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독한 열이를 고치는 원경릉원경릉은 어둠에 적응해 있었는데 불빛이 갑작스레 비치니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빛을 가렸다. 이때 털썩 하고 무릎을 꿇는 소리가 들렸다. 기상궁이 바닥에 꿇어 앉아, “왕비 마마, 쇤네 마마의 크신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마마님을 원망했습니다. 열이를 제발 살려 주시옵소서.”“날 일으키게!” 원경릉은 손을 뻗으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기상궁은 다급한 나머지 등롱도 팽개치고 원경릉을 부축하러 갔는데 원경릉의 등쪽에 핏자국이 흥건하게 매를 맞은 상처를 보고, 이 여자가 악랄함이 떠올라 주저하는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만약 열이가 말한 게 사실이라면?“왕비 마마, 일어서실 수 있겠습니까?”“약 상자를 가져오너라.” 원경릉은 기상궁이 자신을 얼마나 증오하는지, 그런데도 무릎 꿇고 애원하는 건, 열이의 상태가 좋지 못한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상궁에게 약 상자를 들키든 말든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예, 예!” 기상궁은 약상자를 들고 와 원경릉을 부축했다.원경릉은 한 걸음 디딜 때마다 등과 허벅지에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밀려오고, 겨우 문을 나섰을 뿐인데 땀이 비 오듯 흘러 내리며 덜덜덜 이가 떨렸다. “왕비 마마……”“쓸데없는 소리 말고, 가자!” 원경릉은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아냈다.생명을 구하는 일이 그녀에겐 순수하고 단순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열이를 구하는 것은 한 번 더 머리를 굴려야 하고, 사람의 마음을 되돌려야 하는 것이 되었다. 그러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안 죽겠네 그 사람.”문득,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원경릉은 조심스럽게 기상궁을 바라봤지만, 기상궁은 한 손에 등롱을 들고, 한 손으로 그녀를 부축하느라 말이 없었고, 원경릉이 기상궁을 바라보자 이마에 주름이 지며 묻길, “왕비 마마, 통증이 심하셔서 걷지 못하시는 것은 아닌지요?”목소리가 다르다.기상궁의 목소리는 청아한 노인의 목소리지만 방금 들은 목소리는 앳된 소리였다. 원경릉은 갸우뚱 고개를 젓는데 귓
상처가 심해진 원경릉에게 입궁 전갈이?이 모든 걸 마치고 원경릉은 너무 피곤한 나머지 탁자에 반쯤 엎드려 축 늘어졌다. 자신의 모습이 꼴불견이라는 걸 알지만 그걸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잠시 숨을 돌리자 밖에서 기상궁이 초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비 마마, 어떤 지요?”원경릉은 탁자를 짚고 천천히 일어서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오너라.”문이 열리고 기상궁과 녹주가 뛰어들어와 열이 옆에 가더니, 열이의 숨소리가 고르게 안정된 것을 보고 기상궁은 비로소 한 시름 놓았다.원경릉은 약 상자를 들고: “오늘밤 일은 너희 둘만 알고 입을 다물어라. 초왕이나 초왕부 사람이 알게 해서는 안된다.” 기상궁과 녹주는 의아해하며 서로 바라봤다.녹주가 앞으로 나가 원경릉을 부축하고 “왕비 마마, 소인이 길을 안내하겠습니다.”“됐다. 열이를 지켜라. 머리맡에 내가 남겨둔 약이 있으니 두 시진마다 한번 씩 먹이고. 다 먹으면 나에게 더 필요할지 묻고.” 원경릉은 녹주 손을 뿌리치고 힘겹게 밖으로 나갔다.“왕비 마마!” 기상궁이 소리쳤다. 원래는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원경릉이 이전에 한 일을 떠올리면 감사하다는 말이 입밖으로 나오질 않아 그저: “밤길이 어둡습니다, 등롱을 들고 가시지요.”등롱을 건네자, 원경릉은 등롱을 받으며, “고맙네!”기상궁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고맙네? 지금 고맙다고?원경릉은 봉의각으로 돌아가 스스로에게 주사를 놓고 침대에 엎드렸다.염증이 생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상처의 면적이 너무 넓은데다 항생제 작용까지 겹쳐 그녀는 눈에 띄게 약해졌다. 고열이 난 뒤라 손가락 하나도 꼼짝할 수 없고, 물먹은 솜 마냥 한없이 바닥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곧 사방에 어둠이 깔리고 원경릉은 까무룩 잠이 들었다.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 문을 열고 급히 들어와: “왕비 마마, 어서 일어나세요.”원경릉이 겨우 눈을 떠 보니 녹주가 안절부절 하고 있고, 해는 이미 중천에 떠 있다.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열이가
반격의 결과, 자금탕을 마시게 된 원경릉원경릉은 꿈인지 생신지 정신이 오락가락한 상태로 약상자를 침대 밑으로 밀어 넣는 순간 약상자가 사라졌다. 이번엔 잠깐 숨을 멈추고 기다렸다가, 손을 뻗어 침대 밑을 더듬어 보니 진짜 아무것도 없다. 와들와들 떨며 침대로 기어 올라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최근 들어 벌어지는 사건은 그녀의 의식 범주를 넘어서는 일로 전문지식과 비전문지식을 전부 동원해도 답이 안 나왔다. 인류는 미지의 사건을 조우하면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이기 마련이다. 지금 그녀가 그렇다.“끼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고 고개를 들어 돌아보기도 전에 차가운 기운이 사방을 에워 싸며 머리가 지끈하다 하더니 원경릉은 그만 침대에서 땅으로 굴러 떨어졌다.“짐 앞에서 죽어가는 척을 해? 당장 가서 죽어버리던지, 아니면 옷 갈아입고 짐과 입궁하도록 당장 일어나지 못할까.” 서릿발 같은 목소리가 정수리에 꽂히며 거칠게 몸을 뒤집힌 원경릉은 등의 통증에 전신에 경련을 일으켰다.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데 무쇠 같은 손이 원경릉의 턱을 으스러뜨릴 듯 쥐었다. 고통에 찬 그녀의 눈동자와 광분한 초왕의 눈이 마주쳤다. 냉혹하고 매서운 얼굴은 가릴 수 없는 경멸과 증오로 가득했다, “경고하지. 여우 짓은 그만 두는게 좋아, 만약 다시 한 번 태후 마마 앞에서 그 간사한 혓바닥을 놀렸다간, 아주 숨통을 끊어버릴 테니까.”원경릉은 고통이 극심한 나머지 울분이 차 올랐다. 인간의 생명이 이 사람들 눈에는 한 푼어치의 가치도 없는 것인가? 상처가 이렇게 심한 사람을, 그마저도 가만 놔둘 수 없다는 말인가.그녀는 전신의 기력을 쥐어 짜내 머리를 늘어뜨리고 무릎으로 바닥을 짚으며, 머리로 힘껏 초왕의 얼굴을 들이 받았다. 너 죽고 나 죽자는 최후의 일격을 가한 셈이다.초왕 우문호는 원경릉이 반격할 거라 상상도 못했고, 머리로 들이받는 바람에 피하지 못해 눈 앞이 번쩍하며 어찔했다.원경릉 자신은 다 죽어가면서도 이를 악물고, 초왕이 아직 정신을 못 차린 틈에 그의 손
원경릉의 입궁약을 마시고 원경릉은 속이 따듯해 지며 한결 편안해 졌다.“왕비 마마, 궁에서 돌아오시면 천천히 몸조리 하실 수 있게 쇤네가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우선 잠시라도 눈을 좀 붙이세요.” 기상궁이 말했다.원경릉은 눈을 감자 머리 속에 폭죽이 끊임없이 터지는 것 같고, 과거에 들었던 말이 귓전에 울렸다. “미워한다고? 당치도 않은 소릴. 짐은 네가 혐오스러워. 짐의 눈에 너는, 더러운 벌레만도 못한 존재야. 사람을 증오심에 불타게 한다고. 아니면 짐이 약의 힘까지 빌려 너와 합방할 필요도 없었겠지.”초왕 우문호의 목소리다, 원한과 증오가 가득 찬 이런 매정한 말을 그녀는 난생 처음 들었다.누가 귓가에서 엉엉 울고 있다, 머리 속의 폭죽이 터지더니 구불구불 흘러내리는 선혈로 변한다.점점 모든 것이 차분해 진다.마치 머리 속에 수천 수만 개의 어지러운 선들이 전부 깔끔하게 정리된 것 같은 느낌이다.통증도 점점 사라졌는데, 정확히 말하면, 사라진 게 아니라 느낌이 없어졌다.원경릉은 눈을 떠 녹주가 침대맡에 서있는 것을 보고 미간을 움찔거렸다.“왕비 마마, 좀 어떠세요?” 그녀가 눈 뜬 것을 보고 녹주가 서둘러 물었다.“안 아파.” 원경릉이 쉰 소리로 대답했다.그렇다 아프지 않다. 하지만 전신에 감각이 없는 것은 공포 그 자체다. 원경릉은 손을 뻗어 볼을 꼬집어 보았다. 역시 아무 느낌도 없다.이건 마취약보다 효과가 강력하다.“일으켜 드리겠습니다, 옷을 갈아 입으실 게요, 안 그러면 왕야께서 노하십니다.” 녹주는 손을 뻗어 그녀를 부축하고 기상궁도 마침 옷을 가지고 밖에서 들어온다. 기상궁을 원경릉에게 “어서 옷을 갈아입으세요, 왕야께서 서두르라 십니다.”원경릉이 감각없이 서있자 두 사람은 속옷을 벗기고 새 옷을 갈아 입힌다. 상처를 꽁꽁 싸매도 그녀는 아무 느낌이 없다.옷을 갈아 입고 구리 거울 앞에 서자, 원경릉은 비로소 거울에 비친 사람을 훑어봤다.이목구비가 뚜렷하고 피부가 희며, 길고 구부러진 속눈썹 아래 생기라곤 전혀
입궁하는 길, 우문호가 증오하게 된 사연반 주먹 정도 크기의 그 작은 함은, 다름 아닌 침대 밑에서 사라진 약 상자였다.뭐가 어떻게 된 거지? 약 상자가 왜 작아졌고, 어떻게 소매 속에 들어 있는 거야?원경릉의 마비된 몸에 일순간 소름이 끼쳤다.뒤쪽에서 발소리가 들리자, 원경릉은 얼른 약 상자를 다시 소매속에 감췄다.“소인이 왕비 마마님을 모시고 가겠습니다.” 녹주가 그녀를 부축하며, “왕야께 부탁드렸어요, 마마님과 입궁할 수 있게요.”원경릉은 마음이 혼란스러워 녹주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귀에 들리지 않고,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 갔다.아치형 문을 지나 회랑을 돌아 이리저리 걸어간 끝에 앞마당 입구에 도착했다.마차는 이미 문 앞에 대기해 있고, 우문호는 마차에 타지 않고, 검은 준마를 타고 있다. 연 보라색 옷을 입고, 금옥 관모를 썼는데 얼굴빛이 날씨처럼 어둡고 눈은 화가 나서 견딜 수 없다는 듯 그녀를 힐끗 보더니 싸늘하게: “얘들아 가자.”“왕야, 소인도 같이 입궁해도 될까요?” 녹주는 염치 불구하고 대뜸 물었다. 우문호는 녹주를 쏘아보더니: “그러든지, 태후께서 합방 건을 묻지 않으시게, 네가 있는게 나을지도 모르겠구나.”초왕부 입구에 입궁을 돕는 하인만도 십여명으로 그 중엔 가신 탕양도 있었다. 우문호가 그들 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 건, 원경릉이 난처할까 배려해서가 전혀 아니다.원경릉은 무표정했다. 얼굴 근육이 굳어서 아무리 난처해도 난처한 표정조차 지을 수 없다.녹주는 원경릉이 마차에 오르도록 부축하고 마차 창문 발을 내리는 찰나, 우문호의 이글거리는 증오의 눈빛과 초왕부 하인들이 꼴 좋다며 원경릉을 바라보는 시선을 눈치챘다. 원경릉은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귓가에 우문호의 말이 쟁쟁 울린다.몸의 원래 주인은 이쁘게 생겼는데 도대체 얼마나 그녀를 싫어했길래 약을 먹고서야 겨우 합방을 할 수 있었던 거지?이게 몸의 원래 주인에게 얼마나 큰 모욕이었을까?과연 죽음을 선택할 만 했다.마음을 안정시키는
우문호의 정인을 만나다마차는 우문호의 지휘아래 곧장 궁문으로 들어갔다. 원경릉은 지금 황궁에 호기심이 전혀 없고, 오직 휘날리는 마차의 창문 발 틈으로 한없이 긴 궁궐길과 궁궐의 붉은 담장만 보일 뿐이다.멀리 내다 볼 수 없지만 이따금 높은 누각이 눈에 들어 왔다. 금과 비취가 오색찬란하고 유리로 된 기와에 햇빛이 미끄러진다. 마차가 멈추고 원경릉은 심호흡을 한 뒤 녹주의 부축을 받으며 마차에서 내렸다.햇살이 궁궐의 붉은 담장에 내리쬐는 가운데, 멀리 금빛 유리 기와가 반사하는 빛에 그녀는 빛에 닿으면 사라지는 유령처럼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빛을 가렸다.우문호도 말을 내려 마차와 말을 여기에 두고 걸어 갔다.소운전(霄雲殿) 밖에 도착하자 녹주가: “왕비 마마, 소인은 안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조심히 다녀오세요.”원경릉은 소운전이 태상황이 거처하는 곳이라, 밖에 이미 각 황자와 공주부에서 온 하인과 노비로 가득한 것을 보고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한 걸음 한 걸음 우문호를 따라 들어갔다.초목이 무성한 정원을 지나 정전으로 들어서자, 안에 서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원경릉을 쳐다 보는데 하나같이 화려한 옷차림에 위엄 있는 얼굴이다. 이 사람들이 누구인지 몸의 원래 주인이 남긴 기억에 의존했다.푸른 비단 옷을 입고 숙연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은 기왕(紀王) 우문군(宇文君)으로 황제인 명원제의 장자다. 나이는 서른 살, 진비(秦妃)의 소생으로 마후(馬侯) 대감의 적녀를 아내로 맞아 마씨와 진비가 현재 우문군의 세력으로 슬하에 자식 둘을 두었다. 위왕(魏王) 우문위(宇文蔚), 손왕(孫王) 우문두(宇文杜), 주왕(周王) 우문안(宇文安) 모두 왕비와 자녀들을 데리고 입궁해 있었다.왕야들은 그저 가볍게 목례만 나눌 뿐 말이 없어 분위기는 시종 무거웠다.원경릉은 옆에 서 있는 우문호의 몸이 갑자기 경직되는 것을 느끼고 주변을 살펴보니, 사람들이 모두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한 쌍의 부부가 정전으로 들어오고 있기 때문이다.남자는 대략 18~19살쯤 되
임종을 앞둔 태상황원경릉은 고개를 들어 주명취의 온화하고 따스한 눈빛을 바라봤다.“앉아서 좀 쉬는 게 어때요?” 주명취가 물었다.원경릉은 고개를 흔들고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빼며, “괜찮아요, 고맙습니다.”제왕 우문경은 주명취를 자기 쪽으로 끌어 당기며 불쾌하다는 듯이 원경릉의 얼굴을 흘겨보고 주명취에게: “저런 사람을 왜 신경 써?”주명취는 제왕의 곁으로 돌아가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담담한 눈빛으로 조용히: “모두 한 가족인 걸요.”“당신은 너무 착한 게 탈이야.” 제왕은 주명취의 손을 잡고 둘이 나란히 서니 선남선녀가 따로 없다.이 순간 원경릉은 무시무시한 냉기가 피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바로 우문호에게서 이다.자신의 정인이 다른 남자 곁에 서 있는데 가슴이 미어지고 화가 치미는 것도 당연하다. 원경릉은 그렇게 생각했다. 내전 안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모두 놀라 일제히 내전 쪽을 쳐다봤다.발이 걷히고 머리에 하얗게 서리가 내린 듯한 내시감이 나왔다. 울어서 눈은 부어 있고 얼굴빛이 처연하다. 꽉 잠긴 목소리로, “황상께오서 유지를 남기시고자 하오니, 비빈 마마, 왕야, 왕비는 드시지요.”이 사람은 태상황의 시중을 든 지 45년 째인 이태감이다.모두 침통한 표정으로 이태감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는데, 발소리를 죽이고 숨소리도 거의 내지 않았다.원경릉은 우문호 뒤에 서서 현기증이 나지 않도록 애썼다.태상황의 곁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태후와 황제는 침대에 앉아 있고, 황후도 한 쪽에 지키고 섰다. 태상황의 형제인 분봉왕들도 모두 어제 입궁하여 계속 침상을 지키고 있다.궁중의 거의 모든 어의가 전부 와서 엄숙한 표정으로 두 줄로 서있다.원경릉이 슬쩍 보니 금색 휘장이 말려 올라가 있고, 박달나무로 만든 큰 침상에 초췌한 노인이 높은 베개를 베고 누워 있다. 입을 크게 벌리고 숨을 쉬니 입이 마치 검은 동굴 같고 눈두덩이가 푹 꺼졌다. 곡소리는 태후가 낸 것으로 침대맡에 앉아 있는 그녀의 헐렁한 연보라 빛 겉옷이 그녀를
태상황은 힘겹게 눈동자를 굴려 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고 앉아 있는 수 많은 자들을 보았다. 그는 입술을 바들바들 떨며 힘에 부쳐 말 한마디 꺼내지 못하고 애써 아쉬움의 한숨을 내뱉었다. 원경릉은 이들이 무릎을 꿇고 태상황의 임종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가 막 그 곳에 들어왔을 때, 태상황은 이미 임종의 문턱에 서 숨을 거두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태상황을 가까이서 보니 이상하리만큼 뱉는 숨이 힘있고 거칠게 느껴졌다. 아마 어의들이 금방 약을 투약한 효과인 것 같았다. 태상황은 심장병을 앓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병세가 심해져 풍병도 앓았다. “지금은 이렇습니다. 아마 심부전증인 것 같습니다만”심부전, 호흡곤란……그녀의 약 상자 안에 도파민이 들어있었다. 원경릉의 머릿 속이 혼란스러웠다. 지금까지 말도 안되는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났다. 세상 그 누가 그녀를 믿고, 그녀에게 황제의 병을 고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결국 그녀는 태상황이 그녀의 눈 앞에서 숨을 거두는 것을 지켜봐야 할 것이다. 이는 그를 치료했던 사람 입장에서 굉장히 고통스러운 일이다. 15분 정도 무릎을 꿇고 있었더니 그녀는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고, 이내 몸이 마비된 탓에 무릎을 꿇는 자세가 어색하고 뻣뻣해졌다. 상처를 건드리고 싶지 않아 불편해도 무릎을 꿇은 채 버티고 있었지만, 상처는 더욱 벌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돌려 우문호를 바라보았다. 그는 한치의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엔 거짓없는 슬픔이 보였다. 황실 안에는 혈육간의 정이 없다고들 하지만, 사실은 실속 없어보일까봐 마음을 숨기는 것이다. 명원제와 어병원의 원판이 나가더니 커튼 뒤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원경릉은 어렴풋 그들의 대화를 몇 마디를 들었다. 명원제가 태상황의 상태가 호전된 것을 보고, 약을 다시 써야하는게 아닌지 원판에게 물었으나 원판은 태상황이 호전된 것은 임종 직전에 잠깐 정신이 돌아온 것일 뿐이라고 답했다.명원제가 다시 자리로 돌
장 선생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목을 가다듬었다. 이제 목이 그렇게 아프지는 않았다. "자, 모두 조용! 오늘 너희들한테 기쁜 소식을 하나 전하려고 한다. 이번 기초 시험 평가에서 우리 반 학생이 무려 전교에서 압도적인 성적을 거뒀다. 전 과목 만점, 우리 성화 고등학교 개교 이래 처음 만점을 받은 학생이다!"조용히 수군거리던 학생들은 순간 정적에 휩싸이며 놀란 눈으로 장 선생을 바라보았다.학생들은 그의 말이 장난이라 생각했다. 설령 만점을 받을 사람이 있다고 해도, 성화고 학생일 리가 없었고, 더군다나 6반일 리가 없을 거라고 여겼다. 장 선생은 다시 물을 한 잔 마신 후, 부드러운 시선으로 우문황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만점을 받은 학생은, 바로 새로 전학 온 우문황 학생이다. 전 과목 만점!"순간 반 전체 50여 명의 시선이 일제히 우문황에게 향했다.‘만점을 받았다고? 사람이야?!’‘아니, 쟤 예전에 한 자릿수 점수 받지 않았었나? 거기에 소수점까지 있는 황당한 성적이었잖아?’이지혁은 잠결에 우문황이 만점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소매로 얼굴을 문지르며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만점? 너 커닝했지?!"하지만 커닝을 해서라도 만점을 받았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이지혁은 책을 펼쳐놓고 답을 찾아봐도 합격선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6반에도 간혹 성적이 잘 나오는 학생이 있었지만, 대부분 간신히 합격선에서 아슬아슬하게 오르내릴 뿐이었는데, 만점에 심지어는 전교 1등이라니.부러움과 질투, 경외의 눈빛이 모두 우문황에게 쏟아졌지만, 그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만점이 그에게는 너무나도 쉬운 일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충격적인 소식에 반 전체가 이내 조용해졌고, 그 후로 장 선생님이 반복해서 들려주는 감동적인 격려의 말도 학생들은 그저 묵묵히 들을 뿐이었다. 이전 같으면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말들이었지만, 오늘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수업이 끝난 후 장 선생이 우문황을 불렀다."우문황, 잠시 나와봐."그러
하지만, 이건 너무 대단한 일이었다. 모든 과목에서 만점을 받다니? 심지어 국어까지도 만점이었다. 앞부분의 이해 및 분석 문제를 다 맞혔다고 해도, 작문에서 만점을 받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교사로서 이런 성적을 보니, 장 선생은 정말 기뻤다. 비록 그가 담당하는 반 학생은 아니지만, 모든 학생이 좋은 대학에 진학하고, 나라 발전에 기여하기를 바라는 것이 바로 교사로서의 작은 소망이기 때문이다.게다가, 이런 학생이 나오면 학교에도 큰 영광이었다.교장 선생님이 둥근 안경을 살짝 밀어 올리며 그를 바라보았다.“장 선생, 이 성적표는 장 선생 반 우문황 학생의 것이네.”그러자 장 선생은 너무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너무 놀란 나머지 입까지 떡 벌어졌다.“네…? 우문황 학생…? 그 학생 것이라고요?!”교장 선생님은 안경을 벗고, 손수건으로 눈가를 살짝 닦으며, 약간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맞네. 우리가 보물을 발견했어! 이렇게 많은 세월이 지나 드디어 한 명의 천재가 나왔군.”“그 애가요? 하지만 그 학생은 그전까지 성적이…”장 선생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넋을 잃고 중얼거렸다.“조만간 부모님과 상담할 생각이네. 이전 성적은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앞으로의 성적이지. 장 선생, 오늘은 중요한 일을 의논하러 자네를 오라고 했네. 우문황 학생을 계속 6반에 둘 수는 없지 않는가? 그래서 1반으로 옮기려고 하네.”장 선생은 순간 멍해졌다. 조금 전까지 기쁨에 차 있던 얼굴이 점점 굳어지기 시작했다.그러자 방 선생이 급히 말했다.“장 선생님, 오해하지 마세요. 선생님의 뛰어난 학생을 빼앗으려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도 재능 있는 아이를 아끼는 분이시잖아요? 이런 성적을 가진 학생이 계속 6반에 머문다면 성적이 크게 떨어질 겁니다. 그것은 정말 재능을 낭비하는 것이죠.”장 선생이 착잡한 마음으로 성적표를 꼭 쥐었는데, 문득 그도 방 선생의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6반은 솔직히… 공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학
방 선생은 아내와 영화를 보며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지만, 영화도 포기하고 바로 차에 올라타 학교로 돌아갔다.장 선생은 오늘 몸이 좋지 않아 추가 근무를 하지 않았는데, 오후가 되자 더 이상 버티기 힘든듯 병원에까지 다녀왔다. 그러자 의사는 성대와 목이 염증이 생겼고 약간 열이 난다고 했기에, 그는 약을 먹고 핸드폰을 무음으로 설정한 후 바로 잠에 들었다.한밤중이 되어 잠에서 깨어난 그는 어렴풋이 머리맡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방 선생에게 여러통의 전화가 걸려왔었지만, 늦은 시간이라 다시 전화하지는 않기로 했다.그는 몸이 아프니, 마음도 유난히 약해지는 것 같았다. 점점 더 이 일을 버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사직하고 싶은 마음 또한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월요일이 되어, 장 선생은 여전히 목이 아팠지만, 죽을 마신 후 핸드폰을 들어 방 선생에게 전화를 걸 준비를 했다. 장 선생은 방 선생의 전화가 성적 관련 이야기라는 것을 눈치챘다. 예전에도 시험을 치른 후, 성적이 이전보다 나빠지면 방 선생은 밤새 전화를 해왔기 때문이다.그는 이제 그런 일에 대응하는 것도 지쳤기에, 사직서를 꺼내 들고, 오늘은 반드시 제출하겠다고 다짐했다.그런데 주차장에 도착하자마자 교장에게서 전화가 와, 장 선생은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좋은 아침입니다, 교장 선생님."전화기 너머로 교장의 다정하고 온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장 선생, 몸이 아프다던데 괜찮나?"그는 멈칫하다가, 무심코 핸드폰 화면을 확인했다. 전화기 너머의 사람이 분명 틀림없이 교장인데, 목소리와 말투가... 너무 부드럽지 않은가? 게다가 ‘야’가 아닌 장 선생이라고 부르다니?"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장 선생님. 이제 괜찮아져서 지금 학교로 가는 중입니다.""그렇다면 다행이군. 학교에 도착하면 바로 내 사무실로 오게. 긴히 할 이야기가 있네."교장의 목소리는 여전히 친절하고 따뜻했다.장 선생은 바로 "네."라고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 교장이 이렇게나 다정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
다음 날 학교로 돌아오자마자 그는 사직서를 작성했다. 이틀 동안의 모의고사가 끝난 후 교장에게 제출할 생각이었다.고3의 첫 번째 모의고사는 학교에서도 상당히 중요하게 여겼다. 특히 1반을 더욱 신경 썼는데, 1반이야말로 진정한 실험 반이자 특별반이었기 때문이다.1반에는 성적이 시 전체에서 1000등 이내에 드는 학생이 두 명이나 있었는데, 이는 성화고등학교의 입장에서는 매우 뛰어난 성과였다.학교는 그런 그들을 더욱 집중적으로 육성하였기에, 이번 모의고사가 시 단위의 성적에 반영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교장까지 직접 나서서1반 학생들을 격려하며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시험은 이틀 동안 진행되었고, 시험 감독은 여섯 개 반의 선생님들이 섞여 배정되었다.장불운, 장 선생은 운 좋게도 1반의 수학 시험 감독을 맡았다. 1반 학생들이 문제를 풀며 집중하는 모습을 보자, 그는 부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가장 우수한 두 학생의 섬세한 풀이 과정을 보자, 감탄사가 저절로 나와 입이 떡 벌어질 정도였다. 이틀간의 시험이 끝난 후, 선생님들은 함께 식사하러 갔다. 식사 자리에서는 시험 감독을 맡은 선생님들이 각 반의 시험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2반 담임이 웃으며 말했다."우문황 학생은 시험 시작하고 30분 정도만 풀고 그냥 멈췄더라고요. 이번 시험 문제가 좀 어려웠던 모양이에요.""정말요? 저도 봤는데, 30분 정도 쓰다가 멈추더라고요. 그런데 이번 국어 시험 문제가 꽤 쉬운 편이었어요. 다만 작문이 좀 어려웠죠."수학 담당 선생님이 말을 덧붙이지자, 이에 방 선생이 웃으며 말했다."그만, 그 학생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합시다! 전학생이니,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겠죠."그러고는 장 선생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이번 시험이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에요. 어차피 고3은 시험이 많으니까요. 앞으로도 따라잡을 기회는 충분하니 힘내세요!"장 선생은 가방 속에 사직서를 넣으며, 방 선생에게 이일을 먼저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그가 허리를 곧
시끄러운 소리에 기숙사에 있던 남학생들이 모두 우르르 달려 나왔다.그런데 이건휘가 벽에 붙어서 다리를 올린 자세가 마치 강아지가 오줌을 싸는 자세와 똑같아 다들 보자마자 배를 끌어안고 웃기 시작했다.평소 이건휘는 성적은 꼴지면서 태도는 제일 오만했기에, 지금까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이런 창피를 당한 적이 없었다.그는 온힘을 다해 움직이려고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아서 너무 당황스럽고 분하며 부끄러웠다.바로 그때, 사감이 복도에 학생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인파를 뚫고 나왔다.이건휘를 발견한 사감은 두통이 밀려왔다.“너 또 무슨 장난질을 하는 것이야?!”사감이 다가가 그의 어깨를 당기고 나서야, 그는 드디어 움직일 수 있었다.이건휘는 이제 사지가 멀쩡해졌는지 한참을 움직이다가 사감을 껴안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말썽꾸러기인 그가 우는 것을 처음 본 사감은 괜히 마음이 약해졌다.예전에 그가 말썽을 피울 때마다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아직은 아이이기에 참았던 것이었다.“됐어. 그만 장난치고. 얼른 돌아가서 씻고 자.”짐승돌이 재빨리 다가와 이건휘를 부축하면서 기숙사로 돌아갔다.그 사이 우문황은 샴푸가 잔뜩 묻은 이불을 이건휘의 이불과 바꾸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이건휘가 기숙사로 들어오자 구두쇠가 다가가 속닥거렸다.“9점짜리가 이불을 바꿨어. 우린 건드리지 못하겠어.”이건휘는 샴푸가 묻은 이불을 보다가 눈을 감고도 여전히 잘생긴 우문황을 쳐다보았다.방금 몸이 움직이지 못한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철렁내려 앉았다.그는 말없이 이불을 말고는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이건휘는 기숙사의 대장이라 그가 제압당한 이상 다른 룸메이트들은 감히 우문황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지금 우문황은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실험반은 그가 상상했던 것과 너무 달랐다.다들 미쳤는 게 분명했다. 3학년인데도 유치한 장난을 치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수능은 유일한 출로는 아니지만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출발점인데 자신의 앞날을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다들 꿈
장 선생은 잘생긴 그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예쁘게 생긴 아이들은 항상 그의 마음을 약하게 만들었다.어차피 반에서 꼴찌인데 성적이 형편없다면 한동안 웃고 지나면 될 일이었다.“알았어. 내일 시험 봐. 대신 점수에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아직 일년이 있는데 좋은 대학에 가고 싶다면 얼마든지 따라올 수 있어.”장 선생이 그를 격려해 주었다.“선생님, 걱정 마세요. 제가 실망시키지 않을 겁니다.”우문황의 단호한 말에 장 선생은 웃음이 나왔다.“그래. 그럼 됐어. 돌아가.”이보다 더 실망할지 모르겠지만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생각하기로 했다.“선생님 안녕히 계십시오.”우문황은 인사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장 선생은 적어도 예의는 있는 아이라고 여겼다.저녁 자습시간이 끝나고 우문황은 기숙사로 돌아갔다.기숙사 입구에 있는 공용전화기로 집에 전화를 했더니 원 교수가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선생님이 저를 엄청 이뻐하세요. 친구들도요. 오늘 저녁에 기숙사에서 환영 파티를 해준대요. 애들이 잘해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우문황은 걱정시키지 않으려고 거짓말을 둘러댔다.“그럼 됐어. 이제 안심해도 되겠어.”전화기 옆에서 안심하는 외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손자의 성적은 걱정되지 않지만 학생들에게 괴롭힘을 당할까 봐 은근 걱정이었다.그런데 친구들이 다 좋아한다니 이제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넷째 형이 전화 왔었어요?”우문황이 물었다.“방금 전화 왔었어. 말로는 친구들이 공부하느라 바빠서 자기한테 신경도 쓰지 않는대. 아주 그냥 밤 늦게까지 공부하나 보더라.”우문황은 짧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넷째 형은 엘리트 반에 들어갔다.엘리트 반의 학생들은 명문대에 들어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공부할 것이다.그는 돌아서서 기숙사로 들어갔다.한 기숙사에 여섯 명이 있는데 앙숙인 이건휘과 함께 살게 되었다.게다가 짝꿍인 이지혁도 있고 나머지 셋은 이건휘와 관계가 좋아 보였다.그들은 이름을 부르지 않고 별명을 불렀다.이건휘는 ‘대장’, 이지혁은 ‘
수업이 마쳤다는 종이가 울렸는데 장 선생은 나가지 않고 새 학생에게 우르르 몰려가는 여학생들을 보았다.“내 이름은 강소영이야.”“내 이름은 윤가혜.”“내 이름은 서연이야.”여학생들은 시키지도 않는 자기소개를 하더니 우문황에게 물었다.“너 어느 학교에서 전학 왔어?”“이름이 너무 멋지다. 너 복성 맞지?”“평소 취미가 뭐야? 주말에 내가 밀크티 사줄까?”그때 우문황은 머리 위에서 책이 떨어지는 것을 발견했다.손을 뻗어 책을 움켜쥐고는 벌떡 일어섰다.“이건휘, 너무해! 전학생을 괴롭히지 마!”윤가혜라 부르는 여학생이 우문황의 편을 들어 책을 던진 남학생을 혼냈다.“손이 미끌어졌어. 불만이야?”이건휘는 콧방귀를 뀌며 우문황의 손에서 책을 빼앗아가더니 바지 호주머니에 찔러 넣었다.“나 오줌 싸러 간다. 금사빠들과 말 섞기도 싫어.”“우문황, 저 녀석 무시해. 아주 나쁜 놈이야.”윤가혜가 다정하게 설명했다.“맞아. 우리 반에서 꼴찌야. 번마다 십 몇 점을 맞아도 창피한 줄 몰라.”“그럼 너희들 성적은 높아? 너희들도 20점 아니면 30점이잖아.”우문호의 건너편 짝궁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그 소리에 우문황은 더 이상 있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여기 학생들은 대체 어떻게 생겨먹었길래 20점, 30점을 맞을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애들아. 내가 알아봤어.”그때 한 남학생이 교실로 뛰어오면서 싱글벙글 웃었다.“전학생 우문황 있잖아. 과목에서 최고인 수학 점수가 9,5점이래. 우리 반 꼴지 이건휘보다 더 꼴통이야.”“하하하, 진짜야?”남학생들이 갑자기 폭소를 터트렸다.“완전 쓰레기잖아.”그 바람에 다들 우문황에게 비웃는 시선을 보냈다.심지어 방금 그의 편을 들던 여학생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우문황은 그들을 뒤로하고 복도에 있는 온수기에 물을 따르러 갔다.그때 화장실에 다녀온 이건휘가 일부러 그의 얼굴에 물을 뿌리고는 비아냥거렸다.“9점짜리였어? 퉷!”우문황이 얼굴에 묻은 물을 닦으며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거
장 선생은 겨드랑이에 교재를 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래. 수업 시간이 되었으니까 따라와. 학급 친구들을 소개해줄게.”“감사합니다.”우문황이 공손하게 대답했다.장 선생은 고개를 들어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어이쿠, 키가 180은 되겠는데? 반반한 얼굴로 연애나 하지 마라.’그는 속으로 생각하다 한숨을 내쉬었다.3학년에 연애하는 것을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실연하면 분명 문제가 발생했다.며칠 전에도 큰일이 날 뻔했는데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3학년 6반은 6층에 있었다.4월의 날씨는 따뜻하지만 남쪽에 위치한 광원시는 벌써 여름이 된 것처럼 더웠다.6층에 도착한 장 선생은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그가 돌아서서 우문황을 힐끗 쳐다보았다.옥처럼 맑은 얼굴에 땀도 나지 않고 심지어 가쁜 숨도 쉬지 않았다.6층에 올라서자 벌써 반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수업 종이 울려도 학생들은 스스로 제자리에 가지 않고 여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화장품에 대해 열렬한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남학생들은 또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흥분된 목소리로 떠들었다.장 선생이 문을 팡팡 치면서 목청을 높였다.“조용해. 수업이야!”학생들은 저마다 짜증을 부리며 제자리도 돌아갔다.그 장면을 본 우문황은 경악하고 말았다.‘실험반 아니었어? 규칙도 지키지 못하면서 실험반이라고?’“자, 전학생을 소개하겠다.”장 선생은 강단에 서서 우문황을 가리켰다.“이름은 우문황이고 수업이 끝나면 서로 인사들 나눠라!”갑자기 51명의 눈동자가 전학생에 쏠리더니 여기저기서 탄성이 흘러나왔다.“와. 개잘생겼어.”“기준 오빠보다 더 잘 생겼잖아.”“다리 길이를 봐. 연예인 뺨치는데?”여학생들과 상반되게 남학생들은 차가운 눈으로 쏘아보았다.“잘생기면 다야? 한 주먹거리도 안 되겠네.”그때 장 선생이 나서서 분위기를 완화시켰다.“우문황 학생, 맨 뒷줄에 가서 앉아.”우문황은 장 선생이 시키는 대로 뒤로 걸어가자 후문 옆에 책상이
얼마 전에 원 교수는 성화고등학교와 거리가 아주 가까운 푸지오파크에서 가장 높은 복층집에 이사했다.원 교수가 여기에 이사 오겠다고 고집한 이유는, 손자가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보다 나이가 어린데, 성적 쓰레기들 집합소이자 학교 폭력도 끊기지 않는 학교에 다니는 것이 걱정되어서 가까이서 지켜보려고 했었다.“난 정말 학교가 마음에 안 들어요.”원 교수의 부인은 못마땅해서 한숨을 쉬었다.원씨 가문의 자식 원경주와 원경릉은 어릴 대부터 에이스 반을 다녔으니 기분이 안 좋은 것은 당연했다.”“외할머니, 저는 꽤 마음에 들어요. 형이 다니는 학교와 가깝잖아요.”칠성이 웃으면서 말했다.본인이 선택한 학교에서 얼마 안 가면 화진사립고등학교가 있었다.이 학교의 합격선은 600점이라 돈이 있어도 들어갈 수 없었다.화진고등학교의 이과가 유명하여 명문대에 입학할 확률이 50%에 달했다.이것은 사립고등학교에 있어 대단한 숫자였다.콜라가 항공과로 발전하려면 좋은 학교에 들어가야 하고, 칠성은 감독이 되고 싶어서 성화고등학교의 예술반에 지원하게 되었다.그런데 실험반만 자리가 나서 어쩔 수 없었다.솔직히 실험반은 대부분 학년에서 성적이 가장 좋은 반이라 학교에서 중점적으로 가르쳤기에 괜찮았다.“망했어!”그때 모니터를 보던 원경주가 미간을 찡그렸다.“칠성의 성적표를 잘못 작성했어요. 전부 한 자릿수로 입력되었어요.”“설마? 한 자릿수로 입학도 못할 텐데.”원 교수가 다가가 확인했더니 확실히 한 자릿수였고 뒤에 소수점까지 적혀 있었다.“무슨 일을 이따위로 처리해?”“내가 한 게 아니에요. 비서한테 맡겨서 수정하라고 했다고요.”원경주는 종이 한 장을 꺼내 확인했다.거기에 ‘86,75’ 숫자 사이에 확실히 소수점으로 보이는 부호가 있었다.그것은 소수점이 아니라 심전도 자료에서 사용하는 심전도의 점이었다.“회사에 가면 잘라야겠어요. 일을 너무 대충하네.”“그나저나 로 국장도 참 대단해. 이런 성적도 들여보냈어?”원 교수의 부인은 여전히 불만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