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미쳤어? 대체 위로하러 온 거야? 염장 지르러 온 거야?”고수연이 말을 하기 전에 형수가 퉁명스럽게 고아연을 쏘아붙였다.그러자 고아연은 바로 이상함을 눈치챘다.“큰언니, 이상한데? 나 지금 작은 언니랑 말하는 건데 언니가 왜 흥분하고 그래? 누가 언니를 말했어?”고수연도 형수를 바라봤다.하지만 형수는 큰언니다운 카리스마를 보여주며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보긴 뭘 봐? 너도 쟤랑 똑같이 굴려고 그래?”고수연은 이내 도리질했다.그 틈에 형수는 바로 화제를 전화했다. 그제야 나도 따라서 한숨을 돌렸다.“형수, 저 담배 좀 사올게요.”나는 이 위험한 곳에서 한시 빨리 도망치고 싶었다.여자 셋 모인 곳에서 무슨 꼴을 당하려고, 이 곳에 계속 있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내가 집을 나서자 마자 형수가 문자를 보내왔다.[수호 씨는 볼 일 보러 가요. 여기는 일은 신경 쓸 거 없어요.]나는 곧바로 형수의 말뜻을 알아차렸다.형수는 셋째 동생이 나를 귀찮게 할까 봐, 나를 얼른 다른 곳으로 보내 버리려는 모양이었다.나는 형수에게 답장을 보내고 근처 가게에서 아침식사를 했다. 그러고는 국민 공원에서 런닝을 하려고 결심했다.아직 몸이 다 낫지 않아 격렬한 운동은 할 수 없기에, 나는 결국 반 바퀴만 뛰고 반 바퀴는 걸었다. 그런데도 온몸은 땀에 흠뻑 젖었다.벤치에 앉아 쉬면서 시간을 보니 벌써 아침 9시였다.출근하지 않는 것도 참 지루했다. 그러고 보니 매일 출근해서 바삐 보내는 것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나는 결국 정 사장님께 전화했다.“사장님. 저 오후에 출근하고 싶어요.”[수호 씨 팔 다친 거 아니었어? 집에서 쉬면서 몸조리하고 와.]“저 한쪽 팔만 다쳤어요. 다른 한쪽 팔은 움직일 수 있어요. 집에 있는 게 너무 심심해서 출근하는 게 더 나은 것 같아요. 마사지는 못해도 다른분께 도움은 드릴 수 있잖아요. 저 돌아가게 해주세요.”정 사장님은 내가 계속 고집하자 결국 마지 못해 동의했다.[그래, 뭐. 와서 약 짓는 거 도와줘. 이
왕정민이 나한테 잘해주는 건 의도가 있어서고. 하지만 유독 정 사장님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나에게 잘해준다.“찾을 거 없어. 내가 알아서 먹을게.”정 사장님의 말에 나는 강경하게 대꾸했다.“안 돼요. 드시는 거 직접 봐야겠어요. 역시 이 선생님 말씀이 옳았어요. 사장님은 다 좋은데, 본인 건강을 너무 신경 쓰지 않아요. 이러다가 못 버티면 어쩌려고요?”나는 말하면서 마침내 약을 찾아냈다. 이윽고 모든 약을 준비해서 정 사장더러 내 앞에서 먹으라고 강요했다.그러자 정 사장님은 허허 너털웃음을 지었다.“수호 씨도 참. 내가 어린 애로 보네?”“어린 애로 보는 게 아니라 친형처럼 대하는 거예요. 정 사장님, 사장님은 저한테 잘해주시고, 제 인생에 둘도 없는 귀인이세요. 전 사장님한테 무슨 일이 있는 걸 원하지 않아요.”“그 정도 아니야. 오버하지 마. 내 병은 약 안 먹으면 도졌다가 약 먹으면 바로 나아.”정 사장님은 설명을 덧붙이더니 내 앞에서 약을 먹었다.나는 문뜩 궁금해졌다.“사장님 대체 어디가 안 좋은 거예요?”“간.”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깜짝 놀랐다.간질환은 치료가 쉽지 않다.“뭐예요? 간염 바이러스예요? 혹시 B형 간염이예요?”“간암.”정 사장님은 청천벽력 같은 말을 아무렇지 않게 툭 내뱉었다.그 말은 순간 칼처럼 내 가슴을 찔렀다.정 사장님처럼 좋은 사람이 어쩌다 이런 병에 걸린 건지?간암은 완치할 수 없다. 그저 약물로 연명할 수밖에는.이렇게 젊고 좋은 사람에게 하늘은 왜 이렇게 무심한지.나는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하지만 정 사장님은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수호 씨, 왜 그래? 아픈 사람은 난데, 수호 씨가 왜 울어?”“너무 슬퍼서요. 사장님처럼 좋은 분이 어쩌다 이런 병에 걸렸어요?”나는 커다란 돌덩이를 삼킨 것처럼 마음이 좋지 않았다.다만 정 사장님은 아무렇지 않은 듯 계속 미소를 유지했다.“사람이 늙고 병들어 죽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난 오히려 늙어 죽든 병 들어 죽든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한은솔이었다.‘두 사람 아직도 연락하고 있던 거였어?’모태진은 내 눈치를 보더니 한은솔에게 달려갔다.“은솔아 왜 그래? 얼굴은 왜 그 모양이고?”한은솔은 흐느끼며 말했다.“아, 아무 일도 아니에요. 제가 실수로 넘어진 거예요. 저 휴학계 냈어요. 내일 고향으로 내려가요.”“무슨 일인데 그래? 왜 갑자기 휴학하는데? 내 아내가 너희 학교까지 찾아갔어?”한은솔은 마구 도리질했다.“아니요. 그분 때문 아니에요.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모 선생님한테 매달리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동안 보살펴 주셔서 감사해요. 다음생이 있다면 우리 부부로 만나요.”한은솔은 말을 마치자마자 울며 뛰쳐나갔다.모태진은 얼른 그 뒤를 쫓았다.그 모습을 본 정 사장님은 나를 얼른 따라 나가보라고 내보냈다.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얼른 두 사람을 쫓아 나갔다. 하지만 내가 나왔을 때, 두 사람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결국 나는 이곳저곳 목적 없이 떠돌며 두 사람을 찾으려고 애썼다. 그러다 얼마나 걸었을까? 한은솔이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나는 한은솔이 아무리 같은 학교 후배라도 그녀에게 별로 호감이 없었다.꽃다운 소녀가, 그것도 배운 게 있는 여대생이, 매일 유부남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는 게 대체 뭐 하자는 건지.하지만 당장 숨 넘어갈 듯 흐느껴 우는 모습을 봤는데 거기에 대고 뭐라 할 수는 없었다.“그만 울고 눈물 닦아.”그때 한은솔이 갑자기 내 품에 와락 안기는 바람에 내가 오히려 벙쪄버렸다. 그녀는 내 목을 끌어안고 억울한 일이라도 당한 듯 서럽게 울었다.문제는 너무 꽉 끌어안은 바람에 내가 도저히 숨을 쉴 수 없었다.나는 얼른 왼손으로 한은솔의 등을 두드렸다.“야, 이거 놔. 사람 목 졸라 죽일 셈이야?”한은솔은 그제야 천천히 손을 풀더니 붉게 물든 눈으로 나를 봤다.“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저 진짜 너무 슬프고 괴로운데 모 선생님 찾아갈 엄두가 안 나요. 이제 더 이상 모 선생님께 폐 끼치고
한은솔의 말에 나는 순간 웃음이 터졌다.“돈 많은 남자가 호구인 줄 알아? 그런 양아치한테 굴려질 대로 굴려진 너를 돈 많은 남자가 왜 좋아하겠어? 낙태 경험만으로도 너는 진작 그 사람들 블랙리스트에 올랐을 거야. 너도 어쩔 수 없어서 선배 선택한 거잖아.”나는 이렇게 계략적인 여자의 체면까지 봐줄 생각은 없다. 그저 한은솔이 눈치 빠르게 모태진 옆에서 꺼져 주기를 바랄 뿐이다.하지만 한은솔은 계속 고개를 저으며 내 말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아니에요. 난 그런 사람 아니에요. 난 정말 그런 사람 아니라고요...”나는 순간 짜증이 확 밀려왔다.“그런데 왜 여기서 나를 기다렸어? 나를 노린 거 아니라고 할 수 있어? 선배가 안 넘어오니까 목표를 바꾸려던 거잖아. 내가 마침 선배랑 친하고 솔로라서 네 다음 목표로는 딱이었던 거잖아. 맞지?”한은솔의 표정은 점차 변했다. 눈에 드리운 원망이 점점 짙어졌고 나에 대한 미움이 커졌다.“왜 나를 그렇게 나쁘게만 생각해요? 다 같은 시골 출신에, 다 어려운 상황인데 같은 좀 도와주면 안 돼요?”“너 진짜 뻔뻔하구나? 계략이 들통나니까 이제는 도덕의 잣대로 사람을 강요해? 태진 선배는 사람이 너무 성실하고 우직해서 너한테 완전히 놀아났지만, 난 달라. 내 앞에서 그런 잔꾀 부리지 마.”나한테 이런 수법은 전혀 먹히지 않는다.나는 얼른 한은솔의 몸을 수색했다.“왜 이래요? 손 대지 마요. 저리 가요!”얼마 뒤, 나는 한은솔 몸에서 콘돔 한 박스를 찾아냈다.나는 그 콘돔을 한은솔 앞에 내밀며 입가에 냉소를 지었다.“이건 네가 미리 준비한 거잖아. 여기 오기 전에 이미 계획했을 테니까. 태진 선배를 손에 넣을 수 있으면 원래 계획대로 가고, 실패하면 목표를 바꾸려고. 그런데 내가 네 속내를 꿰뚫어볼 거라는 건 몰랐겠지. 이제 어떻게 할지 궁금해지네.”나는 차갑게 웃으며 콘돔 박스를 한은솔 품에 던졌다.그 순간 한은솔은 두꺼운 가면을 벗어 던지고 본 모습을 드러냈다.“내가 정말 그쪽을 과소평가했네
나는 여자가 같이 자자고 하는 게 이렇게 구역질 나기는 처음이었다.위에서부터 토기가 밀려왔고, 세계관이 뒤틀려 괴로웠다.“너 정말 역겨워.”말을 마친 나는 얼른 뒤돌아 자리를 피하려 했다.그런데 한은솔이 갑자기 달려와 나를 와락 껴안았다.“변태야! 이 사람이 저 추행했어요...”방귀 낀 놈이 성낸다더니 한은솔이 딱 그 짝이었다.그때 마침 모태진의 실루엣이 점점 가까워졌다.나는 순간 아차 싶었다.한은솔은 모태진 앞에서 연기하는 게 목적이었던 거다.모태진은 황급히 달려와 나를 떼어놓더니 한은솔의 안부를 물었다.그 모습을 본 순간 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 틈에 한은솔은 나를 향해 승리자의 미소를 날렸다. 마치 내 앞에서 자랑이라도 하듯이.‘내가 저런 여자한테 당했다니. 저런 여자한테!’나는 열불이 나 미칠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아무 말이나 막 하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증거도 없이 지껄이면 모태진은 나를 믿지 않을 테니까.결국 나는 뒤돌아 자리르 떠나려 했다. 짜증나는 일이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편해지겠지 하는 생각으로.안 그러면 이곳에서 화병만 더 얻을 것 같았다.하지만 내가 떠나려 할 때, 한은솔이 갑자기 나를 불러 세웠다.“정수호 씨, 나를 추행하고 그냥 가버릴 생각이에요?”‘뭐?’‘젠장. 오히려 내가 참고 따지지 않은 건데. 이 여자가 진짜 한도 끝도 없네?’“내가 언제 그쪽을 추행했지? 나한테 덮쳐온 건 그쪽인 것 같은데...”“모 선생님, 저 사람 지금 저 모함하는 거예요! 아까 선생님이 안 계실 때 저 사람이 제 몸을 더듬었어요. 그리고 예전부터 진작 저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고 했어요.”“저것 봐요. 저런 것도 다 사놓고 나랑 같이 가서 방 잡자고 했어요. 모 선생님, 선생님은 제 편 들어줘야 해요. 흑흑흑...”한은솔은 말하면서 흐느껴 울었다. 그 모습은 정말 최고 여배우가 따로 없었다.“태진 선배. 그 여자 지금 거짓말하는 거예요. 이 콘돔은 그 여자가 준비한 거예요. 그 여자가
오민혁은 내 공격 적인 말투에 나를 사납게 노려보더니, 그 뒤로는 아예 나와 말도 섞지 않았다.오전은 아주 빠르게 흘러갔다.점심 시간, 나는 혼자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예전에는 항상 모태진과 함께였는데 갑자기 혼자가 되니 너무 외로웠다. 하지만 한편으로 좋았다. 적어도 사람들의 오해를 사지 않을 테니까.식사하는 내내 나는 핸드폰을 보지 않았다. 고민거리를 생각하느라고.그러다 밥을 다 먹은 뒤에야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읽지 않은 카톡 몇 개가 있어 일일이 확인했더니, 그 중에는 친구 신청 알람도 있었다. 비고에는 소여정이라고 적혀 있었다.전에 소여정 때문에 정태곤한테 죽을 뻔한 뒤로 나는 소여정의 연락처를 지워버렸다. 앞으로 그녀와 더 왕래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그때 소여정은 다시 나를 추가하지 않았는데, 며칠이 지난 지금 갑자기 친구 신청을 하는 게 대체 무슨 속셈인지 알 수 없었다.나는 한참 생각하다가 거절을 눌렀다.그러자 곧바로 소여정한테서 문자가 날아왔다.[한 번만 더 거절해 봐. 강북으로 찾아갈 테니까.]협박 섞인 문자에 나는 겁을 먹었다.‘또 강북으로 오겠다고? 임천호가 이번엔 나를 죽이려고 할 텐데.’나는 얼른 친구 신청을 수락하고 문자를 보냈다.[절대 오지 마요. 임천호의 경호원이 너무 무서워요. 내가 그쪽과 엮여 있다는 걸 알면 분명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나를 죽일 거라고요.][죽는 게 그렇게 두려워?][뭘 당연한 소리예요? 죽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난 두렵지 않아. 난 자유만 주어진다면 죽어도 좋아.][쳇, 그런 헛소리를 누가 믿어요? 그나저나 여기로 오겠다면 임천호가 동의해요?][당연하지.][무슨 방법으로 동의를 받아냈는데요?][아이를 낳아주겠다고 했어.]‘헐. 이게 뭔 요구람?’[그런데 내 몸 상태가 좀 특이해서 당분간은 임신할 수 없어. 그래서 강북에 가서 수호 씨한테 치료받으려는 거지.]그 말에 나는 얼른 답장했다.[다른 사람 알아봐요. 난 소여정 씨 병을 못 고쳐
어느 한 별장 안.소여정은 등 뒤에 서 있는 정태곤을 바라봤다.“예뻐?”정태곤의 눈빛은 약간 부자연스러웠다.“소여정 씨, 저 일부러 본 거 아닙니다. 임 회장님이 저더러 감시하라고 한 겁니다.”“알아. 내가 예쁘냐고?”소여정은 정태곤을 향해 눈을 깜빡였다.그 순간 정태곤은 얼른 시선을 돌렸다.소여정은 키득키득 웃었다.“참, 지금 꼴이 어떤 줄 알아? 다른 사람 앞에서는 카리스마 있더니 왜 내 앞에서는 바보처럼 굴어?”소여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걸어 갔다.“내 가운 가져와. 나 샤워할 거야. 오후에 바로 강북으로 넘어갈 거거든.”소여정은 앞으로 걸어가다가 욕실 문 앞에서 우뚝 멈춰 섰다. 그러더니 고개를 돌려 정태곤을 향해 싱긋 웃으며 말했다.“설마 너도?”소여정 뒤에 있는 욕실을 본 순간, 무뚝뚝하기만 하던 정태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소여정 씨, 그런 농담하지 마세요. 소여정 씨는 임 회장님 여자인데, 제가 어떻게 같이 씻을 수 있겠어요?”“무슨 생각 하는 거야? 너도 강북 같이 갈 거냐고.”정태곤은 순간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다급히 해명했다.“당연하죠. 임 회장님 명령입니다.”“넌 가만 보면 실력은 꽤 쓸만한데 공감력과 지능이 좀 딸리더라.”소여정은 말하면서 정태곤 앞에서 옷을 훌훌 벗어버렸다. 일순 그녀의 가녀린 몸매가 여과 없이 드러나자 정태곤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소여정은 욕실로 들어가며 느긋하게 말했다.“임 회장님이 너더러 나를 보호하라고 한 게 핑계라는 거 알아. 진짜 목적은 감시겠지.”“하지만 그렇게 티를 내면 안 되지. 임 회장님 같은 사람과 일하려면 실력만으로는 안 돼. 머리가 있어야지. 머리를 좀 더 단련해. 안 그러면 언젠가 임 회장님한테 밉보일 거야.”정태곤은 놀라운 표정으로 소여정을 바라봤다.“소여정 씨, 설마 지금 저를 위해 말씀하시는 거예요?”소여정은 매혹적인 미소를 날렸다.“그러게? 뭘까? 얼른 가서 가운 안 가져오고 뭐 해?”정태곤은 헐레벌떡 침실로 달려가 가운을
“참, 너 내일 시간 있어?”“별일 없는데. 아마 또 가게에서 잔심부름이나 할걸. 무슨 일인데? 말해.”“설아 때문에 그래. 내가 전에 설아를 데리고 병원에 가보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일 때문에 바빠서 아직도 못 갔거든. 네가 시간 있다면 대신 좀 데려가줄 수 있어? 점검이라도 받아보게.”이 일을... 나는 승낙할 수 없었다.물론 내가 민우와 친하다고는 하지만, 임설아는 민우의 여자 친구인데, 남의 여자 친구를 데리고 산부인과에 검사하러 간다는 건 말이 안 된다.때문에 나는 단번에 거절했다.그러자 민우가 내 팔을 잡아당겼다.“수호야. 나 좀 도와줘. 나 정말 일 때문에 시간 안 나서 그래. 하루 휴가 내면 몇 만 원을 손해보는데. 아까워서 그래.”“앞으로 시간도 많은데 급할 거 뭐 있어? 네 여자 친구는 네가 돌봐야지, 나더러 대신 돌봐달라는 건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나는 이번 일은 절대 승낙할 수 없다고 속으로 다짐했다.하지만 민우가 갑자기 내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네가 가면 설아 엄마도 따라 갈 거야. 그날 내가 임설아 집에 따라 갔다가 설아 엄마한테 병에 대해 물어봤거든. 그런데 설아 엄마가 이를 악물면서 꼭 너를 만나고 싶다더라.”“헐, 그런 건 왜 물어?”나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도 그럴 게, 나는 그날 나와 대화한 사람이 임설아 엄마가 아니라 임설아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미래 장모님이 될 분을 처음 만나는데, 잘 보여야 하지 않겠냐? 미래 사위가 얼마나 능력자인지 보여줘야지.”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이윽고 나는 머리를 마구 저었다.“그럼 더 갈 수 없어. 네 여자 친구 엄마가 나와 그렇게 사적인 얘기를 주고받았는데, 내가 갈 것 같냐? 만나면 우리 모두 쥐구멍에 들어가야 돼.”“아닐 거야. 내 미래 장모님은 말이 엄청 잘 통해.”“누구를 속여? 아까 이를 악물며 말했다면서?”민우는 제 말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내가 말실수했네. 그래도 너를 꼭 보고싶다고 했어. 우리 여기에 직접 올
어쩐지, 방 2개에 거실 하나 딸리고 이렇게 깨끗한 집이 한달에 22만 원일 리가 있나?“젠장.”나는 화가 나서 욕설을 퍼붓고는 당장 집주인한테 전화했다. 하지만 집주인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주선영은 전전긍긍하며 나를 봤다.“선배, 나랑 같이 사는 게 싫으면 내가 나갈게요. 그런데 오늘 밤만 우선 여기 있으면 안 될까요?”주선영의 불쌍한 모습을 보니 도저히 쫓아낼 수 없었다.이건 집주인 잘못이지 주선영 잘못이 아니었으니.게다가 주선영은 애교 누나 사촌동생이고, 단순하고 여린 아이인데, 혼자 밖에서 지내다가 사기를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이런 게 바로 인연인가 보다.“됐어. 그냥 여기서 지내. 마침 방도 2개니까 하나씩 나눠 쓰면 되지. 넌 낮에 학교 가고 나는 출근해야 하니까 밤에만 지낼 거잖아.”말을 마친 나는 소파에 앉아 물 한 잔을 들이켰다.주선영은 약간 쭈뼛하게 서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왜 그래? 또 무슨 일 있어?”주선영은 입을 오므리고 약간 겁먹은 듯 물었다.“선배, 우리 언니랑... 정말 결혼할 거예요?”“꼬맹이는 어른 일에 신경 꺼.”나는 마치 인생 대선배라도 되는 듯 나이를 내세워 위세를 부렸다.“그리고, 우리도 서로 아는 사이인데 내 앞에서 그렇게 눈치 볼 거 없어. 너도 돈 내고 이 집 구한 거니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주선영이 어색하게 구니 나도 덩달아 어색해졌다.마치 나 때문에 주선영이 긴장한 것 같아서.나는 자리에 앉아 있다가 결국 물 한잔을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내가 거실에 없으면 주선영이 그나마 편히 있겠지 하는 생각으로.얼마 뒤, 밖에서 쨍그랑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뭐야? 남자를 무서워하기라도 하나?’나는 별 생가 없이 계속 자료를 훑었다.그렇게 한참 훑어 보다 보니 갑자기 애교 누나가 보고 싶어졌다.‘누나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한참 생각하던 나는 결국 애교 누나에게 문자를 보냈다.그런데 의외로 애교 누나는 바로 답장을 보내왔다.[수호 씨,
“어? 이 사람...”왕정민의 이름을 보자마자 나는 진절머리 난다는 표정을 지었다.그러자 윤미화가 눈웃음 치며 물었다.“왜? 아는 사람이야?”“그렇다고 할 수 있죠.”“마침 잘 됐네. 그럼 이번 일 잘해낼 수 있을 거야. 이건 수호 씨가 탐정 사무소에 들어와서 처음 맡는 임무니까 잘해 봐. 만약 결과가 좋으면 보너스도 두둑히 챙겨줄게.”“됐거든요. 저를 함정에 빠뜨리지만 않으면 땡큐예요.”나는 지난번 계약서에 사인하던 날을 아직도 똑똑히 기억한다. 이게 웬 횡재냐 하고 사인했더니 인신매매 계약서였다.그때 단번에 1000만 원을 주지 않고, 평소에 팁을 줄 때 관대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었다면 나는 진작 그만뒀을 거다.“이 자료들은 돌아가서 잘 연구해 봐. 사흘 내로 고객이 원하는 자료를 손에 넣으면 돼.”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어요.”윤미화는 갑자기 테이블에 엎드려 가슴을 쭉 내밀었다.“한동안 나 못 봤는데, 보고 싶지 않았어?”“...”“사장님, 좀 진지해지면 안 돼요?”나는 너무 어이없었다.윤미화는 테이블 밑에서 하이힐로 나를 걷어찼다.“내가 언제는 뭐 안 진지했어? 누나도 아직 매력 있다는 걸 보여주려고 그런 거잖아.”“네, 매력 있어요. 됐죠?”말을 마친 나는 얼른 자료를 챙겨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윤미화가 나를 놀리고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게 오히려 무서웠다. 정말 윤미화의 유혹에 넘어가 아랫도리가 반응하면 나만 고생 아닌가?나는 커피숍에서 나온 뒤 곧장 주차장으로 향했다.원래는 유미 사모님께 연락이라도 드리려고 했는데, 지금 바쁠 것 같아 문자를 남겼다. 내가 필요하면 언제든 전화하라고.그 문자를 보낸 뒤 나는 얼른 집으로 향했다.시간이 늦어 나는 집에서 대충 허기를 채우고 자료를 살펴봤다.솔직히 나는 왕정민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다. 그 인간이 얼마나 계략적이고 간사하고 악랄한지만 알뿐.자료에 나온 내용은 한정적이어서 철저히 조사하려면 시간이 걸린다. 그런데 내가 자료를
정태곤은 그제야 우뚝 멈춰섰다.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오늘은 그냥 넘어갈게. 운 좋은 줄 알아. 하지만 다음번에 만나면 이렇게 운 좋지 않을 거야.”정태곤은 말을 마친 뒤 뒤돌아 다시 병실 문 앞을 지켰다.나는 그 틈에 얼른 병실 문 앞을 떠났다. 심지어는 아예 병원에서 나왔다.정태곤과 한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불편했으니까.병원을 나온 뒤에야 나는 비로소 긴 숨을 내쉬었다.하지만 문뜩 내가 너무 겁쟁이처럼 행동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이런 일만 있으면 도망치기나 하고. 양동준의 기세를 따라배우기는커녕 반대로만 하고 있었다.문제는 기세와 배짱은 하루아침에 단련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건 오랫동안 쌓아야 하고 실력이 받쳐줘야 한다.나는 아직 충분한 경험이 없고 능력도 부족하다. 그러니 기세가 있는 게 이상하지.“하!”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릴 때 왜 무술을 배워두지 않았는지 후회됐다.내가 만약 어릴 때부터 무술을 배웠다면 정태곤을 무서워할 리 없었을 텐데.내가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익숙한 차 한 대가 내 앞에 천천히 멈춰 섰다.이윽고 윤미화가 차에서 내렸다.윤미화는 윤미 사모님의 사촌 언니다. 때문에 사장님을 뵈러 온 것 같았다.“윤 사모님...”“사모님은 무슨. 사장님이라고 불러.”윤미화는 내 말을 잘라버렸다.그러고 보니 윤미화에게 속아 얼떨결에 탐정 사무소에 들어가 지금은 윤미화 부하가 됐다는 게 떠올랐다.나는 얼른 호칭을 바꿨다.“윤 사장님. 사장님도 정 사장님 보러 오셨어요?”“응.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달려왔어. 호섭 씨는 지금 어때?”“잠시는 안정됐지만 의사 선생님 말로는 재발할 가능성이 있대요.”“그래, 알았어. 나 잠깐 들어가 볼테니까 먼저 가지 마. 여기서 기다려. 할 말 있으니까.”윤미화는 말을 마친 뒤 급히 병원으로 들어갔다.그러다 약 10분 뒤, 윤미화는 다시 병원을 나왔다.“안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비집고 들어갈 수가 없네. 유미랑 두
윤지은은 두 어르신을 훈계하고는 바로 병실을 나섰다. 그러고는 벽에 기대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왜 그래요?”‘이까는 그렇게 위풍당당하더니 왜 갑자기 이러지?’윤지은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유미가 걱정돼서. 만약 호섭 씨가 정말 없으면 유미는 어떡해?”윤지은은 항상 이렇다. 말은 사납게 하면서 마음은 누구보다 약하고, 겉으로는 차갑게 굴면서 모둔 누구보다 친구를 진심으로 걱정한다.나는 이런 윤지은을 뭐라 해야 할지 몰라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그때 윤지은이 갑자기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 나는 온몸이 불편했다.“왜 그렇게 봐요? 내 얼굴에 뭐 있어요?”윤지은은 싸늘하게 나를 노려봤다.“경고하는데, 호섭 씨가 어떻게 되든 유미는 넘보지 마. 만약 유미마저 넘보면 내가 너 죽일 거야!”“헉, 대체 나를 뭐라고 생각한 거예요? 정호섭 씨는 내 사장님이에요. 나한테 평소 얼마나 잘해줬는데, 내가 어떻게 그분 아내를 넘보겠어요?”나는 윤지은이 나를 이렇 사람으로 생각했다는 게 화가 났다.‘이 여자 마음속에 나는 항상 이렇게 비열한 사람이었나?’윤지은은 여전히 냉랭한 표정이었다.“안 그렇다면 다행이고! 만약 정말로 그런다면, 내가 너 아주 처참하게 죽여줄 거야.”나는 화가 치밀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윤지은 눈에 나는 항상 짐승인가 보다. 잠시 뒤, 백연우도 도착했다.백연우와 윤지은은 계속 윤미 사모님 곁에 같이 있어줬다. 사모님도 두 친구의 위로 덕에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병실에 사람이 너무 많은 탓에 들어가도 있을 곳에 없어, 나는 아예 문 밖에 앉아 있었다.그러다가 오후 4, 5시쯤 되니 소여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에 정태곤도 있었다.소여정은 나를 아는 체할 새도 없이 병실에 들어가 친구들을 찾았다.정태곤은 밖에서 말없이 지켰다.나 역시 밖에 있었다.우리는 시선이 서로 맞물렸다. 정태곤의 싸늘한 눈빛을 보니 머리털이 쭈뼛 곤두서는 것 같았다.이 사람과 한 공간에 있기만 하면 나는 온몸이 불편하다. 나는 결국 떠
두 사람은 내 말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제야 분위기도 약간 풀어졌다.“그래. 그만 울자고. 다 큰 어른이 울기나 하고 쪽팔리지도 않나?”이 선생님이 먼저 웃음을 터뜨리며 정 사장님 눈물을 닦아주었다.이 선생님은 정 사장님을 마치 아들 대하듯 대했다.우리가 한창 얘기를 하고 있을 때 두 줄기의 그림자가 급히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두 사람은 화려한 옷차림에 약 50대 정도 돼 보였는데, 병실에 들어오자마자 정 사장님 침대 쪽으로 달려갔다.“호섭아, 어때? 많이 아파?”먼저 말을 꺼낸 여성분은 눈물을 떨구고 있었다.이윽고 뒤에서 유미 사모님이 헐레벌떡 달려 들어왔다.“아빠, 엄마...”유미 사모님은 참지 못하고 흐느꼈다.두 사람은 유미 사모님 부모님이었다. 동시에 정 사장님 장인 장모이자 양부모이기도 했다.두 분은 정 사장님을 친아들 대하듯 아꼈다.솔직히 정 사장님도 그렇게 사랑을 받을 자격이 충분했다.나는 이렇게 다정한 남자를 본 적이 없다. 가족을 대할 때도, 주변 사람을 대할 때도, 그리고 낯선 사람을 대할 때도.정 사장님은 따뜻한 햇살 같은 분이라 함께 있는 사람이 아무리 차가운 사람이라도 결국에는 사르르 녹아버린다.하지만 그렇게 좋은 사람이 하필 간암에 걸렸다니. 유미 사모님의 어머니는 펑펑 울었고, 아버지 역시 정 사장님이 걱정되는 듯 어디 아픈지 계속 물어봤다.정호섭은 처음으로 이렇게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는 것도 마음 아픈 일이라고 생각했다.병실 안 분위기는 점차 침울해졌다. 이러다가 모든 사람이 너무 울어 눈이 팅팅 부을지도 몰랐다.나도 그런 감정에 물 들어 점차 자신감이 사라졌다. 결국 나는 바람 쐬러 병실에서 나왔다.예전에는 죽음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다. 항상 내가 젊다고 자부했고 아직 살 날이 많다고 거만하게 생각했으니까.하지만 짧은 몇 시간 동안 나는 죽음이 우리 가까이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특히 내 주변인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니 그 감각은 배가 되어 다가왔다.나는 가슴이 뭉클해 참을
나는 애써 참으려고 했다.어쨌든 여자 아이가 이 선생님을 따라온 걸 보면 선생님 딸일 수 있었으니까.나와 이 선생님은 사이가 좋은데, 내가 여자 아이를 꾸짖으면 여자 아이 체면도 깎일 뿐만 아니라 이 선생님도 난처해진다.하지만 여자아이는 점점 더 심해졌다. 심지어 게임을 놀면서 언성을 높였다.“가운데, 가운데라잖아... 젠장. 게임 할 줄도 몰라? 등신...”목소리만 크면 모를까, 욕설까지 섞여 있었다.그 순간 정 사장님 얼굴에 그늘이 졌다.정 사장님은 점잖고 신사적인 분이라 한 번도 욕을 입에 담은 적이 없다.그런데 지금 사장님 상황이 이 지경인데, 여자아이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예의 없이 구는 건 너무했다.내가 뭐라고 말하려고 할 때, 이 선생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이다연, 당장 나가! 호섭 오빠 아픈 거 안 보여? 이런 상황에서 게임을 하고 있다니, 양심이 있기는 해?”이다연은 동의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내가 몇 마디 위로한다고 병이 낫는 것도 아니잖아요? 쳇.”이 선생님은 화가 나서 손을 휘두르며 여자 아이에게 걸어갔다.그러자 선생님 아내분이 얼른 막아섰다.“여보, 여기 병원이야. 그러지 마. 다연아, 넌 그만 나가 봐.”이 선생님 아내분은 난감한 듯 말했다.그러자 이다연은 콧방귀를 뀌며 나가버렸다.그 모습에 화가 난 이 선생님은 눈시울이 붉어졌다.“나는 그래도 평생 정직하게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저런 걸 나았는지 모르겠다.”말하면 말할수록 이 선생님 눈은 점점 더 붉어졌다.그러자 이 선생님 아내분이 얼른 그를 위로했다.나 역시 이 선생님께 다가가 위로했다.“이 선생님, 화 푸세요. 사장님도 계시잖아요.”이 선생님은 사장님의 건강 상태를 고려해 황급히 미소를 쥐어 짜냈다.“호섭아, 미안하다. 애가 참 철이 없어. 그러니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정 사장님은 싱긋 미소 지었다.“괜찮아요. 게임 싫어하는 애가 몇이나 돼요? 스승님도 앞으로 다연이를 너무 나무라지 마요. 의학을 배우기 싫어하면 너
‘하!’“수호 씨.”한창 감개무량해하고 있을 때, 사장님이 갑자기 불러 나는 얼른 병상 앞으로 다가갔다.“수호 씨, 앉아 봐. 나 할 얘기 있어.”나는 얼른 의자를 끌어와 자리에 앉았다.“사장님, 할 말 있으면 하세요. 제가 꼭 최선을 다해 들어드릴게요.”사장님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그렇게 심각한 거 아니야. 그냥 수다나 좀 떨까 해서 그래. 이런 병에 걸리고 나서도 사실 항상 좋게 생각했었어. 내가 기쁜 마음을 유지하면 병마도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그런데 병들어 쓰러지면 모든 게 무너진다고, 정말 쓰러지니까 내가 이제 곧 죽겠구나 실감이 오더라.”“나 어릴 때부터 고아였어. 장인어른이 나를 입양해서 키워주다시피 했지. 나랑 우리 아내도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서 사이가 늘 좋았어.”나는 조용히 사장님의 말을 귀담아들었다.“난 어릴 때부터 하느님이 나한테 참 후다고 생각했어. 장인어르신네 가족을 만나고 따뜻한 집을 얻었으니까. 내 아내도 어릴 때부터 나한테 잘해줬는데, 크고 나서 결국 부부의 연을 맺게 됐지.”“만약 내가 계속 이렇게 행복했다면 난 아마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남자였을 거야. 그런데 어릴 때 행운을 다 써버리는 바람에 지금 액운이 닥쳤는지 모르겠어. 하늘은 참 공평하더라고. 모든 걸 다 주지는 않아.”“그래서 난 한 번도 내가 왜 이런 병에 걸렸을까 원망한 적 없어. 곧 죽는다 해도 자연스러운 거라고 생각했어. 사람은 언젠가 죽게 되니까. 하지만 아까 의식을 잃고나서 많은 걸 생각했는데, 내가 떠나면 내 아내는 어쩌지 하는 걱정이 맨 처음 들더라고.”“수호 씨, 나 갑자기 죽기 싫어졌어. 살고 싶어. 아직 내 아내랑 아이를 낳지 못한 게 내 인생에서 가장 큰 한이야. 난 아내와 백년해로하고, 아이도 많이 낳고 싶어.”사장님은 말하다가 끝내 눈물을 흘렸다.그 모습을 보니 나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역시나 죽음을 태연하게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세상에 태어난 이상, 걱정되는 사람과 일이 없을 리 없다.
사모님은 앞으로 나가고 싶었지만 그럴 엄두를 내지 못했다.사모님이 지금 겁먹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나는 먼저 앞으로 걸어 나갔다.“의사 선생님, 환자분 상태는 어떤가요?”“다행히 병세는 진정된 상태입니다.”의사의 말에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사모님은 너무 기쁜 나머지 입을 막고 엉엉 울었다.방금 전까지 잘 참고 있는 듯했는데, 긴장이 풀리니 감정을 주체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애처롭고 가련하게 우는 사모님을 보니 왠지 안쓰러워났다.얼마 뒤, 정 사장님은 응급실 밖으로 밀려 나왔다.사모님은 단숨에 그 앞으로 달려갔다.“호섭 씨, 호섭 씨...”“사모님, 사장님은 아직 혼수상태태예요. 이따가 정심 차릴 테니까 우리 먼저 병실로 가요.”사장님과 사모님을 병원에 모시고 난 뒤, 나는 다른 직원들을 먼저 가게로 돌려보냈다. 그러고나서 사모님과 함께 사장님이 깨어나기를 기다렸다.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정 사장님은 겨우 눈꺼풀을 들었다.“호섭 씨, 겨우 깨어났네요. 정말 놀랐잖아요.”사모님은 정 사장님의 손을 꼭 잡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이에 정 사장님은 싱긋 웃었다.“이번에 이렇게 갑자기 발병할 줄 몰랐네. 그래도 여러분 덕에 저승사자 만나는 건 면했어.”사모님은 울면서 툴툴거렸다.“당신 하마터면 깨어나지 못할 뻔했어. 지금 농담이 나와?”사장님은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지만 얼굴색은 창백하기 그지 업었다.“웃지 않으면 어떡해? 울수록 기분만 나쁠 텐데. 기분 나쁘면 병은 악화할 거고.”나도 그 말에 동의했다.“사장님 말씀 맞아요. 사모님도 낙관적인 마음을 가져야 해요.”내가 물론 이렇게 위로했지만 사모님은 그러지 못했다.늙어 죽거나 병들어 죽거나, 죽음 앞에서 사람은 참 무기력해진다.그래서인지 사모님은 사장님처럼 좋은 마음가짐으로 덤덤하게 대하지 못했다.“됐어. 울보네. 수호 씨도 있는데 그만 울어. 화장 다 번지겠어.”사모님은 그제야 티슈를 뽑아 눈가를 닦았다.하지만 너무 울어
“그런데 놀 배짱도 없고, 즐길 줄 모른다면 분명 우리 무리에서 도태될 거야. 이 무리는 내 정치적 이익과 관련이 있어. 그런데 내가 어떻게 공을 세우는 동시에 깨끗하게 발을 뺄 수 있겠어?”나는 비록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 가운데 있는 관계망이 거미줄처럼 복잡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하나를 움직이면 나머지가 모두 영향받을만큼.남주 누나가 이러지 않으면 정치상의 업적이 없을 거고, 그렇게 되면 조만간 자리에서 밀려나게 될 거다.그런데 남주 누나는 얌전히 집에서 남편을 내조할 유형이 아니다.그렇게 생각하니 이건 참으로 악순환이 아닐 수 없었다.나는 머리가 너무 복잡해 고민에 잠겼다. 그때 남주 누나가 갑자기 옷을 벗기 시작했다.그 행동에 나는 깜짝 놀랐다.“남주 누나, 지금...”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주 누나는 내 입술을 덮쳤다.벌써 며칠 동안 참았던 탓에, 갑자기 따뜻한 입술이 덮쳐 오자 나는 저도 모르게 온몸이 달아올랐다.곧이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그저 우리 둘 다 냉정을 되찾았을 때, 벌어질 일은 이미 벌어지고 난 뒤였다.“하!”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상황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남주 누나는 옷을 챙겨 입고는 내 얼굴을 감싸 쥔 채 이마에 입을 맞췄다.“한숨 쉬지 마. 사람은 현재를 보고 살아가야 해. 지금 기쁘다면 다른 건 생각할 필요 없어. 만약 현재 기쁘지 않아 면 미래를 생각해서 뭐 해?”“그리고 정말 대단하네. 어떻게 한 손으로 그렇게 어려운 동작도 할 수 있어?”남주 누나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누나를 보내고 난 뒤 나는 머리가 터질 듯 복잡했다.‘어쩌다 이렇게 됐지? 성욕을 금하겠다며?’하지만 계속 참고 있는 것도 솔직히 힘들었다.방금 쌓여 있던 성욕을 풀고 나니 온몸의 맥이 뻥 뚫린 것처럼 몸이 가벼웠다.‘됐어. 그만 생각하자.’남주 누나 말대로 많이 생각해도 소용없다.‘될 대로 되라지.’나는 카운터로 돌아가 다시 약을 지었다.그런데 갑자기 정 사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