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불쾌하게 시작했지만 전반적으로 잘 진행된 식사가 끝나자 하지유는 헤어지기 아쉬워 임은미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말했다.“시간 나면 우리 집에 놀러 와.”“그럴게요 어머님.”임은미는 거짓 미소로 화답하며 손을 뒤로 빼고 인사를 건넸고 채성휘도 부모님께 작별 인사를 전했다.“은미 먼저 보내고 좀 늦게 돌아갈게요.”“안 와도 괜찮아. 차라리 은미보고 들어오라고 해. 넌 매일 연구소 출근도 해야 하고 은미 부모님도 안 계시니까 우리가 돌봐주면 좀 더 마음이 놓이잖아.”채은호는 임은미가 거절할까 봐 조금은 긴장된 마음으로 임은미를 간절히 바라보았다.어쨌든 임은미를 쫓아낸 장본인이 바로 부모님이었으니까.임은미는 이 당황스러운 말을 듣고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전에는 그런 말을 하지 않던 두 사람이 이제 와서 자신에게 득 볼 게 있으니 아부하는 꼴이란. 정말 아무 말도 안 한다고 사람 우습게 보는 건가?마음은 편치 않았지만 임은미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번졌다.“안 그러는 게 좋겠어요. 부모님도 며칠 후면 돌아오실 거고, 게다가 남녀가 결혼도 안 하고 같이 사는 건 평판에도 좋지 않잖아요.”그 말에 채씨 가문 부모님의 표정은 순식간에 일그러졌고 채성휘도 조금은 어색한 표정을 지었지만 임은미는 못 본 척 채성휘에게 말했다.“당신도 배웅 안 해도 돼요. 오늘 밤은 다정이네 집에 묵을 예정이고 집에 손님도 계시는데 부모님 도와서 손님 접대해야죠.”무덤덤하고 무심한 말투에 채성휘는 곧바로 임은미가 오늘 밤 일에 대해 탐탁치 않아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남아서 집안일을 처리할 기회를 주는 걸 알았기에 반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알았어요, 그럼 내일 보러 갈게요.”내일 임은미에게 설명을 해 주겠다는 뜻이었다. 임은미도 그 뜻을 알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다정과 여 대표가 자신의 편을 들어준 이상 채씨 가문 어른들이 더 이상 자신과 채성휘를 반대할 것 같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응어리가 남아 있었
토라진 친구의 말을 들으며 고다정의 눈에는 무력감이 가득했지만 그럼에도 그녀를 설득했다.“그래도 채성휘 씨가 모르는 건 아닌 것 같아. 이번에도 단호하게 나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너에 대한 태도는 변함없잖아. 그리고 자기 부모님이니까 본인도 난처할 거야. 부모님이 조금 억척스러운 분들이라 그렇지 채성휘 씨도 말했잖아. 앞으로 너와 운산에 정착할 거라고. 그 집 부모님과 같이 사는 것도 아니니까 별문제 없을 거야.”이 한마디에 임은미의 마음속에 있던 분노가 조금은 가라앉았다.사실 다정의 말이 맞았다. 어쨌든 채성휘의 부모님이니 채성휘가 어느 정도 배려를 하는 건 당연했고 앞으로 그들은 운산에 정착할 테니 채씨 가문 어른들의 태도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임은미의 흔들리는 모습을 본 것인지 고다정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게다가 네가 채성휘 씨와 결혼하지 않겠다고 해도 아저씨 아줌마가 반대할 거야.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한부모 가정이 되는 걸 용납할 수 있겠어?”임은미는 입술을 달싹일 뿐 아무 말도 없었다. 하지만 한부모 가정이 뭐 어때서, 아이가 자신처럼 고통받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고다정은 무표정한 얼굴에 분노에 찬 눈빛을 하고 있는 친구를 바라보면서 자연스럽게 친구의 속마음을 짐작하고는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은미야, 미혼모가 되어도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난...”임은미는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한마디 뱉는 순간 말이 끊겼다.“한부모 가정의 삶은 생각처럼 쉽지 않아. 너도 내가 살아온 거 봤잖아. 결혼도 안 하고 아이를 낳으면 어디를 가도 누군가의 화젯거리가 돼. 아이는 말할 것도 없이 더 힘들어. 그때 준이, 윤이가 왜 친구가 몇 명 없었는지 알아? 성북구에 아이들이 그렇게 많았어도 다 어른들 때문에 준이랑 윤이 배척하고 아빠 없는 아이라고 놀렸어.”그 말을 들으며 임은미도 몇 년 전 고다정을 만나러 갔다가 성북구 아이들 때문에 힘들어하는 준이, 윤이를 봤던 걸 떠올렸다.옆에 앉은 여준재는 더욱 마음이
한편 채성휘는 부모님과 함께 한씨 가족 일가를 배웅하고 곧바로 표정이 굳어졌다.그러나 그는 길거리에서 바로 내색하지 않고 굳어진 얼굴로 끝까지 운전해 부모님을 자신이 구입한 아파트로 보냈다.부부도 잔뜩 저조한 그의 기분을 눈치챘지만 찔리는 게 있어 가만히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세 식구는 아파트로 돌아왔고 문 안으로 들어선 채성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어머니, 아버지, 대체 오늘 저녁 무슨 뜻으로 그러신 거예요? 아저씨 아줌마는 왜 왔어요? 진작 나한테 결혼 강요하면서 은미 씨 면박을 주려고 한 거죠?”“강요에 모욕이라니 얘가 무슨 소릴 지껄이는 거야!”부부는 찔리는 마음에 서로 마주보고는 일절 인정하지 않았고 그걸 본 채성휘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엄마, 아빠, 다른 사람들 다 바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오늘 밤 상황이 어떤지 눈만 있으면 누구나 알 수 있어요.”이 말을 들은 두 노인은 침울한 표정을 짓다가 결국 채은호가 화가 나서 이렇게 말했다.“그게 우리 탓이니? 우리한테 제대로 정보를 알려주지 않은 네 놈 탓이지. 은미 언니가 여씨 가문 사모님이란 걸 알았으면 우리가 그랬겠어?”“그래, 그 정도 나이 먹었으면 신중하게 일을 처리해야지. 대체 그 머리로 연구는 어떻게 하는 건지.”하지유도 남편을 따라 채성휘의 잘못을 따지기 시작하자 채성휘는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엄마, 아빠, 이건 제가 말씀드리고 안 드리고의 문제가 아니라 두 분의 태도 문제예요. 분명히 오셔서 결혼에 대해 제대로 얘기하시겠다고 약속하셨잖아요.”“그래서 결혼 얘기 잘했잖아.”하지만 상대는 임은미가 아니라 한씨 집안이었지.부부는 차마 이 말까지 하지는 못했고 채은호는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잖아. 너와 은미 결혼은 원래대로 진행될 텐데.”“원래대로요?”채성휘는 부모님 때문에 기가 막혀 웃음이 났다.원래대로였다면 그가 이렇게까지 걱정하진 않았을 것이다.임은미는 눈에 모래알 하나 들어가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
이후 이틀 동안 임은미는 고다정의 집에 계속 머물며 채성휘를 만나길 거부했다.이에 채성휘는 불안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어 고다정에게 도와달라고 애원했지만 고다정은 동의하지 않았다.고다정은 임은미가 일부러 채성휘를 불안하게 만들어서 다그치려고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당연히 망치지 않으려고 했다.그렇게 이틀이 더 지나고 임은미는 마침내 고다정의 집을 떠났고 채성휘도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은미 씨, 힘들게 해서 미안해요.”만나자마자 채성휘는 임은미에게 미안하다며 사과를 했다.임은미는 수척해진 그의 얼굴을 보며 일부러 내비쳤던 차가움도 어느새 조금은 누그러져 있었다.“내가 힘들다는 건 알아요? 나랑 결혼하기 싫었으면 빨리 말해요. 난 내세울 것 하나 없어도 주제 파악 하나는 잘하니까.”“누가 그래요, 당신과 결혼하는 게 내 꿈이었는데.”채성휘는 서둘러 변명하며 동시에 미처 설명하지 못한 부분을 말해주었다.“부모님이 갑자기 그렇게 하실 줄 몰랐어. 이미 장모님, 장인어른과 결혼에 대해 의논하려고 얘기 끝났는데 약속을 어길 줄 몰랐어. 그리고 다시는 우리 결혼에 간섭하지 않기로 약속도 했어. 부모님 돌아오시면 그대 결혼 마무리하자.”그 말에 임은미도 마음이 풀렸지만 그럼에도 몇 마디 쏘아붙였다.“다정이와 여대표님이 저한테 준 것 때문에 결혼하겠다고 한 거 아니에요?”“...”채성휘는 2초 동안 침묵을 지키며 입술을 달싹이다가 말했다.“부정하지는 않을게요. 부모님은 돈에 대한 욕심이 많아서 고다정 씨와 여 대표님이 주신 것들에 관심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은미 씨와 고다정 씨 관계도 눈여겨보고 있어요. 하지만 전 이미 계약서를 작성했고, 그것들은 고다정 씨와 여 대표님이 당신에게 줬으니 당신 거예요. 어떤 명분으로도 뺏을 수 없으며 그렇지 않으면 우린 이혼하고 앞으로 우리 아이들 양육권도 당신에게 넘기며 내 명의로 된 모든 재산을 은미 씨에게 넘긴다고 했어요. 여기 계약서를 줄 테니까 한번 보고 문제없으면 사인해요.”채성휘는 말이 끝나자마자
“대표님, 방금 E국 쪽에서 유라가 실종됐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며칠 전, 마크는 여준재에게 유라에 대한 반란을 일으켜 유라의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도움을 요청했다.여준재는 당연히 마다할 리 없었고 심지어 이번 사건으로 유라가 수감되기를 바랐다.유라가 힘을 잃으면 고다정에 대한 위협은 사라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하지만 여준재는 많은 사람들이 둘러싼 상황에서 유라가 실종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표정이 어두워졌다.“사람 보내서 찾아봤어? 주요 출구와 항로까지 전부.”“수색을 다 해봤지만 유라의 단서를 찾지 못했습니다.”구남준은 사실대로 보고했고 여준재는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가늘게 떴다.몇 초 후, 그는 다시 입을 열고 물었다.“유라 측근들은 다 잡았어?”그 말에 구남준은 단번에 그의 뜻을 알아차렸다.“단 한 명도 도망치지 않고 모두 잡혔습니다.”말하고 보니 구남준은 이상함을 눈치챘다.유라의 심복들은 모두 잡혀서 그 세력이 일거에 무너졌는데 그 여자는 대체 어떻게 그들의 추적을 피한 걸까.도저히 알 수 없었던 구남준은 여준재에게 시선을 돌렸고 여준재는 당연히 의아한 그의 눈빛을 잃고 무심하게 말했다.“전에도 말했지만, 유라를 과소평가하지 마. 사생아들 사이에서 눈에 띄어 책임자가 될 수 있었던 건 운이 아니라 진짜 실력이었어.”구남준은 그 말을 듣고 변명하고 싶었다.그가 유라를 과소평가한 것이 아니지만 뭔가 이상했다.분명 덫을 놓아 다른 사람들까지 다 잡힌 게 분명한데 왜 유라만 혼자 도망쳤을까.여준재는 그의 눈에 담긴 감정을 못 본 척하며 다시 말했다.“유라는 모든 걸 잃었고 이 사건의 배후에 내가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분명 내게 복수하려고 하겠지만 성공할 확률이 그리 높지 않다는 것도 알겠지. 그 타깃은 다정 씨와 준이, 윤이가 될 테니까 그동안 소담과 소민에게 다정 씨와 준이, 윤이 곁을 항상 지켜보라고 해. 추가로 저택과 산 위의 요양원에도 사람 보내서 지켜봐.”여준재보다 미쳐가는 유라를 더 잘 아는 사람은 없
다음 날, 고다정은 스승님에게 하루 휴가를 받아 연구소에 가지 않았다.하지만 하루 종일 집에 있어도 여준재가 일을 처리하려는 기미가 없자 이상함을 느꼈다.“준재 씨, 오늘 나랑 같이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여준재와 함께 놀던 두 아이도 이 말을 듣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았다.“아빠, 엄마 외출해요?”“우리도 같이 가면 안 돼요?”두 아이는 이구동성으로 말했다.이를 본 여준재는 손을 뻗어 두 아이의 볼을 꼬집으며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채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물론이지. 이번에도 너희도 주인공이야.”고다정은 여준재의 행동에 대한 의구심과 함께 기대감에 가슴이 설레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급한 일이라면 여준재가 두 아이를 데리고 가지 않을 테니까.오히려 깜짝선물이라면 여준재가 두 아이를 데리고 가는 게 말이 되었다.여준재가 아이들을 위해 어떤 깜짝선물을 준비했는지 모르겠다.여준재는 고다정의 생각에 잠긴 표정을 보며 그녀가 뭔가 짐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그는 고개를 숙이고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바라보더니 말했다.“시간 다 됐어, 가자.”두 아이는 그 말을 듣고 무척 기뻐했다.“아빠, 우리 어디 가요?”“뭐 준비할 거 없나요?”아이들은 고개를 들어 얌전히 아빠에게 물었지만 여준재는 비밀스럽게 말했다.“아무것도 준비할 필요 없어. 거기 가서 준비하면 돼.”이 말이 나오자 마음속으로 짐작만 하던 고다정은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보아하니 서프라이즈가 아닌 것 같은데 정말 무슨 일이 있는 걸까?그리고는 의구심을 품은 채 여준재를 따라 차를 탔다.얼마 지나지 않아 네 사람은 도심에 있는 가장 큰 백화점에 도착했다.차에서 내리자마자 훌륭한 외모가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특히 사람들은 익숙한 고다정의 얼굴을 보고 수군거렸다.“저 예쁜 아기 엄마가 왜 이렇게 낯이 익지?”“나도. 전에 뉴스에 나왔던 고다정 교수님 같은데?”“같은 게 아니라 본인 맞아.”“어머? 그럼 옆에 있
여준재는 고개를 살짝 돌려 옆에 서있는 고다정을 힐끔 보더니 단번에 그녀의 마음을 알아챘다.그리고 구남준에게 들은 내용을 그녀에게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돈을 주고 싶은 마음은 알겠어요. 근데 옛말에 조금씩 도와주는 걸 당연히 여겨 더 큰 도움을 주지 않으면 미워하거나 원망한다는 말도 있잖아요. 사실 이것 말고 더 좋은 방법이 있다고 생각해요.”“무슨 방법인데요?”생각해 보니 여준재가 방금 한 말이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확실히 일시적인 건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생각하던 중 다시 한번 남자의 듣기 좋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성북구 쪽의 사업을 시작하라고 지시했어요. 만약 잘되면 그때 윗선과 합작해서 성북구 쪽 리모델링에 투자해서 나중에 인공 명소로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는 아주 게으른 사람만 아니라면 모두 제힘으로 돈을 벌 수 있을 거예요. ”여준재의 이 아이디어는 아주 기발했다.윗사람과 협력하여 성북구를 리모델링하는 것은 도시 경제뿐만 아니라 문화도 이끌어 갈 수 있다. 하여 위쪽에서는 적극적으로 협조해 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면 나중에 성북구의 비즈니스 기회는 엄청 많아질 것이고 부지런하기만 하면 돈 못 벌 걱정은 전혀 할 필요 없다.고다정도 당연히 이 도리를 알고 있어서 마음속으로 여준재에게 매우 고마워했다.“고마워요!”지금 이 순간, 고다정은 자신이 감사하다고 할 수 있는 것 외에 더 좋은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결국 그녀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허리 쪽에 갑자기 남자의 팔이 감기면서 살짝 끌어당기자 그녀의 몸이 남자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그렇게 두 눈이 남자와 마주쳤다.여준재는 더욱 여자쪽으로 다가가서는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제가 저한테 예의 차리면 벌을 준다고 했죠.”말이 끝나자마자 남자는 고다정의 얼굴에 뜨거운 숨을 뿜어냈다.지금 고다정과 여준재는 사귄 지 거의 2년이 다 되었지만 남자의 잘생긴 외모는 여전히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게 만들고 심장을 뛰게 했다.두 아이
주위에서 떠드는 소리는 별로 크지 않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들을 수 있었다.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두 아이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곧 그들 네 식구는 어느 한 건물 앞에 도착했다.도착하자마자 네 식구는 위층에서 들려오는 온갖 시끄러운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주변 환경도 보통 나쁜 게 아니었다.땅바닥은 울퉁불퉁한 데다가 어떤 곳에는 알 수 없는 물때들로 얼룩져있었다.건물의 구석에는 버려진 폐품들과 공병들로 가득 쌓여 있었다.그리고 주변에는 자전거와 전동차가 엉망으로 주차되어 있었다.여준재는 내색하지 않고 주위를 살폈으나 이런 환경을 보고 나니 지난 몇 년 동안 고다정이 혼자 두 아이를 키우느라 얼마나 고달팠는지 알 수 있었다.고다정은 남자가 지금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는 걸 알지 못하고 그저 그가 미간을 찌푸린 모습이 분명 이런 환경을 견디기 힘들어한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생각해 보니 여준재와 사귀었을 때는 이미 여기에서 이사한 뒤였다.또한 여준재 같이 귀하게 자란 사람은 이런 곳에 와보지 못했을 것이다.“아니면 먼저 차에서 기다려요.”그녀의 말에 여준재는 고개를 돌리더니 단번에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는 어이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무슨 헛된 생각을 하는 거예요. 여기가 싫은 게 아니라 그냥 당신이랑 아이들이 여기에서 힘들게 살았던 날들이 안쓰러울 뿐이에요!”여준재는 말을 마친 뒤 고다정의 손을 잡고 낮은 목소리로 다짐했다.“앞으로 더 이상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할게요.”진지한 얼굴로 말하는 남자의 표정을 본 고다정은 이 순간이 행복하기 그지없었다.두 아이는 아빠랑 엄마가 또다시 애정행각을 벌리는 것 같아 두 눈이 마주치자마자 바로 아파트 안을 향해 달려갔다.“이모, 이모.”두 아이는 뛰어가면서 누군가를 큰 소리로 불렀다.방음이 잘 안되는 아파트라 정수현은 주방에서 소리를 듣고 왠지 귀에 익어 서둘러 문 쪽으로 나왔다.이때, 마침 두 아이도 문 앞에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려고 했는데 문이 갑자기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