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연아는 노태호를 잡아 일으켰다. 노태호의 손에는 깨진 접시 조각에 베인 작은 상처가 있었다. 그는 불안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해요, 형... 저를... 저를 이렇게 싫어하실 줄 몰랐어요...” 장연아는 찌푸린 얼굴로 나를 쏘아보며 날카롭게 말했다. “변진섭, 언제까지 이렇게 도련님과 같이 성질을 부릴 거야? 애초에 태호는 이런 일 하는 애가 아니야!” 이런 식의 비난은 이미 익숙했다. 장연아의 마음이 나에게서 떠난 이후, 나는 매일 이런 말을 들어왔다. 내 머릿속은 복잡한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다. 어디서부터 이 혼란을 정리해야 할지 도저히 알 수 없는 기분이었다. 나는 멍하니 내 손가락 끝 상처에 굳어버린 작은 핏방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치 모든 것을 잃은 사람처럼 허탈한 눈빛으로 장연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우가 아파. 돈이 필요해.” 장연아의 회사에 내가 직접 찾아온 일은 거의 없었다. 물건을 전달하거나 돈을 요청하는 것이 회사 방문의 주목적이었다. 장연아는 노태호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노태호의 작은 상처를 마치 자신의 상처처럼 아파하며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그녀는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돈? 좋아. 바닥에 있는 이 조각들부터 치워.” 임선우가 나를 도와주려 허리를 숙이려 했지만, 장연아는 그를 단호히 막았다. 주변은 조용해졌다. 모두 나를 바라보며 다음 순간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고 잠시 숨을 고른 뒤, 몸을 숙여 깨진 조각들을 하나씩 주워 담았다. 날카로운 접시 파편들에 베이고 긁혀 여러 작은 상처가 났지만, 장연아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내가 장연아를 따라 사무실로 들어가자, 노태호 역시 함께 뒤따라 들어왔다. 나는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 “지우가 아파. 돈이 필요해. 2억.” 수술비와 항암 치료비, 그리고 후속 치료비까지 포함한 최소한의 금액이었다.
아침 8시가 되자마자, 나는 다짜고짜 임선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전화를 받자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변진섭? 무슨 일이야?] 어제 나와 장연아가 회사에서 벌인 싸움은 이미 소문이 쫙 퍼져서 회사 전체가 알고 있었다. 우리의 싸움이 아이 때문에 벌어졌다는 사실도 모두가 알았지만, 그 아이가 어디서 온 아이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나는 임선우에게 부탁했다. “혹시 돈 좀 있어? 돈이 필요해.” 임선우는 어제 일을 떠올렸는지 금방 결론을 내렸다. [입양한 아이에게 문제라도 있는 거야?] ‘다른 사람들도 우리가 아이를 입양했다는 사실을 다들 알고 있는데, 정작 연아는 그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어...’ 나는 마음속의 씁쓸함을 누르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급성 백혈병이래. 그래서 돈이 필요해. 돈이 안 되면, 나 일자리라도 좀 알아봐 줘.” 장연아와 결혼한 이후로 나는 한 번도 밖에서 일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집에 돌아왔을 때 누군가 집에서 기다리며 반겨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 한마디에, 나는 집에서 8년을 아내만 기다렸다. 이제는 더 이상 아내만을 바라보며 집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이미 사회와 단절된 나로서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임선우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너 그 상태로 무슨 일을 하겠다고 그래? 돈이 얼마나 필요한지 말해 봐. 내가 방법을 찾아볼게. 나머지는 그 다음에 생각하자.]2억...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금액이었다. 임선우에게도 이 돈은 몇 년 치 저축을 모아야 가능한 액수였다. 게다가 임선우도 최근 동생 결혼을 돕느라 이미 가진 돈을 대부분 써버린 상태였다. 그는 여기저기 돈을 긁어모아 3000만을 보내줬다. [이 정도가 지금 가진 전부야. 좀 기다려봐. 오늘 퇴근하고 나서 또 알아볼게.]나는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다시 말했다. “내가 일할게. 힘든 건 못 하겠지만, 가벼운 일이라면 할 수 있어.” 지우는 임
노태호는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다. “이 목걸이, 가격이 수십억이잖아요. 너무 비싸요. 누나, 다음에는 이런 거 저한테 함부로 사주지 마세요.” ‘몇 십억? 우리 지우의 치료비는 고작 2억이면 충분한데, 한 푼도 내주지 않았어.’ ‘애인을 기쁘게 하려고 수십억을 쓰는 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면서.’ 두 가지 일이 머릿속에서 교차하며 나를 짓누르자, 나는 마음이 아파 몸을 제대로 가누기도 어려웠다. 내 몸이 휘청거리자, 장연아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노태호를 뿌리치고 내게 손을 뻗어 나를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지금의 장연아가 보이는 그 어떤 행동도 나를 역겹게 만들 뿐이었다. 나는 반걸음 뒤로 물러서며 옆에 있는 테이블을 붙잡아 겨우 몸을 지탱했다. 장연아의 손은 허공에 멈춰 섰고, 표정은 금세 차가워졌다. “변진섭, 지금 뭐 하는 거야?”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지금의 내가 뭘 할 수 있겠냐고?’ 비웃는 듯 웃고 싶었지만, 간헐적으로 몰려오는 통증이 너무 견디기 어려웠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술집의 화려한 조명 아래에서도 누가 봐도 내 모습은 다 죽어가고 있었다. 나는 숨을 깊이 들이쉬며, 몸속에서 몰아치는 고통을 꾹 참고, 빠르게 손을 뻗어 노태호의 목에서 목걸이를 확 낚아챘다. 목걸이가 닿았던 노태호의 목 부분의 살이 벗겨져 상처가 났다. 노태호는 갑작스러운 통증에 비명을 질렀다. “변진섭!!!” 역시, 사람은 고통을 겪을 때 가장 밑바닥에 있는 본성을 드러낸다. 노태호의 눈빛에는 순식간에 악의가 서렸다. 나는 고개를 약간 갸웃거리며 말했다. “노태호, 네 누님 앞에서는 그렇게 불쌍한 척하는 연기 잘하더니, 왜 지금은 다른 거야?” 노태호는 즉시 입을 닫고 장연아를 쳐다봤다.하지만 장연아의 시선은 나에게 고정되어 있었고, 노태호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나는 장연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 마디 한 마디 힘주어 말했다. “장연아, 이
나는 그만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임선우가 나를 억지로 침대 위에 눌러 앉히며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어디 가려고 그래?” “지우 보러 가려고.” “안 가도 돼... 지우...” 임선우의 말이 목구멍에서 걸렸다. 마치 목이 졸린 닭처럼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나는 그의 표정을 보며 서서히 웃음을 멈췄다. 믿기 어려운 불길한 예감이 갑자기 내 마음속에 떠올랐으니 나는 바로 임선우를 밀쳐내고 비틀거리며 지우를 찾아 나섰다. 임선우는 내 등 뒤에서 나를 붙잡고 가벼운 힘으로 내 몸부림을 막아냈다. “이미 짐작했잖아. 왜 그러는 거야? 지우는 네가 이렇게 무너지길 원하지 않을 거야.” 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는데, 머릿속이 하얘졌고, 눈물은 소리도 없이 흘러내렸다. 꼭 수도꼭지가 고장 난 것처럼 멈추지 않았다. 나도 그제야 알았다. 남자가 울 때도 이렇게 비참할 수 있다는 것을. 임선우는 나를 다시 침대로 끌고 갔다. 그는 전혀 망설임 없이 내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며, 낮은 목소리로 진실을 전했다. 사실 나는 하루 종일 의식을 잃고 있었고, 지우는 어젯밤 세상을 떠났다.‘그때 나는 뭐 하고 있었던 걸까? 아, 술집에서 노태호의 목걸이에 화를 내고 있었지.’ ‘그런 사소한 일 때문에, 나는 지우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하지 못했어!!’ ‘만약 그때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지우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볼 수 있었을까?’ 이런저런 생각은 나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나는 몸을 웅크리고 침대에 엎드린 채 목 놓아 울음을 터뜨렸다. 임선우는 말없이 곁에 앉아 묵묵히 내 옆을 지켰다. 장연아가 병실에 나타났을 때, 나는 아직 깊은 슬픔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내 초라한 모습이 마치 길 잃은 떠돌이 개로 비쳤다. 그리고 내게 카드를 한 장 던졌다. “카드 안에 6억이 있어. 이걸로 충분히 치료할 수 있어.” 카드는 가볍게 침대 위로 떨어졌다. 너무
‘이제 와서 이런 얘기가... 무슨 의미가 있겠어?’ ‘예전이라면 정말 신경 쓰였겠지만, 지금은 아니야...’ 나는 무표정하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이제는 다 부질없어.” 운전석 쪽에서 안전벨트를 푸는 가벼운 소리가 들렸다. 장연아는 몸을 기울여 내 얼굴을 손으로 돌리며 억지로 나를 보게 만들고 이를 악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변진섭, 중요하지 않다면서 표정은 왜 그 모양이야?”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당신이 이렇게 구차해지는 걸 보는 게 좋거든. 내가 질투하는 모습을 살짝만 보이면, 당신은 꼭 다시 돌아오잖아.” 장연아는 갑자기 손을 거칠게 치웠다. 그녀의 날카로운 손톱이 내 얼굴을 긁고 지나가며 상처를 내자 피가 맺혔다. 내 머리도 그녀의 힘으로 한쪽으로 기울었다. 그 순간, 내 귓가에 다시금 장연아의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변진섭, 당장 꺼져.” 나는 망설임 없이 차 문을 열고 내렸다. 밖에서 내리던 이슬비는 억수 같은 폭우로 변해 있었다...그리고 장연아의 차가 미련 없이 떠나는 것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애초에 연아도 날 그렇게 사랑한 적이 없었을 거야. 단지 내가 예전에 너무 쉽게 떠난 것이 못내 아쉬웠을 뿐이고.’빗줄기는 점점 더 거세졌다. 나는 품에 안고 있던 지우의 소지품 상자를 최대한 비에 맞지 않도록 지켰지만, 결국 다 젖고 말았다. 임선우가 나를 찾았을 때, 나는 나무 아래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는 나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임선우의 집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맨 먼저 상자를 열어 지우의 물건을 확인했다. 다른 물건들은 괜찮았지만, 지우의 그림은 망가져 있었다. 지우가 남긴 그림들은 비에 젖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고, 그저 얼룩덜룩한 색깔만 남아 있었다. 나는 담요를 둘러쓰고 임선우의 작은 아파트 창가에 앉아,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비가 점점 잦아들며, 구름 사이로 햇살이 뚫고 나와 교외의 산을 비추었는데, 마치
임선우는 ‘죽는다'는 말에 나보다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는 입을 굳게 다물고, 처음으로 나에게 날카롭게 말했다. “진섭아! 제발 헛소리 좀 그만해. 너 아직 오래 살 수 있어. 벌써 유언 같은 말 하지 말라고.”나는 가볍게 웃었지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늘에서는 다시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빗줄기가 거세지는 않았지만, 그 빗줄기 때문에 나와 임선우는 잠시 산 위에 머물러야 했다. 살짝 찌푸린 내 표정을 본 스님이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아마도 아이도 아버지를 더 떠나보내기 싫어서, 여기서 하룻밤 더 머물라고 하는 걸지도 모릅니다.”지우가 정말 나를 붙잡고 있는 거라면, 그건 괜찮았다. ... 나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다시 임선우의 아파트로 돌아왔다. 임선우는 얼마 안 되는 내 짐을 손님방으로 옮기며, 조금 미안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뭐 필요한 물건들이 준비되어 있지 않네. 오늘 일 끝나고 돌아오면 같이 필요한 거 사러 가자.”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우의 물건을 만지작거리며 조용히 정리했다. 저녁에 임선우와 함께 마트에 갔을 때, 그가 사직서를 제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며칠만 더 일하고 마무리하면, 회사로 다시 복귀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장연아를 떠나서 생각하면, 그 회사의 근무 조건은 꽤 좋은 편이었다. 퇴사는 손해라고 느껴졌지만, 임선우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원래 장연아 옆에 남아 있었던 건, 너희 둘의 로맨스를 지켜보려는 거였거든. 근데 이제 내 커플링도 깨졌잖아. 더 이상 거기 있을 이유가 없어.” 솔직히 말해서, 나는 정말 몰랐다. 임선우가 장연아 옆에서 일하게 된 이유가 그런 거였다는 것을. “그것 참 미안하네. 내가 네 커플링까지 깨버렸으니.” “진섭아, 장연아는 너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랑에 자격이 어디 있겠어? 다른 사람 눈
그 사진첩 안에 든 지우의 사진들을 발견하자 나는 화가 나서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는데, 그 주인은 바로 노태호였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돌아서서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여기 있던 물건들 다 어디 갔어?” 장연아는 평소 이런 것들을 정리하는 걸 싫어했기 때문에 안방 정리는 분명 노태호가 했을 것이다. 노태호는 내가 무엇을 찾고 있는지 알고 있을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가 이렇게 악랄하게 웃지 않았을 것이다. “그 안에 죽은 아이의 물건이 섞여 있어서 그런지 요새 영 재수가 없더라고. 그래서 전부 내다버렸어. 지금이라도 가서 찾아보면, 쓰레기 더미 속에서는 찾을 수 있겠지.” 지우의 마지막 남은 사진들이 쓰레기 더미에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손끝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사람이 어쩌면 이렇게까지 악랄해질 수 있지? 작은 아이의 유품조차 용납하지 못하다니!!’ 노태호는 여전히 비웃고 있었다. 나는 주먹을 꽉 쥐어 그의 코를 향해 강하게 한 방 날렸다. 비록 암으로 죽어가고 있었지만, 그런 힘이 어디서 나왔는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노태호는 비명을 지르며 코를 감싸고 나를 노려보았다. 그의 손가락 사이로 붉은 피가 흘러내려 하얀 카펫 위를 물들였다. 나는 고개를 약간 기울이며 노태호를 바라보고 말했다. “저기...” 그리고 안방 한구석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덧붙였다. “저기에 카메라가 있는 거 알아? 네가 날 때리면, 장연아가 회사에서 다 보게 될 텐데.” 노태호는 주먹을 몇 번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다가, 결국 무겁게 숨을 내쉬며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여유롭게 방을 빠져나갔다. 방문을 나서는 순간, 벽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노태호의 그런 행동에 대해 나도 이해가 되었다. 왜냐하면 노태호 같은 사람은 어디를 가든 주목받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이런 굴욕을 당했으니, 분노를 표출하는 것도 당연했다. 나는 경비를 찾아가
그 와중에도, 임선우는 한 손으로 갓 삶아서 따뜻한 달걀로 내 얼굴을 찜질해 주고 있었다. 선우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가 옆에 있으니까 어쩔 수 없이 분노를 꾹 참고 있는 것 같았다. 만약 내가 옆에 있지 않았다면, 임선우도 당장 음성 채팅을 켜고 댓글 작성자들과 맞대응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한숨을 쉬며, 그를 보내 유명한 분식집에 가서 김밥을 사 오게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이 친구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 싶었다. 저녁이 되자, ‘장연아 대표의 남편, 언제 죽을까?’라는 해시태그가 다시 한번 검색어 상위권 순위를 장악했다. 사람들은 나의 사망 시나리오를 다양하게 써대며 전용 게시글을 만들어 토론하고 있었다. 임선우가 김밥을 들고 분노 가득한 얼굴로 병실에 들어왔을 때, 나는 마침 그 게시글을 보고 있었다. 그는 내 핸드폰을 빼앗아 내려놓으며 투덜거리듯 말했다. “그딴 정신 나간 네티즌들 말 듣지 마. 보지도 말라고.” 나는 가볍게 웃었고, 사실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어떻게 죽을지에 대한 관심을 갖고 내놓은 추측성 글을 보는 게 의외로 꽤 재미있었다. 이번에는 장연아가 별다른 해명 없이 이 상황을 사실상 묵인하는 태도를 보이자, 대신 노태호가 한발 앞서 SNS에 해명문을 올렸다. 그의 해명은 ‘이건 모두 제 실수’라며 나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해명문에서 느껴지는 억울함과 ‘차가운 배려' 같은 뉘앙스는, 오히려 그 사건이 나와 관련 있다는 반문으로 보였다. 노태호의 해명문은 노태호의 해명이라기보다는 장연아를 보호하려 한다고 느끼게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의 애절한 이미지 메이킹이 너무 훌륭해서, 노태호가 불륜 상대라는 걸 몰랐다면 나도 깜빡 속아서 감동했을지도 모른다. 이미 병원에 입원해서 며칠째 갇혀 있었지만 의사는 여전히 내 퇴원을 더 이상 허락하지 않았다. 오늘 세 번째 퇴원을 요청했을 때, 의사는 짜증 섞인 웃음으로 손에 들고 있던 차트를
내 옅은 미소는 노태호의 가슴을 찔렀다. 노태호가 뭔가 말하려던 순간, 사무실 안에서 장연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변진섭, 왔으면 들어와.” 나는 노태호에게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그의 옆을 지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노태호, 장연아가 나와 이혼하지 않는 한, 넌 절대 세상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거야.” 내가 괜히 자만하는 것은 아니었다. 장연아는 JP 그룹의 명성을 위해서라도, 우리의 부부 관계가 유지되는 동안 노태호를 공식적인 자리에 데려가지 않을 것이다. 사무실 안. 장연아는 의자에 앉아 완벽히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와 빙빙 돌며 말장난하고 싶지 않았다. 노태호와의 쓸데없는 감정 싸움에도 지쳐 있었기에, 장연아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내 생각이 맞다면, 당신은 내가 공식 석상에 파트너로 참석하길 원하는 거겠죠.” 장연아는 더 숨길 생각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방금 들었다면 알겠지만, 상대방은 쓸데없는 사람이 나타나는 걸 좋아하지 않아.” 장연아의 솔직한 태도에 나는 약간 당황했다. “좋아, 동의할게. 하지만 조건이 있어.” 장연아는 손에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고 나를 바라보았다. “조건? 변진섭, 이제 날 상대로 조건을 걸겠다는 거야?” 우리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지만, 그녀의 시선이 차가워지며 나를 꿰뚫어 볼 듯 쏘아보는 것이 느껴졌다. “우리는 이미 이혼 준비 중이잖아. 당신이 계속 동의하지 않고 질질 끌지 않았다면, 이혼 서류는 벌써 효력을 발생했을 거고, 우리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타인이 되었을 거야.” “당신은 내가 조건을 내세울 자격도 없다고 생각하나?” 나는 장연아가 지금 얼마나 나를 증오하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그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그런 건 나에게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장연아는 나를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되물었다. “내가 알기로 변진섭, 당신 지금
노태호가 장연아의 사무실에 있다는 사실보다, 내가 더 궁금한 건 이 사람이 도대체 어디로 가고 싶어 하는지였다. 그리고 노태호가 장연아와 함께 가고 싶어 하는 그곳이, 장연아가 나를 불러낸 이유와 관련이 있는지도 말이다. “누나, 제발 저도 데려가 주세요! 이번 ‘사업 협력’은 저도 꼭 도움이 될 거예요!” ‘협력’이라는 단어가 노태호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나는 약간 의문이 들었다. ‘설마 노태호가 참석하려는 자리가 정말 JP 그룹의 사업과 관련이 있는 걸까?’ 이제야 왜 장연아가 갑자기 나에게 전화를 걸었는지 이해가 됐다. 나는 JP 그룹에서 근무한 적은 없지만, 중요한 자리에서는 여전히 장연아가 여전히 나를 파트너로 데리고 나가곤 했다. 그리고 지금, 노태호가 그 자리에 함께하려는 속셈은 뻔히 드러나 보였다. 나도 문득 호기심이 생겼다. ‘노태호에게 늘 관대한 장연아가 어린 애인의 요구를 들어줄까?’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나는 장연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태호야, 이번 연회는 JP 그룹의 사업에 중대한 자리야. 내 말 들어. 다음번에 데려갈게.” 장연아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지만, 그 안에 담긴 애정 어린 어조는 나에게 숨길 수 없었다. 나와 이야기할 때는 언제나 명령조나 냉소적인 말투였던 그녀였기에, 이런 부드러운 목소리는 나도 정말 오랜만에 듣는 것이었다.“왜요?” “이런 자리에는 반드시 동반할 파트너가 필요할 텐데, 누나 주변에 적합한 사람이 없잖아요. 그런데 왜 저는 안 되는 거죠?” 노태호의 목소리는 점점 격앙되었고, 아마도 장연아가 선택한 파트너가 누구인지 짐작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장연아 앞에서 이렇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을 것이다.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노태호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낮아지고 어딘가 억울해하는 것처럼 들렸다. “누나, 설마 이번에도 연회에 진섭 형님을 데려가려고 하시는 거예요?” 장연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노태호의 목소리가 떨리며 이어졌다. “그
전화가 너무 오래 울려 자동으로 끊기는 걸 보고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마치 나를 쫓아내려는 것처럼 요란한 초인종 같은 전화벨이 또다시 울려댔다. 나는 체념하고 결국 전화를 받았다. 장연아의 어머니는 장연아만큼이나 강압적인 분이었다. 내가 전화를 받지 않으면 몇십 번이고 계속 전화를 걸 것이고, 심지어 여기까지 찾아올지도 모른다.“장모님...” 그러나 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핸드폰 너머에서 어머니의 화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모님이라고 부르지도 마라! 예전에는 내 앞에서 당당하더니, 지금은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는 꼴이라니. 내가 널 잘못 본 건 아니었네. 자네 여전히 어디 하나 쓸데없는 사람이야!]‘나에게 시비 걸려고 전화를 건 걸까?’ 어머니의 비난은 그동안 참아온 분노와 함께 나를 폭발하게 했다. “제가 그렇게 쓸모없다고 생각하신다면서, 전화는 왜 하셨죠?” 내가 단호한 어조로 되받아치자, 어머니는 순간 말을 잃은 듯 잠시 침묵했고, 한참 지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난 자네가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어. 하지만 자네보다는 노태호가 더 우리 장씨 집안을 망신시킬 놈이야! 그러니 자네가 아직 살아 있다면, 어떻게든 연아가 노태호와 완전히 관계를 끊고 정리하도록 하게.]어머니의 최후통첩을 듣고 나는 피식 웃었다. “연아가 노태호와의 관계를 공개적으로 인정한 이유는, 아마 저보다 장모님께서 더 잘 아실 겁니다.” “그리고, 저와 연아는 곧 장모님 뜻대로 이혼하게 될 겁니다. 그러니 저 같은 쓸데없는 사람에게 협박하느니, 차라리 연아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 쓸데없다는 사람인 나는, 사실 ‘장모님’이 상류층 귀부인들 사이에서 체면을 잃지 않도록 해준 사람이기도 했다. 명문가 사모님들이 참석하는 티타임 모임에서, 내 ‘장모님’은 항상 가장 품격 있고 흠잡을 데 없는 모습으로 주목받았다. 왜냐하면 어머니가 입는 모든 옷과 착용하는 모든 장신구는 내가 직접
장연아가 더는 내 차가운 비아냥을 들으러 오지 않을 거라 생각하던 그때, 그녀는 다시 한번 나를 찾아왔다.초인종 소리가 한 번, 두 번, 끊임없이 울렸다.문밖에 서 있는 장연아의 모습이 도어 뷰어를 통해 보였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을 열지 않으면, 그녀도 지쳐서 돌아가겠거니 했다.하지만 예상 밖으로 장연아는 벽에 기대어 문 앞에 주저앉아 있었다.나는 방 안을 이리저리 걷다가 나가서 그녀를 쫓아내야 하나 고민했다. 이 여자를 더는 보고 싶지 않았지만, 문 앞에 앉아 있는 그녀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채자 나는 밖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췄다.‘오늘 떠날 때 노태호의 전화를 받았던 게 틀림없는데, 갑자기 이렇게 찾아온 게 혹시 노태호와 싸워서? 그렇다 해도,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나는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장연아와 노태호의 다툼 따위는 상관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내 마음은 문밖에서 밤새도록 앉아 있을 그녀를 그냥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다. 결국 문을 열고, 장연아를 허리까지 감싸 안아 방 안으로 데리고 들어와 소파에 눕혔다. 술 냄새가 진동하는 여자를 보며 수건을 가져와 닦아주려던 찰나, 그녀가 내 소매를 잡아채며 나를 소파로 넘어뜨렸다. 장연아는 곧바로 내 위로 올라탔고, 작고 가냘픈 몸이 내 가슴에 파묻혔다.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방 안에는 우리 둘뿐이었기에 여자의 속삭임이 명확히 들렸다. “진섭아, 가지 마.” 그 한마디에 내 마음이 송두리째 흔들렸다. 우리가 처음 만난 순간부터 결혼하고 지금까지 함께한 시간이 벌써 10년이다. 나는 장연아가 단 한 번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과거 우리 사이는 깊고 달콤했던 연인이었다. “장연아, 나를 사랑하긴 했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묻는 내 말에 장연아는 희미하게 눈을 뜨려 했지만, 쉽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다시 물었다. “네 마음속
‘지난번? 서혜가 말한 도움이라면, 나와 장연아의 이혼을 돕겠다는 걸까?’ “고마워요. 하지만 도움은 필요 없어요.” 내 말에 서혜는 눈살을 찌푸리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설마 아직도 연아에게 마음이 남아 있는 거예요?” “진짜로 연아와 이혼하려는 건가, 아니면 단지 연아의 관심을 더 끌고 싶어서?” 서혜의 날카로운 태도는 예전 그녀가 장연아와 지인들을 동반하여 나를 조롱하던 때와 다를 바 없었다. “서혜 씨, 우리 그렇게 가까운 사이 아니에요. 그리고 이건 나와 연아 둘의 문제예요.” 서혜가 내 어깨에 손을 뻗으려다, 닿기 직전에 멈췄다. “하지만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이 있어요. 연아는 당신을 쉽게 놔주지 않을 거예요. 이번 보육원 사건 바로 연아가 당신에게 보내는 경고라고요.” 그녀는 격앙된 목소리로 말하며 내 어깨를 양손으로 꽉 잡았다. “변진섭 씨, 내가 도와줄게요. 당신이 장연아에게서 벗어나도록 내가 도울게요!” “변진섭 씨가 투병 중인 것도 알아요. 그런데도 연아는 여전히 당신을 놓아주지 않을 거예요. 그런데도 당신은... 대체 뭣 때문에 미련이 남는 거죠?” 서혜의 말은 장연아를 잘 아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그럴 만도 했지만, 서혜의 태도는 어딘가 석연치 않았다. ‘예전에 연아가 자기 친구들 앞에서 나를 모욕할수록 서혜는 내가 그런 대접을 받아 마땅하다는 태도였는데, 이제는 직접 나서서 나를 돕겠다고? 대체 무슨 이유로?’ 나는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 장연아와 관련된 모든 사람 때문에 나는 지쳐가고 있었다. “연아의 의도가 무엇이든, 이 문제는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을 겁니다.” “이건 나와 연아의 일이고, 누구에게 털어놓는다고 달라질 것도 없어요.” 내 말을 들은 서혜는 갑자기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맞아요, 두 사람은 아직 부부니까요. 명목상 부부이긴 하지만...” 서혜는 더 이상 머물 생각이 없는 듯, 이 말을 남기고 곧장 떠날 준비를 했다.
‘돈 걱정?’ 서현철 대표가 의뢰한 보석 디자인 작업을 맡은 뒤 재정상태에 여유가 생기자, 나는 더 이상 일에 집착하지 않았다. “무슨 일 있는 거야?” 임선우의 어색한 태도와 말투는 평소 그답지 않아서 나는 이 친구가 뭔가 숨기고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너 아직 모르고 있었구나?” 임선우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뭘 말이야?” 임선우가 뭔가 숨기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왜 내가 당연히 알아야 할 것처럼 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핸드폰을 꺼내 내게 보여주었는데, 화면에 뉴스가 하나 떠 있었다. ‘JP그룹, 성남 보육원 후원 중단 논란’이라는 제목이었다. 댓글란은 JP그룹이 ‘은혜를 모른다’며 비난하는 글로 가득했다. 반면, 일부는 JP그룹이 경영난에 처했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라 추측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JP그룹이 위기에 처했을 리가 없다는 것을. 임선우는 내 얼굴이 굳어지자 곧장 나를 달래기 시작했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장연아라면 분명히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낼 거야.”‘해결? 장연아는 절대 쉽게 포기할 사람이 아니야. 이렇게 한 데에는 분명 내 문제도 관련이 있을 텐데.’ 나는 아무 일도 아닌 척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이런 작은 일에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 곧이어 나는 덧붙였다. “그런데 나, 다른 작업실에 들어갈지도 몰라. 혹시 너도 관심 있으면 같이 할래?” 임선우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네가 다른 작업실에 들어간다고? 난 네가 혼자서 뭔가 해낼 줄 알았는데!”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혼자서 잘해 나갈 수 있다면야 나도 그러고 싶지.” 하지만 나는 내 이름으로는 큰 작업을 따내기 어렵다는 현실을 알고 있었다. “그 얘긴 그만하고, 밥 먹으러 가자!” 임선우는 나를 질질 끌고 나가 근처 식당에서 식사한 후 자기 집으로 갔다. 집에 돌아왔
하지만, 나는 노태호를 집에서 자연인으로 수없이 마주쳤기 때문에, 그리고 질투심에 그 잘생긴 얼굴과 완벽한 체형의 톱스타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노태호도 이지석 선생님을 알고 있는 듯했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눈 후 이지석 선생님은 노태호를 주최 측에서 마련한 사무실로 데려갔다. 나는 노태호가 이지석 선생님을 빼앗아 갈까 봐 걱정되지는 않았지만, 그 둘 사이가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때 나는 고민에 빠졌다. ‘이지석 선생님의 작업실에 정말 합류해야 할까?’ ‘만약 이지석 선생님과 노태호가 특별한 관계라면, 선생님과 함께 일하는 동안 노태호를 자주 마주치게 될 텐데...’ 내 옆에 있던 몇몇 젊은 여성들은 이지석 선생님과 노태호가 있는 방향을 주시하며 소곤거리고 있었다. “우리 오빠 진짜 대단해! 이지석 선생님까지 알다니!” 짧은 머리의 한 여자애가 흥분된 얼굴로 말했다. “이지석 선생님이 누구야? 그렇게 유명해?” 이 여자애 옆에 있던 친구는 이지석 선생님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듯했다. 그렇다면 여성들은 아마 노태호 때문에 이곳에 온 것 같았다. “당연히 알지! 노태호가 새 드라마 준비 때문에 이지석 선생님께 디자인을 배우러 왔대. 다음 작품 진짜 기대된다!” ‘작품? 노태호가 다음에 촬영할 작품이 디자이너와 관련된 건가?’ 나는 고개를 저으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노태호의 일을 신경 쓰고 있다는 게 우스웠다. 떠날 채비를 하려던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진섭이, 너 맞지?!” 급히 다가오는 발소리에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그곳에는 이지석 선생님이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지석 선생님이 나를 알아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진섭아, 너 정말 많이 말랐구나!” 이지석 선생님은 눈살을 찌푸리며 지금의 내 상태를 몹시 안타까워했다. 나는 그 곁에 있던 노태호를 보고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선생님,
“당신... 무슨 일인데 지금 말 못 한다는 거야?” 장연아는 내 팔을 꽉 붙잡으며 강렬한 눈빛으로 나를 압박했다. 그녀는 내 귀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아직 이혼도 안 했는데 벌써 내 제일 친한 친구랑 엮이려는 거야?” 나는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장연아를 응시했다. 이 여자라면 나를 잘 알 텐데, 내가 서혜와 뭔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을 리 없다는 것을. 하지만 장연아는 여전히 나도 그녀처럼 한 관계가 끝나기도 전에 다른 감정에 빠질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농담도 좀 심하네. 우리 이혼 서류만 안 썼을 뿐이지, 이미 관계는 끝난 거나 다름없잖아. 나는 장 대표님이 우리 ‘각자 알아서 하자’고 묵인한 줄 알았는데?” 내 입가에 떠오른 냉소가 장연아의 눈에 그대로 들어갔다. 그녀는 내 손목을 더욱 강하게 쥐었다. 나는 고통스러워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여러 차례 치료를 받은 내 몸은 뼈에 살가죽만 얹혀 있을 정도로 약해졌기에, 조금만 힘을 줘도 엄청난 고통이 따랐다. “뭐든 해도 좋아. 하지만 내 주변 사람들은 건드리지 마. 내 친구들은 널 몰라서 속을 수도 있거든.” 장연아는 나를 가장 아프게 할 말만 골라서 던졌고, 그녀의 말은 늘 가차 없었다. 이때, 서혜가 와인잔을 들고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서둘러 장연아의 손을 밀어냈다. 이미 우리 사이가 이혼 절차를 밟고 있다는 걸 다들 아는데, 굳이 남들 앞에서 거짓으로 애정을 과시할 이유는 없으니까. 장연아는 갑자기 내 팔을 끌어당기더니 서혜와 건배하며 말했다. “우리 남편 돌봐줘서 고마워.” 서혜는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저 빨리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마침 누군가가 장연아를 불렀고, 그녀가 대화를 나누는 틈을 타 나는 재빨리 방에서 빠져나왔다. 서혜가 뒤따라온 것은 그 이후였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날 장연아는 서혜의 태도에서 서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많은 사람은 내가 장연아와 결혼한 이유가 그녀의 신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한 번도 그 사람들의 오해를 굳이 풀려 하지 않았다. 그 사람들은 내가 내 힘만으로도 풍족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알 리 없었다. ...지난 한 주 동안 나는 정말 충실한 시간을 보냈다. 장연아가 없는 삶에 점점 익숙해졌고, 더 이상 그녀로 인한 불안감이 생기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놀랍게도 장연아가 꽤 오랫동안 나에게 연락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장연아는 분명 나를 붙잡으려 애썼지만, 과연 그녀는 내게 진심이었을까? 서현철 대표와의 거래가 이미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서혜는 오히려 종종 나에게 만나자고 연락해 왔다. 나는 서혜의 제안을 한 번도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나는 장연아와 관련된 사람들과 어떤 식으로든 얽히고 싶지 않았고, 그 사람들 중에는 서혜도 포함되어 있었다. 내가 서혜에게 어떻게 내 뜻을 전해야 할지 고민하던 중, 그녀로부터 한 장의 초대장을 받았다. 그 초대장은 곧 B 시에서 열릴 디자인 전시회의 초대장이었다. 그 전시회에는 내가 좋아하는 외국 디자이너의 작품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초대장을 보며 고민에 빠졌다. ‘서혜가 나와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닌데, 내가 이 전시회에 관심이 있을 거라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하지만 나는 결국 초대장을 돌려주기로 결심했고, 서혜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약속을 잡았다. 전화를 받은 서혜의 주변은 무척 소란스러웠다. “서혜 씨, 혹시 지금 시간 좀 있어요?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그녀는 잠시 멈칫하더니 말했다. [시간은 있어요. 그런데 지금 움직이기가 어려워요. 조금 있다가 내가 주소를 보낼게요. 급하면 그리로 와요.] 나는 더 이상 이 일을 미루고 싶지 않았다. 서혜가 초대장을 보낸 진짜 이유가 무엇이든, 그녀와 어떤 관계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나는 서혜가 보낸 주소로 찾아가 보니, 그곳은 한 조용한 고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