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주는 이 일이 두 사람 간에 갈등을 일으킨 것에 대해 아쉬워하며 말했다. “그동안 시만자 아씨는 항상 아씨를 지지해 오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 이번엔 한 번 순응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게다가 지금까지도 평양후부의 하인들 말고는 누가 공방을 방해했다는 증거도 없지 않습니까?”송석석은 잠시 생각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떤 일은 천만번을 대비하는 것보다 한 번이라도 만약의 상황을 염두에 두는 게 중요하단다. 보주야, 나한테 생각이 다 있으니 걱정하지 말거라.”송석석은 턱을 괴고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저녁에 공방에 한 번 가볼 생각이다.”홍소는 옆에서 한참을 말없이 지켜보다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왕비님,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그러자 송석석은 고개를 들어 홍소를 바라보며 말했다. “홍소 네가 같이 갈 필요는 없다. 넌 계속 누군가가 돈을 받고 소문을 퍼뜨린 게 아닌지 알아보거라.”“알겠습니다!” 홍소는 고개를 숙이고 서둘러 나갔다.송석석은 다시 노집사를 불러 풍집사에게 가서 가의가 하인들을 학대한 일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그리고 어떤 하인들이 그 일로 문제가 된 것인지 물어보라고 지시했다.화가 난 시만자는 이리저리 정원을 걷다가 정자에서 노래를 듣고 있는 혜태비를 보았다. 그녀에게 다가가려던 찰나 혜태비는 그 모습을 보고 즉시 가녀에게 물러서라고 한 뒤 고씨 유모에게 말했다. “돌아가자꾸나.”“시만자 아씨가 오셨나이다.” 고씨 유모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 말에 혜태비가 말했다. “그러니 그만 돌아가자니깐! 얼굴이 아주 뾰루퉁해 있지 않느냐! 괜히 건드려서 쓸데없는 소리 듣지 말고 얼른 가자꾸나.”정자에 도착한 시만자는 혜태비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녀도 자신의 행동이 너무 성급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정말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직접 고른 문이 망가졌고, 공방의 간판도 엉망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심 사형이 직접 쓴 글인데 송석석은 아쉬운 마음이 하나도 없는
송석석은 정자 밖으로 나가 장미 한 송이를 꺾어 입에 물고는 연달아 세 바퀴를 돌며 공중제비를 했다. 그리고 난간을 넘어 다시 돌아와 시만자 옆에 앉더니 팔을 펼치며 시만자를 향해 입에 문 장미를 내밀었다. 그의 밝은 눈동자엔 웃음이 가득해졌고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시만자는 손으로 꽃을 낚아채며 뾰로통하게 말했다."이제 그만하거라! 왕비란 사람이 이리저리 공중제비나 돌기나 하고, 체통은 내다 버린 것이냐? 창피하게 말이야.""그러게 내가 왜 우리 시만자 아씨의 기분을 건드려서는!" 송석석이 두 볼에 홍조를 띠며 해맑게 웃었다. "그래서 우리 시만자 아씨, 이제 저를 용서해 주시겠나이까?""애초에 진짜 화난 것도 아니었다. 가자, 공방에 가서 가의나 찾아보자." 시만자는 그녀의 팔을 힘껏 꼬집고는 몽동이를 한 번 흘겨보며 말했다."뭘 그리 웃는 게냐? 그러다 턱 빠지겠다!"몽동이는 눈물을 닦으며 웃음을 터뜨렸다."우스워 죽겠다. 완전 원숭이 같구나."송석석과 시만자는 몽동이를 신경 쓰지 않고 정자를 나섰다.시만자는 뒤에서 송석석의 엉덩이를 발로 툭 차고는 욕설을 퍼부었다."이런 망할 놈."그러자 송석석은 뒤돌아 귀여운 얼굴을 찡그리며 장난쳤다."그래도 내 방도가 먹히지 않았느냐?"시만자도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문득 몽동이의 말이 떠올랐는지 이내 서늘해지더니 눈가가 붉어지며 속이 쓰려왔다. 이렇게 즐겁게 떠드는 것도 오랜만이었지만 말이다. 그들은 소진 소주방의 뒷문으로 들어갔다. 앞문에는 여전히 십수 명의 백성들이 모여 욕설을 퍼붓고 난리를 피우고 있었다. 그들은 문에 돌과 헌 신발을 던지고 오물을 뿌리는 중이었다. 송석석은 들어가자마자 이 부근을 살피던 대둔자에게 상황을 물었다. 그는 이 씨 부인이 보낸 사람이었다. 대둔자가 말하기를 한두 시간 간격으로 사람이 교체되는데 그들 중 백성인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고 일부러 시끄럽게 하러 온 사람도 보인다고 했다.대둔자는 백성들이 소란을 일으키기
편청.손마마가 차를 준비하자마자 가의는 벌컥벌컥 마셔 거의 한 주전자나 마셔버렸다. 배가 고프고 목이 말랐지만 그녀는 사람들이 밀고 들어올까 두려워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손마마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말하였다."며칠 전엔 그래도 열심히 일했으니 내가 국수라도 한 그릇 끓여 주지.""고맙소."가의는 작은 목소리로 울먹이며 손마마가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그녀의 눈은 호두처럼 부어 있어 원래 초췌했던 얼굴이 더욱 처량해 보였다."전당할 수 있는 건 다 전당해서 빚을 갚았다." 그녀의 눈빛은 점차 잠잠해졌다.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라 동정받을 가치가 없다. 허나 내가 평양후부에서 도대체 무슨 악행을 저질렀다고 그러는 것이냐? 시어머니는 나를 좋아하지 않고 서방님도 나를 싫어해서 나에겐 아무런 실권도 없다. 어머니가 살아 계셨을 때는 한 달 중 스무날은 공주부에서 지냈다. 어머니가 사고를 당하고 나서는 고가가 무너져 버려 천민 신분이 되었지. 후부에서 나는 계속 참고 또 참아왔다. 마음속으로 아무리 괴로워도 감히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의 눈물은 점차 얼굴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그 조씨가 집에 들어왔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반대할 자격도 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신경 썼을지도 모른다. 전소환이 집에 들어왔을 때 나는 정말 화가 났었다. 송석석, 내가 이런 얘기를 하면 넌 자업자득이라 생각할 것이겠지. 전소환이 처음에 마음에 둔 사람은 바로 사여묵이니 말이다. 그렇다. 이건 전부 내 업보다."그녀는 소매로 눈물과 콧물을 닦으며 말할 수 없는 억울함과 답답함을 보였다."내가 전소환을 때리고 욕한 적이 있긴 하다. 하지만 그건 그녀가 자초한 일 때문이었다. 그녀는 정말 천박해 어떤 수단도 가리지 않았다. 이런 일은 노부인도 알고 계셔서 노부인께서도 그녀에게 많은 벌을 주셨다.""허나 조씨는 나를 한 번도 적대하지 않았고 집에 들어온 뒤로도 늘 얌전하게 지냈다. 나를 보면 늘 공손히 부인이라고 부르면서 말이다. 만약 조씨의 체면을 보
시만자는 이 가의라는 사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나쁘기도 나빴고, 심지어는 어리석기도 했다. 아마 그녀의 어리석음은 그녀의 어머니인 사온이 살아있을 때 이미 뚜렷하게 드러난 것일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는다면 사온이 그렇게 오랫동안 치밀하게 계획한 일을 왜 그녀에게는 아예 알려주지 않았겠는가?이 생각에 시만자가 무심코 물었다.“네 어머니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그건 왜 묻는 것이냐?”가의는 즉시 경계심을 드러내며 그녀를 노려보았다.“나한테 누명을 씌우고 싶은 것이냐? 그렇다면 생각도 하지 말 거라.”가의가 마치 고슴도치처럼 날을 세우는 모습에 시만자는 더는 그녀를 자극하지 않았고 대신 그녀의 집안 시녀들에 대해 물었다.가의는 시녀들에겐 문제가 없다고 단언하며 모두 그녀의 충실한 하인들이라고 답했다.“나는 쫓겨났지만 그 아이들은 데리고 나오지 않았다. 그 아이들이 후부에 있으면 적어도 박대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노부인은 관대하신 분이니 굳이 나와 함께 고생할 필요 없겠지.”그러자 송석석이 물었다. “전소환이 군주님을 해치려 했을 가능성은 생각해 본 적 없으십니까? 도대체 어떻게 약이 바뀌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전소환은 감히 그러지 못할 것이다.”가의는 확신에 차서 말했다.“매사 나에게 의지하며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그랬을 리가.”“해칠 용기가 없는데 밀고를 했단 말입니까?”가의는 잠시 멈칫했지만 본능적으로 전소환을 변호했다.“아마도 들키는 게 두려워서 그랬던 거겠지. 전소환은 단지 설사약만 썼을 뿐 사람을 해치지는 않았으니.”“어쩜 아량이 그리도 넓은 게냐.”시만자가 비꼬듯 말했다.그러자 가의는 그저 고개만 홱 돌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송석석은 뭔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자손 문제가 걸린 일인데 후부에서는 왜 더욱 철저히 조사하지 않으셨습니까?”가의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노부인은 병에 걸렸고 수씨도 곧 죽을 것처럼 기운이 없었다. 그래서
가의는 수년간 수씨와 얽혔던 은혜와 원한을 떠올렸다.수씨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녀는 깨달았다. 사람이 죽으면 등불이 꺼지듯 모든 것이 사라진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수씨가 그녀를 화나게 했던 많은 일들은 사실 그녀의 잘못이 더 컸건만 가의는 매번 트집을 잡기 일쑤였다.한참을 생각하던 그녀는 깊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사실 그녀는 참 괜찮은 사람이었다. 효성스럽고 너그러웠으며 후작을 위해 장남을 낳았고, 심지어는 수년간 후부의 살림도 총괄했지. 작년에 유산하지 않았더라면 몸 상태가 이렇게 악화되진 않았을 것이다.”“… 작년에 유산을 했단 말이냐?” 시만자가 물었다.“그렇다. 그녀는 원래 체질이 좋지 않았다. 의원이 임신은 피하라고 당부했는데 하필 그 시기에 또 아이를 가졌던 것이다. 태아가 선천적으로 약해 결국 지키지 못했고 유산 이후 몸이 더 상하게 되었다. 그 일이 없었다면 이렇게 젊은 나이에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송석석은 문득 노 집사가 풍 집사에게 물었을 때 풍 집사가 이런 일은 언급하지 않았던 것을 떠올렸다. 그는 그저 그녀가 둘째 아이를 낳을 때 병을 얻었다고만 말한 것을 들었다. 즉, 풍 집사는 많은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 집사에게 일부만 전한 것이 분명했다.시만자는 속으로 탄식하며 수씨는 정말 좋은 사람일 거라고 다시금 믿었다. 악독하고 깐깐한 가의조차 그녀를 좋게 평가한다면 그건 진심일 것이 분명한데, 그렇게 총명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 아이를 낳고 몸이 망가졌으니, 참으로 아쉬울 뿐이다.시만자가 다시 물었다.“정말 하인을 죽인 적은 없는 것이냐?”가의는 억울한 표정으로 답했다.“때리고 꾸짖은 적은 있어도 죽인 적은 없다. 허나 노부인이 싫어해서 자주 그런 것도 아니다. 게다가 내 곁에는 대부분 내 지참금으로 데려온 사람들 아니겠느냐? 내가 굳이 내 사람에게 그럴 이유가 뭐 있겠느냐?”마차로 돌아가는 길에 시만자는 가의를 내쫓겠다는 말을 더는 꺼내지 않았다.송석석이 말했다.“우리가 의
풍 집사와 대화를 끝낸 노 집사는 가의가 실제로 하인을 학대하고 구타한 적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풍 집사가 수씨에 대해 이야기하며 한바탕 눈물을 쏟았다고 했다.수씨는 평양후부에서 매우 인망이 높았으며 가의가 아니었더라면 정실 자리를 차지했을지도 모른다면서 말이다.홍시도 돌아왔지만 별다른 단서를 얻지 못했다. 그녀는 평양후부의 하인들에게도 물었지만 그들은 철저히 침묵했다.단 가의에게 학대당했다고 주장하는 몇몇 사람들 외에는 누구도 가의에 대해 나쁜 말을 하지 않았다.이로써 평양후부의 하인 관리와 내부 사생활 보호가 철저하다는 것이 드러났다.그러니 오히려 몇몇 사람이 의도적으로 가의를 비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평양후부에서는 별다른 단서를 못 찾았지만 이번 외부에서 퍼진 유언비어는 몇몇 거자들이 공방을 비난하는 글을 쓰면서 시작된 것이었어요.”“거자들이라니? 그들이 누구란 말이냐?”“조사해 보니 모두 제상서의 제자들이었습니다.”“제상서?”시만자는 한동안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네, 이부상서이자 황후의 부친이다.”“그 사람이구나.” 송석석이 말하고 나서야 기억이 난 시만자는 점점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근데 왜 그런 짓을 한 거지?”송석석이 담담히 말했다.“여인들의 권익을 위해 목소리를 내고 길을 열어주는 일은 원래 황후의 일이지 않더냐.”“허나 황후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비난받기 딱 좋은 일에 황후가 왜 나선단 말이냐?”“지금은 비난받기만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공방도 인정받을 날이 올 것이야.그렇게 되면 내가 북명왕비로서 황후의 자리를 위협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그랬겠지.”홍시가 동의하며 말했다.“맞습니다. 황후는 가만히 있어도 국모로서 백성의 지지를 받고 있지만 만약 왕비가 나서서 이런 일을 성공시킨다면 황후의 위상이 흔들릴 테니까요.”시만자가 화를 내며 말했다.“그럼 그냥 지지한다고 하면 되지 않더냐!”“지금 황후는 태자가 정해지기 전이라 비난을 감당할 여유가 없어.”“본인은 아무것도
밤이 깊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여묵은 사람을 시켜 상서부로 방문첩을 보냈다.“내 사제와 맞서려 들다니 오늘 밤 제대로 눈 붙일 생각은 하지 말라고 전해라.”송석석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내일 저도 함께 동행해 제대부인께 인사를 드리는 것이 좋겠군요.”“좋소.”사여묵은 그녀를 품 안에 끌어안고는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나지막이 말했다. “사월이 되었건만 우리가 단 하루도 들놀이를 나간 적이 없다네. 나와 혼인하고 고생만 하게 해서 매번 송구스러울 뿐이오.”송석석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기대고는, 문득 그가 산에서 굴러내리던 일이 떠올라 웃음을 터트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그때처럼 또 썰매를 타고 싶은 겁니까? 하지만 지금은 눈도 없을 텐데 말입니다.”“아니오, 아니오!”사여묵은 크게 당황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을 더는 듣지 않겠다는 듯 강렬하게 입을 맞추며 말문을 닫아버렸다.마침 야식을 들고 들어온 궁녀 영씨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황급히 뛰쳐나가는 보주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두 사람은 부딪힐 뻔했지만 궁녀 영씨는 웃으며 보주를 나무랐다.“어쩜 이렇게 덜렁대느냐?”궁녀 영씨는 몇 발짝 걸어 방 안으로 들어갔다. 가리개를 젖히는 순간 궁녀 영씨는 그 자리에서 몸을 홱 돌리더니 이내 야식 쟁반을 들고 방을 나섰다.하긴 저런 상황에 야식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겠지. 궁녀 영씨는 살며시 문을 닫으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별빛이 가득했고 초승달은 옅은 구름 속에 숨어 쑥스러운 듯 세상과 마주하길 꺼리는 듯했다.…제부.제상서는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태사 의자에 앉아 있었다.한밤중에 북명왕이 방문첩을 보냈으니 그가 불쾌함을 느끼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예의가 있다고 하기엔 밤중에 방문첩을 보냈고 예의가 없다고 하기엔 하필 밤중에 방문첩을 보냈으니 무슨 일 때문인지 제상서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이번 일은 평양후부에서 먼저 문제를 일으킨 것이라 보통 사람은 평양후부에서 멈췄을 것이겠지만, 북명왕
송석석은 그녀가 진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성의 없는 말과 진심을 구분하는 건 그녀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대부인께서는 황후마마의 생모이십니다. 만약 소진 소주방이 황후마마께서 주도하시는 사업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입니다.”제대부인은 살짝 멈칫하며 말했다.“왕비님, 소진 소주방만 성공한다면, 장차 역사가 기억할 대업이 될 것입니다. 이미 시작하셨으니 난관이 있더라도 왕비님께는 그리 어렵지 않을 거라 믿습니다.”송석석이 부드럽게 답했다.“쉬운 일이기도 하고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결국 모두 관념을 바꾸는 일 아니겠습니까?”제대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정말 쉽지 않은 일이군요. 하지만 왕비님께서 이미 온갖 비난을 감수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찌 황후마마와 공을 나누려 하십니까?”송석석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이 일에서 공로를 논하는 건 너무 속된 일이라 생각합니다. 순조롭게 시행되는 것이 백성을 위한 대업 아니겠습니까?”제대부인은 그녀의 담대한 답변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한참을 침묵하더니 마침내 감탄하며 말했다.“왕비님이 이처럼 넓은 아량과 안목을 가지셨다니 참으로 귀합니다.”“대부인께서 황후마마께 이 말씀을 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송석석은 목적을 가지고 이곳에 왔다. 여학이 태후의 지원을 받고 있으니 공방도 황후가 주도한다면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었다. 제대부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감사합니다, 왕비님. 제가 황후마마께 전하겠습니다.”하지만 제대부인의 평온한 목소리를 듣자, 송석석은 황후가 이 일에 관심을 가질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직감했다.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묻기로 했다.“만약 황후마마께서 흥미를 보이지 않으신다면 대부인께서 관심이 있으십니까?”두 사람은 정자에 이르렀고 자리에 앉은 제대부인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저는 집안일에 얽매여 왕비님의 기대에 부응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그 말에 송석석도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기대에 부
다음 날, 전북망은 소위 합동 훈련이라는 것이 병력 배치나 전술 훈련이 아니라 농사를 짓는 일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9월은 겨울 밀을 심기에 적기였다. 남강은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지역으로, 물자가 여전히 부족했으며 전쟁으로 인해 인구도 크게 줄어든 상태였다. 이에 병사들이 농사를 돕게 된 것이다. 밀 외에도 배추, 무, 과일 등을 심기도 했다.방천허는 전북망이 마침 좋은 시기에 도착했다며 서둘러 가서 합류하라고 말했다.전북망은 하루 종일 농사일에 시달렸지만, 그 와중에도 짬을 내어 필명에게 편지 한 통을 썼다.진성에서 전북망의 편지를 받은 필명은 편지를 본 후 한참 동안 멍하니 있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음…… 우리 사이가 이렇게 좋았던가?' 편지에는 자잘한 이야기가 빼곡히 적혀 있어 무려 3장이나 되었다. 대부분은 전에 전북망이 술에 취해 늘어놓았던 말들과 비슷했다.전북망은 원수부에서의 생활을 적으며 원수부가 얼마나 호화롭고 웅장한지 왕실조차 능가할 정도라고 표현했다.그는 원수부에 하인들이 구름처럼 많고 임신한 주모를 모시고 있으며, 그녀가 사용하는 물건이 모두 사치스러워 천금에 맞먹는다고 묘사했다.또한 농번기로 인해 현재 병사들이 농사를 지어야 하고, 농사가 끝난 뒤에야 훈련이 시작된다는 점을 언급했다. 병사들의 피부는 모두 새까맣게 그을렸지만 원수는 돼지처럼 하얗다고 비꼬기도 했다.뒤죽박죽한 이야기들을 잔뜩 늘어놓은 뒤, 평서백 부인에게 안부를 전해달라는 말을 덧붙였다.그 말을 마치고 나서는 자신도 한때 그런 사람이었고 비슷한 실수를 저질렀지만, 다른 사람이 자신의 과거와 같은 길을 걷는 것은 차마 볼 수 없다고 말하며 주저리주저리 이야기를 이어갔다.편지를 읽던 필명은 전북망이 왜 이런 말을 적었는지 눈치챘다. 평서백 부인에게 이 이야기를 전해 그녀가 마음 속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하려는 의도였다.필명은 전북망이 괜한 걱정을 한다고 생각했다.'평서백 부인처럼 현명한 사람이 왕표의 상황을 모를 리가 있나?'그러나
왕표는 전북망이 자신의 위엄을 충분히 보도록 한 뒤에야 그를 불러들였다.남강에 머문 지 2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왕표는 살이 많이 쪘다. 비록 과도한 비만 상태는 아니었지만, 호랑이 가죽이 깔린 팔걸이 의자에 앉아 있을 때면 턱 밑의 주름이 겹겹이 드러났다.그는 높은 자리에서 전북망을 내려다보며 위압적인 태도로 말했다.“너와 왕청여의 일은 이미 들었다. 그래, 너같이 평범하고 포부도 없는 자는 내 여동생과 어울릴 자격도 없지."전북망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반응 없이 한마디 대꾸만 하고 입을 닫았다.왕표는 차가운 코웃음을 치며 꾸짖었다."네가 이렇게 무능할 줄은 몰랐다. 현철위 부사령관이었지만 결국 관직에서 쫓겨났으니. 장군부는 정말 무능한 자들로만 가득 찼구나. 네 조부께서 하늘에서 너희 같은 무용지물을 보고 계신다면 눈을 감지 못하실 거다."전북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마에는 핏줄이 드러났다."불만이면 어쩔 거냐? 너희 장군부에서 나온 인간들이 대체 어떤 꼴이 났는지 봐라. 그리고 너 자신만 봐도 여자 하나한테 휘둘려 이 지경이 됐으니. 앞뒤로 세 명의 여자가 있었지만 그 누구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지 않냐……쯧, 우리 남자들의 체면을 다 구겨놨다!”왕표는 지금 그야말로 의기양양했다.그의 곁에는 절세미인이 있었고, 그 미인은 그의 아이를 임신 중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그녀 이전에도 왕표는 남강에서 원하는 여자는 누구든 손에 넣었다.언제나 여자들이 그를 즐겁게 하려고 애썼을 뿐이었다.그래서 그는 본능적으로 전북망을 깔보았다.위세를 충분히 떨친 뒤 왕표는 물었다."진성 쪽에 무슨 큰일이라도 있는 것이냐?"전북망은 대답했다."큰일은 없습니다."왕표는 의자 팔걸이를 매만지며 입가에 냉소를 띠고 말했다."그래? 그럼 여기로 오기 전에 최씨를 본 적이 있나?"전북망은 고개를 들고 답했다."원수께서 말씀하신 게 평서백 부인 입니까?"왕표는 그의 의도적인 물음 속 뜻을 간파하고 냉소를 지었다."왜? 내가 내 여자를 어떻게
그러나 뜻밖에도, 왕표는 전북망이 남강에 도착한 것을 알고 직접 그를 원수부의 부병으로 지명했다.원수부의 부병은 주로 왕표의 출행 준비와 그의 안전을 책임지는 역할이었다. 적의 자객이 잠입해 주군을 해치려는 시도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왕표가 있는 동안에는 이런 일이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과거 송회안이나 사여묵 시절에는 여러 번 이런 자객 사건이 있었다.왕표는 이미 진성의 노부인으로부터 온 편지에서 전북망이 왕청여와 협의 이혼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었다.왕표가 그의 여동생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차치하고, 현재 그의 신분으로 보아 전북망이 그의 여동생을 그런 식으로 대했다는 것은 곧 자신에게 도전하고 자신의 권위를 모욕하는 행위라고 여겼다.그래서 왕표는 전북망을 불러 물 긷기, 장작 패기, 마당 쓸기, 꽃에 물 주기 같은 자질구레한 일감들을 시켰다. 심지어 주방에서 음식을 나르고 물을 따르는 일까지 맡겼다.전북망은 아무 말없이 모든 지시에 순순히 따랐다. 그는 스스로 먼지 속에 가라앉을 만큼 비천해진 존재로 여겼기에, 짓밟힐 자존심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며칠 동안 그는 수부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여기저기를 살폈다. 그리고 그는 수부가 이전에 그가 알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겉모습만 비슷할 뿐 내부는 거의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예전에는 수부에 부엌일을 도맡은 여자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인원이 남자였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많은 시녀와 하녀들이 추가되었고, 심지어 한 명의 주모가 살고 있었다. 그는 그 여인을 두세 번 본 적이 있었는데, 그녀는 임신 중이었으며 대략 5~6개월 정도로 보였다.수부에는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그녀는 외출할 때 가벼운 비단으로 얼굴을 가리곤 했다. 가려진 얼굴 사이로 보이는 눈은 사람의 혼을 빼앗을 만큼 매혹적이었다. 전북망은 그녀의 신분을 사적으로 캐묻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저런 이야기는 자연히 들려왔다.사람들은 그녀를 원수의 부인이라 불렀다. 그녀가
송석석 일행은 왕이장과 시만자가 돌아오길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이 평서백부에 갔다는 소식과 심지어 모든 것을 터놓고 이야기를 했다는 말을 전해 들은 송석석은 약간 걱정스러웠다.요즘 평서백부의 상황이 불안정했기 때문이다."걱정하지 마. 화해하지 않았어."왕이장은 송석석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미소를 지었다."처음엔 꽤 감동적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나중엔 가식적이라는 생각이 들더라."돌아오는 길 내내 그는 노부인이 말하던 장면을 떠올리며 점점 더 명확하게 깨달았다.왕준의 진심 어린 감정 표현과 달리, 노부인의 모든 말은 마치 노부인 자신에게 들려주기 위해 한 것 같았다.그래서 그녀가 왜 그동안 그가 어떻게 지냈는지 묻지 않았는지도 설명이 된다. 그녀가 신경 쓴 것은 그와 최씨가 그녀의 말을 믿는지에 대한 여부였지, 왕이장 그 자체를 걱정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송석석은 이해하지 못한 채 시만자를 바라보았다. 시만자는 고개를 저으며 자신도 모른다는 뜻을 전했다."이제 가서 자자. 나도 졸리네."왕이장은 손을 뒤로 깍지 낀 채 방으로 돌아갔다. 이런 일에 더이상 얽매이지 않는 듯, 한결 가벼워 보이는 왕이장의 모습에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시만자는 남아있던 사람들에게 말했다."왕준과 노부인 모두 무척 격앙된 상태였고 계속 울더라고. 그런데 왕이장이 왜 가식적이라고 하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송석석은 최씨도 방 안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는 얘기를 듣고 말했다."다음에 최씨 부인에게 물어봐야겠어."그전까지 묻지 않은 이유는 단지 오사형이 먼저 얘기를 꺼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그가 얘기를 꺼냈으니 묻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다음 날 아침, 송석석이 최씨를 찾아가려던 찰나에 최씨가 먼저 찾아왔다.최씨는 아주 직접적으로 두 가지 일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첫째, 평서백부의 일부 재산을 왕이장에게 "판매"하도록 그를 설득해달라는 것이었다.둘째, 왕이장이 노부인의 말을 믿지 않도록 하고, 그녀와 화해하지도 말고, 왕
왕이장과 시만자는 말을 끌고 나가 넓은 거리를 걸었다. 살랑살랑 부는 밤바람에 취기가 모두 날아갔다."오늘 밤 일은 너무 충동적이었어. 너를 데리고 오는 게 아니었는데…"시만자가 약간 후회하는 표정으로 말했다."나쁘지 않았어."왕이장이 대답했다."지금 마음이 어떤데? 그들과 화해한 거야?""아니."왕이장은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전보다는 훨씬 여유로운 표정을 지어보였다."노부인이 나와 최씨를 방으로 불러서 정말 많은 이야기를 했어. 하지만 단 한 번도 묻지 않더라. 그동안 내가 어떻게 지냈는지, 내가 끌려간 뒤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 말이야. 그저 자신이 했던 일에 대해 변명하고, 잘못이 없다고 강조할 뿐이었어.""그랬구나"왕이장은 약간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함께 다시 자유분방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나는 처음 산을 내려갔을 때를 기억해. 한 달 동안 외지에서 지내고 돌아오니 사부와 사숙이 나를 둘러싸고 묻더라. 뭘 먹었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어떤 여관에서 묵었는지, 싸움은 했는지, 남에게 속여 돈을 빼앗긴 적은 없는지, 그리고 어떤 경치를 봤는지.""내 사부님께서도 그랬어."시만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게 당연하지.""맞아."왕이장은 다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나는 어릴 때부터 사랑받고 자란 아이였어. 내게도 집이 있었다고."시만자는 그의 기분이 어떤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꽤 좋아 보였다."그래서, 이제는 마음을 정리한 거야?""응. 그런데 그렇게 나쁘지도, 좋지도 않아. 그러니 굳이 화해할 필요도, 원망할 필요도 없지."왕이장은 노부인이 남편을 독살해 복수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감동해야 마땅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감동하지 않았다.그에겐 비록 아이가 없지만 만약 있었다면, 심지어 그 아이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라면, 멀리 떨어진 곳으로 보내어 법도의 가호를 받게 해야 한다 할 때 그는 반드시 함께 갔을 것이다. 자신이 직접 가지 못한다면 믿을 만한 사람이라도 꼭 붙여 함
노부인은 여전히 격한 기쁨과 슬픔에 잠겨 있었다. 그녀는 왕이장의 소매를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 아무리 바라봐도 부족하다는 듯이 만족할 줄 모르며 그를 쳐다보았다. 눈물은 마를 틈이 없었다."이 어미를 용서해줄 수 있겠니? 나는 정말 몰랐단다… 어미가 이미 너의 복수를 해줬으니 제발 용서해주거라…"그러자 왕이장은 잠시 침묵하더니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말했다."노부인, 왕교여는 확실히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 아이는 그 화재 속에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석산에 보내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에서 고통받다 죽었습니다. 장청 도인은 그에게 온갖 고된 일을 시켰고, 툭하면 때리고 욕하여 결국 그를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습니다. 마지막엔 그를 밖으로 내던져버렸고, 그는 굶주린 늑대들에게 먹히고 말았습니다.""그럴 리가 없어!"노부인은 눈을 크게 뜨고 왕이장을 바라보며 소리쳤다."처음에는 인정하더니, 왜 지금 와서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냐? 넌 여전히 나를 원망하고 있구나, 그렇지?"왕이장은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차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저는 당시 그곳에 교여와 함께 있었던 도동입니다. 교여와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그의 일을 알고 있는 것일 뿐, 저는 교여가 아닙니다.""하지만 네 이 얼굴은…….""어머니!"최씨가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말했다."이 사람은 시숙의 친구입니다. 시숙이 아닙니다!"노부인은 멍한 눈빛으로 며느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분명…….최씨는 왕이장에게 말했다."먼저 돌아가십시오. 며칠 후에 제가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안돼, 못 가! 절대 못 간다!"노부인은 필사적으로 왕이장을 붙잡으려 했지만, 그는 이미 일어나 떠난 뒤였다. "어머니."최씨가 그녀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억지로 강요하지 마십시오. 그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나요? 그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어머니는 모르시잖아요. 분명 그의 마음속에 원망이 가득할 겁니다. 어머니께서 죄책감을 느끼신다면 그를 위해 보상해주세요. 집안의 재산 대부분을
최씨는 인삼탕을 노부인에게 건네 마시게 했다. 그녀는 왕이장과 함께 자리에 앉아 노부인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그때 나는 정말 속았다. 장청 도인이 늘 했던 말이, 우리 교여가 복을 가져다줄 아이라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교여를 아주 아끼는 것처럼 보였어. 교여가 병에 걸렸을 땐 나보다 더 안절부절못하며 약을 구하고 의원을 찾으러 다녔지. 하지만 교여의 몸은 날이 갈수록 약해졌다. 다섯 살이 넘자 거의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할 정도였단다."이것은 노부인의 가슴 깊이 새겨진 상처였다.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여전히 숨조차 쉬기 힘들 만큼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장청 도인이 말하길, 방법을 쓰지 않으면 교여는 한 달도 버티지 못할 거라고 하더구나. 석산의 사철에 보내어 부처의 가호를 빌어야만 18살 고비를 넘기게 되고 그 이후로는 평생 순탄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하였다.""네 조부는 이런 말을 전혀 믿지 않으셨다. 다 거짓말이라며 반대하셨지. 하지만 네 아버지가 장청 도인을 데리고 조부를 찾아갔고, 뭔가를 얘기한 끝에 조부는 결국 동의했다. 심지어 매년 삼천 냥의 은화를 그 도인에게 주며 네 수명을 늘리기 위해 연꽃등을 밝혔다. 불교와 도교의 가호를 모두 받아야 한다는 이유였단다.""그런데 그 모든 것이 거짓말이었다니!"노부인의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졌다. 그녀의 표정에는 분노와 살기만이 가득했다."나를 속였고 네 조부를 속였다. 아니, 모든 사람을 속였어! 사실 장청 도인이 네 아버지에게 한 말은 네가 조부에게 복을 가져다주는 존재라는 것이었다. 네가 살아 있는 한 네 아버지는 작위를 이어받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일찍 죽을 가능성도 있다고 했지. 그래서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널 죽이려 했다. 의원이 준 약을 전부 바꿔치기 했는데, 일부는 미세한 독을 섞었고, 일부는 약효가 상충되게 했으며, 일부는 심맥과 기혈을 깎아내리는 성분으로 바꿔 놓았다. 그래서 네 몸이 점점 악화된 게야."노부인은 숨을 헐떡이며 말을 쏘아붙였는데, 눈빛에는
어떤 힘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걷기도 버거워 보이던 노부인이 갑자기 날렵하게 움직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금숙과 천마마조차 그녀를 따라잡지 못할 정도였다.노부인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심장 박동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눈앞에는 정원의 풍경도, 주변의 사물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머릿속에는 수년간 불타오르던 큰` 화재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불길 속에서 울려 퍼지던 처절한 비명이 귀를 맴돌았다.그때 그녀는 누군가에게 끌리고 붙잡혀 움직이면서도 그 불길이 모든 것을 삼키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다.그녀의 막내아들은 그렇게 불 속에서 죽었다.불길 속에서 여러 시신이 끌려 나왔지만 그녀는 그 시신들 중 어느 것이 자신의 아들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그녀는 몇 번이나 의식을 잃을 정도로 크게 오열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죽지 않았을 가능성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감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병약해 걷는 것조차 누군가의 부축이 필요했던 아들이 어떻게 그 불바다 속에서 살아남았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노부인이 본채에 도착했을 때, 그녀의 눈에는 오직 한 사람만이 보였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눈물이 계속 흘러내리면서 그녀의 시야는 더욱 흐릿해졌다. 그녀는 온 힘을 다해 그 희미한 그림자를 따라 걸어갔다.노부인은 고개를 약간 기울이며 힘없고 불확실한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네가 내 아들이냐?"왕이장은 그녀를 알아보았다. 마음속으로 가장 원망스러워했던 사람이었다.하지만 그 순간 노부인의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을 보고 왕이장은 가슴 한구석에서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그는 움직이지 않고 대답도 하지 않았다."어머니, 저 아이가 교여예요." 왕준이 울면서 옆에서 외쳤다."아……!"노부인은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르며 왕이장을 끌어안았다. 그녀의 기억 속 깊은 과거가 검고 짙은 밤을 뚫고 되살아났다. 그녀의 가슴은 마치 한 조각이 도려내
왕준이 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화난 목소리로 외쳤다."여기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거냐? 어머니께서 언제 친아들을 버린 적이 있다고 그래? 나도, 큰형도 잘 지내고 있지 않느냐!""너희는 잘 지낸다고? 그럼 나는?"왕이장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너무 힘을 준 나머지 위와 목이 자극을 받아 고통스러워졌다. 그는 위를 부여잡고 웅크린 채 앉아 내력으로 속을 진정시키려 애썼다.그의 말에 왕준은 한동안 얼어붙었다. 그러다 무언가를 떠올린 듯 그를 급히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최씨 역시 무언가 기억난 듯 당황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그녀가 처음 집에 들어왔을 때 들었던 이야기였다. 어머니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고, 막내아들은 병에 걸려 치료하지 못해 사찰로 보내져 길러졌다. 그러나 사찰에 화재가 발생해 어머니는 막내아들이 불타 죽는 것을 두 눈으로 지켜봐야 했다.‘설… 설마 그때 죽지 않았던 건가?’"이름이 무엇이냐?"왕준은 이미 울먹이며 물었다. 그의 입술은 계속해서 떨렸다. 그는 왕이장을 간절히 바라보았다."노부인에게 물어보십시오, 노부인에게."왕이장은 위를 부여잡고 힘겹게 의자에 앉아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더 이상 힘이 없었다.최씨는 다가가며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기억났어요. 당신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아요. 여러 번 백부 문 앞에서 서성였잖아요."왕이장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최씨는 곧바로 시만자를 바라보았다.하지만 시만자 또한 최씨를 보지 않고 왕이장에게 말했다. "왕노오, 여기까지 왔으니 이들에게 분명히 말해. 왕교여라는 이름으로 어릴 적 여자 아이처럼 길러졌고, 다섯 살 때 사찰에 버려졌으며 학대받아서 몇 달 만에 죽을 뻔하다가 또 다시 버려졌다고. 사부가 널 주워서 살려줬지. 너는 아무 잘못도 없어. 잘못한 건 이들이야. 그러니까 제대로 따져봐."왕준은 마치 벼락을 몇 차례나 맞은 사람처럼 멍하니 굳어버리고 말았다. 눈동자조차 움직이지 않았다.그리고 곧 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