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몰아세우지 마. 나를 몰아세우면 무슨 짓을 할지 몰라.”정태곤이 나를 놓아줄 생각이 없다면 나도 절대 놓아줄 수 없었다. 그대로 풀어주면 오히려 나한테는 후환을 남기는 거나 다름없으니까.정태곤이 갑자기 싸늘한 미소를 짓더니 경멸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그래? 뭐 나를 죽이기라도 하려고?”나는 허리를 살짝 숙이고 있고 정태곤은 꼿꼿이 세우고 서 있는 터라, 놈이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모습은 마치 버러지를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놈의 눈에 나는 버러지와 다름없었다. 그것도 아주 귀찮고 짜증 나는 버러지. 때문에 오늘 나를 살려둘지라도 언젠가는 죽일 거다.나는 정태곤의 태도에서 놈이 나를 언젠가 죽일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그 사실을 안 순간 나는 몹시 당황했다. 때문에 다시 곰곰이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정태곤이 만약 내 협상에 동의하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놈을 고자로 만들어야 하나 하고.“해 봐. 기회 줄 테니까 나를 죽여 봐.”정태곤의 말은 나에게는 적나라한 조롱이나 다름없었다. 정태곤은 나한테 기회를 줘도 내가 저를 죽이지 못 할 거라고 확신했다.그 순간 내 마음속에는 분노의 불길이 타올랐다.나는 결국 손을 떼고 정태곤처럼 꼿꼿이 허리를 폈다.나는 내가 진짜 그렇게 보잘것없는지 확인하고 싶었고, 한편으로는 내가 버러지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남이 할 수 있는 일을 나라고 왜 못 하겠나 하는 오기마저 생겼다.‘솔직히 따지고 보면 내가 정태곤보다 부족한 게 뭔데? 똑같이 팔 두 개, 다리 두 개 달린 사람인데, 내가 왜 정태곤보다 못해?’순간 내 안에 있던 불복하는 정신이 정태곤에 의해 자극되었다.정태곤은 내가 손을 놓은 순간 다시 날카로운 눈빛을 내뿜더니 당장이라도 나를 덮치려는 하이에나처럼 굴었다. 마치 나한테 달려들어 나를 갈가리 찢어놓을 것처럼.정태곤은 허리를 숙여 칼을 집어 들더니 그것으로 차를 두드리며 맑은 소리를 냈다.그 순간 내가 너무 감정적으로 행동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태곤은 안 그
“죽든 말든 상관없어, 하지만 귀신이 되어서라도 널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나는 이를 악문 채로 어깨에 찔렸던 칼을 뽑았다. 정태곤은 그 순간 멍해졌다. 아마도 내가 아직 버티고 있을 줄 몰랐던 모양이다.나는 정태곤이 넋을 잃은 사이, 놈의 머리를 내 머리로 박아버렸다. 다음 순간 정태곤의 코에서 코피가 흘러내렸다.정태곤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서면서 꽉 잡고 있던 발을 놔주었고 칼도 떨어뜨렸다.이 방법이 효과가 있어 나는 또 머리로 정태곤을 들이받았다.정태곤은 이미 얼굴이 피범벅이 되어버렸다. 보아하니 코뼈가 부러진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 상태도 좋지만은 않았다. 나는 이마와 팔, 그리고 발목까지 아팠다.하지만 나는 사냥 본능이 깨어난 맹수처럼 눈앞의 놈을 갈가리 찢어발길 생각뿐이었다.내가 연속적으로 머리를 박아대자 정태곤은 끝내 나를 밀어냈다. 그는 피범벅이 된 제 얼굴을 닦아내며 나를 노려봤다.“뒤지려고!”정태곤은 짤막한 한마디를 내뱉으면서 허리를 숙여 칼을 잡으려 했다. 그 순간 나는 정태곤보다 빨리 달려가 칼을 발로 차버렸다.내가 칼을 차버린 모습에 화가 난 정태곤은 피범벅이 된 얼굴을 신경 쓸 새도 없이 주먹을 그러쥔 채로 나한테 덮쳐 들었다.어두운 등불 아래에서 정태곤이 피범벅이 된 채 사람을 죽일 것처럼 달려오는 모습은 그야말로 섬뜩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설레고 흥분되었다.나도 정태곤을 반격할 힘도 없이 몰아붙였으니, 내가 완전히 쓸모가 없는 사람은 아니라는 뜻이었으니까.나는 순간 미치기라도 했는지 큰 소리로 웃으며 정태곤과 몸싸움을 벌였다.나는 한동안 내 힘을 폭증할 수 있는 혈 자리를 눌렀다.그 덕에 한동안은 정태곤과 비등비등한 수준으로 치고받았다.하지만 정태곤이 비겁하게 내가 다친 곳만 골라서 차는 바람에 너무 아파 식은땀이 흘러내렸다.‘개자식, 감히 이런 비겁한 수를 써? 누구는 뭐 못 할 줄 알고?’놈이 내 상처만 노린다면 나는 또 놈의 거시기를 노릴 수밖에 없었다.그러다 결국 나는 또다시 정태곤의
피곤한 몸을 이끌고 차에 올라탄 나는 오늘 일이 있어 사모님 댁에 가지 못한다고 전화로 얘기했다. 그러고는 곧장 월세방으로 향했다.내 모습을 본 민우는 너무 놀라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수호야, 너 무슨 일 있었어?”“선배, 왜 이래요?’인기척에 깨어난 주선영도 피범벅이 된 나를 보고 놀랐는지 눈물을 터뜨렸다.“임천호 경호원한테 칼빵 맞았어. 하지만 내가 확인해 본 바로는 괜찮아. 뼈를 다친 건 아니야. 민우야, 내 방에 구급상자 있으니까 네가 나 좀 도와줘.”민우는 곧바로 내 방에 들어가 구급상자를 가져오더니 신속히 내 상처를 치료했다.그나마 다행인 건, 칼이 뼈까지 찌른 게 아니고 살만 찢은 거라 며칠 휴식하면 나을 수 있었다. 발목 역시 살짝 삔 거라 며칠 휴식하면 바로 회복할 수 있었다.오히려 정태곤이 나 때문에 고자가 될 뻔해 제때 치료하지 않으면 남은 평생 남자로서의 행복을 잃을 수 있었다.그렇게 따지고 보면 내가 정태곤을 이긴 셈이었다. 그걸 생각하니 나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다시는 날 등신 취급하나 보자.’“선배, 이렇게 다쳤으면서 웃음이 나와요?”옆에서 민우를 도와주던 주선영은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아프기는커녕 오히려 내가 자랑스러웠고 성취감이 들었다.“괜찮아. 별거 아니야.”나는 이제야 학창 시절 깡패들과 어울려 다니며 센 척하던 남자애들 마음이 이해됐다. 순진하고 풋풋한 여자애들한테 이렇게 남자들의 이런 마초적인 모습이 큰 매력으로 다가가기 때문이다.이 순간 나도 그걸 약간 실감했다.특히 나를 안쓰럽게 여기면서도 존경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주선영을 보니 은근히 만족감이 들었다.오늘의 내 모습은 비록 소여정 같은 여자한테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주선영처럼 순진한 어린애한테는 무척 대단해 보일 거다.나는 주선영의 눈빛을 은근히 즐겼다. 나를 우러러보는 눈빛도, 걱정하는 눈빛도 모두.주선영이 이토록 예쁘고 귀엽게 느껴지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나는
나는 속으로 몰래 웃었다.‘재밌네. 설마 내가 곧 죽는다고 생각한 건가?’‘뼈를 다친 것도 아니라고 했는데 설마 그렇게 쉽게 죽겠어?’나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지만 여전히 주선영의 말에 대답했다.“그럼 ‘더 호스트’ 줄거리 이야기 해줄래?”“아, 그건...”“왜? 싫어? 싫으면 됐어. 아쉬움을 안고 떠나가지 뭐.”나는 나 자신한테 감탄했다.‘누구를 닮았는지 연기 참 잘하네.’내 대답에 주선영은 다급하게 말했다.“알았어요. 할게요. 오래전에 아주 아주 잘생긴 호스트가 있었는데 부잣집 사모님들의 사랑을 독차지했어요...”‘뭔가 좀 이상한데?’“선영아, 내가 말한 ‘더 호스트’는 그 호스트가 아니야.’‘어떻게 생각이 그쪽으로 튈 수 있지? 존경스럽다니까.’“네? 제가 잘못 들었어요. 전 호스트라는 줄 알았어요.”주선영은 순식간에 목덜미까지 빨개지더니 어쩔 줄 몰라 했다.하지만 그 모습을 보니 문득 궁금해졌다.“단순한 줄로만 알았는데, 호스트는 어떻게 알고 이야기까지 해주는 거야? 설마...”“헛소리하지 마세요. 아니거든요.”주선영은 얼굴을 더 붉히며 당황한 듯 고개를 돌렸다.나는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농담이야. 너처럼 단순한 애가 호스트바에 갔을 리가 없지.”“제, 제가 정말 호스트바에 가본 적이 있다면 저를 안 좋게 볼 거예요?”“그 말은 정말 가본 적 있다는 뜻이야?”주선영은 요즘 확실히 이상했다. 사실 민우도 며칠 전 나한테 얘기했던 적이 있다. 주선영이 옷 스타일이 확 바뀌더니 가끔은 밤늦게 술냄새를 풍기며 들어온 적 있다고.주선영은 애교 누나 사촌 동생이다. 비록 우연히 같이 살게 되었지만, 나한테는 주선영을 잘 돌볼 의무가 있었다.주선영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채 내 눈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나는 주선영의 팔을 덥석 잡고 진지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주선영. 솔직하게 말해. 너 설마 호스트바에 간 적 있어? 요즘 술 마신 적도 있지?”주선영은 내 모습에 겁을 먹었는지 울음을 터뜨렸다.
‘이건 대체 무슨 논리람? 더군다나 남자 친구를 만나려면 제대로 된 곳에서 찾아야지 클럽에서 찾는 건 대체 뭐지?’‘이렇게 난장판인 곳에 좋은 사람이 얼마나 있다고?’이건 단지 주선영네 룸메이트들이 너무 대담하고 허영심이 강하다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아마도 클럽 같은 곳에서 잘나가는 도련님 하나 건질 생각일지도 모른다.주선영이 계속 이런 애들과 어울린다면 분명 나쁜 물이 들 게 뻔했기에, 나는 오빠가 동생 타이르듯 차분히 경고했다.“앞으로 룸메이트들과 어울리지 마. 정말 남자 친구 사귀려면 정상적인 곳에서 만나고.”“알았어요.”주선영은 고분고분 대답했다.“나 목마르니까 물 좀 따라줘.”주선영은 곧장 물 한 컵을 따라 가져왔다.“됐어. 넌 이만 휴식해.”“수호 오빠, 오빠 오늘 여기서 잘 거예요?”“응.”“어떻게 그래요? 몸도 다쳤으면서. 아니면 차라리 내 방에서 자요.”주선영의 말에 나는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잠자리 바꾼다 해도 민우랑 바꿔야지 어떻게 여자애랑 바꿔? 넌 얼른 가서 자.”주선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돌아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거실 소파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다 보니 나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특히 오늘 밤 벌어진 일을 생각하니 두렵기도 했지만 동시에 나 자신이 존경스럽기도 했다.난 오늘 내가 첫걸음을 내디뎠기에 앞으로 점점 더 용감해질 거라고 믿는다. 적어도 다시는 예전처럼 겁쟁이가 아닐 거다.전에 혈자리로 체력을 한꺼번에 끌어 쓴 관계로 너무 피곤했던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꿈나라에 들었다. 심지어 어찌나 편했는지 이튿날 날이 밝을 때까지 푹 잠들고 말았다.“수호야, 무슨 꿈을 꼈길래 그렇게 기뻐해?”민우가 얼굴을 내 앞으로 쭉 내밀면서 의아한 듯 물었다.방금 전, 나는 확실히 아주 기분 좋은 꿈을 꿨다. 꿈에서 내 실력은 놀랍게 제고되어 양동준이 결국 나를 제자로 받아주었다. 그렇게 양동준한테서 많은 걸 배운 나는 임천호한테마저 패기 있게 맞설 수 있었다.그 느낌은 그야말로 너무 끝내주었
“정말 갔어요?”난 그 말이 믿기지 않았다. 정태곤은 절대 순순히 돌아갈 사람이 아니다.그때 소여정이 말했다.“갔어. 가는 거 내가 직접 봤어. 어젯밤 일은 정말 몰랐어. 만약 알았다면 분명 막았을 거야.”“소여정 씨 탓할 생각 없으니까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나는 진심으로 말했다.그러자 소여정이 의아한 듯 물었다.“정말 내 탓 안 해?”“소여정 씨가 정태곤더러 저를 죽이라고 시킨 것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소여정 씨를 탓해요?”“내가 수호 씨 찾아가서 정태곤이 살의를 느낀 거잖아.”소여정이 말했다.나는 그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하긴. 그럼 다음부터 저 찾아오지 마세요.”“진심이야?”“농담이에요. 소여정 씨는 제 환자잖아요. 제가 제 환자를 치료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더러운 거지.”문제에 직면했다고 자꾸 피하면 안 된다. 만약 내가 피하면 오히려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처럼 보일 테니까.게다가 앞으로 따로 나가 사업하면 이런저런 문제에 직면할 텐데, 고작 이런 용기조차 없다면 사업도 하지 말아야 한다.내 말을 들은 소여정은 은근히 기뻐했다.“어디 있어? 내가 지금 갈게.”“오늘은 됐어요. 저 다쳐서 오늘 하루는 집에서 휴식하고 있거든요.”“치료하러 가는 거 아니야. 얼마나 다쳤나 보러 가는 거지. 수호 씨 입으로 내 의사라고 했잖아. 내 주치의가 나 때문에 다쳤는데 병문안 가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소여정의 말에 나는 반박할 수 없어 결국 주소를 알려주었다.하지만 놀랍게도 소여정은 혼자 온 게 아니라 백연우와 함께 왔다.“하. 나 오늘 바빠. 지은이 찾아가지 왜 나를 끌고 오는 거야?”“그걸 말이라고 해? 우리 성격이 안 맞는 거 알면서. 내가 부른다고 지은이가 따라오겠어?”두 사람은 중얼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심지어 소여정의 손에 보건 식품을 가득 들려 있었다.“그 정도 아니에요. 이거 다 찰과상이에요.”이 보건 식품은 모두 귀한 것들이라 분명 적지 않은 돈이 들었을 거
“비꼬지 마세요. 저도 마음 같아서는 정태곤을 죽이고 싶어요. 그럴 능력이 안 돼서 비겁한 수단으로 상대한 거지.”“비겁하든 말든 뭔 상관이야. 목숨만 건지면 되지.”어제까지만 해도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난 양동준만큼 강해지고 싶다. 아니, 심지어 양동준보다 더 강해지고 싶다. 그게 아니라면 임천호처럼 실력이 부족해도 권력이 있어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부하를 거느리던가.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다. 반드시 강해져야 한다.어젯밤은 운이 좋았던 거지만, 다음번에도 과연 그럴까?정태곤이 가더라도 또 강태곤이거나 서태곤이 오지 말라는 법은 없다.임천호의 부하가 얼마나 많은데. 수많은 사람이 임천호를 위해 목숨 바쳐 일한다. 때문에 나는 서둘러 강해져야 한다.내가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소여정이 갑자기 내 옆에 앉았다.“먹어. 왜 안 먹어?”나는 두 입에 제비집 한 그릇을 뚝딱 먹어 치웠다.“됐어요. 이제 배불러요. 다른 용건 있어요? 없으면 이만 가 줘요. 전 휴식할 테니까.”사실 나는 따로 할 일이 있다.내 말에 소여정이 씩씩거리며 나를 노려봤다.“그렇게 우리가 갔으면 좋겠어?”나는 차분히 해명했다.“저 정말 해야 할 일이 있어요.”“무슨 일인데? 그렇게 다쳤으면서 설마 여자 만나러 가려고?”“아니요. 중요한 일이에요!”나는 재차 강조했다.“그럼 같이 가.”“그럴 필요 없어요. 사적인 일이라 데리고 가기 불편해요. 저 정말 괜찮으니까 마음 놓고 가세요.”오랜 설득 끝에 나는 겨우 두 불청객을 집에서 내보냈다. 이윽고 외투를 걸치고 국민 공원으로 향했다. ‘오늘 윤 회장님 만날 수 있을까 모르겠네. 운에 맡겨야지.’만약 만나지 못한다면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볼 수밖에 없다.하지만 뜻밖에도 내 운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윤 회장님. 이런 우연이. 또 만나네요.”윤해철이 오늘도 평행봉에서 운동하는 걸 본 나는 얼른 그에게 다가갔다.윤해철은 나를 흘긋 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너무 긴장하지 마. 나도 수호 군이 나쁜 사람 아니라는 거 아니까. 그렇지 않으면 여기서 기다리지도 않았어.”윤해철의 말에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럼 왜 기다리신 거예요?”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그러자 윤해철이 싱긋 웃으며 답했다.“저쪽 벤치에 앉아서 얘기하자고.”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윤해철과 함께 공원 벤치에 앉았다.“우리 집사람이 수호 군한테 뭘 시켰는지 나도 아네. 하지만 난 아직 집사람을 받아줄 수 없어. 몸 건강 때문이 아니라 회사 때문에. 우리 회사에 요즘 문제가 생겼는데 한동안은 그걸 처리해야 하거든. 그러니 우리 집사람 쪽은 수호 군이 시간 좀 끌어 줘.”윤해철이 상세한 사항은 설명하지 않았지만, 대충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있었다.하지만 그 말을 듣고 나니 오히려 고민됐다.내가 이영미를 돕는 건, 이영미가 양동준을 설득해 나를 제자로 받게 해준다고 약속해서다. 하지만 윤해철을 돕는 건 나한테 아무런 이득이 없기에, 도와야 할지 무척 고민됐다.짝짝!내가 한창 고민하고 있을 때, 윤해철이 갑자기 손뼉을 쳤다. 그 순간 수풀 뒤에서 날카로운 눈매를 한 남자가 걸어 나와 윤해철에게 공손히 인사했다.“윤 회장님.”윤해철은 사람 좋은 미소를 하며 나를 바라봤다.“이 애는 내 개인 경호원 겸 기사인 변석훈이라고 하네. 이 애의 실력도 양동준 못지않아. 수호 군이 내 요구를 들어주면 석훈이더러 수호 군을 제자로 받아주라고 할게.”나는 도저히 내 귀를 믿을 수 없었다. 변석훈의 실력이라면 의심이 가지 않았다. 윤해철의 개인 경호를 맡을 정도라면 실력은 당연히 문제없을 거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발전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해 한동안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왜? 싫나?”윤해철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좋아요. 너무 좋아요. 회장님 조건은 저한테 너무 이득이에요.”“하하. 별거 아니야. 말 한마디만 하면 되는 일이거든.”비록 그렇다지만 나는 너무 감격스러워,
“남주 누나, 농담 아니죠? 형수가 감옥에 다녀왔다니요? 그럴 리가요.”‘형수처럼 좋은 분이 감옥에 다녀올 리가 있나?’나는 그 말을 조금도 믿을 수 없었다.그러자 남주 누나는 예상했다는 듯 싱긋 웃었다.“내 신분을 생각해 봐. 내가 왜 이런 일로 널 속이겠어?”남주 누나의 신분을 생각하니 나는 더 충격에 빠졌다.남주 누나의 신분이라면 이런 일을 조사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그렇다는 건, 형수가 감옥에 다녀왔다는 건 진짜일 확률이 높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형수가 왜 감옥에 다녀와요?”“사실 큰일은 아니었어. 네 형수가 결혼 전에 쫓아다니는 남자가 엄청 많았거든. 심지어 네 형수 미모에 반해 스토킹하고 강제로 몸을 취하려는 남자들도 적지 않았어. 그런데 네 형수 성격이 그 당시 너무 강해서 상대를 칼로 찍는 바람에 1년 수감되었어.”“그런 일은 여자한테 얼마나 큰 오점이자 상처야? 누가 감옥살이를 한 적 있는 여자와 결혼하려 하겠어? 그렇지 않으면 네 형수 몸매와 외모로 왜 진동성과 결혼했을까?”이렇게 말하니 나는 단번에 이해가 됐다. 하지만 난 형수가 잘못한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그런데 그게 이혼 안 하는 거랑 무슨 상관이에요?”나는 의아해서 물었다.남주 누나는 손가락으로 내 머리를 찔렀다.“똑똑한 줄 알았는데 왜 이런 방면에서는 이렇게 둔해? 네가 스스로 생각해. 만약 이것도 모른다면 앞으로 너 안 찾아올 거야. 정말 그 정도 IQ라면 전염될까 봐 두렵네.”나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아주 무서운 가능성을 떠올렸다.“혹시 진동성이 형수랑 결혼할 때 그 약점으로 협박했어요?”나는 이렇게까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라 떨쳐내지 못 할 정도였다.남주 누나는 곧바로 긍정적인 눈빛을 보냈다.“음, 너무 바보는 아니네. 앞으로 계속 찾아와도 되겠어.”나는 일순 소름이 돋아 찬 공기를 들이마셨다. 순간 손끝부터 발끝까지 싸늘해지는 느낌이었다.이 순간 진동성의 이미지는 내 마음속에서 완전히
나는 몸이 짜릿했다.“어때? 기분 좋아?”남주 누나는 생긋 웃으며 내 가슴에 엎드리더니 긴 손톱으로 내 피부를 긁어내렸다.그때까지도 나는 방금 전 느낌에 깊이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남주 누나, 안 본 사이에 더 대단해졌네요. 어떻게 이렇게 잘해요? 숨 못 쉴 뻔했잖아요.”이런 느낌은 남주 누나와 할 때만 느낄 수 있다.그동안 수많은 여자들과 경험을 해봤지만 남주 누나를 이길 상대는 아무도 없다.남주 누나는 몸매가 끝내주는 것도 모자라 남자가 어떤 걸 원하는지 너무 잘 알아 욕망을 살살 건드리곤 한다. 게다가 어떻게 하면 남자가 흥분하는지, 어떻게 하면 미치는지, 어떻게 하면 기분 좋아지는지 너무 잘 알고 있다.남주 누나의 모든 자세는 그야말로 나에게 최고의 경험을 선사했다. 더욱이 이제는 걱정할 것도 없겠어 멘트마저 노골적으로 변했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전생에 기녀였나 보지.”나는 너무 난감해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자기를 이렇게 형용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남주 누나는 내 가슴을 살짝 깨물었다.“또 할래? 다른 자세도 있는데.”“저...”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남주 누나는 다리를 쫙 벌린 채 내 몸에 올라탔다....그 시각 형수는 혼자 거실 소파에 앉아 화를 삭이고 있었다. 내가 분명 저를 보러 온다고 했으면서 남주 누나를 따라 나가버렸으니까.심지어 그것도 모자라 얼마 뒤 옆집에서 곧바로 19금 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딱 들어도 친구 남주가 낸 소리였다.형수는 곧바로 나와 남주 누나가 옆집에서 뭘 하고 있는지 눈치챘다. 게다가 남주 누나가 일부러 목소리를 높인 건 형수를 향한 도발이었다.형수는 소리를 들을수록 화가 나고 온몸이 불편했으며 아래가 축축해졌다. 하지만 내가 남주 누나와 하고 있다는 걸 생각하니 화를 참을 수 없었다.“정수호 씨, 이럴 줄 알았으면 수호 씨더러 애교를 꼬시라고 하지 않았을 거예요.”만약 형수가 애초에 나를 애교 누나에게 밀어주지만 않았어도 지금 나는 형수 혼
“없어요.”형수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것도 말하려 하지 않았다.남주 누나는 서두르지도 않고 느긋하게 말했다.“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마. 네가 뭐 수호 친형 와이프도 아니고. 솔직히 말하면 수호 씨 일 끼어들 자격 없잖아.”“푸들, 너한테 선택할 기회를 줄게. 이 집에 남아 있을래? 아니면 나랑 같이 나갈래?”남주 누나는 말을 마치자마자 작은 소리로 나에게 속삭였다.“나랑 같이 나가자. 네 형수가 왜 이혼하지 않으려 하는지 알려줄게.”남주 누나의 말은 너무 유혹적인 제안이라 내 마음은 흔들렸다.게다가 형수가 계속 이혼을 거부하는 게 무슨 어려운 사정이라도 있나 생각하던 참에, 마침 답을 너무 알고 싶었다.하지만 내가 정말 남주 누나와 함께 나가면 형수는 반드시 화낼 거다.그때 남주 누나가 일부러 형수의 화를 돋우려는 듯 계속 나를 향해 윙크했다.나는 마음으로는 이러고 싶지 않았지만 형수의 비밀을 알고 싶은 마음에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우리 나가요.”“수호 씨...”나를 보는 형수의 실망스러운 눈빛에 내 마음은 미어질 것만 같았다.나는 살짝 마음이 흔들려 형수에게 말했다.“형수한테 말 못 할 사정이 있다면 말해요. 우리가 도와줄 수 있어요.”“나한테 무슨 말 못 할 사정이 있겠어요? 갈 테면 가요. 이번에 가면 영원이 오지 마요.”형수는 질투한 게 틀림없었다.그걸 나는 당연히 눈치챘다. 하지만 남주 누나는 계속 내 팔을 잡아당기며 절대 마음 약해지면 안 된다는 사인을 보냈다.상황이 이 지경까지 왔는데 일을 그르칠 수 없었기에 나는 이를 악물고 남주 누나와 함께 밖을 나갔다.형수 집을 나온 뒤, 나는 얼른 남주 누나에게 물었다.“대체 뭘 아는 거예요? 말해줘요.”“급할 거 뭐 있어? 네 애교 누나 집에서 말해줄게.”“누나 애교 누나네 집 열쇠를 갖고 있어요?”“내가 애교한테 달라고 했어.”남주 누나는 손바닥을 활짝 펴며 쥐고 있던 열쇠 뭉치를 보여주었다.나는 무척 이해가 되지 않았다.“왜 애교 누나 집에 가려는 건
“나 아직 너한테 질리지 않았어. 내가 몇 번 더 해줄게. 나중에 내가 너한테 질리면 하고 싶어도 못 하게 될 거야.”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내 것을 잃어버리는 느낌이었다.나는 무의식적으로 남주 누나의 허리를 감싸안았다.“무슨 뜻이에요? 저 하나로는 만족 못 하고 다른 놈 만나겠다는 거예요?”남주 누나는 키득키득 웃으며 일어섰다.“너 하나로 어떻게 만족해? 난 역하렘이라도 만들어 매일 다른 남자와 즐겨보고 싶은데.”“누나 진짜 나쁜 여자네요. 전 허락 못 해요.”나는 남주 누나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그러자 남자 누나는 일부러 내 팔뚝을 물었다. 그게 너무 아프고 짜릿해 내 욕망은 단번에 솟아났다.“요물!”“요물이 네 정기 다 빨아먹고 싶다는데, 그래줄 수 있어?”남주 누나는 눈웃음치며 나를 바라봤다. 누나의 빨간 입술은 거부할 수 없는 치명적인 매력이 숨어 있었다.나는 화장실 쪽을 흘긋 바라봤다.“좋아요. 하지만 여기서는 싫어요.”“그럼 밖에 나가자. 나 제대로 만족시켜 줘.”남주 누나는 점점 더 요망해지는 것 같았다.이런 여자의 유혹을 견딜 수 있는 남자는 아마 없을 거다.내가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할 때, 형수가 갑자기 화장실에서 나왔다.그 순간 나는 잘못을 들킨 것처럼 발이 저렸다.하지만 남주 누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내 팔짱을 끼며 형수에게 말했다.“태연아, 나 네 남편 동생 따먹고 싶은데, 괜찮지?”형수는 예쁜 눈으로 내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그 눈빛에 나는 더 마음이 찔렸다.“형수, 저...”나는 뭔가를 설명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다.그때 형수의 낯빛이 어두워지더니 언짢은 말투로 말했다.“싫어! 최남주, 피해줄 거면 다른 놈 건드려. 수호 씨 건드리지 말고.”“피해준다니? 사랑을 나누려는 건데. 안 그래 수호야?”“수호 씨는 네 사랑 필요 없어.”“내가 아니면 누가 사랑해 주는데? 설마 너? 고태연, 난 지금 솔로야. 난 누구랑 하고 싶으면 해도 되지만 넌 달라. 너랑 진동성은
남주 누나는 절대 좋은 여자라고 할 수 없다. 진짜 좋은 여자는 애교 누나처럼 다정다감하고 결혼하기 적합한 조강지처 스타일이니까.하지만 나는 그걸 곧이곧대로 말할 수 없었다.남주 누나는 싱긋 웃었다.“형수 집에 가 봐. 이따 봐.”“네.”나는 사실 남주 누나가 형수네 집에 가는 걸 원하지 않았다. 형수랑 단둘이 있고 싶었으니까.하지만 남주 누나가 가겠다는 걸 내가 막을 수는 없었다. 남주 누나도 이제 막 이혼해 기분이 안 좋을 게 뻔했으니까.퇴근 후 나는 형수네 집으로 향했다. 남주 누나는 나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다.“수호 왔어? 얼른 와서 나 마사지 좀 해줘.”남주 누나는 내가 오자마자 소파에 엎드리며 마사지를 요구했다.오랜만에 보는 건 데도 남주 누나는 여전히 아름답고 요염했으며 고혹적이었다. 남주 누나를 본 순간 누나와 멀어져야겠다던 내 결심은 어느새 저 멀리 사라지고 말았다.남주 누나가 소파에 눕자 볼륨감 넘치는 콜라병 몸매는 내 눈앞에 고스란히 드러났다.“하고 싶어?”남주 누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난 확실히 하고 싶었다. 하지만 여기 오기 전에 내가 생각했던 상대는 형수였다.남주 누나는 가늘고 흰 손가락으로 내 손등을 긁었다.“난 하고 싶은데.”남주 누나의 매혹적인 눈빛은 분명 나를 꼬시는 게 틀림없었다.어쩜 이리도 대담한 건지. 형수 집에서마저 이러다니.나는 다급히 손을 뒤로 뺐다.“안 돼요. 여긴 형수 집이에요.”“네 형수도 함께 부르는 건 어때?”남주 누나는 눈을 깜빡이며 나를 바라봤다.그 모습에 나는 충격을 받고 말았다.“누, 누나 그건 너무 대담한 거 아니에요?”“못 하겠어?”“네, 못 하겠어요.”나는 단번에 거절했다.무엇보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형수한테 맞을까 봐 겁이 났다.“쫄긴. 나도 무서워하지 않는데 네가 뭐가 무서워?”남주 누나는 내 팔을 살짝 꼬집었다.그 순간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내가 누나처럼 밝히는 것도 아닌데. 누나는 당연히 안 무섭겠죠.’“내가 왜 이혼했는지
더욱이 요즘은 마사지를 하면서 은근슬쩍 고객님한테 흘리며 암시했다.화인당에서는 그런 걸 절대 허용하지 않는다.때문에 나는 허심탄회하게 얘기해 보려고 안준희를 찾아갔다.사무실 안.안준희는 내 맞은편에 조용히 앉았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그에게 책임을 묻는 대신 빙빙 돌려 말했다.“정 사장님이 세운 규칙 잊었어요?”“아니요.”“그런데 왜 그래요?”“나도 수호 씨한테 시비 걸려는 거 아니에요. 다만 요즘 급전이 필요해서 어쩔 수 없었어요.”“왜요? 집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요?”나도 상대가 일부러 나에게 시비 거는 게 아닌 줄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토록 인내심 있게 상황 설명을 하지 않았을 테니까.안준희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는 인내심을 갖고 물었다.“말하기 싫으면 하지 마요. 하지만 가게 규칙을 어겼으니 다음번에 또 고객한테 은근슬쩍 암시하다가 걸리면 바로 해고할 거예요.”안준희는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사무실에 혼자 앉아 있는 나는 마음이 심란하고 짜증이 났다.사장님 일은 당분간 해결됐지만, 내 일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임천호가 나타난 뒤로 소여정도 더 이상 나를 만나러 오지 않고, 윤미화는 본인 일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고, 사모님은 사장님을 매일 돌봐야 하고, 백연우는 하루 종일 학교에만 붙어 있고 애교 누나마저 집에 갇혀, 내 주변에 여자라곤 형수님 한 명 밖에 남지 않았다.미녀들한테 둘러싸이다가 갑자기 혼자가 되니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았다.결국 나는 핸드폰을 꺼내 형수한테 문자를 보냈다.[형수, 뭐 해요?][내가 뭐 할 게 있나요? 티브이 보고 있죠.][형수, 보고 싶어요.][보고 싶으면 우리 집에 와요. 진동성도 집에 없어요.]형수의 말에 나는 마음이 두근거렸다.며칠 동안 형수를 만나지 못했더니 정말 보고 싶었다.나는 형수네 집에 가려고 짐을 정리했다. 하지만 그때 핸드폰이 갑자기 울려 확인했더니 남주 누나의 이름이 액정에 떴다.나는
한지영의 말에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의 연기에 협조했다.하지만 주위를 빙 둘러봤지만 우리 쪽을 바라보는 남자는 아무도 없었다.‘전 남자 친구가 우리를 아직 발견하지 못했나 보네.’나는 속으로 생각하며 한지영에게 물었다.“전 남자 친구는 어디 있는데요?”“사실 난 전 남자 친구가 없어요.”그 말을 들은 순간 내 얼굴은 어두워졌다.“미쳤어요? 사람 놀리니 재밌어요?”나는 짜증을 내며 한지영의 손을 뿌리쳤다.그랬더니 한지영이 애원하는 듯 말했다.“사실 나 연기자예요.”“그쪽이 연기자면 난 연기 천재예요.”나는 더 이상 한지영을 상대하기 싫어 뒤돌아 자리를 떠났다. 그러면서 속으로 봉섭 할아버지처럼 훌륭한 분이 어쩌다 이런 미친 손녀를 뒀는지 안 됐다고 생각했다.테이블 앞에 도착한 나는 애써 감정을 숨겼다. 무엇보다 내 언짢은 기분을 봉섭 할아버지한테 들키고 싶지 않았다.잠시 뒤, 한지영도 자리로 돌아왔다. 하지만 착석한 뒤로는 나를 없는 사람 취급하며 계속 외할아버지와 이야기꽃을 피웠다.식사를 마친 뒤, 한지영은 곧장 계산하러 갔다. 하지만 사내대장부인 내가 여자더러 계산하게 하는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말없이 한지영의 뒤를 따랐다.다만 내가 내겠다고 해도 한지영은 본인이 낸다며 한사코 거절했다. 그러다 계산할 때 신용카드 한 장을 집어 들었다.“이봐요, 돈도 없으면서 왜 돈 많은 척 연기해요?”딱 보니 한지영은 돈을 벌 능력도 없으면서 계속 돈 많은 척 자신을 속이고 다녔던 모양이었다.내 말에 한지영은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며 말했다.“작게 말해요. 할아버지가 들으면 안 되니까. 할아버지는 내가 밖에서 배우 활동하는 줄 안단 말이에요. 그런데 배우 되기 어디 그렇게 쉽나요? 그런데 난 언젠가 유명한 배우가 될 거라고 믿어요.”한지영은 돈이 없는 건 물론 자기가 대배우라는 착각속에 빠져 살고 있었다.그 순간 한지영이 겉보기에는 분명 화려해 보였는데 혼자 밖에서 얼마나 고생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방금까지
어여쁜 여자가 웃으며 달려오더니 봉섭 할아버지 품에 와락 안겼다.“할아버지, 오랜만이에요. 너무 보고싶었어요.”“다 큰 여자애가 왜 이렇게 점잖지 못해? 참, 네 동생도 이틀 전에 B시에 갔다던데. 둘이 만났어?”“네. 그 계집애가 글쎄 가슴 수술 하겠다는 걸 내가 호되게 혼냈어요. 그랬더니 삐쳐서는 같이 오자고 했는데도 거절하더라요.”“걔는 갑자기 왜 가슴 수술을 받겠다는 거야? 세상에 각양각색의 미녀가 얼마나 많은데. 다 똑같이 생기면 뭔 의미가 있어?”할아버지가 손녀와 얘기하는 도중에 끼어들 수 없었기에, 나는 살짝 거리를 두고 지켜봤다. 그러는 와중에 두 사람의 대화를 똑똑히 들었다.그때 한창 얘기하던 여자가 나를 보더니 누구냐고 물었다.봉섭 할아버지는 우리를 서로 소개해 주었다.“여긴 정수호라고 내 친구네 손자. 아까 이 친구가 나를 공항까지 데려다줬어. 수호야, 여긴 내 손녀 한지영이야.”“반가워요.”나는 아무 생각도 없이 예의 있게 인사를 건넸다.하지만 한지영이 나를 훑어보는 눈빛은 너무 불편했다.노골적인 시선에 나는 상대가 왜 이러나, 내 얼굴에 꽃이라도 있나 의심했다.한지영은 서둘러 돌아가지 않고 외할아버지께 식사를 대접하겠다며 초대했다.결국 나도 그 자리에 끼는 수밖에 없었다.우리는 고심 끝에 한 중식당에 도착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한지영은 수많은 음식을 주문했다. 그 모습만 봐도 상대가 얼마나 돈이 있는지 알 수 있었다.“수호 씨도 나랑 같이 음료수 선택하러 가지 않을래요?”나는 한지영이 왜 갑자기 나를 따로 불러내는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결국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녀를 뒤따라갔다.음료를 고를 때 한지영이 갑자기 물었다.“혹시 무슨 일 해요?”“한약관에서 마사지사로 일해요.”“몸매도 좋아 보이는데 혹시 모델에 관심 있어요?”나는 눈을 홉뜨며 단번에 거절했다.“없어요.”한지영은 아까부터 나를 이상한 눈빛으로 훑어봤는데, 그 시선은 사람을 매우 불편하게 했다.게다가 한의대를 졸업한 나더러 모델을 하라
임민수와 한영심은 나른하게 누워 나를 잡아먹을 듯 노려봤다.나도 내 행동이 너무 지나치고 무례했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한시가 급한 상황이라 나도 어쩔 수 없었다.나는 단지 봉섭 할아버지가 얼른 사장님 병을 치료하기를 바랄 뿐이었다.치료 과정에 나는 두 어르신 옆을 지키며 감각이 돌아오려고 할 때마다 협곡혈을 찔렀다.그 과정에 임민수의 눈빛은 나를 잡아먹으려던 데로부터 갈기갈기 찢어발기려는 것처럼 살의를 띄었다.사실 나도 너무 난감했다. 심지어 너무 무서워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시간은 1분 1초 흘러갔다.그러다 약 3시간이 지났을 때쯤 봉섭 할아버지의 입에서 겨우 끝났다는 말이 들렸다.나도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내 몸은 어느새 식은땀에 흠뻑 젖어 티셔츠가 몸에 찰싹 달라붙었다.나는 얼른 달려 나가 사장님 상태를 살폈다.“사장님, 어때요?”사장님은 힘에 부친 듯해 보였다.그때 봉섭 할아버지가 말했다.“치료가 방금 끝나 아직은 몸이 허약할 거야. 한동안은 몸조리해야 해.”이 선생님은 옆에서 연신 감탄했다.“어르신, 침술 실력이 참 대단하네요. 저도 30년 동안 의사로 일하면서 이렇게 안정적인 침술 수법은 처음 봐요.”봉섭 할아버지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자네도 내 침술 실력이 보통이 아닌 걸 눈치챈 걸 보면 실력이 만만치 않군.”사모님은 얼른 사장님 곁으로 다가가 땀을 닦아주었다.그사이 나는 봉섭 할아버지와 이 선생님의 대화를 열심히 엿들었다. 심지어 얼마나 집중했는지 침대에 있는 임민수 내외를 까맣게 잊어버렸다.그러다 무심코 고개를 돌렸을 때, 나를 잡아먹을 듯한 임민수의 눈과 딱 마주쳐 얼른 목을 움츠렸다.“어르신, 죄송합니다.”“죄송?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로 어물쩍 넘어가려고? 당장 나가! 당장!”임민수가 폭발한 모습은 너무 무서웠다. 나는 더 이상 이곳에 남아 있기 두려워 꽁지 빠지게 도망쳤다.봉섭 할아버지와 이 선생님도 잇따라 밖으로 나왔다.사모님 집에서 나오기 바쁘게 두려움은 싹 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