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답답한 마음에 고개를 저었다.“몰라요.”“일부러 애교 마음 뒤흔들려고 저러는 거예요. 매번 전화로 보고 싶다, 하고 싶다는 말만 하고 사랑은 한 번도 주지 않거든요.”그 말을 들으니 저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왔다.“인간도 아니네. 저는 밖에서 애인도 만들면서 애교 누나한테는 왜 그런대요?”형수도 따라 맞장구쳤다.“그러니까요. 왕정민은 사람도 아니에요. 배신하고 기만하는 것도 모자라 제 아내를 모함에 빠뜨리려고 머리까지 굴리다니. 이쯤 되면 인간쓰레기죠.”형수의 말을 한참 동안 들었더니 애교 누나가 너무 안쓰러웠다.남편이 밖에서 다른 애인을 만나는 것도 모르고 속고만 있다니.그런데 본인은 남편을 위해 본분을 지키겠다고, 반년 동안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남편한테 미안한 짓 안 하겠다고 그렇게 애쓰고 있으니.그때 형수가 나를 보며 또다시 물었다.“수호 씨도 궁금하죠? 내가 왜 친구인 애교한테 이 사실을 숨기는지?”궁금한 건 사실이다.형수도 내 마음을 알았는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나도 말해주기 싫어서 말 안 하는 게 아니라 말 못 한 거예요. 애교는 정말 어질고 착한 사람이거든요. 왕정민과 결혼한 뒤로 늘 남편 생각뿐이었어요. 오죽했으면 온통 남편과 행복하게 살 생각뿐이겠어요. 애교는 남편 엄청 사랑해요.”“아마 남편이 저를 배신할 거라는 건 꿈도 못 꿀 거예요. 이혼하고 싶어 저를 모함하려 한다는 건 더더욱 생각 못할 거고요. 그런데 만약 이 사실을 말하면 아마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거예요.”“진흙탕 싸움을 하면 왕정민과 그 내연녀를 절대 이기지 못할 거고, 그 내연녀의 뒷배가 엄청 대단하거든요. 그렇다고 싸움에 휘말리지 않자니 이미 사실을 알아버렸는데 마음이 편하겠어요?”형수의 말을 들을수록 애교 누나가 너무 안쓰러워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그때 형수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을 이었다.“이게 현실이에요. 그 현실에 대항할 능력이 없으면 받아들여야 하지 별수 없어요. 수호 씨 형이 나한테 이걸 말해줄 때 나도 무
“형수님, 오늘 많은 얘기해줘서 고마워요. 앞으로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진심으로 애교 누나의 마음을 얻어볼게요.”“그래요, 그렇다면 다행이네요.”형수는 말하면서 고개를 숙여 내 아래를 바라봤다.“애교 마음을 얻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거예요. 그런데 여기가 이런 것도 두고 볼 수는 없는 일이고.”나도 무척 난감했다.“혹시 저 도와줄 방법 같은 거 없어요? 오해하지 마요, 저는 아주 건전한 걸 말하는 거니까. 저 정말 너무 괴로워서 미치겠어요.”이런 쪽으로 아무런 경험도 없어 나는 형수한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다.그때 형수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며 눈빛도 점점 이상야릇해졌다.하지만 날씨가 더워서 그렇겠거니 생각하며 깊게 파고들지 않았다.“형수님, 형수님?”형수가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자 나는 무의식적으로 형수를 불렀다.그러자 형수는 놀란 토끼처럼 번쩍 정신을 차렸다.“왜 그래요? 어디 불편해요?”나는 걱정스레 물었다. 형수의 상태는 정말 어딘가 불편한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하지만 형수는 연신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그냥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 생각하고 있었어요.”“어떻게 도와줄 건데요?”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괴로움에 내가 다급히 묻자 형수는 고개를 저었다.“남자는 여자와 달라 도구의 힘을 빌릴 수 있는 게 아니에요.”“그럼 혼자 해결해도 돼요?”나는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말했잖아요, 적당히 하면 좋다고. 하지만 계속 이러면 언젠가는 몸이 망가질 거예요.”“그럼 어떻게 해요?”‘해결 방법도 없다. 그러고, 도와주지도 못한다 하고, 이건 나더러 죽으라는 거랑 뭐가 달라?’“아니면 지금 애교네 집에 갈래요?”“네? 지금요? 그건 좀 아니지 않나요? 애교 누나 아직도 저한테 화나 있는데 이렇게 늦게 찾아가면 제가 나쁜 마음 품었다고 생각할지도 몰라요.”“오늘 낮에 쇼핑할 때 애교 물건도 많이 샀던 거 기억 안 나요? 그 물건 아직 내 차 트렁크에 있잖아요. 그걸 들고 가서 물건 주러 왔다고 하면 되잖아요.”맞는
나는 형수님과 함께 내려가 애교 누나의 짐을 챙겼다. 그러고 형수님과 함께 애교 누나네 집 문을 두드렸다.한참이 뒤 애교 누나는 문을 열자 형수는 이내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걸었다.“뭐했길래 문 여는 데 이렇게 오래 걸려? 혹시 무슨 부끄러운 짓 했어?”가뜩이나 발그레하던 애교 누나의 볼은 더 홍당무가 되어버렸다.형수는 일부러 애교 누나한테 그런 동영상을 보내고 이런 말장난을 쳤다.하지만 애교 누나는 딱 잡아떼며 인정하지 않았다.“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나 방금 샤워했어.”“내가 보낸 것 때문에 샤워한 거야?”형수는 애교 누나를 놀리며 안으로 들어갔다.그러자 애교 누나가 찔리는 듯 설명했다.“나한테 뭘 보냈는데? 나 안 봤어.”‘엥? 이렇게 뻔한 거짓말을 한다고? 내가 방금 분명 봤는데. 심지어 느낌까지 왔다고.’하지만 나는 이 말을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그렇게 되면 내가 몰래 훔쳐봤다는 걸 들키게 될 테니.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형수님을 따라 연기했다.“형수님, 애교 누나한테 뭘 보냈어요?”그 말에 애교 누나가 다급히 끼어들었다.“뭐긴 뭐예요. 이모티콘이죠.”그때 형수가 보내는 눈빛을 읽은 나는 얼른 물건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애교 누나, 낮에 있었던 일은 잘못했어요. 진심으로 사과할게요. 그러니까 화내지 마요.”형수도 옆에서 연기하기 시작했다.“뭔데 화를 내? 두 사람 무슨 일 있었어?”“수호 씨가 말 안 했어?”애교 누나가 불안한 듯 묻자 형수는 이내 연기 혼을 불태웠다.“그냥 오후에 간장 사러 갔다가 마트에서 마주쳐 인사했는데 화내더라고만 했는데. 그것 때문에 자기가 뭐 잘못했느냐면서 한참을 물어봤어.”“아마 그걸 해결하지 못하면 오늘 잠도 못 잘걸. 그래서 물건도 가져다줄 겸 같이 왔어. 두 사람 사이에 뭔 일이 있었는데? 내 앞에서 말해봐.”애교 누나는 입술을 깨물며 부끄러워했다.이쯤 되면 내가 나설 차례라 나는 얼른 끼어들었다.“형수님, 이건 저랑 애교 누나 일이니까 둘이 해결하고 싶어요.”“
솔직히 애교도 속으로는 찔렸다.그때 그 모습을 보고 소리 지르거나 바로 도망치지 않고 한참을 바라봤다는 걸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려 견딜 수 없었다.그러다가 수호가 또 그 일을 입 밖에 꺼낼까 봐 얼른 말을 잘랐다.“그럼 저 용서해 주는 거예요?”내가 조심스럽게 물어보자 애교 누나는 낮게 콧방귀를 뀌었다.“그 일은 모르고 그랬다. 하지만 마트에서는 왜 그랬는데요? 왜 나한테 그런 말을 했어요? 내가 그렇게 가벼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이것 때문에 화난 거였어?’이제 한번 본 사람한테 그런 말을 했으니 내가 본인을 가볍게 봤다고 생각한 모양이다.그리고 그 계기는 아침에 했던 그 마사지 때문이었다.아침에 내가 그렇게 서슴없이 만져 댔는데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았으니 내가 오해해서 그런 말을 했다고 생각했으니까.그래서 후회하고 괴로워했던 거였다.태연은 가벼운 유혹도 뿌리치지 못하는 자신이 못내 미웠다.젊은 총각이 마사지하면서 서슴없이 만져대는 걸 거절도 하지 않았으니 상대가 저를 가벼운 사람이라고 오해한 거라고 생각했다.유부녀이면서 본분도 지키지 않은 자신이 못내 원망스러워 애교는 끝내 눈시울을 붉혔다.한편 나는 애교 누나가 이런 반응을 보일 거라고 생각지도 못한 터라 당황해서 다급히 변명했다.“애교 누나, 저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요. 누나처럼 착하고 다정하고 예쁘기까지 한 여자를 두고 제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겠어요? 누나는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여자예요.”그 말을 들은 애교는 커다란 눈으로 수호를 바라봤다.지난 몇 년 동안 애교를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여자’라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심지어 5년이라는 결혼생활 동안 남편조차 애교에게 달콤한 말을 속삭이지 않았다.그런데 갑자기 이런 말을 들으니 이제 막 연애에 눈을 뜬 소녀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마치 정민과 연애하던 그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하지만 아쉽게도 눈앞의 남자는 남편이 아니었다.그런 애교 누나의 마음을 알 리 없는 나는 한참 동안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이런 상황에 사실대로 말하면 애교 누나가 나를 변태라고 오해할 거라는 생각에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아니에요, 평소에는 이러지 않아요.”“그럼 뭐예요? 나를 봐서 이렇게 됐다는 뜻이에요?”애교 누나의 얼굴은 홍당무가 되어 있었다.“아니에요. 저 누나한테 무례하게 굴 생각 정말 없어요. 이렇게 된 건 누나가 너무 예뻐서 그래요. 남자는 예쁜 여자한테 끌리는 법이니까요.”내 말에 애교 누나의 얼굴은 점점 달아오르더니 급기야 내 눈을 피하기 시작했다.나는 애교 누나가 또 화를 낼까 봐 다급히 말을 보탰다.“제가 누나한테 마음이 있는 건 맞지만 절대 가볍게 생각하지 않아요. 누나는 제 마음속에 여신 같은 존재예요. 누나처럼 다정하고 예쁜 여신 본 적 없어요.”“됐어요. 그만해요. 여신은 무슨. 태연이 수호 씨를 그렇게 점잖다고 칭찬하던데, 이제 보니 그런 것 같지만은 않네요.”애교 누나는 이러다가 자신을 통제할 수 없을까 봐 걱정이 됐는지 얼른 내 말을 잘랐다.애교 누나가 화를 내지 않자 나는 이내 기분이 좋아졌다.“그럼 이제 저 용서하는 거죠?”“이번 일은 이렇게 넘어갈게요. 하지만 앞으로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마요. 나 수호 씨 형수 친구예요. 나아 차이만 해도 열 살은 족히 넘는다고요.”그 말을 듣는 순간 날아갈 것만 같던 마음이 나락으로 떨어졌다.‘애교 누나는 역시 보수적이네. 어떻게 공략해도 먹히지 않으니 원.’이러다가 언제 애교 누나를 손에 넣을지 걱정이다.형수는 건드릴 수 없고, 애교 누나는 공략하기 너무 힘들고, 나만 가운데서 괴로웠다.하지만 생각할수록 아래가 점점 뻐근해 났다.“이, 이거 왜 또 커졌어요?”애교 누나는 얼굴이 터질 것처럼 빨개졌지만 시선은 애 아래에 계속 고정했다.나는 너무 난감해 고개를 푹 숙이고 중얼거렸다.“어쩔 수 없어요. 원래 이 사이즈라.”“그래도 너무 큰데. 내 남편보다 한참은 더 크잖아.”애교 누나가 하도 작은 소리로 중얼거려 제대로 듣지 못한 나는 무의식적으로 물었다.“방
하지만 형수의 마음은 내가 아니라 형수의 친구 애교 누나한테 가 있었다.형수는 애교 누나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그리고 애교 누나는 얼굴이 사과처럼 빨갛게 익어서는 내 눈을 보지 못했다.애교 누나가 이럴수록 매우 갈망하고 있다는 걸 설명했다.하지만 애교 누나 같은 성격은 아무리 원하고 갈망해도 마음속에 담아둔 채로 절대 말하지 않는다.그렇기에 이런 사람들의 속내를 파헤치려면 표정을 잘 살펴야 한다.형수는 마침 그 분야의 고수기도 하기에 애교 누나의 표정을 보자마자 생각을 읽었다.“그럼 얼른 휴식해. 우리는 이만 가볼게. 내일 우리 집에 오는 거 잊지 마. 수호 씨한테서 마사지 받아야지.”형수는 이 말을 하면서 나에게 나가자는 눈빛을 보냈다.솔직히 떠나기 아쉬웠지만 나는 할 수 없이 형수를 따라 애교 누나 집을 나섰다.그렇게 집으로 돌아오자 형수는 함박웃음을 지었다.“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요. 애교도 몸이 달아올랐어요.”하지만 나는 아직도 애교 누나가 나한테 화난 것 같았다.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찾지 못한 나는 결국 형수에게 물었다.“하지만 아까 애교 누나가 저와 대화하다가 갑자기 화냈어요. 혹시 제가 무슨 실수라도 한 걸까요?”형수는 나를 소파에 앉히며 차근차근 설명했다.“그건 수호 씨한테 화난 게 아니라 본인한테 화난 거예요.”그 말에 나는 어리둥절했다.“본인한테 화났다니요? 왜죠?”“수호 씨한테 딴마음 품었으니까 그렇죠. 본인은 항상 착하고 바른 사람이라 아내의 본분을 잊으면 안 된다고 해왔는데 말이죠.”나는 형수의 말을 알 것 같으면서도 여전히 멍했다.“애교 누나는 아무것도 안 했어요. 오히려 저더러 그러지 말라고 했지.”형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여자는 남자랑 달라요. 남자는 나쁜 생각이 들면 그걸 어떻게 실행할지 생각하지만 여자는 달라요. 특히 유부녀는 더 그래요. 우선 죄책감을 느끼고 그다음 본인을 탓하거든요.”“애교 성격 알잖아요. 얼마나 보수적인지. 불편해도 참고 보는 사람인데 왕정민을 배신하는 일은
“알아요. 걱정하지 마요. 난 약속한 건 지키니까.”형수의 말에 나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혼자서 직접 하는 것과 다른 사람이 도와주는 건 완전히 다르니까.그렇게 희고 보드라운 순을 직접 느낄 수 있다니 너무 기대됐다.“그런데 지금은 안 돼요. 조금만 기다려요.”형수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형이 돌아올까 봐 걱정한다는 걸 알았으니까.솔직히 나도 무서웠다.“그럼 저는 방에서 기다릴게요. 이따가 찾아와요.”“그래요, 가 봐요.”나는 형수와 작별한 뒤 방으로 들어와 팬티만 남겨둔 채 모든 옷을 벗어버렸다. 그러고는 이불 속으로 들어가 잠시 뒤 상황을 기대했다.이건 내가 평생 처음으로 여자의 도움을 받는 거라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얼마 뒤 밖에서 문소리가 들리더니 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식사를 하겠냐는 말에 형이 먹고 왔다고 답하자 형수는 이내 형을 끌어당기며 말했다.“당신 잠깐 이리 와. 할 말 있으니까.”곧이어 문소리가 들리더니 두 사람의 소리가 사라졌다.나는 형수가 형한테 무슨 말을 할지 너무 궁금해 벽에 귀를 대고 엿들었다.하지만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어 결국 포기하고 침대에 누웠다.얼마 뒤 옆방에서 쨍그랑 소리가 들려오더니 내 방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형이 나한테로 달려왔다.너무 놀란 나머지 나는 다급하게 이불을 덮었다.아래가 이런 상태인 걸 형한테 들키면 그것대로 쪽팔릴 터였다.“형, 무슨 일인데 이러는 거야?”한편으로 형한테 너무 미안해 자꾸만 마음이 쿡쿡 찔렸다.그때 형이 나한테로 다가오며 말했다.“수호야 오늘 나랑 같이 자자.”“어?”‘나랑 잔다고? 그럼 이따가 형수님이 나를 도와주지 못하잖아? 내가 그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 왔는데, 갑자기 나랑 자겠다니?’너무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내가 한창 난감해하고 있을 때, 형수가 내 방으로 쫓아왔다.“진동성, 당장 나랑 방에 돌아가.”“자기야, 나 요즘 정말 피곤해. 밤에 자다가 코라도 골면 자기 잠자는데 방해되잖아. 난 수호랑 잘게
동성은 체면을 구기지 않으려고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그러자 태연이 동성의 귀를 잡아당기며 말했다.“피곤한 것도 하루 이틀이지. 예전에는 왜 괜찮았는데? 결혼 초기 때를 돌이켜 봐, 하루에 7, 8번도 더 했어. 심지어 새벽 2, 3시까지 나를 놓아주지도 않았으면서. 회사에서 돌아오면 꼭 한 번은 했잖아.”“그런데 지금 봐 봐. 내가 얼마나 힘쓰는데 왜 맥을 못 추느냐고? 그러면서 문제없다고?”태연은 말하다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갓 결혼했을 때 아기를 갖고 싶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회사가 자리를 잡으면 갖자고 설득해서 매번 피임약을 챙겨 먹었는데.2년쯤 되면서 회사가 자리를 잡아 다시 요구를 하니 이제는 남편이 맥을 못 추니 태연은 혼자만 노력한다는 생각에 억울하고 분했다. 애는 혼자서 생기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태연이 울자 동성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울지 마, 자기야. 그래. 자기 말대로 병원 가보자.”그 말에 태연은 끝내 울음을 그치더니 동성의 품에 안겼다.“나도 자기 애 빨리 낳아주고 싶어서 이러는 거야. 이렇게 계속 미루다가 내가 서른 중후반이 되면 애 낳는 것도 힘들어.”동성은 마음 아픈 듯 태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나도 알아. 우리 함께 노력하면 애는 꼭 생길 거야.”...그 시각 나는 끊임없이 시간을 확인하며 형수가 오기를 기다렸다.시계가 9시에서 10시, 10시에서 11시가 되니 나는 애간장이 탔다.그러다 11시 십몇 분이 되었을 때 방문이 슬그머니 열렸다.어둠 속에서마저 형수의 풍만한 몸매는 또렷하게 보였다. 형수는 슬립을 입은 채로 나에게 걸어왔다.“수호 씨, 자요?”형수가 낮은 소리로 묻자 나는 다급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아니요. 기다리고 있었어요.”“수호 씨 형 이제 막 잠들었어요. 오래 기다렸어요?”‘네, 기다리다 몸이 타들어 갈 것 같았어요. 형수님이 안 올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데요.’나는 이 말을 솔직히 내뱉지 않았다. 내가 온종일 형수를 상대로 그런 생각을 했다는 걸
칼을 쥐고 있던 내 손은 저도 모르게 부들부들 떨렸다.하지만 나는 여전히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렇다면 앞으로 치료해 주지 않으면 될 거 아니야. 왜 꼭 죽이려 드는 건데?”“네놈이 거슬리니까.”나는 그 이유에 너무 놀라 멍해졌다.‘사람이 거슬린다고 죽이려 든다고?’‘고작 임천호의 개인 정태곤도 사람 목숨을 벌레 보듯 하는데, 임천호는 어떨까?’나는 더 이상 생각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순간 이게 임천호도 묵인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그렇다는 건 소여정이 나를 다시 찾아온 순간, 내 목숨은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는 뜻이다. 다만 그동안은 내가 소여정과 접촉하지 않아 죽일 이유가 없었을 뿐.하지만 오늘, 내가 소여정의 몸에 손을 대는 걸 정태곤이 직접 봤으니 죽일 이유는 충분해졌다.나는 놀랍게도 소여정을 원망하는 대신 불쌍한 내 운명을 탓했다.그동안 소여정을 피하면서 선을 넘지 않으려고 그렇게 최선을 다했건만, 저승사자는 끝내 나를 찾아왔다.결국 나와 소여정은 같은 사람이었다. 모두 자기 운명을 제 마음대로 좌우지하지 못하는 사람.“다시 한번 말할게. 칼 이리 내.”정태곤은 손을 내밀며 차갑게 말했다.그 순간 나는 저도 모르게 대담한 질문을 내던졌다.“날 어떻게 죽일 건데?”“토막 내서.”정태곤은 소름 끼치는 대답을 했다.‘나를 토막 내겠다면서 칼을 내놓으라고?’나는 벌레가 아니라 가만히 죽기만을 기다릴 수 없었다.나는 정태곤의 얼굴을 빤하 바라봤다.예전 같았다면 정태곤의 얼굴을 보기 두려워했을 거다. 특히 정태곤의 두 눈을 볼 때면 저도 모르게 오싹했으니까.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나는 놈의 두 눈을 빤히 쳐다봤다.나는 내 안의 두려움을 이겨내고 죽는 걸 두려워하던 나약한 나를 이겨냈다.나는 이를 악문 채로 버럭 소리쳤다.“싫어!”정태곤은 내 대답에 살짝 놀란 듯했다. 내가 저한테 감히 이렇게 높은 소리로 말할 줄은 몰랐으니까. 하지만 그는 이내 음침한 미소를 지었다.“그래. 그러면 네 사지를 하나하
정태곤은 매섭고도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봤다.“등신. 고작 한 대 맞은 거로 못 견디겠어? 이런 주제에 여정 아가씨 눈길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정태곤은 워낙 변태 같은 놈이라 이 상황에 살려달라고 빌면 더 심하게 괴롭힐 게 분명했다.게다가 이 상황에서 믿을 건 오직 나 자신뿐이었다.그동안 일부러 소여정을 피한 건 임천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함이었는데, 내가 아무리 노력해 봤자 닥칠 미래는 결국 닥치고 말았다.이건 나더러 재난을 겪어 보라는 운명의 장난 같았다.피할 수 없다면 마주하는 수밖에. 나는 그동안 찌질하고 겁 많았던 게 아니다. 그저 번거로운 일에 연루되기 싫었을 뿐이지. 하지만 진짜 일이 닥치면 나도 등을 곧게 펴고 용감히 맞설 수 있다.나는 손을 꽉 그러쥐고 정태곤이 방심한 틈을 타 놈의 관자놀이를 세게 가격했다.관자놀이는 머리 중에서 가장 취약한 혈 자리다. 심지어 한 번에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다.물론 내 실력으로 정태곤을 일격에 죽일 순 없었지만, 적어도 방금 당한 걸 그대로 돌려주었다.관자놀이를 맞은 정태곤은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잠깐 의식을 잃었다.나는 그 틈에 정태곤의 칼을 빼앗아 신속히 차 밖으로 뛰어내렸다. 하지만 도망치지는 않았다. 정태곤의 속도가 나보다 훨씬 빠른 걸 알기에 도망치면 잡힐 게 뻔했으니까.나는 그저 두 손으로 칼을 꼭 쥔 채 싸늘한 눈빛으로 정태곤을 바라봤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먼저 공격해 정태곤을 죽여야 하나 생각했다.하지만 사람을 살려야 하는 손으로 사람을 죽이자니 도무지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내가 머뭇거리는 사이, 정태곤은 머리를 문지르며 차에서 내렸다. 놈의 눈은 이미 빨갛게 핏발이 서 있었다. 심지어 나를 보는 눈빛은 더 날카롭고 독기가 차 넘쳤다.“감히 나를 때려? 등신 주제에 감히 나를? 칼 이리 내.”정태곤은 명령조로 말했다. 놈의 눈에 나는 반항도 못 하는 벌레인 듯했다. 그가 칼을 내놓으라고 명령하면 군말 없이 내놓을 정도로 나약한. 그러면 놈은
“너 솔직하게 말해. 대체 무슨 일이야?”소여정은 절대 아무 일 없이 약속을 잡고 커피나 마시며 수다를 떨 사람이 아니다.이건 마치 일부러 회포를 풀면서 뒷일을 맡기는 것만 같았다.여러 가지 추측이 머리를 내밀어 윤지은은 너무 초조했다.윤지은은 소여정한테 깊은 애정을 갖고 있다. 비록 평소에 소여정을 경멸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소여정한테 일이 생기는 건 절대 바라지 않는다.다만 두 사람 모두 고집이 세 먼저 고개를 숙이고 살갑게 말하는 사람이 없을 뿐이었다.“나한테 무슨 일이 있다고 그래? 나 임천호 애 낳을 생각이야. 애가 생기고 내 지위가 안정되면 앞으로의 생활도 분명 점점 좋아질 거야.”소여정은 말하면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하지만 그 모습은 윤지은의 눈에 일부러 찔리는 마음을 숨기는 것으로밖에 안 보였다.윤지은은 너무 불안했지만 소여정이 끝까지 사실을 털어놓지 않아 어쩔 수 없었다....한편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나는 퇴근하자마자 사장님의 차를 몰고 사장님 집에 돌아갈 준비를 했다.하지만 차에 오른 순간 자꾸만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다만 그게 뭔지 정확하게 말할 수 없어 생각을 뒤로한 채 시동을 걸었다.차가 한참 동안 달렸을 때, 내 목덜미에 갑자기 차가운 칼날이 닿았다.그 순간 나는 흠칫 놀라 얼어붙었다.곧이어 정태곤의 싸늘한 말소리가 들려왔다.“길옆에 차 세워.”나는 고개를 숙여 칼을 확인했다. 강철로 만들어진 칼이라 제대로 찌르면 뼈까지 부러질 수 있었다.‘이런 칼을 내 목에 겨누다니, 정말 날 죽일 작정인가?’나는 아까부터 이상함을 감지했지만 자세히 확인하지 않은 게 못내 후회되었다.그때 만약 도망쳤더라면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나는 마지못해 차를 길가에 세웠다.“뭐 하자는 거야?”나는 가슴이 벌렁거렸지만 애써 침착하게 물었다.정태곤은 한 손으로 내 목을 잡고 칼을 쥔 다른 손을 내 목에 눌렀다. 그 순간 칼날이 피부를 찢는 감각이 선명하게 느껴져 나는 다급히 귀띔했다.“조심해. 이러
바쁜 업무를 모두 끝낸 뒤에야 나는 윤지은이 당부한 일이 생각났다.윤지은이 일부러 이런 방식으로 나를 겁주는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친해진 사이인지라 부탁하는 걸 안 도울 수는 없었다.하지만 나는 윤지은한테 전화해 불만을 토로했다.“일을 부탁하고 싶으면 나한테 말하면 될 것이지 왜 서예지 씨와 동준 형님을 보내 겁을 줘요? 직접 부탁하는 게 그렇게 어려웠어요?”윤지은이 평소에 하도 도도하게 굴어 나는 그녀의 기를 죽이고 싶었다.하지만 윤지은의 말투는 여전히 차가웠다.[왜? 내가 겁만 주는 것 같아? 내가 정말 양동준더러 수호 씨를 어떻게 하라고 하지 못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나는 피식 웃었다.“제가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지은 씨는 원래 안 그럴 거잖아요.”[그럼 지금 당장 양동준더러 네 팔 부러뜨리라고 할까?]“그러면 재미없죠. 우리 이미 친한 사이인데, 좀 좋게 좋게 얘기할 수는 없어요?”[없어.]‘윤지은, 내가 언젠간 너를 내 앞에 무릎 꿇고 빌게 할 거야.’[다른 용건 있어? 없으면 끊을게.]윤지은은 내가 마치 본인한테 돈이라도 빚진 것처럼 찬 바람이 쌩쌩 부는 태도였다.나도 더 이상 빈정대는 말을 들어주기 싫어 전화를 끊어버렸다.나는 나중에 따로 방법을 대 윤해철과 만날 생각이었다. 윤해철의 몸을 치료해 주면 다른 사람이 옆에서 부추기지 않아도 윤해철이 직접 아내를 집에 데려오려고 안달복달할 테니까....카페 안.윤지은은 차가운 얼굴로 소여정을 바라보며 핸드폰을 천천히 내려놨다.“야심한 밤에 왜 불러내고 그래?”소여정은 싱긋 웃으며 제 앞에 있는 친구를 바라봤다.“무슨 말을 그렇게 섭섭하게 해? 친구끼리 마주 앉아 수다 떨면서 커피 한잔하는 것도 안 돼?”그 말을 들은 윤지은의 눈은 휘둥그레졌다.“너랑 내가? 수다를 떨며 커피를 마신다고? 너 무슨 생각 하는 거야?”“안돼? 학교 다닐 때 우리 사이가 제일 좋았잖아. 같은 이불 덮고 자기도 하고.”소여정의 말은 사실이었다.사
두 사람은 말을 마친 뒤 곧바로 뒤돌아 떠나버렸다. 하지만 내 마음은 전보다 확실히 무거워졌다.‘정태곤이 나를 죽이려 한다고?’‘어쩜 그렇게 간이 크지? 임천호가 나를 죽이라고 명령을 내린 것도 아닌데 죽이려 하다니?’‘내가 방금 자기를 막아섰다고 서지예 씨가 나 겁주는 거 아닐까?’나는 이내 고개를 마구 저었다. 쓸데없는 생각으로 일에 지장 주고 싶지 않았다.그날 오후 주해진이 나를 찾아와 협력할 의향이 있다고 말했다.“두 사람한테 지분 나눠줄 수 있어. 하지만 5퍼센트밖에 못 줘.”그 말을 들은 민우의 얼굴은 이내 어두워졌다.“5퍼센트? 그것도 지분이라고? 성의가 없네. 그냥 가. 우린 협력할 생각 없으니까.”주해진은 서두르지 않고 차분하게 설명했다.“천수당은 나랑 김진호가 함께 인수한 건데 지분이 각각 50퍼센트거든. 앞으로 천수당에 드는 각종 비용도 다 우리가 부담할 거야. 두 사람한테 5퍼센트씩 나눠주는 것도 남는 장사일걸. 만약 지분을 더 원한다면 따로 투자하던가.”“얼마를 투자하면 50퍼센트를 떼어 줄 건데?”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주해진도 쓸데없는 말은 삼가고 각종 청구서와 데이터를 내놓았다.“천수당의 현재 가치는 5억 6천만 원이거든. 만약 50퍼센트를 원하면 2억 8천만 원을 투자하면 돼.”2억 8천만 원이라는 숫자는 천문 숫자나 다름없었다. 나와 민우한테는 너무 이루기 어려운 목표기도 했고.하지만 나는 50퍼센트의 지분을 갖고 싶었다.따로 사업을 하려면 길게 봐야 하기에 적어도 발언권과 결정권은 손에 쥐어야 했다.주해진은 우리를 파트너로 원하는 입장이라 이미 태도를 많이 낮췄다. 하지만 천수당 장사가 잘되면 주해진과 김진호가 독단적으로 행동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나는 민우랑 힘들게 시작한 사업을 나중에 딴 사람한테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2억 8천만 원이 적은 돈은 아니지만 한번 시도해 보고 싶어.”나는 내 마음을 솔직히 털어놓았다.그러자 주해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두 사람
“어렵다고? 이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어? 사는 것도 어려운데.”‘설마 그 정도라고?’소여정은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구렁텅이에서 굴러본 적 없으니까 내 말이 실감 나지 않을 거야. 수호 씨가 왜 단단해지지 못하는 줄 알아? 그동안 생활이 너무 평탄해서 단련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야.”나는 그 말을 동의할 수 없었다.“제 생활이 평탄하다고요? 이미 충분히 파란만장하다고 생각하거든요?”“하하, 조금 우여곡절을 겪었다고 자기 생활이 파란만장하다고 하더니. 그럼 구렁텅이에서 굴러본 사람들은 어떻겠어?”나는 왠지 소여정이 나한테 시비를 거는 것 같았다.‘왜 내가 꼭 구렁텅이에서 굴러야 하는 건데? 난 지금 당장 강해지고 싶은데.’“제가 책임감 없다고 말하고 싶은 거잖아요. 전 아직 저를 증명할 기회가 없었던 것뿐이에요. 언젠간 증명해 보일게요.”소여정은 싱긋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에서 나를 믿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나는 소여정에게 약을 처방해 주고 어떻게 약을 먹고 어떻게 몸조리해야 하는지 주의 사항을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소여정은 그 말을 듣고는 계산을 한 뒤 떠나버렸다.밖에 나와 보니 서지예와 양동준은 역시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윤지은은 왜 갑자기 나를 찾는지 의문이었다.나는 두 사람에게 다가가 물었다.“지은 씨는 저를 왜 찾는데요?”서지예는 방금 전 일 때문에 안색이 여전히 어두웠다.“사모님 일 때문에. 사모님이 아가씨 곁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거든. 아가씨는 사모님이 얼른 댁에 돌아가셨으면 하고.”그 말을 들으니 순간 의문이 들었다.“그게 저랑 뭔 상관인데요?”“사모님한테 약속한 거 잊었어? 윤 회장님이 먼저 굽히지 않으면 사모님은 절대 안 돌아가. 아가씨가 뱉은 말은 지키라고 전해달래. 만약 뱉은 말도 지키지 못하면 남자도 아니라고.”그 일이라면 당연히 잊지 않았다. 다만 요즘 사장님 일 때문에 그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것뿐이다.‘별것도 아닌 일로 호들갑은.’내
“그래요. 알았어요. 잘 생각해 볼게요.”소여정은 서지예의 말을 마음에도 두지 않은 듯 건성으로 대답했다.서지예는 소여정의 그런 태도에 화낼 기운도 사라졌다.“사람이 어쩜... 그렇게 뻔뻔할 수가 있어?”소여정은 생긋 웃었다.“서지예 씨, 말은 그렇게 하면 안 되죠. 내가 왜 뻔뻔해요? 꾸짖으니 마음에 깊이 새기고 진지하게 생각해 보겠다고 한 건데, 대체 어쩌라는 거예요?”서지예는 화가 치밀어 버럭 소리쳤다.“당장 임천호 곁에서 떠나.”“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해요?”소여정이 되물었다.하지만 서지예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다.“왜 불가능한데. 네가 임천호 옆에 딱 붙어서 떠나기 싫어하는 이상 충분히 가능하잖아.”소여정은 피식 웃으며 일어섰다.“이건 명확히 해야 할 것 같네요. 난 임 회장님한테 빌붙어 떠나지 않으려 한 적 없어요. 임 회장님이 저를 옆에 붙잡아둔 거예요. 나처럼 연약한 여자가 임 회장님이 가지 말라고 하는데 어떻게 떠나요? 죽고 싶으면 모를까.”“내가 그쪽 언니랑 아는 사이도 아닌데, 두 분 결혼 생활 방해하지 않으려고 내 목숨까지 내 바쳐야 해요? 난 그 정도로 위대하지 않아요.”소여정의 말은 듣기 거북했지만 모두 사실이었다.만약 소여정이 떠나기 싫은 게 아니라 떠나지 못하는 거면, 이건 소여정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소여정도 자기를 희생하면서 도덕을 지키고, 유부녀의 한 맺힌 원한을 만족시킬 정도로 위대하지 않았다.서지예는 소여정이 마음에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얄미웠다.마음에 드는 건, 소여정의 총명함이었다. 서지예의 언니는 소여정에 비하면 확실히 많이 부족했다. 매일 울기나 하고 임천호의 환심을 사는 법을 도통 몰랐으니. 게다가 소여정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이번 싸움에서 서지예는 완전히 패했다.“서지예 씨, 혹시 볼 일이 더 남았어요? 없으면 이만 나가주세요.”처음부터 끝까지 나는 한마디도 끼어들지 못했다.하지만 여자들 간의 싸움이 얼마나 격렬한지 제대로 실감했다.서
나는 쓸데없는 일에 참견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서지예가 언니 때문에 소여정을 아니꼽게 여기는 마당에 둘이 만나면 분명 소여정을 가만두지 않을 게 뻔했다.지금은 내가 화인당을 관리하고 있는 마당에 소란이 일지 않도록 하는 것도 내 책임이었다. 때문에 나는 얼른 다가가서 서지예를 막아섰다.“사모님, 소여정 씨는 병 보러 온 거예요. 그러니 절대 시비 걸면 안 돼요.”서지예는 나한테 싸늘한 눈빛을 쏘아 댔다.“사모님? 방금 날 막아선 주제에 날 사모님이라 부를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비켜.”“싫어요.”“양동준을 스승으로 모시고 싶지 않은 모양이네?”서지예는 눈을 부라리며 화가 난 듯 말했다.그 말에 나는 다급히 변명했다.“당연히 아니죠. 저 동준 형님을 스승님으로 모시고 싶다고 생각한 거 하루 이틀이 아니에요. 진짜 고민 오래 했어요.”“그런데도 나한테 그렇게 말해?”서지예는 화가 난 듯 나를 노려봤다.나는 얼른 서지예 앞으로 다가가 설명했다.“저도 다 스승님과 사모님을 위해서 이러는 거예요.”“어디서 개소리야? 그 여자가 무서워서 이러는 거겠지.”“전 소여정 씨 무서워하지 않아요. 두 분이 여기서 싸우면 화인당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칠까 봐 걱정하는 거예요. 여기 윤지은 씨 친구 남편이 운영하는 곳이에요. 윤지은 씨는 사모님이 모시는 아가씨잖아요. 만약 두 분이 싸우기라도 하면 윤지은 씨한테 어떻게 설명하려고요?”서지예는 여전히 차가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아가씨한테 설명하는 건 내가 알아서 해.”“설명한다고 해도 윤지은 씨가 가운데서 얼마나 난처하겠어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서지예는 여전히 나를 싸늘한 눈빛으로 바라봤다.“그래서 나더러 이대로 참으라고? 정수호, 그러고도 남자야?”서여정은 말을 마치자마자 나를 옆으로 밀쳐버리고 마사지룸으로 행했다.보아하니 내 말은 귓등으로 듣고 심지어 나를 경멸하는 것 같았다.나도 이러는 게 이기적이라는 걸 알지만 두 사람이 여기서 소란을 피우는
그때 소여정이 내 얼굴을 톡톡 두드렸다.“뭔 생각을 그렇게 넋 놓고 해?”“아무것도 아니에요.”나는 소여정한테 이 일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그러자 소여정은 제 발을 거두었다.“됐어. 이제 내 몸이나 진찰해 줘. 중요한 건 이거야. 내 몸이 호전되지 않으면 임천호는 분명 내가 거짓말했다고 생각할 거야. 그러면 수호 씨도 무사하지 못 할 거야.”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투덜댔다.“다른 사람 찾으면 안 돼요? 임천호가 가뜩이나 우리 관계를 의심하는데, 왜 하필 나한테 치료받으러 온 거예요? 나 엿 먹이려고 작정했어요?”“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수호 씨랑 나 사이 의심하지 말라고 그런 거잖아. 생각해 봐. 수호 씨가 의사고 내가 환자면 환자가 의사한테 진찰받으러 오는 건 당연한 거잖아. 오히려 의심받았다고 찾아오지 않는 게 이상하지. 임천호는 분명 철저하게 조사할 거야. 워낙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 후환을 막기 위해 수호 씨를 죽일지도 몰라.”“그러면 제가 오히려 소여정 씨한테 고마워해야겠네요?”사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하지만 소여정은 이 상황에도 웃음이 나오는지 농담조로 말했다.“고마워할 건 없어. 내 몸이나 잘 치료해 줘. 내가 임천호한테 약속했거든. 임천호 아이 낳아주겠다고.”“정말 임천호 아이 낳아줄 거예요? 임천호가 명분을 주는 것도 아니잖아요.”“난 명분 따위 신경 안 써. 하지만 아이라도 안 낳으면 내 상황이 위험해져.”나는 소여정이 아닌 지라 소여정의 상황 따위는 모른다. 때문에 뭐라 할 수도 없었다.그저 나더러 몸을 치료해달라고 하니 치료할 수밖에.한바탕 진찰을 한 뒤, 나는 진지하게 말했다.“소여정 씨는 기혈이 좀 부족한 것 말고는 별 이상 없어요. 약 처방해줄게요. 약 먹으면서 몸조리하면 금방 나을 거예요.”“침 맞을 필요는 없는 거야? 마사지거나.”소여정은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실망하게 해서 어쩌죠? 침은 맞을 필요 없어요. 마사지도 할 필요 없고요.”소여정은 임천호의 여자다. 임천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