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청에서 시만자는 진심으로 사과하는 연왕비를 냉담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자기가 사촌 언니를 잘 알지 못했다면 정말 믿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말이야. 언니를 믿어줘. 가의가 내 앞에 와서 울며 불며 정의를 찾아달라고 부탁하는 바람에 내가 마음이 약해져서 도왔던 것이야. 어제 네가 돌아간 후에 왕야께서 이 일로 날 엄청 꾸짖었단다. 공방은 여자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니 내가 오명을 씌우면 안 되는 것이라고. 언니가 잘못했으니 용서해 줄 수 있겠니?” 시만자는 그녀가 말한 한 글자도 믿지 않았다. 그녀가 잠깐 마음이 약해져서 가의를 도왔다는 말이 믿겨지지 않았고, 연왕이 공방은 여자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곳이라고 했다는 것도 믿지 않았다. ‘송석석의 사촌 이모인 전 연왕비가 어떻게 살해되었는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가 어떻게 모를 리가 있겠어?’ 시만자는 담담한 표정으로 그녀의 말을 듣고 그녀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며 사촌 언니가 연왕비가 되더니 다른 건 몰라도 연기하나는 제대로 배웠다고 생각했다. “말이야 누구든 듣기 좋게 할 수 있지. 사과하러 오면서 왜 미리 편지를 보내지 않았어? 내가 꼭 저택에 있을 줄은 어떻게 알고?” 그러자 시민주의 얼굴이 굳어졌다. ‘방금 감정 연기에만 집중하느라 이런 자세한 것까지 물을 줄은 몰랐네.’다행히도 춘행이 옆에서 그녀를 위해 무릎을 꿇고 말했다. “시 아가씨, 왕비께서는 어젯밤에 밤새 울면서도 감히 사과하러 올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왕야께서 잘못을 저질렀으니 인정하고 시 아가씨의 용서를 빌어야 자매의 감정을 상하지 않는다고 해서 왕비께서 선물을 준비해서 사과하러 온 것입니다. 시 아가씨께서 저택에 없다면 원래 시 아가씨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참이었습니다.” 하지만 시만자는 여전히 그녀의 말을 눈곱만큼도 믿지 않는듯 했다. 시만자는 어제 자신의 행동이 무모하다고 느낀 후, 밤에 침대에 누워 무슨 일이든 충동적으로 하면 안 된다며 반성했다. 그래서 그녀는 시민주의 사과 뒤에 무엇이 숨
다음날 조회 후, 사여묵은 최근에 재심된 사건을 가지고 황실 서재에 가서 알현하고는, 전례에 따라 역모 사건 조사의 진행 상황도 보고했다. 역모 사건이 아직 종결되지 않아 대리사는 여전히 조사에 집중해서 간격을 두고 보고를 해야 했다. 하지만 그것도 단지 절차를 밟는 것뿐이었다. 지금 가장 의심스러운 사람은 바로 연왕이었지만 황제는 줄곧 대리사에 조사를 지시하지 않았고 공개적으로 이 일을 언급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사여묵이 분명히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숙청제는 사건을 훑어보더니 역모사건의 진전에 대해 말했다. “여전히 진전이 없는 것 같군.” 그러자 사여묵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황제가 명령을 내려야 진전이 있겠지.’ “그럼 계속 조사하거라.” “네.” 숙청제는 사여묵이 대답하고도 떠나지 않는 모습을 보고 물었다. “또 무슨 일이 있느냐?” 그러자 사여묵이 웃으며 말했다. “중요한 일은 아니지만, 연 황숙께서 오늘 밤 제 일가를 연황실로 초대했습니다.” 숙청제는 고개를 들고 약간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웃으며 말했다. “황숙이 진성으로 돌아온 지 꽤 되었으니 네가 후배로서 그를 초대해야 마땅하지만 그가 먼저 너를 초대했으니 가보거라.” 사여묵은 흰 이빨을 드러내며 흐뭇한 표정으로 답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숙청제의 표정은 모처럼 따뜻했다. “그래, 연황실에 많은 진기한 꽃을 심었다고 하던데 가서 잘 구경해 보거라.” 사여묵도 여전히 웃음을 보였다. “저도 그럴 생각입니다.”“승상이 날 기다리고 있으니 이만 가보거라.” “예, 그럼 전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사여묵은 인사를 하고 몸을 굽히며 나갔다. 숙청제는 그의 뒷모습을 보자, 입가에 웃음이 가시지 않았고 마음속이 왠지 후련해진 것 같았다. 역모사건이 일어난 후부터 그의 마음속에는 항상 큰 돌덩이가 깔려있는 느낌이 들었다. 모든 사람이 수상하게 느껴졌는데, 연왕에게까지 의심이 몰리자 마음속의 돌덩이는 더 무거워져 숨조차 쉴 수가
무상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다른 여자라면 왕야의 약을 써도 되겠지만 시만자는 보통 약으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자 연왕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모두 감정을 주체할 수 없게 하는 약 아닌가? 당신 것은 뭐가 다르단 말인가?” 그러자 무상이 말했다. “왕야님의 약은 사실 감정을 주체할 수 없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감정이 생기게 할 뿐입니다. 하지만 제 약은 묘독의 일종이라 독소가 뇌를 마비시켜 그녀와 결합한 사람에게 감정이 생기게 할 수 있습니다.” 연왕은 기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좋은 약이 있으면서 왜 진작에 내놓지 않았는가? 그녀가 나에게 감정만 생긴다면 내 바람이 곧 그녀의 바람이 될 것이 아닌가?” 그러자 무상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왕야님, 감정을 얽매는 것이란 심지에 어긋나는 일이기에 짧은 시간 동안 밖에 유지할 수 없습니다.” “얼마나 버틸 수 있는가?” “열흘이나 보름 정도로 예상 됩니다.” 도자기 병을 받은 연왕의 눈 밑엔 어두운 빛이 번쩍였다. “효과가 지난 후 약을 계속 쓰면 시간을 연장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무상은 눈썹을 찌푸리고 말했다. “아무래도 독이다 보니 신체에 손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약을 세 번 복용한 선례가 있었는데 중독된 사람은 치매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독을 많이 사용하면 뇌가 손상되어 바보가 되어 사망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연왕은 냉담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바보가 되면 더 통제하기 쉽지 않느냐? 그렇게 된다면 시 씨 가문에서 나보고 그녀에게 잘해달라고 빌겠지!” 무상은 그가 점점 편파적인 선택을 하려는 것을 보고 주의를 주었다. “왕야님, 비록 성공은 사람이 하는 데 달렸다고 하지만 모든 계획을 한 사람만 통해서 통제한다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입니다. 자칫하면 역효과가 날 수도 있으니까요.” 무상은 시만자가 어느 정도 무게는 있지만 시 씨 가문과 송석석이 물러날 만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일은 너무 위험해서 잘못하면 역효과가 날 수도 있었
유시가 되자 북명황실의 마차 두 대가 연황실 입구에 도착했다. 마차가 도착하자 문지기는 급히 들어가서 알렸고, 연황실은 중문을 열고 그들을 맞이했다. 평시에 흔히 열지 않는 중문을 연 것을 보면 얼마나 성대하게 준비했는지 알 수가 있었다. 시민주와 측비 김씨는 옥경과 옥영 두 현주를 데리고 문 앞에서 맞이했다. 시만자는 여식이기 때문에 사여조와 사여령은 나오지 않았다. 두 대의 마차를 보았을 때 측비 김씨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연왕의 계획을 모두 알고 있어서 오늘 밤에 오는 사람이 시만자일 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갑자기 마차가 두대나 온 것이었다. 그 마차에서 사여묵과 송석석이 내리는 것을 보자, 그녀는 완전히 멍해졌고 얼굴에 피어났던 웃음이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시만자만 초대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측비 김씨는 이를 갈며 옆에 있는 시민주에게 물었다. 하지만 시민주는 기뻤다. 그녀는 왕야께서 시만자만 초대했지만 지금은 사여묵과 송석석까지 왔으니 더 기뻐할 것이라 생각했다. 기뻐하던 중에 측비 김씨의 말투에 화가 난 그녀는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져 버렸다. “넌 나와 말하는 태도가 그게 뭐냐? 내가 체면이 있으니 초대했지 않았느냐? 초대할 능력이 없으면 입이나 다물어라.” 측비 김씨는 미련한 여자와 상대하기 싫어 옆에 있는 하녀에게 분부했다. “어서 들어가 왕야께 아뢰어라.” 하녀는 명을 받들고 급히 뛰어 들어갔다. 연왕은 하녀가 아뢰는 말을 듣고 놀라 서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라고? 사여묵과 송석석도 왔다니?!” 그는 오늘 서재에 있을 예정이니 시만자를 만나러 가지 않고 측비 김씨와 시민주에게 두 군주를 모시고 접대하도록 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시만자가 약을 마신 후에 측비 김씨가 그녀를 들여보낼 것이었다.연왕의 놀라움과 분노에 비해 무상은 오히려 기뻐하며 말했다. “왕야님, 이건 분명 좋은 기회일 것입니다. 전에 북명황실에 여러 번 갔었지만 대접을 받지 못했고 개인적으로 사여묵에게 약속을 잡아도 나오지 않았지
무상은 마음이 놓이지 않아 계속 그를 말릴 뿐이었다. “왕야님, 큰일을 이루고 나면 어떤 여자가 나타나지 않겠습니까? 그때가 되면 시만자도 눈에 차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자 연왕은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억울함이 밀려온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됐다. 난 근 몇 년 동안 극도로 자제하며 욕망을 억누르고 있었다. 조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으니까. 지금까지 정말로 내가 마음에 드는 여자가 없었는 줄 아느냐? 본왕은 여자에 얽매이다가는 일을 그르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참아온 것이란 말이다. 그리고 시만자는 다르다. 그녀는 유일하게 내가 좋아하는 동시에 날 도와줄 수 있는 여자란 말이다. 그녀는 연왕비의 자리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다.” 그의 말은 들은 무상은 놀라움과 분노를 참지 못하고 처음으로 엄격한 어조로 말했다. “왕야님께서 마음에 든다는 것은 시만자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까? 만약 정말 그런 마음이라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왕야님의 비열한 행동을 감추기 위한 핑계입니다. 왕야님께서 정말로 그녀를 사랑한다면 그녀의 결백을 훼손하는 방식으로 그녀를 얻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심지어 내가 왕야님께 이 약의 최종 결과가 치명적일 것이라고 말할 때도 왕야님은 조금도 주저하시지 않았습니다.” 무상의 말에 속내를 들켜버린 듯한 연왕은 화가 나서 아예 감추려 하지도 않았다. “내가 정말 그런 생각이라면 또 어떠냐? 감히 내가 비열하다고 할 것인가? 다른 남자들은 첩이며 외실이며 여색을 밝히는데 나 이 정도면 욕심을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그저 어쩌다 한 번 참지 못한 걸 가지고 굳이 이렇게까지 말을 해야 하겠느냐? 넌 내 참모일 뿐이야, 내가 어떤 짓을 하든 네가 참견할 바가 아니란 말이다.” “왕야님,” 무상은 입을 다물기는커녕 더욱 냉혹하게 말했다. “왕야님의 추구가 첩과 외실들이라면 내가 왕야님을 모시고 절정을 향할 복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왕야님께서 소원을 이루고 앞길이 창창하길 바라겠습니다.” 무상의 말이 끝나자 서재는 쥐 죽은 듯
사여묵이 웃으며 말했다. “황숙께서는 어찌 내가 화났다고 생각하십니까? 설마 황숙께서 나한테 미안한 일을 한 건 아니겠지요?” 연왕은 껄껄 웃으며 그의 앞에서 장난스럽게 손을 흔들었다. “장난치기는.” 그는 먼저 정좌로 다가가 앉더니 말했다. “모두들 서 있지만 말고 앉거라.” 그는 금실로 학을 수놓은 비단옷을 입었고 입술은 약간 물들인 듯 붉었는데 얼굴에는 자신감이 넘치는 미소가 가득했다. 하지만 시만자는 그를 한 눈 보더니 공작새 같다고 생각했다. 모두들 자리에 앉은 후 무상은 사여령과 사여조를 데리고 들어왔는데 두 형제는 원래 송석석과 사여묵을 엄청 좋아했지만 지금은 좀 서먹서먹했다. 그래서 인사를 드린 후 자리에 앉아 어색한 표정으로 감히 사여묵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사여묵은 무상을 훑어보았는데 그는 무상이 연왕 뒤에서 책략을 짜는 참모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그와 연왕 사이에 다툼이 있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두 사람의 눈 가에 여한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결코 좋은 일을 위한 다툼은 아닌 것 같았다. 무술을 익힌 사람이라면 쉽게 감지할 수 있었다. 그는 눈길을 돌려 연왕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황숙께서 갑자기 우리를 황실로 초대하시다니. 혹시 무슨 기쁜 일이 있는 것입니까?” 그러자 연왕은 화가 나 속으로 중얼거렸다. ‘널 초대하진 않았거든!’ 그러고는 시민주를 힐끔 쳐다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북명황실로 여러 번 갔지만 모두 네가 바빠서 만나지 못했으니 차라리 너와 조카며느리를 초대하는 것이 낫겠다 싶어서 그랬지. 식구끼리 자주 만나야 하지 않겠느냐?”사여묵은 웃고 싶은 마음을 겨우 참았다. ‘내가 정말 시간이 없어서 자신을 문전박대했다고 생각하는 건가?’ “황숙의 말씀이 옳습니다. 가족이니 자주 만나야지요.” 사여묵은 그와 이야기를 했고 송석석은 은밀히 그를 관찰했다. 몇 마디를 주고받았을 뿐인데 그의 눈동자는 이미 시만자의 얼굴에 여러 번 떨어
옥경은 송석석을 두려워했지만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화가 난듯 벌떡 일어났다. “송석석, 내 명예를 훼손해서 당신이 얻을 수 있는 게 대체 무엇입니까?!” 그러자 몽동이가 소리쳤다. “무엄하십니다. 일개 현주가 감히 왕비의 이름을 부르다니요!” 그러자 송석석은 손을 들어 몽동이에게 물러가라고 손짓한 다음 옥경을 바라보며 비꼬았다. “그렇게 말을 잘하는데 왜 당신 어머니가 박대를 당하는 것을 보고도 찍소리도 하지 못했답니까? 어머니를 위해 말을 할 수 없다면 적어도 옆에서 정성껏 시중을 들어 당신들을 낳아주고 길러주신 은혜를 갚았어야지요.” 옥경은 노여움을 금치 못했지만 시만자의 눈빛이 차갑게 쓸어오자 그녀는 순간 겁에 질려 욕은 하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게 당신과 무슨 상관입니까? 그렇게 잘 났으면 직접 가서 시중이나 들지 그랬습니까? 누가 입으로는 말 못 합니까? 그래도 사촌 이모인데 왜 직접 가서 시중들지 않았습니까?” 송석석은 냉소하며 말했다. “당신의 말에도 일리가 있군요. 자녀들이 효도를 하지 않고는 다른 사람을 비난할 수도 있었군요. 잘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목 씨 부인께 알려서 잘 선전하도록 부탁해야겠어요.” 그러자 연왕의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말했다. “옥경아, 네 사촌언니에게 무례하게 굴지 말거라.” 옥경은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송석석을 째려보더니 달갑지 않은 말투로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연왕은 마음속으로 옥경 현주보다 더 화가 났다. 왜냐하면 송석석이 이렇게 말하는 건 분명 그가 왕비를 박대했다고 비난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시만자 앞에서 그런 말을 하니 그는 더욱 체면이 서지 않았다.다행히도 사여묵이 오해를 풀었다. “자, 오늘같이 즐거운 날엔 옛이야기를 해서 모두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 맙시다.” 그러자 송석석은 사여묵에게까지 화를 냈다. “내가 틀린 말을 했습니까? 난 사촌 이모가 불쌍해서 그럽니다. 불효녀 둘을 낳은 것도 모자라 불효자식을 둘이나 키웠으니요!” 그러자 연왕의 얼
연왕은 옥경을 꾸짖으며 돌아가서 반성하라고 했다. 측비 김씨 또한 옥영 현주를 불러 함께 자리를 떠났는데, 문을 나서자마자 하녀를 데리고 송석석 일행을 쫓기 시작했다. 비록 저택에 암실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음대로 침입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시민주가 멍청해서 그들에게 이용이라도 당할까 봐 걱정되었다. 무상은 줄곧 사여묵을 몰래 관찰하고 있었는데 그가 왕야와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언짢은 표정으로 힐끔힐끔 밖을 내다보았는데 마치 젊은 부부가 다툰 후 화가 나면서도 상대방을 걱정하는 모습 같았다. 게다가 방금 송석석의 눈빛에 드러난 노여움은 연기하기도 어려웠다. 그러니 송석석이 연황실에 온 목적은 전 연왕비의 화를 풀어주기 위해서 온 것 같았다. 무상은 그것이 송석석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담아두었던 화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이 참에 그녀가 화를 풀 수 있게 하는 것도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여식들이 나갔으니 왕야와 이야기하기도 더 편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여묵아, 어머님은 건강하시지?” 연왕은 사여묵에게 혜 태비의 안부를 물었다. 그러자 사여묵이 말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머니는 건강하십니다. 영태비 어르신께선 어떠십니까?” 연왕은 살짝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말했다. “드디어 좀 나아지셨단다.” 그러자 사여묵이 물었다. “그럼 황숙께선 언제 연주로 돌아가실 예정 이십니까?” 연왕은 큰 소리로 웃더니 말했다. “조카는 황숙이 진성에 머무르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이냐? 왜 그렇게 황급히 황숙을 연주로 돌려보내려고 하는 것이냐?” 사여묵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그냥 물어본 것입니다.” 그러자 무상이 연왕 대신 대답했다. “왕야께선 아무래도 월말이면 연주로 돌아가야 하실 것 같습니다.” 사여묵은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무상의 말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여전히 밖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잠시 침묵이 흐른 후에도 사여묵이 다른 질문을 하지 않아 무상은 그가 온 목적
다음 날, 전북망은 소위 합동 훈련이라는 것이 병력 배치나 전술 훈련이 아니라 농사를 짓는 일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9월은 겨울 밀을 심기에 적기였다. 남강은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지역으로, 물자가 여전히 부족했으며 전쟁으로 인해 인구도 크게 줄어든 상태였다. 이에 병사들이 농사를 돕게 된 것이다. 밀 외에도 배추, 무, 과일 등을 심기도 했다.방천허는 전북망이 마침 좋은 시기에 도착했다며 서둘러 가서 합류하라고 말했다.전북망은 하루 종일 농사일에 시달렸지만, 그 와중에도 짬을 내어 필명에게 편지 한 통을 썼다.진성에서 전북망의 편지를 받은 필명은 편지를 본 후 한참 동안 멍하니 있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음…… 우리 사이가 이렇게 좋았던가?' 편지에는 자잘한 이야기가 빼곡히 적혀 있어 무려 3장이나 되었다. 대부분은 전에 전북망이 술에 취해 늘어놓았던 말들과 비슷했다.전북망은 원수부에서의 생활을 적으며 원수부가 얼마나 호화롭고 웅장한지 왕실조차 능가할 정도라고 표현했다.그는 원수부에 하인들이 구름처럼 많고 임신한 주모를 모시고 있으며, 그녀가 사용하는 물건이 모두 사치스러워 천금에 맞먹는다고 묘사했다.또한 농번기로 인해 현재 병사들이 농사를 지어야 하고, 농사가 끝난 뒤에야 훈련이 시작된다는 점을 언급했다. 병사들의 피부는 모두 새까맣게 그을렸지만 원수는 돼지처럼 하얗다고 비꼬기도 했다.뒤죽박죽한 이야기들을 잔뜩 늘어놓은 뒤, 평서백 부인에게 안부를 전해달라는 말을 덧붙였다.그 말을 마치고 나서는 자신도 한때 그런 사람이었고 비슷한 실수를 저질렀지만, 다른 사람이 자신의 과거와 같은 길을 걷는 것은 차마 볼 수 없다고 말하며 주저리주저리 이야기를 이어갔다.편지를 읽던 필명은 전북망이 왜 이런 말을 적었는지 눈치챘다. 평서백 부인에게 이 이야기를 전해 그녀가 마음 속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하려는 의도였다.필명은 전북망이 괜한 걱정을 한다고 생각했다.'평서백 부인처럼 현명한 사람이 왕표의 상황을 모를 리가 있나?'그러나
왕표는 전북망이 자신의 위엄을 충분히 보도록 한 뒤에야 그를 불러들였다.남강에 머문 지 2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왕표는 살이 많이 쪘다. 비록 과도한 비만 상태는 아니었지만, 호랑이 가죽이 깔린 팔걸이 의자에 앉아 있을 때면 턱 밑의 주름이 겹겹이 드러났다.그는 높은 자리에서 전북망을 내려다보며 위압적인 태도로 말했다.“너와 왕청여의 일은 이미 들었다. 그래, 너같이 평범하고 포부도 없는 자는 내 여동생과 어울릴 자격도 없지."전북망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반응 없이 한마디 대꾸만 하고 입을 닫았다.왕표는 차가운 코웃음을 치며 꾸짖었다."네가 이렇게 무능할 줄은 몰랐다. 현철위 부사령관이었지만 결국 관직에서 쫓겨났으니. 장군부는 정말 무능한 자들로만 가득 찼구나. 네 조부께서 하늘에서 너희 같은 무용지물을 보고 계신다면 눈을 감지 못하실 거다."전북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마에는 핏줄이 드러났다."불만이면 어쩔 거냐? 너희 장군부에서 나온 인간들이 대체 어떤 꼴이 났는지 봐라. 그리고 너 자신만 봐도 여자 하나한테 휘둘려 이 지경이 됐으니. 앞뒤로 세 명의 여자가 있었지만 그 누구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지 않냐……쯧, 우리 남자들의 체면을 다 구겨놨다!”왕표는 지금 그야말로 의기양양했다.그의 곁에는 절세미인이 있었고, 그 미인은 그의 아이를 임신 중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그녀 이전에도 왕표는 남강에서 원하는 여자는 누구든 손에 넣었다.언제나 여자들이 그를 즐겁게 하려고 애썼을 뿐이었다.그래서 그는 본능적으로 전북망을 깔보았다.위세를 충분히 떨친 뒤 왕표는 물었다."진성 쪽에 무슨 큰일이라도 있는 것이냐?"전북망은 대답했다."큰일은 없습니다."왕표는 의자 팔걸이를 매만지며 입가에 냉소를 띠고 말했다."그래? 그럼 여기로 오기 전에 최씨를 본 적이 있나?"전북망은 고개를 들고 답했다."원수께서 말씀하신 게 평서백 부인 입니까?"왕표는 그의 의도적인 물음 속 뜻을 간파하고 냉소를 지었다."왜? 내가 내 여자를 어떻게
그러나 뜻밖에도, 왕표는 전북망이 남강에 도착한 것을 알고 직접 그를 원수부의 부병으로 지명했다.원수부의 부병은 주로 왕표의 출행 준비와 그의 안전을 책임지는 역할이었다. 적의 자객이 잠입해 주군을 해치려는 시도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왕표가 있는 동안에는 이런 일이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과거 송회안이나 사여묵 시절에는 여러 번 이런 자객 사건이 있었다.왕표는 이미 진성의 노부인으로부터 온 편지에서 전북망이 왕청여와 협의 이혼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었다.왕표가 그의 여동생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차치하고, 현재 그의 신분으로 보아 전북망이 그의 여동생을 그런 식으로 대했다는 것은 곧 자신에게 도전하고 자신의 권위를 모욕하는 행위라고 여겼다.그래서 왕표는 전북망을 불러 물 긷기, 장작 패기, 마당 쓸기, 꽃에 물 주기 같은 자질구레한 일감들을 시켰다. 심지어 주방에서 음식을 나르고 물을 따르는 일까지 맡겼다.전북망은 아무 말없이 모든 지시에 순순히 따랐다. 그는 스스로 먼지 속에 가라앉을 만큼 비천해진 존재로 여겼기에, 짓밟힐 자존심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며칠 동안 그는 수부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여기저기를 살폈다. 그리고 그는 수부가 이전에 그가 알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겉모습만 비슷할 뿐 내부는 거의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예전에는 수부에 부엌일을 도맡은 여자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인원이 남자였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많은 시녀와 하녀들이 추가되었고, 심지어 한 명의 주모가 살고 있었다. 그는 그 여인을 두세 번 본 적이 있었는데, 그녀는 임신 중이었으며 대략 5~6개월 정도로 보였다.수부에는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그녀는 외출할 때 가벼운 비단으로 얼굴을 가리곤 했다. 가려진 얼굴 사이로 보이는 눈은 사람의 혼을 빼앗을 만큼 매혹적이었다. 전북망은 그녀의 신분을 사적으로 캐묻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저런 이야기는 자연히 들려왔다.사람들은 그녀를 원수의 부인이라 불렀다. 그녀가
송석석 일행은 왕이장과 시만자가 돌아오길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이 평서백부에 갔다는 소식과 심지어 모든 것을 터놓고 이야기를 했다는 말을 전해 들은 송석석은 약간 걱정스러웠다.요즘 평서백부의 상황이 불안정했기 때문이다."걱정하지 마. 화해하지 않았어."왕이장은 송석석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미소를 지었다."처음엔 꽤 감동적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나중엔 가식적이라는 생각이 들더라."돌아오는 길 내내 그는 노부인이 말하던 장면을 떠올리며 점점 더 명확하게 깨달았다.왕준의 진심 어린 감정 표현과 달리, 노부인의 모든 말은 마치 노부인 자신에게 들려주기 위해 한 것 같았다.그래서 그녀가 왜 그동안 그가 어떻게 지냈는지 묻지 않았는지도 설명이 된다. 그녀가 신경 쓴 것은 그와 최씨가 그녀의 말을 믿는지에 대한 여부였지, 왕이장 그 자체를 걱정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송석석은 이해하지 못한 채 시만자를 바라보았다. 시만자는 고개를 저으며 자신도 모른다는 뜻을 전했다."이제 가서 자자. 나도 졸리네."왕이장은 손을 뒤로 깍지 낀 채 방으로 돌아갔다. 이런 일에 더이상 얽매이지 않는 듯, 한결 가벼워 보이는 왕이장의 모습에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시만자는 남아있던 사람들에게 말했다."왕준과 노부인 모두 무척 격앙된 상태였고 계속 울더라고. 그런데 왕이장이 왜 가식적이라고 하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송석석은 최씨도 방 안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는 얘기를 듣고 말했다."다음에 최씨 부인에게 물어봐야겠어."그전까지 묻지 않은 이유는 단지 오사형이 먼저 얘기를 꺼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그가 얘기를 꺼냈으니 묻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다음 날 아침, 송석석이 최씨를 찾아가려던 찰나에 최씨가 먼저 찾아왔다.최씨는 아주 직접적으로 두 가지 일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첫째, 평서백부의 일부 재산을 왕이장에게 "판매"하도록 그를 설득해달라는 것이었다.둘째, 왕이장이 노부인의 말을 믿지 않도록 하고, 그녀와 화해하지도 말고, 왕
왕이장과 시만자는 말을 끌고 나가 넓은 거리를 걸었다. 살랑살랑 부는 밤바람에 취기가 모두 날아갔다."오늘 밤 일은 너무 충동적이었어. 너를 데리고 오는 게 아니었는데…"시만자가 약간 후회하는 표정으로 말했다."나쁘지 않았어."왕이장이 대답했다."지금 마음이 어떤데? 그들과 화해한 거야?""아니."왕이장은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전보다는 훨씬 여유로운 표정을 지어보였다."노부인이 나와 최씨를 방으로 불러서 정말 많은 이야기를 했어. 하지만 단 한 번도 묻지 않더라. 그동안 내가 어떻게 지냈는지, 내가 끌려간 뒤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 말이야. 그저 자신이 했던 일에 대해 변명하고, 잘못이 없다고 강조할 뿐이었어.""그랬구나"왕이장은 약간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함께 다시 자유분방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나는 처음 산을 내려갔을 때를 기억해. 한 달 동안 외지에서 지내고 돌아오니 사부와 사숙이 나를 둘러싸고 묻더라. 뭘 먹었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어떤 여관에서 묵었는지, 싸움은 했는지, 남에게 속여 돈을 빼앗긴 적은 없는지, 그리고 어떤 경치를 봤는지.""내 사부님께서도 그랬어."시만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게 당연하지.""맞아."왕이장은 다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나는 어릴 때부터 사랑받고 자란 아이였어. 내게도 집이 있었다고."시만자는 그의 기분이 어떤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꽤 좋아 보였다."그래서, 이제는 마음을 정리한 거야?""응. 그런데 그렇게 나쁘지도, 좋지도 않아. 그러니 굳이 화해할 필요도, 원망할 필요도 없지."왕이장은 노부인이 남편을 독살해 복수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감동해야 마땅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감동하지 않았다.그에겐 비록 아이가 없지만 만약 있었다면, 심지어 그 아이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라면, 멀리 떨어진 곳으로 보내어 법도의 가호를 받게 해야 한다 할 때 그는 반드시 함께 갔을 것이다. 자신이 직접 가지 못한다면 믿을 만한 사람이라도 꼭 붙여 함
노부인은 여전히 격한 기쁨과 슬픔에 잠겨 있었다. 그녀는 왕이장의 소매를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 아무리 바라봐도 부족하다는 듯이 만족할 줄 모르며 그를 쳐다보았다. 눈물은 마를 틈이 없었다."이 어미를 용서해줄 수 있겠니? 나는 정말 몰랐단다… 어미가 이미 너의 복수를 해줬으니 제발 용서해주거라…"그러자 왕이장은 잠시 침묵하더니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말했다."노부인, 왕교여는 확실히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 아이는 그 화재 속에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석산에 보내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에서 고통받다 죽었습니다. 장청 도인은 그에게 온갖 고된 일을 시켰고, 툭하면 때리고 욕하여 결국 그를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습니다. 마지막엔 그를 밖으로 내던져버렸고, 그는 굶주린 늑대들에게 먹히고 말았습니다.""그럴 리가 없어!"노부인은 눈을 크게 뜨고 왕이장을 바라보며 소리쳤다."처음에는 인정하더니, 왜 지금 와서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냐? 넌 여전히 나를 원망하고 있구나, 그렇지?"왕이장은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차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저는 당시 그곳에 교여와 함께 있었던 도동입니다. 교여와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그의 일을 알고 있는 것일 뿐, 저는 교여가 아닙니다.""하지만 네 이 얼굴은…….""어머니!"최씨가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말했다."이 사람은 시숙의 친구입니다. 시숙이 아닙니다!"노부인은 멍한 눈빛으로 며느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분명…….최씨는 왕이장에게 말했다."먼저 돌아가십시오. 며칠 후에 제가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안돼, 못 가! 절대 못 간다!"노부인은 필사적으로 왕이장을 붙잡으려 했지만, 그는 이미 일어나 떠난 뒤였다. "어머니."최씨가 그녀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억지로 강요하지 마십시오. 그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나요? 그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어머니는 모르시잖아요. 분명 그의 마음속에 원망이 가득할 겁니다. 어머니께서 죄책감을 느끼신다면 그를 위해 보상해주세요. 집안의 재산 대부분을
최씨는 인삼탕을 노부인에게 건네 마시게 했다. 그녀는 왕이장과 함께 자리에 앉아 노부인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그때 나는 정말 속았다. 장청 도인이 늘 했던 말이, 우리 교여가 복을 가져다줄 아이라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교여를 아주 아끼는 것처럼 보였어. 교여가 병에 걸렸을 땐 나보다 더 안절부절못하며 약을 구하고 의원을 찾으러 다녔지. 하지만 교여의 몸은 날이 갈수록 약해졌다. 다섯 살이 넘자 거의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할 정도였단다."이것은 노부인의 가슴 깊이 새겨진 상처였다.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여전히 숨조차 쉬기 힘들 만큼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장청 도인이 말하길, 방법을 쓰지 않으면 교여는 한 달도 버티지 못할 거라고 하더구나. 석산의 사철에 보내어 부처의 가호를 빌어야만 18살 고비를 넘기게 되고 그 이후로는 평생 순탄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하였다.""네 조부는 이런 말을 전혀 믿지 않으셨다. 다 거짓말이라며 반대하셨지. 하지만 네 아버지가 장청 도인을 데리고 조부를 찾아갔고, 뭔가를 얘기한 끝에 조부는 결국 동의했다. 심지어 매년 삼천 냥의 은화를 그 도인에게 주며 네 수명을 늘리기 위해 연꽃등을 밝혔다. 불교와 도교의 가호를 모두 받아야 한다는 이유였단다.""그런데 그 모든 것이 거짓말이었다니!"노부인의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졌다. 그녀의 표정에는 분노와 살기만이 가득했다."나를 속였고 네 조부를 속였다. 아니, 모든 사람을 속였어! 사실 장청 도인이 네 아버지에게 한 말은 네가 조부에게 복을 가져다주는 존재라는 것이었다. 네가 살아 있는 한 네 아버지는 작위를 이어받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일찍 죽을 가능성도 있다고 했지. 그래서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널 죽이려 했다. 의원이 준 약을 전부 바꿔치기 했는데, 일부는 미세한 독을 섞었고, 일부는 약효가 상충되게 했으며, 일부는 심맥과 기혈을 깎아내리는 성분으로 바꿔 놓았다. 그래서 네 몸이 점점 악화된 게야."노부인은 숨을 헐떡이며 말을 쏘아붙였는데, 눈빛에는
어떤 힘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걷기도 버거워 보이던 노부인이 갑자기 날렵하게 움직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금숙과 천마마조차 그녀를 따라잡지 못할 정도였다.노부인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심장 박동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눈앞에는 정원의 풍경도, 주변의 사물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머릿속에는 수년간 불타오르던 큰` 화재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불길 속에서 울려 퍼지던 처절한 비명이 귀를 맴돌았다.그때 그녀는 누군가에게 끌리고 붙잡혀 움직이면서도 그 불길이 모든 것을 삼키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다.그녀의 막내아들은 그렇게 불 속에서 죽었다.불길 속에서 여러 시신이 끌려 나왔지만 그녀는 그 시신들 중 어느 것이 자신의 아들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그녀는 몇 번이나 의식을 잃을 정도로 크게 오열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죽지 않았을 가능성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감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병약해 걷는 것조차 누군가의 부축이 필요했던 아들이 어떻게 그 불바다 속에서 살아남았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노부인이 본채에 도착했을 때, 그녀의 눈에는 오직 한 사람만이 보였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눈물이 계속 흘러내리면서 그녀의 시야는 더욱 흐릿해졌다. 그녀는 온 힘을 다해 그 희미한 그림자를 따라 걸어갔다.노부인은 고개를 약간 기울이며 힘없고 불확실한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네가 내 아들이냐?"왕이장은 그녀를 알아보았다. 마음속으로 가장 원망스러워했던 사람이었다.하지만 그 순간 노부인의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을 보고 왕이장은 가슴 한구석에서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그는 움직이지 않고 대답도 하지 않았다."어머니, 저 아이가 교여예요." 왕준이 울면서 옆에서 외쳤다."아……!"노부인은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르며 왕이장을 끌어안았다. 그녀의 기억 속 깊은 과거가 검고 짙은 밤을 뚫고 되살아났다. 그녀의 가슴은 마치 한 조각이 도려내
왕준이 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화난 목소리로 외쳤다."여기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거냐? 어머니께서 언제 친아들을 버린 적이 있다고 그래? 나도, 큰형도 잘 지내고 있지 않느냐!""너희는 잘 지낸다고? 그럼 나는?"왕이장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너무 힘을 준 나머지 위와 목이 자극을 받아 고통스러워졌다. 그는 위를 부여잡고 웅크린 채 앉아 내력으로 속을 진정시키려 애썼다.그의 말에 왕준은 한동안 얼어붙었다. 그러다 무언가를 떠올린 듯 그를 급히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최씨 역시 무언가 기억난 듯 당황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그녀가 처음 집에 들어왔을 때 들었던 이야기였다. 어머니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고, 막내아들은 병에 걸려 치료하지 못해 사찰로 보내져 길러졌다. 그러나 사찰에 화재가 발생해 어머니는 막내아들이 불타 죽는 것을 두 눈으로 지켜봐야 했다.‘설… 설마 그때 죽지 않았던 건가?’"이름이 무엇이냐?"왕준은 이미 울먹이며 물었다. 그의 입술은 계속해서 떨렸다. 그는 왕이장을 간절히 바라보았다."노부인에게 물어보십시오, 노부인에게."왕이장은 위를 부여잡고 힘겹게 의자에 앉아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더 이상 힘이 없었다.최씨는 다가가며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기억났어요. 당신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아요. 여러 번 백부 문 앞에서 서성였잖아요."왕이장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최씨는 곧바로 시만자를 바라보았다.하지만 시만자 또한 최씨를 보지 않고 왕이장에게 말했다. "왕노오, 여기까지 왔으니 이들에게 분명히 말해. 왕교여라는 이름으로 어릴 적 여자 아이처럼 길러졌고, 다섯 살 때 사찰에 버려졌으며 학대받아서 몇 달 만에 죽을 뻔하다가 또 다시 버려졌다고. 사부가 널 주워서 살려줬지. 너는 아무 잘못도 없어. 잘못한 건 이들이야. 그러니까 제대로 따져봐."왕준은 마치 벼락을 몇 차례나 맞은 사람처럼 멍하니 굳어버리고 말았다. 눈동자조차 움직이지 않았다.그리고 곧 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