸 서신에 의하면 남강 병사들은 빅토르를 확실하게 공격하여 다시는 전쟁을 일으킬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 거라고 했다.송석석이 생각에 잠겨 있었던 그때, 시만자가 문을 두드렸다.“석석아!”“들어와.”송석석의 말에 시만자가 최숙심과 함께 방으로 들어왔다.“최씨께서 너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고 하셔서 모시고 왔어.”최숙심은 한걸음 앞으로 다가가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왕비님, 그동안 신경 써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제가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까요?”송석석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농담을 던졌다.“전 여색을 즐기지 않으니 몸으로만 갚지 않으시면 됩니다.”송석석은 분위기가 무거워지는 게 싫어서 농담을 하자, 흠칫하던 최숙심도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시만자는 잠깐 앉아있다가 왕경루로 가야 한다고 방을 나섰다. 종문파와 시씨 가문 사람들은
오후 3시 정각, 커다란 판대기가 처형장에 올라왔다. 철로 만들어진 판대기는 매우 단단했으며 상국에서 요참형에 쓰이는 유일한 판대기였기에, 오랫동안 방치되어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었다.문엄 황제 때 요참형이 너무 잔인하다는 평가가 많았기에 죄가 아무리 중한 범인이라고 해도 요참형을 내리지 않았다.하지만 이 형이 현재까지 폐지되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반역자에게 겁을 주기 위한 것이다.요참형을 처형할 때 백성들에게 보여주지 않는 게 원칙이지만 국정을 어지럽히고 역적들과 손을 잡고 나라를 배신한 건 역천 대죄이기에 이러한 방식으로 반역의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들에게 겁을 주려고 했다.왕표는 이내 입고 있던 옷이 전부 벗겨졌고 관원 부하 두 명이 왕표를 판대기에 눕혀 어깨를 꾹 누른 뒤 꿈쩍도 못하게 제압했다.공포에 질린 왕표는 순간 정신을 잃은 채 기절했고 망나니가 대도를 치켜 들자 대부분 사람들이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구경꾼들과 달리 영군오아과 연왕 등 사람들은 전방을 직시하게 고정되어 있었기에 고개를 돌릴 수 없었고 눈을 꼭 감은 채 온몸을 덜덜 떨었다.연왕은 그 중에서 가장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 망나니가 대도를 든 순간 눈을 꽉 감은 연왕은 심지어 비명까지 질렀다.하지만 겁을 먹은 사람들과 달리 추몽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전방만을 직시했다.망나니의 대도가 왕표의 허리를 자른 순간에도 추몽의 표정은 한 치의 변화도 없었다.왕표에 이어 고청우가 처형당할 때에도 그는 눈을 피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비명소리나 흐느끼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듯 왕표와 고청우가 발버둥 치다가 완전히 의식을 잃을 때까지 빤히 지켜 보았다.한편, 왕청여는 왕표가 처형되기 전에 노부인을 데리고 이미 처형장을 떠났고, 최숙심은 처형이 끝나고 나서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최숙심은 결국 왕표가 처형당하는 모습을 보지 않았다. 눈을 꼭 감고 있다가 주변에 모여 있던 백성들이 왕표가 죽었다는 말에 그제야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가족들이 시체를 거둬가지 않으면
경위대가 노부인과 최숙심 그리고 왕청여를 처형장 안으로 호송했고 다리에 힘이 쫙 풀린 노부인은 온몸을 덜덜 떨면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이 멍청한 놈아! 넌 우리 집안 조상님들과 네 아버지의 얼굴을 보기 창피하지도 않아? 이제 하늘나라로 가면 어떻게 마주하려고 이런 짓을 저지른 거야!”그러고는 노부인은 엉엉 울면서 왕표의 뺨을 강하게 내리쳤다.한편, 감당할 수 없는 공포에 영혼이 나간 왕표는 어머니를 보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소리를 질렀다.“어머니, 저를 구해주세요! 제발 저를 구해주세요! 전 이대로 죽고 싶지 않다고요!”“네가 이렇게 큰 죄를 저질렀는데 내가 무슨 수로 너를 구해? 황제 폐하께서 너를 얼마나 중히 여기고 믿어줬는데 네가 어찌 이런 배은망덕한 짓을 저지른단 말이냐!”“어머니, 저 정말 잘못했어요. 제 죄를 다 뉘우쳤어요. 다시는 그러지 않을 거예요! 나라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울게요. 제발 이 아들을 살려주세요!”왕표가 오열했지만 노부인은 그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이때, 곁에 서있던 최숙심이 직접 만든 음식과 술을 꺼내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당신과 나 사이에 부부의 연은 끝났지만 어머님과 아이들은 제가 잘 돌볼게요. 그러니 걱정 말고 떠나세요.”왕표는 담담하게 말을 하는 최숙심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네가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와! 서방을 배신한 천박한 년! 감히 나에게 부부의 연을 운운해?”“그래요. 저희는 이제 부부가 아닙니다. 그러니 앞으로 각자 갈 길을 가는 게 좋겠지요.”“나쁜 년!”왕표가 잔뜩 분노한 목소리로 외치자, 이를 들은 백성들이 너도나도 최숙심을 불쌍하게 여겼다. 평생 전전긍긍하면서 왕표를 위해 아들과 딸을 낳고 집안일을 처리하면서 시부모에게도 최선을 다했는데 결국 저런 말을 듣다니.뒤로 한 걸음 물러난 최숙심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편, 고청우는 왕씨 가문의 일에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모여 있는 백성들을 자세하게 쓱 훑었다. 이제 곧 죽을 텐데 정말 아무도
그렇게 한참 지나고 나서야 눈물을 그친 노부인은 결국 왕표를 구하는 일은 포기했지만, 그의 형이 집행되기 전에 최후의 만찬을 직접 먹일 것이라고 고집을 부리기 시작했다. 노부인의 눈은 퉁퉁 부었고, 목소리도 심하게 갈라져 있었다.“형이 집행되기 전에 범인은 가족들을 마지막으로 한 번 만날 수 있다는 걸 알아. 그러니까 이것만 하게 해줘. 아들이 마지막으로 배불리 먹고 길을 떠날 수 있게 해줘.”노부인은 다시 최숙심을 쳐다보며 말을 이어갔다.“며느리 너도 자식이 있으니 부모의 마음을 이해할 거야. 세상 사람들 눈에 걔가 백 번 죽어 마땅한 나쁜 놈이라고 해도 나에게는 그저 한없이 어린 아이일 뿐이야.”한참동안 침묵하던 최숙심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어머님, 형이 집행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만난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아시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집행장에서 아들이 요참형을 당하는 모습을 정말 직접 보실 수 있으시겠습니까?”노부인은 온몸을 덜덜 떨면서 대답했다.“네가 가서 북명 왕비에게 부탁을 좀 해보거라. 난 감옥에 가서 아들을 만나고 싶다.”노부인의 말에 고청락이 어이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참 말씀을 쉽게 하시네요. 어머님께서 부탁하면 왕비님께서 무조건 그 부탁을 들어줘야 하시는 겁니까?”“어머님, 전 그런 부탁을 드릴 수 없습니다. 이 일은 왕비께서 결정할 수 있는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최숙심이 대답하자 노부인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술을 꽉 깨문 채 말했다.“집행장이라도 갈 것이다. 절대 내 아들을 굶겨서 하늘나라로 보낼 수는 없어.”“어머니, 오라버니는 안 굶어요. 형이 집행되기 전에 감옥에서 오라버니에게 맛있는 밥을 준비해줄 거예요. 심지어 술도 준비해준다고 들었어요.”왕청여의 말에도 노부인은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그건 달라!”최숙심이 계속 한숨을 살짝 내쉴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곁에서 지켜보던 모종윤이 고청락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집행 당일 날이 되었고, 하늘은 한없이 맑았다.문엄
궁으로 들어가 황제에게 자초지종을 보고하자, 최숙심의 딱한 사정을 운운하면서 그녀의 선한 마음씨 또한 찬양했다.그녀의 삶도 이토록 엉망진창인데 힘든 사람들에게 죽도 나눠주고 갈 곳 없는 여인들을 소주방에서 지내게 도와준 사실들을 일일이 읊으면서 감탄했다. 솔직히 숙청제에게는 지금 최숙심처럼 백성들을 교화할 수 있는 모범적인 사람이 필요했다. 때문에 바로 어명을 내려 그녀에게 순금 백 냥과 집 한 채까지 하사했다. 그리고 유방 당했던 왕씨 가문 남자들도 남강 전쟁만 끝나면 북명왕과 함께 진성으로 돌아오는 것에 허락했다.그렇게 최숙심은 죽을 고비를 넘어 인생 역전까지 이뤄냈다!한편, 왕표에게는 요참형이 내려졌고 역적과 손잡고 왕표를 선동한 고청우에게도 똑같은 형을 내렸다. 그러자 숙청제는 예전에 고씨 가문 여인들을 살려준 일이 후회되었다. 고청우를 진작 감옥에 가뒀다면 남강에 이렇게 큰 화란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니 말이다.이후 숙청제는 척귀에게 걱정되니깐 암자에 가끔 가보라고 했는데, 이는 실은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송석석은 척귀를 보자마자 황제가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지 바로 알아차리고는, 사람을 보내 고씨 여인들에게 고청우의 형이 집행될 때 고청우와의 옛정 때문에 잘못된 행동을 저지르지 말라고 확실하게 당부했다.한편, 소주방에 있는 노부인은 자신의 아들인 왕표가 결국 체포되었고 요참형을 받는다는 소식에 큰 충격을 받은 채, 죄 없는 왕청여와 최숙심에게 손가락질을 하면서 갖은 욕설을 퍼부으며 화풀이를 했다. 노부인은 두 사람이 어떻게 가족이며, 서방인 왕표를 배신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점점 더 흥분하다가 결국 최숙심과 왕청여의 뺨을 강하게 내리쳤다.그리고는 지금 당장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왕표를 구해내라고 억지를 부렸다.최숙심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노부인에게 노여움을 풀라고 빌었지만, 노부인은 오히려 점점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최숙심도 더 이상 참지 못해 벌떡 일어나 주막에서 칼을 가져오더니 바닥에 툭 던졌다
왕표는 중범죄자이기에 바로 대리사로 이송되어야 하지만, 송석석은 그를 일단 경위부로 압송했다. 경위부에서 심문을 마친 후, 어전에 보고를 올리며 최숙심의 공을 황제에게 잘 얘기한다면,왕준과 현이 하루 빨리 진성으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더군다나 고청우도 아직 경위부에 갇혀 있기에 왕표와 고청우가 만난다면 더욱 많은 일들을 알아낼 수도 있었다.그렇게 고청우와 왕표는 같은 곳에 갇혔으며, 중간에 나무 울타리 하나를 세워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고청우와 왕표가 서로 눈이 마주치자,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으며 왕표가 먼저 이를 갈면서 마구 소리를 질렀다.“천박한 놈! 결국 네 놈 꼴도 이렇게 되었구나! 드디어 벌을 받은 게야!”그러자 고청우가 실눈을 살짝 뜨며,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비아냥거렸다.“내가 천박한 년이면 왕표 너는 뭔데? 나도 벌을 받았지만 너도 결국 이렇게 갇혀 있잖아! 넌 뭐 다를 것 같아?”“이게 다 네 놈 때문이야!”왕표가 울타리 사이로 손을 뻗어 고청우를 잡으려고 허우적거렸고 뒤로 살짝 물러난 고청우는 오아표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코웃음을 쳤다.“버러지 같은 놈!”“네 놈이 감히…! 지금 뭐라고 했느냐! 네 놈이 역적과 손잡고 날 꼬셔서 야반 도주하게 만들지 않았다면 난 지금 남강 원수의 신분으로 잘 살고 있었을 거야! 절대 이런 꼴을 당할 리 없었을 거라고!”왕표가 씩씩거리며 소리를 지르자 고청우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널 꼬셨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넌 결국 죽음이 두려워서 그런 선택을 한 거야. 넌 내가 무엇인가 노리고 접근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잖아. 그런데 내가 아이까지 낳으니 이제 날 곁에 묶어 둘 수 있겠다고 확신한 거지. 이 세상 모든 여자들이 네 본처처럼 아이들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줄 알아? 가족애라는 건 이 세상에서 가장 우스운 거야. 그딴 걸로 날 묶어 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멍청한 놈! 내가 널 버리고 갈 때 분명하게 얘기했잖아. 넌 무능하고 무술 실력도 보잘것없는데
한편, 송석석은 시만자를 데리고 일반 손님으로 위장한 채 직접 보화사로 향했다. 보화사에 도착한 뒤 절을 올리고 초를 꽂고는 주지 스님을 찾아 신분을 밝힌 뒤, 여람 스님에 관해서 물었다.주지 스님은 바로 지객 스님을 불러왔다. 각지 스님들이 보화사에 찾아와 며칠 묵고 갈 때마다 지객 스님이 그자들을 모셨기 때문에 자세한 상황을 제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보화사는 진성 3대 절 중의 하나일 정도로 꽤 유명했기에, 매년 보화사에 찾아와 경을 들으면서 며칠동안 이곳에 묵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많아도, 실제로 이곳에 머물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었다. 지객 스님은 여람 스님에 대해 인상이 꽤 깊었다. 수련의 경지가 그리 높지 않았기에 원칙대로라면 이곳에서 지낼 수 없는데 몇 년 전부터 남강에서 죽은 이의 영혼들을 제도했기에 그 자비로운 마음을 높이 평가하고 덕행도 많이 쌓았기에 지객 스님은 의례적으로 여람 스님을 받아준 것이다.“며칠동안 매일 여람 스님께서 밖에 돌아다니셨습니다. 진성 내에 전란이 일어나 사상자가 많았기에 여람 스님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죽은 이들의 영혼을 제도하느라 고생이 많았습니다.”지객 스님은 여람 스님을 매우 좋게 평가했다. 송석석은 그런 지객 스님의 말을 조용하게 듣고 있을 뿐, 반박하지는 않았다.그러고는 지객 스님에게 여람 스님을 만나보고 싶다고 얘기하며, 여람 스님을 존경하는 마음에 돈을 기부하며 여람 스님을 위해 따로 절 하나를 지어주고 싶다는 말도 함께 전해달라고 했다.한편, 지객 스님은 송석석과 시만자의 신분을 알지 못했지만, 두 사람이 수수한 옷차림과 달리 기품이 넘쳐 흘렀기에 모 훈작 세가의 부인이나 아가씨일 것이라고 추측해,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후 바로 왕표에게 말을 전했다.왕표는 자신을 찾아온 자가 있다는 말에 흠칫 놀랐다가 절을 만들어주며 돈까지 기부하겠다는 소식에 바로 표정이 환하게 바뀌었다.평서백이었던 왕표는 가문의 번영을 위해 절에 돈을 기부하는 명문 가문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렇게
이내 표정을 숨긴 최숙심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얼른 가십시오. 돈을 구하면 바로 서방님을 찾으러 가겠습니다. 아, 그리고 요즘 진성 순찰이 삼엄하니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마십시오.”왕표는 자신을 걱정하는 최숙심의 말을 듣자, 그녀가 밖에서 아무리 대단한 여인이라고 불려도 결국 자신에게 만큼은 마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뿌듯함에 경계심이 완전히 풀렸다.“최대한 3일 안에 마련해주면 고맙겠소.”그러자 최숙심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그건 안 됩니다. 지금 상황이 어려운데, 어떻게 3일 안에 그 큰돈을 마련할 수 있겠습니까?”“우리 딸 지아가 지금 북명 황실에서 지내고 있지 않소? 그러니 난 부인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믿소. 부인의 소식을 기다리겠소. 그리고 내가 부인을 찾아왔다는 말은 아무한테도 하지 마오. 어머니와 왕청여한테도 얘기해서는 안 되오!”말을 마친 왕표는 삿갓을 쓰고는 돌아서서 빠르게 떠났다.표정이 확 어두워진 최숙심은 그를 얼른 따라갔지만 골목 밖에도 순찰하는 경위대가 보이지 않았기에 섣불리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왕표는 궁지에 몰린 순간 백성들을 인질로 잡아 어떻게든 진성을 벗어나려고 할 것이고 만에 하나 왕표가 진성을 빠져나가게 되면 그를 찾아내는 건 더 어려워질 것이다.최숙심은 빠른 걸음으로 소주방에 돌아와 석소를 구석으로 불렀다.“석소 아가씨, 얼른 왕비에게 찾아가서 왕표 그자가 보화사에 여람 스님 신분으로 위장하여 숨어있다고 전하시오.”“네, 지금 바로 다녀오겠습니다.”그렇게 석소가 돌아서서 소주방을 떠나려던 그때, 최숙심이 그를 불러 세웠다.“잠깐만요! 왕비님께 너무 대놓고 보화사에 왕표를 잡으러 가지는 말라고 전해주세요. 저에게 거짓말을 한 것일 수도 있으니 일단 몇 사람만 데리고 가서 상황만 파악해보시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전하세요.”현재 수색이 삼엄해서 왕표는 더 이상 도망갈 곳도 없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조심해야 한다. 이는 최숙심이 공을 세울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고 단번에 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