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진첩 안에 든 지우의 사진들을 발견하자 나는 화가 나서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는데, 그 주인은 바로 노태호였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돌아서서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여기 있던 물건들 다 어디 갔어?” 장연아는 평소 이런 것들을 정리하는 걸 싫어했기 때문에 안방 정리는 분명 노태호가 했을 것이다. 노태호는 내가 무엇을 찾고 있는지 알고 있을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가 이렇게 악랄하게 웃지 않았을 것이다. “그 안에 죽은 아이의 물건이 섞여 있어서 그런지 요새 영 재수가 없더라고. 그래서 전부 내다버렸어. 지금이라도 가서 찾아보면, 쓰레기 더미 속에서는 찾을 수 있겠지.” 지우의 마지막 남은 사진들이 쓰레기 더미에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손끝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사람이 어쩌면 이렇게까지 악랄해질 수 있지? 작은 아이의 유품조차 용납하지 못하다니!!’ 노태호는 여전히 비웃고 있었다. 나는 주먹을 꽉 쥐어 그의 코를 향해 강하게 한 방 날렸다. 비록 암으로 죽어가고 있었지만, 그런 힘이 어디서 나왔는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노태호는 비명을 지르며 코를 감싸고 나를 노려보았다. 그의 손가락 사이로 붉은 피가 흘러내려 하얀 카펫 위를 물들였다. 나는 고개를 약간 기울이며 노태호를 바라보고 말했다. “저기...” 그리고 안방 한구석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덧붙였다. “저기에 카메라가 있는 거 알아? 네가 날 때리면, 장연아가 회사에서 다 보게 될 텐데.” 노태호는 주먹을 몇 번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다가, 결국 무겁게 숨을 내쉬며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여유롭게 방을 빠져나갔다. 방문을 나서는 순간, 벽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노태호의 그런 행동에 대해 나도 이해가 되었다. 왜냐하면 노태호 같은 사람은 어디를 가든 주목받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이런 굴욕을 당했으니, 분노를 표출하는 것도 당연했다. 나는 경비를 찾아가
그 와중에도, 임선우는 한 손으로 갓 삶아서 따뜻한 달걀로 내 얼굴을 찜질해 주고 있었다. 선우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가 옆에 있으니까 어쩔 수 없이 분노를 꾹 참고 있는 것 같았다. 만약 내가 옆에 있지 않았다면, 임선우도 당장 음성 채팅을 켜고 댓글 작성자들과 맞대응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한숨을 쉬며, 그를 보내 유명한 분식집에 가서 김밥을 사 오게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이 친구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 싶었다. 저녁이 되자, ‘장연아 대표의 남편, 언제 죽을까?’라는 해시태그가 다시 한번 검색어 상위권 순위를 장악했다. 사람들은 나의 사망 시나리오를 다양하게 써대며 전용 게시글을 만들어 토론하고 있었다. 임선우가 김밥을 들고 분노 가득한 얼굴로 병실에 들어왔을 때, 나는 마침 그 게시글을 보고 있었다. 그는 내 핸드폰을 빼앗아 내려놓으며 투덜거리듯 말했다. “그딴 정신 나간 네티즌들 말 듣지 마. 보지도 말라고.” 나는 가볍게 웃었고, 사실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어떻게 죽을지에 대한 관심을 갖고 내놓은 추측성 글을 보는 게 의외로 꽤 재미있었다. 이번에는 장연아가 별다른 해명 없이 이 상황을 사실상 묵인하는 태도를 보이자, 대신 노태호가 한발 앞서 SNS에 해명문을 올렸다. 그의 해명은 ‘이건 모두 제 실수’라며 나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해명문에서 느껴지는 억울함과 ‘차가운 배려' 같은 뉘앙스는, 오히려 그 사건이 나와 관련 있다는 반문으로 보였다. 노태호의 해명문은 노태호의 해명이라기보다는 장연아를 보호하려 한다고 느끼게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의 애절한 이미지 메이킹이 너무 훌륭해서, 노태호가 불륜 상대라는 걸 몰랐다면 나도 깜빡 속아서 감동했을지도 모른다. 이미 병원에 입원해서 며칠째 갇혀 있었지만 의사는 여전히 내 퇴원을 더 이상 허락하지 않았다. 오늘 세 번째 퇴원을 요청했을 때, 의사는 짜증 섞인 웃음으로 손에 들고 있던 차트를
아무 걱정도 없이 자라온 장연아는 그 짧은 시간 동안 평생 겪을 고통을 한꺼번에 맛보았다. 나는 정수 이모와 함께 해외로 떠나, 접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미친 듯이 배웠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은, 정수 이모가 바로 내 어머니의 절친이라는 사실이었다. 내 어머니는 원래 부유한 집안의 아가씨였다. 하지만 내 아버지에게 속아 도망친 후,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정수 이모는 내가 어머니의 전철을 밟지 않게 하려고 철저히 막으려 했지만, 결국 나를 막지 못했다. 병상에 누운 나를 멍하니 바라보던 정수 이모의 얼굴에서 점차 미소가 사라지고 결국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나는 정수 이모가 왜 한숨을 쉬는지 알고 있었다. 바로 운명의 장난에 대해 탄식하는 것이었다. 정수 이모는 자기 가방에서 빨간색 녹음기를 꺼내 내 손에 건네주며 말했다. “내 협력자가 다른 곳에서 이걸 손에 넣었어. 긴 생각 끝에 너에게 주기로 했다. 네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진 않지만, 너도 진실을 알아야 해.” 나는 정수 이모를 의아하게 쳐다봤지만, 정수 이모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단지 녹음기를 내 손에 쥐여주고 방을 나갔다. 나는 녹음기를 켜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 안에서 들려오는 건 장연아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술에 취한 듯, 말이 약간 꼬였지만 기분은 좋은 것 같았다. 나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알 수 있었다. “드디어 다시 만났어, 하하.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변진섭, 내가 너를 드디어 다시 봤어.” 녹음기 옆에서 누군가가 물었다. “변진섭이 누구예요?” “변진섭?” 장연아는 웃으며 말했다. “날 버린 전 남자 친구지. 3년 동안 사라졌다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어.” 나는 녹음기를 꺼버리고, 가슴을 움켜쥔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미 돌처럼 굳어버린 심장이, 장연아의 눈물 어린 몇 마디에 다시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감정도 뚜렷이 떠오르지 않았다. 뭔가 크고 무거운
“진섭아, 이모와 함께 이곳을 떠나고 싶니?” “이모, 됐어요.” 놀라움과 충격에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있었지만, 나는 정수 이모의 제안을 본능적으로 거절하고 말았다. “저, 오래 살지 못해요. 이제 와서 괜히 이모까지 힘들게 할 수 없어요.” 나도 이제 너무 지쳤다.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 것도 싫었다. 최대한 빨리 정신을 차리고 억지로 정수 이모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모, 저 피곤해요. 한숨 잘게요.” 정수 이모는 부드럽게 이불을 덮어주고 조용히 방을 나갔다. 나는 침대에 누웠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녹음기 속 장연아의 목소리가 저주처럼 귓가에 맴돌았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불쾌감처럼 나를 쉽사리 놓아주지 않았다. 결국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장연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그녀의 입에서 직접 들어서 확인하고 싶었다. 내 마지막 희망의 끈을 확실히 잘라내고 싶었다. 전화는 빠르게 연결됐다. 장연아 쪽은 조용했는데, 아마 회의 중이었을 것이다. 장연아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다정했다. [무슨 일이야?] “보고 싶어서. 병원으로 와.” 장연아 쪽에서 긴 침묵이 흘렀다. 너무 길어서 전화를 끊은게 아닌가 싶었다. [알겠어.]그녀는 낮고 빠르게 대답했다. 병원은 장연아의 회사와 멀지 않았지만, 그녀의 도착은 꽤 늦은 시간이었다. 장연아는 기쁨이 가득한 얼굴로, 손에는 내가 한때 좋아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먹을 수 없는 음식을 들고 나타났다.그녀는 음식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우리 서로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먼저 손에 쥔 녹음기를 장연아 앞에 내밀었고,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기, 당신에게 줄 깜짝 선물이 있어.” 장연아는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침대 옆에 앉아 녹음기를 틀었다. 그러나 녹음기에서 자기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그녀의 얼굴빛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장연아는 녹음기를 끄려 했지만, 나는 그녀의 손을 눌러 막았다. “그냥 끝까지 들
이때, 임선우가 문을 밀치며 들어왔다. 방 안의 상황을 확인하자 곧바로 얼굴빛이 변한 임선우는 손을 뻗어 장연아를 거칠게 밀쳐냈다. 장연아는 중심을 잃고 반걸음 물러섰지만, 임선우가 순식간에 그녀를 벽으로 몰아붙였다. 임선우의 이마에는 핏줄이 불거졌고, 팔로 장연아의 목을 세게 눌렀다. 그는 이를 악물며 낮은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장연아, 넌 대체 언제까지 진섭이를 괴롭힐 셈이야? 인제 그만 둬! 진섭이 이제 죽어가고 있어! 제발 내 친구를 편히 놔줄 순 없냐고!” 장연아의 얼굴은 붉게 물들었고, 숨을 제대로 쉴 수 없는 듯 보였다. 나는 임선우가 정말 장연아를 해칠까 두려워 서둘러 말했다. “선우야, 그냥 이 사람 보내. 이 사람 때문에 너까지 미래를 망칠 필요는 없잖아.” 임선우는 나를 돌아보더니, 결국 장연아를 놓아주었다. 장연아는 벽에 기대어 몇 번 기침을 하더니,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변진섭이 죽어간다고? 난 못 믿겠는데. 변진섭, 망고 알레르기라고 하더니 이제는 죽어간다고? 도대체 얼마나 더 헛소리를 지어낼 수 있을지 궁금하네.” 임선우가 다시 화를 쏟아내려 하자 장연아는 재빨리 병실을 빠져나갔다. 임선우는 더는 참지 못하고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저 여자는 미친 게 분명해.” 나는 조용히 대답했다. “그런 것 같아.” 사실 지금 내 병세는 너무나 명확해서, 누구라도 나를 보면 이미 건강을 잃었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다.장연아도 모르지는 않을 텐데, 내가 일부러 자신을 속이며 불쌍한 척 연기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예전의 ‘변진섭’이라면 정말 그렇게 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의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나는 임선우를 바라보며 처음으로 부탁했다. “선우야, 나 좀 데리고 나가줘. 어디든 좋아. 여기만 아니면 돼. 더는 장연아와 노태호를 보고 싶지 않아. 둘 다 눈에 띄기만 해도 구역질 나니까.” 임선우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의
나는 걸레로 어머니의 묘비를 깨끗이 닦고, 미리 준비해 둔 백합 한 다발을 묘 앞에 놓았다. 그때 나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우리 어머니가 어떤 꽃을 좋아했는지 기억조차 못 했다. 다만 어렴풋이 백합꽃의 이름을 자주 말씀하시던 기억만 남아 있었다. 임선우는 나무 옆에 기대어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몸이 너무 약해져서 오래 서 있거나 앉아 있기도 힘들었기 때문에, 결국 나는 땅에 주저앉아 어머니의 묘비에 기대어 혼잣말로 많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우리 돌아갈 준비를 할 즈음, 이미 날은 저물고 있었다. 임선우와 나는 저녁에 뭘 먹을지 얘기하며 차로 돌아갔는데, 예상치 못하게 한 남자가 갑자기 차 앞으로 뛰어들었다. 이곳은 도심이라 차량 통행이 잦아서 남자가 뛰어들자 임선우는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고, 바짝 뒤따라오던 차가 그대로 우리 차를 들이받았다. 뒤차 운전자는 창문을 열고 욕을 퍼부었다. “뭐 하는 거야! 왜 갑자기 멈춰!” 나는 좋은 말투로 뒤차를 향해 웃으며 설명했다. “앞에 사람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네요.” 차 앞에 무릎 꿇고 있는 사람이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너무도 익숙한 얼굴을 보았다. 노태호였다. 노태호의 눈은 새빨갛게 충혈되어 있었고, 그 모습은 너무도 애처로워 보였다. 그의 목에는 ‘인제 그만 우리 누나를 놔주세요’라는 팻말이 걸려 있었다.이 문구는 이미 인터넷에 퍼져 있는 소문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챌 수 있는 내용이었다. 노태호가 말하는 ‘누나’는 바로 장연아를 의미하는 게 분명했다.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임선우에게 차를 길가로 옮기라고 신호를 보낸 뒤 차에서 내려 노태호를 바라보았지만 이런 행동을 하는 그의 의도를 전혀 알 수 없었다.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노태호가 먼저 따져 물었다. “왜 누나를 놔줄 수 없는 거죠? 누나는 형님한테 버림받고 정말 힘들게 살았어요! 이제 형님도 누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제발 놔줄 순 없나요? 진섭 형, 부탁이에요. 제발 저와 누나의 아이를
임선우는 조심스럽게 내 안색을 살폈다. 내가 정말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하자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러면 탕수육 어때? 며칠 전에 먹고 싶다고 했잖아.” 탕수육은 달고 느끼해서 내 위와는 좀 맞지 않고, 한 끼를 먹고 나니 위경련이 다시 시작되었다. 칼로 도려내는 듯한 고통이 위장에서 퍼져 나갔고, 나에게 아무런 대비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내 이마에는 가느다란 땀방울이 금세 맺히더니 이내 굵은 땀방울로 흘러내렸다. 이번 통증은 너무 강렬하고 갑작스러워, 나는 소리조차 지르지 못한 채 푹 하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내가 쓰러지는 소리를 듣고 임선우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달려왔다. 나는 또 병원으로 실려 갔고, 이번에는 밤새 응급실에서 처치를 받았다. 다음 날 아침, 내가 깨어났을 때, 의사가 내 침대 옆에서 등을 돌린 채 임선우와 심각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내가 깨어난 소리에 의사가 고개를 돌리더니, 입가에 냉소를 띠며 비꼬듯 말했다.“아니, 이게 누구신가요? 며칠 전 몰래 퇴원하셨던 그 멋진 환자분 아니십니까? 이번에는 또 무슨 일로 돌아오신 겁니까?”나는 몇 번이나 병원에 실려 왔는데도 매번 같은 의사와 마주치는 게 신기했다. 임선우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우리 둘은 병실에 갇힌 채 꼼짝없이 아침 내내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누군가 의사를 부르러 오자 비로소 그 의사는 자리를 떠났다. 의사를 보내고 나서야 임선우는 숨을 돌리며 말했다. “의사 선생님은 그러셨는데, 네 병변은 절제가 가능한 상태래. 절제하면 살아날 가능성이 있다고 했어.” ‘수술이라니, 아플 것 같은데...’ 나는 고개를 저으며 별로 치료받고 싶지 않다고 했다. “네 말대로 가능성일 뿐이잖아. 선우야, 난... 죽기 전에 괜히 고생하고 싶지는 않아.” 임선우는 잠시 침묵하다가 핸드폰을 꺼내 동문회 일정을 보여주었다. “봐봐, 올해 동문회 일정이 연기됐잖아. 내년이 됐는데, 그때까진 버텨야 하지
의사는 긴급하게 만약을 대비한 새로운 수술동의서를 준비하여 가족의 서명을 요구했다. 임선우가 떨리는 손으로 서명하려던 순간, 의사가 소리쳤다. “이렇게 중요한 일은 법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서명해야 합니다!” 임선우는 결국 장연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지금 진섭이가 수술 중인데, 출혈 과다로 쇼크가 왔어요. 동의서에 가족의 서명이 필요해요.”장연아는 임선우의 말을 믿지 않았다. 지금 막 노태호와 함께 어린 ‘애인’의 생일을 축하하고 있었다. 그녀는 노태호의 품에 기댄 채, 노태호가 입에 넣어준 케이크를 먹으며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임선우, 네가 내 밑에서 일한 세월이 얼마인데, 이제 변진섭이랑 짜고 나를 속이려는 거야?]임선우는 핸드폰 카메라 방향을 바꾸어 불이 켜진 수술실 쪽을 비추며 예상외로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 보세요, 장 대표님. 진섭이가 지금 저 안에서 죽어가고 있어요. 그런데 장 대표님은 애인을 품에 안고 한가하게 웃고 계시네요. 진섭이 말이 맞았어요. 장 대표님 같은 사람은 진섭이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어요.]이 말을 듣고 장연아는 순간에 노태호의 품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 “멍청이...”전화를 끊기 직전, 임선우는 참지 못하고 이 말을 던지고 전화를 끊었다. 그 후, 그는 단호하게 통보서에 서명을 하고 의사에게 외쳤다. “선생님!! 무슨 일이 생기든 제가 책임질 테니까, 제발 빨리 제 친구를 살려주세요!!!” 결국, 나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임선우에게 목숨을 빚졌다. 수술을 마치고 눈을 뜨자, 주변 풍경이 익숙하지 않았다. 하얀 천장이 아닌 무영등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임선우는 내가 깨어날 때 곁에 있으려고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는 내 앞으로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을 건네며 물었다. “지금 기분은 어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몸 상태가 나쁘지 않다고 느껴졌다. 수술 후 사흘째 되는 날, 나는 중환자실에서 일
내 옅은 미소는 노태호의 가슴을 찔렀다. 노태호가 뭔가 말하려던 순간, 사무실 안에서 장연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변진섭, 왔으면 들어와.” 나는 노태호에게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그의 옆을 지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노태호, 장연아가 나와 이혼하지 않는 한, 넌 절대 세상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거야.” 내가 괜히 자만하는 것은 아니었다. 장연아는 JP 그룹의 명성을 위해서라도, 우리의 부부 관계가 유지되는 동안 노태호를 공식적인 자리에 데려가지 않을 것이다. 사무실 안. 장연아는 의자에 앉아 완벽히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와 빙빙 돌며 말장난하고 싶지 않았다. 노태호와의 쓸데없는 감정 싸움에도 지쳐 있었기에, 장연아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내 생각이 맞다면, 당신은 내가 공식 석상에 파트너로 참석하길 원하는 거겠죠.” 장연아는 더 숨길 생각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방금 들었다면 알겠지만, 상대방은 쓸데없는 사람이 나타나는 걸 좋아하지 않아.” 장연아의 솔직한 태도에 나는 약간 당황했다. “좋아, 동의할게. 하지만 조건이 있어.” 장연아는 손에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고 나를 바라보았다. “조건? 변진섭, 이제 날 상대로 조건을 걸겠다는 거야?” 우리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지만, 그녀의 시선이 차가워지며 나를 꿰뚫어 볼 듯 쏘아보는 것이 느껴졌다. “우리는 이미 이혼 준비 중이잖아. 당신이 계속 동의하지 않고 질질 끌지 않았다면, 이혼 서류는 벌써 효력을 발생했을 거고, 우리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타인이 되었을 거야.” “당신은 내가 조건을 내세울 자격도 없다고 생각하나?” 나는 장연아가 지금 얼마나 나를 증오하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그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그런 건 나에게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장연아는 나를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되물었다. “내가 알기로 변진섭, 당신 지금
노태호가 장연아의 사무실에 있다는 사실보다, 내가 더 궁금한 건 이 사람이 도대체 어디로 가고 싶어 하는지였다. 그리고 노태호가 장연아와 함께 가고 싶어 하는 그곳이, 장연아가 나를 불러낸 이유와 관련이 있는지도 말이다. “누나, 제발 저도 데려가 주세요! 이번 ‘사업 협력’은 저도 꼭 도움이 될 거예요!” ‘협력’이라는 단어가 노태호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나는 약간 의문이 들었다. ‘설마 노태호가 참석하려는 자리가 정말 JP 그룹의 사업과 관련이 있는 걸까?’ 이제야 왜 장연아가 갑자기 나에게 전화를 걸었는지 이해가 됐다. 나는 JP 그룹에서 근무한 적은 없지만, 중요한 자리에서는 여전히 장연아가 여전히 나를 파트너로 데리고 나가곤 했다. 그리고 지금, 노태호가 그 자리에 함께하려는 속셈은 뻔히 드러나 보였다. 나도 문득 호기심이 생겼다. ‘노태호에게 늘 관대한 장연아가 어린 애인의 요구를 들어줄까?’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나는 장연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태호야, 이번 연회는 JP 그룹의 사업에 중대한 자리야. 내 말 들어. 다음번에 데려갈게.” 장연아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지만, 그 안에 담긴 애정 어린 어조는 나에게 숨길 수 없었다. 나와 이야기할 때는 언제나 명령조나 냉소적인 말투였던 그녀였기에, 이런 부드러운 목소리는 나도 정말 오랜만에 듣는 것이었다.“왜요?” “이런 자리에는 반드시 동반할 파트너가 필요할 텐데, 누나 주변에 적합한 사람이 없잖아요. 그런데 왜 저는 안 되는 거죠?” 노태호의 목소리는 점점 격앙되었고, 아마도 장연아가 선택한 파트너가 누구인지 짐작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장연아 앞에서 이렇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을 것이다.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노태호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낮아지고 어딘가 억울해하는 것처럼 들렸다. “누나, 설마 이번에도 연회에 진섭 형님을 데려가려고 하시는 거예요?” 장연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노태호의 목소리가 떨리며 이어졌다. “그
전화가 너무 오래 울려 자동으로 끊기는 걸 보고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마치 나를 쫓아내려는 것처럼 요란한 초인종 같은 전화벨이 또다시 울려댔다. 나는 체념하고 결국 전화를 받았다. 장연아의 어머니는 장연아만큼이나 강압적인 분이었다. 내가 전화를 받지 않으면 몇십 번이고 계속 전화를 걸 것이고, 심지어 여기까지 찾아올지도 모른다.“장모님...” 그러나 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핸드폰 너머에서 어머니의 화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모님이라고 부르지도 마라! 예전에는 내 앞에서 당당하더니, 지금은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는 꼴이라니. 내가 널 잘못 본 건 아니었네. 자네 여전히 어디 하나 쓸데없는 사람이야!]‘나에게 시비 걸려고 전화를 건 걸까?’ 어머니의 비난은 그동안 참아온 분노와 함께 나를 폭발하게 했다. “제가 그렇게 쓸모없다고 생각하신다면서, 전화는 왜 하셨죠?” 내가 단호한 어조로 되받아치자, 어머니는 순간 말을 잃은 듯 잠시 침묵했고, 한참 지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난 자네가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어. 하지만 자네보다는 노태호가 더 우리 장씨 집안을 망신시킬 놈이야! 그러니 자네가 아직 살아 있다면, 어떻게든 연아가 노태호와 완전히 관계를 끊고 정리하도록 하게.]어머니의 최후통첩을 듣고 나는 피식 웃었다. “연아가 노태호와의 관계를 공개적으로 인정한 이유는, 아마 저보다 장모님께서 더 잘 아실 겁니다.” “그리고, 저와 연아는 곧 장모님 뜻대로 이혼하게 될 겁니다. 그러니 저 같은 쓸데없는 사람에게 협박하느니, 차라리 연아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 쓸데없다는 사람인 나는, 사실 ‘장모님’이 상류층 귀부인들 사이에서 체면을 잃지 않도록 해준 사람이기도 했다. 명문가 사모님들이 참석하는 티타임 모임에서, 내 ‘장모님’은 항상 가장 품격 있고 흠잡을 데 없는 모습으로 주목받았다. 왜냐하면 어머니가 입는 모든 옷과 착용하는 모든 장신구는 내가 직접
장연아가 더는 내 차가운 비아냥을 들으러 오지 않을 거라 생각하던 그때, 그녀는 다시 한번 나를 찾아왔다.초인종 소리가 한 번, 두 번, 끊임없이 울렸다.문밖에 서 있는 장연아의 모습이 도어 뷰어를 통해 보였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을 열지 않으면, 그녀도 지쳐서 돌아가겠거니 했다.하지만 예상 밖으로 장연아는 벽에 기대어 문 앞에 주저앉아 있었다.나는 방 안을 이리저리 걷다가 나가서 그녀를 쫓아내야 하나 고민했다. 이 여자를 더는 보고 싶지 않았지만, 문 앞에 앉아 있는 그녀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채자 나는 밖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췄다.‘오늘 떠날 때 노태호의 전화를 받았던 게 틀림없는데, 갑자기 이렇게 찾아온 게 혹시 노태호와 싸워서? 그렇다 해도,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나는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장연아와 노태호의 다툼 따위는 상관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내 마음은 문밖에서 밤새도록 앉아 있을 그녀를 그냥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다. 결국 문을 열고, 장연아를 허리까지 감싸 안아 방 안으로 데리고 들어와 소파에 눕혔다. 술 냄새가 진동하는 여자를 보며 수건을 가져와 닦아주려던 찰나, 그녀가 내 소매를 잡아채며 나를 소파로 넘어뜨렸다. 장연아는 곧바로 내 위로 올라탔고, 작고 가냘픈 몸이 내 가슴에 파묻혔다.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방 안에는 우리 둘뿐이었기에 여자의 속삭임이 명확히 들렸다. “진섭아, 가지 마.” 그 한마디에 내 마음이 송두리째 흔들렸다. 우리가 처음 만난 순간부터 결혼하고 지금까지 함께한 시간이 벌써 10년이다. 나는 장연아가 단 한 번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과거 우리 사이는 깊고 달콤했던 연인이었다. “장연아, 나를 사랑하긴 했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묻는 내 말에 장연아는 희미하게 눈을 뜨려 했지만, 쉽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다시 물었다. “네 마음속
‘지난번? 서혜가 말한 도움이라면, 나와 장연아의 이혼을 돕겠다는 걸까?’ “고마워요. 하지만 도움은 필요 없어요.” 내 말에 서혜는 눈살을 찌푸리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설마 아직도 연아에게 마음이 남아 있는 거예요?” “진짜로 연아와 이혼하려는 건가, 아니면 단지 연아의 관심을 더 끌고 싶어서?” 서혜의 날카로운 태도는 예전 그녀가 장연아와 지인들을 동반하여 나를 조롱하던 때와 다를 바 없었다. “서혜 씨, 우리 그렇게 가까운 사이 아니에요. 그리고 이건 나와 연아 둘의 문제예요.” 서혜가 내 어깨에 손을 뻗으려다, 닿기 직전에 멈췄다. “하지만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이 있어요. 연아는 당신을 쉽게 놔주지 않을 거예요. 이번 보육원 사건 바로 연아가 당신에게 보내는 경고라고요.” 그녀는 격앙된 목소리로 말하며 내 어깨를 양손으로 꽉 잡았다. “변진섭 씨, 내가 도와줄게요. 당신이 장연아에게서 벗어나도록 내가 도울게요!” “변진섭 씨가 투병 중인 것도 알아요. 그런데도 연아는 여전히 당신을 놓아주지 않을 거예요. 그런데도 당신은... 대체 뭣 때문에 미련이 남는 거죠?” 서혜의 말은 장연아를 잘 아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그럴 만도 했지만, 서혜의 태도는 어딘가 석연치 않았다. ‘예전에 연아가 자기 친구들 앞에서 나를 모욕할수록 서혜는 내가 그런 대접을 받아 마땅하다는 태도였는데, 이제는 직접 나서서 나를 돕겠다고? 대체 무슨 이유로?’ 나는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 장연아와 관련된 모든 사람 때문에 나는 지쳐가고 있었다. “연아의 의도가 무엇이든, 이 문제는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을 겁니다.” “이건 나와 연아의 일이고, 누구에게 털어놓는다고 달라질 것도 없어요.” 내 말을 들은 서혜는 갑자기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맞아요, 두 사람은 아직 부부니까요. 명목상 부부이긴 하지만...” 서혜는 더 이상 머물 생각이 없는 듯, 이 말을 남기고 곧장 떠날 준비를 했다.
‘돈 걱정?’ 서현철 대표가 의뢰한 보석 디자인 작업을 맡은 뒤 재정상태에 여유가 생기자, 나는 더 이상 일에 집착하지 않았다. “무슨 일 있는 거야?” 임선우의 어색한 태도와 말투는 평소 그답지 않아서 나는 이 친구가 뭔가 숨기고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너 아직 모르고 있었구나?” 임선우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뭘 말이야?” 임선우가 뭔가 숨기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왜 내가 당연히 알아야 할 것처럼 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핸드폰을 꺼내 내게 보여주었는데, 화면에 뉴스가 하나 떠 있었다. ‘JP그룹, 성남 보육원 후원 중단 논란’이라는 제목이었다. 댓글란은 JP그룹이 ‘은혜를 모른다’며 비난하는 글로 가득했다. 반면, 일부는 JP그룹이 경영난에 처했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라 추측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JP그룹이 위기에 처했을 리가 없다는 것을. 임선우는 내 얼굴이 굳어지자 곧장 나를 달래기 시작했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장연아라면 분명히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낼 거야.”‘해결? 장연아는 절대 쉽게 포기할 사람이 아니야. 이렇게 한 데에는 분명 내 문제도 관련이 있을 텐데.’ 나는 아무 일도 아닌 척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이런 작은 일에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 곧이어 나는 덧붙였다. “그런데 나, 다른 작업실에 들어갈지도 몰라. 혹시 너도 관심 있으면 같이 할래?” 임선우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네가 다른 작업실에 들어간다고? 난 네가 혼자서 뭔가 해낼 줄 알았는데!”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혼자서 잘해 나갈 수 있다면야 나도 그러고 싶지.” 하지만 나는 내 이름으로는 큰 작업을 따내기 어렵다는 현실을 알고 있었다. “그 얘긴 그만하고, 밥 먹으러 가자!” 임선우는 나를 질질 끌고 나가 근처 식당에서 식사한 후 자기 집으로 갔다. 집에 돌아왔
하지만, 나는 노태호를 집에서 자연인으로 수없이 마주쳤기 때문에, 그리고 질투심에 그 잘생긴 얼굴과 완벽한 체형의 톱스타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노태호도 이지석 선생님을 알고 있는 듯했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눈 후 이지석 선생님은 노태호를 주최 측에서 마련한 사무실로 데려갔다. 나는 노태호가 이지석 선생님을 빼앗아 갈까 봐 걱정되지는 않았지만, 그 둘 사이가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때 나는 고민에 빠졌다. ‘이지석 선생님의 작업실에 정말 합류해야 할까?’ ‘만약 이지석 선생님과 노태호가 특별한 관계라면, 선생님과 함께 일하는 동안 노태호를 자주 마주치게 될 텐데...’ 내 옆에 있던 몇몇 젊은 여성들은 이지석 선생님과 노태호가 있는 방향을 주시하며 소곤거리고 있었다. “우리 오빠 진짜 대단해! 이지석 선생님까지 알다니!” 짧은 머리의 한 여자애가 흥분된 얼굴로 말했다. “이지석 선생님이 누구야? 그렇게 유명해?” 이 여자애 옆에 있던 친구는 이지석 선생님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듯했다. 그렇다면 여성들은 아마 노태호 때문에 이곳에 온 것 같았다. “당연히 알지! 노태호가 새 드라마 준비 때문에 이지석 선생님께 디자인을 배우러 왔대. 다음 작품 진짜 기대된다!” ‘작품? 노태호가 다음에 촬영할 작품이 디자이너와 관련된 건가?’ 나는 고개를 저으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노태호의 일을 신경 쓰고 있다는 게 우스웠다. 떠날 채비를 하려던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진섭이, 너 맞지?!” 급히 다가오는 발소리에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그곳에는 이지석 선생님이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지석 선생님이 나를 알아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진섭아, 너 정말 많이 말랐구나!” 이지석 선생님은 눈살을 찌푸리며 지금의 내 상태를 몹시 안타까워했다. 나는 그 곁에 있던 노태호를 보고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선생님,
“당신... 무슨 일인데 지금 말 못 한다는 거야?” 장연아는 내 팔을 꽉 붙잡으며 강렬한 눈빛으로 나를 압박했다. 그녀는 내 귀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아직 이혼도 안 했는데 벌써 내 제일 친한 친구랑 엮이려는 거야?” 나는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장연아를 응시했다. 이 여자라면 나를 잘 알 텐데, 내가 서혜와 뭔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을 리 없다는 것을. 하지만 장연아는 여전히 나도 그녀처럼 한 관계가 끝나기도 전에 다른 감정에 빠질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농담도 좀 심하네. 우리 이혼 서류만 안 썼을 뿐이지, 이미 관계는 끝난 거나 다름없잖아. 나는 장 대표님이 우리 ‘각자 알아서 하자’고 묵인한 줄 알았는데?” 내 입가에 떠오른 냉소가 장연아의 눈에 그대로 들어갔다. 그녀는 내 손목을 더욱 강하게 쥐었다. 나는 고통스러워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여러 차례 치료를 받은 내 몸은 뼈에 살가죽만 얹혀 있을 정도로 약해졌기에, 조금만 힘을 줘도 엄청난 고통이 따랐다. “뭐든 해도 좋아. 하지만 내 주변 사람들은 건드리지 마. 내 친구들은 널 몰라서 속을 수도 있거든.” 장연아는 나를 가장 아프게 할 말만 골라서 던졌고, 그녀의 말은 늘 가차 없었다. 이때, 서혜가 와인잔을 들고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서둘러 장연아의 손을 밀어냈다. 이미 우리 사이가 이혼 절차를 밟고 있다는 걸 다들 아는데, 굳이 남들 앞에서 거짓으로 애정을 과시할 이유는 없으니까. 장연아는 갑자기 내 팔을 끌어당기더니 서혜와 건배하며 말했다. “우리 남편 돌봐줘서 고마워.” 서혜는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저 빨리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마침 누군가가 장연아를 불렀고, 그녀가 대화를 나누는 틈을 타 나는 재빨리 방에서 빠져나왔다. 서혜가 뒤따라온 것은 그 이후였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날 장연아는 서혜의 태도에서 서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많은 사람은 내가 장연아와 결혼한 이유가 그녀의 신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한 번도 그 사람들의 오해를 굳이 풀려 하지 않았다. 그 사람들은 내가 내 힘만으로도 풍족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알 리 없었다. ...지난 한 주 동안 나는 정말 충실한 시간을 보냈다. 장연아가 없는 삶에 점점 익숙해졌고, 더 이상 그녀로 인한 불안감이 생기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놀랍게도 장연아가 꽤 오랫동안 나에게 연락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장연아는 분명 나를 붙잡으려 애썼지만, 과연 그녀는 내게 진심이었을까? 서현철 대표와의 거래가 이미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서혜는 오히려 종종 나에게 만나자고 연락해 왔다. 나는 서혜의 제안을 한 번도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나는 장연아와 관련된 사람들과 어떤 식으로든 얽히고 싶지 않았고, 그 사람들 중에는 서혜도 포함되어 있었다. 내가 서혜에게 어떻게 내 뜻을 전해야 할지 고민하던 중, 그녀로부터 한 장의 초대장을 받았다. 그 초대장은 곧 B 시에서 열릴 디자인 전시회의 초대장이었다. 그 전시회에는 내가 좋아하는 외국 디자이너의 작품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초대장을 보며 고민에 빠졌다. ‘서혜가 나와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닌데, 내가 이 전시회에 관심이 있을 거라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하지만 나는 결국 초대장을 돌려주기로 결심했고, 서혜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약속을 잡았다. 전화를 받은 서혜의 주변은 무척 소란스러웠다. “서혜 씨, 혹시 지금 시간 좀 있어요?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그녀는 잠시 멈칫하더니 말했다. [시간은 있어요. 그런데 지금 움직이기가 어려워요. 조금 있다가 내가 주소를 보낼게요. 급하면 그리로 와요.] 나는 더 이상 이 일을 미루고 싶지 않았다. 서혜가 초대장을 보낸 진짜 이유가 무엇이든, 그녀와 어떤 관계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나는 서혜가 보낸 주소로 찾아가 보니, 그곳은 한 조용한 고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