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깊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여묵은 사람을 시켜 상서부로 방문첩을 보냈다.“내 사제와 맞서려 들다니 오늘 밤 제대로 눈 붙일 생각은 하지 말라고 전해라.”송석석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내일 저도 함께 동행해 제대부인께 인사를 드리는 것이 좋겠군요.”“좋소.”사여묵은 그녀를 품 안에 끌어안고는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나지막이 말했다. “사월이 되었건만 우리가 단 하루도 들놀이를 나간 적이 없다네. 나와 혼인하고 고생만 하게 해서 매번 송구스러울 뿐이오.”송석석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기대고는, 문득 그가 산에서 굴러내리던 일이 떠올라 웃음을 터트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그때처럼 또 썰매를 타고 싶은 겁니까? 하지만 지금은 눈도 없을 텐데 말입니다.”“아니오, 아니오!”사여묵은 크게 당황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을 더는 듣지 않겠다는 듯 강렬하게 입을 맞추며 말문을 닫아버렸다.마침 야식을 들고 들어온 궁녀 영씨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황급히 뛰쳐나가는 보주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두 사람은 부딪힐 뻔했지만 궁녀 영씨는 웃으며 보주를 나무랐다.“어쩜 이렇게 덜렁대느냐?”궁녀 영씨는 몇 발짝 걸어 방 안으로 들어갔다. 가리개를 젖히는 순간 궁녀 영씨는 그 자리에서 몸을 홱 돌리더니 이내 야식 쟁반을 들고 방을 나섰다.하긴 저런 상황에 야식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겠지. 궁녀 영씨는 살며시 문을 닫으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별빛이 가득했고 초승달은 옅은 구름 속에 숨어 쑥스러운 듯 세상과 마주하길 꺼리는 듯했다.…제부.제상서는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태사 의자에 앉아 있었다.한밤중에 북명왕이 방문첩을 보냈으니 그가 불쾌함을 느끼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예의가 있다고 하기엔 밤중에 방문첩을 보냈고 예의가 없다고 하기엔 하필 밤중에 방문첩을 보냈으니 무슨 일 때문인지 제상서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이번 일은 평양후부에서 먼저 문제를 일으킨 것이라 보통 사람은 평양후부에서 멈췄을 것이겠지만, 북명왕
송석석은 그녀가 진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성의 없는 말과 진심을 구분하는 건 그녀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대부인께서는 황후마마의 생모이십니다. 만약 소진 소주방이 황후마마께서 주도하시는 사업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입니다.”제대부인은 살짝 멈칫하며 말했다.“왕비님, 소진 소주방만 성공한다면, 장차 역사가 기억할 대업이 될 것입니다. 이미 시작하셨으니 난관이 있더라도 왕비님께는 그리 어렵지 않을 거라 믿습니다.”송석석이 부드럽게 답했다.“쉬운 일이기도 하고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결국 모두 관념을 바꾸는 일 아니겠습니까?”제대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정말 쉽지 않은 일이군요. 하지만 왕비님께서 이미 온갖 비난을 감수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찌 황후마마와 공을 나누려 하십니까?”송석석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이 일에서 공로를 논하는 건 너무 속된 일이라 생각합니다. 순조롭게 시행되는 것이 백성을 위한 대업 아니겠습니까?”제대부인은 그녀의 담대한 답변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한참을 침묵하더니 마침내 감탄하며 말했다.“왕비님이 이처럼 넓은 아량과 안목을 가지셨다니 참으로 귀합니다.”“대부인께서 황후마마께 이 말씀을 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송석석은 목적을 가지고 이곳에 왔다. 여학이 태후의 지원을 받고 있으니 공방도 황후가 주도한다면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었다. 제대부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감사합니다, 왕비님. 제가 황후마마께 전하겠습니다.”하지만 제대부인의 평온한 목소리를 듣자, 송석석은 황후가 이 일에 관심을 가질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직감했다.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묻기로 했다.“만약 황후마마께서 흥미를 보이지 않으신다면 대부인께서 관심이 있으십니까?”두 사람은 정자에 이르렀고 자리에 앉은 제대부인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저는 집안일에 얽매여 왕비님의 기대에 부응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그 말에 송석석도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기대에 부
사여묵은 천천히 말했다."남에게 쥐어진 약점이 있으면 모든 일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본왕이 처음에 제상서의 일을 떠들지 않았던 것은 좋은 약점은 중요한 순간에 써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시간이 왔습니다.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습니다. 이틀 안에 제상서가 준비한 글을 염 선생께 전달하지 않으면 그들이 제대인을 위해 글을 쓸 것입니다."이건 적나라한 위협이었다. 제상서는 가슴이 꽉 막히며 화가 나 몸이 떨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사여묵은 여전히 여유롭게 앉아 마치 아무렇지 않은 듯 차를 천천히 음미하며 마셨다. 그는 평소에 매우 까다로운 사람인데 제상서 집의 차는 제법 괜찮다고 생각했다. 이런 사람들이 자만에 빠져 있지만 사실 가장 다루기 쉬운 사람들이었다. 특히 제상서처럼 명성을 중시하면서도 명예를 아끼지 않는 사람은 더 쉽게 다룰 수 있었다.차 한 잔을 다 마시고 나니 송석석과 제대부인이 돌아와 있었다. 사여묵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직도 창백한 얼굴의 제상서에게 말했다. "오늘은 제가 급한 일이 있으니 더 이상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두 번 다시 오지 않으셨음 좋겠습니다."제상서는 얼굴에 웃음을 지을 힘도 없이 그대로 굳어져 버렸다. “안녕히 가십시오. 왕야, 왕비님.”그에 비해 제대부인은 진심 어린 배웅을 했다. "왕비님, 시간이 되시면 자주 들러 주십시오. 저는 왕비님과 대화하는 것이 정말 좋으니깐요.""네, 꼭 오겠습니다." 송석석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마차가 천천히 출발했고 진성의 번화함은 거리를 가득 메웠다.잠시 여유를 즐기기 위해 두 사람은 마차에서 내려 염구진과 보주를 먼저 보내고 둘만의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거리를 걷는 그들의 외모와 기품은 눈에 너무 띄었다.하여 그들은 왕경루로 향해 아늑한 방을 잡고 맛있는 음식을 몇 가지 주문한 뒤 이화주를 한 주전자 시켰다.이화주가 잔에 담기자 술 향이 사방으로 퍼졌다. 사여묵이 기쁜 얼굴로 말했다. "오랜만에 마시는 술이군."송석석
제부.제상서가 옷소매를 휘두르며 말했다. "부인은 참 어리석소. 어찌 그 송석석의 말을 믿을 수 있단 말이오? 만약 마마께서 정말 공방을 지지하면 문관 청류들이 비난할 것이 뻔하지 않겠소? 마마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대황자의 지위는 확고하오. 그는 중궁의 적자이고 장남이오. 허니 그 외에 누가 있겠소?"제대부인은 자리에 앉은 채 반문했다. "그렇다면 대인께서는 왜 공방을 노리시는 겁니까?"고청묘 사건 이후로 제대부인은 그를 한 번도 부군이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오랜 세월 함께했지만 그들 사이엔 틈이 있었다.제상서는 입술을 깨문 채 말없이 앉아 있었는데 그의 눈빛은 점차 어두워졌다.제대부인은 이유를 잘 알기에 직접 밝히기로 했다. "폐하는 지금 강건하시니 후계자를 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궁중에는 후궁도 많고 황자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만약 대황자보다 똑똑하고 기민한 사람이 있다면 폐하 역시 다른 생각을 하실 겁니다. 폐하가 여태 후계자 문제를 언급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대황자가 별 볼 일 없기 때문이겠죠."제상서는 미간을 찌푸리며 반박하려 했지만 할 말이 없어 결국 이렇게 말했다. "폐하의 심기를 건드리면 공훈가문과 문관 청류들이 반감을 품을 것이오. 그렇다면 마마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지 않소? 부인, 제발 어리석게 굴지 마시오."제대부인이 말했다. "이 일은 북명왕비와 이씨 부인이 주도하고 있으니 마마께서는 나서지 않으셔도 됩니다. 마마께서는 먼저 태후의 입장을 살피다가 만약 태후께서도 찬성하시면 공방에 조금의 돈을 보태시면 됩니다. 그렇게 되면 폐하가 책망하더라도 태후에 효를 다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폐하가 책망하지 않으면 외부의 비판에 불과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마마와 대황자에게 이익이 될 것입니다. 대인께서도 공방을 추진할 수 있다는 걸 알기에 사람을 시켜 방해한 게 아닙니까?"제대부인이 아무리 설득해도 제상서는 여전히 동의하지 않았다. "하지 않으면 실수할 일도 없소. 이 위험까지 감수할 필요가 없단
몇몇 거자들이 글을 가져왔지만, 염구진은 왕야에게까지 보고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 바로 거절했다. 그들은 태도가 부자연스러웠고 공방에 대한 편견도 여전했다. "내일 다시 제출하시게. 만약 내일도 이렇게 쓸 거라면 더는 오지 않아도 될 걸세." 염구진이 담담하게 말했다.그중 진씨 성을 가진 거자가 분노에 차서 말했다. "선생님도 학문을 하는 사람으로서 어찌 권세를 얻고 나서 학문하는 사람을 괴롭히시는 겁니까?"염구진은 그들의 얕은 생각을 직접적이고 간단하게 반박했다. "자네들이 여자가 아닌 것이 한탄스럽소. 어머니의 고생을 알지 못하니 말이오.""공방과 여인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그것은 버려진 여인들을 수용하는 곳입니다."염구진이 엄하게 말했다. "버려진 사내가 있을 수도 있지 않겠소?"그러자 거자들이 모두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버려진 사내라니요? 정말 우스운 말이군요."염구진은 그들을 경멸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왜 버려진 사내가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오? 세상 사내가 모두 고귀해 여인을 능가한다고 생각하는 게요?""사내는 온갖 고생을 도맡아 하고 아내와 자식까지 부양해야 하지 않습니까?"그러자 염구진이 물었다. "여인들은 못하는 일이오?"그들은 하나같이 눈을 크게 뜨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내일 이 시간까지 내가 만족할 만한 글이 제출되지 않으면 그대들의 미래는 없을 것이오. 돌아가서 농사를 짓든 글을 팔든, 아니면 아내가 자수라도 잘하면 아내의 힘으로 먹고 살 수 있소. 그러다 아내가 머리가 하얘질 때까지 기다리다 아내를 쫓아내면 될 것이오."염구진은 결국 몽동이를 불러 사람들을 쫓아내게 했다.그러자 몽둥이가 철몽둥이를 휘두르며 큰 소리로 욕설을 내뱉었다. "하나같이 여인의 몸속에서 나온 것들이 까짓 학문을 좀 익혔다고 어머니까지 욕보이다니! 참으로 우습도다. 의리도 모르고 효도도 모르고, 백성을 위해 싸우지도 않고 사람들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 채 이것저것 비난만 할 줄
송석석이 미간을 찌푸렸다. 역시나 수씨와 관련이 있는 일이었다. 그녀가 가장 아니길 바랐던 것이 바로 수씨었다. 그녀는 다년간 후부에서 집안의 일을 도맡고 아이를 낳고 기르며 온갖 고생을 다 했지만 가의는 늘 그녀에게 가혹하게 대했다. 비록 그녀가 노부인의 조카이긴 했지만, 본처가 아니라 명분도 제대로 얻지 못했다. 시만자 역시 머리가 아팠다. “이걸 어쩐단 말이냐? 정말 수씨라는 것이냐? 만약 그렇다면... 사람도 다 죽은 마당에 조사한들 평양후부의 노부인이 그 말을 믿기나 할까? 게다가 수씨가 죽기 전에 계획했다는 증좌도 없으니 단지 시녀의 증언으로 부족할 것이다.” 송석석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렇다면 노 집사에게 부탁해 풍 집사를 청하도록 하지. 이번엔 우리가 직접 묻는 것이 좋겠구나.” “그럴 수밖에. 모든 일은 풍 집사가 안배한 일이니 그자는 절대 아무 이유도 없이 가의를 겨냥하지 않을 것이다. 배후에 분명 누군가가 있는 게 분명하다.” 송석석은 먼저 노 집사를 불러 풍 집사에 대해 철저히 알아보면 그의 의도를 분석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풍 집사가 이 일을 꾸몄을 거라는 말에 노 집사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화가 역력한 기색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저에게 했던 말들은 전부 일부러 왕비님의 귀에 들어가라고 한 말이군요.”“그럴 가능성도 있지요. 사실을 왜곡해 우리가 가의를 나쁜 사람으로 믿도록 한 것입니다. 물론 가의가 악독하긴 하지만 이 일에 있어 무고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 우리가 가의를 의심하게 유도한 것이지.” 송석석은 노 집사를 진정시키며 말했다. “허나 일부러 속이려고 한 건 아니었을 것이다. 이건 일이 밝혀지고 나서 다시 묻도록 하자.” 송석석은 풍 집사의 의도를 확신할 수 없지만 그가 악의적인 사람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노 집사와 이렇게 오랫동안 친분을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그러자 노 집사는 얼굴이 조금 창백해졌다.“하긴, 정말 절 이용하려고 했
단신의의 제자들은 진성 행림에서 알아주는 인물로 소식도 제법 빠르다. 공방과 가의의 일이 시끌벅적하게 퍼지자 의원들도 의문을 금치 못했다. 설사약으로 어찌 유산이 된단 말인가? 그러던 중 누군가 중얼거리며 말했다. “홍화삼칠탕약을 그리도 먹어댔으니 유산이 안 될 리가 없지. 생명도 위태로울 판에.” 이 말은 그렇게 돌고 돌아 홍작의 귀에 들어갔다. 공방과 관련된 일이라 홍작은 이 소문에 대해 철저히 조사했고 결국 유 의원의 제자라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 유 의원은 평양후부의 전용의원으로 작은 의관을 운영하며 몇몇 제자도 키우고 있었다. 거듭된 조사와 질문 끝에 홍작은 유 의원이 누군가의 명령을 받아 매일 평양후부에 보내는 약에 소량의 삼칠과 홍화를 넣었는데 그 향을 숨기기 위해 용안과 붉은 대추도 넣었다고 말했다. …왕경루.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 남성이 노 집사와 후부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말 속에는 원망이 가득했다. “고청락이 난리를 치지 않았다면 측부인도 이리 일찍 가지 않았을 터, 측부인은 분명 화가 나서 갔을 것이오. 후부에 들어간 뒤로 고청락 때문에 측부인은 고단하게 살았소. 그러다 보니 젊은 나이에 병이 들어 죽게된 것이지. 우리 하인들까지도 가슴 아프로구나.” 그 말에 노 집사는 고개를 들고 담담히 물었다. “듣자니 측부인께서 작년에 유산을 했다지? 사실이오?” 속으로 괴로워하던 풍 집사는 그 말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가 곧 다시 정신을 차렸다. 때마침 송석석과 시만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고 풍 집사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예의 행했다. “왕비님을 뵙습니다.” 그러자 송석석은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미소를 지었다. “풍 집사, 어서 앉거라.” 풍 집사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소인이 어찌 감히 왕비님과 자리를 함께하겠습니까. 서서 모시겠습니다.” “앉거라. 너에게 몇 번이고 일을 알아보면서도 내가 감사의 표시를 하지 못했다. 그러니 어서 앉거라.” 송석석은 먼
풍집사는 아무 말 없이 침묵하며 속으로 그녀가 얼마나 알고 있을지를 추측하며 혹시라도 그녀가 자기를 속이는 게 아닌지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이때 시만자가 크게 말했다. “어려울것 없다. 증좌를 들고 바로 관청에 고하면 될 일이다. 비록 장본인은 죽었다지만 그래도 자기가 한 일에는 책임을 져야지!”“안 됩니다!” 그 말에 풍집사는 털썩 무릎을 꿀고 다급히 말했다. “이건 측실과 상관없는 일입니다. 측실은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 더는 측실의 영혼을 불안하게 하지 말아주십시오. 왕비님, 부디 자비를 베푸소서. 모든 건 소인의 짓입니다. 공방을 헐뜯으라고 사람을 보낸 것 역시 소인의 짓입니다.”송석석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보고 말했다. “시만자가 수씨를 언급한 것도 아닌데 넌 뭐가 그리 급해 그녀를 언급하는 것이냐. 관청에 고하라.” 그 말에 풍집사는 제대로 놀란 듯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아니 되옵니다. 제가 어찌해야 할지 말씀만 해주십시오. 왕비님이 시키는대로 다 하겠습니다. 소인의 목숨을 빼앗아 가도 아무런 원망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관청에 고하진 않았지만 홍작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배후에서 계략을 세운 건 수씨이고 실행에 옮긴 건 풍 집사와 수씨의 몇몇 시녀였다. 하지만 평양후 모자가 이 일을 알고 있는지, 알면서도 감싸준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수씨가 이런 계획을 세운 이유는 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된 뒤부터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 시기에 평양후가 자신에게 측실을 들이겠다고 말하면서 이미 조씨라는 여인을 정해두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평양후는 조씨를 서부인의 신분으로 들이겠다고 했다. 허나 서부인이란 이름만으로도 그 지위는 첩들보다 월등히 높았다.게다가 조씨를 언급할 때면 평양후는 그녀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녀의 부친이 수재고, 그녀 또한 단정하고 정숙해 집안을 맡기기에 딱이라고 했다.허나 수씨가 알아본 데 의하면 조씨에겐 약혼자가 있었지만 약혼자가 죽게 되어 여태 혼인을 하지
다음 날, 전북망은 소위 합동 훈련이라는 것이 병력 배치나 전술 훈련이 아니라 농사를 짓는 일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9월은 겨울 밀을 심기에 적기였다. 남강은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지역으로, 물자가 여전히 부족했으며 전쟁으로 인해 인구도 크게 줄어든 상태였다. 이에 병사들이 농사를 돕게 된 것이다. 밀 외에도 배추, 무, 과일 등을 심기도 했다.방천허는 전북망이 마침 좋은 시기에 도착했다며 서둘러 가서 합류하라고 말했다.전북망은 하루 종일 농사일에 시달렸지만, 그 와중에도 짬을 내어 필명에게 편지 한 통을 썼다.진성에서 전북망의 편지를 받은 필명은 편지를 본 후 한참 동안 멍하니 있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음…… 우리 사이가 이렇게 좋았던가?' 편지에는 자잘한 이야기가 빼곡히 적혀 있어 무려 3장이나 되었다. 대부분은 전에 전북망이 술에 취해 늘어놓았던 말들과 비슷했다.전북망은 원수부에서의 생활을 적으며 원수부가 얼마나 호화롭고 웅장한지 왕실조차 능가할 정도라고 표현했다.그는 원수부에 하인들이 구름처럼 많고 임신한 주모를 모시고 있으며, 그녀가 사용하는 물건이 모두 사치스러워 천금에 맞먹는다고 묘사했다.또한 농번기로 인해 현재 병사들이 농사를 지어야 하고, 농사가 끝난 뒤에야 훈련이 시작된다는 점을 언급했다. 병사들의 피부는 모두 새까맣게 그을렸지만 원수는 돼지처럼 하얗다고 비꼬기도 했다.뒤죽박죽한 이야기들을 잔뜩 늘어놓은 뒤, 평서백 부인에게 안부를 전해달라는 말을 덧붙였다.그 말을 마치고 나서는 자신도 한때 그런 사람이었고 비슷한 실수를 저질렀지만, 다른 사람이 자신의 과거와 같은 길을 걷는 것은 차마 볼 수 없다고 말하며 주저리주저리 이야기를 이어갔다.편지를 읽던 필명은 전북망이 왜 이런 말을 적었는지 눈치챘다. 평서백 부인에게 이 이야기를 전해 그녀가 마음 속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하려는 의도였다.필명은 전북망이 괜한 걱정을 한다고 생각했다.'평서백 부인처럼 현명한 사람이 왕표의 상황을 모를 리가 있나?'그러나
왕표는 전북망이 자신의 위엄을 충분히 보도록 한 뒤에야 그를 불러들였다.남강에 머문 지 2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왕표는 살이 많이 쪘다. 비록 과도한 비만 상태는 아니었지만, 호랑이 가죽이 깔린 팔걸이 의자에 앉아 있을 때면 턱 밑의 주름이 겹겹이 드러났다.그는 높은 자리에서 전북망을 내려다보며 위압적인 태도로 말했다.“너와 왕청여의 일은 이미 들었다. 그래, 너같이 평범하고 포부도 없는 자는 내 여동생과 어울릴 자격도 없지."전북망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반응 없이 한마디 대꾸만 하고 입을 닫았다.왕표는 차가운 코웃음을 치며 꾸짖었다."네가 이렇게 무능할 줄은 몰랐다. 현철위 부사령관이었지만 결국 관직에서 쫓겨났으니. 장군부는 정말 무능한 자들로만 가득 찼구나. 네 조부께서 하늘에서 너희 같은 무용지물을 보고 계신다면 눈을 감지 못하실 거다."전북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마에는 핏줄이 드러났다."불만이면 어쩔 거냐? 너희 장군부에서 나온 인간들이 대체 어떤 꼴이 났는지 봐라. 그리고 너 자신만 봐도 여자 하나한테 휘둘려 이 지경이 됐으니. 앞뒤로 세 명의 여자가 있었지만 그 누구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지 않냐……쯧, 우리 남자들의 체면을 다 구겨놨다!”왕표는 지금 그야말로 의기양양했다.그의 곁에는 절세미인이 있었고, 그 미인은 그의 아이를 임신 중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그녀 이전에도 왕표는 남강에서 원하는 여자는 누구든 손에 넣었다.언제나 여자들이 그를 즐겁게 하려고 애썼을 뿐이었다.그래서 그는 본능적으로 전북망을 깔보았다.위세를 충분히 떨친 뒤 왕표는 물었다."진성 쪽에 무슨 큰일이라도 있는 것이냐?"전북망은 대답했다."큰일은 없습니다."왕표는 의자 팔걸이를 매만지며 입가에 냉소를 띠고 말했다."그래? 그럼 여기로 오기 전에 최씨를 본 적이 있나?"전북망은 고개를 들고 답했다."원수께서 말씀하신 게 평서백 부인 입니까?"왕표는 그의 의도적인 물음 속 뜻을 간파하고 냉소를 지었다."왜? 내가 내 여자를 어떻게
그러나 뜻밖에도, 왕표는 전북망이 남강에 도착한 것을 알고 직접 그를 원수부의 부병으로 지명했다.원수부의 부병은 주로 왕표의 출행 준비와 그의 안전을 책임지는 역할이었다. 적의 자객이 잠입해 주군을 해치려는 시도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왕표가 있는 동안에는 이런 일이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과거 송회안이나 사여묵 시절에는 여러 번 이런 자객 사건이 있었다.왕표는 이미 진성의 노부인으로부터 온 편지에서 전북망이 왕청여와 협의 이혼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었다.왕표가 그의 여동생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차치하고, 현재 그의 신분으로 보아 전북망이 그의 여동생을 그런 식으로 대했다는 것은 곧 자신에게 도전하고 자신의 권위를 모욕하는 행위라고 여겼다.그래서 왕표는 전북망을 불러 물 긷기, 장작 패기, 마당 쓸기, 꽃에 물 주기 같은 자질구레한 일감들을 시켰다. 심지어 주방에서 음식을 나르고 물을 따르는 일까지 맡겼다.전북망은 아무 말없이 모든 지시에 순순히 따랐다. 그는 스스로 먼지 속에 가라앉을 만큼 비천해진 존재로 여겼기에, 짓밟힐 자존심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며칠 동안 그는 수부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여기저기를 살폈다. 그리고 그는 수부가 이전에 그가 알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겉모습만 비슷할 뿐 내부는 거의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예전에는 수부에 부엌일을 도맡은 여자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인원이 남자였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많은 시녀와 하녀들이 추가되었고, 심지어 한 명의 주모가 살고 있었다. 그는 그 여인을 두세 번 본 적이 있었는데, 그녀는 임신 중이었으며 대략 5~6개월 정도로 보였다.수부에는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그녀는 외출할 때 가벼운 비단으로 얼굴을 가리곤 했다. 가려진 얼굴 사이로 보이는 눈은 사람의 혼을 빼앗을 만큼 매혹적이었다. 전북망은 그녀의 신분을 사적으로 캐묻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저런 이야기는 자연히 들려왔다.사람들은 그녀를 원수의 부인이라 불렀다. 그녀가
송석석 일행은 왕이장과 시만자가 돌아오길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이 평서백부에 갔다는 소식과 심지어 모든 것을 터놓고 이야기를 했다는 말을 전해 들은 송석석은 약간 걱정스러웠다.요즘 평서백부의 상황이 불안정했기 때문이다."걱정하지 마. 화해하지 않았어."왕이장은 송석석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미소를 지었다."처음엔 꽤 감동적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나중엔 가식적이라는 생각이 들더라."돌아오는 길 내내 그는 노부인이 말하던 장면을 떠올리며 점점 더 명확하게 깨달았다.왕준의 진심 어린 감정 표현과 달리, 노부인의 모든 말은 마치 노부인 자신에게 들려주기 위해 한 것 같았다.그래서 그녀가 왜 그동안 그가 어떻게 지냈는지 묻지 않았는지도 설명이 된다. 그녀가 신경 쓴 것은 그와 최씨가 그녀의 말을 믿는지에 대한 여부였지, 왕이장 그 자체를 걱정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송석석은 이해하지 못한 채 시만자를 바라보았다. 시만자는 고개를 저으며 자신도 모른다는 뜻을 전했다."이제 가서 자자. 나도 졸리네."왕이장은 손을 뒤로 깍지 낀 채 방으로 돌아갔다. 이런 일에 더이상 얽매이지 않는 듯, 한결 가벼워 보이는 왕이장의 모습에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시만자는 남아있던 사람들에게 말했다."왕준과 노부인 모두 무척 격앙된 상태였고 계속 울더라고. 그런데 왕이장이 왜 가식적이라고 하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송석석은 최씨도 방 안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는 얘기를 듣고 말했다."다음에 최씨 부인에게 물어봐야겠어."그전까지 묻지 않은 이유는 단지 오사형이 먼저 얘기를 꺼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그가 얘기를 꺼냈으니 묻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다음 날 아침, 송석석이 최씨를 찾아가려던 찰나에 최씨가 먼저 찾아왔다.최씨는 아주 직접적으로 두 가지 일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첫째, 평서백부의 일부 재산을 왕이장에게 "판매"하도록 그를 설득해달라는 것이었다.둘째, 왕이장이 노부인의 말을 믿지 않도록 하고, 그녀와 화해하지도 말고, 왕
왕이장과 시만자는 말을 끌고 나가 넓은 거리를 걸었다. 살랑살랑 부는 밤바람에 취기가 모두 날아갔다."오늘 밤 일은 너무 충동적이었어. 너를 데리고 오는 게 아니었는데…"시만자가 약간 후회하는 표정으로 말했다."나쁘지 않았어."왕이장이 대답했다."지금 마음이 어떤데? 그들과 화해한 거야?""아니."왕이장은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전보다는 훨씬 여유로운 표정을 지어보였다."노부인이 나와 최씨를 방으로 불러서 정말 많은 이야기를 했어. 하지만 단 한 번도 묻지 않더라. 그동안 내가 어떻게 지냈는지, 내가 끌려간 뒤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 말이야. 그저 자신이 했던 일에 대해 변명하고, 잘못이 없다고 강조할 뿐이었어.""그랬구나"왕이장은 약간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함께 다시 자유분방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나는 처음 산을 내려갔을 때를 기억해. 한 달 동안 외지에서 지내고 돌아오니 사부와 사숙이 나를 둘러싸고 묻더라. 뭘 먹었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어떤 여관에서 묵었는지, 싸움은 했는지, 남에게 속여 돈을 빼앗긴 적은 없는지, 그리고 어떤 경치를 봤는지.""내 사부님께서도 그랬어."시만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게 당연하지.""맞아."왕이장은 다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나는 어릴 때부터 사랑받고 자란 아이였어. 내게도 집이 있었다고."시만자는 그의 기분이 어떤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꽤 좋아 보였다."그래서, 이제는 마음을 정리한 거야?""응. 그런데 그렇게 나쁘지도, 좋지도 않아. 그러니 굳이 화해할 필요도, 원망할 필요도 없지."왕이장은 노부인이 남편을 독살해 복수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감동해야 마땅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감동하지 않았다.그에겐 비록 아이가 없지만 만약 있었다면, 심지어 그 아이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라면, 멀리 떨어진 곳으로 보내어 법도의 가호를 받게 해야 한다 할 때 그는 반드시 함께 갔을 것이다. 자신이 직접 가지 못한다면 믿을 만한 사람이라도 꼭 붙여 함
노부인은 여전히 격한 기쁨과 슬픔에 잠겨 있었다. 그녀는 왕이장의 소매를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 아무리 바라봐도 부족하다는 듯이 만족할 줄 모르며 그를 쳐다보았다. 눈물은 마를 틈이 없었다."이 어미를 용서해줄 수 있겠니? 나는 정말 몰랐단다… 어미가 이미 너의 복수를 해줬으니 제발 용서해주거라…"그러자 왕이장은 잠시 침묵하더니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말했다."노부인, 왕교여는 확실히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 아이는 그 화재 속에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석산에 보내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에서 고통받다 죽었습니다. 장청 도인은 그에게 온갖 고된 일을 시켰고, 툭하면 때리고 욕하여 결국 그를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습니다. 마지막엔 그를 밖으로 내던져버렸고, 그는 굶주린 늑대들에게 먹히고 말았습니다.""그럴 리가 없어!"노부인은 눈을 크게 뜨고 왕이장을 바라보며 소리쳤다."처음에는 인정하더니, 왜 지금 와서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냐? 넌 여전히 나를 원망하고 있구나, 그렇지?"왕이장은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차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저는 당시 그곳에 교여와 함께 있었던 도동입니다. 교여와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그의 일을 알고 있는 것일 뿐, 저는 교여가 아닙니다.""하지만 네 이 얼굴은…….""어머니!"최씨가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말했다."이 사람은 시숙의 친구입니다. 시숙이 아닙니다!"노부인은 멍한 눈빛으로 며느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분명…….최씨는 왕이장에게 말했다."먼저 돌아가십시오. 며칠 후에 제가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안돼, 못 가! 절대 못 간다!"노부인은 필사적으로 왕이장을 붙잡으려 했지만, 그는 이미 일어나 떠난 뒤였다. "어머니."최씨가 그녀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억지로 강요하지 마십시오. 그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나요? 그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어머니는 모르시잖아요. 분명 그의 마음속에 원망이 가득할 겁니다. 어머니께서 죄책감을 느끼신다면 그를 위해 보상해주세요. 집안의 재산 대부분을
최씨는 인삼탕을 노부인에게 건네 마시게 했다. 그녀는 왕이장과 함께 자리에 앉아 노부인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그때 나는 정말 속았다. 장청 도인이 늘 했던 말이, 우리 교여가 복을 가져다줄 아이라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교여를 아주 아끼는 것처럼 보였어. 교여가 병에 걸렸을 땐 나보다 더 안절부절못하며 약을 구하고 의원을 찾으러 다녔지. 하지만 교여의 몸은 날이 갈수록 약해졌다. 다섯 살이 넘자 거의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할 정도였단다."이것은 노부인의 가슴 깊이 새겨진 상처였다.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여전히 숨조차 쉬기 힘들 만큼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장청 도인이 말하길, 방법을 쓰지 않으면 교여는 한 달도 버티지 못할 거라고 하더구나. 석산의 사철에 보내어 부처의 가호를 빌어야만 18살 고비를 넘기게 되고 그 이후로는 평생 순탄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하였다.""네 조부는 이런 말을 전혀 믿지 않으셨다. 다 거짓말이라며 반대하셨지. 하지만 네 아버지가 장청 도인을 데리고 조부를 찾아갔고, 뭔가를 얘기한 끝에 조부는 결국 동의했다. 심지어 매년 삼천 냥의 은화를 그 도인에게 주며 네 수명을 늘리기 위해 연꽃등을 밝혔다. 불교와 도교의 가호를 모두 받아야 한다는 이유였단다.""그런데 그 모든 것이 거짓말이었다니!"노부인의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졌다. 그녀의 표정에는 분노와 살기만이 가득했다."나를 속였고 네 조부를 속였다. 아니, 모든 사람을 속였어! 사실 장청 도인이 네 아버지에게 한 말은 네가 조부에게 복을 가져다주는 존재라는 것이었다. 네가 살아 있는 한 네 아버지는 작위를 이어받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일찍 죽을 가능성도 있다고 했지. 그래서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널 죽이려 했다. 의원이 준 약을 전부 바꿔치기 했는데, 일부는 미세한 독을 섞었고, 일부는 약효가 상충되게 했으며, 일부는 심맥과 기혈을 깎아내리는 성분으로 바꿔 놓았다. 그래서 네 몸이 점점 악화된 게야."노부인은 숨을 헐떡이며 말을 쏘아붙였는데, 눈빛에는
어떤 힘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걷기도 버거워 보이던 노부인이 갑자기 날렵하게 움직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금숙과 천마마조차 그녀를 따라잡지 못할 정도였다.노부인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심장 박동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눈앞에는 정원의 풍경도, 주변의 사물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머릿속에는 수년간 불타오르던 큰` 화재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불길 속에서 울려 퍼지던 처절한 비명이 귀를 맴돌았다.그때 그녀는 누군가에게 끌리고 붙잡혀 움직이면서도 그 불길이 모든 것을 삼키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다.그녀의 막내아들은 그렇게 불 속에서 죽었다.불길 속에서 여러 시신이 끌려 나왔지만 그녀는 그 시신들 중 어느 것이 자신의 아들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그녀는 몇 번이나 의식을 잃을 정도로 크게 오열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죽지 않았을 가능성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감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병약해 걷는 것조차 누군가의 부축이 필요했던 아들이 어떻게 그 불바다 속에서 살아남았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노부인이 본채에 도착했을 때, 그녀의 눈에는 오직 한 사람만이 보였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눈물이 계속 흘러내리면서 그녀의 시야는 더욱 흐릿해졌다. 그녀는 온 힘을 다해 그 희미한 그림자를 따라 걸어갔다.노부인은 고개를 약간 기울이며 힘없고 불확실한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네가 내 아들이냐?"왕이장은 그녀를 알아보았다. 마음속으로 가장 원망스러워했던 사람이었다.하지만 그 순간 노부인의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을 보고 왕이장은 가슴 한구석에서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그는 움직이지 않고 대답도 하지 않았다."어머니, 저 아이가 교여예요." 왕준이 울면서 옆에서 외쳤다."아……!"노부인은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르며 왕이장을 끌어안았다. 그녀의 기억 속 깊은 과거가 검고 짙은 밤을 뚫고 되살아났다. 그녀의 가슴은 마치 한 조각이 도려내
왕준이 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화난 목소리로 외쳤다."여기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거냐? 어머니께서 언제 친아들을 버린 적이 있다고 그래? 나도, 큰형도 잘 지내고 있지 않느냐!""너희는 잘 지낸다고? 그럼 나는?"왕이장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너무 힘을 준 나머지 위와 목이 자극을 받아 고통스러워졌다. 그는 위를 부여잡고 웅크린 채 앉아 내력으로 속을 진정시키려 애썼다.그의 말에 왕준은 한동안 얼어붙었다. 그러다 무언가를 떠올린 듯 그를 급히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최씨 역시 무언가 기억난 듯 당황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그녀가 처음 집에 들어왔을 때 들었던 이야기였다. 어머니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고, 막내아들은 병에 걸려 치료하지 못해 사찰로 보내져 길러졌다. 그러나 사찰에 화재가 발생해 어머니는 막내아들이 불타 죽는 것을 두 눈으로 지켜봐야 했다.‘설… 설마 그때 죽지 않았던 건가?’"이름이 무엇이냐?"왕준은 이미 울먹이며 물었다. 그의 입술은 계속해서 떨렸다. 그는 왕이장을 간절히 바라보았다."노부인에게 물어보십시오, 노부인에게."왕이장은 위를 부여잡고 힘겹게 의자에 앉아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더 이상 힘이 없었다.최씨는 다가가며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기억났어요. 당신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아요. 여러 번 백부 문 앞에서 서성였잖아요."왕이장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최씨는 곧바로 시만자를 바라보았다.하지만 시만자 또한 최씨를 보지 않고 왕이장에게 말했다. "왕노오, 여기까지 왔으니 이들에게 분명히 말해. 왕교여라는 이름으로 어릴 적 여자 아이처럼 길러졌고, 다섯 살 때 사찰에 버려졌으며 학대받아서 몇 달 만에 죽을 뻔하다가 또 다시 버려졌다고. 사부가 널 주워서 살려줬지. 너는 아무 잘못도 없어. 잘못한 건 이들이야. 그러니까 제대로 따져봐."왕준은 마치 벼락을 몇 차례나 맞은 사람처럼 멍하니 굳어버리고 말았다. 눈동자조차 움직이지 않았다.그리고 곧 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