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각.S시.60이 넘은 늠름한 중년 남자가 흰색 한복을 입고 별장에서 태극권을 하고 있었다.그 사람은 바로 나를 겁에 질리게 했던 임천호다.임천호가 지금 하고 있는 건 바로 태극권의 팔단금다.심지어 옆에는 태극권 고수가 직접 가르치고 있었다.그래서인지 임천호가 하고 있는 태극권 팔단금은 제법 그럴싸했다. 그의 팔단금이 끝나자 옆에 있던 태극권 선생이 연신 손뼉을 쳤다.“아주 좋습니다! 역시 재능을 타고나셨나 봅니다. 팔단금이 나날이 좋아지고 있네요.”임천호의 무뚝뚝한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번지더니 동작을 마무리 지으며 짧고 굵게 말했다.“상을 내려라.”그 말에 선생은 연신 허리를 굽신거렸다.“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임천호는 손을 휙 젓더니 뒤돌아 의자에 앉았다.그러자 고용인 한 명이 얼른 온도와 습도가 딱 적당한 수건 한 장을 건넸다.임천호는 자연스레 수건을 받아 땀을 닦았다. 하지만 핸드폰을 들어 확인한 순간 동작을 멈췄다. 그리고 안색과 눈빛이 단번에 변해 어디론가 전화했다.그 시각.소여정은 한창 내 마사지를 즐기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폰을 들어 임천호의 전화라는 걸 확인한 순간 소여정은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나를 향해 손을 휙 저으며 그만하라는 사인을 보냈다.하지만 나는 그때 무슨 상황인지 몰라 동작을 멈춘 채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마침 옆에 있던 유미 사모님이 내 팔을 잡아당기기 전까지는.“얼른 가요.”갑작스러운 상황에 나는 어리둥절했다.‘뭐지? 한창 마사지 잘하고 있었는데, 왜 갑자기 쫓아내고 그래?’하지만 세 사람의 심각한 표정에 나는 순순히 떠났다.내가 떠나자 소여정은 겨우 미소를 지으며 전화를 받았다. 그러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무슨 일로 전화했어요? 또 얼른 오라고요? 하루라도 재촉하지 않으면 괴로운가 봐요?”임천호는 여전히 차갑고 덤덤했으며 얼굴에는 그 어떤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깊은 눈동자는 매치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날카롭고 무서웠다
“흥, 나를 부러워하는 여자들이 나만큼 예뻐요? 나만큼 몸매 좋아요? 나를 깎아내리려면 저들도 나처럼 예쁘던가.”임천호는 리클라이너에 기댄 채 느긋하게 말했다.[네가 가장 특별하고 내 마음을 가장 잘 알아. 여자 천 명을 갖다 놔도 너 같은 여자는 찾을 수 없지. 내가 널 아끼고 사랑해 주는 건 당연해. 하지만, 밖에서 함부로 하고 다니는 건 딱 질색이라는 건 알아 둬.]소여정은 심장이 덜렁 내려앉았지만 끝까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말했다.“내가 또 무슨 짓을 했다고 그래요? 친구들과 온천욕 하는 것도 함부로 하는 거예요?”[정말 온천욕만 한 거 맞아? 젊은 놈 끼고 마사지 받은 거 아니고?]임천호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소여정은 순간 임천호가 제 죄를 따져 물으려고 전화한 거라는 걸 알아챘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방법은 있었다.소여정은 입을 삐죽 내밀며 일부러 화난 척 말했다.“에이, 이젠 젊은 남자한테 마사지 좀 받는 것도 안 돼요? 정말 저를 새장 안의 새처럼 키우게요?”임천호는 몸을 일으켜 똑바로 앉더니 눈에서 차가운 빛을 내뿜었다.[안 되는 게 아니라 내가 용납 못해. 강북 삼성에 네가 나 임천호의 여자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어!]이건 소여정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다. ‘내가 당신 여자라고? 당신 여자는 당신 아내 아닌가? 난 당신이 자랑하고 다니는 물건일 뿐이고.’하지만 그 한마디 때문에 강북 삼성에서 임천호를 아는 사람들은 소여정에게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소여정은 밖에서 바람피울 배짱이 있다 한들, 상대는 절대 그럴 배짱이 없다.그 때문에 소여정은 이토록 강렬한 반항심을 갖게 되었다. 그녀는 새장 안의 새처럼 살고 싶지 않았고, 임천호가 데리고 다니며 자랑하는 물건이 되고 싶지 않았으며 고분고분 말만 듣는 토끼는 더더욱 되기 싫었다.소여정도 사람이다. 자기만의 생활이 있다. 때문에 자꾸만 반항심이 생기곤 한다.임천호가 하지 말라고 하면 기어코 하려 하고. 그래야만 자기가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걸 증명할 수 있는 것처럼
소여정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남자를 너무 잘 안다. 상대가 명령조로 말할 때는 애교를 부려봤자 소용없다.임천호는 지금 마지막 인내를 갖고 경고하는 거다. 만약 아직도 눈치 없이 굴면 소여정에게는 폭풍우가 닥칠 거다.소여정은 화가 나면서도 어쩔 수 없어 씩씩거리며 전화를 끊었다.“뭐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여기서 이틀 정도 더 있어도 된다고 했으면서 왜 또 당장 오라고 전화하는 건데? 내가 진짜 하라는 대로 하는 애완동물인 줄 아나?”소여정은 핸드폰을 내동댕이쳤다. 생각할수록 기분 나쁘고 화가 났다.그와 동시에 반항심은 점점 강해졌다.그때 유미 사모님이 소여정의 팔을 잡으며 좋은 말로 달랬다.“딱 보니까 물러서지 않을 것 같던데. 돌아가. 가서 기분 풀어주고 나중에 다시 오든 말든 얘기해.”백연우도 옆에서 팔짱을 낀 채 분석했다.“그 남자 소유욕 엄청 강하잖아. 얼른 돌아가. 아니면 정말 강북에 쳐들어올지도 몰라.”소여정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임천호가 강북에 쳐들어오는 것만은 싫었다.그 남자는 분명 강북에 있는 동안 소여정의 행적을 뒤질 거고, 그녀와 접촉한 적 있는 남자들은 가죽을 벗기고 뼈를 발라내려 들 거다.소여정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안절부절못했다.“그럼 이제 어떡해? 정말 임천호 말대로 순순히 돌아가라고? 그러면 내가 애완동물과 뭐가 달라?”소여정은 너무 싫었다.그때 유미 사모님이 얘기했다.“아니면 먼저 전화해서 애교 좀 부리고 잘 설득해 보는 건 어때?”“소용없어. 임천호는 절대 애교부린다고 결정을 번복할 사람 아니야. 그 사람은 남을 명령하고 남이 제 말에 복종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거든.”백연우의 정확한 분석에 소여정도 동의했다.“연우 말이 맞아. 임천호는 그런 사람이야. 내가 전화하면 내가 정말 자기를 못 떠나는 줄 알 거야. 절대 먼저 전화하면 안 돼.”“그럼 정말 강북으로 와서 너 찾으면 어떡해?”임유미가 물었다.“직접 오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내가 계속 안 돌아가면 사
나는 백연우 곁으로 다가가 마사지하기 시작했다.왠지 모르겠으나 이 여자는 조금 무서운 감이 없지 않아 있다. 마치 학창 시절 선생님을 두려워하던 것처럼.나는 온몸이 불편했다.백연우도 그런 내 뻣뻣함을 느꼈는지 물었다.“마사지하는 게 좀 뻣뻣한데, 긴장했어요?”“아, 왠지 모르게 긴장되네요.”나는 솔직히 말했다.“긴장할 거 없어요. 여기가 학교도 아니고. 내가 수호 씨 어떻게 한대요?”이 여자는 말투마저 학과장 같았다.하지만 학교를 말하는 게 조금 이상해 무의식적으로 물었다.“연우 씨, 무슨 뜻이에요? 제가 이제 갓 졸업한 학생인 건 어떻게 알았어요?”“이제 갓 졸업한 학생인 것도 알고 강북 한의원 다녔던 것도 알아요.”나는 더 놀랐다.“소여정 씨한테 들었어요?”‘아닌데? 소여정은 내가 어느 학교 졸업했는지 모르는데?’물론 이 여자가 뒤에서 나를 몰래 조사했을 수도 있다.‘그런데 이건 내가 너무 자뻑이 심한 거 아닌가?’‘이 여자도 소여정도 할 일이 없는 사람도 아니고. 나를 왜 뒷조사하겠어?’그때 옆에 있던 사장 사모님이 말을 보탰다.“수호 씨 몰랐어요? 연우 수호 씨 학교 학과장이었어요. 백 쌤.”“네?”난 이건 정말 모른다.나는 학교 다닐 때 공부에만 관심이 있어 학과장 쌤이 누구 건, 교장이 누구 건 관심이 없었다.하지만 백 학과장 쌤이 있었던 기억은 있다.나는 그 순간 바짝 긴장했다.아무리 졸업해도 학과장이라는 직업이 두려운 건 어쩔 수 없었다.나는 쩔쩔매며 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하하, 내가 그렇게 무서워요?”백연우는 나를 보며 웃었다.‘당연한 거 아닌가? 학교장이라는데, 무섭지 않을 리가.’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긴장할 거 없어요. 이미 졸업했잖아요. 내가 수호 씨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백연우는 계속해서 마사지를 요구했다.워낙 학과장처럼 생겼는데 정말 그렇다고 하니 나는 다시 대학생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내가 그렇게 무서워요? 뭘 그렇게 겁먹었어요?”백연우는
“정수호 씨, 내가 안경 낀 모습이 예뻐요? 안경 벗은 모습이 예뻐요?”백연우가 갑자기 물었다.안 그래도 가슴이 두근댔는데,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니 나는 마음이 찔려 사실대로 답할 수 없었다.결국 대충 얼버무렸다.“다 예뻐요.”“그래요? 그럼 내가 예뻐요? 아니면 유미가 예뻐요?”‘어...’‘이 질문은 참...’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스타일이다.한 명은 가르침을 잘 받은 양반댁 규수처럼 온화하고 우아한 스타일.한 명은 무뚝뚝하고 무섭지만 몸매는 화끈한 학과장.이걸 어떻게 비교한단 말인가?이 둘은 비교할 수 없다.하지만 정복욕으로 볼 때, 백연우를 내 여자로 만드는 게 더 성취감이 있을 거다.‘몸매가 화끈한 여 학과장이라...’‘생각만 해도 스릴 넘치네.’“왜 대답 없어요? 어떻게 우리를 기쁘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니면 어떻게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어요?”백연우는 내 배에서 태어난 회충처럼 내 마음을 꿰뚫고 있었다.나는 결국 아무 말이나 지어냈다.“두 분 다 예뻐요. 모두 미녀세요. 두 분과 결혼하는 분은 참 복 받은 것 같아요.”“그런 아부는 우리 앞에서 떨 필요 없어요. 이미 지리도록 들었으니까. 다른 방식으로 물어볼게요. 한 사람을 정복하라면 누구를 더 정복하고 싶어요?”나는 질문을 들은 순간 더 의문이 생겼다. 이 여자가 독심술을 하는 게 아닌가 하고.방금 전까지만 해도 어느 여자가 더 정복욕 있는지를 생각했는데, 바로 그런 질문을 하다니.게다가 눈빛도 마치 나를 꿰뚫어 보는 듯 이상했다.나는 마음이 찔려 얼굴마저 빨개졌다.“그런 생각은 할 배짱도 없어요. 대답은 더더욱 못 하고요.”나는 거짓말했다.그러자 백연우가 싱긋 웃으며 여전히 나를 꿰뚫어 볼 것 같은 눈빛으로 물었다.“그래요? 상상한 적 없다고요? 한 명은 사장 사모님이고, 한 명은 대학 시절 학과장인데, 누구를 정복하든 성취감이 대단할 텐데, 정말 생각한 적 없어요?”나는 마구 도리질하며 찔리는 마음을 애써 숨겼다.“정말 아니에요. 저
‘내가 뭐 어떻게 한 것도 아니고, 왜 저렇게 째려본대?’‘오냐, 네가 나를 째려보면 나는 뭐 못 볼 줄 알고?’나는 따라서 윤지은을 째려봤다. 게다가 시원하게 입은 윤지은은 나한테 오히려 더할 나위 없는 눈요깃거리였다.“그 여자는?”윤지은은 소여정이 원래 앉았던 자리에 앉아 차갑게 물었다.그러자 유미 사모님이 말했다.“먼저 S시로 돌아갔어.”“겨우 돌아갔네. 정말 볼 때마다 짜증 났는데.”윤지은은 역시나 독설을 퍼부었다.그 말에 옆에서 듣던 백연우가 피식 웃었다.“소여정이 여기 있는 것도 아닌데, 왜 또 독설을 퍼붓고 그래?”“이건 독설이 아니거든. 난 정말 걔만 보면 짜증 나. 내 앞에서 하루 종일 자랑만 해대고, 대체 자랑할 게 뭐 있는지.”“너도 그만 인정해. 그렇게 자꾸만 시비 거는 거, 다 여정이 위해서잖아. 그러면서 왜 한 번도 좋게 말하지 않아? 여정 이번에 억지로 돌아간 거야. 임천호한테서 연락 왔거든, 오늘 당장 돌아오라고. 말투 들어보니까 좀 이상했어. 나랑 유미도 걱정이야. 걔한테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나는 옆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엿들었다.‘소여정이 돌아간 게 억지로 돌아간 거라니, 그러면 위험한 거 아닌가?’‘임천호가 소여정을 어떻게 하는 건 아니겠지?’왠지 모르겠으나 나는 너무 걱정됐다.그때 윤지은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대체 왜? 애 갑자기 강제로 불러가는데?”유미 사모님도 무척 걱정됐는지 입을 열었다.“몰라, 갑자기 생각이 바뀌었을 수도 있고. 무슨 일이 일어났을 수도 있고. 아무튼 이번에 태도가 엄청 강경하더라. 상의할 여지도 전혀 없어 보였고.”그 말을 들을수록 나는 걱정이 앞섰다.다들 소여정이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 왜 다 같이 해결 방법을 생각하지 않는 건지.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질문했다.“저기, 소여정 씨가 곤경에 처한 걸 알면서 왜 방법을 생각해 주지 않아요?”세 여자는 동시에 나를 돌아봤다.그 눈빛에 나는 순간 등골이 서늘했다.그때 백연우가 먼
세 여자는 온천에 한참 있다가 술 마시러 바로 향했다.더 이상 내가 낄 일은 없다는 생각에 마침 가려던 그때, 백연우가 입을 열었다.“수호 씨, 우선 가지 마요.”“혹시 볼 일이 남았어요?”“우리랑 같이 가요.”“네?”‘셋이 술 마시러 가는데, 내가 왜?’이곳 바에서 파는 술은 너무 비싸서 내가 소비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게다가 물주인 소여정도 갔는데, 이 세 여자가 나 대신 돈 내줄지도 미지수였다.“저는 됐습니다. 여기 너무 비싸서 전 소비 못 해요.”나는 솔직히 말했다.그랬더니 백연우가 입을 열었다.“남자가 그래서 어떻게 살겠어요? 돈 쓰는 게 뭐 수명 깎이는 것 마냥. 수호 씨는 그저 우리 따라와요. 돈 낼 필요 없어요.”‘그렇다면 나야 좋지.’이곳 와인 한 병은 내 몇 달 치 월급에 맞먹으니, 나로서는 당연히 경험해 보고 싶었다.그런데 지금 마침 그 기회가 왔고, 돈도 들지 않는데, 누가 이런 좋은 기회를 거절할까?나는 바로 헤실거리며 대답했다.“좋아요. 그럼 갈래요.”그렇게 나는 이 세 사람과 함께 바에 도착했다.세 사람은 아주 비싼 와인 한 병을 주문했다.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와인이었는데, 한 병에 600만 원이 넘는 건 똑똑히 들었다.백연우가 나에게 와인 한 잔 따라 주었으나 나는 술을 받아 든 채 아까워서 먹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 작은 한 잔에 몇만 원이라니.너무 사치스러웠다.하지만 세 사람은 마치 물 마시듯 마시며 가격에 신경 쓰지 않았다.“수호 씨, 마셔요.”백연우가 재촉했다.나는 결국 한 모금 살짝 음미했다.이건 내가 처음 마시는 와인이다. 때문에 아는 게 없는지라 뭐가 특별한지는 음미를 해봐도 알 수 없었다.결국 “맛있네요.”라는 말로 대충 감상평을 낼 수밖에 없었다.백연우는 내 말이 재밌는지 피식 웃었다.“앞으로 그런 말은 우리 앞에서만 하고 다른 사람 앞에서 하지 마요.”나는 어리둥절해서 무의식적으로 물었다.“왜요?”“유미야, 네가 좀 알려줘라.”그러자 유미 사모님
“우리 넷은 다 여자라서 서로 몸 다 봤어요.”백연우는 말하면서 웨이터에게 카드를 가져오라고 부탁했다.게임 룰은 간단했다.카드 게임을 해서 지는 사람이 옷을 벗는 것.나는 카드 게임에 자신 있기에 세 명이 모두 나를 속이는 건 쉽지 않을 거라고 자신했다.하지만 게임이 시작되니 내가 너무 간단하게 생각했다는 걸 깨달았다. 백연우는 정말 고수 중의 고수라 첫 게임부터 나를 몰아붙여 결국엔 내가 졌다.그리고 게임 룰대로 나는 외투를 벗었다.“오호, 가슴 근육도 있었네?”백연우의 뜨거운 눈빛에 나는 왠지 쑥스러웠다.상대가 내가 다니던 학교 학과장이어싸는 걸 생각하면 부끄러웠으니까.하지만 나는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계속 해요. 첫판은 내가 상대를 얕잡아 봤어요. 이번 판은 무조건 이길 거예요.”나는 게임에 이미 완전히 빠져버렸다.내가 카드 게임을 얼마나 잘하는데, 여자 셋한테 졌다는 게 너무 쪽팔렸다.그렇게 두 번째 게임이 시작되었다.이번에도 백연우가 역시나 날아다니고 있었다.이 정도면 백연우의 금손이 부럽기까지 했다.어떻게 두 번 모두 그렇게 좋은 패를 가질 수 있는지.두 번째 게임까지 질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나는 완전히 풀이 죽었다.하지만 게임 룰대로 러닝셔츠를 벗었다.러닝셔츠까지 벗으니 내 상체는 완전히 발가벗겨졌다.백연우는 예쁜 눈을 크게 뜨더니 참지 못하고 내 가슴을 손으로 만졌다.“어머, 가슴 근육이 이렇게 발달했어요? 촉감 장난 아니네.”백연우는 내 마음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부드러운 손가락으로 내 가슴을 쓸었다.하지만 혈기 왕성한 남자가 이런 터치를 견딜 수 있을 리가 없었다.갑자기 아랫도리가 괴로워, 나는 백연우의 손을 쳐냈다.“이러지 마세요. 저 정상적인 남자예요.”“그렇게 말하면 내가 이상해지잖아요. 저 둘한테 물어봐요. 내가 이상하냐고.”‘이게 이상한 게 아니면 뭐지? 정상적인 사고라면 이렇게 야릇하게 만질 리 없잖아.’왠지 소여정 친구라 그런지 소여정과 똑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아
“보아하니 두 사람 모두 조금희 씨 몸에 종양이 퍼지고 있어 곧 죽는다는 걸 알고 있었네요.”“혹시 조금희 씨가 뒤에서 꼼수 부린 거 아닐까요?”나는 문득 뭔가 떠올라 의문점을 제기했다.현재 상황으로 분석해볼 때 조금희의 혐의가 가장 높았다.그때 윤지은이 말했다.“자세한 건 조사해 봐야 하지만 나도 조금희 씨가 이상한 것 같아.”사모님은 참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혔다.“다음에 조사할 때 나도 끼워줘. 나도 같이 조사하고 싶어. 두 사람 말 맞아. 호섭 씨가 억울한 죽임을 당했는데, 나라도 진실을 밝혀 억울함을 풀어줘야 해. 이게 내가 살아갈 유일한 동력이야.”사모님은 말하면서 또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슬픔 속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나와 윤지은은 항상 사모님 곁을 지킬 거다.그날, 우리는 곧장 종양 전문 병원에 가 조금희의 병력을 조사했다.조금희 몸에서 종양이 발견된 건 1년 전인데, 처음에 양성이었다가 악성으로 번지기까지 적지 않은 돈을 들였던 거로 확인되었다.게다가 조금희는 불치병에 걸리기 전에 아내와 갈등을 겪었다.“자세한 건 저도 모르는데, 조금희 씨가 우리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젊은 여자가 항상 와서 돌봐줬어요. 그러다가 부인이 병원에 찾아와 그 아가씨를 때렸고요. 그 일은 병원 사람들 다 알아요.”‘그렇다는 건 조금희가 바람을 피웠다는 거네?’조금희가 이런 사람일 주은 생각지도 못했다.윤지은은 여간호사에게 돈다발을 건넸다. 그러자 간호사는 아주 기뻐하며 떠나갔다.조사를 마친 뒤 우리는 밖에서 식당을 찾았다.식당에 도착한 윤지은은 분석을 시작했다.“조금희 씨가 불치병에 걸렸고, 예전에 아내와 아들한테 잘못을 저질렀다면 혹시 자기가 얼마 못 살 걸 알고 호섭 씨를 배신해 돈을 챙겼던 건 아닐까?”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그럴 가능성이 커요. 만약 조금희 씨 계좌에 큰돈이 입금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아쉽지만 이곳은 강북이 아닌 Y시다. 안 그랬다면 윤지은의 인맥
나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배고픔을 느낀다는 건 좋은 일이다.윤지은이 아침을 사 오자 사모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음식을 먹었다.그걸 본 윤지은은 나를 향해 엄지를 추켜들었다. 그건 내 실력을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이번 치료 방법이 확실히 효과적이었으니까.나는 사모님을 한참 동안 관찰했다.비록 컨디션이 많이 안 좋은데도 사모님은 음식 드실 때 여전히 우아하고 단아했다. 살짝 슬픔을 띄고 있어 살짝 비극의 여주인공 같기도 했다.내가 한창 사모님을 바라보고 있을 때, 윤지은의 날카로운 눈빛이 갑자기 나를 쏘아봤다. “짐승!”윤지은은 욕지거리를 퍼부었다.그 욕에 나는 억울함을 호소했다.“제가 뭘 했다고 짐승이라는 거예요?”“아무튼 짐승 맞아. 이런 상황에서 훔쳐보기나 하고.”윤지은은 나를 째려봤다.난 그저 사모님을 몇 번 본 것뿐인데 나를 짐승 취급하다니, 너무 어이없었다.하지만 이러다 또 싸움 나겠다 싶어 나는 얼른 아침을 들고 다른 곳에 가서 배를 채웠다.식사를 마친 뒤 사모님은 자발적으로 나와 윤지은을 찾아왔다.“알고 있는 거 사실대로 다 알려줘요. 난 호섭 씨 사고에 대한 모든 사실이 알고 싶어요.”사모님은 너무 평온해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때문에 나는 사모님 상태가 여전히 걱정스러웠다.“사모님, 우선 맥 좀 짚어봐도 될까요?”“그럴 필요 없어요. 내가 뭘 해야 하는지 나도 알아야. 걱정할 거 없어요. 어젯밤 많이 생각해 봤고, 호섭 씨가 떠난 사실을 받아들였어요.”“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건 호섭 씨처럼 착한 사람이 남한테 죽임을 당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억울함을 풀어줄 거예요.”“난 강해져야 하고 호섭 씨처럼 용감해져야 해요. 그래야 호섭 씨가 마음 놓고 갈 수 있어요.”사모님은 애써 슬픔을 참으려 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또 흐느꼈다.그 말을 들으니 나도 코끝이 시큰거리고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이제 우리에게는 같은 목표가 생겼다. 바로 진실을 밝히는 것.나는 얼른 마음의
나는 사모님 팔을 힘껏 잡으면서 사모님과 눈을 마주쳤다.“사모님! 현실을 받아들이세요. 더 이상 자신을 속이지 마세요. 사장님이 이런 사모님 보고 편히 가지 못하길 원하시는 건 아니잖아요.”내 말이 사모님의 마음에 큰 상처를 줬는지, 사모님은 순간 울음을 터뜨렸다.윤지은은 내가 강제로 사모님을 자극했다며 나를 탓했다.“유미 지금 안 그래도 나약한 상태인데, 왜 그런 말을 직접 해?”나는 너무 난감했다.“누구는 뭐 이러고 싶은 줄 알아요? 하지만 사모님이 계속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환상 속에 살고 있는데, 계속 이러면 상태가 점점 악화해요.”윤지은은 내 말에 일리가 있다고 인정했지만 그와 동시에 사모님이 또 상처받을까 봐 걱정했다.나도 사모님이 현실을 받아들이게 하려면 그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고 있다. 하지만 사모님을 절망 속에서 끄집어내려면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나는 윤지은에게 말했다.“정말 사모님을 돕고 싶다면 모질어야 해요. 이럴 때 마음 약해지면 오히려 해치는 거예요.”윤지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내 말에 동의하는지, 내가 치료할 수 있도록 묵묵히 자리를 비켜줬다. 나는 나른하게 힘이 쭉 빠진 사모님을 잡고 진지하게 말했다.“죽은 사람이 다시 돌아올 수 없어요. 사모님이 속사한 건 알겠어요 하지만 지금 속상해할 때가 아니에요. 우리 할 일이 있어요.”“사장님 사고 단순 사고가 아니에요. 누군가 인위적으로 사고 낸 거예요. 사모님, 정신 차리고 우리와 함께 진실을 조사해요.”사모님은 텅 빈 눈으로 나를 보며 중얼거렸다.“그게 무슨 말이에요?”사모님을 깊은 슬픔에서 꺼내는 건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무엇보다 중요한 건, 서두르지 않고 그녀가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천천히 다가가는 것이다.나는 말투를 부드럽게 하며 방금 한 말을 또다시 반복했다.“사장님 교통사고에 수상한 점이 발견됐어요. 사모님도 사장님이 억울하게 돌아가시는 거 원하지 않죠? 우리 함께 진실을 알아내 사장님이 억울하게 죽임당하
나는 그 말을 들은 순간 식은땀이 송골송골 솟아올랐다.사모님 상태는 살짝 이상해 보였다. 아마도 의식이 혼미해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를지도 몰랐다.나는 사모님이 바보 같은 짓을 할까 봐 서둘러 사모님 팔을 꼭 잡았다. 그러면서 계속 따라오지 않으면 강제로라도 데려올 생각이었다.“수호 씨, 이거 놔요. 난 남아서 호섭 씨랑 같이 있을래요...”사모님은 마구 버둥대며 소리쳤다.이러다가 사고가 날 것 같아 나는 아예 사모님을 어깨에 두러 업었다. 그러자 사모님은 곧바로 버둥거리며 소리쳤다.벼랑 끝에 서 있는지라 조금만 실수하면 함께 아래로 떨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나는 결국 사모님을 손날로 기절시켰다.내가 가드레일 안쪽으로 다시 넘어왔을 때 윤지은의 차가 마침 도착했다.“왜 그래?”윤지은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나는 사모님을 차에 앉히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사모님 지그 정신이 이상해서 현실과 환각을 구분하지 못해요. 방금 사장님이 춥다고 한다면서 옷 주러 내려가겠다고 했어요. 제가 제때 나타나지 않았으면 뛰어내렸을지도 몰라요.”윤지은은 내 말을 듣더니 미간을 찌푸렸다.“계속 이럴 순 없어. 우리가 잠깐은 지켜볼 수 있지만 평생 지켜볼 순 없잖아.”그때 내 머릿속에 문득 방법이 떠올랐다.“사모님께 사장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려드리는 건 어때요?”“미쳤어? 이번 일로도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닐 텐데, 또 자극하자고?”윤지은은 내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이에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제 할아버지가 남긴 의학 서적에 비슷한 사례가 있는데, 옛날에는 환자가 가족을 잃고 감정을 통제하지 못할 때 치료가 안 된다면 환자한테 희망을 줘야 한대요. 그 희망이 의학에서 말하는 기예요.”“그 기를 가진 환자가 음식 치료와 약물 치료를 함께 진행하면 서서히 회복할 수 있대요.”“사장님의 죽음에 수상한 점이 있잖아요. 그래서 사모님과 함께 그 사건을 수사하는 거예요. 아마 사모님도 사장님이 죽은 진실을 알고 싶을 거예요.”
장례식장 안을 모두 뒤져 봤지만 사모님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리 조급하지 않던 내 마음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불안해졌다.사모님은 현재 몸 상태도 안 좋고 정서도 매우 불안하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가족한테 어떻게 말해야 할지 걱정됐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내 마음은 점점 불안해졌다.그러다 결국 방법이 없어 나는 문득 사모님 번호를 떠올려 그쪽으로 전화를 걸었다.전화는 계속 긴 연결음만 들릴 뿐 아무도 받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포기하려고 할 때 연결음이 꺼졌다. 액정을 확인하니 전화가 연결되었다.“사모님?”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수호 씨, 나 괜찮으니까 좀 내버려둬요.]사모님 목소리는 매우 우울해 보였고 기운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나한테는 너무 듣기 좋았다. 나는 다급히 물었다.“사모님, 어디 있어요? 너무 걱정돼요.”[혼자 있고 싶어요.]“알아요, 아는데 어디 있는지만 알려줘요. 사모님이 안전하다는 거 확인해야 해요.”전화 건너편에서 한참 침묵이 흘렀다.그때 갑자기 차 경적음이 들려왔다.그렇다는 건 사모님이 장례식장에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나는 문득 사모님이 있을 수 있는 곳이 떠올랐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물었다.“사모님, 알려주시면 안 돼요?”사모님은 아예 전화를 끊어버렸다.하지만 이미 대충 답을 얻은 나는 장례식장을 뛰쳐나가 택시를 잡고 사장님이 사고를 당한 곳으로 향했다.가는 길에 사모님을 찾았냐는 윤지은의 전화를 받은 나는 내 추측을 말했다.“아니요. 사모님 아마도 사장님 사고 난 곳에 있는 것 같아요.”[거긴 왜?]윤지은은 이해가 되지 않아 무의식적으로 물었다.“사장님 죽음이 수상해 직접 조사하고 싶었을 수도 있고, 단순히 사장님이 그리웠을 수도 있고... 아무튼 저 지금 가는 중이에요.”[그럼 먼저 건너가. 나 이따 바로 갈게.]나는 윤지은과 상의한 뒤 먼저 사장님이 사고 난 곳으로 향했다.사고가 난 곳은 절벽인데, 사모님은 마침 절벽
사모님의 이런 모습을 보니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꾹 다문 채로 옆을 지켜드렸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졸음이 몰려왔다.최근 계속 이리저리 다니다 보니 그동안 제대로 휴식한 적 없어, 나는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눈을 붙이려고 했다.하지만 잠을 편히 잘 수 없었다. 꿈속에서 정 사장님은 계속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나도 사장님을 구하고 싶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사장님과 닿을 수 없었다. 그러다 꿈의 마지막쯤 정 사장님은 가면을 쓴 사람에게 살해당했다.꿈에서 놀라 깬 나는 이미 온몸이 식은땀에 푹 젖어 있었다.비록 꿈이었지만 꿈에 나온 장면들이 너무 생동해서 직접 경험한 것 같았다.밖은 어느 때부터인지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고, 유리창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최면 노래처럼 느껴졌다.피곤함에 눈을 비비다가 문득 사모님이 침대에서 사라졌다는 걸 발견한 나는 다급히 호텔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디에도 사모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나는 호텔 안을 마구 달리며 윤지은에게 전화했다.“혹시 유미 사모님 봤어요?”[나 계속 밖에 있어서 유미 본 적 없는데? 네가 유미 호텔에서 돌봐주던 거 아니었어? 그런데 어디 갔는지 모른다고?]윤지은이 반문했다. 이에 나는 얼른 설명했다.“제가 너무 피곤해서 잠깐 눈 붙였는데 깨어나니 사모님이 사라졌어요.”[넌 대체 뭘 할 수 있어? 사람 하나 돌보는 것도 못해?]윤지은은 나를 꾸짖기 시작했다.나는 얼른 전화를 끊고 이리저리 찾으며 물어봤지만 호텔 직원들도 모두 사모님을 본 적 없다고 했다.결국 나는 프런트에 달려가 물었지만 프런트 직원들도 못 보기는 마찬가지였다.“그럼 CCTV 한번 확인할 수 있을까요?”“안 됩니다. 호텔 규정상 CCTV는 함부로 보여드릴 수 없어요.”나는 다급히 말했다.“제 친구 남편이 이틀 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 친구 정서가 엄청 불안해요. 반드시 빨리 찾아야 해요. 지금 우선 CCTV 확인해 줘요. 제가 당장 경찰에 신고할 테니까...”“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자가 이렇게 빨리 남편 시신을 화장하려고 하는 이유가 없다.내가 분명 이번 교통사고가 단순한 사고가 아닐 거라고 말했는데 들을 생각도 하지 않다니.나는 슬쩍 찔러보려고 다시 물었다.“왜 그렇게 서둘러요? 혹시 뭐 알고 있는 거 아니에요?”여자는 내 말을 듣더니 얼굴색이 확 바뀌었다. 나는 뭔가 찔린 듯 불안해하는 여자의 행동을 눈에 담았다. 그러고는 갑자기 여자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뭔가 알고 있는 거죠? 알고 있는 거 다 얘기해요. 그게 이번 사고의 진실을 밝힐 수도 있어요...”“뭐 하는 거예요? 아파요.”여자는 내 손을 뿌리쳤다. 여자의 아들은 어머니가 괴롭힘당하는 걸 보자 바로 나를 막아섰다.지금 내 실력으로 두 사람을 상대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윤지은은 일을 크게 만들까 봐 내 팔을 쿡쿡 찔렀다.“됐어. 저 사람들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해.”나는 이대로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이 너무 수상해 반드시 기회를 잡아 두 사람의 입을 열어야 했다.하지만 점점 모여드는 구경꾼들 때문에 나는 결국 포기할 수박에 없었다. 만약 나 혼자였다면 내가 내키는 대로 소란을 피웠을 테지만, 정서가 불안정하기에 사모님한테 피해 가게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나는 장례식장을 떠난 뒤 두 사람을 찾아 결판 낼 생각이었다.오늘 장례식장에 나타난 유가족은 또 있었다. 바로 운전한 오 기사님 가족이었다.오 기사님 가족은 얘기가 잘 통해 화장을 조금 미루기로 했다. 그들 역시 이번 교통사고가 수상쩍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오 기사님 아들은 심지어 확신했다.“제 아버지 운전 실력은 엄청 좋아요. 사고가 난 곳도 생전에 수백 번도 더 다녔던 곳이라 그 길을 잘 알고 있어요.”“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도 처음에 믿지 않았어요. 난 이번 일 제대로 조사해서 아버지 결백을 증명할 거예요.”겨우 생각이 같은 사람을 찾았다는 생각에 나는 너무 기뻤다. 결국 조금희의
“들여보내 줘요. 나 호섭 씨랑 같이 있을래요. 같이 있어 줘야 해요...”장례식장 입구에서 유미 사모님은 몇몇 직원들에게 가로막혀 애타게 울고 있었다.그 모습을 보자마자 나와 윤지은은 급히 달려갔다.“사모님, 여긴 왜 왔어요?”장례식장도 규칙이 있는데 가족 방문 횟수가 제한되어 있다. 우리가 나가기 전 분명 사모님더러 호텔에서 휴식하라고 했는데,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다.한참 애를 먹던 두 직원이 얼른 말했다.“얼른 이분 좀 말려 봐요. 이곳 냉기를 보통 사람들은 견디기 힘들어하세요. 그런데 자꾸만 안에 들어가겠다고 하시는데, 절대 안 됩니다.”“그리고, 절차는 다 밟았나요? 다 밟았다면 얼른 화장할 수 있게 사인하세요. 시체 안에 계속 두고 있는 것도 좋은 선택은 아니에요...”나는 손을 저으며 두 직원의 말을 잘랐다.“네, 알겠어요. 먼저 가서 일들 보세요.”나와 윤지은은 유미 사모님을 조용한 곳으로 데려갔다. 사모님은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고 너무 지쳐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 모습을 보며 윤지은도 드물게 눈시울을 붉혔다.“유미야, 이러지 마...”윤지은은 흐느끼느라 말도 제대로 내뱉지 못했다.사모님 역시 슬피 울부짖었다.“왜? 좋은 사람은 복이 온다며? 그런데 왜...”“호섭 씨는 이 세상에서 가장 착한 사람인데. 호섭 씨가 가난한 사람을 위해 얼마나 많은 선행을 베풀었는데 왜 이렇게 된 거야? 왜...”처절한 외침에 듣는 나도 너무 괴롭고 삼장이 칼에 베이는 것처럼 아팠다.이 순간 어떤 위로의 말도 소용없다. 그 어떤 위로도 사모님의 비통한 심정을 달랠 순 없으니까.나는 그저 사모님이 진정할 수 있게 침을 놔줄 수밖에 없었다. 잠시 뒤 나는 조금 안정이 된 사모님을 안아 차에 앉혔다. 창백하고 초췌한 사모님의 얼굴을 보니 내 마음은 더욱 괴로웠다. 그때 윤지은이 이를 악물며 악에 받쳐 말했다.“이번 사건 우리가 꼭 밝혀낼게.”그 순간 나도 윤지은과 같은 마음이었다. 나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고 그걸 당장 토
나는 윤지은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거라고 생각지도 못해 무척 감격스러웠다.나 혼자 다른 도시에서 도움 없이 이 사건을 조사하는 건 확실히 힘들다. 하지만 윤지은이 같이 조사하겠다고 하니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나는 느릿한 말투로 진지하게 말했다.“이번에 우리 같이 손을 잡고 정 사장님을 위해 진실을 밝혀요.”그동안 나와 윤지은은 서로 고양이와 개처럼 항상 만나기만 하면 싸웠는데, 이번만큼은 힘을 합쳐 함께 정 사장님 사건을 조사하기로 했다.우리는 해야 할 일을 확인한 뒤, 강한나를 만나러 갔다. 강한나라면 전문가의 관점에서 우리를 도와 증거를 수집할 수 있을 테니까.“최선을 다해 볼게. 하지만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 내가 방금 사건 기록을 봤는데 현장 사진과 다양한 증거들을 취합해 보면 단순 사고사일 수 있어.”“내가 의심했던 브레이크 흔적 거리인데, 이것도 어찌 보면 사고사일 수도 있고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어. 결론적으로 조사하기 매우 어려워.”한참 듣고 있던 윤지은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현장 증거로 조사할 수 없으면 다른 쪽으로 출발해야겠네.”한창 낙담하고 있던 나는 윤지은의 말에 다급히 물었다.“혹시 방법이 있는 거예요?”윤지은은 팔짱을 끼면서 냉정하게 분석했다.“내가 알기로 운전한 기사는 호섭 씨랑 오랜 친구였고 운전 실력도 엄청 뛰어나. 이 점에서 출발하면 될 것 같아. 그리고 함께 차에 탔던 피해자 가족들도 조사해 볼 수 있어.”나는 맞장구치며 고개를 끄덕였다.“음, 좋은 방법인 것 같아요. 그럼 사고 유가족들부터 조사해 봐요.”강한나는 우리를 보며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정말 그렇게 할 거야? 이 사건이 만약 인위적인 거면 두 사람도 위험해. Y시는 국내 다른 도시들과 달라. 여긴 무법지대인 D국과 엄청 가까워.”윤지은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그게 뭐? 의심 가는 구석이 있는데 그냥 덮자고? 그러고도 내가 무슨 친구야? 유미 지금 충격이 너무 커. 호섭 씨는 유미한테 가장 중요한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