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의 기후는 일정치 않았다. 특히나 진달래 산은 더 그러하다. 차우미와 온이샘이 절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보슬비는 산과 나뭇잎에 떨어져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두 사람은 방을 예약한 뒤 간단히 씻고 절밥을 먹으러 갔다.이 계절은 진달래가 만개할 때라 많은 사람이 이곳을 찾아 진달래를 감상했다.하지만 절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절밥을 먹는 사람도 아주 적었다.서서히 밀려오는 어둠과 함께 빗소리가 자욱하여 절 안은 더욱 적막해졌다.차우미와 온이샘은 그저 가끔 나지막한 목소리로 두 마디씩 나눌 뿐, 되도록 조용하게 식사를 마쳤다.하지만 두 사람이 식사를 끝내고 일어서려 할 때, 갑자기 쨍그랑 소리와 함께 그릇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이 부서졌고 남은 음식도 덩달아 바닥에 전부 엎질러졌다.차우미는 멈칫하더니 시선을 앞으로 향했다.한 젊은 여자가 벌떡 일어나 맞은편에 앉은 남자에게 삿대질하며 소리를 질러댔다.“오기석, 너 그게 무슨 말이야? 여기까지 같이 온 게 억울해? 내가 똑똑히 말하는데, 억울해도 참아!”여자는 의자를 발로 걷어차고 뒤돌아섰다. 남자는 거기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더니 사람들의 시선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차우미는 시선을 거두고 휴지를 꺼내 온이샘에게 넘겨주었다.온이샘도 그 장면을 보았지만 차우미를 따라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가지런히 접힌 휴지를 바라보며 온이샘은 저도 몰래 미소를 지으며 건네받았다.“고마워.”두 사람은 곧 식당을 나섰다.밖은 아까보다 더 어두워졌고 절당 안의 등불만이 환히 빛나며 산을 밝게 비추었다.비는 여전히 세게 오지 않았다. 아까처럼 가늘고 촘촘하게 산에 뿌려져 흰 안개를 만들었다.“공기 좋다.”두 사람은 걸어 나와 절을 둘러보았다.도시의 소란스러움과 고층 건물을 벗어난 이곳은 고요함으로 사람 마음을 안정시켜 준다.차우미는 절의 건물과 조각을 열심히 관찰했다.온이샘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응했다.“진달래 산 공기는 정말 좋아. 그래
그렇다. 휴대폰 화면에 뜬 발신자는 다름 아닌 나상준이다.주변은 고요해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심지어 가느다란 빗소리마저 사라져 버린 듯했다.차우미는 휴대폰 화면에 표시된 발신자를 보고 잠시 머릿속이 하얘졌다.기억 속의 나상준은 한 번도 그녀에게 먼저 전화를 걸지 않았다.무슨 일이 있으면 허영우가 그녀를 알리면 알렸지 나상준이 직접 알린 적은 없었다.마치 그녀가 그에게 전화를 거의 하지 않는 것처럼.그런데 지금 나상준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차우미에게 있어 이런 일은 마치 하늘에 핀 꽃을 보는 것처럼 몽환적이라 믿어지지 않았다.휴대폰은 아직도 윙윙거리며 손바닥에서 진동하고 있다.그 진동은 그녀에게 이것은 진실이라고 알려주는 것 같았다.그녀는 손끝을 움직여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그녀의 가랑비를 머금은 것 같은 잔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마치 비 오는 그날 밤, 이혼을 제기하던 그때처럼 말이다.바 앞에 서서 컵을 들고 물을 마시던 나상준은 그녀의 잔잔한 목소리에 동작을 멈추었다.“물 안 나와.”찬물이 나상준의 식도를 타고 위장으로 흘러 내려갔고, 나상준은 개운함을 느꼈다.그럴 줄 알았다. 나상준은 급한 일이 있기에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을 것이다.그는 워낙 쓸데없는 말을 하기 싫어하는 성격이라 중요한 말만 했었다.휴대폰 저편에서 들려오는 무거운 목소리에 차우미는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수도 요금 안 낸 거 아니야?”“몰라.”나상준은 정말 모른다.나상준은 매일 회사 일로 바쁘다 보니 집안일에 신경 쓰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집안일은 하나도 몰랐다.그녀는 의미 없는 질문을 했다.“샤워하다가 단수된 거야?”그녀는 아마도 이런 이유일 것이라고 생각했다.“응.”“기다려 봐. 내가 낼게.”말을 끝낸 차우미는 휴대폰 앱으로 수도 요금 10만 원을 냈다.별장에서는 수도 요금보다 전기 요금이 더 많이 들었다. 아무래도 면적이 크다 보니 전기가 많이 나갈 수밖에 없었다.별장에서 나오기 전, 그녀는 이미 모든 걸 확인
종료 버튼을 누르려던 손가락은 그대로 멈췄다.“선배.”차우미는 온이샘에게 다가갔다.온이샘은 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통화 끝났어?”“응.”온이샘은 스님을 향해 합장하고 고개를 숙였다.“그럼 먼저 일 보십시오.”스님은 저녁 수업이 있어 지금 당장은 시간이 없다고 했다.스님도 합작하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뒤돌아 떠났다.차우미는 멀어져가는 스님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확실히 스님이 우리보다 이 진달래 산에 대해서 더 잘 아실 거야.”그 스님은 대략 예순, 일흔의 나이로 이 산에서 오래 산 것이 분명해 보였다.온이샘이 스님에게 진달래 산의 상황을 여쭈는 건 놀랄 일이 아니다.“맞아. 나중에 스님을 찾아뵈어야겠어.”차우미는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계속 앞으로 걸었다.날이 아까보다 더 어두워지니 절의 등불은 더욱 밝아졌다.다만 밤이 깊으니 안개가 짙어졌고, 등불이 안개 속을 가득 메워 주변이 몽환적으로 물들었다.두 사람은 한가롭게 걸었다. 이 고요한 밤, 그들의 발소리는 평화롭게 들려왔다.그런데 갑자기 쌀쌀한 바람이 불어왔다. 차우미는 외투를 걸치지 않았고, 쌀쌀한 바람은 산의 서늘한 기운과 한데 섞여 그녀는 저도 몰래 추위에 몸을 떨었다.그 모습에 온이샘은 즉시 외투를 벗어 그녀에게 걸쳐주었다.차우미는 멈칫하더니 이내 사양했다.“괜찮아, 선배.”“나한테 뭘 사양해. 너 이러다 감기 들면 내가 어떻게 너희 부모님께 설명하겠어?오늘 아침에 분명 두 분에게 약속드렸단 말이야.”온이샘은 옷을 움켜쥐고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하지만 우연히 손끝이 그녀의 어깨에 닿았고, 그는 저도 몰래 손을 움츠렸다.다만 아주 미세한 이 터치로 그는 그녀의 피부와 체온을 느꼈고, 심장은 걷잡을 수 없이 뛰기 시작했다.차우미는 이런 과분한 친절을 받아들일 수 없어 거절하려고 했다.하지만 온이샘의 말을 들은 그녀는 자기가 너무 예민하다고 생각했다.온이샘은 확실히 좋은 사람이다.그는 늘 차우미에게 신경 썼고, 그녀가 아플까 봐 걱정했다.
방에 돌아온 차우미는 깨끗이 씻고 잠자리에 누웠다. 시간은 이제 9시를 가리켰다.늦지 않은 시간이지만 오늘 아침에도 일찍 일어났고, 등산을 한 탓인지 잠이 몰려왔다.그녀는 눈을 감고 오늘 하루를 돌이켜 보았다. 그리고 아직 끝내지 못한 일을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잠이 들었다.“가겠다고?”“오기석, 내가 똑똑히 말하는 데 절대 안 돼!”“......”“하하, 좋아. 이리 와. 나 때려 봐!”“......”“퍽!”“......”“오기석, 너 가만히 안 둬!”“......”차우미는 멀리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를 들었지만 오랜만에 등산을 한 탓에 온몸이 쿡쿡 쑤셔 일어나지 않았다.이따금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몸싸움하는 소리도 들렸지만 점차 그 소리는 사라졌다.모든 것이 조용해졌고 그녀는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연기가 풍겨왔다.숨을 쉴 수 없었다.차우미는 무의식적으로 기침을 하며 눈을 떴다.방 안에는 언제 연기가 피어올랐는지, 그 연기는 방 안 가득 자욱이 퍼져있었다.차우미는 완전히 잠에서 깨어났고, 그 냄새는 그녀의 후각을 자극했다.정신을 차린 차우미는 입과 코를 막고 사방을 둘러보았다.방안에 불은 나지 않았지만......차우미는 벽 사이로 스며 나오는 연기를 보고 재빨리 옷을 걸치더니 문을 열고 나가 옆방으로 들어갔다.옆방은 이미 문이 활짝 열렸고, 그녀는 방 안의 상황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그녀의 방과 연결된 벽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저녁에 식당에서 밥을 먹고 그릇을 떨어뜨린 젊은 여자가 바닥에 누워있었는데 그녀의 이마는 피로 물들었다.차우미는 깜짝 놀라 안색이 확 변했지만 워낙 차분한 성격이라 우선 주위를 둘러보며 큰소리로 도움을 청했다.“누구 없어요? 여기 불 났어요, 사람이 다쳤어요!”그녀는 사람을 부르며 안으로 들어가 여자의 앞에 쪼그리고 앉더니 여자의 코에 손을 가져다 대고 숨결을 살펴보았다. 숨이 붙어있다.그녀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갑작스러운 화재와, 여자의
그 상황을 발견한 차우미는 망설임 없이 달려가 엎어지려는 병풍을 옆으로 밀어냈다.쾅 하는 소리와 함께 병풍이 넘어졌다.온이샘은 안색이 하얗게 질려 그녀의 손을 바라보며 외쳤다.“차우미!”“선배 빨리 나가!”그녀는 손바닥에서 전해오는 고통도 잊은 채 온이샘을 잡고 밖으로 당겼다.시끄러운 소리에 다른 방에서 쉬던 사람들도 잠에서 깨어 분분히 밖으로 나와 상황을 확인하더니 황급히 달려갔다.어떤 사람은 신고 전화를 걸었고 어떤 사람은 손을 거들었으며 또 어떤 사람은 불을 끄려고 시도했다.소방차 경찰차 그리고 구급차가 올 때까지 모두 한마음으로 움직였다.차우미와 온이샘은 사고 현장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목격자였고 차우미는 병풍을 밀다가 다쳤기에 여자를 따라 구급차에 올라 병원으로 향했다. 물론 온이샘도 함께 구급차에 올랐다.병원에 도착하자 여자는 바로 응급실로 옮겨졌고 차우미도 손의 상처를 치료하러 갔다.하지만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경험있는 구급대원이 그녀의 상처를 간단히 처리해 주었기에 병원에 도착한 후 의사는 그녀의 화상을 보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다행히 화상이 심하지 않고 제때 처리도 잘했기에 흉터는 남지 않을 것 같네요. 아직 나이가 젊으니 흉터를 남기지 않는 게 좋죠.”차우미의 안색은 고통으로 인해 미세하게 창백해졌다. 급한 상황에서 그녀는 아픈 줄도 몰랐고 나중에야 통증이 전해졌다.특히 이 순간, 그녀의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의사의 말을 들은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다행이네요.”그 상황에서 그녀는 생각할 틈이 없었다. 심지어 생각도 안 하고 그녀는 그런 행동을 했다.후회는 없었다.흉터가 남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온이샘은 차우미 옆에서 거즈로 꽁꽁 싸맨 그녀의 손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안색은 그녀보다 더 창백했다.‘나 때문에 다쳤어. 내가 지켜주지 못했어.’두 사람은 주의 사항을 들은 뒤에 진료실에서 나갔다.온이샘은 차우미에게 말했다.“일단 앉아서 좀 쉬어. 내가 가서 약 받아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온이샘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내가 책임질게.”“알았으니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곧 돌아올게.”“그래.”온이샘이 떠난 뒤, 차우미는 그 자리에서 멀어지는 그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선배가 없었더라면 그녀와 그 여자는 더 심각한 부상을 입었을 것이다.잠시 후, 온이샘은 약을 가지고 돌아왔다. 두 사람은 함께 응급실로 향했다.응급실 밖에는 형사들이 대기하고 있었다.차우미는 그 젊은 여자의 상태가 무척 궁금했다.그들은 형사들에게 오늘 밤에 벌어진 상황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을 상세하게 진술했다.“알겠습니다. 이 정도면 될 것 같아요. 날이 밝았으니 두 분도 어서 돌아가서 쉬세요.”“나중에 궁금한 점이 있으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차우미와 온이샘은 형사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 뒤, 병원을 떠났다.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마무리했으니 나머지는 형사들이 알아서 할 것이다.어느새 동이 트기 시작하고 시간은 다섯 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병원을 나온 차우미는 청량한 새벽 공기를 맡으며 피곤한 얼굴로 하품을 했다.이렇게 밤을 새운 적은 거의 처음이었다. 긴장감이 풀리자 피곤이 몰려왔다.다친 손은 소독하고 연고를 바르자 점점 통증이 옅어지고 있었다.온이샘은 새빨갛게 충혈된 그녀의 눈을 보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일단 호텔로 돌아가서 씻고 좀 쉬어야겠다. 남은 일은 쉬고 나서 다시 얘기하자.”차우미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상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두 사람은 전에 묵었던 호텔로 돌아갔다.그런데 문제가 조금 생겼다.씻고 싶은데 손의 부상 때문에 씻기가 불편했다.화재 현장에서 사람을 구하느라 진땀을 뺏더니 온몸에 매캐한 냄새가 진동하고 몸은 땀범벅이 되어 끈적거렸다.차우미는 난감한 표정으로 붕대를 칭칭 감은 손을 내려다보았다.그녀는 그제야 이 손으로는 간단한 일마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체감했다.온이샘은
커튼이 열려 있는 방 안에는 햇살이 비쳐들어 소파에서 자고 있는 여자의 얼굴을 밝게 비추었다.길게 늘어진 검은 생머리가 소파에 자연스럽게 펼쳐져 있고 그녀는 몸을 웅크린 채 자고 있었다.길게 드리워진 속눈썹이 자연스럽게 눈밑에 그림자를 만들었다.온이샘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자고 있는 차우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많이 피곤한 탓인지 사람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는데도 그녀는 계속 자고 있었다.그는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침대에서 이불을 챙겨 그녀의 몸에 덮어주었다.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그녀의 하얀 얼굴에 부자연스러운 홍조가 드리운 게 보였다.호흡도 평소보다 거칠었다.온이샘은 화들짝 놀라며 그녀의 이마를 짚었다.불덩이 같았다.“우미야.”하지만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은 듯, 그녀는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온이샘은 그대로 그녀를 품에 안고 호텔을 나왔다.그 시각 청주시.어젯밤 밤새 내린 비로 공기 중에는 짙은 안개가 드리웠다. 아침해가 뜨면서 안개는 조금 걷혔지만 공기는 여전히 차가웠다.나상준은 평소처럼 일어나서 트레이닝을 갈아입고 조깅을 마치고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정장으로 갈아입고 출근하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계단을 내려가던 그는 떨떠름한 얼굴로 걸음을 멈추었다.거실의 소파에 어머니 문하은이 앉아 있었다.옅은 자색 원피스에 하얀색 외투를 걸치고 목에는 같은 브랜드의 스카프를 걸친 그녀는 우아한 자세로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소리를 들은 그녀는 천천히 커피잔을 내려놓고 자상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지금 출근하는 거니?”나상준은 조용히 그녀에게로 다가갔다.“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소파로 다가가서 앉은 그는 미리 준비된 커피잔을 들었다.아직은 가정부가 출근할 시간이 아니었다. 차우미가 이 집에 있을 때 삼시 세끼는 전부 그녀가 담당했지만 그녀가 떠난 뒤로는 아무도 그의 아침을 챙겨주지 않았다.그 뒤로 나상준은 따로 가정부를 고용했지만 청소만 하고 밑반찬과 저녁을 챙기는 게 전부였다.문하은은 부드러
교외에 위치한 동안 호텔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곳으로, 경치를 감상하며 식사하기 좋은 곳이었다.점심 때가 되자 주차장으로 외제차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검은색 롤스로이스가 호텔 주차장으로 들어섰다.운전기사가 내려 뒷좌석 차 문을 열자 나상준은 옷차림을 정리하며 차에서 내렸다.안으로 들어가던 일행이 그를 알아보고 다가왔다.“상준이 왔구나?”원 회장 사모님인 서혜란이었다.그녀는 나상준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잘 지내셨어요?”“그래. 어서 들어가자꾸나. 네 엄마는 미리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어. 나랑 같이 들어가자.”“바쁘실 텐데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제가 알아서 들어갈게요.”“괜찮아. 마지막으로 널 봤을 때가 네 결혼식 날이었나? 벌써 3년이 지났구나. 시간 참 빨라.”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서혜란과 나상준은 홀을 지나 안쪽 정원으로 들어갔다.동안 호텔은 파티홀과 정원이 바로 이어진 구조였다. 간단한 생신연이라고는 하지만 호텔 전체를 통째로 빌려 주최한 이 파티에는 수많은 유명 인사들이 참석했다.나상준이 안으로 들어서자 주변에서 호기심에 찬 시선들이 쏟아졌다.훤칠한 키에 넓은 어깨, 그리고 대기업 오너로서의 자신감과 카리스마는 여자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다.태어날 때부터 금수저 집안에서 태어나 양호한 교육을 받고 자란 그는 가만히 있어도 부티가 넘쳐 흘렀다.“저분은….”“NS그룹 대표잖아. 잊었어? 결혼식에도 갔었잖아.”“아… 어쩐지 눈에 익더라니.”“그런데 왜 혼자 왔을까? 와이프는?”“아직 몰랐어?”“뭔데?”“둘이 이혼했대.”“뭐라고?”“쉿! 소리 좀 낮춰.”“왜 이혼했대? 잘 살고 있는 거 아니었어? 와이프도 참하게 생겨서 천생연분이라고 생각했는데?”“원인은 모르겠고 이혼한 건 사실이야.”“아이는 어쩌고?”“애는 없대. 애 태어났으면 축하연에도 우리 불렀겠지.”“그러네. 뭔가 대단한 이유가 있는 것 같구먼.”사람들은 나상준의 뒤를 쫓으며 작은 소리로 수군거렸다.정원에는 나
온이샘은 차우미 앞에 부드럽게 차를 멈추고 문을 열고 나왔다.자기 앞에 서 있는 차우미를 바라보며 그는 진정으로 차우미가 자기 손이 닿는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이 실감 났다.온이샘은 빠른 걸음으로 차우미의 앞으로 갔는데 그녀는 그를 보는 순간 잠깐 멍해 있었다.햇빛이 강렬한 관계로 그녀는 눈을 찌푸려서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하지만 온이샘도 차우미의 이런 표정은 처음으로 보았는데 조금은 귀엽고, 또 조금은 매혹적이었다.온이샘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차우미의 귀에 들어갔는데 그제야 눈썹을 흠칫하며 온이샘이 자기 앞에서 부드러움으로 가득 찬 눈으로 자기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차우미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웃으며 말했다.“아니야. 선배, 아침 먹었어? 안 먹었으면 내가 살게.”차우미가 그를 보자마자 첫마디가 그에게 아침 사준다는 말에 그는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온이샘이 웃는 것을 본 차우미는 왜 웃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고 그 표정을 본 온이샘은 더 크게 웃었다.그러다가 헛기침하며 웃음을 꾹 참았는데 입꼬리는 여전히 참지 못하고 치켜올라갔다.“우미야, 여기는 청주이니 내가 살게.”그의 진지한 표정에 차우미가 웃었다.“알았어. 안평으로 돌아가면 내가 살게.”“약속한 거야?”차우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당연하지.”“나 똑똑히 기억하고 있을 거니까 아침 사주기로 한 거 까먹으면 안 돼.”온이샘은 특별히 차우미가 이번에 아침을 사주기로 한 것과 기존에 밥 사기로 한 것을 구분해서 강조했다.전에 약속한 것과 지금 약속한 것을 반드시 별도로 해야 했는데 같이 있을 수 있는 차수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차우미가 대답했다.“알았어.”“가자. 내가 먹어 본 중에서 아침을 제일 잘하는 집이 있는데 거기로 가자.”“좋아.”온이샘은 조수석의 차 문을 열어주었고 차우미가 올라타자, 본인도 즉시 운전석에 타고 출발했는데 교통 체증은 여전했다.“오래 기다렸어?”교통 체증 때문에 천천히 달리는 차에서 차
나상준이 만약 아무 일도 없으면 자기와 같이 안평으로 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차우미는 미간을 찌푸리고 한참을 생각하다가 메시지를 보냈다.그녀가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흰색 BMW 차 한 대가 멈춰 섰다.차가 브레이크 밟는 소리를 내며 앞에 멈춰서자, 차우미는 고개를 들었는데 운전석의 문이 열리며 흰색 셔츠에 회색 캐주얼 바지를 입은 온이샘이 내려왔다.시간은 8시가 넘어서 햇빛이 적당하여 너무 덥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몸 전체를 짱짱하게 따뜻하게 내리 비춰주었다.온이샘이 차에서 내리자 밝은 햇빛이 즉시 그를 감쌌는데 얼굴도 더욱 맑고 우아해졌다. 그는 햇빛 때문에 눈을 지그시 뜨더니 입꼬리를 치켜올리고 미소를 아끼지 않으며 차우미를 보고 있었다.그건 만족의 눈빛이었다.차우미는 온이샘의 그런 모습에 마음이 살짝 흔들리는 것 같았다.사람으로서 가장 거부할 수 없는 것이 진심이라고 하는 데 진심은 분명히 통하게 된다.차우미는 온이샘이 자기를 대하는 것이 조금은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는데 여가현이 노골적으로 얘기한 이후로는 그 마음이 더 잘 보였다.온이샘은 차우미를 각별히 챙기고 돌봐주었는데 모든 면에서 온이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온이샘은 연인으로도 남편으로도 너무나 좋은 사람이다.처음에 차우미는 그냥 한 번 시도해 보려고 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피치 못 할 일이 생길 거라는 생각에 이제 더 이상 시도하고 싶지 않았다.온이샘은 남자로서 훌륭하고 심지어 나상준보다도 더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차우미는 만약 이혼한 경력만 없었으면 아무 고민 없이 온이샘과 함께했겠지만, 본인의 상황이 온이샘 인생에 흠집이 될까 봐 걱정되었다.그녀는 본인은 자격이 없기에 온이샘은 자기보다 더 좋은 여자를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왜 그래?”온이샘은 주차장을 나오자마자 차우미의 호텔을 향해 달렸는데 아마 평생 처음으로 이렇게 빨리 운전했을 것이다.청주의 7~8시는 모두가 출근하는 시간이기에 자전거, 스쿠터, 자동차로 이동하는 사람들로 붐볐다.어쩔
휴대폰 화면에 나상준의 이름이 나타났다.온이샘이 아닌 것을 보고 차우미는 잠깐 멈칫했다가 메시지를 클릭했다.[일 끝나면 연락해.]너무 간결한 한 마디였지만 뜻은 분명했는데 동시에 차우미의 머릿속에는 나상준이 어젯밤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일 끝나면 연락해. 너랑 같이 안평으로 갈 거니까.”어제저녁부터 나상준은 차우미와 같이 안평으로 가려고 했는데 그녀가 처리할 일이 있어서 미룬 것이다.차우미는 나상준이 정말로 일이 있고 타임이 맞아서 같이 안평으로 가는 줄 알았는데 그냥 쉽게 미루니까 급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어젯밤에 물어보려고 했지만, 그가 순식간에 차에 올라타면서 대화가 끊어져 버렸다.그 후 집중해서 운전하느라 그 일은 완전히 잊었다.지금 차우미는 나상준의 메시지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정말 나와 같이 안평으로 가겠다는 건가?’차우미는 나상준과 같이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메시지를 확인하고 잠시 생각하다가 답변했다.[오늘 나와 같이 안평으로 가겠다는 거야?]메시지를 보내고 차우미는 나상준이 메시지를 보낸 시간을 보고 엘리베이터로 갔다.그녀는 아까 연락한 시간에서 20분 정도 지났기에 온이샘이 이제 곧 도착할 것 같아서 호텔 입구에서 기다리기로 했다.같은 시각, 관강동 별장에서 나상준은 차우미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욕실로 들어갔다.그는 어젯밤에 회사에서 밤을 새우고 방금 집에 왔는데 샤워하고 식사를 한 다음 곧바로 다시 회사로 나가야 했다.나상준이 욕실로 들어가자마자 물소리가 들렸는데 침대 머릿장에 올려놓은 휴대폰에서 그때 메시지 도착 음이 울렸다.휴대폰은 짧게 두 번 울리고 곧바로 침실에 정적이 흘렀다.별장 전체가 차우미와 나예은이 떠나면서 고요함은 더욱 짙어졌다.욕실의 물소리가 아무리 크게 들려도 별장 내의 고요함과 차가운 느낌은 가려지지 않았다.나상준은 시원하게 씻고 머리를 닦으며 나와서 곧바로 머릿장으로 가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화면이 켜지면서 읽지 않은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는데 발신자 이름을 보고 그는
순간 여가현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차우미가 행복하기를 바라지만 어쩐지 힘들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차우미는 여가현의 목소리에서 슬픔과 무력함을 듣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가현아, 난 괜찮아. 이혼을 결심했을 때 남은 생을 살면서 다시 결혼하기가 쉽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어. 원래는 선배와 잘 지내면서 연애도 해보고 나중에 천천히 결혼 생각도 해보려고 했어. 이샘 선배와 같은 좋은 사람을 놓치고 싶지 않았거든. 그런데 선배가 좋으면 좋을수록 내가 너무 부족하고 자격이 없는 것 같아. 선배는 나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 그래서 계속 이렇게 선배의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오늘 선배한테 확실하게 얘기하고 더 좋은 여자를 만나라고 할 거야. 그리고 나는 당분간 다른 건 신경 쓰지 않고 일에 매진하고 결혼은 나중에 다시 생각할 거야.”어떤 일들은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하는 것이 다를 때가 많다.산도 보기에는 가까워 보여도 정작 가려면 엄청 멀듯이 말이다.온이샘은 차우미에게 바로 그런 가까이에 있는 같지만 사실상 멀고 먼 곳에 있는 존재인 것 같다.여가현은 크게 벌렸던 입을 다물며 속상해했다.“우미야, 나도 지금 세상이 이혼한 여자한테 불공평하다는 거 알아. 현재로서 세상 사람들의 그런 생각을 바꿀 수 없다는 것도 잘 알아. 그런데 나는 이혼을 한 사람도 자기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 그리고 이샘 선배가 너를 지켜줄 거라는 것도 믿어. 너도 이샘 선배가 훌륭한 사람이라는 거 인정하잖아. 더 중요한 건 이샘 선배의 마음속에서 너의 자리는 아무도 대체할 수 없다는 거야.”차우미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현아,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해. 얻지 못한 것은 언제나 좋아 보이는데 정작 얻고 나면 달라질 거라고. 너 그거 알아? 그날 나상준과 같이 예은이를 데리고 식당에 갔는데 선배가 밖에서 우리를 만났을 때의 표정을 보며 재혼이라는 건 쉽지 않다는 걸 절실히 느꼈어. 왜냐하면 아무리 이전의
여가현은 서류의 맨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사인을 하려다가 차우미의 말을 듣고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할 말이라는 건 뭐야? 무슨 뜻이야? 해야 할 말이 뭔데? 그러니까 네 말은 이샘 선배가 고백하기 전에 네가 먼저 거절하겠다는 거야?”역시 차우미와 함께 자란 사람으로서 차우미의 간단하게 한 말에서 그 의도를 알아챘다.차우미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응.”탁!여가현이 펜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두 눈을 크게 뜨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흥분하며 큰 소리로 말했다.“거절한다고? 왜? 이틀 동안 나상준 씨가 또 무슨 말로 너를 꼬셨는데 이샘 선배를 거절한다는 거야? 차우미, 제발 멍청한 짓 하지 마!”여가현은 어찌나 흥분했는지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사무실 안을 이리저리 걷기 시작했다.차우미는 여가현의 반응을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클 줄은 몰랐다.이어서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큰 목소리에 차우미는 깜짝 놀라며 본능적으로 휴대폰을 귀에서 멀리 뒀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가현의 다급한 목소리는 여전히 잘 들렸다.여가현이 말을 다 하고 잠깐 숨을 쉬는 사이에 차우미가 휴대폰을 가까이 가져다 진지하게 말했다.“가현아, 일단 진정하고 내 말을 들어봐.”휴대폰으로 차우미의 차분한 목소리를 들으니, 여가현은 화가 치밀어 올라 핏줄이 터질 것만 같았지만 애써 참고 심호흡하며 자신을 진정시켰다.‘그래, 우선 진정하자.’차우미는 휴대폰 건너편이 조용해지고 거친 호흡 소리가 들리자, 여가현이 듣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속해서 말했다.“가현아, 상준 씨랑 상관없이 나도 오랫동안 생각했어. 얼마 전에 선배의 어머니와 가족들도 만난 적이 있는데 너무 좋은 분들이었어. 이번에 청주에 와서 선배 어머니를 또 뵀었는데 너무너무 좋은 분이셔. 상준 씨의 어머니보다도 엄청 좋았어. 그분도 나를 예쁘게 봐주셨고 나도 선배 어머니가 너무 좋았는데 그렇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건 아니잖아. 나는 이혼했고 선배의 가족과 배경은 너도 잘 알다시피 그런
차우미는 스카이빌리지가 어디에 있는지 알기에 거기에서 호텔까지 거리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온이샘이 스카이빌리지에서 출발하는지를 확인하지 않아서 그냥 마음 놓고 짐을 준비했다.그녀가 모든 짐을 챙겼을 때 휴대폰 벨이 울렸다.익숙한 전화벨 소리에 차우미는 캐리어를 한편에 놓고 손잡이를 거둔 다음 휴대폰을 들었다.휴대폰에서 여가현이라는 아주 익숙한 이름이 보였다.차우미는 온이샘이 도착했다는 전화인 줄 알았는데 여가현인 것을 보고 조금 놀라면서 전화를 받았다.“가현아, 무슨 일이야?.”“이틀 동안 괜찮았어? 나상준 씨가 괴롭히지 않았어? 너 다친 데 없지? 그 아이를 돌봐주는 건 이제 끝난 거야?”휴대폰 건너편에서 서류 넘기는 소리와 함께 여가현의 말소리가 들렸는데 그녀는 일하고 있는 것 같았다.차우미는 그제야 오늘이 월요일이라는 알아채고 웃으며 말했다.“월요일인데 나한테 전화할 시간이 있어?”월요일은 모두에게 바쁜 날이다.“흠! 사실은 어제 너에게 전화하려다가 방해가 될 것 같아서 참았어. 어차피 나상준 씨도 나씨 가문과 차씨 가문의 관계 때문에 감히 너를 어떻게 하지 못할 테니까. 만약 나상준 씨가 너에게 무슨 짓을 한다면 내가 직접 나씨 가문의 어르신을 찾아갈 거야. 그분은 자기 집안 사람이라고 감싸주는 분이 아니니까.”여가현의 말에 차우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나상준은 이미 여가현의 블랙 리스트에 올라서 믿음이라고 전혀 없었다.차우미는 통유리창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아침 햇살을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아니야. 괴롭히거나 다치게 한 것 없어. 이틀 동안 나와 같이 나예은과 아주 잘 놀아 줬어. 상준 씨가 예은이을 얼마나 예뻐하는지 몰라.”직접 눈으로 본 것이 아니라면 차우미도 절대 믿지 못했을 것이다. 이틀 동안의 나상준은 전에 전혀 본 적이 없던 다른 사람이었다.“쳇! 그 아이는 나씨 가문의 아이니 당연히 친절하게 잘해주겠지. 그런데 너는 다르잖아. 너는 이제 나상준 씨의 전처일 뿐이잖아.”차우미는 입술을 살짝
차우미는 온이샘에게 할 일이 끝났다고 아주 간단하게 메시지를 보냈었다.온이샘의 메시지를 확인하는 순간 그녀는 온이샘이 오늘 시간이 되는 것 같아서 대화창을 누르고 답변했다.[호텔에 있어.]윙윙.휴대폰 진동소리였는데 또 온이샘의 메시지가 왔다.[알았어. 호텔에서 기다려. 지금 바로 갈게.]온이샘이 오겠다는 말에 차우미는 깜짝 놀랐다.‘선배가 여기로 온다고?’차우미는 고개를 들고 창밖의 화창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해가 나온 지 한참이 지났고 청주는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여 북적거리기 시작했다.차우미는 창밖의 밝은 햇살을 바라보며 눈을 살짝 찌그리더니 다시 온이샘이 보낸 메시지를 보았다.그녀는 워낙 온이샘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짐을 정리한 다음 아침 먹으러 가려고 했다.그런데 온이샘이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곧바로 답변을 보내고 호텔까지 온다고 할 줄을 몰랐다.차우미가 답장을 보냈다.[알았어.]메시지를 보내고 차우미는 짐을 정리하면서 온이샘을 기다리기로 했다.스카이빌리지에서 온이샘은 7시에 강서흔의 전화 소리에 깨어났다.강서흔이 이른 아침에 온이샘에게 전화를 한 것은 그가 청주에 아직 있으면 만나서 차우미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다.강서흔의 말투에서 조금 다급하고 중요하게 할 얘기가 있는 것 같았다.온이샘은 강서흔이 정말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아직 청주에 있다고 했는데 현재 차우미의 메시지를 기다리고 있어서 언제 만날지는 나중에 다시 알려주겠다고 했다.온이샘은 강서흔에게 아무것도 숨기지 않고 차우미와 식사하기로 한 것까지 모두 말했다.그런데 온이샘의 말을 듣고 강서흔은 더 다급해졌다.‘기다리면 어떡해? 주동적으로 연락해야지.’온이샘의 성격은 온화하고 횡포하지 않기에 차우미를 좋아하더라도 항상 차우미를 존중하고 그녀의 의견을 따랐다.강서흔은 그런 온이샘을 답답해하며 오늘 무조건 만나야 하니 기다리고 있을 거니까 만날 수 있는 시간이 확정되면 알려달라고 했다.그는 이런 일은 얼굴 보고 얘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상준의 회사에서 멀지 않아서 20분 만에 호텔에 도착했다.차우미는 호텔 지하 주차장에 주차하고는 캐리어를 들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자신의 방으로 갔다.방 안은 청소를 해서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는데 마치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차우미는 차 키와 가방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캐리어에서 깨끗한 옷을 꺼내 욕실로 향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샤워를 마치고 나오더니 침대에 앉아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때는 이미 매우 늦은 자정 12시 30분이었다.차우미는 오래 전부터 많이 피곤한 걸 애써 참고 있었는데 시간을 확인하자 참았던 피로가 순식간에 확 풀리는 것 같았다.그녀는 하품하고, 휴대폰을 머릿장에 올려놓고 점등한 다음 바로 누워서 눈을 감았다.점등하는 순간부터 방 안에 고요한 밤이 시작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차우미는 곧바로 꿈속으로 들어갔다.다만 잠들기 전에 그녀의 눈앞에는 오늘 밤 나상준이 예전에는 절대 하지 않았던 말을 할 때의 신중하고 담담하던 모습들이 떠올랐다.그의 눈빛 속에 많은 것이 숨어 있는 것 같았는데 그것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두려워서 멀리 떠나고 싶게 만들었다.청주의 밤은 깊어졌고 도시 전체가 잠이 든 것 같았는데 도시의 혼잡함과 차들의 경적 그리고 사람들의 말소리까지 새벽 시간이 되자 모두 사라졌다.같은 시각 스카이빌리지 서재에서 온이샘은 안경을 벗고 의자에 기대어 피곤한 듯 미간을 찌푸리고 눈을 감았다.그는 서재에 들어간 후 지금까지 줄곧 일을 했다.겨우 일를 끝내고 눈을 감았는데 조금 지나자, 온몸의 피곤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아 눈을 뜨고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시간을 확인하고 휴대폰 잠금을 해제하니 차우미와의 대화창이 나타났다.차우미는 그가 메시지를 보낸 다음 답장을 했는데 비록 아주 간단한 세 글자였지만 온이샘은 만족했다.온이샘은 다시 한번 차우미의 답장을 확인하고는 위로 올려 서로의 대화들을 훑어보았는데 마음이 두근거렸고 동시에 안정감을 느꼈다.‘주말이 지났으니, 내일은 그 아이도 학교에
하성우는 여전히 담담한 나상준의 목소리를 들으며 미소를 지었다.“여가현이라고 알지? 며칠 동안 너의 근황을 조사하고 있어. 대체 뭘 잘못해서 여가현에게 조사를 당하는 거야? 어쨌든 변호사이고 이 바닥에서 몇 년 동안 일해서 차우미 씨보다는 더 예민해.”하성우는 비록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전혀 농담이 아니었다.그는 여가현이 온이샘을 도와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나상준에게는 절대 좋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나상준은 시선을 거두고 눈을 감더니 상관없다는 말투로 말했다.“조사하라고 해.”하성우가 곧바로 웃음을 터뜨렸다.“하긴, 조사해서 네가 어떤 사람이고 옆에 다른 여자가 있는지, 없는지 제대로 상세하게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이번 기회에 여가현이 너를 철저하게 조사해서 이미지를 세탁하면 좋을 수도 있겠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너한테 불리한 것을 유리하게 바꿀 수도 있잖아. 그래도 너니까 그렇게 당당할 수 있지, 나는 절대 안 돼.”하성우는 나상준을 아무리 조사해 봐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걸 알고 있을뿐더러 자신의 주제 파악도 잘했다.나상준이 눈썹을 치켜들며 말했다.“그만해.”“뭘 그만해? 무슨 말이야? 무슨 말을 하는지 도저히 모르겠네.”하성우는 나성준의 무의식적으로 던진 한마디에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나상준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나상준은 고개를 들어 허공을 바라보았는데 모든 것을 꿰뚫어 본다는 듯 말했다.“나연이가 옆에 있을 때 잘해.”어떤 말은 나상준도 직설적으로 할 수 없었다.그는 다른 사람의 연애사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상대가 하성우라서 한마디 했을 뿐이다.게다가 이번은 첫 번째가 아니라 두 번째다.“...”하성우는 바로 굳어버렸다.나상준에게 전화한 것은 자기 문제가 아니라 나상준의 문제를 얘기하려고 했는데 갑작스럽게 불통이 자기한테로 튕길 줄을 생각도 못 했다.하성우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아무 말도 안 하고 조용해지자 나상준이 말했다.“나중에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