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말캉한 입술이 느껴지기는커녕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눈을 떠보니 형수는 어느새 욕실 문 앞에서 팔짱을 낀 채 나를 꿰뚫어 볼 것처럼 바라보고 있었다.“수호 씨, 방금 뭐한 거예요?”형수의 질문에 나는 가슴이 콕콕 찔렸다.나쁜 짓 좀 하려고 했더니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덜미만 잡히다니.너무 쪽팔렸다.게다가 더욱 중요한 건 어렵게 용기를 냈는데 형수가 그걸 망쳐버렸다는 거였다.나는 말을 더듬으며 황급히 형수의 눈을 피했다.“형수님, 잘못했어요. 앞으로 다시는 안 그럴게요.”“천천히 씻고 나와요. 나는 저녁 준비하러 갈 테니까.”형수는 이 말만 하고 밖으로 나가버렸다.그 순간 후회가 밀려왔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한 거야? 형수가 분명 나를 변태라고 생각할 텐데.’나는 내 얼굴을 세게 때렸다.“정수호! 너 어떻게 형수님한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맞지 않은 것만 해도 감지덕지해.”심지어 넋이 나가 제대로 샤워할 수 없어 대충 씻고 나서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그 시각, 형수는 주방에서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나는 주방에 가서 형수를 보고 싶었지만 그럴 배짱이 없어 내 방으로 돌아갔다.“하!”깊은 한숨을 푹 내쉬며 나는 형수에게 사과라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형수가 나를 그렇게 도왔는데, 나는 형수를 상대로 그런 생각이나 하다니, 내가 생각해도 너무했다.’나는 속으로 구시렁대며 젖은 바지를 벗었다. 그러고는 깨끗한 바지로 갈아입으려 할 때 침대에 묻은 얼룩을 발견했다. 하지만 이미 말라 있었다.‘난 분명 침대에서 한 적 없는데, 이건 어디서 났지?’나는 이때까지 형수가 나 몰래 내 침대에서 부끄러운 짓을 했다는 걸 몰랐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그러고는 곧바로 깨끗한 바지로 갈아입은 뒤 주방으로 향했다.형수가 주방에서 식사 준비를 하는 동안, 나는 마치 잘못을 저지른 어린애처럼 주방 입구에 서 있었다.“형수님, 죄송해요. 아까는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형수는 그 말에 나를 힐끗 보더니 다시
“그런데 만약 능력이 없다면 신의 자리에 앉혀도 제대로 해낼 수 없고. 그리고 아직 젊으니 더 배우라고 했어요. 그러니 한의원을 가든 말든 상관없어요.”나는 진심을 말한 것뿐인데 형수는 나를 대견하다는 듯 바라봤다.“역시 착하네요, 앞으로 크게 되겠어요.”형수는 이 말을 하면서 시선을 내 아래로 옮기더니 깜짝 놀란 듯 말했다.“방금 전에 찬물로 샤워했는데 왜 또 이렇게 됐어요?”그건 나도 답답했다.“저도 모르겠어요. 욕실에서 나온 지 얼마 안 지나서 이렇게 됐어요.”“하, 이건 수호 씨가 그동안 여자를 만나지 못해 욕구가 쌓여서 그래요. 괴로운 건 알겠지만 절대 나를 어떻게 할 생각은 하지 마요. 난 수호 씨 형수예요.”“오늘 밤 내가 알려준 대로 몰래 베란다 넘어가 봐요. 애교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면 어떻게 꼬셔야 할지도 감이 잡힐 거예요.”나는 애써 욕구를 억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면서 형수가 나를 더 이상 보지 않을까 봐 가지고 있던 마음을 포기했다.그 사이, 형수가 전화로 형이 오늘 야근 때문에 집에 늦게 들어온다는 걸 확인한 덕에 우리끼리 식사하게 되었다.식사를 마치자 날이 점점 어두워졌고, 형수는 나더러 얼른 베란다로 가라고 재촉했다.“네? 이렇게 빨리요? 이따가 가면 안 될까요?”‘아직 밖이 밝은데 너무 급한 거 아닌가?’‘아무리 그래도 애교 누나가 이 시간에 그런 짓을 할 리는 없잖아.’“수호 씨가 어떻게 알아요? 우선 넘어가서 쪼그리고 앉아 때를 기다려야죠.”형수의 끈질긴 설득 끝에 나는 결국 몰래 애교 누나네 집 베란다로 숨어들었다.역시나 침실에는 아직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거실에서 티브이 소리가 들려왔다.‘거실에서 티브이 보고 있나 보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니?’나는 무료한 나머지 베란다를 둘러봤다.그랬더니 베란다에 널려 있는 속옷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 속옷은 모두 애교 누나 거였다.‘그런데 바나나는 왜 걸려있지?’‘설마 그러려는 건 아니겠지?’이건 내 생각이 더럽다고 생각할 게 아니
그때 내 호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이 갑자기 울리기 시작해 나는 얼른 핸드폰을 꺼내 무음으로 설정했다.그리고 확인했더니 형수한테서 문자가 와 있었다.형수가 보낸 말은 이러했다.[내가 애교한테 영상을 보냈는데 꼭 볼 거거든요. 그러니 재밌는 구경할 준비나 해요.]이 문자를 본 순간 나는 형수가 어떤 영상을 보냈을지 알 수 있었다.‘이런 영상은 대체 어디서 이렇게 많이 구한 거지?’물론 이런 의심이 들기는 했지만 깊이 생각할 틈이 없이 잔뜩 흥분하여 안을 들여다보았다.그랬더니 애교 누나가 핸드폰을 보며 한참 도안 얼굴을 붉히더니 뭔가 망설이는 것 같았다.한참 뒤, 애교 누나는 옷장에서 검은색 레이스 슬립을 꺼내 침실 안 화장실로 향했다.그리고 곧바로 안에서 물소리가 흘러나왔다.애교 누나는 정말로 샤워하러 간 거였다.‘형수 말은 정말 꼬박꼬박 듣네.’이건 너무나 놀라웠다.사실 애교 누나가 정색하며 형수를 말할 거라고 생각했었다.‘역시 애교 누나가 너무 오래 외롭게 지내 남자의 품이 그리웠다는 형수 말이 맞나 보네.’약 10분 정도 지나자 애교 누나가 화장실에서 나왔다.검은색 슬립 원피스를 입고 있는 애교 누나는 무척이나 섹시하고 매혹적이었다.심지어 새하얀 가슴까지 언뜻언뜻 보였다.애교 누나의 가슴은 형수처럼 풍만하지 않았지만 봉긋 솟아 있어 속옷을 입지 않아도 무척이나 예뻤다.애교 누나는 침대에 오라가 다시 핸드폰을 꺼내 들었지만 한참 동안 아무 동작도 없었다.마치 큰 전쟁을 준비하는 사람처럼.‘설마 샤워도 했으면서 후회하는 건가?’다행히 애교 누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다시 영상을 틀었다.게다가 혼자 집에 있다는 생각에 소리를 낮게 조절하지도 않았다.내가 창밖에 숨어 있다는 건 꿈에도 모를 테니까.형수가 애교 누나한테 준 영상은 역시나 야한 동영상이었다.심지어 전희도 없이 곧바로 주제로 넘어갔다.영상 속의 시음 소리에 나는 또 괴로웠고, 애교 누나 역시 마찬가지였다.그때 애교 누나가 이불로 제 몸을 덮더니 이불 한쪽 끝을
만약 방금 그대로 달려들어 애교 누나한테 무슨 짓이라도 했으면 그대로 망했을 거다.애교 누나의 성격에 신고했을 테니 말이다.그러면 나는 강간미수라는 누명을 쓴 채 평생 떳떳하지 못하게 살아야 한다.역시 색에 미치면 물불 안 가린다더니, 방금은 내가 너무 충동적이었다.형수는 나더러 애교 누나가 뭘 하는지 지켜보라고 했지 그런 짓을 하라고 한 게 아닌데 말이다.나는 너무 두려워 누구 전화인지 상관도 하지 않고 다급히 베란다를 넘어 형수네 집으로 돌아갔다.침실에 누워있던 형수는 내가 돌아온 걸 보자 다급히 일어났다.“어땠어요?”“애교 누나가 정말 자위했어요.”“거 봐요. 내 말이 맞죠? 오랫동안 남자의 사랑에 목말라 있던 여자는 외롭고 허전하기 마련이라니까요.”형수는 한창 말하다가 내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왜 그래요? 안색이 왜 그렇게 안 좋아요?”나는 방금 전 하마터면 범죄를 저지를 뻔했다는 것만 생각하면 겁이 났다.어를 때부터 늘 어른이 시키는 대로만 하는 착한 아이였기에 불법적인 일에는 더욱더 손댈 기회가 없었다.그런데 방금은 정말 이성을 잃을 뻔했다.나는 무척 후회하며 형수를 바라봤다.“형수님, 저는 사람도 아니에요.”“대체 왜 그래요?”형수가 다급히 물어봤다.그러자 나는 아까 있었던 일을 솔직히 털어놓았다.다시 회상하니 아직도 무서웠다.“형수님, 아까 만약 그 전화가 아니었다면 저 정말 쳐들어갔을지도 몰라요. 다시 생각하니 너무 무서워요. 사회 초년생인 제가 그런 짓을 하려고 했다는 게. 저는 정말 사람도 아니에요.”너무 괴로워하는 나를 보자 형수는 마음 아픈 듯 내 손을 잡았다.“내가 미안해요.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수호 씨는 착한 사람이에요.”형수는 말하면서 복잡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형수도 내가 얼마나 참아왔고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알기에 충동적으로 행동하려한 나를 이해해 주었다.솔직히 태연이 지금껏 수호를 건드린 것도 수호가 괴로워하다가 참지 못하고 애교 누나를 덮치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고개를 저었다.“몰라요.”“일부러 애교 마음 뒤흔들려고 저러는 거예요. 매번 전화로 보고 싶다, 하고 싶다는 말만 하고 사랑은 한 번도 주지 않거든요.”그 말을 들으니 저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왔다.“인간도 아니네. 저는 밖에서 애인도 만들면서 애교 누나한테는 왜 그런대요?”형수도 따라 맞장구쳤다.“그러니까요. 왕정민은 사람도 아니에요. 배신하고 기만하는 것도 모자라 제 아내를 모함에 빠뜨리려고 머리까지 굴리다니. 이쯤 되면 인간쓰레기죠.”형수의 말을 한참 동안 들었더니 애교 누나가 너무 안쓰러웠다.남편이 밖에서 다른 애인을 만나는 것도 모르고 속고만 있다니.그런데 본인은 남편을 위해 본분을 지키겠다고, 반년 동안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남편한테 미안한 짓 안 하겠다고 그렇게 애쓰고 있으니.그때 형수가 나를 보며 또다시 물었다.“수호 씨도 궁금하죠? 내가 왜 친구인 애교한테 이 사실을 숨기는지?”궁금한 건 사실이다.형수도 내 마음을 알았는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나도 말해주기 싫어서 말 안 하는 게 아니라 말 못 한 거예요. 애교는 정말 어질고 착한 사람이거든요. 왕정민과 결혼한 뒤로 늘 남편 생각뿐이었어요. 오죽했으면 온통 남편과 행복하게 살 생각뿐이겠어요. 애교는 남편 엄청 사랑해요.”“아마 남편이 저를 배신할 거라는 건 꿈도 못 꿀 거예요. 이혼하고 싶어 저를 모함하려 한다는 건 더더욱 생각 못할 거고요. 그런데 만약 이 사실을 말하면 아마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거예요.”“진흙탕 싸움을 하면 왕정민과 그 내연녀를 절대 이기지 못할 거고, 그 내연녀의 뒷배가 엄청 대단하거든요. 그렇다고 싸움에 휘말리지 않자니 이미 사실을 알아버렸는데 마음이 편하겠어요?”형수의 말을 들을수록 애교 누나가 너무 안쓰러워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그때 형수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을 이었다.“이게 현실이에요. 그 현실에 대항할 능력이 없으면 받아들여야 하지 별수 없어요. 수호 씨 형이 나한테 이걸 말해줄 때 나도 무
“형수님, 오늘 많은 얘기해줘서 고마워요. 앞으로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진심으로 애교 누나의 마음을 얻어볼게요.”“그래요, 그렇다면 다행이네요.”형수는 말하면서 고개를 숙여 내 아래를 바라봤다.“애교 마음을 얻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거예요. 그런데 여기가 이런 것도 두고 볼 수는 없는 일이고.”나도 무척 난감했다.“혹시 저 도와줄 방법 같은 거 없어요? 오해하지 마요, 저는 아주 건전한 걸 말하는 거니까. 저 정말 너무 괴로워서 미치겠어요.”이런 쪽으로 아무런 경험도 없어 나는 형수한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다.그때 형수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며 눈빛도 점점 이상야릇해졌다.하지만 날씨가 더워서 그렇겠거니 생각하며 깊게 파고들지 않았다.“형수님, 형수님?”형수가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자 나는 무의식적으로 형수를 불렀다.그러자 형수는 놀란 토끼처럼 번쩍 정신을 차렸다.“왜 그래요? 어디 불편해요?”나는 걱정스레 물었다. 형수의 상태는 정말 어딘가 불편한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하지만 형수는 연신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그냥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 생각하고 있었어요.”“어떻게 도와줄 건데요?”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괴로움에 내가 다급히 묻자 형수는 고개를 저었다.“남자는 여자와 달라 도구의 힘을 빌릴 수 있는 게 아니에요.”“그럼 혼자 해결해도 돼요?”나는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말했잖아요, 적당히 하면 좋다고. 하지만 계속 이러면 언젠가는 몸이 망가질 거예요.”“그럼 어떻게 해요?”‘해결 방법도 없다. 그러고, 도와주지도 못한다 하고, 이건 나더러 죽으라는 거랑 뭐가 달라?’“아니면 지금 애교네 집에 갈래요?”“네? 지금요? 그건 좀 아니지 않나요? 애교 누나 아직도 저한테 화나 있는데 이렇게 늦게 찾아가면 제가 나쁜 마음 품었다고 생각할지도 몰라요.”“오늘 낮에 쇼핑할 때 애교 물건도 많이 샀던 거 기억 안 나요? 그 물건 아직 내 차 트렁크에 있잖아요. 그걸 들고 가서 물건 주러 왔다고 하면 되잖아요.”맞는
나는 형수님과 함께 내려가 애교 누나의 짐을 챙겼다. 그러고 형수님과 함께 애교 누나네 집 문을 두드렸다.한참이 뒤 애교 누나는 문을 열자 형수는 이내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걸었다.“뭐했길래 문 여는 데 이렇게 오래 걸려? 혹시 무슨 부끄러운 짓 했어?”가뜩이나 발그레하던 애교 누나의 볼은 더 홍당무가 되어버렸다.형수는 일부러 애교 누나한테 그런 동영상을 보내고 이런 말장난을 쳤다.하지만 애교 누나는 딱 잡아떼며 인정하지 않았다.“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나 방금 샤워했어.”“내가 보낸 것 때문에 샤워한 거야?”형수는 애교 누나를 놀리며 안으로 들어갔다.그러자 애교 누나가 찔리는 듯 설명했다.“나한테 뭘 보냈는데? 나 안 봤어.”‘엥? 이렇게 뻔한 거짓말을 한다고? 내가 방금 분명 봤는데. 심지어 느낌까지 왔다고.’하지만 나는 이 말을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그렇게 되면 내가 몰래 훔쳐봤다는 걸 들키게 될 테니.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형수님을 따라 연기했다.“형수님, 애교 누나한테 뭘 보냈어요?”그 말에 애교 누나가 다급히 끼어들었다.“뭐긴 뭐예요. 이모티콘이죠.”그때 형수가 보내는 눈빛을 읽은 나는 얼른 물건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애교 누나, 낮에 있었던 일은 잘못했어요. 진심으로 사과할게요. 그러니까 화내지 마요.”형수도 옆에서 연기하기 시작했다.“뭔데 화를 내? 두 사람 무슨 일 있었어?”“수호 씨가 말 안 했어?”애교 누나가 불안한 듯 묻자 형수는 이내 연기 혼을 불태웠다.“그냥 오후에 간장 사러 갔다가 마트에서 마주쳐 인사했는데 화내더라고만 했는데. 그것 때문에 자기가 뭐 잘못했느냐면서 한참을 물어봤어.”“아마 그걸 해결하지 못하면 오늘 잠도 못 잘걸. 그래서 물건도 가져다줄 겸 같이 왔어. 두 사람 사이에 뭔 일이 있었는데? 내 앞에서 말해봐.”애교 누나는 입술을 깨물며 부끄러워했다.이쯤 되면 내가 나설 차례라 나는 얼른 끼어들었다.“형수님, 이건 저랑 애교 누나 일이니까 둘이 해결하고 싶어요.”“
솔직히 애교도 속으로는 찔렸다.그때 그 모습을 보고 소리 지르거나 바로 도망치지 않고 한참을 바라봤다는 걸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려 견딜 수 없었다.그러다가 수호가 또 그 일을 입 밖에 꺼낼까 봐 얼른 말을 잘랐다.“그럼 저 용서해 주는 거예요?”내가 조심스럽게 물어보자 애교 누나는 낮게 콧방귀를 뀌었다.“그 일은 모르고 그랬다. 하지만 마트에서는 왜 그랬는데요? 왜 나한테 그런 말을 했어요? 내가 그렇게 가벼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이것 때문에 화난 거였어?’이제 한번 본 사람한테 그런 말을 했으니 내가 본인을 가볍게 봤다고 생각한 모양이다.그리고 그 계기는 아침에 했던 그 마사지 때문이었다.아침에 내가 그렇게 서슴없이 만져 댔는데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았으니 내가 오해해서 그런 말을 했다고 생각했으니까.그래서 후회하고 괴로워했던 거였다.태연은 가벼운 유혹도 뿌리치지 못하는 자신이 못내 미웠다.젊은 총각이 마사지하면서 서슴없이 만져대는 걸 거절도 하지 않았으니 상대가 저를 가벼운 사람이라고 오해한 거라고 생각했다.유부녀이면서 본분도 지키지 않은 자신이 못내 원망스러워 애교는 끝내 눈시울을 붉혔다.한편 나는 애교 누나가 이런 반응을 보일 거라고 생각지도 못한 터라 당황해서 다급히 변명했다.“애교 누나, 저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요. 누나처럼 착하고 다정하고 예쁘기까지 한 여자를 두고 제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겠어요? 누나는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여자예요.”그 말을 들은 애교는 커다란 눈으로 수호를 바라봤다.지난 몇 년 동안 애교를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여자’라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심지어 5년이라는 결혼생활 동안 남편조차 애교에게 달콤한 말을 속삭이지 않았다.그런데 갑자기 이런 말을 들으니 이제 막 연애에 눈을 뜬 소녀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마치 정민과 연애하던 그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하지만 아쉽게도 눈앞의 남자는 남편이 아니었다.그런 애교 누나의 마음을 알 리 없는 나는 한참 동안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칼을 쥐고 있던 내 손은 저도 모르게 부들부들 떨렸다.하지만 나는 여전히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렇다면 앞으로 치료해 주지 않으면 될 거 아니야. 왜 꼭 죽이려 드는 건데?”“네놈이 거슬리니까.”나는 그 이유에 너무 놀라 멍해졌다.‘사람이 거슬린다고 죽이려 든다고?’‘고작 임천호의 개인 정태곤도 사람 목숨을 벌레 보듯 하는데, 임천호는 어떨까?’나는 더 이상 생각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순간 이게 임천호도 묵인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그렇다는 건 소여정이 나를 다시 찾아온 순간, 내 목숨은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는 뜻이다. 다만 그동안은 내가 소여정과 접촉하지 않아 죽일 이유가 없었을 뿐.하지만 오늘, 내가 소여정의 몸에 손을 대는 걸 정태곤이 직접 봤으니 죽일 이유는 충분해졌다.나는 놀랍게도 소여정을 원망하는 대신 불쌍한 내 운명을 탓했다.그동안 소여정을 피하면서 선을 넘지 않으려고 그렇게 최선을 다했건만, 저승사자는 끝내 나를 찾아왔다.결국 나와 소여정은 같은 사람이었다. 모두 자기 운명을 제 마음대로 좌우지하지 못하는 사람.“다시 한번 말할게. 칼 이리 내.”정태곤은 손을 내밀며 차갑게 말했다.그 순간 나는 저도 모르게 대담한 질문을 내던졌다.“날 어떻게 죽일 건데?”“토막 내서.”정태곤은 소름 끼치는 대답을 했다.‘나를 토막 내겠다면서 칼을 내놓으라고?’나는 벌레가 아니라 가만히 죽기만을 기다릴 수 없었다.나는 정태곤의 얼굴을 빤하 바라봤다.예전 같았다면 정태곤의 얼굴을 보기 두려워했을 거다. 특히 정태곤의 두 눈을 볼 때면 저도 모르게 오싹했으니까.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나는 놈의 두 눈을 빤히 쳐다봤다.나는 내 안의 두려움을 이겨내고 죽는 걸 두려워하던 나약한 나를 이겨냈다.나는 이를 악문 채로 버럭 소리쳤다.“싫어!”정태곤은 내 대답에 살짝 놀란 듯했다. 내가 저한테 감히 이렇게 높은 소리로 말할 줄은 몰랐으니까. 하지만 그는 이내 음침한 미소를 지었다.“그래. 그러면 네 사지를 하나하
정태곤은 매섭고도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봤다.“등신. 고작 한 대 맞은 거로 못 견디겠어? 이런 주제에 여정 아가씨 눈길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정태곤은 워낙 변태 같은 놈이라 이 상황에 살려달라고 빌면 더 심하게 괴롭힐 게 분명했다.게다가 이 상황에서 믿을 건 오직 나 자신뿐이었다.그동안 일부러 소여정을 피한 건 임천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함이었는데, 내가 아무리 노력해 봤자 닥칠 미래는 결국 닥치고 말았다.이건 나더러 재난을 겪어 보라는 운명의 장난 같았다.피할 수 없다면 마주하는 수밖에. 나는 그동안 찌질하고 겁 많았던 게 아니다. 그저 번거로운 일에 연루되기 싫었을 뿐이지. 하지만 진짜 일이 닥치면 나도 등을 곧게 펴고 용감히 맞설 수 있다.나는 손을 꽉 그러쥐고 정태곤이 방심한 틈을 타 놈의 관자놀이를 세게 가격했다.관자놀이는 머리 중에서 가장 취약한 혈 자리다. 심지어 한 번에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다.물론 내 실력으로 정태곤을 일격에 죽일 순 없었지만, 적어도 방금 당한 걸 그대로 돌려주었다.관자놀이를 맞은 정태곤은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잠깐 의식을 잃었다.나는 그 틈에 정태곤의 칼을 빼앗아 신속히 차 밖으로 뛰어내렸다. 하지만 도망치지는 않았다. 정태곤의 속도가 나보다 훨씬 빠른 걸 알기에 도망치면 잡힐 게 뻔했으니까.나는 그저 두 손으로 칼을 꼭 쥔 채 싸늘한 눈빛으로 정태곤을 바라봤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먼저 공격해 정태곤을 죽여야 하나 생각했다.하지만 사람을 살려야 하는 손으로 사람을 죽이자니 도무지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내가 머뭇거리는 사이, 정태곤은 머리를 문지르며 차에서 내렸다. 놈의 눈은 이미 빨갛게 핏발이 서 있었다. 심지어 나를 보는 눈빛은 더 날카롭고 독기가 차 넘쳤다.“감히 나를 때려? 등신 주제에 감히 나를? 칼 이리 내.”정태곤은 명령조로 말했다. 놈의 눈에 나는 반항도 못 하는 벌레인 듯했다. 그가 칼을 내놓으라고 명령하면 군말 없이 내놓을 정도로 나약한. 그러면 놈은
“너 솔직하게 말해. 대체 무슨 일이야?”소여정은 절대 아무 일 없이 약속을 잡고 커피나 마시며 수다를 떨 사람이 아니다.이건 마치 일부러 회포를 풀면서 뒷일을 맡기는 것만 같았다.여러 가지 추측이 머리를 내밀어 윤지은은 너무 초조했다.윤지은은 소여정한테 깊은 애정을 갖고 있다. 비록 평소에 소여정을 경멸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소여정한테 일이 생기는 건 절대 바라지 않는다.다만 두 사람 모두 고집이 세 먼저 고개를 숙이고 살갑게 말하는 사람이 없을 뿐이었다.“나한테 무슨 일이 있다고 그래? 나 임천호 애 낳을 생각이야. 애가 생기고 내 지위가 안정되면 앞으로의 생활도 분명 점점 좋아질 거야.”소여정은 말하면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하지만 그 모습은 윤지은의 눈에 일부러 찔리는 마음을 숨기는 것으로밖에 안 보였다.윤지은은 너무 불안했지만 소여정이 끝까지 사실을 털어놓지 않아 어쩔 수 없었다....한편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나는 퇴근하자마자 사장님의 차를 몰고 사장님 집에 돌아갈 준비를 했다.하지만 차에 오른 순간 자꾸만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다만 그게 뭔지 정확하게 말할 수 없어 생각을 뒤로한 채 시동을 걸었다.차가 한참 동안 달렸을 때, 내 목덜미에 갑자기 차가운 칼날이 닿았다.그 순간 나는 흠칫 놀라 얼어붙었다.곧이어 정태곤의 싸늘한 말소리가 들려왔다.“길옆에 차 세워.”나는 고개를 숙여 칼을 확인했다. 강철로 만들어진 칼이라 제대로 찌르면 뼈까지 부러질 수 있었다.‘이런 칼을 내 목에 겨누다니, 정말 날 죽일 작정인가?’나는 아까부터 이상함을 감지했지만 자세히 확인하지 않은 게 못내 후회되었다.그때 만약 도망쳤더라면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나는 마지못해 차를 길가에 세웠다.“뭐 하자는 거야?”나는 가슴이 벌렁거렸지만 애써 침착하게 물었다.정태곤은 한 손으로 내 목을 잡고 칼을 쥔 다른 손을 내 목에 눌렀다. 그 순간 칼날이 피부를 찢는 감각이 선명하게 느껴져 나는 다급히 귀띔했다.“조심해. 이러
바쁜 업무를 모두 끝낸 뒤에야 나는 윤지은이 당부한 일이 생각났다.윤지은이 일부러 이런 방식으로 나를 겁주는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친해진 사이인지라 부탁하는 걸 안 도울 수는 없었다.하지만 나는 윤지은한테 전화해 불만을 토로했다.“일을 부탁하고 싶으면 나한테 말하면 될 것이지 왜 서예지 씨와 동준 형님을 보내 겁을 줘요? 직접 부탁하는 게 그렇게 어려웠어요?”윤지은이 평소에 하도 도도하게 굴어 나는 그녀의 기를 죽이고 싶었다.하지만 윤지은의 말투는 여전히 차가웠다.[왜? 내가 겁만 주는 것 같아? 내가 정말 양동준더러 수호 씨를 어떻게 하라고 하지 못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나는 피식 웃었다.“제가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지은 씨는 원래 안 그럴 거잖아요.”[그럼 지금 당장 양동준더러 네 팔 부러뜨리라고 할까?]“그러면 재미없죠. 우리 이미 친한 사이인데, 좀 좋게 좋게 얘기할 수는 없어요?”[없어.]‘윤지은, 내가 언젠간 너를 내 앞에 무릎 꿇고 빌게 할 거야.’[다른 용건 있어? 없으면 끊을게.]윤지은은 내가 마치 본인한테 돈이라도 빚진 것처럼 찬 바람이 쌩쌩 부는 태도였다.나도 더 이상 빈정대는 말을 들어주기 싫어 전화를 끊어버렸다.나는 나중에 따로 방법을 대 윤해철과 만날 생각이었다. 윤해철의 몸을 치료해 주면 다른 사람이 옆에서 부추기지 않아도 윤해철이 직접 아내를 집에 데려오려고 안달복달할 테니까....카페 안.윤지은은 차가운 얼굴로 소여정을 바라보며 핸드폰을 천천히 내려놨다.“야심한 밤에 왜 불러내고 그래?”소여정은 싱긋 웃으며 제 앞에 있는 친구를 바라봤다.“무슨 말을 그렇게 섭섭하게 해? 친구끼리 마주 앉아 수다 떨면서 커피 한잔하는 것도 안 돼?”그 말을 들은 윤지은의 눈은 휘둥그레졌다.“너랑 내가? 수다를 떨며 커피를 마신다고? 너 무슨 생각 하는 거야?”“안돼? 학교 다닐 때 우리 사이가 제일 좋았잖아. 같은 이불 덮고 자기도 하고.”소여정의 말은 사실이었다.사
두 사람은 말을 마친 뒤 곧바로 뒤돌아 떠나버렸다. 하지만 내 마음은 전보다 확실히 무거워졌다.‘정태곤이 나를 죽이려 한다고?’‘어쩜 그렇게 간이 크지? 임천호가 나를 죽이라고 명령을 내린 것도 아닌데 죽이려 하다니?’‘내가 방금 자기를 막아섰다고 서지예 씨가 나 겁주는 거 아닐까?’나는 이내 고개를 마구 저었다. 쓸데없는 생각으로 일에 지장 주고 싶지 않았다.그날 오후 주해진이 나를 찾아와 협력할 의향이 있다고 말했다.“두 사람한테 지분 나눠줄 수 있어. 하지만 5퍼센트밖에 못 줘.”그 말을 들은 민우의 얼굴은 이내 어두워졌다.“5퍼센트? 그것도 지분이라고? 성의가 없네. 그냥 가. 우린 협력할 생각 없으니까.”주해진은 서두르지 않고 차분하게 설명했다.“천수당은 나랑 김진호가 함께 인수한 건데 지분이 각각 50퍼센트거든. 앞으로 천수당에 드는 각종 비용도 다 우리가 부담할 거야. 두 사람한테 5퍼센트씩 나눠주는 것도 남는 장사일걸. 만약 지분을 더 원한다면 따로 투자하던가.”“얼마를 투자하면 50퍼센트를 떼어 줄 건데?”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주해진도 쓸데없는 말은 삼가고 각종 청구서와 데이터를 내놓았다.“천수당의 현재 가치는 5억 6천만 원이거든. 만약 50퍼센트를 원하면 2억 8천만 원을 투자하면 돼.”2억 8천만 원이라는 숫자는 천문 숫자나 다름없었다. 나와 민우한테는 너무 이루기 어려운 목표기도 했고.하지만 나는 50퍼센트의 지분을 갖고 싶었다.따로 사업을 하려면 길게 봐야 하기에 적어도 발언권과 결정권은 손에 쥐어야 했다.주해진은 우리를 파트너로 원하는 입장이라 이미 태도를 많이 낮췄다. 하지만 천수당 장사가 잘되면 주해진과 김진호가 독단적으로 행동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나는 민우랑 힘들게 시작한 사업을 나중에 딴 사람한테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2억 8천만 원이 적은 돈은 아니지만 한번 시도해 보고 싶어.”나는 내 마음을 솔직히 털어놓았다.그러자 주해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두 사람
“어렵다고? 이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어? 사는 것도 어려운데.”‘설마 그 정도라고?’소여정은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구렁텅이에서 굴러본 적 없으니까 내 말이 실감 나지 않을 거야. 수호 씨가 왜 단단해지지 못하는 줄 알아? 그동안 생활이 너무 평탄해서 단련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야.”나는 그 말을 동의할 수 없었다.“제 생활이 평탄하다고요? 이미 충분히 파란만장하다고 생각하거든요?”“하하, 조금 우여곡절을 겪었다고 자기 생활이 파란만장하다고 하더니. 그럼 구렁텅이에서 굴러본 사람들은 어떻겠어?”나는 왠지 소여정이 나한테 시비를 거는 것 같았다.‘왜 내가 꼭 구렁텅이에서 굴러야 하는 건데? 난 지금 당장 강해지고 싶은데.’“제가 책임감 없다고 말하고 싶은 거잖아요. 전 아직 저를 증명할 기회가 없었던 것뿐이에요. 언젠간 증명해 보일게요.”소여정은 싱긋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에서 나를 믿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나는 소여정에게 약을 처방해 주고 어떻게 약을 먹고 어떻게 몸조리해야 하는지 주의 사항을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소여정은 그 말을 듣고는 계산을 한 뒤 떠나버렸다.밖에 나와 보니 서지예와 양동준은 역시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윤지은은 왜 갑자기 나를 찾는지 의문이었다.나는 두 사람에게 다가가 물었다.“지은 씨는 저를 왜 찾는데요?”서지예는 방금 전 일 때문에 안색이 여전히 어두웠다.“사모님 일 때문에. 사모님이 아가씨 곁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거든. 아가씨는 사모님이 얼른 댁에 돌아가셨으면 하고.”그 말을 들으니 순간 의문이 들었다.“그게 저랑 뭔 상관인데요?”“사모님한테 약속한 거 잊었어? 윤 회장님이 먼저 굽히지 않으면 사모님은 절대 안 돌아가. 아가씨가 뱉은 말은 지키라고 전해달래. 만약 뱉은 말도 지키지 못하면 남자도 아니라고.”그 일이라면 당연히 잊지 않았다. 다만 요즘 사장님 일 때문에 그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것뿐이다.‘별것도 아닌 일로 호들갑은.’내
“그래요. 알았어요. 잘 생각해 볼게요.”소여정은 서지예의 말을 마음에도 두지 않은 듯 건성으로 대답했다.서지예는 소여정의 그런 태도에 화낼 기운도 사라졌다.“사람이 어쩜... 그렇게 뻔뻔할 수가 있어?”소여정은 생긋 웃었다.“서지예 씨, 말은 그렇게 하면 안 되죠. 내가 왜 뻔뻔해요? 꾸짖으니 마음에 깊이 새기고 진지하게 생각해 보겠다고 한 건데, 대체 어쩌라는 거예요?”서지예는 화가 치밀어 버럭 소리쳤다.“당장 임천호 곁에서 떠나.”“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해요?”소여정이 되물었다.하지만 서지예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다.“왜 불가능한데. 네가 임천호 옆에 딱 붙어서 떠나기 싫어하는 이상 충분히 가능하잖아.”소여정은 피식 웃으며 일어섰다.“이건 명확히 해야 할 것 같네요. 난 임 회장님한테 빌붙어 떠나지 않으려 한 적 없어요. 임 회장님이 저를 옆에 붙잡아둔 거예요. 나처럼 연약한 여자가 임 회장님이 가지 말라고 하는데 어떻게 떠나요? 죽고 싶으면 모를까.”“내가 그쪽 언니랑 아는 사이도 아닌데, 두 분 결혼 생활 방해하지 않으려고 내 목숨까지 내 바쳐야 해요? 난 그 정도로 위대하지 않아요.”소여정의 말은 듣기 거북했지만 모두 사실이었다.만약 소여정이 떠나기 싫은 게 아니라 떠나지 못하는 거면, 이건 소여정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소여정도 자기를 희생하면서 도덕을 지키고, 유부녀의 한 맺힌 원한을 만족시킬 정도로 위대하지 않았다.서지예는 소여정이 마음에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얄미웠다.마음에 드는 건, 소여정의 총명함이었다. 서지예의 언니는 소여정에 비하면 확실히 많이 부족했다. 매일 울기나 하고 임천호의 환심을 사는 법을 도통 몰랐으니. 게다가 소여정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이번 싸움에서 서지예는 완전히 패했다.“서지예 씨, 혹시 볼 일이 더 남았어요? 없으면 이만 나가주세요.”처음부터 끝까지 나는 한마디도 끼어들지 못했다.하지만 여자들 간의 싸움이 얼마나 격렬한지 제대로 실감했다.서
나는 쓸데없는 일에 참견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서지예가 언니 때문에 소여정을 아니꼽게 여기는 마당에 둘이 만나면 분명 소여정을 가만두지 않을 게 뻔했다.지금은 내가 화인당을 관리하고 있는 마당에 소란이 일지 않도록 하는 것도 내 책임이었다. 때문에 나는 얼른 다가가서 서지예를 막아섰다.“사모님, 소여정 씨는 병 보러 온 거예요. 그러니 절대 시비 걸면 안 돼요.”서지예는 나한테 싸늘한 눈빛을 쏘아 댔다.“사모님? 방금 날 막아선 주제에 날 사모님이라 부를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비켜.”“싫어요.”“양동준을 스승으로 모시고 싶지 않은 모양이네?”서지예는 눈을 부라리며 화가 난 듯 말했다.그 말에 나는 다급히 변명했다.“당연히 아니죠. 저 동준 형님을 스승님으로 모시고 싶다고 생각한 거 하루 이틀이 아니에요. 진짜 고민 오래 했어요.”“그런데도 나한테 그렇게 말해?”서지예는 화가 난 듯 나를 노려봤다.나는 얼른 서지예 앞으로 다가가 설명했다.“저도 다 스승님과 사모님을 위해서 이러는 거예요.”“어디서 개소리야? 그 여자가 무서워서 이러는 거겠지.”“전 소여정 씨 무서워하지 않아요. 두 분이 여기서 싸우면 화인당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칠까 봐 걱정하는 거예요. 여기 윤지은 씨 친구 남편이 운영하는 곳이에요. 윤지은 씨는 사모님이 모시는 아가씨잖아요. 만약 두 분이 싸우기라도 하면 윤지은 씨한테 어떻게 설명하려고요?”서지예는 여전히 차가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아가씨한테 설명하는 건 내가 알아서 해.”“설명한다고 해도 윤지은 씨가 가운데서 얼마나 난처하겠어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서지예는 여전히 나를 싸늘한 눈빛으로 바라봤다.“그래서 나더러 이대로 참으라고? 정수호, 그러고도 남자야?”서여정은 말을 마치자마자 나를 옆으로 밀쳐버리고 마사지룸으로 행했다.보아하니 내 말은 귓등으로 듣고 심지어 나를 경멸하는 것 같았다.나도 이러는 게 이기적이라는 걸 알지만 두 사람이 여기서 소란을 피우는
그때 소여정이 내 얼굴을 톡톡 두드렸다.“뭔 생각을 그렇게 넋 놓고 해?”“아무것도 아니에요.”나는 소여정한테 이 일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그러자 소여정은 제 발을 거두었다.“됐어. 이제 내 몸이나 진찰해 줘. 중요한 건 이거야. 내 몸이 호전되지 않으면 임천호는 분명 내가 거짓말했다고 생각할 거야. 그러면 수호 씨도 무사하지 못 할 거야.”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투덜댔다.“다른 사람 찾으면 안 돼요? 임천호가 가뜩이나 우리 관계를 의심하는데, 왜 하필 나한테 치료받으러 온 거예요? 나 엿 먹이려고 작정했어요?”“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수호 씨랑 나 사이 의심하지 말라고 그런 거잖아. 생각해 봐. 수호 씨가 의사고 내가 환자면 환자가 의사한테 진찰받으러 오는 건 당연한 거잖아. 오히려 의심받았다고 찾아오지 않는 게 이상하지. 임천호는 분명 철저하게 조사할 거야. 워낙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 후환을 막기 위해 수호 씨를 죽일지도 몰라.”“그러면 제가 오히려 소여정 씨한테 고마워해야겠네요?”사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하지만 소여정은 이 상황에도 웃음이 나오는지 농담조로 말했다.“고마워할 건 없어. 내 몸이나 잘 치료해 줘. 내가 임천호한테 약속했거든. 임천호 아이 낳아주겠다고.”“정말 임천호 아이 낳아줄 거예요? 임천호가 명분을 주는 것도 아니잖아요.”“난 명분 따위 신경 안 써. 하지만 아이라도 안 낳으면 내 상황이 위험해져.”나는 소여정이 아닌 지라 소여정의 상황 따위는 모른다. 때문에 뭐라 할 수도 없었다.그저 나더러 몸을 치료해달라고 하니 치료할 수밖에.한바탕 진찰을 한 뒤, 나는 진지하게 말했다.“소여정 씨는 기혈이 좀 부족한 것 말고는 별 이상 없어요. 약 처방해줄게요. 약 먹으면서 몸조리하면 금방 나을 거예요.”“침 맞을 필요는 없는 거야? 마사지거나.”소여정은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실망하게 해서 어쩌죠? 침은 맞을 필요 없어요. 마사지도 할 필요 없고요.”소여정은 임천호의 여자다. 임천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