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형의 말을 들은 남자가 웃으며 대답했다.“네, 용형. 이 일은 저한테 맡겨주세요!”말을 마친 남자가 수아와 지유를 향해 다가왔다.“이봐, 예쁜 아가씨, 왜 거지를 데리고 밥을 먹으러 나왔어? 이렇게 하면 우리 눈을 버려야 하잖아, 입맛도 떨어지고.”남자는 지유 앞으로 다가가 장난기가 다분한 얼굴로 걸상을 밟곤 턱을 만졌다.“거, 거지가 아니에요. 그냥 옷이 좀 낡고 더러워졌을 뿐이지.”남자의 말을 들은 지유는 놀라서 어쩔 바를 몰랐다. 저렇게 많은 사람들을 보아하니 쉽게 물러날 것 같지도 않은데 도범까지 자리에 없어 그녀는 난감해졌다.“쯧, 내가 거지라고 하면 얘는 거지인 거야. 거지를 그렇게 감싸주다니, 역시 예쁜 사람은 달라, 얼굴만 예쁜 게 아니라 말도 예쁘게 하네, 하하!”남자가 웃으며 한 손으로 수아를 들더니 빠른 걸음으로 밖으로 걸어갔다.“우리가 밥 먹는데 입맛 떨어지게 했으니까 이 아이는 내다 버릴 거야, 예쁜 아가씨는 조용히 우리 용형 옆에서 밥이나 먹으면서 술이나 따라주고. 우리 용형 시중을 잘 들어주면 이 일 없던 걸로 해줄 테니까, 알았지?”“아이는 놓아주세요, 이제 4살 밖에 안 된 아이예요. 아이 아빠가 화장실에 갔으니 이제 곧 나올 거예요.”놀란 지유가 얼른 남자에게 달려가 그를 막았다.“짝!”하지만 남자는 지유의 뺨을 때리며 말했다.“내가 말한 거 못 들었어? 아니면 귀먹은 거야? 가서 우리 용형 밥 먹는 거 시중이나 들으라고… 꼬맹이 아빠? 거지 아빠면 큰 거지겠네? 아유, 무서워라!”남자에게 따귀를 맞은 지유는 머리가 어질해졌다. 그녀의 입가에는 피가 맺혀있었다.“수아 내려놔!”하지만 금방 정신을 차린 지유가 다시 남자를 향해 다가갔다.“쿵!”남자의 힘이 워낙 셌기에 지유는 그의 발길질에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젠장, 한 마디만 더 하면 네 딸 때려죽인다.”남자가 소리치자 지유는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몇 발자국만에 식당 밖으로 온 남자가 냉랭하게
지유는 도범을 데리고 도심을 벗어난 곳에 위치한 낡은 집 앞으로 왔다.마당 앞에는 커다란 소나무가 있었는데 밖에서 보니 무척이나 고요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 하지만 집이 너무나도 낡았다는 것이 단점이었다.“그러니까 우리 어머니랑 시율이, 장인어른 장모님께서 이런 곳에서 지내고 있었다는 거야?”눈앞의 집을 보니 도범은 괴로워졌다.박시율은 박 씨 집안의 아가씨였다.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어 사람들에게 미녀 대표님이라는 말까지 들었을 정도였다. 도도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향해 사랑을 갈구했었다.하지만 지금, 그녀는 아이를 남겨두기 위해 집에서 쫓겨나 이런 곳에서 지내고 있었다!도범의 말을 들은 지유가 쓸쓸하게 웃었다.“도련님 처남도 이곳에 계세요, 5년 전에는 어렸었지만 지금은 열아홉이 되었는데 모두 이곳에서 지내고 계세요.”“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지유의 말을 들은 도범이 눈시울을 붉혔다.“시율이가 고생을 많이 했겠구나!”하지만 도범은 곧 마당 옆에 세워진 벤틀리를 발견했다.“이 벤틀리는 뭐야?”도범이 미간을 찌푸린 채 의아하게 물었다.“저도 모르겠어요, 자주 오지 않아서. 5년 동안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났어요, 시율 아가씨는 도련님이 오시기를 늘 기다리고 있었어요!”“하지만 아가씨 부모님께서는 진작에 인내심을 잃으셨어요, 그리고 도련님께 불만을 품고 계셔서… 심지어 결혼 첫날밤, 도련님께서 시율 아가씨께서 술에 취한 틈을 타 강제로 아가씨랑 하룻밤을 보낸 거라고 했어요…”지유가 미간을 찌푸린 채 조심스럽게 말했다.“어쩔 수 없지, 천천히 보답해 드리는 수밖에. 다 같이 고생을 많이 했겠구나!”도범이 한숨을 쉬었다. 그도 자신의 여자 옆에서 그녀를 보호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집안에 발을 들인 도범은 얼마 가지 못하고 미간을 찌푸리더니 지유에게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했다.집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은 도범의 안색이 새파래졌다.안에서는 박시율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
“네, 도련님 말이 맞아요, 사실 저도 저 계집애를 좋아하지 않았거든요.”나봉희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저 아이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아이에요!”그 말을 들은 도범은 당장이라도 눈앞의 이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고 싶었다.하지만 그는 속으로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나봉희는 자신의 장모님이기도 했고 박시율의 어머니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이곳은 더 이상 살육으로 가득한 전쟁터가 아니었다, 적어도 박영호와 나봉희는 적이 아니었다.자신과 박시율이 결혼식을 올린 첫날밤의 충동으로 박영호의 다리도 지금처럼 된 것이었다.그랬기에 두 사람이 이렇게 자신을 미워하는 것도 도범은 이해가 갔다.하지만 이곳에는 바깥사람이 한 명 있었다.도범이 차갑게 웃으며 성경일을 바라봤다.“수아는 내 딸이야, 덤받이도 아니고 잡종은 더더욱 아니야. 그러니까 무릎 꿇고 방금 했던 말에 대해 사과해!”말을 멈췄던 도범이 다시 입을 뗐다.“내가 오늘 금방 돌아와서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아, 그게 아니었다면 너 이곳에서 죽었을 거야!”“하하, 이 자식 봐라,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너 지금 누구랑 말하고 있는 건지 알기나 해?”성경일이 웃음을 터뜨리며 밖의 벤틀리를 가리켰다.“너 예전에 배달부였다며, 전쟁터에 나가서 싸움 좀 하다 오니까 아주 대단한 것 같지? 하지만 내 눈에는 아무것도 아니야, 너 저 차가 얼마나 하는지 알아? 너 같은 건 평생 일해도 못 사.”“그러니까, 도범. 행패 그만 부리고 네 딸 데리고 여기서 꺼져!”나봉희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내 딸 행복한 생활을 망치지 말라고!”“어머니, 시율이가 직접 떠나라고 말하기 전까지 저 시율이 곁에서 떠나지 않을 겁니다!”나봉희가 단호한 얼굴을 한 도범을 바라봤다.“뭐 가지고 나랑 비길 건데? 네가 무슨 자격으로 시율이 곁에 있겠다고 하는 거야? 사람은 자기 주제를 알아야 하는 거야, 안 그래?”성경일이 도범에게 다가가 손으로 그의 가슴을 치며 말했다.“전쟁터에 발 좀 들였던 쓰
“무조건 죽인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도범은 상관없다는 듯 밖을 한 번 내다봤다. 지유는 수아를 데리고 소나무 아래에서 놀고 있었다.“흥, 어디 이따가도 그렇게 당당하게 굴어보시지!”성경일은 더 이상 도범과 입씨름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곧 도범이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머지않아 여러 대의 차량이 집 밖에 멈춰 섰고 장건이 여러 명의 남자들을 데리고 성큼성큼 집안으로 들어섰다.장건은 마당으로 들어서자마자 욕을 내뱉었다.“누구야? 감히 우리 도련님을 때리다니,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지금의 장건은 마침 분노에 사로잡힌 상태였다. 자신이 감히 상대조차 할 수 없는 놈을 만난 덕분에 애꿎은 손가락을 하나 잃었기 때문이었다.병원에서 나오자마자 성 씨 어르신의 전화를 받은 그는 도련님이 맞았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당장 처리하라는 명을 받았다.“이 도범이라는 쓰레기가 나를 때렸다, 전쟁터에 좀 있었다고 생색내려는 건 가 본데 감히 내가 누군지 알고!”성경일은 장건이 사람들을 데리고 온 것을 보곤 순식간에 기세등등해져서 말했다.“젠장, 정말…”욕을 하며 마당 안으로 들어선 장건은 금방이라도 싸움판을 벌일 기세였다. 그는 이곳에서 더러워진 기분을 풀 생각이었다. 하지만 성경일 앞에 선 남자를 본 순간, 장건은 놀라서 제자리에 얼어버리고 말았다. “또 만날 줄 생각도 못 했네!”도범이 담담하게 웃으며 붕대를 감은 장건의 손을 바라봤다.“그래도 약속은 잘 지키는구나, 남자답네, 말한 대로 한 걸 보니!”성경일은 도범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어 미간을 찌푸리곤 장건을 보며 말했다.“둘이 만난 적 있어?”성경일의 말을 들은 장건이 씁쓸하게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도련님, 점심시간도 다 되어가는데 그만 돌아가는 게 어떨까요?”장건이 말을 하며 성경일을 향해 눈을 깜빡였다.“밥? 밥은 무슨 밥? 저놈 때려, 젠장, 오늘 이 화풀이를 하지 않으면 내가 사람도 아니다!”성경일이 분노에 찬 목
“어머니, 그래도 수아 아버지이고 두 분 사위인데 앞으로는 이 사람한테 그런 말 하지 마세요! 그리고 이미 지나간 일은 더 이상 입에 올리지 마세요!”박시율은 여전히 다른 이의 속마음을 헤아릴 줄 알 뿐만 아니라 착하기까지 했다.“우리는 저놈을 사위라고 인정한 적 없다, 이 일은 무효야!”나봉희가 말했다.“그래, 저놈만 아니었다면 내 다리도 이렇게 되지 않았을 거야!”도영호가 씩씩거리며 말했다.“하지만 저 이한테 무슨 잘못이 있겠어요? 그때 저도 홧김에 도범이랑 결혼을 한 거라고요. 결국 임신까지 하게 될 줄 저도 몰랐다고요!”박시율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때 확실히 자신이 충동적으로 저지른 짓이었지만 아이를 지우기는 아까웠다.오늘 이런 결과를 맞이하게 된 것도 그때 저지른 잘못을 만회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다.“그렇다고 정말 아이를 낳을 필요까지는 없었잖아, 정말... 내가 너 때문에 제 명에 못 죽지!”나봉희는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굴렸다.“그만하세요, 도범이 이렇게 전쟁터에서 무사히 돌아왔으니 앞으로 무슨 일이라도 찾아서 할 수 있다면 생활은 점점 나아질 거예요!”박시율의 말을 들은 도영호가 담배를 꺼내 피우기 시작했다. 도범을 보니 화가 나기는 했지만 지금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수아는 도영호의 외손주였고 자기 딸의 아이이기도 했다.“어디까지 좋아질 수 있을 것 같아? 우리가 예전에 살던 그 별장보다 편안할 수 있을 것 같아?”나봉희는 여전히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시율아, 우리 어머니는 어디에 계셔? 왜 안 보이는 거야?”도범이 미간을 찌푸리곤 물었다. 이곳에 발을 들인지 시간이 꽤 지났지만 자신의 어머니의 모습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유는 도범의 어머니께서도 이곳에서 함께 지내고 있다고 얘기했었다.“지금 일 나가셨어, 너희 어머니는 배운 것도 별로 없고 나이도 많으셔서 청소부로 밖에 일할 수 없어. 월급은 얼마 안 되지만 그래도 우리에게 보태줘서 우리 가족이 그나마 살아갈 수 있게 해주셨어.”박시율이 씁쓸하
“그러니까, 쓰레기들이 모여서 전쟁이니, 나라를 위해 서니, 그딴 소리 지껄이고 앉았네!”또 다른 노란색 머리를 한 남자도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퍽!”하지만 다음 순간, 두 사람은 눈앞이 어지러워지더니 저 멀리 날아가 등 뒤의 담벼락을 무너뜨렸다.“푸웁!”피를 토한 두 사람은 그 자리에 쓰러져 꼼짝도 하지 않았다.“아, 사람이 죽었어!”그 모습을 본 두 여자는 소리를 지르며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도망갔다.“도범, 지금 뭐 하는 거야? 사, 사람을 죽이다니, 저 사람들이 우리가 건드리지 못할 신분을 가진 사람이거나 어느 조직의 사람이면 어쩌려고 그래?”서정은 바닥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두 사람을 보곤 얼굴이 창백해졌다.“너, 너무 충동적인 거 아니야? 여기는 전쟁터가 아니야,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감히 건드릴 수 없는 거라고. 여기가 아직 전쟁터이고 상대방이 적인 줄 알아? 그렇게 마음대로 죽이게?”“왜 항상 자기 성질을 못 죽여서 이렇게 일을 크게 키우는 거야? 저 사람들 그냥 몇 마디 한 것뿐이잖아!”박시율은 화가 나기도 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다.하지만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두 여자가 자기 걱정에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을 본 도범은 마음이 따뜻해졌다.“어머니, 시율아, 걱정하지 마, 그냥 잠깐 정신을 잃은 것뿐이니까. 나도 나름 힘 조절한 거라고,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깨어날 거야.”도범이 웃으며 설명했다.“정말이야?”도범의 말을 들은 박시율이 얼른 두 사람 곁으로 다가가 손가락을 코에 대고 시험해 봤다. 그리고 한시름 놓으며 말했다.“아직 숨 쉬고 있으니까 큰 일은 없겠네.”“가자, 가, 얼른 가!”주위를 둘러본 서정이 얼른 말했다.“가요, 어머니, 이 일도 이제 그만두세요, 앞으로 복 누릴 일만 남았으니까.”도범이 두 사람을 보며 웃었다.“갑시다, 시간도 많이 남았으니까 옷이라도 몇 벌 사줄게요!”“몇 벌?”도범의 말을 들은 서정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네가 돈이 어디 있다고? 그리고 내가 일을 그만
“저 세 사람 이상하지 않아? 저렇게 꼬질한 옷 입고, 저 여자는 청소부 옷에 밀짚모자를 쓰고 들어오다니. 세상에, 여기 그래도 브랜드 전문점인데.”명품 백을 들고 옷을 고르려던 귀부인 한 명이 세 사람을 보더니 차갑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여사님, 지금 바로 쫓아내겠습니다!”옆에 있던 점원이 얼른 웃으며 귀부인에게 말하더니 다시 옆에 있는 점원을 바라봤다.“가서 나가라고 해, 격 떨어지게 정말!”점원은 즉시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세 사람 앞으로 다가왔다.“여기에서 옷을 살 생각인가요? 저희 매점은 해외상품만 취급하는 명품 럭셔리 매장인데...”여직원은 보통 이렇게 말을 하면 돈이 없는 손님들은 자신이 매장을 잘못 찾았다는 것을 깨닫고 조용하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번에 그녀는 사람을 잘못 봤다.“마침 럭셔리 매장을 찾고 있었는데 잘 됐네요. 제 아내와 어머니에게 비싼 옷을 사주려고 했던 참이었거든요, 너무 격 떨어지는 옷은 눈에 안 차서.”“네? 손님, 확실하세요?”여직원이 멍청하게 물었다.그러자 도범이 옆에 있던 박시율을 보며 대답했다.“이렇게 예쁜 아내를 두었는데 고급스러운 옷을 입는 것도 당연하잖아요.”“네, 그럼요, 당연하죠. 그런데 혹시라도 계산을 할 때가 되어서 곤란한 상황을 마주할까 봐 그런 거 아니겠어요?”여직원이 웃으며 말했다. 매장의 이미지를 생각하지 않았다면 직접 그들에게 돈도 없는 주제에 여기의 물건들을 살 수나 있겠냐고 했을 것이다.“무슨 곤란한 상황을 마주친다는 거죠?”직원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도범은 원피스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시율아, 저 원피스 괜찮네, 너한테 잘 어울릴 것 같아!”“됐어, 나 저런 색 안 좋아해. 도범, 우리 그냥 나가자!”박시율이 도범을 끌고 나가려고 했다. 결혼 전에는 그녀도 이런 매장에 자주 왔었다.하지만 아쉽게도 지금 이런 매장에 오니 그녀는 마음대로 쇼핑을 즐길 수 없었다.“이런 색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좋은 핑계거리네.”그때 귀부인이 세
“이 세 벌 모두 다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자기는 어때, 마음에 들어? 마음에 들면 사!”점원들은 더 이상 도범을 무시할 수 없어 옆에서 조용히 서있었다.자신을 자기라 칭하는 도범의 말을 들은 박시율이 얼굴을 붉혔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비싼 것 같아!”박시율은 자신의 옷으로 갈아입은 채 세 벌의 옷을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마음만으로도 충분하니까 하나만 사주면 돼, 그렇게 많이 살 필요 없어!”“돈 없으면 없다고 하면 되지, 어디서 있는 척이야. 오늘 돈 안 내면 여기서 나갈 생각도 하지 마!”박시율의 말을 들은 귀부인이 옆에서 냉랭하게 웃으며 말했다.점원들은 귀부인의 말을 들으며 속으로 고소해했다. 돈도 없는 주제에 행패를 부리는 세 사람이 자신들보다 더 대단한 사람을 만났으니 이 사태를 수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도범은 세 벌의 옷을 집어 들더니 자신에게 뺨을 맞은 여직원에게 주며 말했다.“이 세 벌로 할게요, 담아주세요.”“정말 살 생각인 건가요? 세 벌을 합치면 3500만 원인데…”멍청하게 질문을 던진 여직원이 결국 길을 안내했다.“손님, 이쪽으로 오세요.”도범은 여직원을 따라 계산대로 가더니 금색의 카드 한 장을 꺼냈다. “이, 이걸로 계산해 드리면 되나요?”여직원이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 이런 은행 카드를 그녀도 처음 봤기 때문이었다.“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요? 2조 원 안에는 비밀번호 없어도 계산 가능합니다.” 도범이 성가시다는 듯 점원을 한 눈 보더니 한 쪽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박시율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하지만 점원은 도범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눈앞의 남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알고 있는 것 중에 블랙카드만이 19억 안에 비밀번호 없이 계산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도범은 2조 원 안에 비밀번호 없이 계산을 할 수 있다고 했으니 당연히 허풍을 치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원은 여전히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
관중석에는 각양각색의 무사들이 섞여 있었고, 불량배들도 많았다. 평소에 거리에서 욕을 퍼붓기 좋아하는 이들은 이제야 자신들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기회를 찾은 듯, 원건종의 제자들에게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일부 사람들은 진원을 목에 운용하여 의도적으로 목소리를 크게 했다.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할까 봐 걱정이라도 되는 듯, 그들은 더욱 큰 소리로 온갖 더러운 말을 쏟아냈다. 이로 인해 도범의 귀는 무척이나 시끄러웠고, 고통스러울 정도였다.도범은 자신과 원건종의 제자들 사이에 오간 몇 마디 대화가 이렇게 사람들을 폭발시키게 될 줄은 몰랐다. 또한, 도범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이런 싸움은 결국 아무런 결론도 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몸싸움을 할 수도 없고, 계속 말다툼만 이어질 뿐이었다.그래서 도범은 더 이상 들으려 하지 않고, 대련 무대의 한쪽 가장자리로 가서 조용히 서 있기로 했다. 도범은 아직 오양수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오양수가 자신에게 했던 그 약속, 즉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시간은 조금씩 흘러갔고, 싸움 소리는 계속해서 끊이지 않았다. 마침내 오양수의 몸부림이 점점 약해지고, 장벽이 완전히 해제되자 원건종의 제자들이 한꺼번에 몰려가서 오양수를 부축했다.한편, 진태산은 눈살을 찌푸린 채 오양수의 코에 손을 대 그의 호흡을 확인했다. 비록 오양수는 아직 숨을 쉬고 있었지만, 그 호흡은 매우 미약했다.민경운은 급하게 자신의 보관 반지에서 여러 개의 단약을 꺼내 오양수의 입에 넣었다. 그러나 이 단약들은 오양수의 현재 상태를 치료하기에는 전혀 효과가 없었다. 방금 도범이 사용한 참멸현공이 오양수의 영혼을 완전히 찢어놓았기 때문이다.영혼이 찢어진 상태에서 내상을 치료하는 단약이 효과가 있을 리 없었다. 따라서 민경운이 오양수에게 많은 단약을 먹였지만, 오양수의 상태는 전혀 나아지지 않은 것이다. 민경운은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만약 오양수가 정말로 이 사건으로 인해 죽는다면, 그들 모두 책임을
“맞아! 당장 우리 오양수 선배를 풀어줘! 양수 선배에게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너는 천번 만번 죽임을 당할 거야! 오양수 선배는 도민수 선배가 아니야. 네가 도민수 선배를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갔을 때는 우리도 나서서 협상할 여지가 있었어.그러나 네가 오양수 선배를 진짜로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간다면, 염라대왕이라도 너를 보호할 수 없을 거야! 바라문 세계를 벗어나는 순간, 너는 원건종의 끝없는 추격을 받게 될 거야!”바깥에서 들려오는 원건종 제자들의 고함과 욕설은 도범의 귀에 전부 들렸다. 이는 이미 예상된 일이었기에 도범은 일말의 두려움도 느끼지 않았다.원건종은 일반적인 자유 무사들에게 충분한 위압감을 줄 수 있지만, 도범에게는 그렇게 중요한 상대가 아니었다. 원건종이 무엇이건, 자신의 힘이 충분히 강하다면 더 강력한 종문에 가담할 수 있을 테니, 원건종이 손해를 본다고 해도 도범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게다가 이번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원건종이 문제를 일으킨 것이었다. 도범은 결코 선을 넘는 행동을 하지 않았고 원건종 쪽에서 여러 번 도발하지 않았다면, 도범 역시 이들과 싸울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잠시 후, 도범은 차가운 웃음을 지으며 원건종의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원건종 제자들, 잘 들어! 8품 종문 출신이라는 이유로 제멋대로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 처음부터 끝까지 문제를 일으킨 건 너희들이었잖아. 그런데 패배하고 나니 이제와서 나를 협박하는 거야?만약 너희들이 먼저 건드리지 않았다면, 나 역시 너희들과 엮일 생각이 전혀 없었을 거야. 즉, 너희들은 본인들의 강력한 종문을 배경을 믿고 제멋대로 행동해도 된다고 착각하는 거야. 하지만 나는 너희들의 그런 행태를 전혀 묵인할 생각 없어!”도범의 이 말은 관중석에서 큰 박수갈채를 일으켰다. 관중들은 도범이 그들 마음속에 담아둔 말을 대신 말해준 것 같아 고무되었다. 이들 고급 종문의 제자들은 항상 약한 무사들 앞에서만 무력을 과시하며, 이
“오양수는 원건종의 친전 제자 아닌가요?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약할 수 있죠?”“당신 바보 아니에요? 이건 오양수이 약한 게 아니라 도범이 너무 강한 거에요! 아까도 말했잖아요? 빙봉천리는 지급 상급 무기에요.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몇이나 지급 상등 무기를 수련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도범이 빙봉천리를 부순다는 건, 도범의 무기가 오양수의 무기보다 강하다는 걸 의미해요!”“설마 도범이 천급 무기를 수련한 건가요?”이 말이 나오자마자, 주변의 거의 모든 이들이 단번에 부정했다.“미쳤어요? 무슨 말이든 막하네요. 천급 무기가 어떤 개념인지 알고나 하는 소리에요? 수련 경지가 고신경에 도달했거나, 혹은 특별한 재능을 지닌 영천 경지 후기에 이르러야만 천급 무기를 수련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는 거에요.그리고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바라문 세계의 규칙을 지켜야만 이곳에 들어올 수 있고요. 나이도 60세를 넘지 않아야 하죠. 그렇다면 60세가 넘지 않은 사람이 천급 무기를 수련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그렇네요! 아마도 지급 상급 무기를 수련한 거겠죠. 도범이 오양수를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도범이 지급 하급 무기를 대원만 단계까지 수련했기 때문일 거에요.”“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도범의 재능은 정말 두려운 수준이네요. 8품 종문의 친전 제자조차 도범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거잖아요!”“이번에 바라문 세계에 온 보람은 있네요. 이렇게 많은 천재들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다니.”오양수와 관련 없는 관중들은 이런 논의를 흥미롭게 이어갔다. 이전에 도범을 비하하던 사람들도 이제는 도범을 칭찬하며, 도범을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라고 말하기 시작했다.8품 종문의 친전 제자들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원건종의 제자들은 차분할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관중석에서 편안하게 앉아있던 그들은, 도범이 빙봉천리를 단칼에 베어내는 모습을 보고는 그만 입을 다물고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지금 오양수가 이렇게 극심한 고통을 겪는 걸 보니, 분명 도범이
두 번째 방법은 고도의 신법을 필요로 하며, 일반적인 무사로서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수준이다. 첫 번째 방법도 강력한 실력이 필요하기에, 주위 사람들이 도범을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빙봉천리의 감금 아래에서 도범은 결코 빠져나갈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따라서 모두가 도범이 반드시 패배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도범의 경맥이 감금되면 오양수가 도범을 결코 쉽게 놓아주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한편, 도범은 한 손에 장검을 쥐고, 다른 손으로는 연달아 법진을 만들어냈다. 이윽고 백 개의 영혼검이 하나로 융합되어, 거대한 영혼 검이 되어 회흑색 장검 속에 흡수되었다.도범이 전승 상태로 참멸현공을 펼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비록 빙봉천리가 지급 상급 무기일지라도, 도범의 눈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도범은 현재 참멸현공을 대원만 단계까지 수련한 상태였고, 영혼검과의 융합으로 생성된 힘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힘이다.도범은 분노에 차서 큰 소리로 포효하며 단칼에 검을 휘둘렀다. 이윽고 회흑색 장검에서 거대한 검기가 날아가면서 하늘을 뒤덮은 얼음망이 도범의 앞에 닥쳐왔다.모두는 쾅쾅하는 몇 번의 뚜렷한 소리를 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단단해 보이던 빙봉천리가 도범의 한 줄기 검기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게다가 이 검기는 빙봉천리를 부순 뒤에도 힘이 전혀 소모되지 않은 채 여전히 앞으로 돌진했다. 이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고, 뒤따라오던 오양수조차 반응하지 못했다.현재 도범의 참멸현공은 대원만의 경지에 도달했다. 비록 빙봉천리가 지급 상급 무기라 할지라도, 참멸현공 앞에서는 종이장처럼 부서질 뿐이었다.모두가 도범이 빙봉천리에 온몸이 봉쇄되어, 도살당할 어린 양처럼 될 것을 기대했으나, 그들의 모든 환상은 산산이 부서졌다. 검날이 빙봉천리를 부순 후, 곧장 반응하지 못한 오양수를 향해 돌진했다. 검날이 오양수의 면전 3척 앞에 닿기 직전에야 오양수는 자신을 보호하려 했지만, 이미 너무 늦어버린 상황이었다. 평상시라면 오양수는 공격과 동시에
각양각색의 논조, 그리고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끝없는 토론. 그러나 도범은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상관하지 않았다. 도범은 그저 담담한 눈빛으로 오양수를 바라보았다.잠시 후, 오양수가 무기를 꺼내들자, 도범도 천천히 자신의 회흑색 장검을 꺼내 손에 쥐었다. 이 장검은 오랫동안 도범과 함께한 무기로,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었다.오양수는 청란골패를 가볍게 휘두르자, 뚜렷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한기가 청란골패에서 뿜어져 나오며 분위기를 한순간에 바꾸었다.현재 오양수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만이 존재했다. 그건 바로 도범을 쓰러뜨린 뒤, 잔인하게 고통을 주어 그 대가가 얼마나 혹독한지 알게 하는 것이었다.오양수는 크게 포효하며 두 손을 뒤집어 법진을 만들어냈다. 그러자 오양수의 손바닥에 육각형 모양의 얼음 화살이 생겨났고, 4초 후, 수백 개의 육각형 얼음 화살이 오양수의 앞을 가득 메웠다.오양수는 다시 한번 포효하며 앞을 향해 힘껏 밀어붙였다. 그러자 수백 개의 육각형 얼음 화살이 도범을 향해 맹렬히 돌진했고, 이 화살들과 함께 엄청난 한기가 도범을 덮쳤다.도범은 눈살을 찌푸린 채, 두 손으로 장검을 단단히 쥐고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는 조용히 검을 휘둘렀다. 이윽고 수많은 육각형 얼음 화살은 단숨에 두 조각으로 나뉘었다.그때, 관중석에서 다시 한번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도범 저 녀석, 실력이 정말 보통이 아니네요!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면, 오양수가 수련한 무기는 지급 상급 무기, 빙봉천리에요! 그런데 도범이 단칼에 빙봉천리를 가르다니, 실력이 꽤 강한데요!”그 사람이 말을 끝내자마자 주변에서는 곧바로 반박이 나왔다.“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게 무슨 말이에요? 빙봉천리는 지급 상급 무기에요. 바라문 세계를 둘러봐도, 지급 상급 무기를 수련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 같아요? 방금 전의 공격은 단지 약간의 힘만 사용한 거에요. 오양수가 진심으로 도범을 죽이려 했다면, 반항할 틈조차 없었을 거에요!”오양수가 쏘
검은 옷의 대장부는 눈살을 찌푸린 채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내가 무슨 말을 하든 네가 뭔 상관이야! 이 건방진 놈, 죽고 싶어! 마침 상대가 필요했는데, 너의 입탑영패를 가지고 와. 우리 한 판 붙자!”그러자 오수경은 콧방귀를 뀌며 태연하게 말했다.“내 앞에서 강자 흉내 내지 마. 내 가슴에 6품 연단사 휘장이 붙어 있는 걸 못 봤어? 그런데 네가 연단사인 나와 실력을 겨루겠다고? 차라리 연단술을 겨뤄보는 게 어때?”이 말에 검은 옷의 대장부는 말문이 막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규칙이 없었다면 그는 당장이라도 오수경의 목을 조를 기세였다.오수경은 검은 옷의 대장부가 더 이상 말하지 않자, 더욱 신나서 비아냥거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순간 도범이 손을 뻗어 그를 막았다.“너는 왜 이렇게 매사에 신중하지 못해? 지금부터 내 말을 잘 들어. 무슨 일이 있어도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해. 알겠어?”도범의 꾸짖음에 오수경은 목을 움츠리며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전에 도범에게 문제를 일으킨 적이 있었기에, 이번에는 더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이때, 검은 옷의 대장부는 냉소를 머금은 채 다시 도범을 바라보았다. 방금 그들의 대화를 일부 들었기에 도범에 대한 호기심은 더욱 커진 상태였다.“네가 정말 8품 종문의 친전 제자보다 강하다고 생각해?”도범은 눈살을 찌푸린 채 검은 옷의 대장부를 상대할 가치가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검은 옷의 대장부는 도범이 대답하지 않아도 화내지 않았다.이렇게 시간은 점점 흘러갔고, 아마도 내기 때문이거나 도범의 냉담한 태도 때문인지 상황은 이상할 정도로 고요해졌다. 도발적인 말이 다시 들리지 않았다. 제73회 대결이 곧 시작되려 할 때, 도범은 더 이상 쓸데없는 소리를 듣지 않게 되었다.잠시 후, 도범은 자리에서 일어나 숨을 내쉬고는 오수경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그리고는 나지막이 말했다.“누구를 보든, 어떤 말을 듣든, 이 자리에서 떠나지 마.”그 말을 마치고 도범은 큰 걸음으로 대결 무대를 향해 걸어갔다
“내기를 하려면 정식으로 해야 하지 않겠어? 누구도 뒤집을 수 없도록, 우리 계약 하나 체결하자. 네가 이기면 내가 19만 개의 영정을 주고, 내가 이기면 너는 같은 수량의 영정을 줘야 해.”그러자 민경운이 눈살을 찌푸린채 말했다.“너는 사람들과 계약을 맺는 걸 참 좋아하네.”칠현대에서 민경운은 도범이 검은 옷의 대장부와 계약을 체결하기 전에 도범의 거래를 방해했었다. 그런데 도범과 내기를 할 때도 계약을 체결해야 한다고 하니 어이없을 따름이었다. 도범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들고 진지한 표정으로 민경운을 바라보며 말했다.“계약을 맺고 싶지 않다면 솔직히 말해. 다른 핑계를 대지 말고, 계약을 맺는 것이 내기에서 가장 확실한 보증이라고 생각할 뿐이야.”이 말을 듣고 나서 민경운은 더 이상 도범과 쓸데없는 말을 나누고 싶지 않았다. 사실 계약을 체결하는 것이 민경운에게는 유리한 일이다.도범은 자신의 실력만 믿고 8품 종문의 친전 제자에게 도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도범이 이렇게 자발적으로 19만 개의 영정을 내놓으려 한다면, 민경운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야말로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 그래서 민경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렇다면 어서 계약을 체결하자.”도범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평생 가장 빠른 속도로 계약 내용을 작성하고 자신의 정혈을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계약서 두루마리를 민경운에게 건네주었고, 민경운은 두말할 것도 없이 자신의 손가락을 그어 피를 떨어뜨렸다.계약서에 적힌 모든 문자가 즉시 뒤틀리며 두루마리의 속박을 벗어나 공중에 떠올랐다. 천지의 기운이 쏟아져 내려와 이 문자들과 얽히기 시작했고, 세 번의 호흡 후에 문자는 다시 두루마리에 합쳐졌다. 이것은 계약이 체결되었음을 의미했다.모든 절차가 끝난 후, 도범은 미소를 머금은 채 계약 두루마리를 회수했다. 계약이 체결되면 변경할 수 없고, 거짓말할 수도 없다.한편, 민경운은 도범의 흥미진진한 모습을 보고 얼굴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 민경운은 콧방귀를 뀌며
도범은 고개를 돌려 오양수를 한 번 쳐다보았다. 그 순간 오양수는 진지한 표정으로 도범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진실한 눈빛은 마치 자신이 말한 모든 것이 반드시 이루어질 일이라는 믿음을 주려고 하는 듯했다.도범은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도범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오양수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강했다. 그러나 도범이 말하는 강함은 오양수가 다른 사람들보다 실력이 뛰어나다는 뜻이 아니었다. 오히려 오양수는 다른 사람들을 화나게 만드는 재주가 훨씬 더 뛰어났다.평소에는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도범이지만, 오양수의 몇 마디에 지금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으니 말이다. 도범은 냉소를 터뜨리며 말했다.“네가 한 말 잊지 마.”그러자 오양수는 눈살을 살짝 치켜올린 채 말했다.“당연히 내가 한 모든 말을 기억할 거야!”도범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대결 무대에 있는 실력이 비슷한 두 무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주위는 다시 적막에 휩싸였다. 오양수는 도범이 시선을 돌리는 모습을 보고 불쾌해났다.오양수가 방금 한 말은 물론 의도가 있었다. 오양수는 자신의 말이 끝나면 도범의 얼굴에 두려움과 걱정이 스며드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도범이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며 몸서리치는 모습을 기대했었다. 도범이 자신에게 자비를 구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도범은 냉소 외에 어떠한 감정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오양수는 자신이 방금 했던 말이 충분히 잔인하지 않았던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민경운의 얼굴도 역시 어두워졌다. 민경운은 오양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도범이 일어날 일을 미리 두려워하며 땅에 엎드려 용서를 구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했다. 그러나 도범의 반응은 너무나 작았다. 잠시 후, 민경운은 깊은 숨을 들이쉬고 오양수 옆에 털썩 앉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오양수 하나만이 자리하고 있었다.한편, 도범은 이들과 더 얽히고 싶지 않아 다시 대결 무대에 집중하며 말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이렇게 시간을 허
도범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이 불청객들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곳은 관중석으로, 이곳에서 싸우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만약 이들이 이곳에서 싸움을 벌인다면, 가장 먼저 처벌받는 쪽은 바로 원건종 쪽이다.어차피 싸움이 일어날 가능성이 없으니, 도범은 신경 쓸 필요는 더더욱 없었다. 이들이 여기 온 목적은 뻔했다.민경운은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정말 대단한데? 모든 걸 알면서도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는군. 너는 8품 종문의 친전 제자가 무엇을 대표하는지 정말 모르는 건가?전에 네가 도민수와 싸워 이겼다고 해서 우리 원건종 제자들 앞에서 거만하게 굴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마. 도민수는 약간의 실력은 있지만, 내문 제자들 중에서도 별 볼 일 없는 존재였어. 이제 네가 상대해야 할 사람은 우리 원건종에서 가장 강한 자들 중 하나야!”원건종 제자들은 도범을 둘러싸며 압박을 가했지만, 아직 손을 대지는 않았다. 도범은 눈살을 찌푸렸다. 제73회 대결까지 아직 시간이 좀 남아 있었기에 원래 조용히 대결을 지켜보려 했다.그러나 이처럼 많은 파리들이 들이닥칠 줄은 몰랐다. 도범은 답답한 숨을 내쉬었다. 눈을 감고 있어도 저들의 입은 막을 수 없었다. 원건종 제자들을 완전히 조용하게 만들지 않으면, 결국 귀찮아질 게 뻔했다.그래서 도범은 머리를 들어 7품 연단사인 민경운을 바라보았다. 민경운은 제자들 사이에서 선도자의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이윽고 도범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무사들을 이토록 자신만만하게 평가하는 연단사는 처음 보네.”연단사의 수련 경지가 높지 않다는 것은 현연대륙의 무사들 사이에서 기본적인 상식이다. 그러나 민경운은 마치 자신이 친전 제자보다 더 강한 듯, 다른 무사들을 평가하고 있었다.이 말에 민경운은 얼굴이 검게 변하며, 분노로 가득 찬 눈빛으로 도범을 바라보았다. 오기 전부터 다른 제자들이 말하길, 도범은 단지 실력만 있는 게 아니라 입담도 독하니 쉽게 말싸움에 휘말려서는 안 된다고 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