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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작가: 유리
집으로 돌아온 예은이는 어른들과 인형놀이를 시작했다. 서혜지는 그 틈을 타서 나준우를 끌고 침실로 들어가서 문을 잠갔다.

“이게 무슨 상황이죠? 당신 다 들었죠? 아주버님 긴장 좀 하셔야겠는데요?”

서혜지는 수다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무척 궁금했다.

나준우는 아내의 생각을 눈치채고 인상을 찌푸렸다.

“당신 상준이 형이랑 형수님 일에 무슨 관심이 그렇게 많아?”

“내가… 그랬나요?”

서혜지는 그제야 자신이 너무 과하게 흥분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냥 아주버님 같은 사람이랑 결혼하면 좋은 점보다는 나쁜 점이 더 많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사람 좋고 성격이 좀 까칠하지만 그래도 딴짓하는 게 아니라 일에 몰두하는 느낌이고. 아내로서는 참 걱정할 게 없고 든든하겠다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형님이 아깝다는 생각이 문득 들더라고요. 형님은 아주버님을 무척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아주버님은 너무 싸늘하시잖아요. 형님이 많이 서운했을 것 같아요.”

“예전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사실 모든 부부가 우리처럼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건 아니니까요. 그런데 아까 남자 목소리를 듣고 생각이 좀 바뀌었어요. 목소리만 들었는데도 상대가 형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느꼈거든요.”

“그래서 상준 아주버님의 생각이 궁금해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살았던 아내인데 누군가가 그런 아내를 좋아한다고 하면 어떤 느낌일지.”

“어쨌든 아주버님이 조금 달라졌으면 하는 바람이랄까요? 여자 때문에 흔들리고 고민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해야 하나?”

뒤로 가면서 점점 주제 넘은 그녀의 발언에 나준우는 살짝 언짢았다.

그는 아내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

상황이 별로 좋지 않다는 게 안 느껴지나?

부부 사이에 제3자가 끼어들었다는 건 두 사람의 신뢰에 문제가 생길 거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걱정됐다.

부부는 각자 다른 생각을 하며 차우미와 나상준을 걱정했다.

그 시각, 서재.

원목 자재의 책장이 줄 지어선 서재는 호화로우면서도 근엄한 분위기를 풍겼다.

서재에는 옛 그림이나 서예, 자기 등이 진열되어 있었는데 이곳에 앉아 있으면 타임머신을 타고 고대로 돌아간 느낌마저 들게 했다.

아줌마가 차를 내오고 조용히 서재를 나갔다.

나상준은 소파에 앉아 찻잔을 들었다.

이혜정이 그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우미랑 어떻게 된 거야?”

인생 경험이 풍부한 이혜정 여사였기에 굳이 말하지 않아도 대략적으로 어떤 상황인지 짐작하고 있었다.

나상준과 차우미 사이에 뭔가 심각한 문제가 생긴 건 분명했다.

나상준은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부드러운 톤의 불빛이 그의 얼굴을 비추자 싸늘한 인상이 조금은 부드럽게 보였다.

“저희 이혼했어요.”

이혜정 여사가 미간을 확 찌푸렸다.

분명 심각한 문제일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혼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노인은 싸늘한 시선으로 애지중지 키운 손자를 빤히 노려보았다.

나상준은 압박감 가득한 그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 사람이 먼저 꺼냈어요.”

이혜정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노인은 차가운 시선으로 손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네 잘못이야.”

간단명료하고 단호한 말이었다.

이혜정은 손자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네가 3년 동안 밖으로만 돌고 집에 정을 두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 너에게는 일만 중요하고 아내를 위한 자리는 남겨두지 않았지.”

“우미가 성격이 좋아서 불만을 토로하지 않아서 그렇지, 다른 여자였다면 진작 난리 났을 거야. 우미가 널 위해, 우리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동안 넌 남편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않았어.”

“넌 모든 게 당연하다는 듯이 행동했지. 난 너한테 꼭 우미랑 결혼하라고 강요한 적 없다. 결정은 네가 한 거야. 그런데 넌 너와 평생 같이 갈 동반자에게 제대로 된 관심 한번 준 적 없었어. 우미는 네 직원이 아니라 네 처야. 물질적으로만 만족을 주면 되는 게 아니라고.”

나상준은 고개를 떨어뜨린 채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항상 마시던 차인데 오늘따라 뒷맛이 썼다.

“남편으로서 책임을 다하기 싫었으면 넌 결혼을 선택해서는 안 됐어.”

“한 여자와 평생을 함께한다고 맹세했으면 그 무게에 대한 책임은 졌어야지.”

“네가 회사에서 뛰어난 리더라는 걸 부정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넌 가정에 너무 무심했어. 난 너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살아왔고 그래서 깨달은 것도 많아.”

“넌 우미보다 더 괜찮은 짝을 찾지 못할 거야.”

“다른 가족들은 네가 주혜민 그 애를 좋아해서 우미한테 차갑게 대한다고 생각했겠지만 난 아니란 걸 알아.”

“그래서 우미를 너한테 소개해 줬던 거고. 너도 우미가 괜찮은 짝이라고 생각해서 스스로 결혼을 결심했던 거 아니더냐? 그런데 난 지금 너한테 많이 실망스러워.”

이혜정 여사의 눈빛에는 실망감이 가득했다.

“넌 곧 후회하게 될 거다.”

나상준은 갑자기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울컥 올라오는 느낌을 받았다.

갑갑하고 숨이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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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봄날   제19화

    박물관 동료들과 사이가 아주 좋았기에 차우미는 쉽게 스케줄을 조절할 수 있었다. 사람들에게 상황을 설명했더니 그들은 흔쾌히 그러라고 했다.작업실 동료들은 거의 다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이라 차우미를 딸처럼 각별히 아꼈다.게다가 평소에 그들이 일이 있다고 했을 때 차우미도 흔쾌히 당직을 서주었기에 그들도 그녀 대신 당직을 서는 일이 당연하다고 말했다.온이샘은 다음 주 주말에 보자고 연락이 왔다.차우미도 동료들과 합의를 마쳤고 그렇게 두 사람은 다음 주 토요일에 근교에 있는 구현으로 가보기로 했다.눈 깜짝할 사이에 금요일이 되었다.차우미가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가니 어머니가 저녁을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고 아버지도 일찍 퇴근했다.공방은 열 시까지 운영하지만 따로 파트타임 직원을 썼기에 출퇴근 시간이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었다.부지런한 아버지는 밥만 드시고 공방으로 돌아가고는 했다.그녀의 아버지 차동수는 이 일을 무척 사랑했다. 몇십 년을 공방에서 같은 작업을 반복하는 게 일상이지만 전혀 질리지 않는다고 했다.차우미는 그의 그런 우직한 성격을 닮았다.“어쩜 부녀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같은 시간에 들어오니? 내가 저녁을 조금 늦게 준비했으면 큰일 날 뻔했네.”하선주가 반찬을 테이블에 올리며 말했다. 차동수와 차우미는 손만 씻고 주방으로 가서 그녀를 거들었다.잠시 후, 가족들은 오붓하게 식탁에 모여앉았다.“우미야, 내일 친구랑 몇 시에 나갈 거야? 엄마가 아침 준비할 테니까 그 친구한테 와서 아침 먹고 출발하라고 해.”차우미는 부모님에게 주말에 온이샘을 도와 근교에 다녀오겠다고 이미 얘기한 바 있었다.부모는 그 말을 듣고 흔쾌히 찬성했다. 어차피 딸만 원한다면 그들이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그들은 딸이 언제나 올바른 판단을 내릴 거라고 믿었다.차우미는 생각없이 일 저지르는 타입은 아니었다.그녀는 된장찌개를 한술 뜨며 대답했다.“아침 일곱 시에 출발하기로 했어. 차 막히기 전에 출발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안평은 꽤 큰 도시였지만 많은

  • 봄날   제20화

    그런데 갑자기 이런 친구가 나타나 주니 두 사람은 딸을 밀어주고 싶었다.그리고 그 친구가 어떤 사람인지 직접 보고 판단해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차동수가 말했다.“엄마 말이 맞아. 여기까지 왔는데 아침도 안 먹이고 보내는 건 예의가 아니지.”차우미는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진지하게 고민해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이따가 문자해서 물어볼게.”그녀는 부모님의 말씀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이미 돕기로 했으면 사소한 부분에도 신경 쓰는 게 당연했다.그녀의 말을 듣고 하선주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참 속이기 쉬운 단순한 아이였다.식사가 끝난 뒤, 차우미가 설거지를 돕겠다고 했지만 하선주는 빨리 친구한테 문자나 해보라며 그녀를 주방에서 밀어냈다.차동수도 맞장구를 치며 주방 일은 자기가 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차우미는 두 분의 정성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거실로 가서 온이샘에게 문자를 보냈다.그녀는 교수인 온이샘이 언제 바쁘고 언제 한가한지 확신할 수 없었기에 문자를 선택했다. 그리고 나상준과 살 때도 통화보다는 문자를 선호하기도 했다.그녀는 문자를 보낸 뒤, 방으로 가서 내일 입고 갈 옷을 정리했다.그 시각 온이샘은 강의를 마치고 주차장으로 향하고 있었다.하루 종일 논문을 수정하고 강의를 하느라 아직 저녁도 먹기 전이었다.진동음이 울리자 그는 곧바로 걸음을 멈추었다.[선배, 지금 바빠?]그의 입가에 저절로 부드러운 미소가 지어졌다.그는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그 시각 차우미는 온이샘이 바쁠 거라 생각하고 침실에서 옷장을 정리하고 있었다.그녀는 한참 정리가 끝난 뒤에야 핸드폰을 확인했다. 온이샘에게서 문자가 두 개나 도착해 있었다.[안 바빠.][통화 괜찮아?]두 문자 사이에 시간 간격이 조금 있었던 거로 보아 그녀의 문자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차우미는 30분이 훌쩍 지나버린 것을 확인하고 미안한 마음에 바로 답장을 보냈다.[미안해, 선배. 옷장 좀 정리하느라 문자 못 봤어. 지금 시간 괜찮아? 내가 전화 걸게.]

  • 봄날   제21화

    온이샘은 혹시라도 운전 중에 그녀에게서 답장이 올까 봐 줄곧 차에서 기다렸다.그러다 보니 어느새 30분이 훌쩍 지나갔다.하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았다. 차우미에게서 답장이 오자 그는 바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나긋나긋하고 진지한 물음에 그는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집으로 오라고?’누군가를 좋아하면 당연히 그 사람과 함께 있고 싶은 법이다.당연히 그도 조만간 그녀의 가족을 만나야 한다.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그녀의 가족을 만나야 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그는 잠시...... 어쩔 바를 몰랐다.온이샘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둘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다.이런 고요함은 차우미에게 한 가지 문제를 깨닫게 했다. 이렇게 갑자기 친구를 집에 부르면 친구는 반드시 불편해할 것이라는 걸.누구나 다 여가현처럼 친구의 집을 자기 집처럼 생각하는 건 아니니까.“선배, 미안해. 내가 너무 갑작스러웠지? 마음에 두지 마.”“아니, 그게 아니라. 아침 식사는 내가 생각하지 못했어. 그래, 내일 아침 7시 30분에 출발하자.”온이샘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자 그제야 차우미는 한시름 놓았다.“그래, 그럼 일 봐. 내일 아침 거의 도착한다 싶으면 문자줘. 내가 내려갈게.”“그래, 알았어.”전화를 끊은 차우미는 내일 아침 시간을 대략 계산하더니 부모님께 온이샘이 내일 아침 식사하러 올 거라고 말씀 드렸다.그 말에 부모님은 너무 기뻐 내일 아침 식사 준비를 위해 온이샘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이냐고 물었다.하지만 차우미는 온이샘이 좋아하는 음식을 알지 못했다. 하여 그녀는 다시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인지, 가리는 건 없는지.같은 시각, 차에 앉아 휴대폰을 들고 메시지를 확인하던 온이샘은 심장이 쿵쾅거렸다.그녀의 집으로 가는데, 빈손으로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하지만 무엇을 사야 할지, 어떻게 사야 할지 알 수 없었다.그는 단 한 번도 이런 상황을 직면한 적 없었기 때문이다.곰곰이

  • 봄날   제22화

    차우미가 시간을 확인하니 어느덧 7시가 훌쩍 넘었다.여가현이 가장 바쁜 시간이다.그녀는 자주 야근을 했으며 밤을 새우는 것이 다반사인데 모처럼 이 시간에 그녀에게 영상 통화를 보냈다.영상 통화를 받자마자 머리를 박고 컵라면을 먹고 있는 여가현의 모습이 보였다.차우미는 관심조로 말했다.“너 또 컵라면이야? 몸에 안 좋다니까. 너 밥 해먹을 시간 없으면 차라리 밀키트라도 사 둬. 데우면 먹을 수 있을 거 아니야.”여가현에게 돈은 생명이다.목숨과 돈 중에, 그녀는 한 치의 여유도 없이 돈을 선택할 것이다.여가현은 컵라면을 후루룩 먹으며 대꾸했다.“내 걱정은 하지 마! 지금 네가 제일 중요해. 너 어때? 선은 봤어? 두 번째 봄은 언제 오는 거야? 너 상준 씨랑 이혼한지 한 달 넘었지? 이젠 두 번째 봄이 슬슬 와야 해.”“나 있잖아, 반드시 그 사람보다 더 좋은 남자 만나서 아주 본때를 보여줄 거야! 소중함도 모르는 멍청한 자식!”차우미가 이혼하고 여가현은 늘 그녀에게 선을 보고 두 번째 사랑을 시작하라고 다그쳤고 매번 두 사람의 대화에는 이 화제가 떠나지 않을 정도이다.심지어 그녀에게 이혼서류를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으로 설정하고 두 번째 봄을 맞으면 다시 다른 프로필 사진으로 바꾸라고 했다.차우미는 어이가 없었지만 이것 또한 그녀의 관심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여가현은 그녀가 실패한 결혼에서 헤어나오지 못할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여가현은 목소리가 아주 높다. 차우미는 혹시라도 부모님이 그들의 통화를 들을까 봐 이어폰을 귀에 끼고 말했다.“너 안 바빠? 이 시간에 어떻게 내 생각이 났대?”여가현에게는 화제를 돌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하! 내가 안 바쁠 리가 있겠어?”여가현은 책상에서 서류 뭉치를 들어 카메라 앞으로 가져다 댔다. 서류 뭉치를 본 차우미는 걱정되는 마음에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너 또 밤 새우려고?”“당연하지! 난 부자가 될 거야!”여가현은 하루 빨리 많은 돈을 모아서 자유로운 생활을 하는 것이 꿈

  • 봄날   제23화

    “선배 이게 다 뭐야?”한가득 꺼내는 선물 꾸러미를 보고 차우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아침을 먹으라고 했을 뿐인데 온이샘은 이렇게 많은 선물을 가져왔다. 비록 차우미도 온이샘의 예의를 지키려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이건 너무 과하다.온이샘의 양손 가득 들린 선물은 아무리 봐도 단순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차우미와 눈이 마주친 온이샘은 그제야 자기의 목적성이 너무 강했다는 것을 인지하고 다급히 말했다.“아저씨, 아주머니가 뭐 좋아하시는지 몰라서 그냥 여러 가지 사봤어. 좋아하실지 모르겠다.”차우미는 온이샘처럼 고작 아침 식사 한 끼에 이렇게 예의를 차리는 사람은 처음 봤다. 뭐라고 하기도, 안 하기도 애매한 상황이다.그녀는 하는 수 없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선배 왜 이렇게 많이 사 왔어.”“하하, 아니야. 무엇보다 나도 네 도움이 필요한데 미안해서 그러지.”차우미도 온이샘의 성격을 잘 알고 있기에 더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그만 올라가자.”“그럴까.”두 사람은 위층으로 올라갔다.위층 베란다. 하선주와 차동수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특히 하선주는 기쁨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역시.”차동수도 기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그는 애써 웃음을 절제하며 말했다.“애들 올라오니까 빨리 준비하자고.”“그래.”차우미는 온이샘과 함께 집으로 들어왔고, 인기척에 차동수와 하선주는 주방에서 즉시 나왔다.온이샘은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고 차우미는 부모님에게 온이샘을 소개해 주었다. 이내 집안에는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가득 퍼졌다.“이샘 씨, 왜 이렇게 많이 사 들고 왔어? 미안하게.”“당연히 그래야죠.”“그건 아니지. 이샘 씨는 우리 우미 친구니까 내 집처럼 생각해도 좋아. 다음에는 이런 거 사 들고 오지 마.”“하하, 아니에요. 작은 성의예요. 두 분이 좋아하실지 모르겠어요.”“그럼, 좋아하고 말고. 젊은 사람들은 안목이 뛰어나서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지.”“......”차우

  • 봄날   제24화

    발신인이 강서흔이라는 것을 확인한 온이샘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나 잠시 전화 좀 받을게.”“그래, 앞에서 기다릴게.”차우미는 휴대폰을 들고 앞으로 걸어갔다. 휴대폰에는 온이샘이 찾는 식물이 있는데 그들은 지금 산간의 돌길을 걷고 있으며 양쪽에는 다양한 식물들이 가득했다.그녀는 계속 찾아보았다.차우미가 멀어지자 온이샘은 그제야 전화를 받았다.“그래.”“어때? 미래의 장인 장모님 너 마음에 들어 하셨어?”진지한 듯한 말투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질투가 느껴졌다.온이샘은 강서흔의 속셈을 알아차리고 웃으며 말했다.“아마도?”“하하.”“하긴, 잘생긴 온이샘을 누가 마다하겠어. 특히 어르신들은 더 좋아하시겠지.”강서흔의 말은 정확한 말이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온이샘은 늘 어르신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강서흔은 여가현 집에 갔다가 좌절을 겪고 한이 서려 있었다. 온이샘이 화제를 돌렸다.“벌써 일어난거야?”“흥!”“네가 새벽부터 깨워놓고 벌써라니.”“빨리 잡아. 이 형님이 네 결혼식을 고되게 기다린다! 아니지, 나 부케 받을래!”“부케 받고 여가현 그 나쁜 년이랑 결혼할 거야!”온이샘은 나지막이 웃으며 말했다.“그래, 그날이 오기를 기다릴게.”두 사람은 간단한 대화를 나누고 전화를 끊었다.온이샘이 앞을 보니 차우미는 보이지 않았다.그는 멈칫하더니 빠르게 발걸음을 옮겨 그녀의 그림자를 찾았다. 그녀는 돌계단 옆에 쭈그리고 앉아 휴대폰과 눈앞의 식물을 번갈아 보았다.그녀는 어느새 포니테일을 묶었다.살랑살랑 바람이 그녀의 뺨을 스치며 그녀의 흘러내린 잔머리와 속눈썹을 가볍게 날렸다.온이샘은 저도 몰래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그는 가까이 다가가 몸을 숙이고 물었다.“왜 그러고 있어?”온이샘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청초한 눈매를 보았다. 그녀의 외모는 이 산의 수려함보다 더 매혹적이었다.차우미는 그제야 온이샘이 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선배, 이것 좀 봐봐. 이거 아니야?”그녀는 발아래의 푸른 식물을 가리키며 휴

  • 봄날   제25화

    똑...... 똑......물방울이 나상준의 머리카락을 타고 바닥에 떨어져 맑은 소리를 냈다.물줄기는 그의 몸을 따라 매끄러운 바닥으로 흘러내리고 다시 하수구로 흘러가더니 가느다란 물 흐름소리가 들려왔다.모든 것이 이토록 정상적이고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있었다.나상준은 아무런 기척도 없는 샤워기를 한참 바라보더니 가운을 입고 욕실을 나섰다.예전 같으면 이 시간에 바깥의 등불은 모두 밝았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칠흑처럼 어두웠고 침실도 마찬가지다.나상준은 어두운 바깥을 보며 휴대폰을 들어 허영우에게 전화를 걸었다.“대표님.”“정전이야.”허영우는 멈칫하더니 모처럼 멍해졌다.정전?대체 무슨 말씀일까?허영우가 곰곰이 생각하는 사이, 나상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집안 전기요금은 누가 냈었지?”이 말에 허영우는 한 가지 일이 떠올랐다.차우미와 나상준이 이혼하던 그날, 그녀는 허영우에게 메일 한 통을 보냈다. 차우미는 집안의 주의 사항과 해야 할 일, 그리고 세부 사항들을 꼼꼼히 메일로 작성해 보냈다.허영우는 메일을 확인했고 또 알고 있었지만 너무 바쁜 탓에 까맣게 잊고 있었다.메일 속의 여러 사항은 그녀가 이미 다 처리해 두었으니 허영우는 그저 기억만 하면 된다.그러다 보니 잊고 있었다.허영우가 다급히 말했다.“사모님이 냈었어요. 전에 사모님이 메일로 알려주셨는데, 제가 깜빡했어요.”“죄송합니다, 대표님. 지금 바로 처리할게요.”“그래.”통화가 종료되었다.나상준은 휴대폰을 던져두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날은 아직 완전히 어두워진 것은 아니다. 집안의 모든 것이 아직 마지막 빛에 비추어져 아주 희미하게 보였다.나상준은 바에 있는 냉장고를 열었다.그는 목이 말라서 물을 좀 마시려고 했다.하지만 열어보니 냉장고는 텅 비어있었다.그는 멍하니 먼지 하나 묻지 않은 깨끗한 냉장고를 바라보다가 한참 뒤 부엌으로 향했다.부엌에도 냉장고가 있었다. 차우미가 이 집에 있을 때, 그 냉장고는 항상 꽉 차 있었다.하지만 열어보니 역시나 텅

  • 봄날   제26화

    산의 기후는 일정치 않았다. 특히나 진달래 산은 더 그러하다. 차우미와 온이샘이 절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보슬비는 산과 나뭇잎에 떨어져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두 사람은 방을 예약한 뒤 간단히 씻고 절밥을 먹으러 갔다.이 계절은 진달래가 만개할 때라 많은 사람이 이곳을 찾아 진달래를 감상했다.하지만 절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절밥을 먹는 사람도 아주 적었다.서서히 밀려오는 어둠과 함께 빗소리가 자욱하여 절 안은 더욱 적막해졌다.차우미와 온이샘은 그저 가끔 나지막한 목소리로 두 마디씩 나눌 뿐, 되도록 조용하게 식사를 마쳤다.하지만 두 사람이 식사를 끝내고 일어서려 할 때, 갑자기 쨍그랑 소리와 함께 그릇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이 부서졌고 남은 음식도 덩달아 바닥에 전부 엎질러졌다.차우미는 멈칫하더니 시선을 앞으로 향했다.한 젊은 여자가 벌떡 일어나 맞은편에 앉은 남자에게 삿대질하며 소리를 질러댔다.“오기석, 너 그게 무슨 말이야? 여기까지 같이 온 게 억울해? 내가 똑똑히 말하는데, 억울해도 참아!”여자는 의자를 발로 걷어차고 뒤돌아섰다. 남자는 거기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더니 사람들의 시선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차우미는 시선을 거두고 휴지를 꺼내 온이샘에게 넘겨주었다.온이샘도 그 장면을 보았지만 차우미를 따라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가지런히 접힌 휴지를 바라보며 온이샘은 저도 몰래 미소를 지으며 건네받았다.“고마워.”두 사람은 곧 식당을 나섰다.밖은 아까보다 더 어두워졌고 절당 안의 등불만이 환히 빛나며 산을 밝게 비추었다.비는 여전히 세게 오지 않았다. 아까처럼 가늘고 촘촘하게 산에 뿌려져 흰 안개를 만들었다.“공기 좋다.”두 사람은 걸어 나와 절을 둘러보았다.도시의 소란스러움과 고층 건물을 벗어난 이곳은 고요함으로 사람 마음을 안정시켜 준다.차우미는 절의 건물과 조각을 열심히 관찰했다.온이샘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응했다.“진달래 산 공기는 정말 좋아.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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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봄날   제956화

    나상준은 차우미 뒤에서 두 모녀가 포옹하는 것을 지켜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자기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시선을 느끼고는 흠칫하며 눈을 들었다.차동수는 하선주의 뒤를 따라 입구로 왔는데 문이 열리자마자 차우미를 보았고, 이어서 딸의 뒤에 서 있는 나상준을 보았다.그는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깜짝 놀랐다.사위였던 나상준은 나씨 가문의 후손으로서 언제나 예의가 바르고 사려가 깊었다.나상준의 성격은 보통 사람과 달랐는데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고 잘 웃지도 않으며 내성적이어서 사람들이 잘 접근하지 못한다.차우미와 나상준이 결혼한 3년 동안 차동수도 사위 나상준과 몇 마디 해본 적이 없어서 여전히 낯설었다.차동수에게 나상준은 아주 훌륭하고 교양이 있는 젊은이였고 동시에 따뜻함도 인간미도 없는 사위이기도 했다.이런 사윗감은 좋다고 하기도 나쁘다고 하기도 애매했는데 차우미만 좋으면 그들은 의견이 없었다.그런데 두 사람이 이혼한 이유가 제3자 때문이라는 것이 제일 의외였다.차동수의 마음속에 나상준은 절대 교양이 없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일이 발생하고 나니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다만 나상준의 신분과 지위를 곰곰이 생각해 봤을 때 있을 법한 일이기도 했다.비록 부모 눈에 자신들의 자식이 제일이겠지만 차우미가 어느 정도인지는 그들도 똑똑히 알고 있었고 또 사람과 사람은 차이가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나상준과 같은 훌륭한 아이가 나씨 가문과 차씨 가문의 관계가 아니었다면 절대 차우미와의 결혼이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다.만약 나상준이 차우미보다 훨씬 훌륭하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았더라면 차동수는 절대 두 사람을 만나게 하지 않았을 건데 나중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가 알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기에 운명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얼마 전에 차우미가 나상준과 이혼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마음이 아팠는데 동시에 다행이라고도 생각했다. 모든 사람이 그렇듯이 맞지 않으면 하루빨리 헤어지는 게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그래서 하선주가 나상준을 못마

  • 봄날   제955화

    차우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아니야. 시간도 늦었고 아빠와 엄마는 이제 주무실 거야. 그러니 상준 씨도 일찍 돌아가서 쉬어.”안평에 오기 전에 나상준은 차은평과 소명진을 보러 온다고 했지, 차동수와 하선주도 만나겠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기에 차우미는 조금 놀랐다.하지만 그녀는 금방 나상준의 뜻을 이해했다.후배로서 예의상 부모님을 찾아뵙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고 안 가면 오히려 말이 안 되는 것이다.하지만 차우미는 나상준이 자기 집에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는데 왜 그러는지는 나상준도 잘 알고 있었다.“가자.”차우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나상준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했다.나상준이 말을 마치자마자 차가 그와 차우미 앞에 멈춰 섰다.나상준은 몸을 옆으로 돌리고 뒷좌석의 차 문을 열어 차우미를 타라고 했다.차우미는 약간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다음에 가. 그리고 상준 씨는 일도 바쁠 텐데 얼른 가서 일해. 굳이 오늘 갈 필요 없으니 나중에 시간이 많을 때 가도 돼.”“지금 시간이 돼.”“...”차우미는 할 말을 잃었다.그녀가 싫어하는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왜 굳이 가겠다고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순간 차우미는 나상준의 깊은 눈동자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상준은 차우미의 생각을 아예 모르는 듯 대답이 없는 차우미를 향해 말했다.“계속 이러고 있으면 시간이 더 늦어져.”차우미는 입술을 다시며 열려 있는 차 문을 보더니 잠깐 머뭇거리다가 올라탔다.나씨 가문에서 자란 나상준에게 예의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기에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차동수와 하선주가 나상준을 반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겠다고 하니 차우미는 포기했다.차우미가 차에 타자 나상준은 문을 닫고 다른 쪽으로 가서 차에 탔다.그들은 순식간에 청강 아파트를 떠났다.청강 아파트와 차동수가 살고 있는 아파트가 멀지 않았기에 십여 분이면 도착할 수 있었다.게다가 지금 시간은 교통이 막히지 않은 시간이고 도

  • 봄날   제954화

    차우미는 걸음을 멈추고 소명진의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할머니, 저는 괜찮아요. 상준 씨는 좋은 사람이고 아무 문제가 없어요. 저도 그렇고요. 저희는 그냥 맞지 않을 뿐이에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소명진은 밤하늘을 바라보더니 평소와 같은 단순하고 깨끗하고 부드러운 얼굴이었지만 눈에는 걱정이 많았다.“알았어. 맞지 않으면 다시 찾으면 되지. 우리 손녀가 얼마나 훌륭한데, 꼭 잘 어울리는 사람을 찾을 수 있을 거야.”차우미가 웃으며 소명진을 끌어안더니 소명진의 등을 다독이며 말했다.“할머니, 저 꼭 행복할 거예요. 저만 믿으세요.”소명진도 웃었다.“그럼, 우리 우미는 꼭 행복할 거야.”차우미와 소명진은 밖에서 너무 오래 머무르지 않고 30분 정도 있다고 신선한 과일을 사 들고 집으로 돌아갔다.집에 들어서자마자 차우미는 거실의 분위기가 나갈 때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차우미는 나상준과 차은평을 번갈아 보았는데 두 사람은 여전히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지만, 표정은 모두 달라졌다.나상준의 표정은 여전히 기쁨과 분노를 알아볼 수 없었지만 차우미가 예민한 탓인지 그녀는 나상준이 조금 전과 너무 달라진 것 같았다.반면에 차은평은 표정에 명백한 변화가 있었는데 전처럼 웃는 모습이 아니고 근엄하고 위엄이 느껴졌다.차우미와 소명진이 나가자마자 그다지 좋지 않은 대화를 한 모양이다.차우미는 과일을 테이블에 놓으며 말했다.“할아버지, 할머니, 시간이 많이 늦었으니 이제 쉬셔야죠. 저희는 이만 갈게요. 나중에 시간이 되면 다시 또 뵈러 올게요.”현재의 시간은 노인들에게 있어서 늦은 시간이 확실하다.차운평은 찻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끄덕였는데 조금 전의 엄숙한 표정은 차우미 집에 들어오는 순간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다시 인자한 얼굴로 변했다.“우리도 알아. 걱정하지 마. 너도 지금 금방 도착했으니 얼른 집에 가서 쉬어. 너의 부모도 너를 기다리고 있을 거잖아. 그런데 너 몇 달 못 본 사이에 야윈 것 같아.”매년 청주에서 새해를 맞이하고 차우

  • 봄날   제953화

    주변의 공기가 갑자기 응축되면서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른 것 같았다.차은평은 주전자를 들고 나상준을 바라보았는데 조금 전까지 보이던 후배에 대한 사랑은 온데간데없이 엄숙했다.나상준은 허리를 약간 굽혀 주전자를 받으려던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차은평의 진지한 말에 그는 동작을 멈추고 차은평과 눈을 마주치고 말했다.“네, 사실입니다.”대답을 들은 차은평의 표정은 엄숙하고 모르는 사람을 대하듯 낯설게 변했다.그와 동시에 나상준에게 차를 주려고 들었던 주전자를 거두고 테이블에 올려놓았다.나상준은 차은평의 행동에 놀라지 않고 다시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저와 우미가 이혼하게 된 건 제3자 때문이기도 하지만 전적으로 제 문제입니다. 하지만 결혼 3년 동안 절대 혼인 생활을 배신하는 일은 하지 않았어요. 저희 사이에 오해가 좀 있어요. 제3자는 저도 생각을 못 했던 부분이었습니다. 저의 실수입니다.”차은평은 찻주전자를 내려놓고 자기 찻잔을 들고 마셨다.나상준이 담담한 어조로 하는 말을 들으며 차은평은 잠깐 흠칫하고 눈빛이 흔들리더니 계속 차를 마셨다.그 모습은 나상준의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하고 듣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나상준은 조금은 당황한 표정으로 계속 말했다.“할아버지, 저는 우미와 다시 시작하고 싶습니다. 보상하려는 것도 죄책감도 아니고 나씨 가문과 차씨 가문의 관계 때문도 아닙니다. 오로지 우미와 이번 생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차은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를 마시며 눈을 내리깔고 나상준의 말에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나상준은 말을 마치고 차은평을 바라보면서 무슨 말이라도 하기를 기다렸다.두 사람이 그렇게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거실은 다시 조용해졌다.차은평은 그렇게 나상준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모르는 듯 고요함을 만끽하며 차를 천천히 마셨다.손에 들고 있던 차를 절반 넘게 마시고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자, 차은평은 찻잔을 내려놓고 나상준을 바라보았는데 화는 조금 풀리고 미소가 살짝 보였다.하지만 그 미소는

  • 봄날   제952화

    청강 아파트는 도시 중심이 아닌 외곽에 자리잡고 있으며 입주한 지 2년밖에 안 되는 아파트인데 그 옆에는 강이 있고 그 맞은편에는 작은 산이 있다.때문에 청산녹수가 한눈에 보이고 경치가 너무 좋아 어르신들이 살기에 매우 적합한 곳인데 차우미의 조부모님들도 바로 이 아파트에 살고 있다.그들은 이제 백발노인이 되었지만, 아파트 앞에서 기분 좋게 오가는 차들을 보고 있었다.차가 멈추려 하자 노인들은 누구인지 궁금해서 차 쪽으로 보고 있었고 차 안에 있는 차우미도 밖에 있는 노인들을 바라보았다.차가 멈추자 차우미는 잽싸게 내려서 노인들에게로 다가가서 손을 잡고 말했다.“할머니, 여기까지 나와서 기다리지 않으셔도 되는데...”오늘 밤 차우미가 나상준과 함께 조부모님 뵈러 가는 것을 하선주는 싫어했지만, 그녀는 그래도 하선주와 통화를 마친 후 조부모님께 연락했었다.그리하여 그들이 아파트에 도착하기 전에 차우미는 할머니 소명진의 전화를 받고 도착 예정 시간을 얘기했다.그런데 이렇게 밖에 나와서 그들을 기다릴 줄은 생각도 못 했다.소명진은 차우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괜찮아. 조금 전까지 산책하다가 마침 네가 올 시간이 되는 것 같아서 기다린 거야.”두 사람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소명진은 차에서 내려 차우미 옆에 서 있는 키가 큰 사람을 보았다.나상준이 말했다.“할머니, 안녕하세요.”소명진은 나상준을 향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우미를 보고 말했다.“들어가자. 할아버지는 기다리다가 먼저 집에 들어갔어.”“네.”차우미는 소명진의 팔짱을 끼고 손을 잡고 계속 문질렀다.소명진은 차우미의 일과 생활에 관해 물었고 차우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하나하나 대답했다.나상준은 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차우미 옆에서 두 사람이 걷는 속도와 비슷한 페이스를 유지하며 걸었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그렇게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고 두 분이 사는 건물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 봄날   제951화

    “띵. 존경하는 여러분 안녕하세요. 우리 비행기는 15분 후에 안평 공항에 착륙할 예정입니다. 착륙 준비를 위해...”기내에서 항공 승무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차우미는 속눈썹을 움직이다가 멍한 표정으로 눈을 떴는데 기내의 희미한 조명과 윙윙거리는 비행기 소리가 들려왔다.그녀는 제대로 한잠을 잤다.무의식적으로 창밖을 바라보니 안평시의 불빛들이 깜빡였는데 밤하늘의 가득 채운 것이 은하수의 별빛처럼 아름다웠다.차우미는 일어나 앉아서 눈을 비볐다.나상준은 옆에 있는 차우미가 일어나면서 담요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잽싸게 손을 뻗어 담요를 잡아 다시 덮어주었다.차우미는 무언가 느끼고 고개를 숙였는데 관절이 명확한 손이 자기에게 담요를 덮어주고 있었다.“고마워”그리고 직접 담요를 가져다가 덮었다.담요를 정리하고 차우미는 자연스럽게 하품하며 계속해서 창문으로 점점 가까워지는 도시를 바라보았다.목적지에 가까워지면서 비행기는 점차 하강했는데 익숙한 도시, 고향이 가까워지자, 차우미는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었다.드디어 돌아오게 되어 그녀는 행복했다.나상준은 미소를 짓고 있는 차우미의 옆 모습을 바라보았는데 눈에 빛이 반짝거렸고 또 하품으로 인해 살짝 촉촉했다.눈빛에서 나상준은 차우미가 고향으로 돌아와서 너무 행복해하는 것을 느꼈다.어느덧 시간이 흘러 비행기는 유유히 안평 공항에 순조롭게 착륙했다.기내는 어느새 등이 전부 켜졌고 승무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차우미는 안전벨트를 풀고 가방을 챙겨 일어섰는데 도로 옆에 앉은 나상준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가방을 들고 먼저 나갔다.차우미는 하는 수 없이 나상준의 뒤를 따라 기내에서 나갔다.두 사람은 여전히 VIP 통로로 아무 막힘없이 일사천리로 몇 분 만에 공항을 나왔다.차는 이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기사는 차우미와 나상준이 나오는 것을 보고 즉시 짐을 받아 트렁크에 넣었다.나상준은 뒷좌석의 차 문을 열어 차우미에게 먼저 타라고 했다.차우미는 사양하지 않고 올라가서 안쪽으로 앉

  • 봄날   제950화

    진문숙은 마음이 어찌 조급했는지 가능하다면 올해에 결혼식까지 치르고 싶었다.파티에서 사람들은 서로 잘 아는 사람들과 모여 앉아서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며 우아한 음악 선율에 맞춰 각자의 생각과 행복, 그리고 걱정들을 이야기했다....성북동 별장에서.주혜민은 운전해서 별장을 떠난 후 액셀러레이터를 세게 밟고 큰 도로로 빠르게 달렸다.그날 밤, 그녀는 나상준의 냉정한 눈빛이 너무 두려워서 가까이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고 당황했다.주혜민은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해 봤지만, 도저히 나상준과 가까이할 수 없었다.그래서 고민 끝에 문지영을 만나서 상황을 얘기하려고 했다.비록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문지영과 친해지면 그것 또한 자기에게 유리할 거라고 믿었다.그런데 주혜민이 문지영이 집에 있을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방문했는데 결국 집에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가정부의 말에서 문지영이 자신을 만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왜 나를 안 만나려고 하는 거지?’주혜민은 설마 나상준이 다른 여자를 데리고 문지영을 만났고 또 문지영은 그 사람이 마음에 들었는지 궁금했다.그녀는 문지영의 성격을 잘 아는데 절대 아무에게나 마음을 주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그런데 이제 며칠도 되지 않았는데 문지영이 자기를 만나주지 않는다는 건 그 이유 외 다른 건 없다고 생각했다.이제 문지영이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여자가 자신을 이겼다는 생각에 화가 났다.‘절대 안 돼!’주혜민은 지금 상황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녀는 상대가 자기보다 조건이 좋든 안 좋든 절대 나상준을 포기할 수 없었다.3년을 기다려서 겨우 기회가 왔는데 다시는 나상준을 다른 여자에게 뺏기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핸들을 꽉 잡고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았다.그러자 기다란 브레이크 소리가 깊은 밤에 울려 퍼졌다.차를 길옆에 주차하고 주혜민은 분노로 가득 찬 눈으로 앞을 바라보았는데 눈빛에는 분노가 활활 타올랐다.그녀는 더 이상 시간

  • 봄날   제949화

    문지영도 멀지 않은 곳에서 들리는 편안하고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들으며 시선을 돌렸는데 한 번에 몇몇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아봤다.거의 모두 만나봤던 사람들인데 그중에 온씨 가문의 진문숙도 있었다.문지영은 친구 사귀는 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인데 특별히 필요가 있을 때만이 그 필요한 사람과 가까워지려 한다. 예를 들어 지금의 서혜란처럼 말이다.예를 들어 온씨 가문의 진문숙과는 거의 왕래가 없었는데 평소에 가끔 만나면 간단하게 웃으면서 인사만 하는 사이였다.서혜란의 말에 문지영은 궁금해서 물었다.“결혼식이라니? 어느 가문에 결혼식이 있을 것 같아?”문지영 나이대의 사람들은 자식들의 나이가 모두 나상준과 비슷했는데 거의 모두 결혼해서 아이까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게다가 최근에 어느 가문의 자식이 약혼하고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없었다.서혜란은 문지영을 보더니 턱으로 진문숙의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저기 가운데 있는 온씨 가문의 며느리 진문숙 씨 알지?”문지영은 진문숙 방향으로 보았는데 거기에는 3~4명이 있었는데 진문숙에 가운데서 제일 기쁘게 웃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무슨 경사가 있는 듯싶었다.문지영이 잠깐 생각하더니 무언가 떠오른 듯 말했다.“온씨 가문의 아들은 해외에서 무슨 연구를 하는데 괜찮다고 들었어.”예로부터 사람들은 훌륭한 아이와 나쁜 아이들에 대한 인상이 깊게 남는다.“맞아. 온씨 가문의 아들은 모두가 좋다고 해. 최근에 들었는데 그 아들이 좋아하는 아이가 있다고 해. 성격이 조용하고 가문도 좋으며 진문숙 씨도 보고 엄청 마음에 들었나 봐.”문지영이 그제야 이해했다.그들과 같은 가문에서는 며느리를 볼 때 아들만 좋아한다고 되는 거 아니고 가문 어른들의 동의도 받아야 하는데 만약 어른들이 동의하지 않으면 절대 불가능했다.그런데 서혜란이 진문숙도 만나보고 만족한다고 하니 아마도 성사될 거라고 생각했다.“그럼, 잘된 일이군.”말은 그렇게 했지만, 문지영은 마음속으로 조금 다급했다.주변의 많은 아이들은 모두 결혼

  • 봄날   제948화

    어떤 일은 당사자가 눈치채기 전에 잘못 말하면 미움을 사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그 뒤에 주씨 가문에 일이 발생하고부터 문지영은 서혜란과 가까이 지냈는데 그녀를 통해서 더 많은 아기씨를 요해하고 직접 며느리를 고르고 싶었다.그때 서혜란은 마음속으로 기뻐했고 문지영이 장님은 아니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혜란은 주혜민의 나쁜 말은 하지 않고 자기가 알고 있는 아가씨들에 대해서만 문지영에게 알려주고 문지영이 직접 만나보고, 조사하고 고려하게 했다.비록 주혜민은 좋아하지 않지만, 서혜란은 나상준을 높이 평가했다.서혜란이 봤을 때 나상준은 능력이 있고 대담하고 용감하며 신중하게 일 처리 하는 모습에 호감을 느꼈다.하지만 결혼은 서로 맞아야 하는 것을 알고 있기에 비록 자기 가문에 나이와 조건이 비슷한 소녀를 나상준에게 소개해 주려고 골라봤지만, 도저히 찾을 수 없어서 포기했다.사람은 자신의 상황을 잘 알아야 한다.사람과 사람이 이어지려면 서로 맞아야 한다.서혜란은 모든 일을 한 번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본다.때문에 문지영이 며느리를 찾는 문제에서 그녀는 특별히 신경을 써서 모두 나상준과 잘 어울릴만한 아가씨들만 문지영에게 말했다.이제 남은 건 나상준의 마음에 달렸는데 그는 아무나 쉽게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다.문지영이 주혜민을 얘기하는 것을 듣더니 서혜란은 곧바로 문지영이 이제 주혜민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주혜민은 정말로 며느리로 적합하지 않았기에 서혜란도 그냥 준다고 해도 거부할 것이다.“그 아이가 상준이를 많이 좋아하나 봐요.”서혜란은 여전히 주혜민에 대한 나쁜 말은 하지 않고 이해한다는 듯이 말했다.주혜민과 나상준에 대한 소문은 서혜란도 들었지만 믿지 않았다.나씨 가문의 나상준이 만약 정말로 주혜민을 좋아한다면 절대 다른 사람과 결혼하지 않았을 거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게다가 주혜민이 어떤 사람인지 나상준이 모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때문에 나상준이 주혜민을 선택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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