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의 고비를 맞은 열이, 왕비의 진실을 말하다찐빵 반 개쯤 먹고 나니 원경릉은 힘이 다소 회복되는 것을 느끼며 탁자를 잡고 일어나려 안간힘을 썼다. 상반신으로 몸을 지탱하면서 물을 따를 방법이 없어, 바닥에 엎드려 잔에 남은 물을 마실 수 밖에 없었다.좀 나아진 듯해서 천천히 다리를 움직여보고 팔을 펴고 등을 구부리려 했지만 체력이 없어 땅에 덜퍼덕 쓰러지며 등에 난 상처가 지지는 듯 아파왔다.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아내며 팔꿈치로 바닥을 디뎌가며 겨우겨우 약상자를 찾았으나, 소염제와 해열제 주사약이 놓아 둔 곳에 없었다. 주사를 놓을 수 없으니 먹는 약의 용량을 늘릴 수 밖에 없다.대략 30분쯤 지나, 비타민C를 더듬거려 찾은 후 몇 알 삼켰다. 물이 없어 그냥 넘겼더니 너무 셔서 하마터면 뱉을 뻔 했다. 약을 먹은 뒤 원경릉은 몸을 웅크리고 숨을 헐떡거렸다. 이런 육체적 고통은 생전 처음이다. 이번 매질을 당하며 원경릉은 이 시대는 자기가 살던 시대와는 다르다는 것, 신분이 높고 권력을 가진 자의 손에 인간의 생사여탈권이 쥐어져 있음을 깨달았다.따라서 그녀의 목숨은, 초왕의 손에 달려 있다.원경릉은 기필코 이 악랄하고 저열한 생존환경에 적응해야 한다.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상처에서 고름은 제거했지만, 악을 쓰지 않고 좋아질 수는 없다.열이의 방.열이는 약을 먹고 다시 고열이 나기 시작했다.기상궁은 다급해 죽을 지경이다. 낮에는 분명 좋아졌었는데 밤이 되어 왜 다시 고열이 난단 말인가?녹주도 안달이 나긴 마찬가지여서, “아니면, 제가 가사 이의원님을 모셔올까요.”기상궁은 열에 들떠 숨소리마저 거칠어진 손자를 보며 이의원이 다섯 냥에 겨우 이틀 치 약을 지어준 것을 떠올렸다. 사실 그녀 수중에 더이상 은자가 없다: “아니다, 됐어.”녹주는 어쩔 줄 몰라 눈물을 흘리며, “그럼 어떡해요? 두 눈 멀쩡히 뜨고 열이가…..” 뒷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기상궁은 이를 악물고 비분강개한 눈빛으로, “열이한테 만약 무슨 일이 생기
위독한 열이를 고치는 원경릉원경릉은 어둠에 적응해 있었는데 불빛이 갑작스레 비치니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빛을 가렸다. 이때 털썩 하고 무릎을 꿇는 소리가 들렸다. 기상궁이 바닥에 꿇어 앉아, “왕비 마마, 쇤네 마마의 크신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마마님을 원망했습니다. 열이를 제발 살려 주시옵소서.”“날 일으키게!” 원경릉은 손을 뻗으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기상궁은 다급한 나머지 등롱도 팽개치고 원경릉을 부축하러 갔는데 원경릉의 등쪽에 핏자국이 흥건하게 매를 맞은 상처를 보고, 이 여자가 악랄함이 떠올라 주저하는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만약 열이가 말한 게 사실이라면?“왕비 마마, 일어서실 수 있겠습니까?”“약 상자를 가져오너라.” 원경릉은 기상궁이 자신을 얼마나 증오하는지, 그런데도 무릎 꿇고 애원하는 건, 열이의 상태가 좋지 못한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상궁에게 약 상자를 들키든 말든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예, 예!” 기상궁은 약상자를 들고 와 원경릉을 부축했다.원경릉은 한 걸음 디딜 때마다 등과 허벅지에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밀려오고, 겨우 문을 나섰을 뿐인데 땀이 비 오듯 흘러 내리며 덜덜덜 이가 떨렸다. “왕비 마마……”“쓸데없는 소리 말고, 가자!” 원경릉은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아냈다.생명을 구하는 일이 그녀에겐 순수하고 단순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열이를 구하는 것은 한 번 더 머리를 굴려야 하고, 사람의 마음을 되돌려야 하는 것이 되었다. 그러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안 죽겠네 그 사람.”문득,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원경릉은 조심스럽게 기상궁을 바라봤지만, 기상궁은 한 손에 등롱을 들고, 한 손으로 그녀를 부축하느라 말이 없었고, 원경릉이 기상궁을 바라보자 이마에 주름이 지며 묻길, “왕비 마마, 통증이 심하셔서 걷지 못하시는 것은 아닌지요?”목소리가 다르다.기상궁의 목소리는 청아한 노인의 목소리지만 방금 들은 목소리는 앳된 소리였다. 원경릉은 갸우뚱 고개를 젓는데 귓
상처가 심해진 원경릉에게 입궁 전갈이?이 모든 걸 마치고 원경릉은 너무 피곤한 나머지 탁자에 반쯤 엎드려 축 늘어졌다. 자신의 모습이 꼴불견이라는 걸 알지만 그걸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잠시 숨을 돌리자 밖에서 기상궁이 초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비 마마, 어떤 지요?”원경릉은 탁자를 짚고 천천히 일어서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오너라.”문이 열리고 기상궁과 녹주가 뛰어들어와 열이 옆에 가더니, 열이의 숨소리가 고르게 안정된 것을 보고 기상궁은 비로소 한 시름 놓았다.원경릉은 약 상자를 들고: “오늘밤 일은 너희 둘만 알고 입을 다물어라. 초왕이나 초왕부 사람이 알게 해서는 안된다.” 기상궁과 녹주는 의아해하며 서로 바라봤다.녹주가 앞으로 나가 원경릉을 부축하고 “왕비 마마, 소인이 길을 안내하겠습니다.”“됐다. 열이를 지켜라. 머리맡에 내가 남겨둔 약이 있으니 두 시진마다 한번 씩 먹이고. 다 먹으면 나에게 더 필요할지 묻고.” 원경릉은 녹주 손을 뿌리치고 힘겹게 밖으로 나갔다.“왕비 마마!” 기상궁이 소리쳤다. 원래는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원경릉이 이전에 한 일을 떠올리면 감사하다는 말이 입밖으로 나오질 않아 그저: “밤길이 어둡습니다, 등롱을 들고 가시지요.”등롱을 건네자, 원경릉은 등롱을 받으며, “고맙네!”기상궁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고맙네? 지금 고맙다고?원경릉은 봉의각으로 돌아가 스스로에게 주사를 놓고 침대에 엎드렸다.염증이 생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상처의 면적이 너무 넓은데다 항생제 작용까지 겹쳐 그녀는 눈에 띄게 약해졌다. 고열이 난 뒤라 손가락 하나도 꼼짝할 수 없고, 물먹은 솜 마냥 한없이 바닥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곧 사방에 어둠이 깔리고 원경릉은 까무룩 잠이 들었다.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 문을 열고 급히 들어와: “왕비 마마, 어서 일어나세요.”원경릉이 겨우 눈을 떠 보니 녹주가 안절부절 하고 있고, 해는 이미 중천에 떠 있다.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열이가
반격의 결과, 자금탕을 마시게 된 원경릉원경릉은 꿈인지 생신지 정신이 오락가락한 상태로 약상자를 침대 밑으로 밀어 넣는 순간 약상자가 사라졌다. 이번엔 잠깐 숨을 멈추고 기다렸다가, 손을 뻗어 침대 밑을 더듬어 보니 진짜 아무것도 없다. 와들와들 떨며 침대로 기어 올라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최근 들어 벌어지는 사건은 그녀의 의식 범주를 넘어서는 일로 전문지식과 비전문지식을 전부 동원해도 답이 안 나왔다. 인류는 미지의 사건을 조우하면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이기 마련이다. 지금 그녀가 그렇다.“끼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고 고개를 들어 돌아보기도 전에 차가운 기운이 사방을 에워 싸며 머리가 지끈하다 하더니 원경릉은 그만 침대에서 땅으로 굴러 떨어졌다.“짐 앞에서 죽어가는 척을 해? 당장 가서 죽어버리던지, 아니면 옷 갈아입고 짐과 입궁하도록 당장 일어나지 못할까.” 서릿발 같은 목소리가 정수리에 꽂히며 거칠게 몸을 뒤집힌 원경릉은 등의 통증에 전신에 경련을 일으켰다.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데 무쇠 같은 손이 원경릉의 턱을 으스러뜨릴 듯 쥐었다. 고통에 찬 그녀의 눈동자와 광분한 초왕의 눈이 마주쳤다. 냉혹하고 매서운 얼굴은 가릴 수 없는 경멸과 증오로 가득했다, “경고하지. 여우 짓은 그만 두는게 좋아, 만약 다시 한 번 태후 마마 앞에서 그 간사한 혓바닥을 놀렸다간, 아주 숨통을 끊어버릴 테니까.”원경릉은 고통이 극심한 나머지 울분이 차 올랐다. 인간의 생명이 이 사람들 눈에는 한 푼어치의 가치도 없는 것인가? 상처가 이렇게 심한 사람을, 그마저도 가만 놔둘 수 없다는 말인가.그녀는 전신의 기력을 쥐어 짜내 머리를 늘어뜨리고 무릎으로 바닥을 짚으며, 머리로 힘껏 초왕의 얼굴을 들이 받았다. 너 죽고 나 죽자는 최후의 일격을 가한 셈이다.초왕 우문호는 원경릉이 반격할 거라 상상도 못했고, 머리로 들이받는 바람에 피하지 못해 눈 앞이 번쩍하며 어찔했다.원경릉 자신은 다 죽어가면서도 이를 악물고, 초왕이 아직 정신을 못 차린 틈에 그의 손
원경릉의 입궁약을 마시고 원경릉은 속이 따듯해 지며 한결 편안해 졌다.“왕비 마마, 궁에서 돌아오시면 천천히 몸조리 하실 수 있게 쇤네가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우선 잠시라도 눈을 좀 붙이세요.” 기상궁이 말했다.원경릉은 눈을 감자 머리 속에 폭죽이 끊임없이 터지는 것 같고, 과거에 들었던 말이 귓전에 울렸다. “미워한다고? 당치도 않은 소릴. 짐은 네가 혐오스러워. 짐의 눈에 너는, 더러운 벌레만도 못한 존재야. 사람을 증오심에 불타게 한다고. 아니면 짐이 약의 힘까지 빌려 너와 합방할 필요도 없었겠지.”초왕 우문호의 목소리다, 원한과 증오가 가득 찬 이런 매정한 말을 그녀는 난생 처음 들었다.누가 귓가에서 엉엉 울고 있다, 머리 속의 폭죽이 터지더니 구불구불 흘러내리는 선혈로 변한다.점점 모든 것이 차분해 진다.마치 머리 속에 수천 수만 개의 어지러운 선들이 전부 깔끔하게 정리된 것 같은 느낌이다.통증도 점점 사라졌는데, 정확히 말하면, 사라진 게 아니라 느낌이 없어졌다.원경릉은 눈을 떠 녹주가 침대맡에 서있는 것을 보고 미간을 움찔거렸다.“왕비 마마, 좀 어떠세요?” 그녀가 눈 뜬 것을 보고 녹주가 서둘러 물었다.“안 아파.” 원경릉이 쉰 소리로 대답했다.그렇다 아프지 않다. 하지만 전신에 감각이 없는 것은 공포 그 자체다. 원경릉은 손을 뻗어 볼을 꼬집어 보았다. 역시 아무 느낌도 없다.이건 마취약보다 효과가 강력하다.“일으켜 드리겠습니다, 옷을 갈아 입으실 게요, 안 그러면 왕야께서 노하십니다.” 녹주는 손을 뻗어 그녀를 부축하고 기상궁도 마침 옷을 가지고 밖에서 들어온다. 기상궁을 원경릉에게 “어서 옷을 갈아입으세요, 왕야께서 서두르라 십니다.”원경릉이 감각없이 서있자 두 사람은 속옷을 벗기고 새 옷을 갈아 입힌다. 상처를 꽁꽁 싸매도 그녀는 아무 느낌이 없다.옷을 갈아 입고 구리 거울 앞에 서자, 원경릉은 비로소 거울에 비친 사람을 훑어봤다.이목구비가 뚜렷하고 피부가 희며, 길고 구부러진 속눈썹 아래 생기라곤 전혀
입궁하는 길, 우문호가 증오하게 된 사연반 주먹 정도 크기의 그 작은 함은, 다름 아닌 침대 밑에서 사라진 약 상자였다.뭐가 어떻게 된 거지? 약 상자가 왜 작아졌고, 어떻게 소매 속에 들어 있는 거야?원경릉의 마비된 몸에 일순간 소름이 끼쳤다.뒤쪽에서 발소리가 들리자, 원경릉은 얼른 약 상자를 다시 소매속에 감췄다.“소인이 왕비 마마님을 모시고 가겠습니다.” 녹주가 그녀를 부축하며, “왕야께 부탁드렸어요, 마마님과 입궁할 수 있게요.”원경릉은 마음이 혼란스러워 녹주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귀에 들리지 않고,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 갔다.아치형 문을 지나 회랑을 돌아 이리저리 걸어간 끝에 앞마당 입구에 도착했다.마차는 이미 문 앞에 대기해 있고, 우문호는 마차에 타지 않고, 검은 준마를 타고 있다. 연 보라색 옷을 입고, 금옥 관모를 썼는데 얼굴빛이 날씨처럼 어둡고 눈은 화가 나서 견딜 수 없다는 듯 그녀를 힐끗 보더니 싸늘하게: “얘들아 가자.”“왕야, 소인도 같이 입궁해도 될까요?” 녹주는 염치 불구하고 대뜸 물었다. 우문호는 녹주를 쏘아보더니: “그러든지, 태후께서 합방 건을 묻지 않으시게, 네가 있는게 나을지도 모르겠구나.”초왕부 입구에 입궁을 돕는 하인만도 십여명으로 그 중엔 가신 탕양도 있었다. 우문호가 그들 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 건, 원경릉이 난처할까 배려해서가 전혀 아니다.원경릉은 무표정했다. 얼굴 근육이 굳어서 아무리 난처해도 난처한 표정조차 지을 수 없다.녹주는 원경릉이 마차에 오르도록 부축하고 마차 창문 발을 내리는 찰나, 우문호의 이글거리는 증오의 눈빛과 초왕부 하인들이 꼴 좋다며 원경릉을 바라보는 시선을 눈치챘다. 원경릉은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귓가에 우문호의 말이 쟁쟁 울린다.몸의 원래 주인은 이쁘게 생겼는데 도대체 얼마나 그녀를 싫어했길래 약을 먹고서야 겨우 합방을 할 수 있었던 거지?이게 몸의 원래 주인에게 얼마나 큰 모욕이었을까?과연 죽음을 선택할 만 했다.마음을 안정시키는
우문호의 정인을 만나다마차는 우문호의 지휘아래 곧장 궁문으로 들어갔다. 원경릉은 지금 황궁에 호기심이 전혀 없고, 오직 휘날리는 마차의 창문 발 틈으로 한없이 긴 궁궐길과 궁궐의 붉은 담장만 보일 뿐이다.멀리 내다 볼 수 없지만 이따금 높은 누각이 눈에 들어 왔다. 금과 비취가 오색찬란하고 유리로 된 기와에 햇빛이 미끄러진다. 마차가 멈추고 원경릉은 심호흡을 한 뒤 녹주의 부축을 받으며 마차에서 내렸다.햇살이 궁궐의 붉은 담장에 내리쬐는 가운데, 멀리 금빛 유리 기와가 반사하는 빛에 그녀는 빛에 닿으면 사라지는 유령처럼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빛을 가렸다.우문호도 말을 내려 마차와 말을 여기에 두고 걸어 갔다.소운전(霄雲殿) 밖에 도착하자 녹주가: “왕비 마마, 소인은 안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조심히 다녀오세요.”원경릉은 소운전이 태상황이 거처하는 곳이라, 밖에 이미 각 황자와 공주부에서 온 하인과 노비로 가득한 것을 보고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한 걸음 한 걸음 우문호를 따라 들어갔다.초목이 무성한 정원을 지나 정전으로 들어서자, 안에 서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원경릉을 쳐다 보는데 하나같이 화려한 옷차림에 위엄 있는 얼굴이다. 이 사람들이 누구인지 몸의 원래 주인이 남긴 기억에 의존했다.푸른 비단 옷을 입고 숙연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은 기왕(紀王) 우문군(宇文君)으로 황제인 명원제의 장자다. 나이는 서른 살, 진비(秦妃)의 소생으로 마후(馬侯) 대감의 적녀를 아내로 맞아 마씨와 진비가 현재 우문군의 세력으로 슬하에 자식 둘을 두었다. 위왕(魏王) 우문위(宇文蔚), 손왕(孫王) 우문두(宇文杜), 주왕(周王) 우문안(宇文安) 모두 왕비와 자녀들을 데리고 입궁해 있었다.왕야들은 그저 가볍게 목례만 나눌 뿐 말이 없어 분위기는 시종 무거웠다.원경릉은 옆에 서 있는 우문호의 몸이 갑자기 경직되는 것을 느끼고 주변을 살펴보니, 사람들이 모두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한 쌍의 부부가 정전으로 들어오고 있기 때문이다.남자는 대략 18~19살쯤 되
임종을 앞둔 태상황원경릉은 고개를 들어 주명취의 온화하고 따스한 눈빛을 바라봤다.“앉아서 좀 쉬는 게 어때요?” 주명취가 물었다.원경릉은 고개를 흔들고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빼며, “괜찮아요, 고맙습니다.”제왕 우문경은 주명취를 자기 쪽으로 끌어 당기며 불쾌하다는 듯이 원경릉의 얼굴을 흘겨보고 주명취에게: “저런 사람을 왜 신경 써?”주명취는 제왕의 곁으로 돌아가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담담한 눈빛으로 조용히: “모두 한 가족인 걸요.”“당신은 너무 착한 게 탈이야.” 제왕은 주명취의 손을 잡고 둘이 나란히 서니 선남선녀가 따로 없다.이 순간 원경릉은 무시무시한 냉기가 피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바로 우문호에게서 이다.자신의 정인이 다른 남자 곁에 서 있는데 가슴이 미어지고 화가 치미는 것도 당연하다. 원경릉은 그렇게 생각했다. 내전 안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모두 놀라 일제히 내전 쪽을 쳐다봤다.발이 걷히고 머리에 하얗게 서리가 내린 듯한 내시감이 나왔다. 울어서 눈은 부어 있고 얼굴빛이 처연하다. 꽉 잠긴 목소리로, “황상께오서 유지를 남기시고자 하오니, 비빈 마마, 왕야, 왕비는 드시지요.”이 사람은 태상황의 시중을 든 지 45년 째인 이태감이다.모두 침통한 표정으로 이태감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는데, 발소리를 죽이고 숨소리도 거의 내지 않았다.원경릉은 우문호 뒤에 서서 현기증이 나지 않도록 애썼다.태상황의 곁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태후와 황제는 침대에 앉아 있고, 황후도 한 쪽에 지키고 섰다. 태상황의 형제인 분봉왕들도 모두 어제 입궁하여 계속 침상을 지키고 있다.궁중의 거의 모든 어의가 전부 와서 엄숙한 표정으로 두 줄로 서있다.원경릉이 슬쩍 보니 금색 휘장이 말려 올라가 있고, 박달나무로 만든 큰 침상에 초췌한 노인이 높은 베개를 베고 누워 있다. 입을 크게 벌리고 숨을 쉬니 입이 마치 검은 동굴 같고 눈두덩이가 푹 꺼졌다. 곡소리는 태후가 낸 것으로 침대맡에 앉아 있는 그녀의 헐렁한 연보라 빛 겉옷이 그녀를
원경릉은 어두운 풀숲에서 이 장면을 보고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그가 정말 주문이라도 걸고 있는 걸까?능력 조종은 몸과 마음을 집중해야 한다. 처음 능력을 얻었으니, 분명 머릿속이 복잡할 것이다. 그래서 능력을 제어하지 못하고, 게다가 억제제도 조금 효과가 있기 때문에, 능력을 사용하기가 더 어려울 것이었다.그녀는 이 바보가 너무 안타까웠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믿지 않는 척했지만, 몰래 나와서 시험해 보는 그를 보니 속상했다.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밖으로 걸어갔다."다섯째!"우문호는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표정은 어쩔 줄 몰라 당황했으며, 손가락을 뒤로 숨기려 했다."아니... 언제 온 것이오?"원경릉이 답했다."호숫가에 서 있기에 온 것이오. 혹시 오늘 밤 내가 말한 걸 시도해 보려고 하는 것이오?"그녀는 뒤에서 따라갔던 것도, 그가 시도하는 것을 보았다고도 말하지 않았다.우문호는 그녀가 그의 어리석은 행동을 보지 않았다는 것을 듣고 한숨을 내쉬었다."아니네. 그저 잠이 안 왔을 뿐이오. 길주에서 벌어진 부정을 생각하느라 마음이 복잡해서, 바람을 쐬려고 나온 것이오. 당신이 말한 일은 벌써 잊은 지 오래되었네. 그런 농담을 어찌 아직까지도 마음에 담아두겠소?"원경릉은 대답한 후, 그에게 다가가 손을 꽉 잡았다."함께 바람도 쐴 겸 호숫가 정자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어떻소?""피곤하지 않소?"우문호가 물었다."괜찮소. 그냥 당신과 얘기하고 싶네."그녀의 눈빛에는 은은한 미소와 애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우문호가 그런 그녀에게 입맞춤하고 웃으며 말했다."좋소. 호수 가운데로 가시오."두 사람은 손을 잡고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갔다. 호수 가운데에는 작은 정자가 하나 있었고 호수를 관찰하기에 아주 좋은 장소였다.그리고 정자의 처마 아래에는 하나의 풍등이 걸려 있었다. 비록 불빛은 다소 어두웠지만, 분위기는 정말 좋았다.두 사람은 자리에 앉지 않고 난간에 기대어 호수에서 반짝이는 빛을 바라보았다. 미풍이 불어와,
원경릉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그렇다고 할 수도 있지만, 우리의 능력과는 차이가 있소."우문호는 웃음을 터뜨렸다."어리석은 말 하지 말고 자시오. 참 피곤하오. 아, 그리고 이번에 서일과 이부 사람들을 길주로 보냈소. 만두도 함께 가서 배웠으면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오?""좋소."원경릉은 멈칫하다 말을 이었다."그럼, 다시 물을 조종하는 능력에 대해 이야기하자면..."우문호는 일어나 또 연신 하품을 하며 말했다."아이고, 정말 힘드오. 그럴 리 없는 일로 그만 이야기하시오. 원 선생, 다들 나한테도 그런 능력이 있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소. 하지만 이런 일은 강요할 수 없네. 더 나아지려고 노력할 것이니, 걱정하지 마시오.""그것이 아니라..."원경릉도 벌떡 일어나서 그를 따라갔다."정말 사실이오. 시도를 해보는 것이 어떻소? 궁 안에 호수가 있지 않소?""피곤하니, 이만 자야겠소."우문호는 침대에 뛰어올라 이불을 휘저었다."정말 피곤하오."그러자 원경릉은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그녀는 우문호가 흥분에 휩싸일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피할 줄은 몰랐다. 설마 두려운 걸까?"내 말 좀 들어보시오. 이 능력은 무서울 필요가 없네. 다룰 수만 있다면...""원 선생, 그만하시오. 정말 피곤하니, 어서 자시오."우문호는 손을 내밀어 그녀를 잡아당겼고, 그녀는 그의 몸에 쓰러졌고, 그는 그녀를 감싸 안았다.원경릉은 그가 이렇게 거부할 줄은 몰랐다. 강제로 받아들이게 할 수도 없으니, 우문호가 지금 하는 일을 마친 뒤, 다시 이야기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며칠간 왔다 갔다 하느라 바빴고, 생각할 일도 많아 그녀는 정말 피곤한 상태였다. 그녀는 이내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었다.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어렴풋이 우문호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녀가 눈을 뜨기도 전, 우문호가 살짝 그녀의 목 아래에 있던 팔을 빼는 것이 느껴졌다.잠시 후, 그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떠났다.원경릉은 눈을 뜨자마자 마침 우문호
자시가 다 되어 갈 때, 그녀는 바로 소월궁으로 돌아갔다.궁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자마자, 다섯째가 돌아왔다. 녹주가 그의 옷을 걸어주고, 목여 태감이 차를 준비한 뒤 물러갔다. 기라는 복도 앞의 불을 하나만 남긴 채 모두 끄고, 잠자리에 들었다.우문호는 원경릉을 안고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맞춤했다."기다리지 말고 피곤하면 먼저 자지 그랬소.""마침 연구를 확인하려 했소. 일부러 기다린 것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시오. 피곤할 텐데 오늘은 씻지 말고 바로 쉬시오."하지만 우문호는 고개를 저었다."화가 너무 나서 잠이 오지 않소. 그건 그렇고, 아이들에 대한 얘기 좀 해주시오."그는 침대에 누워 몸을 뒤로 뉘었다. 약간 피곤해 보였지만, 그보다도 화가 난 것 같았다. 평소 아무리 바빠도 오늘처럼 피곤해 보인 적은 없었다.원경릉은 그의 허리 쪽에 부드러운 베개를 끼워주고, 반쯤 무릎을 꿇은 채 그의 눈썹과 관자놀이를 마사지했다. 우문호는 화를 낼 때면 두통이 자주 생겼다."계란이는 어떤가? 워낙 바쁘다 보니 자세히 듣지도 못했소."그는 동그랗게 눈을 뜨고 원경릉을 바라보고는, 그녀의 손을 잡고 마사지하지 못하게 했다.그러고는 팔을 크게 펼쳐 그녀를 품에 안았다."당신도 피곤했을 텐데 그만하시오. 조금 쉬다가, 당신의 어깨를 눌러주겠네."원경릉은 그의 품에 기대며 웃으며 말했다."계란이는 괜찮소. 아이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고, 앞으로 혼사를 하더라도 당신이 좋아하는 자와 하겠다고 했소."다섯째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피곤함이 말끔히 사라진 것처럼 말이다."정말? 정말 그렇게 말했소?!""물론이네. 당신은 그녀의 우상이오."그러자 우문호는 곧바로 기운을 차린듯 허리를 곧게 폈다."우상이라. 그렇다면 앞으로 무공을 갈고닦는 것 외에도 책을 많이 읽고 지식을 쌓아야겠군. 우상이 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네. 실력이 없으면 아이가 실망할 것 아닌가.""실력이라..."원경릉은 그의 품을 떠나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예. 태자 전하께서 돌아오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뵙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런데 옷가지를 정리하고 궁으로 오시니, 전하는 이미 군영으로 떠나셨지요. 마침 마마께서도 외출하신 터라, 이곳에서 폐하를 보살피고 계신 것입니다.""그래."원경릉은 직접 어서방에 가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로하신 희 상궁에게 밤새도록 지키게 할 수 없었다.어서방에 도착하자, 목여 태감과 희 상궁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그녀를 보자마자 황급히 다가왔다."마마, 이렇게 늦은 시간에 어인 일이십니까?""다섯째가 저녁을 먹었는지 보러 왔네. 무슨 일이 생긴 것이오? 이렇게 늦도록 의논을 한다니."단단히 닫혀 있는 어서방의 문틈 사이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고 익숙한 얼굴도 보였다. 탕양, 냉 대인, 홍엽, 이리 나리와 다른 사람들이 보였다.목여 태감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길주(吉州)에서 과거 시험 부정행위 사건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폐하께서 크게 노하셨습니다."원경릉이 미간이 찌푸렸다. 다섯째는 조정의 인재 등용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고, 재위하는 동안 부정행위에 대해서 엄격하게 처벌해 왔다. 그런데도 누군가는 감히 이런 짓을 벌였단 말인가? 돈에 눈이 멀어도 정도가 있지!길주에서 이런 일이 터졌으므로 다른 지역에서도 비슷한 조짐이 보일 가능성이 컸기에, 지금 바로잡지 않으면 불길 번지듯 확산할 것이었다.다섯째는 문인을 매우 중시하며, 늘 무장은 나라를 지키고, 문인은 나라를 다스린다고 말해왔다. 그런 마음 가짐으로 황제의 자리에 앉았으니, 당연히 문인의 중요성이 더욱 절실하게 느껴졌을 것이다.게다가 그는 백성이 자신의 운명을 바꾸는 방법은 십여 년간의 힘든 공부 끝에 과거에 급제하는 것이라 말했었다. 그런데 부정행위가 만연하면 실력 있는 자들이 탈락할 테고 그렇게 되면 문인을 중시하는 정책이 무너질 것이다.더 나아가, 억울하게 탈락한 자들은 조정에 대한 불만을 품을 것이고, 문인이 불만을 가지면 나라의 기운은 쇠퇴할 것이다."식사는
아이들과 밤새 각자 도성에서 있었던 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원경릉은 다음 날 아침 서둘러 경성으로 돌아가기로 했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경천의 혈액과 호수 에서 채취한 얼음물에 얼음 벌레가 존재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기화가 아직 돌아가지 않았기에, 원경릉은 그를 불러내어 계란에게 그 일을 비밀로 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기화는 가슴을 두드리며 절대로 말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했다.하지만 원경릉은 그의 진지한 모습을 보며 더욱 불안해져, 왠지 모르게 그가 말실수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래서 다시 한번 당부하자, 기화는 슬슬 짜증이 나는 듯했다."정말 저를 못 믿는 것입니까? 분명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원경릉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예. 꼭 비밀로 하십시오.""예. 어서 아이들과 인사나 하시지요."기화는 성가신 듯 손을 휘저으며 속으로 투덜거렸다.'나이도 어린 황후가 어쩜 이렇게 잔소리가 많지?'원경릉은 아이들과 작별을 마친 후, 바로 경성으로 떠났다.하루도 채 걸리지 않아, 그녀는 황궁으로 돌아왔다.그녀는 돌아오자마자 간단히 다섯째에게 상황을 설명한 후, 바로 실험실로 향했다.경천의 혈액을 현미경으로 관찰하니, 역시나 얼음 벌레가 있었다. 비록 과거 다섯째의 혈액에서 발견된 것과 동일하긴 했으나, 다섯째의 것보다 더욱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이어서 호수에서 가져온 얼음물을 현미경으로 확인해 보기도 했지만 얼음 벌레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호수 근처에서 채취한 물도 마찬가지이므로, 호수에서 감염된 것이 아닐 수도 있었다.얼음 벌레의 감염원을 추적할 수 없게 되자, 원경릉은 꽤 실망스러웠다.하지만 우선 경천의 혈액 속 얼음 벌레를 연구할 수 있기에, 그녀는 벌레를 분리하여 다양한 온도에서 번식력과 생존력을 실험해 보려 했다.이 일을 마무리한 뒤, 원경릉은 드디어 다섯째에게 능력에 대해 알려줄 때가 왔다는 결정을 내렸다.그저 그가 놀라서 기절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그녀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소월궁으로
기화가 말했다."형인 경천보다 크게 부족하지는 않지만, 아직 경천만큼의 패기는 없습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경천과 대등해질 것입니다!""성격은 어떻습니까?""괜찮습니다."기화는 대부분의 사람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괜찮다"고 했으니, 정말 괜찮은 사람일 것이었다.이후 기화는 원경릉과 함께 다른 도성을 방문했다. 원경릉은 미리 능력으로 소식을 보내 그들을 한곳에 모이게 했다. 한편 기화는 계란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동행했다. 그도 어쩌다 조금 여유가 생겼다.소년들은 어머니가 오자 무척 기뻐했다. 하지만 저녁이 되자, 그들은 어머니를 데리고 방으로 향했다. 그들은 그녀가 이유 없이 이렇게 먼 곳까지 올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원경릉은 아이들에게 아버지에 대한 일을 모두 이야기해 주었다. 약을 잘못 쓰고, 얼음 벌레에 감염되고 현대에서 사용한 약까지, 모든 것을 알려주었으며, 경천의 저주까지 전부 털어놓았다.경단과 찰떡은 이 말을 듣고 무척 놀랐다. 그들은 위기에 처한 아버지의 상황에 대해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반면, 환타와 칠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깊은 생각에만 빠져 있었다.원경릉은 이 두 아이가 떡들보다 신비로운 일에 대해 더 잘 이해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의 이 능력은 정말 타고난 것 같았다.잠시 후, 칠성이 입을 열었다."사실, 경천이 감염된 얼음 벌레가 저주의 일종일 가능성이 큽니다. 비록 기화 스승께서 연관 없다고 하셨지만, 저주도 일정한 형태와 매개체를 가지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형태나 매개체가 있으니, 분명 저주를 풀 방법도 있지요. 큰 공덕을 지닌 자가 필요하다고 했으니, 어쩌면 어마마마일 수도 있습니다. 어마마마가 얼음 벌레의 저주를 없앨 방법을 연구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내가?"원경릉은 깜짝 놀랐다."아니면 아바마마일 수도 있습니다."옆에서 듣고 있던 환타가 말을 보탰다."아바마마 혈액 속 마커가 사라졌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원경릉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녀는 기화가 말한 고차원 문명이 아무리 들어도 이상하게만 느껴졌다.인류는 고차원 문명에 대해 단지 추측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으며, 심지어 그 존재 여부조차 검증할 수 없다.누군가 고차원 문명이 신계 문명과 동일하다고 주장했지만, 그녀는 신계 문명을 접할 방법조차 갖지 못했다. 그런데 어떻게 신계의 시선으로 이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겠는가?그녀는 점점 자신이 주제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원경릉은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화제를 경천 황제에게 돌리려 했다."그를 구할 방법이 없습니까? 아직 젊은데 그냥 죽게 내버려두는 건 너무 아깝잖습니까?"아깝긴. 큰 공덕을 쌓았으니, 그는 죽고 윤회할 것입니다.""윤회라..."원경릉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는 미간을 문질렀다."아까는 고차원 문명 얘기를 하시더니, 이번엔 윤회라. 사고방식이 너무 빠르게 바뀌시니, 따라가기가 힘듭니다."하지만 기화는 오히려 태연하게 말했다."뭐가 어렵습니까? 과학의 끝엔 결국 신학이라 하지 않습니까? 어찌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십니까?""그럼, 고차원 문명의 관점에서 이 저주에 관해 설명해 주시지요."이렇게 특별한 이유를 과연 그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기화가 답했다."사실 이해하기엔 쉽습니다. 저주라는 건 하나의 힘이고, 그 가문은 힘을 어지럽혀 반작용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저주라는 게 바로 그런 것이지요. 하지만 가문의 기운이 달라지며 이 반작용의 힘도 점점 약해지게 되고, 이 세대에서 거의 끝이 보입니다. 그를 큰 공덕을 쌓은 사람이라고 한 이유는, 나라를 다스리고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고, 나라 발전에도 공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그가 쌓은 덕이 반작용보다 커지면, 반작용의 힘도 점점 약해질 것이고, 결국 동화될 것입니다. 그럼, 윤회한다 해도 그는 복이 가득한 사람일 것입니다."원경릉은 그의 말을 이해하려 애쓰고 있었는데, 그때 기화가 한마디 덧붙였다."누군가는 화를 입으려 태어났고, 누군가는 운명을
"생사도 팔자에 달린 것인데 무서울 필요가 뭐 있습니까? 사람은 언젠가 죽는 법입니다. 완안 가문은 저주를 받아, 대대로 한 명씩 열여덟 살 이전에 모두 죽었지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운명이 정해져 있었고, 그래서 사원에 보내졌습니다. 이 저주를 피하려 했지만, 결국 소용이 없었지요.""추측입니까?"원경릉이 물었다."아니요. 안풍친왕의 장인이 알려준 것입니다.""그분도 여기 계십니까?""아니요. 이 대륙의 나라들, 그리고 이 근방의 연안까지, 전부 용인 그들이 관장하고 있습니다. 제가 처음 이곳에 온 이유도, 택란이 금나라 어린 황제가 혼사를 이야기했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곳에 오기 전, 안풍친왕의 장인 라진이 경천을 황제가 되도록 도와주라 했습니다. 금나라의 정권을 안정시킨 후, 그의 동생을 후계자로 키우라고요. 아시다시피, 그들은 모든 나라가 큰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국사, 대사, 법사, 그리고 도사들이 갑자기 나타난 장군을 파견하여 권력을 쥐고 하지요. 역사를 공부했으니 아시잖습니까? 시대마다 등장한 엄청난 인물들은 대부분 그가 보낸 자들입니다. 각 나라에 다 있지요."원경릉은 놀라 입을 떡하고 벌렸다."용이라니요? 안풍친왕의 장인이 용이고, 여러 나라를 관장한다고요? 술을 너무 많이 드신 것 아닙니까?""아직 한 잔도 마시지 않았습니다!"기화는 다시 수염을 만지작거렸는데, 그 모습이 원경릉에게는 너무나도 어색하고 위화감이 들게 만들었다.털털하던 사람이 국사 행세를 하고 있으니, 도무지 습관 되지 않았다."어쨌든 상황은 이러합니다. 경천은 열여덟이 되기 전, 죽을 운명이지요. 하지만 죽기 전에 금나라를 안정적으로 발전하게 만들 능력이 있지요. 나라가 안정되면, 그도 죽을 것입니다."원경릉이 숨을 들이쉬었다."그 사실을 본인은 알고 있습니까?"어찌 상황이 이렇게 비현실적으로 되는 걸까?"모르지요. 알고 있다면 택란을 황후로 책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은 백 살까지 살 수도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기화는 피식 웃었
찾아온 사람은 바로 택란의 스승인 기화였다.하지만 원경릉은 그를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금나라 복장을 하고 있었으며, 넉넉한 옷자락에 얼굴도 훨씬 희고 깨끗해졌으며 수염까지 길렀기 때문이다. 그의 날카롭고 빛나는 눈빛이 아니었다면, 정말 알아볼 수 없었을 것이었다."스승님, 어찌 이곳에 계십니까?"택란이 기쁘게 묻자, 기화가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미소를 지었다."이곳에 온 지 좀 됐다. 금나라에서 국사를 하며, 네 사모를 잠시 피할 겸 말이다. 금나라에 무슨 일로 온 거냐?""금나라에 온 지 오래되셨습니까? 어찌 저를 찾아오지 않았습니까?"택란이 물었다."그동안 조금 바빴다."기화는 예전보다 훨씬 더 신중해진 모습이었다. 말투에서 마저도 국사의 위엄이 느껴질 정도였다. 원경릉은 문득 예전에 양여혜가 그를 이상한 사기꾼이라고 했던 것을 떠올렸다. 이제 보니 꽤 그럴싸한 평가였다."택란아, 네 어머니와 함께 내 저택으로 가서 이야기하자꾸나."기화가 말을 이었다.택란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이제 저택까지 있으세요?"기화는 여전히 태연하게 말했다."국사인데 저택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냐?""예. 스승님의 저택도 구경하고, 며칠 머물면서 스승님과 함께 한잔... 과일주 한잔해야겠습니다."택란은 너무 기쁜 나머지 실수로 '술 한잔'이라고 말할 뻔했다.기화는 눈치를 보며 원경릉을 힐끗 보았다. 원경릉에게 택란과 술을 마시는 걸 들키면 안 된다.원경릉은 못 들은 척 넘어갔다. 사실 택란이 어린 나이에 술을 즐기는 것이 신경 쓰였지만, 직접 나설 필요는 없었다. 이 문제는 양여혜에게 전해, 기화의 부인에게 귀띔하라 말하면 된다.기화의 부인 월아는 보수적인 성격이라, 택란이 술 마시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그들은 마차를 타고 국사인 기화의 저택으로 향했다.저택은 아주 컸고, 내부는 새롭게 단장되어 있었다. 고급스러운 가구가 있는 것으로 보아, 금나라 황제가 기화를 상당히 신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기화는 택란에게