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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Author: 유리
last update Last Updated: 2023-11-22 13:10:59
나상준의 눈빛이 처음으로 잠깐 흔들렸다.

그도 왜 이러는지 종잡을 수 없었다.

그는 얕은 한숨을 내쉬고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캐리어에 눈길이 갔다.

중간 사이즈의 크지도 작지도 않은 캐리어 하나뿐이었다.

마치 잠시 출장을 나갔다가 돌아올 것처럼 가벼운 짐이었다.

“이혼서류는 확인했지? 이건 가현이가 따로 뽑은 서류인데 메일로 보낸 것과 똑같아.”

“확인해 보고 사인하고 법원에 제출하면 돼.”

차우미는 미리 준비했던 이혼서류를 담담한 표정으로 나상준에게 건넸다.

나상준은 서류를 펼쳤다. 큼지막하게 쓰여진 협의 이혼 신청서라는 글자가 왠지 거슬렸다.

그는 서류를 뒤로 넘겼다.

차우미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마치 회사에서 업무를 처리하듯이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녀가 원해서 한 결정은 아니었지만 그와 결혼한 걸 후회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어느새 그를 사랑하게 된 것도.

3년을 같이 보낸 시간에 그녀는 아무런 유감도 없었다.

“난 사인했으니까 문제없으면 당신도 사인해.”

나상준이 마지막 장을 펼치자 차우미는 준비한 볼펜을 그에게 건넸다.

볼펜까지 벌써 준비해 놓았다니.

평소에도 그녀는 항상 존재감이 없으면서도 그가 불편함이 없도록 모든 걸 대신 준비해 주었다.

나상준은 착잡한 시선으로 차우미를 바라보았다.

그가 차에서 내려서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줄곧 잔잔한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어쩌면 그녀는 이 관계를 이미 진작에 내려놓은 것 같았다.

나상준은 호수처럼 고요한 그녀의 눈동자를 빤히 응시하다가 볼펜을 들고 사인란에 묵묵히 사인했다.

그러자 그녀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모든 게 순조로웠다. 그들은 그 길로 캐리어를 차에 싣고 법원으로 향했다.

이혼 수속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여가현이 말했던 것처럼 법원 직원들 점심 시간 전에 그들은 모든 절차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밖에서 대기하던 운전기사가 차 문을 열어주었다.

“어디로 갈 거야? 데려다줄게.”

차에 오르기 전, 그가 걸음을 멈추고 그녀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냥 형식적인 말로 들릴 뿐, 진심은 느껴지지 않았다.

차우미는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알아서 갈 수 있어. 일 봐.”

그가 바쁜 사람이라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래.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

그는 아무런 미련없이 차에 올랐다. 마치 평소에 그녀를 집에 두고 출장을 가는 것과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차는 곧바로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

뒷좌석에 탄 나상준은 백미러로 멀어지는 그녀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있었다.

핸드폰 진동음이 울리자 그는 상념을 멈추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대표님, 뉴욕 지사에 문제가 좀 생겨서 직접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티켓 예약하고 알려줘.”

“네.”

차우미는 그 자리에 서서 차가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시야에서 그의 차가 완전히 사라지자 그녀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맑았고 따스한 햇살이 얼굴을 비춰주고 멀리서 봄꽃의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그녀는 손을 들어 광선을 살짝 가리고 예쁘게 피어난 구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봄은 새 생명이 피어나는 계절이다.

‘행복해야 해, 상준 씨. 그리고 나도 행복해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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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서흔은 여가현의 전남자친구였다. 차우미도 여가현을 통해 강서흔을 알게 되었다.온이샘은 강서흔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여가현이 데이트를 하면서 차우미를 자주 끌고 나갔기에 그녀와 온이샘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처음에는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었고 차우미는 조용한 성격이었기에 온이샘과 단 둘이 접촉할 기회는 많지 않았다. 그래도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같은 대학 출신이라 선배라고 친근하게 부르며 한때는 꽤 친하게 지냈었다.나중에 여가현과 강서흔이 헤어지면서 점차 연락이 뜸해지게 되었다.강서흔 얘기가 나오자 그녀는 바로 온이샘을 기억해냈다.그는 매너가 온몸에 배긴, 항상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던 신사였다.차우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탄성을 질렀다.“이샘 선배?”차우미는 자신보다 몇 살 많은 온이샘을 오빠처럼 친근하게 생각했다.“우미 씨, 이제 퇴근하자.”옆에 있던 조각사가 공구를 내려놓으며 말했다.“벌써요?”차우미가 의외라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다섯 시 다 됐잖아. 저거 봐.”차우미는 그제야 시간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간만에 같이 밥이나 먹으러 갈래?”온이샘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제안했다.차우미는 이런 초대가 약간은 당황스러웠다. 예전에는 친하게 지냈지만 3년이나 연락을 안 하고 지내던 사이인데 갑자기 같이 밥을 먹으려니 어색했다.하지만 거절하기도 미안해서 초대에 응하기로 했다.“그래. 잠깐만 기다려. 정리 좀 하고.”“천천히 해.”차우미는 공구를 깔끔하게 정리해 공구함에 넣고 작업대도 깨끗하게 닦은 뒤에야 핸드폰과 핸드백을 챙겨 나왔다.온이샘은 밖에서 조용히 그녀를 기다렸다.그는 큰 키에 부드러운 인상을 가진 훈남이었다.복도를 지나가던 사람들은 잘생긴 미남이 이러고 서 있으니 저도 모르게 자꾸만 시선을 주었다가 그가 차우미에게만 시선을 주는 것을 보고 무슨 상황인지 알아차렸다.“가자.”“그래.”그렇게 두 사람은 같이 박물관을 나왔다.복도를 지나가면서 동료 직원들이 인사를 건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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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그런 상황을 전혀 모르는 차우미는 박물관을 나서자마자 온이샘에게 먹고 싶은 걸 물었다.멀리서 자신을 보러 온 손님이니 자신이 밥을 사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온이샘도 거절하지 않고 사주는 대로 먹겠다고 했다.차우미는 그에게 가리는 음식은 없는지 확인하고 현지에서 유명한 한정식집으로 그를 데려갔다.식당에 도착하자 그녀는 집에 전화를 걸어 친구랑 약속 있으니 조금 늦게 들어가겠다고 말씀 드렸다.그녀가 전화를 끊자 온이샘은 그녀에게 음료수 하나를 건네며 물었다.“내가 괜히 와서 방해한 건 아니지?”차우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아니야.”부드럽고 예의 바른 성격은 여전했다.온이샘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메뉴를 주문하고 차로 입가심을 한 뒤, 차우미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그런데 왜 갑자기 안평까지 왔어? 무슨 일 있어?”온이샘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응, 볼일이 좀 있어서. 왔다가 네가 여기 있다는 얘기 들어서 얼굴이나 보려고 온 건데 내가 괜히 방해만 한 건 아닌지 몰라.”차우미는 온이샘이 여기까지 자신을 찾아온데는 뭔가 용건이 있어서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기억하는 온이샘은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에 대해 많이 아는 건 아니지만 강서흔과 여가현 사이에 다툼이 벌어졌을 때, 온이샘이 중간에서 중재를 많이 해줬다고 들었다.성격 까다로운 여가현마저 온이샘은 정말 괜찮은 친구라고 칭찬할 정도였다.그러면서 자꾸 아깝다는 얘기를 했는데 그때 차우미는 아깝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내가 도울 일 있으면 부담 갖지 말고 얘기해.”차우미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절대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바보 같이 착한 사람.그녀는 모두에게 그랬다. 조용한 성격임에도 주변에 친구가 많은 이유가 바로 이런 점 때문이었다.온이샘은 이런 질문이 나올 거라 미리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거절을 못하는 성격이라 오히려 그에게는 다행이었다.“내가 요즘 어떤 식물을 연구하고 있는데 안평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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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대폰 화면에 나상준의 이름이 나타났다.온이샘이 아닌 것을 보고 차우미는 잠깐 멈칫했다가 메시지를 클릭했다.[일 끝나면 연락해.]너무 간결한 한 마디였지만 뜻은 분명했는데 동시에 차우미의 머릿속에는 나상준이 어젯밤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일 끝나면 연락해. 너랑 같이 안평으로 갈 거니까.”어제저녁부터 나상준은 차우미와 같이 안평으로 가려고 했는데 그녀가 처리할 일이 있어서 미룬 것이다.차우미는 나상준이 정말로 일이 있고 타임이 맞아서 같이 안평으로 가는 줄 알았는데 그냥 쉽게 미루니까 급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어젯밤에 물어보려고 했지만, 그가 순식간에 차에 올라타면서 대화가 끊어져 버렸다.그 후 집중해서 운전하느라 그 일은 완전히 잊었다.지금 차우미는 나상준의 메시지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정말 나와 같이 안평으로 가겠다는 건가?’차우미는 나상준과 같이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메시지를 확인하고 잠시 생각하다가 답변했다.[오늘 나와 같이 안평으로 가겠다는 거야?]메시지를 보내고 차우미는 나상준이 메시지를 보낸 시간을 보고 엘리베이터로 갔다.그녀는 아까 연락한 시간에서 20분 정도 지났기에 온이샘이 이제 곧 도착할 것 같아서 호텔 입구에서 기다리기로 했다.같은 시각, 관강동 별장에서 나상준은 차우미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욕실로 들어갔다.그는 어젯밤에 회사에서 밤을 새우고 방금 집에 왔는데 샤워하고 식사를 한 다음 곧바로 다시 회사로 나가야 했다.나상준이 욕실로 들어가자마자 물소리가 들렸는데 침대 머릿장에 올려놓은 휴대폰에서 그때 메시지 도착 음이 울렸다.휴대폰은 짧게 두 번 울리고 곧바로 침실에 정적이 흘렀다.별장 전체가 차우미와 나예은이 떠나면서 고요함은 더욱 짙어졌다.욕실의 물소리가 아무리 크게 들려도 별장 내의 고요함과 차가운 느낌은 가려지지 않았다.나상준은 시원하게 씻고 머리를 닦으며 나와서 곧바로 머릿장으로 가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화면이 켜지면서 읽지 않은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는데 발신자 이름을 보고 그는

  • 봄날   제887화

    순간 여가현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차우미가 행복하기를 바라지만 어쩐지 힘들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차우미는 여가현의 목소리에서 슬픔과 무력함을 듣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가현아, 난 괜찮아. 이혼을 결심했을 때 남은 생을 살면서 다시 결혼하기가 쉽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어. 원래는 선배와 잘 지내면서 연애도 해보고 나중에 천천히 결혼 생각도 해보려고 했어. 이샘 선배와 같은 좋은 사람을 놓치고 싶지 않았거든. 그런데 선배가 좋으면 좋을수록 내가 너무 부족하고 자격이 없는 것 같아. 선배는 나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 그래서 계속 이렇게 선배의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오늘 선배한테 확실하게 얘기하고 더 좋은 여자를 만나라고 할 거야. 그리고 나는 당분간 다른 건 신경 쓰지 않고 일에 매진하고 결혼은 나중에 다시 생각할 거야.”어떤 일들은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하는 것이 다를 때가 많다.산도 보기에는 가까워 보여도 정작 가려면 엄청 멀듯이 말이다.온이샘은 차우미에게 바로 그런 가까이에 있는 같지만 사실상 멀고 먼 곳에 있는 존재인 것 같다.여가현은 크게 벌렸던 입을 다물며 속상해했다.“우미야, 나도 지금 세상이 이혼한 여자한테 불공평하다는 거 알아. 현재로서 세상 사람들의 그런 생각을 바꿀 수 없다는 것도 잘 알아. 그런데 나는 이혼을 한 사람도 자기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 그리고 이샘 선배가 너를 지켜줄 거라는 것도 믿어. 너도 이샘 선배가 훌륭한 사람이라는 거 인정하잖아. 더 중요한 건 이샘 선배의 마음속에서 너의 자리는 아무도 대체할 수 없다는 거야.”차우미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현아,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해. 얻지 못한 것은 언제나 좋아 보이는데 정작 얻고 나면 달라질 거라고. 너 그거 알아? 그날 나상준과 같이 예은이를 데리고 식당에 갔는데 선배가 밖에서 우리를 만났을 때의 표정을 보며 재혼이라는 건 쉽지 않다는 걸 절실히 느꼈어. 왜냐하면 아무리 이전의

  • 봄날   제886화

    여가현은 서류의 맨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사인을 하려다가 차우미의 말을 듣고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할 말이라는 건 뭐야? 무슨 뜻이야? 해야 할 말이 뭔데? 그러니까 네 말은 이샘 선배가 고백하기 전에 네가 먼저 거절하겠다는 거야?”역시 차우미와 함께 자란 사람으로서 차우미의 간단하게 한 말에서 그 의도를 알아챘다.차우미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응.”탁!여가현이 펜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두 눈을 크게 뜨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흥분하며 큰 소리로 말했다.“거절한다고? 왜? 이틀 동안 나상준 씨가 또 무슨 말로 너를 꼬셨는데 이샘 선배를 거절한다는 거야? 차우미, 제발 멍청한 짓 하지 마!”여가현은 어찌나 흥분했는지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사무실 안을 이리저리 걷기 시작했다.차우미는 여가현의 반응을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클 줄은 몰랐다.이어서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큰 목소리에 차우미는 깜짝 놀라며 본능적으로 휴대폰을 귀에서 멀리 뒀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가현의 다급한 목소리는 여전히 잘 들렸다.여가현이 말을 다 하고 잠깐 숨을 쉬는 사이에 차우미가 휴대폰을 가까이 가져다 진지하게 말했다.“가현아, 일단 진정하고 내 말을 들어봐.”휴대폰으로 차우미의 차분한 목소리를 들으니, 여가현은 화가 치밀어 올라 핏줄이 터질 것만 같았지만 애써 참고 심호흡하며 자신을 진정시켰다.‘그래, 우선 진정하자.’차우미는 휴대폰 건너편이 조용해지고 거친 호흡 소리가 들리자, 여가현이 듣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속해서 말했다.“가현아, 상준 씨랑 상관없이 나도 오랫동안 생각했어. 얼마 전에 선배의 어머니와 가족들도 만난 적이 있는데 너무 좋은 분들이었어. 이번에 청주에 와서 선배 어머니를 또 뵀었는데 너무너무 좋은 분이셔. 상준 씨의 어머니보다도 엄청 좋았어. 그분도 나를 예쁘게 봐주셨고 나도 선배 어머니가 너무 좋았는데 그렇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건 아니잖아. 나는 이혼했고 선배의 가족과 배경은 너도 잘 알다시피 그런

  • 봄날   제885화

    차우미는 스카이빌리지가 어디에 있는지 알기에 거기에서 호텔까지 거리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온이샘이 스카이빌리지에서 출발하는지를 확인하지 않아서 그냥 마음 놓고 짐을 준비했다.그녀가 모든 짐을 챙겼을 때 휴대폰 벨이 울렸다.익숙한 전화벨 소리에 차우미는 캐리어를 한편에 놓고 손잡이를 거둔 다음 휴대폰을 들었다.휴대폰에서 여가현이라는 아주 익숙한 이름이 보였다.차우미는 온이샘이 도착했다는 전화인 줄 알았는데 여가현인 것을 보고 조금 놀라면서 전화를 받았다.“가현아, 무슨 일이야?.”“이틀 동안 괜찮았어? 나상준 씨가 괴롭히지 않았어? 너 다친 데 없지? 그 아이를 돌봐주는 건 이제 끝난 거야?”휴대폰 건너편에서 서류 넘기는 소리와 함께 여가현의 말소리가 들렸는데 그녀는 일하고 있는 것 같았다.차우미는 그제야 오늘이 월요일이라는 알아채고 웃으며 말했다.“월요일인데 나한테 전화할 시간이 있어?”월요일은 모두에게 바쁜 날이다.“흠! 사실은 어제 너에게 전화하려다가 방해가 될 것 같아서 참았어. 어차피 나상준 씨도 나씨 가문과 차씨 가문의 관계 때문에 감히 너를 어떻게 하지 못할 테니까. 만약 나상준 씨가 너에게 무슨 짓을 한다면 내가 직접 나씨 가문의 어르신을 찾아갈 거야. 그분은 자기 집안 사람이라고 감싸주는 분이 아니니까.”여가현의 말에 차우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나상준은 이미 여가현의 블랙 리스트에 올라서 믿음이라고 전혀 없었다.차우미는 통유리창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아침 햇살을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아니야. 괴롭히거나 다치게 한 것 없어. 이틀 동안 나와 같이 나예은과 아주 잘 놀아 줬어. 상준 씨가 예은이을 얼마나 예뻐하는지 몰라.”직접 눈으로 본 것이 아니라면 차우미도 절대 믿지 못했을 것이다. 이틀 동안의 나상준은 전에 전혀 본 적이 없던 다른 사람이었다.“쳇! 그 아이는 나씨 가문의 아이니 당연히 친절하게 잘해주겠지. 그런데 너는 다르잖아. 너는 이제 나상준 씨의 전처일 뿐이잖아.”차우미는 입술을 살짝

  • 봄날   제884화

    차우미는 온이샘에게 할 일이 끝났다고 아주 간단하게 메시지를 보냈었다.온이샘의 메시지를 확인하는 순간 그녀는 온이샘이 오늘 시간이 되는 것 같아서 대화창을 누르고 답변했다.[호텔에 있어.]윙윙.휴대폰 진동소리였는데 또 온이샘의 메시지가 왔다.[알았어. 호텔에서 기다려. 지금 바로 갈게.]온이샘이 오겠다는 말에 차우미는 깜짝 놀랐다.‘선배가 여기로 온다고?’차우미는 고개를 들고 창밖의 화창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해가 나온 지 한참이 지났고 청주는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여 북적거리기 시작했다.차우미는 창밖의 밝은 햇살을 바라보며 눈을 살짝 찌그리더니 다시 온이샘이 보낸 메시지를 보았다.그녀는 워낙 온이샘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짐을 정리한 다음 아침 먹으러 가려고 했다.그런데 온이샘이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곧바로 답변을 보내고 호텔까지 온다고 할 줄을 몰랐다.차우미가 답장을 보냈다.[알았어.]메시지를 보내고 차우미는 짐을 정리하면서 온이샘을 기다리기로 했다.스카이빌리지에서 온이샘은 7시에 강서흔의 전화 소리에 깨어났다.강서흔이 이른 아침에 온이샘에게 전화를 한 것은 그가 청주에 아직 있으면 만나서 차우미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다.강서흔의 말투에서 조금 다급하고 중요하게 할 얘기가 있는 것 같았다.온이샘은 강서흔이 정말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아직 청주에 있다고 했는데 현재 차우미의 메시지를 기다리고 있어서 언제 만날지는 나중에 다시 알려주겠다고 했다.온이샘은 강서흔에게 아무것도 숨기지 않고 차우미와 식사하기로 한 것까지 모두 말했다.그런데 온이샘의 말을 듣고 강서흔은 더 다급해졌다.‘기다리면 어떡해? 주동적으로 연락해야지.’온이샘의 성격은 온화하고 횡포하지 않기에 차우미를 좋아하더라도 항상 차우미를 존중하고 그녀의 의견을 따랐다.강서흔은 그런 온이샘을 답답해하며 오늘 무조건 만나야 하니 기다리고 있을 거니까 만날 수 있는 시간이 확정되면 알려달라고 했다.그는 이런 일은 얼굴 보고 얘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봄날   제883화

    나상준의 회사에서 멀지 않아서 20분 만에 호텔에 도착했다.차우미는 호텔 지하 주차장에 주차하고는 캐리어를 들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자신의 방으로 갔다.방 안은 청소를 해서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는데 마치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차우미는 차 키와 가방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캐리어에서 깨끗한 옷을 꺼내 욕실로 향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샤워를 마치고 나오더니 침대에 앉아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때는 이미 매우 늦은 자정 12시 30분이었다.차우미는 오래 전부터 많이 피곤한 걸 애써 참고 있었는데 시간을 확인하자 참았던 피로가 순식간에 확 풀리는 것 같았다.그녀는 하품하고, 휴대폰을 머릿장에 올려놓고 점등한 다음 바로 누워서 눈을 감았다.점등하는 순간부터 방 안에 고요한 밤이 시작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차우미는 곧바로 꿈속으로 들어갔다.다만 잠들기 전에 그녀의 눈앞에는 오늘 밤 나상준이 예전에는 절대 하지 않았던 말을 할 때의 신중하고 담담하던 모습들이 떠올랐다.그의 눈빛 속에 많은 것이 숨어 있는 것 같았는데 그것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두려워서 멀리 떠나고 싶게 만들었다.청주의 밤은 깊어졌고 도시 전체가 잠이 든 것 같았는데 도시의 혼잡함과 차들의 경적 그리고 사람들의 말소리까지 새벽 시간이 되자 모두 사라졌다.같은 시각 스카이빌리지 서재에서 온이샘은 안경을 벗고 의자에 기대어 피곤한 듯 미간을 찌푸리고 눈을 감았다.그는 서재에 들어간 후 지금까지 줄곧 일을 했다.겨우 일를 끝내고 눈을 감았는데 조금 지나자, 온몸의 피곤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아 눈을 뜨고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시간을 확인하고 휴대폰 잠금을 해제하니 차우미와의 대화창이 나타났다.차우미는 그가 메시지를 보낸 다음 답장을 했는데 비록 아주 간단한 세 글자였지만 온이샘은 만족했다.온이샘은 다시 한번 차우미의 답장을 확인하고는 위로 올려 서로의 대화들을 훑어보았는데 마음이 두근거렸고 동시에 안정감을 느꼈다.‘주말이 지났으니, 내일은 그 아이도 학교에

  • 봄날   제882화

    하성우는 여전히 담담한 나상준의 목소리를 들으며 미소를 지었다.“여가현이라고 알지? 며칠 동안 너의 근황을 조사하고 있어. 대체 뭘 잘못해서 여가현에게 조사를 당하는 거야? 어쨌든 변호사이고 이 바닥에서 몇 년 동안 일해서 차우미 씨보다는 더 예민해.”하성우는 비록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전혀 농담이 아니었다.그는 여가현이 온이샘을 도와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나상준에게는 절대 좋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나상준은 시선을 거두고 눈을 감더니 상관없다는 말투로 말했다.“조사하라고 해.”하성우가 곧바로 웃음을 터뜨렸다.“하긴, 조사해서 네가 어떤 사람이고 옆에 다른 여자가 있는지, 없는지 제대로 상세하게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이번 기회에 여가현이 너를 철저하게 조사해서 이미지를 세탁하면 좋을 수도 있겠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너한테 불리한 것을 유리하게 바꿀 수도 있잖아. 그래도 너니까 그렇게 당당할 수 있지, 나는 절대 안 돼.”하성우는 나상준을 아무리 조사해 봐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걸 알고 있을뿐더러 자신의 주제 파악도 잘했다.나상준이 눈썹을 치켜들며 말했다.“그만해.”“뭘 그만해? 무슨 말이야? 무슨 말을 하는지 도저히 모르겠네.”하성우는 나성준의 무의식적으로 던진 한마디에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나상준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나상준은 고개를 들어 허공을 바라보았는데 모든 것을 꿰뚫어 본다는 듯 말했다.“나연이가 옆에 있을 때 잘해.”어떤 말은 나상준도 직설적으로 할 수 없었다.그는 다른 사람의 연애사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상대가 하성우라서 한마디 했을 뿐이다.게다가 이번은 첫 번째가 아니라 두 번째다.“...”하성우는 바로 굳어버렸다.나상준에게 전화한 것은 자기 문제가 아니라 나상준의 문제를 얘기하려고 했는데 갑작스럽게 불통이 자기한테로 튕길 줄을 생각도 못 했다.하성우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아무 말도 안 하고 조용해지자 나상준이 말했다.“나중에 또

  • 봄날   제881화

    허영우는 후속 업무에 대한 지시를 받고는 서류를 들고 사무실을 나갔다.나상준이 이메일을 클릭하여 최근 업무 리포트를 확인하려고 할 때 옆에 있던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그는 곧바로 휴대폰을 들었는데 화면에 하성우 이름을 보더니 마음속으로 역시 며칠을 못 버틴다고 생각하며 전화를 받았다.“왜.”그는 리포트를 보며 전화를 받았는데 반대편의 하성우는 여전히 감정 기복이 하나도 없는 목소리를 들으며 기분 좋게 웃었다.“갖은 수단을 동원해서 청주에 꼬셔오더니 어떻게 됐어?”하성우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 흥미롭게 나상준의 감정 상태를 물었다.나상준은 한 손으로 휴대폰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 마우스를 움직이고 있었는데 귀에 들리는 소리가 분명 자기를 놀리려는 것임을 알아채고는 곧바로 전화를 끊고 테이블에 내려놓았다.리포트에 있는 데이터를 보고 있는 그의 눈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마치 자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인 듯했다.하성우는 휴대폰을 들고 두 팔을 벌린 채 소파에 등을 대고 앉아 있었는데 아주 만족하는 미소를 지었다.그는 며칠 동안 다른 나무 조각가들과 놀러 다녔는데 오늘 오후에 헤어졌다. 그리고 회사에서 업무를 처리하고 이제야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워낙 오후에 사람들과 헤어지고 나상준에게 전화해서 잘 되고 있는지 친구의 감정을 관심하려고 했지만, 회사 일 때문에 지금까지 바빠서 그럴 시간이 없었다.겨우 일이 끝나고 아직 늦지 않았다는 생각에 나상준에게 전화한 것이고 나상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하성우는 며칠 동안 참았던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기다렸다.“...”그런데 휴대폰에서 곧바로 연결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조용해졌다.하성우는 초기 화면으로 돌아온 휴대폰을 보며 어이가 없었다.‘지금 내 전화를 일부러 끊은 거야? 설마 아니겠지? 실수로 끊어졌을 거야. 얼마 만에 전화하는 건데 이렇게 무정하게 끊을 수는 없을 거야.’하성우는 나상준이 분명 휴대폰을 잘못 건드려서 실수로 끊어진 거라고 믿고 다시 전화를 걸었다.

  • 봄날   제880화

    차우미는 허영우에게 비용은 자신이 부담할 테니 나상준의 생활까지 돌봐줄 간병인을 찾아주라고 부탁하려 했다.그녀는 자기가 비용 부담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전화 연결음을 들으며 그녀는 출발하지 않고 차를 옆에 주차한 채 회사 안에서 나오는 불빛을 바라보며 나상준의 손이 더 심각해질까 봐 걱정했다.“사모님 안녕하세요.”전화가 연결되면서 허영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차우미는 시선을 거두고 말했다.“허 비서님, 안녕하세요. 상준 씨가 조금 전에 처리할 일이 있다고 회사에 들어갔어요. 손이 아프다고 했는데 허 비서님 혹시 지금 회사에 계시면 심각한지 가서 봐주실 수 있을까요? 만약 회사에 안 계시면 상준 씨에게 전화해서 상황을 알아보고 그쪽으로 전문 간병인을 찾아봐 줘요. 그리고 상준 씨가 다친 건 저 때문이어서 간병인 비용이 나오면 알려주세요. 제가 부담할 거예요.”차우미는 허영우에게 모든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의 업무 능력은 모두 인정한다.허영우는 차우미의 말을 듣고 그의 앞에서 평온한 걸음으로 걸어가는 나상준을 바라보며 대답했다.“저 지금 회사에 있어요. 마침, 대표님께 서류 가져가는 길인데 바로 가서 확인할게요.”“네, 그러면 부탁해요.”“별말씀요. 당연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허영우는 전화를 끊고 앞에서 가다가 걸음을 멈춘 사람을 향해 말했다.“대표님, 사모님께서 대표님이 손이 아프다고 하셨다고 상태를 알아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대표님께 전문 간병인을 찾아드리라고 하셨어요.”어젯밤에 손을 다치고 오늘 밤에 일하러 나온 나상준의 의도를 허영우는 진작에 알아챘는데 바로 일부러 차우미를 걱정하게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오랜 세월 동안 나상준 옆에 있으면서 그가 이토록 한 여자를 대하는 건 처음이었다.그렇다, 나상준은 차우미에 대해 진심이다.차우미에게 손이 아프다고 한 것도 아마 나상준의 작전일 것이다.사실이든, 거짓이든 허영우는 차우미의 말을 그대로 나상준에게 전달하고 또 나상준이 지시하는 대로 하면 된다.나상준이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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