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평화로운 결혼 생활은 잔잔한 물결처럼 기복도 격정도 없다. 윤미화의 결혼 생활이 지금 그러하다.이젠 중년에 접어든 터라 한 달에 한 번 부부 관계를 맺는 것만 해도 괜찮은 축에 속한다.하지만 윤미화의 남편은 매번 할 때마다 숙제를 완성하기라도 하는 듯 기계처럼 임무를 수행하느라, 애무도 하지 않고 그녀를 기쁘게 하지도 않으며 심지어 만족스러운지 물어보지도 않는다.윤미화는 솔직히 그동안 마음이 허전했다. 때문에 마사지 받으러 와서 자꾸만 나를 희롱했던 거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남편을 배신하는 일을 저지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하지만 방금 나와 뒹군 그 짧은 시간 동안, 윤미화는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뜬 것처럼 자꾸만 정신이 멍하고 어쩔 줄 몰랐다. 게다가 그녀의 몸은 마치 열쇠라도 열린 듯 민감해지고 통제 불능이 되었다.결국 윤미화는 참지 못하고 제 옷 속으로 손을 넣더니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곧이어 그녀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하지만 나는 당연히 그 일을 알 리 없었다.방금 겪은 일에 나는 자극을 받지도 흥분하지도 않고 오히려 불안하고 조마조마했다.윤미화는 내 사장님인데, 내가 사장님을 그랬다니...나는 내 머리를 세게 쥐어박았다.“앞으로 욕구가 생기면 제때제때 풀어야겠어. 절대 이런 망나니 같은 짓을 하면 안 돼.”다행히 중요한 순간에 고삐를 쥐어 잡았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진짜 난처해 죽었을 거다.나는 일부러 문에 바싹 기대 밖을 훔쳐봤다. 그러고는 안방 쪽 문이 굳게 잠겨 있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다행히 사장님과 사모님이 엿듣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지 않으면 진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나는 화장실에서 찬물 샤워를 해 강제로 몸을 식힌 뒤 방으로 돌아가 잠을 청했다.다음 날 아침.윤미화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먼저 나한테 인사했다.“수호 씨, 좋은 아침.”나는 속으로 태연하게 행동하는 윤미화를 존경스러워하며 맞장구쳤다.“좋은 아침이에요. 언제 왔어요?”윤미화는 예쁜 미소를
윤미화는 예리하게 이상함을 알아차렸다.“난 그냥 농담한 건데, 얼굴은 왜 그렇게 빨개져? 설마 내 말이 맞아? 설마 정말 둘이 그랬어?”윤미화는 솔직히 너무 부러웠다. 그녀의 제부는 유려하고 우아하지만, 전혀 무뚝뚝하지 않다. 이건 동생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여자는 정신과 마음이 모두 사랑을 받을 때만 얼굴에 붉은빛이 감돈다. 때문에 윤미화는 자기 동생 역시 그렇다는 확신이 들었다.그에 반해 윤미화는 너무 슬펐다. 똑같이 유려하고 우아한 남편을 뒀으나, 윤미화의 남편은 무뚝뚝하고 재미없는 데다, 매번 정사를 치를 때마다 아무 느낌도 없다.윤미화는 예쁜 데다 몸매도 좋고, 꽃에 비유하자면 활짝 핀 장미 같은 분위기를 띠었다. 그런데 아무리 예쁜 장미꽃이라도 충분한 보살핌을 받지 못하면 시들어 죽기 마련이다. 윤미화는 본이니 지금 겉으로는 괜찮아 보이나 속은 텅 비었다는 생각이 들었다.“됐어. 그런 얘기는 그만해. 집에 우리만 있는 거 아니잖아.”사모님은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나를 자꾸만 흘깃거렸다. 그러다가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저들의 대화를 내가 들었다는 걸 알아차리고 더 부끄러워했다.나는 너무 어색해 머리를 긁적이며 얼른 뒤돌아섰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서로 너무 어색할 테니까.하지만 호기심이 발동한 윤미화는 제 동생의 팔짱을 끼고 계속 물었다.“대체 한 거야 안 한 거야? 말해 봐.”“안 했어. 저 사람 몸이 저런데 어떻게 해? 머리로 생각 좀 해 봐.”“안 했는데 얼굴은 왜 붉혀? 혹시 부끄러워 말 못 하는 거 아니야? 아니면 네가 먼저 하자고 해서 내가 알기를 원하지 않는 거야?”그 순간 임유미는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는 자기 언니가 이런 것마저 눈치챌 정도로 똑똑할 줄은 몰랐다.“아니야. 헛소리하지 말고 얼른 아침이나 사와.”“오호. 유미, 네가 이런 사람인 줄은 몰랐는데.”윤미화는 더 이상 묻지 않아도 이미 동생의 반응에서 답을 얻었다. 이윽고 신이 나서 집을 나섰다. 그러면서 속으
“아니에요.”하늘에 맹세코 나는 절대 사모님을 노린 게 아니다. 그저 대략적인 사이즈를 가늠하려는 거였다.하지만 사내인 내가 사모님 몸을 훑는 게 확실히 부적절하다는 걸 알았기에, 나는 얼른 시선을 돌렸다.“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오늘 사장님이 드실 약은 냉장고에 넣어 뒀어요. 그럼 일 보세요, 전 이만 가볼게요.”나는 말을 마치자마자 도망치듯 집을 나갔다.사모님이 부끄러워하는 모습에 나도 따라서 쑥스러워졌으니.나는 곧장 화인당으로 가는 대신 우선 자동차 판매점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 내 차를 수리 맡긴 뒤에야 택시를 타 화인당으로 향했다.내가 가게에 도착했을 때 이미 10시가 넘었다. 나는 더 이상 마사지할 필요가 없기에 일찍 오든 늦게 오든 별로 상관은 없었다.오늘은 모태진도 왔다. 다만 얼굴에는 여자의 손톱자국을 달고서.‘아내한테 할퀴었나?’보아하니 한은솔과의 일을 아내한테 솔직히 털어놓은 게 틀림없었다.어떤 여자도 자기 남편이 다른 여자와 그런 짓을 한 걸 용납할 수는 없다. 비록 그게 강제로 한 것일지라도.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모태진 눈 밑에 진한 다크서클이 생겼다.“수호 씨, 민우 씨한테서 들었는데 김진호 일당이 어제 또 시비 걸어왔다면서요?”어제 싸워서 이긴 것 때문에 어깨뽕이 올라간 민우는 오늘 출근하자마자 동료들한테 허풍을 떨어댔다. 우리 둘이 4, 50 명을 이겼다고. 그 말에 동료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해했다.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모태진은 이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이번 일은 내 책임이 커요.”나는 얼른 모태진을 째려봤다.“이게 왜 선배 책임이에요?”“내가 한은솔과 엮이지 않았다면 안명훈도 우리를 찾아오지 않았을 거고 나중의 일이 없었을 거잖아요.”“누구 좋으라고 책임을 혼자 떠안아요? 선배가 한은솔과 그런 일이 없었어도 김진호는 우리를 찾아와 시비를 걸 거예요.”나는 모태진을 질책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의 부담을 덜어주고 싶었다.그때 모태진이 칼을 들고 안명훈한테 달려들던 모습
“잘 생각해 봐요.”나는 더 이상 말을 아꼈다. 여기서 더 말하면 진짜 쓸데없는 참견하는 거니까.모태진도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수호 씨 말은 잘 생각해 볼게요.”나는 모태진의 어깨를 툭툭 치고 일 보러 갔다.얼마 뒤, 화인당 매니저 오교준이 나를 찾아왔다.“수호 씨, 우리 가게 약재가 모자라서 얼른 재고 보충해야 해요.”이 일은 사장님이 진작 나한테 일러둔 적이 있다. 그러면서 나에게 상세한 과정과 공급업체 연락처를 주었다.그런 걸 보면 사장님은 정말 가게 전체를 나한테 맡긴 셈이다.한의관 잘 돌아가는지는 물론 운영을 잘하는 것과 상관있지만 그보다도 한약재의 품질이 더 중요하다.화인당은 줄곧 자신만의 루트가 따로 있는데, 화인당에 약재를 공급하는 건 G시에 있는 한 약재상이다.그 사장님 이름은 서윤기인데 정 사장님과 10년 넘게 거래해 왔다.정 사장님은 서윤기 사장의 연락처를 나한테 주며 나더러 직접 연락해 보라고 했다.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장님 사무실에 가 서윤기한테 전화했다.화인당 직원들이 모두 한마음 한뜻이라지만 그래도 사람은 늘 경계해야 한다. 얼마 뒤, 서윤기가 전화를 받았다.“정 사장한테서 들었어요. 늘 만나던 곳에서 만나서 얘기하죠.”“만나던 곳이 어디죠? 그건 사장님이 말씀 안 해 주셨거든요.”사장님이 나한테 말해주지 않는 게 아니라, 사실은 서윤기가 매번 약속 장소를 다른 곳으로 잡았다. 게다가 항상 두 사람이 직접 연락했었고.서윤기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순덕 찻집이라고 알아요?”“네.”“오후 두 시. 순덕 찻집에서 만나요.”서윤기는 말이 많지 않았다. 그저 약속 장소를 정하고 전화를 끊었다.하지만 나는 그냥 약재 공급업체일 뿐인데 비밀스럽게 구는 상대가 의아했다.강북에 한약당이 그렇게나 많은데, 대부분은 공급업체에서 물건을 직접 배달하곤 한다.하지만 나는 정 사장님이 매번 이렇게 거래하는 게 그분만의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점심 식사를 마친 뒤, 나는 가게 일을 배정하고 혼자 약속
그 말에 나는 더 멍해졌다.나는 정 대표님을 대신해 G시 약재상을 만나러 온 거다. 게다가 서윤기 말로는 이곳에 올 사람은 우리 둘뿐이라고 했다.서윤기는 G시 약재상이 맞고, 나도 정 대표님을 대신해 나온 게 맞는데 왜 상대가 나를 대단한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는지 의문이었다. ‘아니면 이 속에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나?’순간 일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복잡해진 느낌이었다.내가 한창 고민하고 있을 때 진용진이 또 입을 열었다.“당신이 그 대표 맞지? 그쪽일 줄 몰랐네. 오늘 우리가 여기 온 목적이 모두 돈 벌기 위해서니 예전 일은 없던 셈 치고 나랑 협업하는 거 어때?”“어떻게 협업할 건데?”“간단해. 강북 약재 시장을 나한테 조금 넘겨줘. 내가 더 싼 약재를 공급할 게. 그러면 그 마진이 남을 거 아니야.”진용진은 자기 목적을 말했다.그걸 듣자마자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그러니까 진용진은 나더러 품질이 떨어지는 약재로 대충 수량만 채우라는 뜻이었다.나는 깊은숨을 들이쉬고 감정을 추슬렀다. 물론 이 일이 어떻게 된 건지는 알 수 없었으나, 누군가 약재 시장을 노려 검은 돈을 벌려 한다는 건 알 수 있었다.나는 싸늘한 표정으로 진용진을 바라봤다.“꿈 깨. 난 당신과 손 안 잡아.”진용진은 조급해하지도 않고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그렇게 쉽게 거절하지 말고. 내가 계산해줄 테니 잘 들어 봐.”진용진은 말하면서 펜과 공책을 꺼냈지만 나한테 제지당했다.“내가 말했지. 당신과 협업할 일은 없으니까 꺼지라고!”내가 싸늘한 태도로 거절하자 진용진도 이내 표정이 싹 바뀌었다.“돈 거저 준다는데 어디서 호의를 무시해?”“이거 불법이야. 한마디만 더 하면 경찰에 신고할 거야.”나는 상대의 협박에 넘어가지 않고 여전히 쌀쌀맞게 말했다.진용진은 그런 나를 한참 노려보다가 결국 헛웃음을 치더니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주워 떠나갔다.하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복잡하기만 했다.여기 오기 전에 사장님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이게 나에
‘그게 나라는 건가?’‘정 사장님이 나한테 유일하게 이런 중책을 맡겨 주셨다니.’나는 살짝 놀랐다. 그와 동시에 사장님이 나를 이렇게 믿어준다는 것에 감했다.그때 서윤기가 말을 이었다.“이 찻집에 대한 정보는 내가 일부러 흘렸어요. 때문에 강북의 약재 시장을 노리는 사람들이 요즘 계속 이곳에 진을 치고 있었거든요. 요즘 수호 씨를 찾아오는 사람이 아마 엄청 많을 거예요. 수호 씨가 그 유혹을 이겨내는 지가 관건이에요.”나는 그제야 충격에서 조금 벗어났다.“지금 그러니까 저한테 강북 시장 약재 관리를 맡기겠다는 말씀인가요?”이런 생각이 너무 터무니없다는 걸 알지만 지금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이것뿐이었다.그러자 서윤기가 싱긋 웃었다.“그렇다고 할 수 있죠. 상세한 건 저도 몰라요. 돌아가서 정 사장님께 물어보세요.”서윤기는 내 물음에 직접적인 대답을 주지 않았다. 때문에 나는 내심 궁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모순되었다.궁금한 건 이렇게 큰 강북 시장에 자기만의 약재 관리 시스템이 있다는 거였고, 모순되는 건 정 사장님이 그렇게 중요한 일을 나한테 맡겨주면 나중에 민우와 어떻게 따로 일하는가 하는 거였다.하지만 지금 상황에 나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정 사장님은 나를 신임하는 만큼 중요한 일을 모두 나에게 맡겨 주었다. 그런데 내가 가면 화인당은 어떡하고 약재 시장은 또 어쩐단 말인가?만약 정 사장님이 정말 나에게 약재 시장을 맡겨줄 생각이라면, 이 일에 대해서 사장님과 제대로 얘기해 볼 필요가 있다. 절대 사장님을 실망하게 하면 안 되니까.“저 잠깐만 정 사장님께 전화 좀 하고 올게요.”내 말에 서윤기는 편한 대로 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나는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 정 사장님께 전화해 현장에서 있었던 일을 사장님께 말씀드렸다.정 사장님 목소리는 약간 기운이 없었지만 내 질문에 답하는 건 문제없었다.“수호 씨, 사실 나도 회장 신분은 진작 내놓고 싶었는데 합당한 적임자를 찾지 못해서 그동안 미뤘던 거야. 상회는 우리 한약관 사장
하지만 내가 이해가 안 되는 건, 사장님이 방금 한 말이다.나더러 서윤기의 말을 무시하고 화인당에 필요한 약재만 챙기라니?나는 머리가 복잡했지만 어느 정도 자초지종을 분석해 냈다.나는 사장님더러 몸조리에만 신경 쓰고 다른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러고는 전화를 끊고 다시 서윤기 앞으로 다가갔다.“다른 일은 우선 제쳐두고, 저는 화인당만 챙기면 될 것 같아요. 이건 정 사장님께서 나열한 목록이니 한번 봐주세요.”서윤기는 그걸 급히 확인하지 않고 여전히 나를 바라봤다.“수호 씨, 정 사장님이 요즘 상회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을 텐데 정말 고려해 보지 않을 겁니까?”“왜 저한테 그런 걸 묻죠?”“너는 장사꾼이라 이익만 따지지 정은 뒤로 하거든요. 저와 정 사장님이 다년간 협업해 온 건 맞지만, 정 사장님이 항상 가격을 후려치는 바람에 저희가 버는 게 크게 없어요. 오히려 가짜 약재를 파는 상인들이 저희보다 더 많이 벌어요.”“수호 씨가 정 사장님 손에서 상회 다른 회원의 소식을 알아내서 저한테 넘기면, 제가 이윤을 조금 넘길게요. 어때요?”나는 서윤기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이 사람 목적이 이것일 줄은 몰랐다. 이 틈에 가격을 올릴 작정이었다니.정 사장님이 서윤기와 협력하는 걸 봐서 강북의 대부분 약재는 모두 서윤기가 제공한다는 걸 알 수 있다.하지만 정 사장님도 대단한 분이기에 이런 사람한테서 약재 가격을 후려쳐 그동안 최저가로 거래해 온 거다.그런데 서윤기는 지금 욕심이 발동해 가격을 올리려는 속셈이었다.나는 정 사장님이 어떻게 하신 건지는 모르지만 너무 존경스러웠다.시장 규율은 한번 깨지면 혼란스러워진다. 심지어 야심 없는 약재상들이 그 틈에 파고들 수 있다.나는 절대 그런 죄인이 될 수는 없었다.“아무리 돈이 좋대도 정당한 방법으로 얻어야 한다고 했어요. 정 사장님이 저를 이렇게나 믿어주시고 저더러 서 사장님과 거래하라고 여기까지 보냈는데, 전 절대 정 사장님께 미안한 일은 할 수 없어요. 그리
하지만 지금, 누군가 그 균형을 깨고 싶어 한다. 게다가 정 사장님은 지금 제 코가 석 자라 조만간 그 균형은 깨질 거다.나는 쓸데없는 일에 참견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이 업계는 물이 너무 깊어 내가 낄 수 있는 게 아니다.그날 오후 퇴근 시간이 다가왔을 때 주해진은 또 가게로 찾아왔다.그 순간 나와 민우는 바짝 경계심을 높였다.하지만 주해진은 그저 헤실 웃으며 말했다.“그렇게 긴장할 거 없어. 내가 말했잖아, 친구가 되고 싶다고.”민우는 콧방귀를 뀌었다.“그 말을 누가 믿어?”“이것 봐, 내가 선물도 가져왔는데. 이만하면 성의 표시는 충분하지 않나?”주해진은 슈트 차림에 가죽 구두를 신고 선물을 들고 찾아왔다. 심지어 평소 주렁주렁 달고 다니던 똘마니들도 데려오지 않은 걸 봐서 소란 피우러 온 것 같지는 않았다.하지만 나는 여전히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대체 무슨 꿍꿍이야?”나는 오히려 주해진이 속 시원하게 목적을 말하기를 바랐다.그때 주해진이 선물을 내려놓으며 진지하게 말했다.“인맥도 내가 한 수 아래고, 실력도 내가 한 수 아래야. 그런데 내가 왜 주제도 모르고 소란 피우러 오겠어? 머리가 어떻게 된 것도 아니고.”“머리가 어떻게 된 거 맞는 거 같은데? 어젯밤, 그 사람들 부르면 안 됐어.”내가 남주 누나한테 도움을 청했을 때, 주해진은 나한테 뒷배가 있다는 걸 알았어야 했다. 하지만 사촌 형 말은 귓등으로 듣고 사람까지 불러 나를 처리하려 했다.이렇게 무모한 사람이 이대로 포기할 거라는 걸, 나는 절대 믿지 않는다.주해진은 또 헤실 웃었다.“여기 사람도 많은데, 우리 안에 들어가서 얘기할까?”주해진은 어제 자기가 어떤 꼴을 당했는지 가게 사람들이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곧 죽어도 체면은 차려야 하는 작자였다.나는 결국 주해진의 체면을 차려주기로 결심하고 그를 데리고 뒤뜰로 향했다.그러자 민우는 내가 걱정됐는지 함께 따라왔다.주해진은 자세를 바짝 낮추었다.“어제 일은 내가 너무 충독적이었어. 두 사람이 그
왠지 모르겠지만 나는 애교 누나에게 이 문자를 보내고 싶었다.지금껏 애교 누나와 알게 된 이래 우리는 로맨틱한 기억이 없었다. 내가 한 번도 로맨틱한 분위기를 만들지 못했기에 그런 기억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내 유일한 추억이라고는 그저 애교 누나의 훌륭한 몸매와 다정한 모습뿐이다.이 모든 게 그저 욕망 때문이라면 내가 너무 나밖에 모르는 쓰레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뜩 들었다.문자를 보낸 뒤 나는 곧장 잠이 들었다.다음 날 아침, 애교 누나가 보낸 문자 한 통이 도착해 있었다.[좋은 아침이에요.]짤막한 한마디였지만 그걸 본 순간 내 기분은 유난히 좋았다.이게 바로 연애의 맛일지도 모른다. 영화 속에 나왔던 것처럼 단순한 연애의 맛.나는 침대에 누워 애교 누나와 문자를 주고받았다.그때 민우가 들어와서 아침에 뭘 먹을 건지 물었고 나는 ‘아무거나’라고 대충 대답을 흐렸다.그러자 민우는 아예 내 쪽으로 다가와 침대에 털썩 앉았다. 나도 민우를 피하지 않았기에 그는 나와 애교 누나의 대화 내용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아침부터 연애질이야?”민우는 언짢은 표정을 지었지만 속으로는 무척 부러워했다.나는 헤실 웃으며 말했다.“네가 나더러 좀 배우라며? 그래서 실천 중이잖아. 그런데 기분은 진짜 좋네.”“수호야, 뭐 하나만 물어보자.”“뭔데?”“너 정말 애교 누나랑 결혼할 거야?”나는 되려 반문했다.“난 애교 누나랑 결혼하면 안 돼?”“어. 난 네가 그냥 누나 기분 좋으라고 한 말인 줄 알았지.”“왜 그렇게 생각하는데?”나는 민우가 왜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 알고 싶었다.지금껏 나는 내 감정에만 신경 쓰면서 다른 사람의 견해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이걸 알아내면 나도 이태웅의 마음을 알 것만 같았다.그때 민우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너 여자 친구 많잖아. 그 누나들과 모두 결혼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아? 그래서 네가 결혼하겠다고 한 건 그냥 여자 달래는 수법인 줄 알았지.”나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보아하니 다른 사
나는 그 문자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그건 왜요?][내가 남자의 다릿심에 관한 특집 하나 만들 거거든.]‘그런 거였구나. 난 또 나랑 뭘 해보자는 줄 알았네.’나는 두말없이 영상을 찍어 전송했다.[됐어. 나 이제 영상 편집해야 해서 얘기는 나중에 해.]어렵게 대화할 상대를 찾았나 싶었는데 몇 마디 나눠보지도 못하고 또 가버렸다.‘됐어. 그냥 영상이나 찾아보자.’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영상을 보다가 어느새 잠이 들었다.그러다 비몽사몽 중에 누군가 내 방으로 들어와 내 몸을 더듬는 걸 발견했다.그 순간 나는 번쩍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 일어나 앉았다.“누구야?”“수호야. 나야.”그건 다름 아닌 민우의 목소리였다.“젠장. 깜짝 놀랐잖아. 걷는데 왜 소리도 없어? 내 몸은 왜 더듬는 건데?”나는 말하면서 침실의 불을 켰다.그러자 민우가 헤실 웃으며 내 옆에 앉았다.“난 현성인 줄 알았잖아. 너인 줄 몰랐어.”“왜? 너 현성이한테 관심 있어?”“아니거든. 전에 형성이 그 자식이 여자애랑 해본 경험이 없다고 기회가 되면 우리끼리 먼저 체험해 보자고 했거든.”그 말에 내 눈은 커다래졌다. “너희 변태야? 남자 둘이 어떻게 해?”“그냥 체험. 진짜로 하는 게 아니라. 수호야, 나 요즘 임설아랑 부쩍 가까워졌어. 이제 꼭 결혼할 거야. 사실 나도 설아랑 진도 더 빼고 싶은데 내가 이런데 익숙하지 않아서 그러는데, 네가 좀 가르쳐줄래?”‘이 자식 뭐라는 거야? 남자를 상대로 어떻게 가르쳐달라는 거지? 난 남자를 보고 아무 느낌도 없는 건 물론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고.’나는 두말없이 야동 하나를 공유했다.“네가 직접 봐.”“어. 이런 영상은 싫어. 너무 노골적이잖아. 좀 아름다운 영상은 없어?”“나도 섹스를 어떻게 아름답게 해야 하는지 몰라. 너 사람 잘못 찾아왔어.”나는 확실히 그런 방법 따위는 모른다. 나는 항상 하고 싶으면 바로 본론으로 직행하는 스타일이라.민우는 내 말에 투덜거렸다.“나 정말로 설아랑
곧이어 백연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승호 씨, 좋아요?”“당연하죠. 연우 씨처럼 농염한 여자를 싫어할 남자가 어디 있어요?”곧이어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그 순간 내 뇌는 새하얗게 질렸고 그 자리에 뻣뻣하게 굳어버린 채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다.나는 다급히 그곳을 떠났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했고 마음이 무거웠다. ‘내가 안 와서 다른 사람을 부른 건가?’‘우리는 처음부터 서로 즐길 목적으로 만난 건데 진지할 거 뭐 있어?’하지만 왠지 모르게 내 마음은 좋지 않았다.나는 차에 앉아 담배를 연거푸 몇 대를 태웠다. 하지만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그러다 결국 월세방으로 돌아갔다.그동안 조현성과 주현영이 월세방에서 함께 지냈다. 현성은 매일 가게에 나가보는 것 외에 온 신경을 주현영에게 쏟아부었다.그리고 현성의 끊임없는 노력 덕에 주현영은 확실히 그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다.내가 돌아왔을 때만 해도 두 사람은 서로 마주 앉아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를 본 현성은 실망한 의아한 듯 말했다.“수호야, 네가 왜 왔어?”여긴 분명 내 집인데 현성은 오히려 내가 손님인 것처럼 굴었다.하지만 나는 말하기 귀찮아서 고개를 푹 숙인 채 소파에 주저앉았다.“너무 피곤해 운전하기 싫어서 여기로 왔어.”현성은 곧바로 내 옆으로 다가와 내 목을 끌어안았다.“그럼 너 혼자 여기서 지내. 난 선영이 데리고 영화 보러 갈 거야.”“그러던가.”현성은 내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고 기분 나빠하고 있었다. 다만 이 기회에 주선영과 함께 영화를 보고 나서 호텔 방 하나 잡아...현성은 생각할수록 기뻤다.원래는 이곳에 돌아와서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현성 이 자식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친구를 바로 버렸다.현성이 주현영을 데리고 가는 바람에 집에는 또 나 혼자 남았다. 그 순간 기분 나쁜 일들이 물밀듯 밀려왔다.하지만 내가 질투할 자격이 있을까? 나와 백연우는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백연우가 누구를 만나든
때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사장님 말씀대로 할게요. 우리 화인당과 천수당이 힘을 합쳐 사업을 더 크게 발전시켜 봐요.”“하하. 나도 바라던 바야. 앞으로 화인당에 정형외과 환자가 있으면 천수당을 추천할게. 그쪽에도 마사지를 원하는 고객이 있으면 우리 화인당을 추천해.”마침 정 사장님과 뜻이 맞아 나는 무척 기뻤다.나는 얼른 사장님의 손을 잡고 말했다.“사장님. 우리가 힘을 합치면 분명 이 업계를 점점 더 잘 발전시킬 수 있을 거예요.”그때 유미 사모님이 옆에서 농담조로 끼어들었다.“두 사람 너무 친한 거 아니야? 보는 내가 다 부럽네.”나는 머쓱해서 사장님 손을 바로 놓아주었다.“사장님, 사모님. 일찍 쉬세요. 전 방해하지 않을게요.”“수호 씨, 내가 앞까지 마중해 줄게요.”사모님은 마치 나에게 할 말이 있어 보였다.아니나 다를까 문을 나서자마자 사모님은 조심스럽게 물었다.“수호 씨, 우리 그이 몸 완전히 회복된 거 맞죠?”사모님이 이 말을 할 때 얼굴부터 귀불까지 발그스름했다.그 순간 나는 사모님의 뜻을 이해했다.유미 사모님은 무척 함축적으로 물어보면서도 부끄러워했다. 사모님은 워낙 내성적이라 백연우처럼 남녀 간의 정사를 함부로 입에 쉽게 담지 못했다.나 역시 사모님이 이 순간을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지 알기에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문제없을 거예요. 자제하면서 하면 돼요.”내 말에 유미 사모님의 얼굴은 확 달아올랐다.“내, 내 말은 그게 아니라.”“사모님, 저 다 알아요. 그러니까 얼른 들어가서 사장님 돌봐드려요.”“그래요.”사모님은 기분이 좋았는지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 미소는 너무 아름답고 눈부셨다.사실 나는 사모님의 마음을 진작 꿰뚫어 봤다. 오늘 특별히 한껏 치장하고 예쁘게 화장한 것도 모자라 섹시한 옷을 입은 걸 보면 사장님을 꼬시려는 게 분명했다.사모님과 사장님 대신 내가 다 기뻤다. 사장님이 건강을 되찾았으니 사모님도 이제 더 이상 성욕을 참을 필요가 없다. 그러면 두 부부의 관계도
윤지은은 픽 웃음을 터뜨렸다.“그 말은 설마 너랑 잔 여자들이 모두 너한테 먼저 들러붙었다는 거야?”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 아닌가?애교 누나 외에 내가 먼저 꼬신 사람은 아무도 없다.물론 내가 이렇게 말하면 자기애가 넘치는 사람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내가 신들마저 공분하게 할 미모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기에 이런 말 할 자격은 없다.그때 윤지은이 갑자기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나를 봤다.“왜? 내 말에 자신감을 잃었어? 솔직히 말하면 너 확실히 잘생겼어. 게다가 선천적으로 사람을 끌어당기는 뭔가를 지니고 있어.”“그건 돈 주고 산 남자들한테서 찾을 수 없는 거야. 돈 주고 산 건 재미가 없어. 오히려 너처럼 약간 멍청한 게 사람을 더 끌리게 하지.”나는 윤지은이 오늘 밤 좀 달라 보였다. 왠지 자꾸만 나를 꼬시는 것 같았다. 물론 불장난에 휘말릴까 봐 윤지은의 뜻을 마음대로 추측할 수는 없었다.“뜬금없이 웬 칭찬이에요? 쑥스럽게.”나는 이 기회에 화제를 돌리려고 했다.그때 윤지은이 내 어깨를 살짝 꼬집었다.“그러니까 잘생긴 게 다는 아니라고. 그냥 하느님이 너한테 운을 몰아준 거야. 그러니까 나중에 후회할 짓 하지 마.”윤지은은 마지막 한마디를 하는 순간 살기를 내뿜었다. 그 눈빛과 마주친 순간 내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그 순간 나는 윤지은이 전에 했던 경고가 떠올랐다. 윤지은은 나더러 자기 친구들을 눈독 들이지 말라고 했다. 가까운 접촉은 더더욱 하지 말고.그렇다면 나와 백연우의 일은 윤지은이 절데 알게 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윤지은이 내 가죽을 벗길지도 모르니까.나는 너무 놀라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묵묵히 운전했다.윤지은을 집에 데려다준 뒤 나는 다시 사모님 댁으로 향했다.방금 친구 세 명이 모여 대화를 하는 바람에 나는 옆에서 듣기만 하느라 사장님께 한약관 얘기를 하는 걸 깜빡했다.천수당은 모레면 개업식이라 나는 하루빨리 화인당 일을 사장님께 다시 인수해야 했다.그동안 휠체어만 타고 다녀
백연우는 말하면서 내 엉덩이를 힘껏 주물렀다.이런 여자가 요물이 아니라는 게 말이 안 됐다. 사람을 어떻게 이렇게 잘 홀리는지.나는 아무것도 상관하지 않고 이대로 백연우를 안고 싶었다.“그럼 이따 학교 갈 때 배웅해 줄게요.”백연우는 내 턱에 가볍게 입 맞췄다.“이따 봐.”나는 백연우를 놔주고 화장실에서 나왔다. 하지만 하필이면 윤지은과 마주쳤다.나는 순간 도둑이 제 발 저린 듯 어찌할 바를 몰랐다.원래는 다정하던 윤지은의 눈빛은 내가 화장실에서 나오는 순간 살기를 띠었다.“이젠 내 눈앞에서 이러시겠다? 너 아주 발정 났구나?”“오해예요. 난 그저 잘 생각해 보라고 설득하려고 온 것뿐이에요. 다른 뜻은 없어요.”나는 다급히 해명했다.그러자 윤지은이 냉소를 흘렸다.“그래? 그럼 이따 나 집까지 바래다줘.”그건...“왜? 싫어? 백연우를 데려다주고 싶어?”윤지은은 우리의 대화를 들은 것 같았다. 현재로서 윤지은이 나와 백연우 사이를 아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나는 더 이상 윤지은과 관계가 악화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때문에 흔쾌히 동의했다.“그래요. 이따 바래다줄게요.”윤지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의미심장하게 웃더니 뒤돌아섰다.윤지은이 떠난 뒤 나는 다시 화장실로 들어갔다.“이따 윤지은 씨를 데려다줘야 해서 백 쌤은 데려다주지 못할 것 같아요.”“마음대로 하던가. 난 상관없어.”다행히 백연우와는 대화가 잘 통했다.나는 신속히 화장실에서 나왔다.윤지은과 백연우는 잠시 앉아 있다가 일어섰다. 백연우는 직접 운전해서 떠났고 나는 윤지은을 데려다주기로 했다.윤지은이 조수석에 앉은 순간 늘씬한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뜬금없이 물어왔다.“백연우랑 잔 적 있어?”나는 윤지은이 왜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는지 알 수 없었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도 막막했다.“대체 뭘 묻고 싶은 거예요?”나는 양심이 찔려 대뜸 물었다.그러자 윤지은이 나를 차갑게 노려봤다.“내 질문에 대답해. 다른 쓸데없는 질문하지 말고
유미 사모님과 윤지은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놀라움을 표했다.백연우는 네 명 중에서 자유를 가장 좋아하고 구속받는 걸 가장 싫어하는 사람인데, 갑자기 약혼하고 결혼까지 하겠다고 하니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윤지은은 잠깐 침묵하다가 또다시 설득했다.“나는 네가 더 생각해 봤으면 좋겠어. 너 정말 자유를 완전히 포기할 수 있어?”“내가 언제 자유를 완전히 포기하겠다고 했어? 우리 이미 합의했어. 결혼하면 각자 놀고 싶은 대로 놀기로. 승진도 하고 내가 얻고 싶은 것도 얻고, 이거야말로 일거양득 아니야?”그 말에 유미 사모님이 미간을 찌푸리며 끼어들었다.“난 영 미덥지 못한 것 같은데? 설마 너한테 사기 치는 거 아니야? 연우야, 잘 생각해 봐.”백연우는 다리를 꼰 채 소파에 등을 기댔다.“생각할 것도 없어. 내가 평생 바라는 게 딱 두 가지야. 바로 사업과 남자. 총장 아들 잘생겼어. 피부도 하얗고 점잖은 게 딱 내 스타일이야. 게다가 그런 남자가 내 승진을 도와줄 수 있다는 데 내가 땡잡은 거지.”윤지은은 아주 냉정하게 분석했다.“너도 방금 말했잖아. 한 가지를 얻으면 한 가지를 포기해야 한다고. 세상에 그렇게 좋은 일이 어디 있어? 너 그 사람 제대로 알아봐. 두 사람 결혼하면 빠져나오기 힘들어.”“나도 알아. 내 얘기는 이제 그만하자. 우리 함께 모인 것도 오랜만인데 같이 한잔해.”백연우는 바로 화제를 돌렸다.유미 사모님과 윤지은은 더 설득하려는 모습이었지만 백연우는 두 사람에게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그러다가 백연우가 화장실을 갈 때 나도 조용히 뒤따랐다.“정말 결혼해요?”“응.”백연우는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이에 나는 바로 경고했다.“나도 백 쌤 말리려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지은 씨와 사모님 말도 맞잖아요. 결혼은 작은 일이 아니에요. 신중하게 고려하세요.”백연우는 립스틱을 덧바르면서 아를 향해 눈웃음을 날렸다.“내가 결혼한다니까 아쉬워? 결혼하면 너랑 안 놀아줄까 봐?”“솔직히 아쉬운 것도 맞아요. 하지만 백
“두 분 모두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한번 시도해 볼게요.”“그럼 부탁드릴게요.”“우선 집에 바래다 드릴게요.”나는 대리를 불러 두 분을 집까지 모셔다드렸다.이다연은 어느새 집에 돌아왔는지 우리가 도착했을 때 거실 소파에서 게임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들어오는 걸 보더니 고개를 홱 돌려 제 방으로 들어가 쾅, 하고 방문을 닫아버렸다.이 선생님은 그 순간 욱해서 욕지거리를 퍼부으려고 했지만 이 사모님이 제때 말렸다.이 사모님은 이다예의 연락처를 나한테 몰래 건네주면서 할 수 있는 데까지만 해달라고 부탁했다.나는 그 연락처를 저장한 뒤 이 선생님을 위로하다가 이내 집을 나섰다.나는 사모님 댁에 들러 사잔님과 화인당 및 천수당에 관한 일을 얘기해 볼 생각이었다. 이다연에 관한 일은 나중에 시간 날 때 제대로 대화해 보면 되니까.내가 사모님 댁에 도착했을 때 집에 윤지은과 백연우도 와 있었다.두 사람은 일 때문에 식사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다가 일이 끝난 뒤 바로 달려온 모양이었다.두 사람 모두 유미 사모님과 친한 사이라 고가의 선물을 바리바리 싸 들고 왔다.“여정이 자리에 없는 게 아쉽네. 안 그러면 우리 넷이 또 모일 수 있을 텐데.”백연우는 소여정을 언급하며 아쉬워했다.임천호가 강북에 온 뒤로 소여정은 친구들과 완전히 연락이 끊겼다. 때문에 그녀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그때 윤지은은 여전히 생각을 읽을 수 없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했다.“잘 지내고 있을 거야. 임천호가 걔를 얼마나 이뻐하는데. 이제는 임천호 아이까지 낳겠다고 나섰으니 임천호가 푸대접하지 않을 건 아니야.”그 말에 백연우가 혀를 끌끌 찼다.“이것 봐. 여정이 곁에 있을 때는 그렇게 투덕대더니, 없으니까 또 걱정하네.”“누가 걱정했다고 그래? 나는 단지 사실을 말한 것뿐이야.”윤지은은 여전히 고집스럽게 인정하지 않았다.그때 백연우가 싱긋 웃으며 윤지은의 팔짱을 꼈다.“이제는 그만 인정해. 우리가 안 지 몇 년인데 누가 어
그날 임민수 내외는 모든 사람을 불러 식사를 대접했다. 그리고 식사 자리에서 나에게 술까지 권했다. 그 모습은 살짝 의외였다.“수호 군, 우리 호섭이가 이렇게 빨리 회복할 수 있었던 건 자네 공이 커. 자, 내가 한 잔 권하지.”임민수의 말에 나는 얼른 뚝딱거리며 술잔을 들어 올렸다.“어르신, 별말씀을요.”나는 솔직히 임민수가 나에게 술을 권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그때 한영심도 잇따라 일어났다.“정 선생, 나도 한 잔 권하네.”“아닙니다, 어르신.”임민수 내외의 존경을 받게 되어 나는 정말 감개무량했다.심지어 유미 사모님마저 직접 나에게 술을 권했다.“수호 씨, 나도 한 잔 올려요.”“사모님, 저만 마실 테니 사모님은 마시지 마세요.”사모님은 아직 사장님을 돌봐야 하기 때문에 나는 살짝 걱정되었다.그런데 사모님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나도 딱 한 잔만 마실 거예요. 우리 호섭 씨가 이렇게 회복할 수 있었던 건 모두 수호 씨 덕분이에요. 호섭 씨는 아직 술을 마실 수 없으니까 내가 대신 마실게요. 그러니 절대 사양하지 마요.”사모님이 이렇게까지 말하니 나는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 결국 술잔을 들어 올려 사모님의 잔과 부딪혔다.식사 분위기는 매우 화목하고 화기애애했으며 전에 있던 안 좋은 일은 모두 털어버렸다.임민수는 어찌나 기뻤는지 취할 때까지 술잔을 놓지 않았다. 심지어 내가 두 어르신을 집으로 모셔 드리겠다고 하니 기어코 필요 없다며 대리까지 불렀다.술을 마시지 않은 한지영은 봉섭 할아버지와 함께 떠났고, 이 선생님은 기분이 안 좋아 살짝 술을 들이켜더니 또 이다연을 꾸짖었다. 결국 이다연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떠나버렸고, 그 때문에 이 선생님은 또 한바탕 화를 냈다.사장님은 나더러 저와 사모님을 상관하지 말라며 대리를 부르고는, 나더러 이 선생님 가족을 데려다주라고 부탁했다.차에 올라탄 순간, 이 선생님은 결국 슬픔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보이셨다.나이도 드신 분이 서럽게 펑펑 우는 모습을 보니 나도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